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폭스, 꼬리치고 도망친 남자
헬렌 오이예미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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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어느 산골에 할머니하고 할아버지 하고 살고 있었어. 그런데 너무 적적했던거야 그래서 산신령한테 아기들 갖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했대 그랬더니 어느날 강가에 할머니가 빨래를 하러 갔는데 사과가 둥둥 떠내려오더래.   그래서 할아버지랑 나누어 먹으려고 집에 가져가서 반으로 뚝 잘랐더니. 글쎄 거기서 갓난 아기가 응애 응애 하고 나오더래. 할아버지하고 할머니는 너무 기뻤대.


어릴 적 할머니의 무릎에서 듣던 얘기다.  수십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외울만큼 하고 또하고 또하고 했던 얘기는 지금 생각해보니 반전도 없고 클라이맥스도 없을 뿐더러 인물의 성격도 드러나지 않고 내면 묘사도 없다. 개연성도 없고 말도 안된다. 게다가 사과를 자르려면 칼이 푸욱 들어가야 하는데 거기 아기가 있다니. 


이렇게 이상한 이야기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끊임없이 다른 형태로 구전되고 반복적으로 들어도 계속 재미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산 북클럽 카페에서 이 책을 먼저 읽은 몇몇 블로거들의 답글들을 보니 끝까지 작품 설명을 참조하지 않고 읽었는지 어느 시점에서 설명을 참조했는지가 관심대상이었다.  나는 아주 조금, 한 50쪽 가량 읽었을때 이미 역자노트를 읽었음에도 뭐가 뭔지 한참 몰랐는데 삼분의 일 지점에서 설명을 봤다는 독자도 끝까지 오기로 스스로의 힘으로 해독하며 읽었다는 독자도 모두 존경스러웠다. 처음엔  황당하지만  읽을 수록 점점 비현실적인 설정들에 푹 빠져들게 되는 게 이 책의 매력이다.  


옛날 이야기 같이 황당한 이야기들이 불쑥불쑥 여기 저기서 시작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틈틈히 소설가인 미스터 폭스와 그의 아내 그리고  미스터 폭스의 상상속 인물 메리 폭스가 또다른 이야기 갈래를 형성하는 이 소설은 전혀 새로운 형식이다. 


중간에 번역 문체가 너무 거칠고 맥락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 역자를 찾아보니 최세희 번역,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비롯한 줄리안 반스의 소설과 많은 번역을 한 역자시다.  일부는 여전히 껄끄럽지만 아마도 원본에 충실하다보니 문화적으로 이해불가한 문장을 유지하는 역자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읽는 재미가 훨씬 반감되었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저자의 발랄 깜찍한 문체를 그대로 만날 수 있었다. 


최근 특히 이달에 들어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도의 소설 책들을 참 많이 만났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새로운 형식의 책이다. 구전 동화나 신화와 같이 신비하고 황당한 스토리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한 점,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처럼 몇 겹의 중첩된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 찾아보면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어떤 하나의 일관된 통일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점, 그래서 저자와 독자간의 숨바꼭질 놀이를 계속하려면 몇번이고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점, 앞서 했던 말 같지만 조금은 다른 점 하나 더. 많은 이야기가 결국 버전을 달리한  하나의 이야기이며, 결국 작가의 이야기일 거라는 점 등이 그렇다. 


그러니까,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스토리에 대한 작은 힌트를 주자면, 소설가인 미스터 폭스에겐 상상속의 여자 메리 폭스가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이 가상의 인물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고, 와이프 대프니에게도 나타나면서 세 사람의 미묘한 삼각관계와 동거가 계속되는 동안 그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 가지가 스토리배틀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그 작은 이야기는 하나의 독립된 단편 소설 처럼 완전한 형태인 것도 있고, 할머니가 사과를 똑 자르면 아기가 응애응애 하고 나오는 것처럼 완전 황당한 스토리도 있고, 형식도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이런 대략의 줄거리는 사실 별 주목할 게 못된다.  그 각자의 이야기들이 메리 폭스와 미스터 폭스와 미세스 폭스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반짝반짝 어디서도 보지 못한 유머러스하고 귀여운 문체들은 직접 읽지 않으면 절대로 전달될 수 없는 이 책의 가치이다. 


줄리안 반스도 그렇고 작품을 고르는 최세희 역자의 안목이 존경스럽다. 간혹 눈에 띄는 오탈자는 유감. 한 번 더 읽고 내용 보충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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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 개정판 손철주의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오픈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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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람 전기가 스물 네살에 그렸다는 계산포무도이다. 추사의 제자였던 그는 30살을 채 넘기기도 전, 그림 몇 점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초가집 옆으로 나부끼는 풀은 그령이라고 한다.

 

 

 

마치 싸리 빗자루로 마당을 쓸어 놓은 것처럼 몽땅한 붓끝이 종이 위를 듬성듬성 훑고 간 자취는 보는 이의 마음까지 스산하게 만든다. 진저리 치는 세상사에 어떤 애증도 품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표표한 심회가 이런 것이다. 꾸밈이라고는 한점도 없는 이 그림이 가슴을 치는 것은 까마득한 허무와 알지 못할 적요, 그리고 덧없는 삶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반납 전에 건진 문장이다. 한꺼번에 많이 읽을 욕심에 잔뜩 빌려다 놓은 오석주와 손철주의 책들을 두고 긴 여행을 다녀오니, 반납일이 몇일 만료되었다. 여러 권을 한꺼번에 체납하여 대출중지기간이 한 달이 넘는다.

 

처음 펴낸 효형출판은 운명을 달리했는지, 오픈하우스에서 2011년 개정판을 냈다. 다행이다. 반납 기일을 넘겨 채 읽지 못한 책을 훑어 보는 순간 '어머 이건 사야 해'라며 마음이 다급해져 급찾아보니 절판되었으나 개정판이 있다. 그래도 어쩐지 1998년도 판을 갖고 싶다. 저작권 없이 쓴 도판이 개정판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을테고..


이 책은 말 그대로 미술의 세계 저 편 깨알같은 일화들을 알알이 정성껏 모아 쓴 손철주의 손때묻은 글들이다. 지금이야 많이 알려졌겠지만, 당시 쉽게 접할 수 있는 미술계의 스토리들을 엮은 책들이다. 때때로 예술 속에 깃든 이야기들과 품고 있는 사연들은 별 의미없는 그림을 빛나는 예술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 의미들, 거기서 캐치해낸 멋진 필체와 별난 감성으로 빚어낸 글타래들.. 그림이라고는 어릴 적 미술 시간에 쭐떡쭐떡 그려본 것이 전부인 이 무지랭이도 미술이라는 세계에 쉽게 텀벙텀벙 걸어들어가 맘껏 휘저어 볼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그러나 가끔은 절절히 가슴에  품을 것들을 제공하며 그렇게 예술 세계로 인도한다.

 

손철주가 뽑은 미술들은 한국 미술 서양 미술 할 것 없이, 현대 미술과 고전을 가를 것 없이, 르네상스와 낭만파와 행위예술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보고 느끼는 시각적인 예술을 가르는 어떠한 사조도 시대적 구분도 동서양도 없이,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미술의 세계 속 깨알같은 사연들을 만나는 재미는 손철주 특유의 풍부한 어휘가 카푸치노 거품처럼 녹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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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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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전무후무할 전혀 새로운 소설 <고래>를 쓴 천명관의 소설집이다. 2010부터 2014 6월에 걸쳐 문학동네를 비롯하여 8개의 다른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 소설 작가가 단편 모음집을 낼 때에는 어떤 통일된 하나의 주제로 모으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러 소설을 주제별로 분류해서 하나씩 책을 내려면 긴 기간동안 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단편소설을 써야 할 테니까 말이다. 작가의 성향이 일정 기간 내에서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테지만, 이 책은 책의 제목과, 여러 개의 소설들과 또 문체들이 잘 조화되어 하나의 주제로 잘 엮이는 것 같다. 


<봄, 사자의 서>는 3년전 실직한 사내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해가는 과정을, <동백꽃>은 어느 작은 섬 동엽이라고 하는 선주의 아들과 경숙, 유자 두 섬마을 처녀의 삼각관계를, <왕들의 무덤>은 세련된 도시의 여자들이 나오는 로맨틱한 소설을 쓰는 정희가 떠나온 과거, 가난과 무지, 폭력과 야만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을,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 노동자>는 한 때는 트럭을 몰던 경규가 고용과 실직의 무한 반복 속에 불안과 결핍과 줄어들지 않는 빚을 술로 마비시키며 살아가는 육체 노동자의 우스꽝스러운 저항과 일탈을, <전원교향곡>은 귀향과 농사라는 잘못된 선택이 파괴한 가정을 소재로, 피폐해진 정환이 돼지 축사가 들어선 후 들끓는 파리떼와 개짖는 소리와 지독한 냄새로 이중 삼중고를 겪으면서 막판의 끝에 몰리게 되었을 때의 선택을 그린다. 앞의 문장에서 언급한 <봄 사자의 서> 부터, <전원 교양곡>까지는 6개의 소설을 하나의 범주에 넣고, 그 뒤에 나오는 <핑크>와 <우이동의 봄>과 그 앞에 있었던 <파충류의 밤>은 또 하나의 다른 범주에 분류하고 싶다. <우이동의 봄>은 어떤 면에서는 앞의 다른 소설들과 같이 분류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왕들의 무덤>과 같이 묶어도 될 것 같기도 하지만.. 


<파충류의 밤>은 지독한 불면증으로 모든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잃은 수경이 두뇌 속 파충류의 봉인된 기억을 이야기하던 수더분한 선배의 자살을 묵도한 후,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알게 된 아이의 자살을 막는 이야기를, <핑크>는 대리 기사와 고객과의 눈오는 밤의 동행을, <우이동의 봄>은 옆방에서 방귀끼는 소리까지 들리는 옹색한 셋방에서 할아버지 내외와의 동거중 일어나는 자잘한 일화들을 통해 80~90년대 풍경을 재현한다. 


앞의 작품들이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한 절망을 이야기했다면, <핑크>와 <우이동의 봄>, <파충류의 밤>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인간의 온기가 소망이라고 부르고 싶은 어떤 소박하고 절실한 감정을 자아낸다. 전자 그룹이 혼자 남는 것 소외로 수렴한라면 후자 그룹은 동행으로 맺는다. 동행. 둘이서 함께 가는 길. 거칠고 춥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숨결로 온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



삶은 계속된다. 문제는 그거다.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사명이 발 밑에 떨어져 있을 때, 절망 말고, 좌절 말고, 체념 말고, 고통 말고 다른 대안이 없을 때에도 계속해서 살아있는 육체와 정신에게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벼랑 끝에 몰린 쥐가 선택하는 방법, 1. 뛰어 내린다. 2. 고양이에게 덤벼 본다. 자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첫번째 그룹의 소설들은 이  마지막 선택의 절정의 신음 소리와 함께 이상한 쾌감을 선사하며 끝나지만, 두번째 그룹은 아마도 그 이후, 쥐가 고양이를 물어 뜯든, 시퍼런 바닷물에 머리와 심장이 깨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살아있든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는 살아진다는 명제를 담았다. 2막이 시작되었지만 더 비루한 현실 마찬가지인 그곳에서 다시 또 작은 지푸라기 하나가 동행하게 되었을 때  헛된 바람일 지라도, 우리는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꿈꾸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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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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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여자아이를 말하는 것 같다. 사춘기 여자 아이들. 그 아이들의 성을 다룬 소설이다. 소설 속에는 배경 묘사가 없다. 인물에 대한 설명도 없다. 시간과 공간이 목적을 상실한채 우주 바깥쪽에서 유영할 뿐이다.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난해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어느 지점에서 머리속으로 배경이 명료하게 그려지는 시점이 생기는데, 이 소설은 끝내 그 지점을 통과하지 못한다. 이제 초경을 막 시작한 솔랑주와 친구들은 오로지 성(sex)만 보인다. 그들의 대화는 성에서 시작해서 성으로 끝난다. 그들이 하는 행동 역시 성적 호기심으로 시작된 일관되고 탈선적인 행위가 다다. 


온갖 성적인 행위와 성기를 뜻하는 금기어들이 지면 가득 채워져 있지만, 완전히 발가벗은 사람들로 우굴대는 목욕탕에서는 성적인 흥분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은밀한 19금의 성애 소설과는 달리 외설적이라는 느낌마저 달아난다. 그들이 다루는 성이 너무 미숙하고, 사랑을 매개로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혹은 나는 '사랑'이라는 달콤한 감정을 싣지 않은 섹스는 '성애'가 아닌 동물적 행동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그럴까?)


그렇다. 이 시대, 이 공간에서 막 가슴이 나오고, 초경을 시작한 여자 아이들의 최대 관심사인 성에 접근하고 알아가는 경험하는 과정은 우리가 어릴 적, 억압되고 숨겨졌던 은밀한 유혹과는 다른 정반대쪽 세상 풍경이다.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 나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체의 변화에 주목하고 집착한다. 그들은 섹스라는, 경계 넘어의 새로운 세계로 맘껏 도약하고 싶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아픔을 준다는 사실은 훗날에야 깨닫게 된다(깨달았을까? 누군가가 실제로 죽었다면?).  


솔랑주를 부모처럼 돌보는 옆집 아저씨 비오츠의 고뇌는 책을 덮고 시간이 지나서야 서서히 보였다.  앞뒤 정황없이 아무 설명도 없는 솔랑주의 독백으로 진행되는 소설 속에서, 독신남 비오츠는 솔랑주와 부모 이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조연일 뿐이다. 직업도 없이 고작해야 남의 집 아이를 보는 사람이고, 아이의 눈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감은 바닥이다. 파티에서 만난 잘생긴 아르노와 항문성교, 구강성교 등의 매우 난잡한 성행위를 했음에도 아직 '물리적'으로  virgin인 그녀는 고통스럽게 유혹을 떨쳐내는 비오츠를 끝내 굴복시킨다. 그토록 궁금했던 경계를 넘어 맘껏 펼쳐진 성의 세계에 도달하지만 그녀가 찾는 건 사랑이 아니었음이, 그 아이의 목적은 행위와 경험과 싫증날때까지 싫컷 해보는 것 그 자체였음을 알게 되는 것으로 인해 돌아온 상처는 온전히 아이와 섹스를 한 그 자신의 몫.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정말? 성행위를 했다고 해서?) 아르노에게 나도 해봤다고 말할 수 있게 당당해졌고, 비오츠가 필요없게 되었다. 


아이에게 버려지고 남겨진 어른 비오츠가 한 행동은 얼마 전 읽은 폴 오스터의 <선셋파크>를 연상시켰다. 그 곳에서도 주인공은 아이에게 버려지지는 않지만 아직 미성년인 아이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은 스스로의 삶 자체를 변화시킨다.  비오츠.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부모처럼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대고, 아이의 성적 일탈을 나무라던 어른이, 그 아이의 끈질긴 유혹에 손을 들고 넘어간 후에 그 불꽃처럼 뜨거운 섹스의 향연이 우리가 알고 있는 남자들의 그저 짐승같은 본성의 충족에만 그 목적과 의의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는 그런 결정을 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아이를 사랑했기 때문에(아마도) 절망했어야 했을 어른은 만일 사랑하지 않는 파렴치한 어른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면 절망하지 않은 것보다 나았을까? 



정제되지 않은 중2 쯤되는 아이들의 그 직접적이고도 적나라한 섹스 놀이는 난해하다. 뭔가를 얘기하고 있지만 뭘 얘기하고 있는지. 뭔가를 기억해내고 있지만 그게 언제이고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누구와 대화하고 있지만 거기가 어디인지. 그저 생각 생각 생각. 마치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처럼 앞뒤 설명도 없이 뚝뚝 끊어진 의식의 징검다리를 따라 가면, 겨우 겨우 가느다랗게 명맥을 유지하는 어떤 이야기의  흐름이 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어렵게 통과한 사춘기의 성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 미치도록 궁금한 곳,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허세와 분별없는 온갖 위험한 시도와 멸시와 유혹과 위험한 행위들 사이에서 두서 없이 섟인다. 


* 문체가 난해해서, 번역에 문제가 있을까 싶어 뒤저보니 최정수님의 번역이다.  이분의 번역서를 최근 많이 읽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딸2><딜레마><기 드 모파상> 등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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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르미날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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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밀졸라를 인터넷에 찾으면, 자연주의의 거장이라고 나온다. 나는 처음에 자연주의를 잘못 이해했다. 변명을 하자면 이과 출신이라 문학사와 사조에 대한 기반 지식이 없어서다. 우리에게 '자연'이라고 하면 아름다운 들과 꽃과 나무와 시내와 푸른 하늘 같은 아름답고 건강한 목가적 풍경을 떠올리지만, 문학사조에서 에밀졸라를 향해 말하는 자연주의란 것은 그게 아니다. 자연은 막연히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공적이지 않은 것. 꾸미지 않은 것. 허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답기만 한가, 꽃들이 활짝 핀 푸른 들판과 새가 지저귀는 숲도 자연이지만, 거센 폭풍우와 사나운 들짐승과 볼모의 황무지도 자연이다. 거기에는 추함과 사악함을 덮는 인공적 미화의 과정이 없다. 


대개 소설 속의 압축된 삶에는 작가가 전달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만 살아 있고, 나머지 일상은 없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의 어떤 특정 부분의 삶, 특정 생각의 조각들만을 골라 꿰어 놓은 책을 읽는다는 뜻일 것이다. 거기에는 주제가 있다.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똥을 누거나, 코딱지를 후비거나 하는 별 의미없는 일상들은 생략된다. 사랑, 욕망, 증오 그런 감정들을 녹여낸 감동에는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소설은 생략의 예술이다. 원하는 것만 남기고 생략하는 것. 원하는 부분만 축출해서 강조할 때, 그 소설속 사람들은 나머지 다른 일상들, 그 생각 외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그걸 독자는 모른다. 그들이 어떻게 똥을 닦는지. 내게, 에밀졸라의 작품 속 자연주의라는 말은,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그 누구도 그 어떤 감정도 미화되지 않았다는 걸로 이해된다. 에티엔과 카트린의  순수한 사랑마저도 누추한 단면이 적나라하다. 


19세기 세계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뜨겁게 불타오를 때, 그 불구덩이 역사 속을 통과하던 자리가 배경이다. 혁명으로 이룩해낸  피의 댓가로 탄생한 새 공화정에 대통령으로 앉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왕정으로 복고한 때다. 억압과 착취의에 대한 자각이 들풀처럼 번질 때, 탄광 노동자의 깊숙한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간 에밀 졸라는 개미집처럼 복잡한 깊고 어둡고 습한 탄광 속 그들의 삶과 사랑과 분노와 체념과 실패와 희망을 적나라하게 캐어내었다. 탄광 깊은 곳에서 몸이 바스라질 때까지 석탄을 캐던 노동 현장에 대한 묘사는 인류 기록 유산에 가깝다.  닭장처럼 좁은 연립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은 그들의 거처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며 아귀다툼으로 가정과 이웃의 일상이 묘사되는 그곳에 사회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숭고한 노동자들의 거룩한 이상은 없다. 하숙생을 포함한 온 가족이 한 방에서 함께 지내며, 사생활 없이 노출된 아이들의 어른 흉내내기 놀이는 그 아이들이 본 모든 것, 탄압과 착취, 섹스와 욕설 폭력 속임수 등 그 모든 어른들의 세계를 담는다. 아직 발육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들은 시커먼 공터의 으슥한 곳에서 힘센 남자들게 유린당하고 아이가 아이를 가지면 엄마가 되었지만, 하루 일당으로 집에 보탬이 되는 아기의 엄마 아빠가 된 아이들은 분가하지 못하고, 석탄 가루가 날라다니는 공터와 숲에서 섹스를 한다. 


전기와 석유가 하던 모든 일을 석탄이 하던 시대에 석탄 채굴은 모든 산업의 기반산업이었다. 체념과 핍박의 수레바퀴 속에서, 탄광의 먼지와 사고로 목숨을 잃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석탄을 옮기던 자식들이 다시 또 아비 어미와 똑같은 생을 반복하면서 가난과 굶주림과 착취와 포기와 체념을 운명으로 안고 살아가던 그들 광산 노동자들이다.  착취가 한계에 달해, 아이들을 포함한 온식구가 죽도록 일해도 굶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더욱 더 열악해지는 환경이 닥치자, 조금씩 흔들리던 굳은 체념은 천천히 자각으로 바뀐다. 


깨우쳐주고, 자각하게 하고, 알리고자 한 게 목적이고, 그것에만 충실했다면 그게 어디 예술이겠으며, 왜 에밀 졸라가 위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소설이 위대한 건 노동자의 삶과 혁명의 과정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다. 비참한 노동자의 현실을 사회에 알리거나, 노동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사회 소설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건 이야기 전체의 일부일 뿐이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짐승같은 삶이 있는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 밖에 없는 부르주아들의 삶도 있다. 언제나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고 광부들을 불쌍히 여겼던, 온실 속 화초, 공주처럼 보호되었던 부르주아의 세실의 짧은 생과 죽음도 있다. 각자 자기가 속한 환경 속에서 그들의 세계관 내에서 그들 나름의 삶이 있다. 부르주아와 노동자가 선과악의 대립적인 구도로 그려지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표출되는 다면적인 양상을 골고루 품는 거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아- 에밀 졸라는 정말로 위대하다. 소설 너무나 완벽하다. 결국 노동자들의 승리로 결말짓지 않았다. 그들은 패배했다. 언제나 늘 그렇듯이. 약한 자, 힘없는 자, 억눌린 자들이 저항할 때는 죽음 말고는 더이상의 바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로 도입된 임금 제도로 인해 1시간의 노동양을 더 착취당하게 된 채로, 아무 득실없이 세 달 동안 배곯아 죽고, 총에 맞아 죽고, 광산 붕괴로 죽었지만, 그 피의 댓가가 더욱 끔찍한 노동 현실에 팽개쳐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숱한 패배들이 영원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부딪치고 실패하고 또 부딪치고 실패하고, 그렇게 계속되는 흔들림 속에 조금씩 사회는 변화되고 있을 터였다. 




그대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이 세기말의 핏빛으로 물든 어느 날 저녁에 결정적으로 모든 것을 휩쓸어갈 혁명의 붉은 환영이었다. 그렇다. 어느날 저녁 분노가 끓어오르는 민중이 고삐풀린 말처럼 이렇게 길을 따라 달려갈 것이다. 그리하여 부르주아들의 피가 넘쳐흐르고 그들의 잘린 머리가 사방에 나뒹굴며 활짝 열어젖혀진 금고의 금이 길 위에 뿌려질 것이다. 여인네들은 울부짖고 남자들은 늑대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덤벼들 것이다. 그렇다. 지금 저들과 똑같은 누더기를 입고 똑같이 발소리 요란한  커다란 나막신을 질질 끄는, 똑같이 더러운 피부와 악취나는 숨결을 뿜어내는, 저들과 똑같이 끔찍하고 야만스러운 무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이 낡은 세상을 깨끗이 씻어내고 말 것이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서 도시에 돌멩이 하나 남지 않을 것이며 가난한 이들은 하룻밤 사이에 부자들의 여자들을 밟고 그들의 술 저장고를 비워내는 나는 축제가 끝나면 다시 숲속의 야생적인 삶으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 땅에 새로운 질서가 자라나게 될 때까지 <제르미널 2권-P95>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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