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앞으로 100년의 시간이 주어져야 해.  90년전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다.
 100년의 시간이 필요한 그녀는 세익스피어의 누이다. 세익스피어와 똑같은 재능과 열정을 지니고 태어난 세익스피어의 누이가 같은 세익스피어가 쓴 글과 같은 글을 쓰기 위해 인류에겐 100년이 필요하다고 했다. 세익스피어의 시대에는 같은 재능, 같은 열정, 같은 가정 환경을 가진 그의 누이가 작품을 쓰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90년 전, 세익스피어가 죽은 지 300년이 넘는 시점, 직업적인 글쓰기가 사회적으로 가능해진 새 시대에, 그녀는  재능있고 열정으로 가득한 당대의 여성 문학 지망생들에게 아직도 멀었다고, 1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문화와 사회 제도, 가치와 관습 전반에 걸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헤밍웨이가 세계를 여행하며 경험을 쌓는 동안 스타킹을 깁고,  제인 오스틴은 시끄러운 거실 한편에서 차를 대접하며 틈틈히 상상력을 옮겨적는동안 처했을 여성으로서의 어려움을 헤아렸다. 

가상의 세계에서 캠브리지 캠퍼스 잔듸 위를 걷는 것을 저지당하던 그녀, 도서관 출입을 금지당하던 그녀는 자신이 걷고 있는, 걷게 될, 여성 작가의 길이 폭신폭신하고 말끔하게 깎여진 잔듸길이 아닌 이곳 저곳 돌뿌리가 발길을 방해하는 자갈밭임을 알았다.  90년이 지났다. 지난 90년동안 인류 전역사에 걸친 변화만큼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 세계는 하나가 되고 풍성한 문화적 교류를 이루고 평화와 자유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음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고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누구나 울프가 이야기한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누구나 자신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도록 법적,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었다. 

사회는 이제 여성의 특권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여성이 결혼하면 가정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직장 남성들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고, 하릴없는 맘충들은 남편이 뼈빠지게 돈벌며 고생하는 동안 한가하게 비싼 커피 마시고 다닌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이야기하는 소설들은 대개 우리에게 조금은 이질적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역동의 근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하는 이야기, 불의에 저항하거나, 복수하는 이야기. 그렇지 않고 우리에게 가까운 이야기들은 적어도 어떤 드라마가 담겨 있다. 그러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에는 드라마가 없다.  

역사도, 고통도, 분노도, 복수도 없다. 
매일매일 여성으로서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일 뿐이다.  
매일매일 겪다보니 드라마가 되지 못하고 일상이 되어 버린,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일상 중 부딪치는 미세한 차별이 낳은 작디 작은 슬픔들의 합이 만들어낸 갑작스런 환기가 있을 뿐이다.  

양성 평등 조항이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훌륭한 헌법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미국에서도 유래가 없던 여성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는 국민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일은 과잉 은 일상중 일어나는 그 미세한 작은 차별들에 일일히 대응하고 따지고 분노하면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며 커져버린 반향의 힘에 부딪혀 무기력해지고, 무기력해지고, 또한 무감각해진, 그래서 김지영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인격이 되는 길을 택했다. 82년생 김지영이 말이다. 72년생 이미영보다는 조금 상황이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92년생 유진과 2002년생 보람의 삶이 72년생 김지영과 얼만큼 더 달라졌을지...

또... 조남주가 새로 쓴 사하 맨션은 어떤 드라마를 가지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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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미국의 아주 작은 도시에서 잠시 살 기회가 있었었는데, 그곳은 집집마다 지하실이 있고, 그 지하실에는 여러가지 잡동사니와 세탁기/건조기를 두고 사용한다. 그래서 저녁 산책을 하다보면, 한국에서 밥냄새를 맡듯 열어둔 지하실 창문 위로, 혹은 후드를 통과해 퍼지는 여기 저기서 빨래 돌리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내가 기억하는 미국의 냄새는 대표적인 세재 냄새, 대표적인 섬유 유연제 냄새다. 한국에서 한 때 유해하다는 소동이 있던 다*니 냄새이기도 하다. 이 냄새가 문제가 되면서 우연히 인터넷에서, 우리나라가 개도국이었던 시절 한 때에는 부자집 애들한테 나는 냄새였다는 얘기를 읽을 수 있었다. 내 기억에도 어릴 때는 훨씬 더 코가 예민했고, 이런 저런 냄새들을 잘 맡았다. 하지만 그 때에 맡은 갖가지 냄새들은 삶의 계급을 분리하는 것들이라기 보다는 그저 다양한 이런 저런 삶의 냄새였다고 할 수 있다. 


어릴 때, 학교에 들어가기도 아주 한참 전의 어릴 때 냄새에 대한 기억이 하나 있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엄마를 따라 버스를 타고 아주 한참동안 어떤 시골에 있는 어떤 집에 갔는데, 집에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흔히 시골에서 맡을 수 있는 외양간 냄새로 아직도 기억난다. 하지만 나는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실례라는 사실을 몰랐을테고, 그래서 엄마에게 냄새난다고 말했는데, 그 때 엄마는 무섭게 눈을 호라리며 절대 그런 말 주인 앞에서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 때의 기억이 엄마가 무섭게 화를 내서였는지 냄새가 강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냄새라는 게 어떤 사회적 혹은 물질적 위치를 살그머니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기억이 남편에게도 있었다. 어린 시절을 잘 기억 못하는 그는, 초딩 1학년 때 짝꿍 여자애에게서 고등어 냄새가 나서 선생님에게 짝을 바꿔달라고 했다가 호되게 혼나고, 선생에게도 내내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내가 보기엔 그래도 쌌지). 가난의 냄새와 부자의 냄새로 무 자르듯 딱 잘라서 구분할 수는 없지만, 냄새들은 삶의 패턴을 반영한다. 왜냐하면 



" 코는 아주 예민해서 공기 중에 떠도는 냄새들을 금방 알아차리지.

300억 개의 공기 분자 속에 냄새 분자가 한 개만 있어도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인도 파키스탄 계열의 인종이 많은 런던에 있을 때 일인데, 누가 왜 그런 말을 했고, 어떤 경위로 그런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레 냄새가 난다고 했다. 어쩌면 TV 드라마에서였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들은 늘 카레 냄새를 달고 다닌다고 했다. 어딜가든 어떻게 입든, 무엇을 하든, 항상 카레 냄새가 따라다닌다는 거였다. 나는 움찔했다. 내게서 김치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사실 김치 담그기 힘들어서 잘 못먹기는 했지만 식생활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몸에서 다른 냄새가 날 거고, 그들이 느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기도 했다. 


단편 소설들을 읽고 토론하는 영어 클래스를 담당하던 교수가 한 학기 동안 육아 휴직을 내는 바람에 캐나다인 여성이 대신 한 학기를 맡았었는데, 이 사람은 영어를 가르치러 온 건지, 아니면 혼자 있기 심심하고 수다 떨 사람도 없어서 그냥 수다 떨러 온 건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자기 얘기만 하다 가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했던 냄새에 대한 얘기 역시 한참동안 기억을 떠나지 않았다. 자기 옆사람(역시 외국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 로 시작해서. 오 누구나 다 자기 특유의 냄새가 있지 않나? 하더니.. 집집마다 특유의 냄새가 있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낯선 곳에 들어가면 늘 특유의 냄새가 나고, 특히 집집마다 들어갈 때 특유한 냄새들이 있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 선생 왈, 자기 집에서 나는 그 특유의 냄새를 사람들이 다 몸에다 묻혀서 나오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는 그 집안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 날 집에 들어가서 문을 여니 과연 집에서 우리집 냄새가 났다.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지만, 우리집 냄새다. 저 냄새가 나에게서도 나겠다는 거지? 내 남편에게서도, 내 자식에게서도? 그것은 오래된 집 가구들과 옷들과, 빨래 세제의 향들과 요리할 때 날아다니다가 어딘가 구석에 붙어 숨어 있는 각종 분자들과 몸에서 나온 여러가지 분자들의 유니크한 배합일 터다. 내가 그녀에게 불쾌했던 점은, 그가 서양백인으로서 한국에서 한국인과 결혼하여 살면서 느꼈을 그 이질적인 냄새들이다. 그녀가 시작한 옆자리 여성의 냄새는 물론 서양 백인의 냄새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토록 냄새에 예민한 그녀가 한국서 가장 많이 부딪혔을 냄새들은 단연코 한국인과 한국 공간에서 나는 냄새일 것이다. 그때 느꼈을지도 모를 어떤 감정, 혹은 어떤 감각. 이것이 나는 불쾌하다. 


그래서 나는 송강호가 마지막에 한 그 순간적인 행동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만일 어떤 관람객이 자신이 반지하에 살지 않아서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가 나지 않을 거라고 안심했다면, 그는 반지하에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냄새나지 않는다고 믿는 그 1%의 최상위 계급일 듯하다. 우리 모두는 고유의 냄새를 가진다. 그것을 어렴풋한 다양성으로 이해했던 나는, 엄마에게 된통 혼나고 냄새에 대한 감각을 함부로 표현하면 안된다는 커다란 교훈을 배웠지만, 여전히 나는 그 다양성을 믿고 싶다. 외국에 있던 그 1년동안, 한 때 개도국 시절 미국의 냄새, 부자의 냄새라 알려진 그 다*니 향에 진저리를 치며, 향 없는 세제를 찾아서 코스코까지 다녔던 나는 그 인위적 부의 위장의 냄새 역시 마찬가지로 싫다. 


기침이 끊이지를 않아 알러지 검사를 했더니, 꽃가루와 과일 등 아주 여러가지 항원들에 반응하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코 집먼지 진드기가 1위였다. 나는 조금씩 집안을 구석구석 청소하기 시작했다. 침구를 홀라당 벗겨 90도 물에 빨고 쨍쨍한 햇볕에 말리고, 솜은 햇볕에 말렸다가, 이불청소기로 빨아들이고 또 빨아들이고, 말려 빨은 껍데기에 남아 붙어있을지 모를 진드기 사체를 위해 다시 청소기로 빨아들이고..거실의 보이지 않는 구석의 먼지들도 가구와 일상용품들을 드러내며 청소했다. 먼지는 한도 끝도 없이 나온다. 저 먼지가 품고 있었을 냄새들...아직도 벽이며 천장이며 붙어있을 집안의 냄새들...아무리 빡빡 닦고 빨고 씻었다 한들, 단 한 개의 분자가 머리카락, 옷자락 어딘가에 붙어있다가 후루룩 떨어져 상대방의 코에 닿는 순간, 그의 어두운 일상의 배경은 까발려진다. 


미국의 냄새, 아시아의 냄새. 그런데 ... 그게 어때서? 알러지만 아니면, 불쾌하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아?


물론 송강호의 가족에겐 괜찮지 않았다. 그 냄새가 가난의 냄새, 지하실의 냄새, 홍수가 나면 가장 먼저 오수가 가정을 덮치는 종류의 씻을 수 없는 가난의 냄새라는 걸 모두가 알고 맡을 수 있을 때, 그 냄새를 아무리 씻어도 절대로 절대로 지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 냄새는 우리 사회의 냄새는 괜찮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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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다섯 번째 계절 : 부서진 대지 3부작 1 부서진 대지 3부작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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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만큼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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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신간에 카를로 로벨리의 신간이 떠서, 찾아보니 오래전에 읽었던 <모든 순간의 물리학>의 저자가 쓴 책이다. 작년에는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가 나와서, 슬슬 읽어볼까 생각중이었는데 빛의 속도로 또 새책이 나오는구나.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새 책의 제목은 반대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다. 세 개의 책 제목이 물리학 책 제목 치고는 시적이어서, 원제를 찾아보니 까막눈이다. 영문 제목이 원제에 충실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 표지를 보고 영문 제목과 대충 대조를 해보면 <모든 순간의 물리학>은  Seven Brief Lessons on Physics 이고, <보이는 것은 실제가 아니다>와 <첫번째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각각 The reality is not what it seems The First Scientist: Anaximander and His Legacy 으로 한국제목 모두 원제에 충실해 보인다. 새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The order of time으로 모두 영문 오디오북 까지 검색된다. (Audible을 구독하고 싶지만, 듣는게 더뎌 별 메리트가 없을 듯). 영문 오디오북의 알라딘 판매 가격은 3만원대로 아마존 오더블 서비스를 1달에 15불 정도에 이용하면서 세 권을 들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비싸지만, 소장한다는 의미가 있을 듯하다. 이북을 이용하면서 기계음이라도 읽어주는 기능에 매료되어 영어원작의 번역본을 읽을 때 유튜브 찾아서 가끔 같이 듣곤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시간을 내서 정리를 해봐야겠다. 


(아래 <모든 순간의 물리학> 리뷰는 재업임에도, 서재 인기글에 떠서, 무척 찔리는 마음에,  오디오북에 대한 오전 중 경험을 토대로 내용을 약간 추가한다.)  영문판 오디오북을 구매하면 새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데이비드 컴버배치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오더블에서는 20불 가까이 되지만 구글 플레이에서는 1만4천원 선으로 나름 합리적 가격인 것 같다. 미리듣기 해봤는데, 데이비드 컴버배치의 절제있고 세련된 오만하고 기품있는 영국식 발음을 저음으로 깔고 시를 읽듯 나직하게 하지만 또박또박 읽어준다. 이 분의 책 자체가 물리학임에도 문장이 시적이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아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한글 책 읽으면서 영어 오디오북을 들으면 두 언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모호성이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고, 영어 공부도 된다.



아무튼 카를로 로베르의 책이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을 때 좀 띄어주는 분위기여서 이 책을 읽기는 했는데 짧았던 것만 기억나고, 도통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출간 시기에 맞춰 내 리뷰를 찾아보니 2016년 초에 써 놓은 게 있다. 리뷰를 읽으면 대략 내용과 그 때 들었던 생각들이 기억이 나는 편인데... 별로 그렇지 않고 매우 새롭다. 새롭고 신기한 기억력이여. 어쨌든 대략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 저자인지는 다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재업한다. 



(2016년 모든 순간의 물리학 리뷰 재업)

찰스 다윈이 종이 진화한다는 엄청난 아이디어를 최초로 적었을 때, '내가 생각하기에는...'으로 서문을 시작했다.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기장이라는 혁명적 아이디어를 소개할 때에도 주저하는 말투를 썼다. 천재 아인슈타인이 광자를 증명했을 때도 '내가 보기에는' 으로 말문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는 빛 에너지가 공간 속에 비연속적으로 분포한다고 가정할 경우, 형광물질이나 음극선 생산, 상자에서 나오는 전자기 방사선을 비롯해 빛의 방출 및 변화가 관련된 유사 현상들을 함께 관찰해야 이해하기가 더 용이할 것 같다. 여기서 나는 빛 에너지가 공간 내에 연속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의 특정한 지점들에 위치하고 이동은 하지만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각각 하나의 개체로서 생산되고 흡수되는 일정한 수의 '에너지 양자'로 이루어진다는 가설을 염두에 두었다. (p31, 재인용)"

 

'이 간단명료한 몇 줄의 설명은 양자이론의 진정한 탄생의 서막을 알리는 것(p31)' 이다. 1900년 막스 플랑크가 처음 상상하고 측정했던 양자 역학의 핵심은 전기장의 에너지가 양자(quantum)과 같은 덩어리 형태로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었고, 빛이 무리를 이루어 입자들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다. 1910년과 20년대를 지나면서 닐스 보어는 양자도약(quantum leap) 이론을 알아내어 발전시켰고, 하이젠베르크는 모든 물리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양자역학 기본 방정식을 쓰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손을 떠난 양자 역학은 최초의 이론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었다.  이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을 설득하지 못했다. 간담회와 서신, 언론 기사 등을 통한 수년간의 대화 끝에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몇 가지는 더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그 상태로 한 세기가 지나도록 같은 지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이론이 확신이 되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양자역학 방정식은 일상에서 매우 유용하게 널리 사용되어 왔다. 이 이론의 핵심은 현실은 상호작용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오히려 이론에 대한 의문은 계속해서 증폭되고 있다. 현실의 본질에 깊이 침투한 이론인지, 혹은 우연히 맞아 떨어진 이론인지, 아직 완성하지 못한 퍼즐의 한조각인지, 혹은 우리가 아직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심오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신호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물리학계 지식의 중심에 놓여있는 역설적 상황이다. 20세기에 남겨진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서로 모순된다. 그럼에도 두 학문은 각 영역에서 동시에 수많은 학문의 바탕이 되어 왔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우주학과 천체물리학, 중력파와 블랙홀 연구를, 양자역학은 원자물리학과 핵물리학, 기초입자물리학, 응집물질물리학을 비롯한 수많은 학문의 바탕이 되었다. 한쪽에서는 모든 것이 연속적인 곡선 공간에서 설명되고, 다른쪽에서는 에너지 양자들이 불연속적으로 점프하는 평평한 공간에서 설명된다. 문제는 모순되는 이 두 이론이 모두 현실에서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두 이론의 모순을 해결해 보려는 연구 분야를 양자중력이라고 하는데, 이 학문의 목적은 세상에 대한 일관된 관점의 이론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모순된 두 개의 이론을 통합한 경우는 이 전에도 많았다. 뉴턴은 갈릴레오의 포물선과 케플러의 타원을 조합해 만유인력을 찾아냈고, 맥스웰은 전기이론과 자기 이론을 조합해 전자기 방정식을 찾았고, 아인슈타인은 전자기와 역학 사이의 심각한 모순을 해결하려다가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다. 이탈리아의 과학자이며 이 책의 저자인 카를로 로벨라가 양자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결합하여 블랙홀의 본질을 새롭게 규명한 이론이 루프양자중력이다. 


루프양자중력이론의 핵심은 공간은 연속적이지 않으며 무한하게 나누어지지도 않지만 아주 미세한 크기의 공간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공간 양자들은 그 자체가 공간이기 때문에 공간 속에 있지 않으며 공간은 각각의 양자들을 통합하여 만들어진다. 루프 방정식은 빅뱅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가 극도로 압축된 상황에 양자 이론을 적용하면 대폭발이 일어나며, 때문에 이 세상은 현재 이전의 우주에서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거의 우주가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압축돼 아주 작은 공간 속에 짓눌리다가 결국 재도약을 한 후 다시 확장하기 시작해, 현재 우리 주위에서 관찰되는 계숙 확장하는 우주가 된 것이라는 것인데, 이 재도약의 순간 우주가 호두껍질만한 공간 속에 압축되어 있을 때 공간과 시간이 모두 사라지고 세상이 수많은 가능성의 구름 속에 녹아 있는 양자중력의 왕국이 펼쳐지며, 양자 중력 방정식들이 설득력을 얻는다. 즉 현재의 우주는 그보다 한 단계 전의 도약에서, 공간도 없고 시간도 없는 중간단계를 통과하면서 탄생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설명한다.


열은 언제나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이동한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열에서 발생한다. 볼츠만은 그 이유를 확률적으로 설명하는데, 뜨거운 물질의 원자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가 차가운 원자에 부딪히면서 약간의 에너지를 전달할 가능성이 많고, 반대로 차가운 원자가 뜨거운 원자에게 에너지를 남겨줄 가능성은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볼츠만은 이 가능성을 열역학의 배경을 설명하려 했으나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1906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시간적 현상은 세상의 미세한 상호작용들이 하나의 체계 속에서 무수한 변수들의 평균을 통해서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공간이 하나 하나 떨어져있고,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물이 어떤 공간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과학자들도 어려워하는 것들을 독자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복잡한 물리학 법칙 속에 있는 핵심 아이디어를 일반 독자들에게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은 일반 독자들의 평범한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대략 무슨 말인지에 알 것도 같다.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우주의 극히 일부분을 알게 되었지만, 이러한 우주는 우리 사고의 공간 속에서만 존재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새로운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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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보르코시건 : 마일즈의 유혹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5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김창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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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가 경험하는 세타간다 제국은 30 세기 미래의 기술이 만들어 낼 가상의 낯선 인류와 계급과 문화 제도,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한다. 원래 제목이 《세타간다》인데 이런 식의 고유명사가 독자들의 관심을 쉽게 끌지 못할 것을 우려했던 것인지 한국어판에서 《마일즈의 유혹》으로 바뀌었지만, 그래서 이러한 제목의 변경은 전체 내용을 편협하게 축소시키는 느낌이다. 이번 편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편에서건 남성 호르몬이 최대치에 오른 나이의 마일즈는 항상 매력적인 여성들에게서 유혹을 받고, 그 때문에 문제를 자초하기에, 이번 편이라고 해서 여성 문제에 관해 그리 특별하다고 보여지지도 않는다. 


시리즈의 전편들과 비교할 때 《마일즈의 유혹》의 다른 점은 전투씬이 없다는 거다. 전편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던 세타간다 제국에 외교 사절단으로 방문한 마일즈는 게놈을 통해 유전자의 선택 교배에 따라서만 후세가 결정되는 이 사회의 문화와 예절을 배우는 중이다. 사실 1편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항성계를 연결하는 웜홀 문제로 수백년(600년이었던 걸로 기억) 간 나홀로 항성계에서 고립 시대를 겪는 동안 보수적이고 남녀 차별적인 중세풍의 황제정과 보루라는 귀족 사회가 지배하는 문화를 갖는 바라야 행성도 21세기의 눈으로 볼 때 굉장히 이질적이다. 그러는 동안 전 우주에 걸쳐 가장 많은 항성계와 도약 웜홀의 지배권을 가진 세타 연합의 지배자는 독자인 21세기 지구인의 시각으로 볼 때 뿐만 아니라 바라야인의 시선에서도 신비롭고 이질적이면서 이해불가능하고 괴상한 점 투성이다. 


전투신이 빠진 이번 편에서 새로운 전투는 보이지 않는 어떤 계략과 마일즈와의 두뇌 게임이다.여기에 세타간다의 유전자 풀을 지배하는 은둔적 호트 여성과 우연히 엮인다. 우주선에 침입한 괴한을 처치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막대 모양의 정체 모를 물건을 손에 넣었는데 그게 호트족의 후세 유전자 정보를 보관하는 정보를 여는 유일한 열쇠다. 어쨌든 이 월등한 유전자 조작 인류인 호트 여성은 그들을 보자마자 저항의 여지를 주지 않고 열병처럼 확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졌는데 그에 따른 부작용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들은 철저하게 폐쇄되어 있으며 자신들 외에는 절대로 외부에 자신을 노출하지 않는다. 하지만 열쇠를 가진 마일즈를 찾은 호트 리안은 열쇠를 돌려받기 위해 구형의 떠다니는 거품에 은폐한 자신의 모습을 마일즈에게 드러내고, 가뜩이나 남성 호르몬이 콸콸 쏟아지는 왕성한 나이의 마일즈는  이 거부할 수 없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유전적으로 구현한 여성에게 빠져버리고 만다. 


제국보안사에 근무하게 된 마일즈는 팔촌 형 이반과 함깨 세타간다의 황태후 장례식에 사절단의 자격으로 왔지만 신체적 약점에서 비롯된 뿌리깊은 열등감과 뛰어난 두뇌로 어떻게 해서든 인정욕구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번 편에서 그가 관여하게 된 사건은 그 목적이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불분명하다. 이반의 훤칠한 키와 수려한 용모의 이반은 마일즈와 함께라면 더욱 두드러지지만 야망이 없고 상사에게 주목받고 싶지 않은 그가 마일즈와 한팀이 되는 것은 여러가지 위험한 일에 말려들고 협조하게 됨을 의미한다. 바보 이반과 키작은 마일즈를 보고 있노라면, 왕좌의 게임이 자꾸 생각난다. 누이를 사랑한 제이미 라니스터가 이반처럼 물러터지지지도 않고 마일저가 티리온처럼 노련하고 전략적인 인간인 건 아니지만(이 점은 아직 그가 청소년기라서라고 이해) 두 사람의 케미가 (원작이 쓰여진 시점에서 볼 때 크게 서로 영향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지만) 돋보인다.


괴한에게 빼앗은 물건이 세타간다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요한 물건이며 이것은 죽은 황태후가 정체된 세타간다의 부흥을 위해 계획한 거대한 작전의 음모임을 알고도 이를 일리안이나 상사에게 즉각 보고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과 이반 더 나아가서는, 일이 잘못되는 경우 애당초 괴한을 보냈던 목적인 상대쪽의 계략에 빠져 유전자 열쇠를 훔친 스파이로 침략의 빌미를 주게 되고 결국 바라야 행성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매우 민감하고 정치적인 사건임에도 자신의 힘으로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직감에 능수능란한 거짓말과 밥먹듯 하며 호투 귀족, 겜 귀족, 상사 등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직접 사건의 본질을 캐기 시작한다 


본격 탐정 쟝르로 보기엔 개연성이 살짝 갸우뚱하지만, 어쨌든 이야기의 흐름은 광대한 우주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는 세타간다에서 바라야 제국을 희샹양 삼아 벌이는 권력 투쟁의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탐정 소설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호트귀족의 열쇠 도난 사건을 이해하려면 세타간다의 독특한 지배체계와 문화, 관습, 제도를 이해해야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상식적으로는 벌어질 수 없는 사건이다. 그 때문에 이 세계관을 묘사하는 텍스트가 많아져 다른 편에 비해 속도와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행성의 두뇌가 결국은 유전자 조작 기술을 이용한 신인류로의 변화, 그에 따른 21세기에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확고한 승계 방식의 카스트 계급 형성, 전통적 부부 및 가족 제도의 소멸과 새로운 대체 가족의 대두에서 비롯된 가능성있는 미래임에 동의하게 된다. 


여러 항성계의 많은 세타 행성들을 지배하는 자는 호트 귀족의 황제로 황제와 황태후 호트귀족과 그 배우자의 역할은 상호 보완적이지만 독립작이기도 하다. 호트와 호트 부인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부부라고 생각하는 수준의 친밀감과 사랑을 기반으로 형성된 가족이 아니라 유전자를 공유하는 공식적인 배우자일 뿐이다. 그 이유는 세타라는 사회 자체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번성허고 유지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가 섞이는 게 아니라 호트의 메인 게놈 속에 선택적으로 유전자를 자르기와 붙여넣기로 후세를 선택 배양하는 것이다. 이 일의 책임과 권한이 황태후에게 있고 황제는 그것을 손대지 못한다.



호트 계급 여성들은 완벽하게 은둔하고 있어서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이 없다. 그들이 공적인 행사에 나올 깨는 둥둥 떠다니는 의자에 타고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 거품 속에 모습을 감추고 다닌다. 아랍의 부르카를 연상할 수 있는데, 그들과 달리 이러한 은둔이 이 사회에서는 특별한 계급으로서의 특권이다. 공적 파티에서조차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그들의 사회에서는 예의에 해당한다. 


먼 미래에는 현재에 비윤리적이라고 금지한 많은 것들이 여러 우회로와 느슨한 구멍을 통해 빠져 나가고 결국 지금은 질병예방과 장애의 표식을 찾는데 집중하고 있는 인간 유전자 조합 기술이 어떤 식으로든 큰 전기를 맞게 될 사건이 무한한 미래의 역사에 기다리지 않을 보장이 있을까. 소름끼치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유전자 기술에 의한 번식 방법이 ‘난수적인 자연 진화의 낭비를 피하고 그 대신 이성의 효율성을 추가’한다고 믿는 호트 귀족들의 가치관이다. 수백만년 진화의 결과를 크리스피 유전자 가위로 쌍둥쌍둥 자르고 붙이고 이어서 원하는 외모, 성격, 두뇌를 가진 인간을 창조해 내고 그 게놈은 바로 호트 귀족의 여성인 황태후가 독점한다는 게 이 사회에서 아주 소수의 호트족이 스스로를 가치있게 만들고 전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다. 그런데 어느날 황태후는 이러한 지배 질서의 전복을 꾀하고 일을 다 끝내기도 전에 죽은 것이다. 



세타간다와 바라야는 마치 일본과 우리나라처럼 침략과 약탈의 뿌리깊은 역사를 가진 탓에 심적으로는 엉숙이지만 약소국과 대형제국이라는 틀 때문에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하고 교류하늠 상태다. 엄청나게 큰 규모로 한달여간 지속되는 장례식에서 마일즈가 경험하는 문화는 이질적이지만 호트 귀족은 뛰어난 마일즈가 과외 교습을 받아도 때때로 실수할만쿰 복잡하고 흥미롭다. 유전자 조작으로 결정된 소수의 지배자 계급인 그들은 하류 계급 역시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조작하고 조절한다. 자연 임신과 자연 분만으로 태어난 인간을 '생물'로 지칭하며 우리가 동물(?)한테 그러듯 생물취급한다. 우리가 생물인건 맞는데, 막상 선택된 게놈에 인공적으로 편입된 유전자들과의 결합으로 태어는 그들이 인간을 그렇게 부르는 건 뭔가 억울하다. 


하지만 그런 유전자조작 여인들의 완벽한 미는 마치 일생에 한 번 누구나 걸리는 질병처럼 치명적이다. 이상한 일에 휘말려 탐정행세를 하게 된 마일즈의 이번 편의 쓸데없는 모험과 호기심은 자신도 그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괴한의 습격때부터 상부에 보고했더라면 어쩌면 보기 좋게 모반자의 음모에 말려들어 세타간다와 바라야 사이에 전쟁 촉발의 빌미를 주었을 것이라는 마일즈의 확신 밖에. 결과적으로는 마일즈가 또 한번 바라야 제국을 구하는 일이 되었고, 과정적으로는 열등감과 인정욕구 혹은 공을 세워 승진하려는 속물적 욕구 혹은 치명적 유혹 때문인 듯한데.. 이렇게 과감하게 일을 끌고 나가면서도 심리적으로는 갈팡질팡하는 마일즈는 여전히 귀엽고 매력적인 작은 악마적 캐릭터다. 이제 스무살.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된다.



먼 미래에 어떤 과학이 현재의 숱한 한계들을 극복했을 때 도래할 수 전혀 새로운 사회를 제시했기에 나로서는 그 어떤 전투적 소설보다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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