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의 비극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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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정통 추리 소설이었다. 1932년작. 80여년이 넘은 시간이 흐르고, 몇 대에 걸쳐 미스테리 소설의 진보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점에서도 여전히 흥미롭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 시간이 가치를 증명한 것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쪽 시간과 이쪽 시간 사이의 간극이 몰입을 방해하는 것과, 흥미를 촉발하는 것이 있다. 전자는 문학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와  지식이란 이름으로 단편화된 조각 정보들이 교과서와 지적인 대화 사이를 구름처럼 떠돈다.  후자는 그냥 조용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 추리소설 팬이 아니라서, 교과서에서 본 적이 없어서 잘 알고 있던 작가가 아니었지만, 읽고 나서 알아 보니 엄청 읽혔다. 수많은 버전의 다른 출간본이 있고, 많은 이들이 번역을 했고, 많은 독자들이 리뷰를 했다.

 

두 명의 저자 x 두 개의 필명 x 두 개의 페르소나

소설의 저자와 주인공에 얽힌 이야기는 추리 소설 못지 않게 흥미롭다. 원래 이 책은 바너비 로스 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물리적 저자는 만프레드 리와 프레더릭 다네이라는 쌍동이처럼 닮은 동갑의 사촌 형제이다. 앨러리퀸은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은 필명이자, 주인공 탐정의 이름이며, 두 사람의 페르소나다.  그런데, 리와 다네이 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은  또 하나의 필명이 있었으니 그것이 드루리 레인을 주인공으로 택한 바너비 로스이다. 둘이 하나인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공개석상에서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는 등, 개구장이 같은 행동들을 즐겼다고 한다. 미스터리와 위트 가득한 삶을 영위했던 그들이다. 바너비 로스의 생은 고작 3년이었다. 출판사와의 저작권 분쟁으로 바너비 로스는 x,y,z의 비극 등 그들의 지적이고 고뇌에 찬 햄릿 스타일의 드루리 레인을 탐정 주인공으로 한 많지 않은 작품을 던져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신중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전직 배우는, 실존했던 작가 만프레드 리와 프레더릭 다네이의 감추어진 또 다른 자아, 깊이 내재된 보이지 않는 분신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기록으로는 그들의 페르소나는 엘러리 퀸이었고, 드루리 레인과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고 한다. 

 

둘이서 하나의 소설을 쓰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글과 그림을 따로 써서 하나의 동화책을 엮는 것처럼, 글의 논리적 전개와 스토리, 그리고 문장을 분리해서 각자 역할 분담을 했을까. 그렇게 역할 분담을 했더라도 최종적으로 글을 쓰려면 머리 속에 굴러다니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일관된 문장 속에 배열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곰곰히 함께 스토리 구조를 짜내고 하나씩 하나씩 그 디테일을 상의해 가며 한 문장 한 문장 함께 완성했을까.  초기에 그 둘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졌으므로 시간이 그렇게 충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한 워낙 많은 작품을 써냈기에 많은 것을 조율해서 쓰는 일은 더욱 어려웠을 듯하다. 그렇다면 모든 스토리를 함께 짜고 일정을 맞추기 위해 부분부분 챕터별로 나누어 병렬로 동시에 쓰는 작업을 진행했을까. 알쏭달쏭한 두 사람의 탐정소설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다.

 

당신은 이미 범인을 알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시체다. 불우한 해터가의 주인, 화학자, 요크 해터씨다. 석연치 않은 자살 판정. 그러나 그의  죽음은 서막에 불과했다. 몇달 후 해터가에서는 루이자를 겨냥한 또다른 살인 미수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 발생한다. 어두운 광기에 휩싸인 해터 가의 저택이 공간적 배경의 전부이다. 독자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으스스한 저택에 괴이한 해터가의 자식들과 함께 갇혀 답답하다. 용의자이자, 잠재적 피해자이자, 새로운 사건의 잠재적 범인인 해터가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외출금지령이 떨어지고, 여러 명의 경찰이 구석구석 배치된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 두 딸과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루이자, 가정교사, 운전사, 하녀 등 그 집에서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한 발작도 떠나지 못하지만,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결정적인 알리바이들이 있다. 사건을 담당한 섬 경감도 감시와 사건 해결을 위해 해터가를 떠나지 않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지만, 그가 있는 동안에도 루이자를 향한 살인 미수극은 계속된다. 드루리 레인은 섬 경감이 의지하고 있는 민간인으로, 타고난 직관으로 논리적인 사고력으로 문제 해결을 하는 인물로, 한물 간 퇴역 배우이다.  그 역시 청각 장애인이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하나의 감각을 상쇄시키는 또다른 감각을 주었다. 논리적 추리력, 직관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가 범인을 아예 못맞춘 것이 아니었다.  '아 그럴 줄 알았어'가 아니라 '설마' 했던 거다. 모든 단서가 처음부터 정확하게 오차 없이 범인을 향해 있었고, 출간 당시 바너비 로스라는 이름을 썼던 저자는 숨김없이 그것을 꼼꼼하게 독자에게 알렸다. 알아가는 과정 자체에 인간의 차가운 본성에 또한번 굴복해야 하는  윤리적 이슈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의 단서가 가리키는 모든 힌트들을 부정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루이자는 시청각장애인이다. 추리 소설에 헬렌 켈러 드라마를 소재로 쓸  이유도 없는데 그녀가 등장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녀의 증언이 문제 해결의 열쇠다. 

보통의 우리가 시각과 청각에 의지하는 양 만큼 루이자의 다른 감각은 발달할 수 밖에 없다. 목격자가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녀의 나머지 감각이 있다. 저자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루이자의 초감각적인 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독자(나)는 독자가 경험한 것, 독자가 알고 있는 것에만 집중한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가 손에 쥐어주는 사건의 단초를 흘려 버린다.  거기에 설마 하는 마음. 불편한 마음을 제거하고 그 설마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단서가 제시하는 길을 스스로 차단한다. 차단할 수밖에 없다. 성선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아무리 많은 타락과 부패를 묵도해  온 경찰이라 해도 그렇게 목격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인간 본성을 그렇게 취급해도 된다고 교육받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
다른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미스터리나 탐정 장르 소설은 소소한 일성에서는 볼 수 없는 삶의 가장 극한까지 상황을 몰고 가기 때문에 개연성이 부족해지기 쉽다. 납치나 살인과 같은 사건의 원인은 현실에서는 대개 금전적인 이유나 원한 관계가 대부분이어서 진부해지거나 작위적이기 쉽다. 내가 추리소설을 많이 안읽는 이유 중의 하나다. 이 소설은 그같은 우려는 밀쳐버리고 다른 종류의 고뇌를 안겨준다. 인간 본성과 죄의 근원에 대해 성찰이 요구되는 이 소설은, 나에게는  사실 드루리 레인의 윤리적 선택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혼돈스럽게 한다. 주인공인 그의 결정이 독자인 나의 결정과 언제나 같을 수만은 없다. 그의 선택에 윤리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선택이 있을까. 

사건 종료 후, 레인은 섬 경감과 부르노 검사에게 비극적 결말을 초래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결정에 대해 충분히 변호할 기회를 갖는다. 만일 범인을 확신하였을 때 이를 알렸다면 초래할 수 있었던 결과에 대해 그가 고뇌했던 이유들 때문에 그는 면죄부를 갖는다. 한 사람의 한 때의 잘못이 꼬리를 끊지 못하고 그대로 혈통으로 이어져 자식과 그 자식에게 그대로 되물림되고, 결국 돌고 도는 관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드루리 레인은 비통해한다. 그렇다. 나의 악하거나 약한 유전자는 선조로부터 온다. 그건 맞다. 유전자는 승자이다. 레인이 내린 결론은 아무래도 찝찝하다.  유전자의 결함이 어떤 특정한 질병 때문이었을 때, 그 결함이 일으키는 모든 악행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은 영원히 개인의 몫이다. 사회의 몫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들,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건드리며 드루리 레인이 내린 결론을 유예하기엔 우리가 믿고 있는,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는 가치가 때로 허황되고 근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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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정원 -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혜영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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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하지 않은 소설을 쓰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진부하지 않은 소설을 만나기도 어렵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해진 형식의 틀을 벗어나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진부하지 않은 소설을 읽는 일은 모험이고 때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또, 진부하지 않다고 해서 모두 최고의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훌륭한 예술은 발상의 전환, 새로운 시도, 침신한 구성과 소재가 필수다. 이 소설 어딘지 진부한듯 하면서 파격적이다. 


20세기초 봇물터진 서양문물에 도취한 명문가 지식인들의 나르시스적인 엘리트 의식에 흠뻑 절은 듯하면서도 고색창연한 고가의 풍경을 한없이 느리고 정적인 악보위에 써나갔다. 거의 반이 지나도록 진도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작가는 이야기를 펼칠 의지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강릉 선교장을 연상케하는 노관이라는 명문 고가의 풍경과 일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고즈넉한 고가의 풍경은 직유의 융단 폭격으로 압사할 듯하다. 생경한 비유는 때로 그려내고자 하는 이미지에 적절히 매치되지도 않았고, 사춘기 소녀의 시쓰기 습작 노트를 무작위로 조합하여 나열한 문장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전개 없이 반을 읽어나가면, 그 다음 단계로 이야기의 폭격이 시작된다. 이번엔 감정의 과잉이다. 비밀이 파헤처지는 광경도 진부하다. 잘 배치된 추리소설같이 하나씩 실마리가 풀려나가는 게 아니라, 폭로하듯 촌스러운 독백이 과도한 감정과 함께 이어진다. 


이렇게 이상야릇한 책이 독자에게 제목 그대로 신비한 비밀 정원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책을 덮고 나서 왜 자꾸 그 곳에서 살다 나온 것 같을까. 시간이 멈춘 곳 같은 그 노관에서  자신때문에 하루하루 절망으로 죽어가던 시동생에게, 초연하게 차를 대접하고 음악을 듣던 요의 어머니가 머리에 떠나지 않는 걸까. 사랑을 극복한 것인지, 애써 숨기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책의 제목은 비밀정원, 이야기 자체로만 본다면 제목이 암시하는 비밀은 막장드라마처럼 진부하다. 비극적 사랑은 운명의 회오리 속에서 비껴갔고, 무고한 생명이 잉태되었으며, 고택의 가문을 지키고자 비극은 끝까지 비극을 지킨다. 그러나 비밀은 진짜 비밀은 흔한 막장 드라마 코드가 아니다. 그것은 노관의 집주인인 어머니이다. 비밀 정원은 요의 어머니의 마음 속 정원이다. 그 속에 숨겨온 사랑, 끝내 이승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랑. 사랑의 씨앗이 잉태되어 손만 뻗치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데도 초연했던 그 마음이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딸의 존재를 알면서, 지척에 있는 딸에게 초연한 것 역시 이 소설의 미궁같은 매력이다. 기존 소설이었다면, 혹은 일일 드라마였다면, 딸의 존재가 소설의 축으로 이어지거나 갈등의 매개체가 되어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형성에 기여했을 터인데, 이곳에서 딸의 존재는 마치 그녀가 요에게 보낸 동화처럼 초월적이다. 이 두가지 요소, 두 여성에 대한 비밀스런 마음의 문에 끝내 빗장을 끝까지 열어두지 않은 것과 최대의 결핍을 절제로 표현한 것,. 그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고 새로움이다.  


사실 율이 삼촌의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랑은 너무나 오버스러워서 20세기를 통과해온 세대로서도 그대로 읽어 주기가 메슥스럽다. 사랑의 감정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지더려빠진 놈 약먹었나 싶다.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미숙한 사춘기 소년의 거친 사랑의 찬미와 같은 그의 시도 유치해보인다. 그러면서 밤늦도록 멈추지 못하고 책장을 계속 넘기는 이유는 바로 어머니의 마음 속 정원에 무엇이 있는지 그 비밀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철저히 베일을 벗지 않는다. 실제로 비련의 여주인공이고, 이러한 소설에서 가장 많이 독자와 교감하고 감성을 전달해야 할 사람이지만 소설에서는 철저히 그 사람의 감정이 없고 묘사가 배제되어 있다. 어머니는 저 멀리 깊숙한 안채에서 모든 것을 감독하고 지시할 뿐 독자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명맥이 끊어질 듯 겨우 이어가고 있는 대가 노관의 안주인으로서 고작 책을 읽고 손님을 대접하는 정도의 묘사가 전부이다. 대사도 거의 없다. 


1인칭 시점의 소설은 자주, 화자의 생각을 빈틈없이 독자에게 세세하게 전달하고 아주 밀접하게 독자와 교감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은 소설 속의 인물과 가장 내밀하게 소통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1인칭임에도, 화자인 요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대화가 표현하는 감정, 요가 묘사하는 고택의 풍경, 그것을 통해 독자가 느끼는 것이 반대로 화자에게 이입된다. 스토리는 그가 우연히 듣게 되는 대화에서 형성된다. 


심사에서 '과잉과 결핍'이라는 단어에 격하게 공감하였는데.. 작품 전체에 흐르는 과잉과 결핍은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천명관의 <고래>를 읽을 때, 그 말도 안되는 스토리들을 너무나 통쾌하고 진지하게 읽었었던 것처럼 비록 심사의원이 지적한 것처럼 기존 소설의 정형화된 틀에서 많이 벗어난 이 작품은 혼불문학상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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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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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알게 모르게 편을 가르고 적을 만든다. 남과 북이 대치되어 있는 우리 나라의 이 특수한 국면은 남북의 두 권력 집단에게는 편리한 통제 수단과 탄압의 구실을 만들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의 그것이 조금 더 극단적일 뿐이지 다른 종족이라고 다른 국가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의 책 <적의 말하다>의 첫 글에서 에코는 과감히 말한다. 인류 문명의 아주 초창기부터 본질적으로 적이란 실제로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묘사되는 자들이라고. 


우리가 우리의 '적'으로 알고 있는 '적'들이 언제 우리의 목숨을 노렸는가. 편의상 권력이 가진 세계를 단순화하고, 그 권력과 나라를 지탱하기 위해 구성원들의 에너지를 결집시켜 방어라는 수단으로 기만하는 것이 '적'이라는 것의 실체다. 그 '만들어진' 적들은 오늘날은 물론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문화에서건 이방인과 소수자들을 타겟으로 손쉽게 적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아름다움의 본질적 특징이 종의 평균적 대표가 되는 데 요구되는 모든 것을 가지는 '온전함'이라면 중세시대에는 이 기준에 따라 평균과 멀리 떨어진 신체적 특징을 가진, 흑인, 난쟁이, 나병환자가 적으로 둔갑하였고, 한 때는 매춘부에 대한 혐오감을 모든 여성에게 확대 해석하여 모든 여성은 인류의 적이 되었다. 그럼 지금은. 의식 수준이 나아졌다고 해서, 미국의 대통령이 흑인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서 적이 사라졌나? 적을 만드는 정치적 장치가 사라졌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적이 되어 증오하는 일이 사라졌나. 심화되었나.


<적을 만들다>라는 칼럼은 2008년 볼로냐 대학교에서 열린 <고전의 밤>에서 발표한 후 <정치 찬가>에 실린 글이다. 칼럼 내에 고대와 중세 시대의 신화와 기록과 문학을 다양하게 인용하고, 깊은 지식을 펼쳐놓고 현대 정치에서 적의 '필요성'에 대해 꼬집는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고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시인이나, 성인, 또는 변절자들의 특권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는, 전쟁의 필요성은 적을 규명하고 만들어 내는 필요성과 일치하는 것이라는 미국의 한 국가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한다. 전쟁은 한 공동체가 자신을 <국가>로 인식하게 하며, 전쟁의 견제 세력이 없다면 정부는 합법적인 자신의 영역을 설정할 수도 없을 것이며, 오직 전쟁만이 계급 간의 균형을 보장하고 반사회적인 요소들을 해결하고 이용하게 한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 때의 파괴적인 전쟁이 이 보고서의 가르침을 따른 것일까. 국가가 그들이 생각하기에 사회의 낙오자들을 전장의 화염 속으로 내몰아 죽게 하는 것은 적의 실체를 국민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것과 낙오적 인간들의 퇴치 목적을 숨기고 있다면 나치와 무엇이 다를까.


군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희망이다. 생명과 죽음의 힘을 거머쥔 전쟁 시스템만이 사회 조직에서 비주류에 속하는 다른 기관들도 피의 대가를 치르게끔 한다. 37


책에 소개되는 글들은 하나의 주제로 수렴되지 않는, 제각기 다른 목적, 다른 기관의 요청에 의해 다른 주제와 구성, 문체들로 이루어진 움베르토 에코의 글모음이다. 방대한 지식의 향연이 거침없이 드러나는 에코의 글쓰기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따라서 잘 정리되어 있고 친절하고, 쓸데없는 주석이나 인용이 대부분 생략된 서적에게 익숙한 한국 독자에게는 매우 산만하고 정신없다는 것 빼고는 나무랄 곳이 없다. 단지 그 산만함이 문제다. 그의 지식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종횡하며 끝없이 엉켜있고, 그 출처와 인용을 조금도 생략하지 않는다.  


에세이라고 하기엔 전문적인 내용이 많고, 학술 논문이라고 하기엔 하나의 주제가 어떤 결론을 향해 수렴하지 않고, 협소하지 않으며 짧은 글마저도 결코 한문장 한문장 휘리릭 넘겨버릴 수 있지 않은 통찰의 밀도가 단단한 에코식 글모음이다. 책을 아끼고 싶었으나, 줄을 안그을 수가 없었고, 줄을 긋기 시작하니, 인용문을 빼고는 거의 다 그어야 해서 줄긋기를 포기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가끔 안그을 수 없는 곳이 사방 팔방 널려있다. 에코는 소설가이면서, 사상가, 철학가이며 건축, 미학 등 다채로운 부분에서 폭넓고 깊이 있는 통찰과 지식을 가진 세기의 지성인이다. 이 책은 에코가 가진 지식이 얼마나 넓고도 깊은지를 헤아릴 수 있는 좋은 샘플링이 될 수 있다. 정치, 철학, 문학, 천문, 지리, 윤리, 예술를 비롯하여 위키리크스에 관한 고찰과 속담을 이용한 위트 있는 창작물까지 매우 다양한 주제를 타고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이제껏 비판없이 형성되어 왔던 그리고 수용해왔던 의식의 세계가 얼마나 편협하고 왜곡되고 기만적인 것이었는지를 반성하게 된다. 


두번째 글인 <절대와 상대>는 <절대>를 주제로 삼은 밀라네지아나 축제의 간담회에서 발표한 글이다. 여기에서 에코는 절대를 이해하는 것이 늪에 빠진 허풍선이 남작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끌어 늪지에서 빠져 나오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비유를 들었다. 결국 사유를 위해 필요한 언어라는 것이 몽롱하고 흐릿하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것을 설명하기 어렵고 따라서 신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암흘속에서 모든 암소는 검다고 여기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미지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상상하도록 단순히 부추기고는 결국 우리의 기대를 좌절시킨다. 48


창조론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정액의 힘을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옮겨지고 인간성의 타락도 마찬가지다. 이 딜레마를 고대의 종교에서는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앞에서 소개한 맨 앞의 두세 글 외에 꽉찬 기대감으로 읽어내려간 글은 <천국밖의 배아들> 편이었다. 아직까지도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낙태 문제를 현재 천주교에서 다루고 있는 방식과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를 비롯한 고대의 학자들과 인식과 그 변화들에 대한 을 지적인 통찰을 전한다. 



이쯤하자. 여기서 포기한다. 이 선에서 책의 내용을 허술하게나마 요약해보려는 부질없는 내 의지를 접는다.  그의 책은 요악할 수 없다. 그는 세상을 한 마디로, 한문장으로 정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의 글은 어떤 한 결론을 향해 수렴되어 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주제 자체의 탐험에 그 의의가 있다. 우리는 책을 통해 수많은 문학 작품과, 신화와 과학과 미학과 역사와 온갖 종류의 지식을 심지어 한보따리의 속담들과도 만난다.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이라는 부제는 이 글이 왜 이렇게 주제와 형식과 양이 제각각인 글들의 모음이 되었나를 설명한다. 학술행사의 오프닝을 위해 쓰인 글들이 많은 만큼 주제가 다양한 것인데, 의학 윤리, 기호학 협회, 섬에 관한 학회, 고전 학회에서부터 이탈리아의 주간 일간지 등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연구를 하는 학술단체와 각종 매체에서 그의 글을 원했다. 정치적으로 우리나라와 많이 닮은 이탈리아 베를루스쿠니 체제 하에서의 정치적 색채를 띤 글들도 볼 수 있었다. 


소음은 은폐와 같다. 소음을 통한 검열의 이데올로기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침묵해야 할 것이 있으면 더 많이 떠들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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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엘레지 -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이언 샌섬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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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종이가 곁에 있을 땐, 그 쓰임새에 대해 무심해서 몰랐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우리는 참으로 수세기동안, 특히 우리들의 스마트한 디지털 세대가 종이를 잠식하기 바로 방금 전의 세기까지 가장 풍부하게 종이를 누리고, 종이를 종같이 부리고 학대하며,  종이와 함께 살아왔다. 


이제 종이가 떠나가려나, 종이에 대한 애가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다. 갑자기 슬퍼지려고 한다. 종이엔 우리의 정신이 알알이 배겨있을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정신이, 내면이 머물 곳은 종이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이제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하나. 원고지나 노트에 소설을 쓰는 폴 오스터를 오래된 박물관의 구석기 유물을 보듯  신기해하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우리는 종이에 긴 글을 쓰는 방법을 잊어버렸고, 환한 모니터의 불빛을 온 얼굴로 맞아야 생각들이 텍스트로 기어나오며, 아이들은 손글씨를 삐뚤빼뚤 알아볼 수도 없게 써도 무심히 넘겨야 하고, 화면에 쓰일 예쁜 글자체를 디지털 머니를 주고 구입하는 세상이 우리도 모르게 지배하게 되었다. 디지털 원주민인 우리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에도, 종이에 박힌 글자들에 대해 우리 성인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종이는 언젠가 빛바랜 노스텔지아가 될까


종이가 꼭 글씨들과 쌍으로 엮일 필요는 없다. 조금은 뜬금없게도, 이 책은 종이의 쓰임에 대한 글을 지도에서부터 찾기 시작한다. 종이가 장소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빼곡히 채워넣은 지도를 담았을 때 본격적인 인류의 대탐사가 세계를 대대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책은 종이의 목적 자체이기도 했다. 사상을 전달하고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인간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인류 역사를 변화시켜 왓다.  과학 혁명, 종교개혁, 구체제의 몰락, 자분주의의 부상, 공산주의의 몰락, 그리고 그 사이 역사의 동력이 되는 텍스트를 담고 있었으니 세계를 지배한 건 무기 이전의 정신 자각 분노 깨우침 뭐 그런 거니까. 구텐베르크 이래 책과 거의 동일시 해 온 종이는 인류가 오랜동안 쌓아온 지성을 담는 그릇이다. 지폐의 사용 이후 경제 역시 종이 위에 세워졌고, 금융상품도 종이 위의 숫자로 구성된 것들이다. 필요가 발명을 낳듯, 지폐의 통용은 9세기 구리가 부족해진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인류를 물질적 삶을 지탱하는 경제는 지폐로 인한 버블과 붕괴의 역사이기도 했다. 아직도 우리는 상품 위에 붙여놓은 종이 상표와 포스터와 아파트 입구로 쑤셔넣어진 각종 상품과 세일과 배달 음식점의 광고 전단지들의 홍수 속에 있으며, 상점의 유리벽에 각종 세일과 행사를 알리는 종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틈새로 새어 나오는 불빛 속을 걷는다. 종이는 건축과 예술 작품의 소재로도 쓰였으며, 일본의 전통 놀이(?)라고 잘못 알려진 오리가미 종이접기는 사실 서양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일본에서 발전시켜 다시 역수입된 문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문구점에서 파는, 서양에서는 구할 수 없다는 색종이들을 떠올린다. 여권과 같은 신분증은 물론, 두 나라 사이의 주요 협정도 종이 위에 쓰여진다. 


이러한 종이 기반의 모든 것들이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디지털화되어 왔지만, 아직 애도할 시점은 아니다. 크레딧 카드와 전자화폐가 지폐를 대치하고 있는 동안에도 정겨운 재래시장에서  현금없이 콩나물을 살 수 없다. 킨들과 크레마가 앞다투어 전자책을 출판하고 있고, 차안에 굴러다니던 각종 지도책은 오래 전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이제 네비 없이는 통근을 못하고, 스트릿뷰어로 확인하지 않고는 약속잡는 일을 삼가하는 동안에도 새로운 곳을 여행할 때에는 여행안내소에 들어가서 그곳의 안내 책자와 지도를 받아 들고 나온다. 끊임없이 스마트폰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책상에는 교과서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종이시험지의 문제들을 풀어 성적을  평가받고, 책읽는 어른들도 아직 이렇게 건재하지 않은가. 


정신문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종이가 실은 환경을 무참히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흔히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비닐 봉지를 꼽기에, 마트에서는 종이봉투를 구입하는데 종이가 이에 못지 않다. 오늘날 산업용으로 벌목한 목재 가운데 절반 가량이 제지용 펄프로 쓰이고, A4 용지 한 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구 하나를 한 시간 동안 켜놓을 때만큼의 온실가스가 배출될 뿐 아니라 물도 한 컵이나 사용된다고 하니 아무렇게나 휘갈겨 없어지는 A4 용지 한장에 애도를 불러야겠다. 그런데 환경보호와 같은 선의의 주제에 대한 책을 모으는 장서가들도 결국 환경파괴자라고도 할 수 있는 아이러니는 어찌할 것인가. 너도나도 보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종이책 출판 산업은 환경 파괴 산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이러니는 또 어쩔 것인가.


저자 이언 샌섬은 신발 밑창이 너덜너덜 떨어지는 걸 본드로 이리저리 붙여가며 신고 다니면서도 책 한권의 저술로 생긴 선인세로 한질의 책을 사는데 써버리는 장서가이다. 폭넓은 지식을 전방위로 휘두르며 기관총처럼 거침없는 지식을 난사하는 글쓰기가 움베르토 에코를 연상케하기도 하지만, 어렵지는 않게 읽힌다. 주위를 살펴본다. 온통 종이로 된 것들이로구나. 달력, 3M 포스트잇, 흩날리는 A4 용지들, 영수증, 지갑의 현금 약간과 상품권, 쌓여잇는 책들, 상품의 박스, 상자들.... 아직 애도할 때가 아니다. 종이로 이루어진 세상을 살고 있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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