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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24.3.4 - no.53 ㅣ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3월
평점 :
세상을 진지하게 응시하고 읽고 이해하는 행위 속에 문학이 있다!
다면적이고 유난스러운 우리들을 위한 격월간 문학 잡지 악스트!
“난 우리 모두가 서로를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테스 건티의 소설 『우주의 알』(은행나무)에서 열여덟 살의 주인공 블랜딘은 이렇게 말한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가 서로 엮여 있음을 깨닫고, 잘디잔 목소리와 이야기까지 성실하게 귀 기울이기. 어쩌면 나는 문학을 쓰고, 읽는 행위야말로 세상을 좀 더 진지하게 응시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 ‘다면적이고 유난스러운 종’을 성급하게 재단하지 않고, 좀 더 찬찬히 오래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문학이란 것이 있어서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Axt』 53호 ‘빌런’ 편을 읽으며 나는 오늘 어떠한 이야기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나는 또 누구의 목소리로 세상을 듣고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물리적 공간의 한계를 넘어 문학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기
쭈뼛 솟은 보라색 머리카락과 동글동글한 몸집, 커다란 눈망울에 장난기 어린 표정까지. 지난 52호가 세련된 느낌이라면 이번 53호는 발랄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묘한 희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트롤 인형이 시선을 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난감을 낯설게 제시하기, 왕선정과 양승욱의 합작품 <꾸덕꾸덕팡팡>은 ‘빌런’을 통해 ‘정의’의 양면성을 살펴보려는 이번 호의 취지를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이 히어로/빌런 서사에 열광하는 이유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읽어볼 수 있다. 히어로와 빌런이 탄생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계기를 맞아 현실을 각성하고, 스스로 자기만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는 점에서 동일한 이야기 구조가 발견된다. 다만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수호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파괴하느냐 각자의 지향점에서 히어로와 빌런의 본질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하지만 명성이 됐든, 악명이 됐든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획득하고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히어로와 빌런은 모두 우리에게 대리만족을 준다. / <자기만의 인형극> 왕선정과 양승욱의 커버 스토리 글 중에서 68p
‘빌런’을 주제로 다양한 글을 만나볼 수 있어 즐거웠다. 수상한 본성을 지녔지만 어찌 되었든 계속 변화를 꿈꿔온 인간의 다면성에 주목하는 정세랑 작가의 인터뷰를 재미있게 읽었다. 『셜록 홈즈 전집 1: 주홍색 연구』를 읽고 오은 시인과 박서련 소설가, 전승민 문학평론가가 비대면으로 채팅을 나눈 ‘CHAT’ 코너도 눈길을 끌었다. 빌런을 단순히 히어로와 대적하는 존재로 읽기보다는, 작가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지향성을 형상화하는 소설의 주요 요소로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로웠다. 이 외에 빌런의 미학을 다룬 박참새 시인, 우리 세계의 수많은 빌런들을 감지하게 하는 소설가 김홍의 글 역시 재미있게 읽었다.
“종종 이런 일이 있거든요. 책 밖을 빠져나가서 진짜가 되는 일이. 세계는 의외로 막이 얇으니까.” 수록작인 이희주의 <0302♡> 속 문장이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 이유는, 때로는 현실 속 빌런들이 소설을 막 뚫고 나온 캐릭터보다도 과감하고 강력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검증되지 않은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고, 좌표를 찍고, 나는 정의롭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우리 시대에 빌런은 어쩌면 내부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위압적인 방식으로 정의를 밀어붙이는 대신 자기모순과 윤리 의식을 먼저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한 때라 지적하는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의 글은 우리를 깊이 숙고하게 한다.
아주 실용적인 목표를 위해 회복이 있는 소설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와 같이 뉴스를 소화하지 못하는 분들과 이야기로 된 일종의 코팅제를 나눠 가지려고요. 미약하기 그지없는 코팅제지만요. 신념도 신념이지만 생존에 방점이 있지요. / 소설가 정세랑의 인터뷰 글 중에서 16p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고 순응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때로 커다란 망치가 필요하다. 누군가에겐 벽돌을 깨부수는 그 소리가 고통이고 신경을 긁는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진보해왔다. ‘(저들이) 미워해도 (우리에게) 좋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빌런은 ‘미워해도 좋은 사람’이다. 이 문장은 너무 많은 방식으로 다르게 읽힌다. 어쩌면 실패한 문장이고, 좋은 제목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정확한 것이 더 진실될 때가 있다. / <미워해도 좋은 사람> 김홍의 글 58p
몇 달 전, 세월호 생존 학생, 천안함 생존자, 쌍용차 해고 노동자 등을 연구해온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를 인터뷰이로 만났을 때 인상 깊게 들은 말이 있다. “가장 큰 폭력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정의롭다 믿는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 같아요. 욕망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오히려 조율도 되고 타협도 되는데, 본인의 모든 게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념이기 때문에 자신이 틀릴 수 있단 생각을 안 하죠. 나 역시 의도와 무관하게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 <나는 정의롭다는 착각> 정시우의 글 중에서 63p
이번 호에서도 다양한 소설을 만나볼 수 있다. 붕어빵에 슈크림을 넣듯 신체에 영혼을 주입하는 ‘휴먼슈트’가 활성화될 미래를 담은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조시현), ‘사거리의 미소년’이라는 말랑말랑한 도시 전설의 이야기 <0302♡>(이희주)가 인상적이다. 전세 사기 피해자 관련 소설 <지금은 아닌>(김영은)과 자발적 은둔자를 주인공으로 한 <매점 지하 대피자들>(전예진)은 시류를 반영한 주제라 더 관심 있게 읽었다.
진실을 추구하는 일이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종종 사실과 진실을 혼동한다. 그러나 진실은 사실처럼 고정된 정보값이 아니다. 사실이 문자와 숫자, 통계 속에 있다면 진실은 인간 사이에 있다. 각자의 욕망과 오해, 감정으로 뒤범벅된 삶 속에 있다.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팩트가 아니라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정과 대화는 이 과정의 다른 말이다. 사실이 전선을 구축하고 옳고 그름을 나누기 위한 것이라면 진실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더하기 위한 것이다. / 정지돈 소설가의 글 중에서 88p
제빵을 시작한 것도 그해 봄. 마디가 슈크림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흔적은 늘 그런 식으로 몸으로 들어와 함께 빚어지는 것이다. 돌아보면 인생이 다 복선이더라니까. 몸에 심는 거지, 미래를. 그렇게 말했던 게 친척 중 누군가였는지 상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거라면, 내 삶은 마디를 만나기 위한 복선이었을 것이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빚어온 몸이라면, 나는 어떤 몸으로 죽게 될까. /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 조시현의 작품 중에서 119p
착한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지만 여전히 착한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매력적인 빌런보다는 그저 그래도 썩 괜찮은 사람이라면 좋겠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픈가, 『Axt』 53호를 읽고 당신도 응답해보시길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