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호랑이가 온다
피오나 맥팔레인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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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럴 줄 알았어. 이야기가 전개가 절정을 치달을 무렵 나는 책장을 싱경질적으로 마구마구 넘겼다. 이게 뭐야. 뭔가 대단한 반전을 기대했는데, 뻔한 사기극이었잖아. 물론 술렁술렁 읽어 넘긴 후 결론을 읽고 나서 프리다가 사기치던 앞부분은 제대로 다시 읽었다.  그리고 나서 옮긴이의 읽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차에서 갑자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오래된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I don't wanna talk about it, how you broke my heart, if you stay..."


"그래서 끝은 어떻게 되었나요?"

삶이란 뭔가 일이 일어나는 기간을 일컫는다는듯한 말투였다

끝... 그래 아직 끝나지 않은 노년에, 아직 첫사랑의 설레임마저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노년에, 아직 사유의 자유가 영혼을 떠나지 않은 노년에, 아직 기쁨과 슬픔과 아픔과 상처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느낄 수 있는 노년에, 생각만큼은 날개를 달고 멀리 멀리 어릴 적 자랐던 그 먼 시공을 가까이 고스란히 품고, 하루 하루 아직 뭔가가 더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품고 눈을 뜨는 그 끝나지 않은 노년에.. 요양사 프리다는 이미 "끝난 것"에 대해서만 묻고 있었다.  


끝은.. 끝이란 건.. 설령 그게 바로 코 앞에 다가와 있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멀리'에 있다. 필립로스는 <에브리맨>에서 노년은 전투다 라고 했던가. 그렇게 하루하루를 싸워 나가는 거다. 저벅저벅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걸어가면서, 살아왔던 기간에 반비례한 기간만큼 먼 기억을 더욱 가까이 느끼며, 살아왔던 인생만이 전부가 아니고 지금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잊혀진채, 마치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살아온 길을 추억하는 것 말고는 없는 것처럼, 고독과 우울 속으로 깊이 깊이 빠져들어 망각되는 것이 수순인양, 저항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치열한 내면의 전투이다. 시간과의 싸움.  기억과의 싸움. 삐그덕거리는 관절과의 싸움,  얇고 쭈글쭈글한 피부가 견뎌내는 외로움과의 대전투다. 


나는 잘못했다. 서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해안가 외딴집에 홀로 사는 돈 많은 노인은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손쉬운 사기 범죄의 표적이다. 그 뻔뻔함 속에 뭔가가 있기를 기대하면 안되는 거였다. 우리는 노인이 계좌에 언제 끝날 지 모를 자신을 위해 현금을 남겨둔다면 가족이든 이웃이든 그녀를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탈취해야만 정의가 실현되는 것처럼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스쿠루지 영감이 비난받은 이유는 돈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늙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홀로 사는 몸도 마음도 취약한 상태의 노인에게 마지막 남은 재화가 아직 노인이 되기 전인 모든 주변인의 표적이 되는 건 ..그건 매일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운전을 하고 거리를 다니는 것처럼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만연화된 일상이라는 것. 그걸 먼저 간파해야 했다. 프리다의 사기 행각은 소설의 핵심이 아니라, 루스의 노년을 설명해주는 배경같은 장치였다. 


루스가 앓고 있는 치매는 루스를 루스로부터 소외시킨다. 우리는 연속적인 기억과 그 기억의 작용이 만들어낸 새로운 시간들로부터 자아를 뽑아낸다.  그래서 기억의 단절은 자아의 상실과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 책이 치매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정보를 주워들은 나는, 그녀의 시점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점에서 모든 상황을 의심하였다. 그녀의 기억은 사실일까? 그녀가 기억하는 키스는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실제로 존재했던 남자일까? 프리다가 조지와 합작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50년 전의 그 감정을 그대로 불러오는 것을 읽으며 먹먹한 슬픔을 느꼈다. 90살이 된 남자에게 18세 소녀가 사랑했던 남자에게 느꼈던 똑같은 지적 열등감과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들... 그 끝나지 않은 노년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밤을 지나면서 여운이 되고, 슬픔을 주었다. 


호랑이가 상징하는 건 무얼까. 위엄? 기품? 고독? 위용? 어쨌든 호주의 바닷가 별장같은 집에 홀로 사는 75세 노인 루스는 호랑이를 본다. 호랑이는 소설의 제목에도 소설의 시작에도 소설의 끝부분에도, 소설의 중간중간에도 계속 등장한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독자도 주인공에게도 직접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소리로 왔다가 냄새로 왔다가 요양사 프리다와의 걸레대첩에서 치열한 결투를 끝에 마지막 순간에는 칼에 찔려 잔인하게 죽지만 그렇게 루스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문학적 해석을 어떻게 내리는지 궁금하다. 중요한 건 단지 그녀에게 보였다는 것.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한 존재였다는 것. 위협적이었지만, 그를 보살피던 프리다가 용감하게 죽여버렸지만, 결국 그녀를 그렇게 데려가 버렸다는 것이다.


가시기 마지막 한 달간을 병원에서 지내셨던 내 할머니는 나를 키워주셨다. 어린 내가 밥을 안먹는다며 뛰어다니는 놀이터까지 밥과 숟가락을 들고 쫓아다니며 한 숟갈만 한숟갈만 애원하듯 떠먹이며 키우신 내 할머니가 입원하셨다는 말을 듣고 병원에 갔을 땐, 이미 내가 그분에게 낯선 사람이었다. '댁은 뉘슈' 하는 듯한 그 낯선 표정에 나는 슬픔으로 무너져내렸다. 이미 그 때 할머님이 더이상 내 곁에 안계사다는 걸 알았다. 그곳에 계신 할머니는 늙어 쪼그라든 몸 뿐, 내 할머니의 영혼은 먼 곳 어딘가에 계셨다. 그 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무어라 말씀하셨는데.. 말투는 할머니인데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는데, 그래도 할머니는 그곳에 없는 누군가와 계속 말씀을 나누셨다. 또 다른 날 찾아뵈었을 때는 간호사가 기저귀를 갈아채우는 걸 목격하였다. 아무도... 치매 앞에.. 존엄성을 지키며.. 근엄하게죽을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의 끝 노년은 전투다. 막상 장례식 때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미 병원에 계실 때 내겐 잘있으렴, 인사도 없이 그렇게 떠나셨기에.. 그래서.. 보내드렸기에..


무서운 건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다. 그 내일이 오늘이 되었을 때에도 오늘처럼 똑같이 생각하고 소망하면서, 뭔가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두렵다. 지금의 내가, 마치 소녀 때처럼 그때와 변함없는 기억과 감정을 가졌는데, 그것이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는 걸 문득 문득 깨닫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평범하던 일상 속에 갑자기 5년 전에 세상을 뜬 남편의 부재를 깨닫고, 장성해서 독립한 아들의 존재를 깨닫고, 길가던 이웃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아득한 두려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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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매뉴얼
제더다이어 베리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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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않은 세계를 상상으로 창조한 것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인셉션>에서  천재 소녀가 함께 꾸는 꿈을 위해 실험적으로 설계했던 반으로 접히던 도시다. 아무리 현실적인 사람일라도, 그런 종류의 기발하고 환상적인 장면에 감탄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상의 세계에서 과학적 파라다임의 벽은 쉽게 사라진다. 중력은 무시되고 시간은 균질성을 잃는다.

 

이 책의 배경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20세기 초 쯤에서 시간이 멈춘 어떤 도시이다. 이름도 없는 시대도 알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몽유병 환자들처럼 꿈 속을 살고, 안개 쌓인 거리는 온통 잿빛이고, 거리엔 매일 비가 내린다. 인셉션의 도시처럼 환상적 신기함이 미로처럼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도시가 아니다. 도시의 외향은 비루한 현실적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 현실속에 비현실적 풍경들이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탐정 소설의 주인공 언윈이 매일 비에 젖어 질척거리는 양말을 낡은 구두 속에 신고  자전거를 타고 빗속을 출근하는 곳은 고층으로 올라갈 수록 안개에 점점 히미해지는, 거대하고 높은 건물의 '탐정 회사'다. 


영화 <설국열차>처럼 계급과 계급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고,  계급간 대화와 이동, 통신이 차단된 디스토피아적 사회다. 상관과 부하 직원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통제되어 있어서 배달부를 통해 상하층으로 배열된 수직적 계층 구조 사이로 업무가 하달된다. 엘리베이터의 모든 층을 액세스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배달부 뿐이다. 상관이라 하더라도 그 수직 관계에 더 많은 특권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그저 높은 층에 있고 업무가 아래로 흐를 뿐이다. <설국얼차>와 같이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를 빗대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실무자들 사이에서 음성이나 구면을 통해 작업하기 보다는 이메일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현대, 현실의 많은 사무실 작업 환경과 크게 다른가.   효율성 내에서 파생된 공상적 조직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친절한 해설을 기대하고 읽은 책의 마지막 해설 편에서 듀나라는 필명을 가진 평론가는 엄청나게 많은 전문 작가들과 전문 장르들을 언급하며 '이 모든 것이 장르적 패러디다'라고 얘기한다. 난해한 책의 해설까지 난해할 필요가 있을까만 어쨌든, <탐정매뉴얼>은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단서를 모으고 추리를 한다는 점에서는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배경과 몽환적 공상적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는 환상 혹은 공상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읽기가 어려웠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 관계를 추리해야 했고, 부분 부분은 읽을만 해도, 전체 속에 하나로 연결되는 서사구조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여기 저기서 이야기는 단절되고 단절된 부분들은 한참 뒤에 다시 계속 언급되며 찔끔찔끔 설명된다.  너무 많은 세부사항들이 사건의 단서와 혼동되어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언윈은 꿈을 세세하게 꾸는 사람이다. 꿈 속의 세부 사항, 현실 속의 세부사항이 한첨 뒤의 어느 지점에 가면 하나로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단서로 알고 읽어 나가다 보면, 또다른 세부 사항이 합체했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건물의 14층 소속 서기인 언윈에게  갑자기 주어진 탐정 일에는 매뉴얼이 따라온다. 언윈이 읽은 구절 '세부 사항을 단서로 혼돈하지 말아라'라는 부분은 독자에게는 단서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말장난이다. 독자는 어떻게 세부사항과 단서를 혼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장면이 무엇을 왜 어디에서 하는 것인지를 파악하기도 힘든 판에 말이다. 

 

1/3 쯤 되었을까. 어떤 지점이 지나자 나는 조금씩 이런 몽환적 방식의 서술이 익숙해졌다. 이 소설의 이질적 요소들을 수용하고 나면, 새로운 장르로서 그리고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호응하며 처음에 기대했던 추리소설의 형식적 익숙함를 잊고 이 새로운 장르의 소설을 나름대로 즐길 수 있게 된다. 그 이질적 요소란 이런 것들이다. 


꿈과 현실이 모호하다. 작가가 꿈과 현실을 수수께끼처럼 왔다갔다 하는 건 아니고, 꿈은 꿈이다 라고 명시해 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현실과의 관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현실이 꿈을 모방하는가 꿈이 현실을 모방하는가. 현실 속의 사람들은 잠든 채 꿈을 모방하고 꿈 속의 세부사항들은 사건 해결의 단서처럼 의미 심장하다. 이런 것들의 파악이 힘들어서 앞뒤로 책장을 넘겨가며 읽다가 어느 순간, 독자로서의 탐정노릇을 포기하고 나니 흥미로운 요소들이 거기에 별처럼 반짝거린다. 다시 말해, 어릴 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읽거나 <인셉션>같은 영화를 볼 때의 기이함에 촛점을 맞추니, 이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새로운 눈이 떠졌다.

 

이 소설은 탐정 소설이 아니다. 물론 듀나의 설명처럼 장르적으로 탐정 소설의 형식을 고루고루 갖추었으므로, 장르적 패러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탐정 소설, 범죄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교묘하게 독자를 혼란에 파뜨리는 작가의 함정을 우회해서 읽는다면 이제까지 읽어온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소설을 읽는다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이 탐정소설이 아닌 이유 첫번째, 이 소설에서 죽음은 끔찍하지 않다. 살인은 범죄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끔찍하고 참혹하고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은 인간의 절망과 욕망을 드러내는 장르 소설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죽음은 우스꽝스럽다. 살인 사건의 목격은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 같다. 그 이후에도 총을 쏘고 죽고 죽이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 죽음들의 무게는 새털처럼 가볍다.죽음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주요 동력이 되지 못한다면, 그 소설은 범죄 소설, 탐정 소설일까?  두번째로 대개의 장르소설에서처럼, 비밀이 천천히 드러나는 방식은 소설의 긴장감을 계속해서 높여줌으로써 마치 탐정소설과 같은 효과를 주지만, 결국 그 인과관계가 설득력이 없다. 현실적이지 않은 배경속에서 현실적이지 않은 목적들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섥혀 있고, 지나간 사건들의 오류 속에서 현재의 사건들이 발생하지만, 그 인과관계를 밝히기엔 불충분한 심리묘사 불충분한 인물의 성격들로 답답함을 준다. 대신 사건이 진행되며 사건이 설명된다.


그러므로 독자로서 탐정 소설을 읽으면서 으레히 가지게 되는 왜 라는 논리적 필요조건을 포기하고, 엘리스가 동굴에서 만난 많은 기이한 것들처럼 그 기이한 현상들을 즐기면서, 꼬이고 꼬인 사건들이 풀려가는 과정을 읽어가면 된다.  그것이 이 책을 재밌게 읽는 방법이다.

 

이 소설이 유일하게 어떤 하나로 수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꿈과 현실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한 것이다. 이야기 속에도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가 이야기의 일부로서 나오지만, 이 책은 전체로서 호접몽과 같은 알레고리를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장자가 꾸었다는 나비의 꿈, 나비가 꾼 장자의 꿈. 거기에 탐정적 형식을 취해 디테일을 가미한 것이라고도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들은 꿈을 통해 의식을 제어한다.  사건의 발단도 꿈 속에서 있었고, 사건의 해결 역시 꿈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이상한 탐정 회사의 비밀은 무의식을 수사하는 임무를 맡은 감독관이라는 계급의 존재에 있었다.  그리고 꿈의 탐정이라는 세계가 그려내는 환상적 디테일은 이 소설이 가진 가장 독자적이고도 위대한 영역이다. 컴퓨터도, 스마트 폰도 없이, 어떤 최첨단의 장치도 부재한 약 1950년대 쯤으로 추정되는 애매한 아날로그 시대에, 읽기 전용의 재생 꿈과 같은 개념을  가진 레코드판 주파수가 등장하고, 죽은 자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단서를 찾아 꿈의 형상을 소리로부터 재생해 내는 모습은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를 열어준다. 의식을 지배하기 위해 꿈 속에 들어가지만, 결국 그 꿈에 갇히고 마는 모습, 누가 누구의 꿈에 있는지 꿈이라고 얘기하는 것들이 사실은 현실이고 현실이라고 얘기하는 것들이 꿈인 것은 아닌지.. 이런 몽상들을 하면서 따라 읽는 <탐정매뉴얼>을 읽는 내내 잠과 꿈과 같은 몽환적 서술 때문인지 자주 잠이 왔고, 실제로 여러 차례 책을 읽다가 잠들게 했지만, 문학은, 예술은 기존의 가치에 저항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성스러운 작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 흥미로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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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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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똑같은 사람과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밥을 먹고, 매일 보는 사람들과 함께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상에 아무 변화가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지루할까. 권태로운 삶에 변화를 주는 것은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일상중에 마주치는 작은 일들 속에 예상치 못한 작은 반전이 있기에 우리는 때로 꿈꾸고 소망한다. 


매일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던 부부에게 희망이라면 대단한 게 아니라  단지 그 상태를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거다. 그렇지만 그 벗어남, 헤어짐의 뒤에 또 어떤 반전이 숨어 있을 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한 미래를 선택하기 보다는 불행한 현재를 유지한다. 결정 뒤에 찾아올 지 모르는 더 끔찍한 반전이 겁나기 때문에, 반전없이 그대로의 삶에 만족할만한 숱한 핑계들을  만들어낸다. 거기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만일 이별 후에 다시금 서로를 향항 사랑을 발견했다면 로맨틱 문학작품이, 이별 후에 복수를 시작했다면  장르소설이 될까.  대개 소설 속에는 훨씬 더 자극적이거나 로맨틱한 반전이 있다.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로서의 삶이 전개되어 나갈 때 우리는 반전이라 부를 수 있다.


모파상의 짧은 단편들을 읽으면 반짝이는 별빛과도 같은 아주 작은 수많은 반전들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라면 상상할 수 없거나, 혹은 윤리적 도덕적 관습적 가치 체계에 맞서는 대단한 반전이나 복수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다양성을 설명해주는 것들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상상도 못할 대단한 반전이나 혹은 매혹적 문체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로 접하는 짧은 단편 속에는 반전보다는 대개 어떤 상황이나 주인공의 내면 세계를 통한 주제의식과 더 자주 만난다. 그래서 단편은 자주 이해하기 어렵다. 모파상의 단편은 그렇지 않다. 그가 19세기에 쓴 짧은 단편들은 예측을 조금 벗어나는, 완결된 하나의 이야기들이다. 


그 반전들은 때때로 따스한 결말에 안도감을 준다. <어느 농장 아가씨 이야기>에서 하녀 로즈는  마을 청년 아이를 임신하고 버림받아 고향 유모 집에 맡기고 돌아와 일을 계속 하지만 주인의 청혼으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결혼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6년동안 아이가 없고, 남편은 자식에 대한 욕구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사이가 나빠지는데 결국 로즈는 폭력을 견디다 못해 그를 떠날 작정으로 혼전 아이가 있다는 비밀을 터뜨린다. 반전은 여기에 있다. 혼전 임신을 거의 범죄 수준으로 비난했던 당시 사회의 불문률을 깨고 남편은 기뻐하며, 왜 그 얘기를 이제야 하느냐며,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아이를 데려다 키우자고 제안한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따스한 반전도 있는 것이다. 남편에게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아이었을 뿐, 그녀의 과거 따위, 아이의 핏줄 따위, 사회적 관습 따위 개의치 않았다. 짧은 단편 속에 퍽이나 긴 스토리가 담겨 있지만, 짧은 문장과 대사와 여백의 세 요소가 짧은 얘기를 길고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모파상과 함께 한 덩어리의 연상작용으로 따라다니는 비곗덩어리는 처음 읽었다. 1880년 에밀 졸라를 비롯한 6명의 젊은 작가들이 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취재한 단편집 <메당야화>에 실린 작품이다. 아마도 우리 구세대들에겐 교과서에서 모파상과 함께 짝으로 외운 낯익은 작품이지만, 누가 읽었을지 의문이다. 모파상은 이 뛰어난 작품으로 화려하게 문단 데뷔를 확고히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반전은 슬프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도시를 빠져나가기 위해 마차에 함께 탄 숱한 인간 군상들 속에 이질적인 여자 한 명. 그녀는 몸을 팔아 먹고 살던 창녀였고 멸시의 시선을 받지만, 여행 중 배고플 때 음식을 나누고 여관에서 장교의 통행 허가를 받기 위해 장교에게 몸을 바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지는 비련의 여자다. 그러나 정작 이 스토리를 이끄는 작가의 시선은 그녀를 멀찍이서 건조하게 바라볼 뿐 어떤 감정이입도 없다. 그녀가 필요하자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목적인 통행허가를 얻기 위해 똘똘 뭉쳐 그녀가 희생하기를 은밀히 요구하지만, 막상 그들 뜻대로 떠날 수 있게 되자 이제  떠나는 마차에서 그녀는,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영웅이 아니라 그들이 경멸하는 매춘부로 다시 돌아와있다. 그것도 마차가 떠나기 직전 아침까지 적군인 프로이센 장교와 몸을 섞은 더러운 여자로 말이다.


그 전에 우리는 시대를 떠나, 생각해 볼만한 또다른 도덕적 딜레마와 마주치게 된다. 여관에 몇일씩 몸이 묶여 장교의 허락 없이는 꼼짝 달싹도 못하게 된 일행에게 필요한 건 장교가 원하는 걸 주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센 장교는 '고맙게도' 다른 귀족 부인의 몸이 아닌 매춘부의 몸을 원한다. 매춘부는 지독한 모멸감을 느끼고 몸을 허락하지 않고, 일행들도 처음엔 그녀를 이해하는 척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들의 여정이 언제 다시 이어질 지도 모르는 막막한 상태가 되자 차츰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어차피 몸을 팔던 창녀에게 장교와의 하룻밤이 무슨 대단한 일일 거냐는 거다. 모두를 위해 그런 일쯤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그들은 작전을 세우고 그녀를 끈질기게 설득한다.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는, 그들의 목적이 달성 된 다음 날 태도를 바꾼 후에야 구역질나지만, 그 전에 나는 그들의 말에 어느 정도 설득당했다. 


첫번째 딜레마는 전체를 위해 한명의 희생을 은근히 강요할 수 있는 것이냐에 대한 부분이다. 목숨이 달린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여행이 계속 지체된다면 그들은 적국 프로이센이 지배한 곳으로 되돌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만일 목숨이 달려 있었다면 그녀는 더욱 노골적으로 그들에게 이용되었을 지도 모른다. 두번째는 그 희생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해 온 직업적인 여성었을 때 그렇게 대단한 희생이냐는 질문에 대한 것이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귀족 부인이 아니라 다름아닌 원래 몸을 팔던 사람이다. 어쨌든 그녀는 원치 않았지만, 했고, 함으로 인해서 전체는 도움을 받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자신은 똥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모파상의 단편에는 이런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도덕적 딜레마에 많이 부딪힌다. 사랑은 숭고하기만 한 것인가. <의자고치는 여자>는 허망하고 비참한 짝사랑의 비애를 이야기한다. 당시 의자 고치는 직업은 떠돌이 집시와도 같은 것이었던 것 같다.   거지꼴의 집시같은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실에 불쾌해하던 남자 부부는 그 여자가 자신에게 유산을 남기고 죽었다는 말을 듣자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꿔 그녀가 타던 마차까지도 요구한다. 자신을 원치 않는 상대를 평생 사랑하는 일은 바보짓이다.  사랑이 아름답다고 누가 그러는가. 모파상은 그것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의 소설 속 사랑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간결한 문체 속 사랑은 언제나 날카로운 그의 해학과 만난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소년을 안고 입맞춤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주었고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부모의 돈까지 훔쳐내고 모았다. 그렇게 해서 가진 순간의 입맞춤 순간의 포옹. 그게 어떤 의미일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나쁜 사람을 단죄하는 우화처럼 짧은 이야기는 그 어리석은 사랑이 아무 의미도 없음을, 허무하다는 말 조차도 사치라는 걸 알려주는데, 그걸 직접 알려주는 게 아니라 꼭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알려준다. 서양 문학사를 제대로 잘 모르지만 19세기라면 액자 구조 같은 문학적 구성의 프레임이 일반화되어 있지는 않을 때라고 짐작되지만, 그의 단편 중 거의 대부분은 유사 프레임 구조로 되어 있다. 작가의 시선은 완전히 배제된 채 누군가의 얘기를 전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단편들은 대체로 그런 종류의 예상치 못한 작은 반전을 품고 있다. <들놀이>는 굉장히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면서 우리의 안방과 극장을 차지하는 비껴 지나가 버린 안타까운 사랑의 전형적 형태를 보여주면서도, 그 건조한 시선의 결말에 이르러서는 서늘한 사랑의 본질을 느끼게 한다. 어느 화창한 봄날 가족과 약혼녀와 함께 들놀이에 나선 여자가 약혼자와 아버지가 잠든 사이 그 날 낮 함께 어울리던 청년과 뱃놀이에 나선다. 그 짧은 뱃놀이 중 둘은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지만 아쉽게 헤어지고 얼마 후 남자는 여자가 그 날 함께왔던 꺼벙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다시 찾은 그 곳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낸 물놀이를 하던 섬엔 그토록 그리던 그녀가 새 남편과 함께 있다. 예정에도 없이 번개처럼 갑자기 나타난 사랑, 그러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길도 없이 헤어진 후, 서로의 갈 길을 갈 때, 그 작은 추억이 영혼이 되어 버리는 것. 그것은 사랑일까. 아니면 무료한 인생을 가끔 반짝이게 하는 별들일까.


매우 짧은 단편 <봄>의 반전은 참으로 기발하다. 봄날에 대한 찬사와 막 만난 여자와의 사랑의 노래는 마치 아름다은 시처럼 황홀한 사랑을 시처럼 반짝이다가 결혼과 함께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여자와 함께 하면 인생이 달콤해 질 거라 생각 하지요 그래서 여자와 결혼 합니다 그러고 나면 그 여자는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에게 욕설을 퍼붓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수다를 떨고 중략 석탄 상인과 말싸움을 하고 관리인에게 집안의 내밀 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이웃집 하녀에게 침실의 비밀을 모두 털어놓고 거래하는 상점에서 남편을 헐뜯습니다. 그녀의 머릿속은 너무나 어리석은 이야기들로 너무나 바보 같은 믿음들로 너무나 기괴 한 견해들로 너무나 놀라운 편견 들로 가득 차 있어요서 절망스러운 나머지 눈물이 나올 정도랍니다


그의 소설은 전쟁, 사랑 등 다양한 주제로 다가오며,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이끈다.  우리의 삶에도 반전이 있다. 반전은 비루한 삶과 일상에 활력을 주고 반전은 소설에서 극적 스토리를 완성시킨다. 우리의 삶에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반전을 참 기발한 방법으로 짦막하고, 아름다움 문체로 재현해냈음에도, 그 속에 아무런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전달하는 모파상이 왜 고전이 되었는지 이해할만하다. 그의 글에선 권선징악적인 메시지도 없고, 선과 악도 없다. 단지 어리석음이 있을 뿐이다. 겉멋만 요란한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와는 다르다. 그냥 그대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푸욱 이성을 찌른다고나 할까.  아직 좀 더 남았다. 62편의 많은 단편이 실려 있지만 한편 한편 모두 다 너무 좋다. 고전 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어렵고 재미없을 것 같은 편견에 사로잡혀 지루해서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반대다. 너무 재밌어서 꼼꼼히 한편한편 여운을 즐겨가며 읽다보니 세월아 네월아 오래 걸린다. 


모파상은 19세기를 살았다. 그는 당시 보불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했고, 패전으로 인한 사회 분위기를 소설 속에 잘 녹아내었다. 천재는 모두 매독에 걸렸었는가. 정신이상과 자살시도... 화려한 인생의 마지막이 안타깝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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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인생수업 - 지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동섭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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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중반까지 결혼하지 않았던 친구 하나가 풀어놨던 사랑 이야기가 아직도 먹먹하다. 남자는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에서 살림을 차릴 수 있는 여건만 되면 결혼하겠다고 했다. 멀지 않은 과거,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넘치도록 흘러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 남자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갖지 못해 그녀와 헤어졌다. 친구는 그 남자의 그 말을 오랫동안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뉴욕의 혼자 사는 아파트에 뜨거운 물이 나올 때마다 그 남자를 생각했다.

 

명절 때마다 대체 결혼은 언제 할거냐고 친척들 앞에서 성화를 들어야 했던 한 살 많은 선배와 연락이 닿았다. 오랜 만의 소식에서 결혼과 자녀를 둔 평범한 삶을 가졌다는 게 기특하게 여겨질 정도의 어떤 결핍을 몸에 걸치고 다니던 선배였다. 그는 가난했었다고 했다.

'승진도 하고, 작은 아파트도 장만하고, 그러고 나니까 이제 결혼해도 되겠다 싶더라.'

사랑이 아니라  조건위에 자신을 올려 놓을 때까지  미루었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안타까왔다. 가난을 이유로 떠나보낸 청춘의 사랑이.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생에 투영했다. 고흐의 인생 곳곳에 조명을 들이대고 비추며 자신에게 찾아왔던 갈림길을 성찰했다. 그 성찰은 때로 자기 변명이기도 했고, 삶의 고백이기도 했고, 때로 한 인생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고흐의 생은 많이 알려져있다. 고흐의 사랑도 우리는 잘 안다. 철없이 고흐가 가난한 빈 손으로 사랑을 갈구했던 것과 달리, 저자 이동섭은 갖추어지지 않은 애정의 조건을 핑계로 사랑을 포기하고 많은 여인들을 떠났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자신이 행복해서는 안될것 같다는 죄책감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노력했던 젊은 날을 풀어놓았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막막한 삶을 이어가면서, 생활고에 시달렸던 많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정신적으로 교유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서 항상 함께 위로하고 위로받은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수한 예술적 행위를 서포트하기 위해 먹고 사는 삶의 현실적 무게를 떠안아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 고흐의 인생에 있어 동생 테오는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이지만, 테오의 내면을 들여다볼만한 기회는 없었다. 이 책에서는 . 충분하지는 않지만 형을 사랑하고 지원하면서도 그 때문에 경제적으로 고통스러웠을 테오의 삶을 심리학적 접근을 통해 조금은 다가서려는 부분이 보인다. 테오와 빈센트의 관계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밥을 벌어먹어야 하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추구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어렵다.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위해 성기가 잘리는 굴욕적인 형벌을 선택했던 것처럼, 빈센트에게는 성인 이후의 일생동안 동생에게 굴욕적으로 돈을 부탁하면서까지 일생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절실한 일, 영혼을 담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을 저자 자신에게 투영했다. 자신은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일을 하고 먹고 살기 위해 유학을 떠났으며, 그것을 빈센트 반 고흐가 여러 번 직업을 버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했던 화가로서의 길과 비유하였다.

마모되는 자아에 대한 안타까움은 술자리의 불판 위에서 타들어가던 고기 냄새 속으로 사라져갔다. 직업에서 돈과 자아실현은 양립하기 어려웠고, 돈이라도 가지면 다행이었다. 그 무렵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22

빈센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테오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했지만, 저자는 스스로를 해결하였다. 빈센트와의 가족과의 관계를 자신에게 투영하고, 빈센트식의 사랑과 자신이 사랑했던 방법을 비교하기도 했다. 그 비교는 매끄럽고 부드럽게 어을리지는 못하는 듯, 약간의 무리수가 보였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스스로 진실되게 성찰하고 고백한다는 면에서 어떤 이에게는 큰 공감을 불러올 수도, 또 다른 이에게는 영양가 없이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으로 읽힐, 읽는 이의 호불호가 크게 작용할 책이다. 또한 책의 성격이 애매하게 심리서 같기도, 수필같기도, 예술 에세이 같기도 하면서 이도저도 아닌 게 되어버린 느낌도 함께 있다.  현실과 추구 속의 힘겨운 선택 과정에 대한 진실된 고백에게 격려를, 아직 무명 작가로서 스스로 내딛은 돈 말고 다른 이상을 향한 용기있는 발걸음에 응원을 보낸다. 왜냐 하면 이 조급한 설국열차 같은 사회에, 누군가는 그래도 소박한 꿈을 꾸고 소박하게 이루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빈센트의 인생의 전환점들을 돌아보면서 함께 한 그의 그림, 그리고 그 그림에 대한 작은 에세이들이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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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단편집 <여자없는 남자들> 예판중. 설명이 필요없는 무라카미 하루키


이 책이 눈에 들어온다. 생명과학에서 태어나 특허법으로 무장한 인체특허는 유전자 비즈니스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불운한 운명에 처한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유전정보가 그것이 특이할수록 수익창출 기회만을 노리는 투자자들과 벤처 바이오기업들의 ‘표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유전정보를 제공한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불운한 유전정보는 어느새 벤처 바이오기업들 사이를 이리저리 전전하며 ‘표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 상황을 파헤치고 들어가 보면 실상은 거대 다국적 제약회사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어 그들만의 일그러진 행태를 일삼고 있다. 이와 같은 실태에 관해 통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가라시 쿄우헤이의 주장은 간결하고 명쾌하다. 과학기술과 법 제도는 무엇보다도 인류 전체의 ‘공익’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세계적인 바이오기업들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인체특허’가 생명과학 연구 혹은 신약개발의 걸림돌이 되어 버리는 현실에 대한 우려를 거침없이 표현한다. 
그런데 과연 ‘지적재산권’, ‘과학기술의 진보’, ‘인권’, ‘생명’, ‘사익’, ‘공익’과 같은 가치들이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고민해보면 좋을 부분이다. 



책에 대한 소개가 없고, 저자에 대한 소개만 있다.

저널리스트로 신경과학, 의학, 불교 관련 글을 주로 썼으며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기사 「무엇이 아버지의 심장을 망가뜨렸나What Broke My Father's Heart」로 2011년 미국국립과학저술인협회상, 미국의학전문기자협회상을 받았다. 목차도 그닥 정보가 되는 제목이 없지만, 현대 의료와 의미없는 생명연장이라는 주제에 대한 통찰이 기대되는 책.  









미술가와 관련된 책에 비해 음악가와 관련된 책은 많지 않다.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중 11번째 상품이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CD음반이 2장이 포함되어 있는데, '음반 2장에는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피아노 연주한 「전주곡과 푸가 C장조, Op.87」와 쇼스타코비치의 라디오 연설 중 발췌된 부분을 그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어 더욱 생생하게 쇼스타코비치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다. 








스페인 하면 가우디의 성당이 떠오른다. 그 가우디가 직접 손으로 기록하여 레우스의 수기라고 불리는 노트에서 발췌한 책. 


 
이 글은 가우디Antoni Gaudi i Cornet (1852 . 1926)가 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1873년부터 졸업 이듬해인 1879년까지 7년간 사용했던 노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가우디가 직접 손으로 기록하여 ‘레우스의 수기Manuscrito de Reus’로 불리기도 하는 이 노트는 1881년 2월 《라 레나이센샤La Renaixenca》에 기고한 ‘장식예술 박람회’의 소개 글,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을 제외하고 그가 남긴 유일한 기록물로 인정받고 있으며, 가우디의 독특한 건축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헨리 데이브드 소로라고 되어 있지만, 소제목을 보면 '<월든>에서 <시민 불복종>까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명문장'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다음을 소로의 저서를 편집자 임의로 골라 뽑아 엮은 책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은 <월든> 하나만이 아니다. <나는 어디서 살았으며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에는 <월든>뿐만 아니라, 덜 알려졌지만 여러 독자와 평론가가 더 중요하다고 평가하고 추천하는 다른 작품들까지 포함되었다. '콩코드와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메인 숲', '되찾은 낙원', '야생 사과', '산책', '원칙 없는 삶' 그리고 소로가 평생 써내려간 일기와 수많은 편지 중에서 뽑아낸 보석 같은 문장들로 가득하다.




박경철의 자기 혁명의 청소년 버전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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