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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 - 당신을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조종하는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방법
스테파니 몰턴 사키스 지음, 이진 옮김 / 수오서재 / 2021년 10월
평점 :

그 어느 누구도 나에 대한 권한을 가질 수 없다!
다양한 유형과 사례, 치료법에 이르기까지 가스라이팅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책!
그들은 굉장히 기괴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KBS 프로그램 <표리부동>의 출연자인 범죄심리학자 표창원과 이수정은 바닷가 근처 모텔에서 7살, 10살인 여아의 시신이 발견된 한 사건을 두고 난색을 표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모텔 방안에서 어떤 저항의 흔적도 없이 자매가 동시에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 꽤나 수상쩍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범인은 자매의 친엄마였다. 그녀가 믿고 따르는, ‘기계교’라 불리는 한 사이비 종교가 원인이었다. 휴대폰 메시지로 내려진 기계교의 지령을 제대로 따르기만 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 하나 때문에 엄마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딸들을 굶기거나 학대해왔고, 마침내 살해를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충격적인 진실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녀가 믿고 따랐던 ‘기계교’의 정체가 아이들의 친구 학부모 양씨였던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친구들로부터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양씨가 그들의 엄마를 가스라이팅하기 시작했고, 기계교라는 종교를 내세워 뒤에서 교묘히 심리적으로 조종하고 지배하다 끝내 이와 같은 참극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대체 가스라이팅이 무엇이기에, 엄마로 하여금 딸을 살해토록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날의 방송으로 나는 그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가스라이팅의 실체와 위험을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친구로부터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한 적이 있는데, 학교가 달라지면서 만나지 않게 되어서야 친구가 했던 행동들이 나를 줄곧 곤란에 빠뜨리게 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심각한 유형의 가스라이팅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우리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일상 속에서 생각 이상으로 다양하게 가스라이팅을 경험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때문에 우리는 책 『가스라이팅』이 던지는 경고에 한 번쯤은 귀를 기울여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가스라이터의 초상 그리고 벗어나기 위한 방법들
가스라이트(gaslight)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은 영국 극작가 패트릭 해밀턴이 1938년에 제작한 연극 <가스등>에서였으며 이후 조지 쿠커 감독의 영화 <가스등>을 통해 대중에게 처음 알려졌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폴라의 남편 그레고리는 폴라가 알고 있는 사실을 거짓이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강압적인 말투와 행동으로 자발적인 생각과 행동을 제한하며 남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녀가 스스로 미쳐가고 있다고 세뇌시킨다. 이처럼 가스라이터는 상대방을 공격하고, 계략을 짜고, 대놓고 거짓말을 하고, 상대방의 욕구를 부정하거나 과도한 권력을 휘두르고, 통제 혹은 조정하여 현실 감각을 잊게 만든다. 또 사람들을 선동해서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 폭발에서 힘을 얻는다. 단지 상대가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상대가 자신에게 더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서.
다시 말해, 가스라이터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저자는 ‘다른 사람에 대한 권력을 확보하고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가스라이팅은 친밀한 관계에서 가장 흔히 나타난다는 점이다. 정치인, 유명인, 상사, 형제나 부모, 친구, 동료, 연인이나 배우자, 그들 모두가 가스라이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특히, 연인 관계에 있어 가스라이터는 애정 공세(자신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애정 공세를 쏟아 부어 연인의 현실 감각을 망가뜨림)-후버링(상대가 멀어진다 싶을 때 다시 움켜잡기 위해 전면적으로 압박해옴)-철벽치기(자신의 행동을 들키거나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할 때 그들이 감행하는 잠적 혹은 연락 두절 상태)의 형태를 보인다. 또 자신의 불륜을 배우자 탓이라고 비난하거나 배우자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절대 사과하지 않지만 연인이나 배우자에게는 사과를 기대하고 원하는 바가 충족되지 않으면 대화를 거부하고 마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한다.
가스라이터 중 상당수는 ‘자기애 손상’을 보인다. 자기애 손상은 자존심 혹은 자기 가치감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위협에 자기애적 분노로 반응한다. 그 분노는 항상 요란하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조용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하다. 사실 자기 도취자, 즉 나르시시스트가 분노에 휩싸이면 대체로 섬뜩할 정도로 고요하다. / 48p
그가 뭐라고 하건, 당신이 부족해서 그가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건 중요하다. 그가 바람을 피운 이유는, 가스라이터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고 관심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설령 당신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겠지만, 가스라이터들에겐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있다. 어차피 그들은 자신의 불륜이 당신 탓이라고 할 것이다.
가스라이터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이 잘못했다고 믿는다. / 64p
가스라이터는 결코 당신과 당신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에게 당신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하나의 물건이고, 목적지로 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당신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의사 표시를 하고 ‘무례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예를 들면, 당신의 차 안에서 상대에게 인사를 했는데도 그가 너무 가까이 몸을 기대어 온다면 “이러지 마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더 크게 말하라. 기억하라. 가스라이터와 함께 있을 땐 무례해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니다. 당신의 안전이 문제다. / 94p
정유정 작가의 소설 <완전한 행복>을 보면 가스라이터인 엄마가 딸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딸 지유는 평소 엄마의 사소한 눈빛과 말투, 행동이 보내는 신호에 유독 기민하게 반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유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엄마가 제시한 규칙에 따르도록 주입 당해왔기 때문이다. 통제하고 조종하고 마치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를 권력처럼 휘두르는 엄마의 행동은 지유를 통제조차도 사랑이라 믿게 만든다. 이렇듯 가스라이터 부모는 자녀를 조종하고, 비하하며, 자녀와 경쟁하면서 한편으로는 자녀가 독립적인 성인 되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하나의 예로 살을 빼라고 말하면서 브라우니를 잔뜩 만들어놓거나 빨리 학교 갈 준비를 하라고 하면서 게임기를 건네주기도 하는 등 ‘이중구속’을 통해 자녀들이 정서적으로 불안을 유발하게 하고 어떻게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도록 덫을 놓기도 한다. 때때로 자녀와 경쟁을 하거나, 병적인 수준에 이를 만큼 자녀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 하기도 한다. 문제는 가스라이터의 자녀는 결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가스라이터에게 만족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득, 두 아이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나는 이 문제로부터 과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질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엄마 말 들어.” “아니야. 이렇게 해야지.” 내가 아이에게 던지는 눈빛과 말에 담긴 어떠한 신호가 아이를 움직이게 하고 아이의 의지를 꺾게 했다면 이 역시 가스라이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진짜 자신이 가스라이터라면,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기 자신이 가스라이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대체로 가스라이터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신에게서 가스라이팅의 행동을 발견했다면, 나의 경우처럼 어느 정도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치유 방법들을 읽어봄으로써 개선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항상 소리를 지르는 건 아니다. 가스라이터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악랄한 말을 내뱉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렇듯 모순되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첫째, 다른 사람이 그들이 행사하는 폭력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 희생자가 무방비 상태로 공격당할 때 통제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고, 셋째, 가스라이터가 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희생자가 경계를 풀기 때문에 공격시점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138p
가스라이터는 한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 그들은 심리학자들이 소위 ‘통합적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여되었다. 통합적 인격이라는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뜻하는 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않은 것의 경계를 인지하는 것이다. 통합적 인격의 결여로 인해 가스라이터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으로 타인을 대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가스라이터는 ‘자아’에 대한 확신이 없다. / 267p
“지금 엄마 기분은”으로 말을 시작하면 ‘너’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불만을 얘기할 수 있다. 사람은 비난받는 순간 자동적으로 방어적이게 되고, 문장 속에 ‘너’가 들어가 있으면 그 나머지는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한, ‘너’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당신도 해결책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내 기분’으로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현 상황에 대한 당신의 기분을 표현하고,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를 표현하고, 거기에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 “집에 왔는데 식탁 위에 접시들이 있으면 엄마는 좀 화가 나.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집이 깨끗했으면 좋겠거든. 먹고 나서 접시를 바로 세척기에 넣어주면 좋겠어.” / 281p
이처럼 『가스라이팅』은 명백한 신호에서부터 미묘한 신호들에 이르기까지 남녀관계, 가정, 직장, 정치, 폐쇄 집단 등 다양한 유형 속에서 발생하는 가스라이팅과 그 특징에 대해 알아본다. 덕분에 책을 읽다보면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스라이팅의 사례와 이를 미리 판단하고 대비할 수 있는 방법들을 얻게 된다. 옮긴이의 글에 쓰인 말처럼 ‘몰랐던 단어 하나를 깊이 이해한다고 해서 삶의 모든 덫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런 덫이 존재함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나에 대한 권한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타인이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 역시 타인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나만의 목소리를 낼 줄 알고 스스로 힘으로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타인이 아닌 진짜 나를 위한 삶을 위해서.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