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단편들은 재미있다. 읽는 동안 딴 생각이 들지도 않고 거창하게 문장을 배배 꼬지도 않고 심리는 묘하게 늘어놓지도 않는다. 문장은 단순하고 때때로 킬킬거릴만큼 유머가 있고 정확하게 상황은 정확하게 표현된다.

미사여구나 장황설도 없다.

그래서 쉽게 읽히고 내용도 간결하게 들어오는 편이다.

하지만 불편하다.

말랑말랑한 이야기도 뒤가 계속 남아있고 어딘가 살벌하고 누군가 나를 주시하는 눈동자가 자꾸 따라오는 듯한  불안감을 야기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무심하게 넘겼던 상황들이 디테일하게 묘사되면서 그때 내가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이 세삼 느껴지면서 움찔 움찔하기도 한다.

나도 "이사"를 했고  누군가의 어두운 그림자를 부러워도 해봤고 그래서 혼자 화를 내고 뒷감당을 하기도 했었다(그림자를 판 사나이) 거지같고 모조리 없어졌으면 하는 가족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지만 "오빠가 돌아왔다"는 가족만큼 막장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설레게 좋아하고 설레발을 쳤던 적은 있지만 그 대상은 "마코토'는 아니었고 아이스크림을 자주 먹어도 고객센타에 전화할 일은 없었다.

가족이 몰살되는 악몽같은 순간은 없었고 내가 아는 누군가가 살해되어 누군가를 의심하고 두려워한 기억도 다행히도 없다.

김영하의 단편들은 내가 경험했던것들 혹은 하지 않았던 것들이 혼합되어 이야기되고 있는데 그래서일까 모든 이야기들이 익숙함과 동시에 몹시도 낯설다.

 

늦은 시각 이제는 집에 돌아가야 하지 않나 하는 그 시간 어느 술자리에서 알고는 있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조금은 어려운 그렇지만 무시해도 괜찮을 선배가 툭툭 뱉어 내면서 하는 말같았다.

"그런데 말이지.. 이런 일이 있었는데 혹시 알아?  " 혹은 " 이런 얘기 들어본 적 있어? 내 친구의 선배 사촌 이야긴데 말이야"

하면서 무심하게 꺼낸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끌려서 빠져드는.. 하지만 이야기에 빠지면서도 자꾸 시계를 힐끔거리고 어디쯤에서 끊고 일어나야 하는 건 아닐까  더 듣고 있으면 안될거같은 불안감도 들지만 이렇게 앉아서 끝까지 듣는다고 뭐 별일이 있겠어 싶기도 하고 왠지 더 있으면 안될거같기도 하고 뭐 그런 복잡한 마음이 드는데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는... 뭐 그런 상황같은 이야기들이다.

누군가가 이런 일이 있었대 하면 얼마나 한심하면 그런 일을 겪냐? 사람이 너무 질질 끌려가도 안돼. 맺고 끊는 건 확실해야지  하고 목청을 올리다가도 막상 내가 당하면 순간 어어.. 하면서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변명하고 혼자 아악... 소리치고 반항하는데 아무도 모르는 것. 그래서 결국 홀로 모든 뒷감당을 쓸쓸하게 하게 되는 일

김영하의 단편을 읽으면서 내내 기분이 그랬다.

 

예전에 친구들 혹은 아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하면 누구나 꼭 한명쯤은 자기의 은밀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너무너무 힘들다. 내게 왜 이런 시련이... 하는 나만 가지고 있는 시련 같은 거.. 하지만 뒤집어보면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던 이야기.. 사실 별거 아닌 이야기

하지만 그런 고민이 알콜과 섞이면 꽤나 낭만적이 되고 그 고민을 짊어진 사람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뭔가 비련의 주인공같기도 해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런거 없는게 낫지 하는 조금은 쓸쓸한 자기위안이 되는 이야기들  "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으면 그때의  생각이 났다.

나도 늘 그랬던 어디선가 본듯한 들은 듯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자 나는 어디가 모자라서 저런 경험이 없을까 하는 자책도 하고 .. 뭐 별것도 아닌걸 혼자 소설쓰네 하기도 했다. 내가 갖지 못한 그림자를 갈망하던 풋내기 시절이기도 하고 어쪄면 가장 편한 시기이기도 했었다.

 

누군가의 작은 위안에도 쉽게 무너지고 감사해하면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배신이나 이별을 애써 혼자 변명하고 마무리한다. "로봇"의 그녀처럼 

 

한편한편이 잘 만들어진 단편영화같기도 하고 이야기를 조금 더 다듬고 늘여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그만일거같다는 느낌도 든다. 짧은 글속에 확 사람을 잡아끄는 이야기를 뿌려놓고 그걸 상대가 어어 하는 동안 맛깔나게 버무리고 마무리해서 어. 하면 이미 이야기 하나가 끝나있다.

누가 누구를 만나고 누가 누군가를 욕하고 헤어지고  질척거리고 비루하게 구는 모양새를 따라가 다 보면 그렇게 킬킬거리고 웃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불안하고 불쾌하는 동안 이야기는 막바지가 되고 깔끔하게 끝나버렸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뒷이야기를 더 해도 될거같은 아쉬움이 남는  모양새는 드라마나 다름없다.

 

 

두권의 단편들을 읽고 든  아무 상관없는 생각

만약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 암튼 잘 쓰게 된다면

나는 김연수보다는 김영하처럼 쓰고 싶다.

아무렇지 않게 의뭉스럽게 툭툭 이야기를 내뱉지만 듣는 사람은 괜히 모른척 하며 귀를 기울이게 되고 자꾸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것. 뭔가 찝찝하고 불안하고 불쾌하지만 그래서 그만 일고 싶지만 그래도 끝까지 놓지 않은 이야기 ..

그게 더 재미있고 통속적인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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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서 책읽기는 현실도피의 의미가 컸다.

뭔가 현실에서 부딪치는 일들에 자신이 없어질때 누군가에게 뭐라고 맞받아치고 싶은데 말이 목구멍에서만 맴돌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을때 세상을 향해 뭐라고 바락바락 대들고 싶은데 마땅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할때. 그래서 나에 대한 오해가 쌓여가고 그게 내가 아닌데 엉뚱한 걸 두고 나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지도 못할때 나는 책을 읽는다

책에서는 누구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특히 이야기는 언제나 내편이었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실을 현실을 눈앞에 들이미는 책들도 있다.

그 책들을 읽고 지식이 쌓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책들은 나의 약한 부분을 긁어대고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건데.. 하고 자꾸 다그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너눈 외면할래? 이제 뭔가 행동이 필요한거 알지? 이제 책장을 덮으면 무얼 할거니?

그렇게 나를 다그치는 진실이 아니라 그저 달콤하고 씁쓸하고 때로는 시고 떫은 이야기들은 나를 그저 덮어지고 안아주고 가만히 지켜본다.

그래서 나는 점점 이야기에 빠지고 그 속에 길이 있을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이야기를 찾아 읽는다.

때로는 이야기들이 더 큰 진실을 말하기도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듯 능청스럽게 멀리 에둘러가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그 중심은 아프고 쓰라린 경우도 있다. 어뗜 신문기사나 칼럼 르포보다 더 강하고 아프게 다가오는 이야기들도 있다. 내 주변의 진실들이 사실들이 이야기라는 껍데기를 쓰고 다가와서 어떤 선입견도 없는 내게 어떤 방어막도 치지 않은 내안으로 쑥 들어와서 소금을 뿌려대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속에서 나와 닮은 누군가도 찾아내고 나를 위로해주는 누군가도 발견하고 내가 가만히 기대고 싶은 공간을 구절을 발견한다.그렇게 이야기는 내게 어떤 사람보다 위로가 되어준 적이 많았다.

막상 이야기를 덮고 현실로 나가면 변한건 하나도 없고 내가 해야할 일들은 쌓여만 가고 있지만 그래도 뭔가 할 수 있을거 같은 막연한 기대감같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벼텨가는 것도 이야기의 힘이었다.

책을 읽으며 대단한 성찰을 하고 성큼 성장하는 경우는 절대 없었지만 그래도 꼬물꼬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은 얻을 수 있었고 그 비슷비슷하고 구질구질한 하루라도 차곡차곡 쌓여서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어낸 이야기와 비교했을 때 진실이 우리에게 어떤 위안을 주던가요? 굴뚝 위에서 포효하는 곰처럼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밤. 진실이 도움이 되던가요? 침실 벽에 번개가 번쩍거리고 빗줄기가 그 긴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릴 때는 또 어떤가요? 전혀 쓸모가 없지요 오싹한 두려움이 침대위에서 당신을 얼어붙게 만들 때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아한 뼈다귀같은 진실이 당신을 구하러 달려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겠지요 그럴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이야기의 위안이지요 거짓말이 주는 아늑함과 포근함 말이예요. .......p 14

 

이 부분만으로도 이책은 충분했다.

우리를.. 아니 적어도 나를 위로하는 건 거짓말일지라도 이야기였으니까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거니까.

 

 

내용이 진부하다고 해도 책 속에는 항상 나를 감동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쨌건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에게 그것은 책으로 쓸만큼 심각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웃음 숨결과 온기 살과 뼈도 함께 사라진다. 살아있는 그들의 기억도 거기에서 멈춘다. 슬프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멸에는 예의가 있다. 그들이 남겨놓은 책 속에서 그들은 영원히 존재한다. 우리는 책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유머 문체 기분까지도 그들은 책을 통해 독자를 화나게 할 수도 있고 행복하게 할 수도 있다. 위안을 줄 수도  있다. 당황하게 할 수도 있다.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호박속 파리처럼 얼음 속에 묻힌 시신처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사라졌어야 마땅할 것들이 종이 위에 적힌 잉크의 기적으로 보존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p 30

 

세상에는 쓸모없는 이야기는 없다.쓸데없는 소설나부랭이만 읽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뭘 모르는 사람들이다. 소설같은 이야기라거나 그런 소설 쓰지 말라거나  소설쓰고 있네,, 하는 말들은 이야기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말들이다. 세상에 하찮은 이야기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절절한 바램이 있었을 것이고 심각한 무엇이었을 것을 아무 상관없는 타인이 뭐라고 폄하하는 건 안될 일이다. 그것이 비록 한때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신세라고 하더라고 이야기 그자체는 진실되고 심각하고 중요하다.

 

마가렛은 이야기속으로 숨어버린 인물이라면 비다 윈터는 이야기의 힘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둘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힘을 알고 있었다.

비다는 유명하지 않은 마가렛의 저서를 통해 이야기의 힘을 알고 있는 마가렛을 알아보았고 그를 선택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를 그녀에게 남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의 진실을 이야기라는 것으로 그녀에게 남긴다. 그것이 진실인지 혹은 그녀가 만든 이야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지막 반전이 나오지만 그것이 진실의 힘인지 이야기의 힘인지도 알 수 없다. 진실이든 이야기이든 비다윈터는 그녀속에 있는 모든 걸 털어내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제 3의 소녀로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고 유령처럼 살았던 소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늘 그림자처럼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를 서성이며 들었던 것들 보았던 것들이 그녀의 속에 차곡차곡 이야기로 쌓여갔다. 그 많은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던 그녀가 작가가 된건 당연한 일이었다. 끝없이 펼쳐나오는 그녀의 이야기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진실 스스로도 마주보기 두려운 진실을 이야기로 풀어놓은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이야기하는 동안 차례대로 나오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떤 질문도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그 이야기 사이에 진실이 얼굴을 내밀까 두려워했던것이 아니었을까 진실을 진실이 아닌것처럼 이야기로 풀어내야하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과제였을것이다.

마가렛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헷갈려 한다. 누구에게나 진실인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냈던 그녀가 자신에게 과연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하지만 마가렛은 비다의 이야기를 마주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진실을 알기가 두려워 무의식적으로 엄마를 멀리하고 미워했던 그녀가 자신의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비다를 통해 얻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비다는 매혹적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놓고 마가렛은 그 이야기 속의 진실들을 하나씩 찾아낸다. 이야기가 진실이고 진실자체도 매혹적인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책속으로만 파고 들면서 현실을 두려워했던 마가렛도 이제 자기의 반쪽 영혼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이해하고 엄마를 이해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야기의 힘을 믿을 것이고 그녀의 독서취향도 조금 더 넓어졌을 것이다.

 

 

우리 두사람은 한가지에 대해서만은 완전히 의견이 일치했다. 그것은 바로 한 번뿐인 인생에서 다 읽어내기에는 이 세상에 책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어디에서건 선을 그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p 47

 

세상에 있는 모든 책들 내가 읽지 못한 모든 책들은 모두 유혹적이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들려줄 준비를 마치고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다.

어떤 책을 선택해서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어떤 진실을 알게 될지는 모두 내 선택에 달려있다.

 

 

 

여기 또 다른 이야기에 빠진 소녀가 있다. 이비읍

아빠없이 엄마랑 단둘이 대도시 변두리에 사는 소녀는 엄마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덕분에 삐삐를 알게 되고 그 영화가 원래는 이야기였고 책이었다는 걸 알게 되고 책으로 빠지고 린드그렌 선생님에게 빠지고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이야기에 빠져서 위로받고 성장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되는  동화이기도 하다.

나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위로해주는 무언가가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것 그것이 사람이 아니었고 살아있어 마주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위로의 대상이 되어준 이야기가 나의 세상을 다시 넓혀주는 건 정말  감동적이었다.

마가렛이 비고의 이야기에 빠져서 진실에 다가가고 세상을 넓혀가고 소통을 시작했듯이 비읍이도 린드그렌 선생님을 알게 되고 이야기를 모으고  이야기에 위로받으며 그러게 언니를 알게된다, 그리고 이미 가지고 있던 관게망(지혜와 엄마)마저 더 넓게 확장한다.

이야기는 그런게 아닐까

좋은 이야기만 그렇다고 하지만 어쩌면 내게 위로를 해주었기에 그게 좋은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무서운 이야기 아이들을 충동하게 하는 이야기들도 그 이야기의 존재이유가 있다는 걸 책에서는 잘 보여준다. 가출하는 이야기 아픈 이야기 무서운 현실을 보면서  내가 직접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간접경험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고 옳고 그름을 알게 하는 힘을 주는 건 어떤 도덕교과서보다도 이야기의 힘을 더 필요로 할테니까

 

오늘도 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는다.

내가 위안을 받을 수 있고 잠시라도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비록 바뀌지 않은 현실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힘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들

이야기를 통해 조금 더 진실로 다가가려는 용기를 얻을 수 있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재촉하지 않고 보여주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나는 아직도 몹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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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해 그리고 올 초  참 많은 청소년 소설을 읽었다.

다른 장르에 비해 내용에 몰입하거나 읽어내는 속도감이 더 좋았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아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신문이나 인터넷에 오르는 여러가지 청소년문제들 사고들을 구체적인 인물의 이야기로 보게 되면서 마음아프고 미안하고 짠하고 결심하고 그랬었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서 내 아이랑 함께 읽고 싶어서 권하기도 하고 아이가 원하는 책을 골라 함께 읽기도 했지만 의외로 아이는 나보다는 덤덤하게 내용을 읽고 넘기는 모양이었다.

원체 덤덤한 성격이니 좋았다고 호들갑떨지는 않고 그냥 괜찮아.. 정도면 다행이지만 내가 함께 읽고 뭔가를 말하려고 하면 그냥 듣는게 전부이고 좀처럼 자기 표현은 하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하면 .. 아하.. 그런 의미일 수도 있구나 .. 하는게 고작이라

이 녀석이 제대로 읽는 건지  너무 감정이 매말랐는지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편 어쩌면 아직 오지않은 여러가지를 미리 책을 통해 경험하면서 지레 겁을 먹거나 질린건 아닌지  혹은 어쩌면 현실의 수위는 이보다 더 쎄서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이에게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선생님이나 친구들 학교생활 학원생활 과제 시험 등등이 더 현실적으로 와닿아서 다른 무언가를 보고 감동할 여유가 없는건지도 모ㅇ르겠다.

 

결국 청소년 소설을 읽고 동동거리고 걱정하는 건 엄마들 몫이 아닌가 싶었다.

엄마들끼리 함께 책을 읽고 여러가지 문제들로 생각이 가지를 뻗어나가면서 세상에나 세상에나... 설마 이런 일까지... 하면서 걱정하고 모의하고 어떡해야하는가 하고 머리를 맞대는 동안 아이들은 그냥 그런 일처럼 무심하게 넘기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청소년 문학이라는 건 그 또래 아이를 둔 부모에게 아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청소년을 위한것이 아니라 청소년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과 함꼐 살아가기에 도움을 주는  다큰 자식을 위한 육아서의 또다른 이름이란 생각도 했다.

내가 청소년 소설을 읽고 푹 빠진 것도  아이가 내게는 말하지 않은 그들만의  세계를 훔쳐보고 알고 싶어서일것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함꼐 읽기를 원하면서도 사실은 나만 읽고 싶은 마음도 들었던거 같다. 엄마가 이런것도 안다는 걸 아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는 기분 같은 거

아이에게 직접 대화를 하려니 방법을 모르겠고 막막하고 아이가 대화를 거부해서 받을 상처가 두려워서 책을 읽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직 아이와 소통하는 방법이 어렵고 힘들때 내가 상처받는 것도 싫을때 소셜을 읽으면서  난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세상에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위안하고 싶어서 읽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결국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내 아이는 또다른 현실이고 그 또래들 역시 그러하지만 아이에게 직접 다가가기에 소심하고 두려운 부모는 지금도 청소년 소설을 아이몰래 읽으면서 내 아이를 간접적으로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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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가 그 시간속에 함께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몰랐던 것들이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되는 것들이다.

어쩌면 시간이라는 것들에 푹 빠져서 깊이 깊이 숙성이 된 다음에야 맛이 드는 것처럼 그제사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그걸 후회라고도 한다. 깨달음이라고도 하고

 

그땐 내 마음도 몰랐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 아니면 애써 쿨한척 하는 오락가락하는 마음이었던 건지

누군가를 미워했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내가 미움 받을까 위악을 떤 것이었다고 나중에 알게 되기도 한다.

그땐 다 이해했다고 니 마음 내가 알고 니 아픔 내가 공감한다고 두 손 잡고 함께 울었고 술잔에 취해 주절주절 떠들었는데 돌아보면 내가 뒤통수 맞은 일이었따거나 내가 아주 오해하며 그 사물을 혹은 사람을 사건을  한단면만 바라보았구나 하는 가슴치는 한탄이 따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 정리되고 통제되는 숫자와 건조한 문장들로 그 모든 감정을 다 살릴 수 없다.

몇년에 태어나고 몇년에 죽고   언제 어느때 몇시에 사고가 발생하고 피해자가 몇명이고 피해액수가 얼마이고 그로 인한 손실이나 복구비가 얼마가 든다든가

누군가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취학통지서를 받고 입영문서를 받아 군대를 가고 몇년에 결혼을 하고 언제 사망했는가 하는 기록들은  마치 마른  곤들래 같아서.. 그걸 시간이라는 물속에 푹 담궈놓고 한참을 잊고 나서야 아차.. 내가 곤드레를 담궜었는데 기억하고 다시 양푼이로 달려가도 그 곤드레는 그저 뻣뻣함이 가실뿐 아직 먹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처럼.. 겨우 뭔가 기록과 숫자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고 끝이 아니다. 곤드레처럼

 

오랜시간 미지근한 물속에 담겼던 곤드레처럼 푹 물러진 이야기는 이제 그 향을 드러내고 본래 모습을 드러내긴 하지만 어딘가 원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얼마나 물에 담궜는가.. 말리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가에 따라 곤드레의 모양이 다르듯이 이야기도  그걸 들여다 보는 사람의 마음과 상황 그리고 시간적 공간적인 것에 제한을 받을 것이다.

누가 어느방향에서 들여다 보는가. 얼마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 보는가 에 따라 다른 무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뒷부분의 이야기는 여전히 끝없이 숨어있다. 태어나 처음 만진 코끼리의 다리가 전부라고 믿는 장님처럼 그 다리에 대해서만 뭉툭한 기둑같은 것 아래 있는 손바닥만한 발톱하나만 만져보고는 아... 여기 무언가가 숨어있다 이것이 본질이라고 외치는 어리석은 장님처럼 아마 내가 본것에만 집착해서 그게 전부라고 믿어버리고 의미를 부여하고 만족해한다.

허나..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니다.

 

그래서 더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한번 더 끓여내고 밥과 함께 푹 익혀진 곤드래만 먹을 수 있다

그제사 아.. 곤드레가 이런 맛이구나 하고 아는 것처럼

이야기는 시간속에 더 푹 담겨서 고아졌다가 모든 것이 흐물흐물 형체도 없이 뭉개져서야 비로소 또 다른 면을 드러내고  나는 퍼즐을 맞추듯이 그때 이런 이런 상황이었음을 다시 깨달으면서 바보가 도통하듯이 아하! 하고 한탄한다,

 

그래도 그것이 모든 건 아니다,

 

 

 

 

 

 

 

단편을 읽는게 편했다

읽는 호흡이 짧아서 긴 글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얼른 무언가 어설프도 끝이 났다는게 내겐 중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오징어를 씹고 난 뒤처럼 뭔가 오래오래 남아서 조금 찝찝하기도 하고  혹은 더 오래 여운을 가진다는 착각도 하면서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았던거 같다.

아무래도 장편은 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지만 단편은 독자가 읽고 판단함에 따라 여러가지의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거 같다.

그리고 단편은 읽었다고 만족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게 저거같고 저건 또 저기 있는 무언가와 닮은 느낌이란 혼란만 늘었다,

나이를 먹었으니까 뭔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기억속에서 뒤섞이는 현상인지 아니며 단편들이 가지는 공통점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작가가 쓰든 단편들은 비슷해보였다

읽는 동안은 작가의 색채가 느껴지고 각각이 가지는 고유한 문장이라든가 쉼표들 혹은 묘사가 있지만 그 내용이 형식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는 작가고유의 것들과 내것이 뒤섞인다,

내가 가졌던 경험들 내가 품었던 생각들이 작가의 그것들과 섞이고 반죽되고 삭혀지고 부풀어지면서 나이들면 비슷해지는 모양새처럼 그렇게 비슷비슷한 것들이 되어버렸다,

 

결국 남은 건 한 참 시간이 흐른 후 느끼는 되새김질이 주로 단편에 많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땐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들,, 너무 젊어서 너무 무지해서 혹은  사느라 바빠서 잊고 있던 것들이 잠자리에 누워 천정을 올려다보며 점점 말똥말똥해지는 정신으로 혹은 어떤 사고를 겪은 후 내 사고의 틀이 뒤바꾼 후 아니면 그저 시간이 흐르다 보니 그때의 일들이 문득 떠오르고 그때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 무릎을 치거나 뒤늦게 후회되는 것 혹은 알아가는 것들이 단편속에 숨어있다,

 

장편은 나름의 긴 서사로 인해 고유의 생명을 오래오래 유지하게 되지만

단편은 그렇게 나와 뒤섞여서 또다른 이야기로 재 탄생되어버린다,

그게 단편의 매력인지 나의 무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장편보다 뭔가 고민할 거리를 더 많이 던져주고 이리저리 꿰어맞추고 이야기를 굴리다보면 또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

그것이 단편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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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책읽는 모임에서 올해이 주제는 동화읽기였다.

작가를 선정하고 그 작가의 작품을 읽고 발표하는 것

사실 아이들 그림책을 읽어주고 동화읽는 단계에서 빠져버린 나는 (왜냐면 그 수준이면 혼자 책을 읽으니까 난 내가 읽고 싶은 걸 읽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이기적인 어미였다...)

아무 생각없이 몇몇 작품이 좋았던 기억으로 택한 작가가 이금이였다.

이금이 작가의 작품이 많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많다는 생각은 못했다.

결국 동화는 제외하고 청소년물만 읽어보기로 했다.

내가 이 작가를 첨 알게 된것도 청소년문학에서였기때문에

 

 

 

나의 짧은 독서이력지만 나름 성장소설을 많이 읽었다고 자부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남의 아이는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남의 집을 훔쳐볼 일은 없으므로 가장 쉬운 방법은 책을 읽는거였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는지. 아이는 어떻게 변해가고 부모는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그리고 누군가 자라는걸 보면서 나 자신이 자란다고 느낄만큼 대리만족을 주는 분야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장소설은 대부분이 여학생의 이야기였다.

물론 소설로 넘어가서 내가 애정하는 '나의 아름다운 정원'혹은  내가 닮고싶은 엄마가 나오는 "소년을 위로해줘"의 경우는 소년이 나오지만

청소년 도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나오는 성장기 소년은 완득이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었다.

허나 완득이 자체가 매우 독특한 캐릭터라보니

조금 평범하고 일반적인 소년들의 성장기는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물론 지오도 석주도 절대 평범하지만은 않다.

왠지 일본만화를 연상시키는 표지를 보면서 괜히 설레기도 했다.

두 소년이 아니 소년과 청년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마주선 두 남자가 들려줄 이야기가 많이 기대되었나보다.

이야기는 두 아이의 이야기가 교대로 서술된다.

두 아이가 만난건 지방의 기숙 고등학교 입학후 지오가 자퇴를 하기까지 짧다면 짧은 기간인 1년 남짓한 시간이고 두 아이의 전혀 다른 기질과 성격으로  서로 부딪치거나 친해질 기회도 없었다.

다만 우연처럼 기숙사에 오래 남았던 어느 주말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하고 함께 어떤 과수원에 머물면서 소녀를 만나고 추억을 만든게 전부다.

그 과정을 통해서 둘이 급격히 친해지거나 속내를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한놈은 공부에 매달리고 한놈은 계속 밖으로 맴돌면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석주의 짧은 메일 한통이 지오를  추풍령행 기차에 오르게 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지도 모르는 가정사를 가진 아이들이다.

평범하고 겉보기엔 누군가는 부러워했을 가족을 가진 아이들이지만 나름의 아픔과 고민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작은 일에  세상이 무너질 듯 고민하는 건 여학생이든 남학생이든 상관이 없다.

사실 그런 하늘이 무너지는 고민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또 그길을 묵묵히 가다가 후회하고 화를 내고 견디고 그리고 성장한다는 이야기

나의 인생에서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제인가?

어쩌면 나는 영영 그 순간을 깨닫지 못하고 지날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른 후에 아하.. 그때 나는 정말 빛났었구나 하고 깨닫기도 하고 아직은 그 순간이 오지 않았다고 고집스럽게 믿고 살기도 한다.

어떤 시련이 와도 그건 나의 선택에 대한 결과물이라는 것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았던 누구의 강제가 있었던 결국 최종 결정을 내리는 나이고 나의 선택이 나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걸 두 아이가 아파하고 깨져가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선택에서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작가는 보여준다. 그냥 아이의 선택을 믿고 기다려주라고.. 깨어지고 부서져도 아이는 다시 일어날 거라고

그리고 그 선택이 비루하더라도 후회하지 말라고. 나름 빛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겠는가

선택과 그에 따른 후회들로 이루어진것이 삶이 아닐까  그래서 살아갈 만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어린 청년들이 내게 들려준다.

 

 

 

 

작가가  인터넷에 연재했던 소설이란다. 그리고 표지를 그린건 작가의 딸이라고..

딸과 함께 뭔가를 만들어 냈다는게 부럽다.

어쩌면 단순한 스토리이지만 나는 그 속에서 그나이또래 여자아이들의 은밀하고 무서운 속성을 발견한다.

대단한 문제아라서... 큰 사건이라서 세상이 들썩이는 건 아니다.

친구에 대한 질투심  어이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기심이 아이들 사이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정말 큰 사건없이 보여준다.

사실 봄이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하지만 나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세상이 공평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이쁘고 잘난 것들이 모두 가지는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다수가 방관자가 되고 공범이 되어서 한 아이를 바보로 만들어 가는 것

난 아무짓도 않했고 빌미는 그 아이가 제공했고 그 아이의 말은 다 거짓말이고 믿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잘못한게 없다고 믿는 아이들

그래서 떠나버린 아이...

크게 소리치지않지만 왕따나 소외같은 사회문제가 어쩌면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모두 끝이 아닐는 것 늘 우리 삶속에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첨 읽었을때는 아이들의 성폭력에 대해 촛점을 맞추어 읽었다.

그런 비극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아이들에게 일어난 일이 아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 죄의식을 덜어줘야하고 너는 언제나 영원히 소중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인지시켜야 한다는 것

같은 상황을 겪고도 어떻게 대처했는가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 두 유진을 보면서 엄마로서 어떻게 대처할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지금 다시 읽으면서 단지 성폭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가장 상처받는 관계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다.

가장 기대를 많이하고 사랑하고 위로받아야 할 가족이라는 관계가 아이들에게 혹은 어른에게도 가장 큰 상처가 된다. 그건 그 만큼 가족에게 기대를 많이하고 많이 요구하기때문일것이다.

가장 사랑하고 믿어야할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큰 유진과 작은 유진은 유치원때 똑같은 일을 당했다.

부모는 모두 경악하고 놀랐고 분노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대한  대처는 달랐다.

아이를 위로하고 사랑하고 배려했던 큰 유진은 그 일이 끔찍하긴 했지만 마주보지 못할 일은 아니었지만 쉬쉬하고 덮어직 감추기에 급급했던 작은 유진은 그 사건을 기억에서 지워버렸고 마주보고 견딜 과정을 가지지 못해 큰 상처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상처를 마주하게 된 지금 현재 어떻게 해야할건가를 묻고 있다.

이 책은 나쁜 경험을 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까운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장 가까워야 하고 힘들때 위로가 되어야 할 관계는 당연히 가족이다.

뭐든 감싸 안아주고 받아주고 위로해주는 것  그리고 해결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가족이라고

하지만 가족이라고.. 어른이라고 모든것이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아직 내 속에 자라지 않은 아이를 가진 작은 유진 부모같은 경우는 아직 나조차 여물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감싸안고 다독일 여유가 없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배워야 할것은 사랑받고 위로받는 방법일지모른다.

사랑받고 위로받아본 아이는 누군가에게 배풀 수 있다.

사랑과 위로속에서 키운 힘이 나를 얼마나 강하게 하는지를 경험하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나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남에게 배려할 수도 있으니까

저자가 하고픈 말은 나쁜 경험에 대한 대처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강한 믿음을 보여주는게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작가의 책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주된 관심이기도 하고  작가의 말에서 처럼 이 책에서 작가는 모든 걸 다썼다고 할 만하다 싶은 작품이다. (개인적이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딸과 엄마의 여행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들

지금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아지는 것들의 슬픔이 느끼진다.

고비사막에서 함께 본 신기루

엄마는 거기서 내 삶이 어쩌면 허망한 것들만 쫓았던 신기루가 아닐까 황망해하고

딸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것에 매력을 느끼며 위안을 얻는다.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하지만 어쩌면 시간이 흐르기전에 혹은 흐른후에는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인모녀는 어쩌면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형인의 문제도 아직 그대로고 다인은 여전히 오빠에게 치인 둘째이고 엄마는 아이들때문에 동동거릴테고.. 하지만 신기루에 대한 기억은 문득문득 나지 않을까

신기루처럼 지나버린 시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위안에 대해서

 

 

 

 

 

인물들 중에 가장 마음이 쓰이는 이가 소희였다.

달밭마을에서도 소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온몸으로 반항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미르나 입을 닫아버리고는 조용히 저항하는 바우와 달리

소희는 그저 받아들이고 순응하고 성숙하다.

속으로만 쌓아가는 아이가  언제 터뜨릴지 모르는 폭탄을 가진 아이처럼 불안했다.

그렇게 속으로 누르고 담기만 하고 드러낼 줄 모르는 소희는 결국 모든걸 토해낸다.

자기의 방을 가지고 거기에 맞는 아이가 되고나 노력하면서 또 담기만 하고 누르기만 하다가 드디어 터진다.

다행이다.

결핍과 불안으로 자라지 못했던 소희 속의 어린아이가 이제 성장을 시작한다.

 

 

 

어 ㅌ

 

 

작가가 쓴 첫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짧은 연작소설들이다.

그간 보여준 주인공에 대한 따뜻한 결말대신 현실적인 결말들을 보여준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일들이라 뭐라고 결론내기가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학교를 떠난 아이   학교밖에서 서성이는 아이

넓은 세상을 나가도 따라다니는 편견이 아이들에게도 고대로 연결되다는 것

실수가 실패가 계속 족쇄처럼 따라다녀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

내꿈이 희망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게 되는 아이

아직도 여전한 문제고 해결이 힘든 아이들의 이야기다

가장 아픈 이야기였다.

 

 

 

 

 

ㅏㅈ

 

중학교 아이들의 이야기

사실 아이돌을 꿈꾸는 이야기는 표피에 지나지 않고 각자 상처를 가진 아이들이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타인의 상처도 들여다 봐주면서  성장하게된다.

마주보기 겁나는 것들이 참 많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별거 아니라고 느끼게 되는 것도 참 많다.

정면으로 바라볼 줄 아는 것 그것도 참 중요하다.

 

 

 

 

 

 

6학년 소년의 첫사랑 이야기

동재와 연아의 서툴고 수줍은 첫사랑

이웃집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시간을 뛰어넘는 오래된 사랑

재혼한 아버지의 조심스러운 사랑과 어머니의 새 연인등 여러가지 사랑이 교차되어 보여준다

사랑이란 언제든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것'설령 실패로 끝나더라도 모두를 걸었던 그 사랑은 성장의 거름이 된다는 걸 보여준다.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억은 절대 손해가 아니라고 작가는 말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자꾸 박완서님이 떠오른다.

다르다면 다른 작가이지만 둘 다 사람을 위로하고 다독이는데는 최고가 아닐까 싶었다.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자분자분 들려줄 뿐이다.

대단한 반전이나 위트도 없지만 읽다보면 계속 책장이 넘어가고 그래그래 고개가 끄덕여 지는 것

잔소리같고 수다같으면서도 읽으면서 멈출 수 없고 책장을 덮으면 내가 위로받았다는 느낌이 든다

많이 썼지만 같은 주제가 없다.

그리고 작중 인물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내 자식처럼 품어주고 끝까지 행복하게 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계속 글을 쓰고 있다.

 

작품속의 주인공들은 소통이 힘들다.

나를 들여다 보는 것도 서툴고 남과의 관계도 서툴다.

그래서 아프고 힘들지만 그래서 성장하게 된다.

주인공만 그런게 아니라 주변 어른도 마찬가지다.

문제에 부딪쳤을 때 도망가고 싶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건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처음 대하는 문제에서 답을 구하기 어려워 회피하게 되는 것처럼

피하고 숨고 만다.

사실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것 타인과 관계를 맻어가는 것은 어른도 어려운 문제다.

작은 유진 엄마도 사건이후 딸과의 관게맺음을 놓쳐버렸고 그 파장이 유진에게 미친다.

벼랑의 주인공들도 그렇다.

신기루의 모녀는 서로가 닮았다는 걸 부정하면서 서로를 거부한다.

하늘 말나리야의 아이들은 심통이 나서 혹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 관계를 맺지 못하거나

소희처럼 그냥 속으로 누르고 누르기만 할 뿐이다.

사내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지오도 석주도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하는지 몰랐다.

작가는 주인공들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몰라서 서성대고 그러다가 엉뚱하게 일을 벌이더라도 괜찮다고 . 그렇게 실수하고 넘어지면서 배우는 거라고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주인공들 자라면서 작가도 해결책이 궁해진 모양이다.

아니 문제가 점점 커지고 다양해지면서 일반적인 상식적인 기준의 해결이 감당하지 못한다.

사회문제이기도 하니까 작가 혼자의 힘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또 다른 해결책을 기다린다 해결은 아니더라도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는 손길을 기다린다.

다 괜찮다고 다 지나간다고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이 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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