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어서 밤새읽는 생명과학 이야기 재밌어서 밤새 읽는 시리즈
하세가와 에이스케 지음, 조미량 옮김, 정성헌 감수 / 더숲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밌어서 밤새읽는 OO 이야기" 시리즈 중 생명과학  편이다. 내가 학교다닐 때는, '생물'이라는 과학 시간에 생명과학 분야를 일부 배웠는데, 외워야 할 부분이 많아서, 암기력이 딸리는 나는 과학 중에서도 생물이 어려웠다. 그래도 유전 부분은 우리 때에 아직 덜 정립이 된 모양인지, 지금처럼 복잡하진 않았던 것 같고, 생물학 중에서도 가장 이해에 바탕을 둔 부분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이 책의 띠지에 있는 광고를 보면, 아직도 일선 학교에서는 유전 관련 부분을 암기에 바탕을 둔 과목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생명과학, 아직도 무조건 외우니? 이해하면 쉬워져!"


책의 대상은 학생, 특히 유전 공학 혹은 생명 과학이라고 불리는 분야의 과목을 어렵게 느끼는 고등학생들을이고, 쉽게 쓰여진 애중 과학서를 표방한다. 저자인 하세가와 에이스게는 생태학을 전공했고, 진화생물학자이고, 사회성 곤충을 연구한다. 책의 내용은 DNA의 구조에 관한 교과서적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 파트1과 현재 현재 생명과학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재미있는 사실들을 엮은 파트2와 파트3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트1은 생물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DNA의 나선구조와 이중으로 보호받고 있는 유전정보, 염기쌍과 사다리 이론, 수소 결합, 단백질을 이용한 효소의 촉매기능, 세포의 탄생과 엽록체, 미토콘드리아의 구성 등과 같이 교과시간에 등장하는, 이미 유전공학적 파라다임 내에서 체계화된  이론들을 쉽고 단순하게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저자 자신이 고등학교 때 과학시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사실은 대학 2~3학년에나 가서 제대로 이해했으며, 원리를 이해하면 쉬우므로 원리를 이용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염기쌍은 푸린염기와 피리미딘 염기의 조합이며 A-T, GC의 조합이라는 것을 배웠지만 시험을 보려면 그것을 무작정 외워야 했다며 불경을 외우는 것처럼 귀찮고 어려운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왜 A-T, G-C로 조합해야 하는가를 이해하면 '그렇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머리속에 지식이 자리잡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데, 사실 왜 A-T, G-C로 조합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 역시 그닥 자세한 설명은 아니라, 개괄적인 설명이다. 염기쌍 간의 결합은 +. -의 전하를 띤 말단 원소가 마주보고 그 전기의 힘으로 끌어당기는 수소결합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들이 A-T, G-C의 조합일 때만 끌어당기는 힘이 발생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고등학교 수학책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는 교과서에 설명되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딱히 더 재미있거나 쉽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트1에 비해 파트2와 파트3는 생명과학의 여러 이면에서 나타나는 매우 흥미로운 최근의 연구 내용들이 쉽고 재미있게 소개되어 있다. 특히 사회성 곤충의 의사결정 메카니즘과 관련된 자신의 연구와 최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론들은 까다로운 전문용어 없이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어릴 때, 학교 운동장에서, 개미들이 줄지어서 뭔가를 물어 나르고 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관찰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 때의 이들이 어떤 종류의 언어로 서로 통신하고 협력하는지가 매우 궁금했었다. 이후, 베르나르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읽은 후엔, 그들이 강력한 페로몬을 통해 그 화학물질의 농도나 기타 조건들을 감지함으로써 인간과 같은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여기에 답이 있었다. 저자의 연구팀이 발견한 사무라이 개미의 의사결정 알고리즘을 보자. 


1. 페로몬을 따른다. 

2. 일정수의 개체와 스치면 방향을 바꾼다. 

3. 일정 시간 자신과 스치는 개체가 없으면 방향을 바꾼다. (p137)


사무라이 개미는 다른 개미집을 습격하여 번데기를 강탈할 때, 정철자가 습격할 집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페로몬을 방출해 행렬을 이끄는데, 정찰 무리가 길을 잃고 헤매면 행렬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정체되다가 결국 뒤쪽 무리부터 서서히 되돌아가기 시작해 전체가 원래 집으로 되돌아간다. 이 세 가지 규칙으로 구성된 알고리즘으로 시뮬레이션 하면 페로몬을 내뿜고 행렬을 이끄는 정찰자의 움직임을 멈췄을 때 일정시간이 경과하면 전체가 원래방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집단적으로 생활하는 생물이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각 개체의 지능이 낮은 곤충 등의 사회에서 전체 개체군에 유리하도록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꿀벌이 새 집을 찾아 이사갈 때, 정찰 벌이 8자 춤을 추는 과정을 예로 들었는데, 정찰 벌에게 괜찮은 후보지가 나타나면 8자 춤을 이용해 8자가 만들어내는 방향과 춤의 격렬함으로 목표 지점까지의 거리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주변 벌은 동료의 춤을 보고 그 후보지로 갔다가 8자 춤을 추면서 되돌아가게 되고 이렇게 각 장소에 차례로 벌이 동원되면서 특정 장소에 동원된 개체수가 많아져 그 수가 일정 수를 넘어서면 무리 전체가 날개짓을 시작해서 최종 장소가 선정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파트2와 파트3를 통해 사회성 곤충인 벌과 개미의 집단 행동을 인간의 두뇌와 비교하고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와 곤충의 다수 개체의 행동에 따른 의사 결정을 비교하는 과정 역시 흥미롭다. 


유전공학의 깊이 있는 부분을 쉽게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개략적인 설명으로 조금은 부실한 느낌을 받았으나,간략하고 핵심적인 부분을 강조하면서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가급적 많이 퍼뜨리기 위해 합리적인 의사ㅣ 결정을 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는 시대의 패러다임을 쉽고 간략하게 잘 전달해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영화는 상상력이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이야기 전달 방법이자, 엔터테이닝이다. 또한 말로 쓴 세상을 머리속에 그릴 수 있을만큼 체험이 축적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둘러보게 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상상으로 펼쳤던 세계를 영화에서 만나면 실망하는 경우도 많다.  읽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무한한 상상력과 유한한 스크린만큼이나 크다. 시각과 청각을 통해 바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로 보는 것은 책을 읽는 것보다 즉각적이고 감각적이다.  모든 보이는 것은 시각적 감각을 동반한다. 


보는 것이 감각으로만 끝날까? 화면 속의 다양한 풍경들이 보이는 즉시 감각적 울림을 주기도 하지만, 풍경 앞에 선 사람들의 관계와 사건과 동기와 눈동자와 유머가 빚어내는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보는 것 너머에 있는 읽을 것을 제공한다.  때로 묵직한 정치적 메시지인 것도 있고 달콤한 대리 사랑의 경험의 끝에서 도달한 연애지침일 수도, 인간 본성에 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다. 스크린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과 화면 속 배경이 되는 사물로 이루어진 풍경은 우리의 환경이 우연히 만들어 내는 일상을 흉내내고 있지만 사실은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치밀하게 계산되고 정교하게 짜여진 가짜 현실이다. 거기서 우리는 보고, 느낀 것 뒤의 보이지 않는 글씨들을 찾아 읽어낸다. 주인공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붉어지는 순간 사랑이 끝났음을 혹은 사랑이 시작됨을 읽어내는 것처럼, 볼거리들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쳐서 서사가 부족하다는 블록버스터들 속에서조차 우리는 우뢰 같은 사운드와 함께 쉴 새 없이 바뀌는 장면 장면을 보고,  그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의식의 작용과 연상의 꼬리들로 이루어진 어떤 메시지를 읽으며  또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또다른 자신과 만난다.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같은 존재로 살았다는 소설가 김영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회에 탐침을 꽂기로 결심했고, 그 결심의 일환으로 산문을 쓰게 되었다고 작가의 말에 적고 있다.  작가가 '주기적으로' 산문을 쓰기 위해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 숙고하고 글을 쓰는 행위는, 독자로서의 내가 책을 읽고, 그 책속에서 받은 강렬한 느낌을 기록하고 익명의 누리꾼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다시 글쓰기를 하고 있는 지금의 내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글모음 중 첫번째가 이 책 <보다>다.  시리즈로 계속 책을 출판을 계획하고 있으며 다음엔 <읽다>가 될 것이다. 그 다음은 <듣다>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은 그가 본 것들에 더 집중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평론은 아니다. 그가 본 것들은 영화 뿐만 아니라, 세상이다. 그 세상 속에, 세상을 풍자하고 흉내내고 비판하는 영화가 포함되어 있다. 


독자가 소설가 김영하가 본 것에 대해 적은 글을 읽는 이유는 그가 보는 행위를 통해 느낀 똑같은 감각을 느끼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각자가 느낀 것은 각자의 정체성의 일부로 흡수하면 그만이다. 작가가 본 것을 읽기 위해서다. 독자는 작가가 본 것을 읽음으로서 장면 장면에서 스스로 읽어냈던 사유와 작가의 생각이 조우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건축학개론>에서 작가처럼 여자의 욕망의 삼각 꼭지점을 읽어내지 못했더라도 서연의 흔들리는 욕망이 아버지의 서연에 대한 욕망으로 치환됨으로써 건축이라는 행위를 드라마의 메인스트림으로 끌고 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모든 욕망의 방향이 단순히 직선적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그 복잡한 인간의 심리와 내제된 욕망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읽고 나서야, 잠시나마 영화에 투영한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작가의 시각과 만나 객관적일 수 있다.  철학이 예술일 필요는 없다. 팝콘을 들고 앉아 팝콘처럼 가볍게 두시간 가량의 러닝타임과 시시한 감정을 소비한 후 개운한 기분으로 문을 나서면 되는 종류의 영화들이다.누구나 가볍게 보았던 영화, 많은 사람들이 보았던 <설국열차>, <건축학 개론>, <시저는 죽어야 산다>, <변호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영화들을 리얼 세계에 투영하여 해석하고, 성찰한다.  전문가 눈에는 '그저그런' 영화를 선택한 관객의 안목이 한줄평 속에 마구 구겨져 버리지도 않고, 미학적 혹은 전문적인 용어도 없다. 읽으면서 끊임없이 영화 속에서 내가 읽은 것과 작가가 읽은 것들이 함께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한다. 작가의 문학적 감수성과 통찰력으로 읽어낸 것들을 공유하는 소소한 즐거움은 해당 영화를 본 영화팬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연극적 본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최근 읽은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은 자신이 경험했던 필명으로 추리소설 쓰기 체험이 소설 속에 녹아 있다. 필명의 이름 윌리엄 윌슨은 주인공 퀸이 아내와 아들이 죽은 후 창조해 낸 가짜 인물로, 실제 인물인 퀸과는 다른 독자적인 삶을 영위한다. 퀸은 자기 대신 가짜 정체성을 만들고, 그가 되어 그 이름으로 책을 발표하고 퀸이 썼던 책과는 다른 종류의 책을 쓴다. 자신과는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이제까지 하루하루를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만들어간 자기 중 가장 자기 자신이라고 규정한 자신을 연기할 필요 없이, 자기가 되고 싶은 하나의 인물, 단순한 하나의 정체성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김영하 작가는 <시저는 죽어야 산다>에서 자신을 연기할 때 가장 어색하고 서툴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이를 통해,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인 이유는 우리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끝없이 변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게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뉴욕3부작을 읽어면서 그 가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아내와 자식이 죽은 후의 퀸은 그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정체성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체성, 아내와 자식이 죽지 않고 아무런 인간관계도 갖지 않은 정체성을 만들어 그 캄캄한 굴 속에 자신을 감금시키는 방법으로 상실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보는 것과 읽는 것을 통한 작가와의 조우는 이렇게 순간적인 번뜩임을 준다. 생각이 합해지고 더해지고 변화해서 아주 작은 진실 하나를 넘어선 것 같은 기분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micah 2014-11-21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핫!!!! 축하드려요ㅎ 나름 심혈을 기울여 써서 응모했는데 저는 똑! 떨어졌네요. 기네스님 수상에 대리만족 했네요ㅎ 이분 참 잘 쓰신단 말야ㅎ 축하드려요

CREBBP 2014-11-2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인이 더 잘쓰면서 말이야.. ㅎㅎ
저도 심혈을 기울여서 썼어요. 쓰다가 길어지는 것도 몰랐나봐요. 근데 수상작은 이거 말고 검은꽃
 
검은 꽃 - 김영하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7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시아의 길거리 음식을 다룬 한 TV 프로그램을 보던 중 친숙한 풍경이 눈에 띄었다. 라오스 혹은 베트남의 도시의 거리였는데 , 포장마차에서 김밥을 마는 앳된 여자의 모습이었다. 이 나라에도 김을 밥에 싸서 먹나요? 진행자가 물으니, 한국 음식이라고 했다. 삼촌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어서, 귀국했을 때 알려준 음식이라고 했다. 김밥. 한 때는 소풍날이나 운동회날 처럼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에만 새벽에 어머님들이 정성스럽게 싸던 음식이었으다. 어느새 김밥은 김밥천국 같은 흔한 분식집에서 천원 남짓 지불하면 급하게 한 줄 우걱우걱 배를 채울 수 있는 서민적인 음식이 되었다. 라오스 거리에서 김밥을 싸던 여자의 손길 뒤로, 머나먼 이국 만리 노동에 쩔은 피곤한 몸을 뉘였을 한칸짜리 쪽방, 혹은 허름한 공장 기숙사 한 켠의 숙소를 생각했다. 누추하고 좁은 방에서 까만 봉지에 담긴 김밥 한 줄을 꺼내 맛있게 먹었을 그녀의 삼촌을 생각했다. 아마도 소주 한 병, 오뎅 국물도 함께 마셨으리라. 아줌마 국물 많이 주세요. 멸시와 천대의 눈빛을 견디는 생활 속에 작은 위안이 되어준 뜨거운 오뎅 국물과 단단히 말아 싼 김밥 한 줄, 그리고 소주 한 잔. 힘겨운 노동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하루하루 견디며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던 어느 순박한 외국인 노동자의 고단한 인생이 주마등처럼 펼쳐지며 지나갔다.

     

구한말, 풍전등화처럼 흔들리던 나라를 야곰 야곰 팔아먹는 댓가로 호위호식하던 일부 친일파들 말고, 어느 누구인들 따스한 보금자리에서 안락한 생활을 영위했겠을까. 멕시코로 떠나던 자들에게  빈 곳간을 지키던 허울 뿐인 '제국'은 희망 없는 땅이었다. 군인들은 급료를 받지 못했고, 황족이 굴레가 된 가문은 끝내 목까지 차오르던 시퍼런 칼날의 위협을 견딜 수 없었다. 왕을 지키던 내시는 갈곳이 없어졌고, 순교를 강요받은 신부는 신분을 감추고 어디로든 떠나야 했다. 미풍처럼 불어오던 개화의 바람은 버려진 소년과 소녀들에게 미지의 땅을 향한 달뜬 경외와 희망을 불러왔다. 그리고 도둑과 무당 역관들,  제 땅에서는 스스로 버려졌다고 여긴 1033명이 있었다. 

     

우리는 가끔 꿈을 꾸듯 떠남을 동경한다. 현실이 비루할 때, 발붙인 땅에서 풀 한포기조차 자랄 수 없이 황폐하다고 느낄 때, 쳇바퀴처럼 늘 제자리인 현실이 감옥처럼 답답할 때, 바다 건너 멀고 먼 반대쪽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위안이 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두려움과 불안을 이길 때,  이 정든 세계를 정녕 떨치고 떠나야할 만큼 현재와 미래가 절망적일 때, 가슴 터지도록 두려움과 설레임을 가득 안고 떠날 수 있다. 더도 덜도 말고 죽을만큼 열심히 일하면 많은 돈을 벌어 돌아와서 먹고 살 한 조각의 내 땅을 살 수 있다는 소박한 바람이 이루어지리라 철썩같이 믿고 희망 가득한 미래를 그리며 떠나는 배에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질 채찍질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신분제 사회에서 살아왔건만, 사람과 짐승과는 구분하는 사회에서만 살아왔기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지던 채찍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채찍 문화가 전혀 없던 조선인들에게 그것은 굴욕이기 이전에 놀라움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이 굴욕이라는 걸 알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는 얘기다. 중략. 마소에게나 휘두르는 채찍을 사람에게 휘두를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p126

     

산허리를 돌아 계곡을 건너 그늘과 물소리 새소리가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 굴곡진 땅만 알고 있던 그들에게 뜨거운 태양을 가릴 아무 것도 서 있지 않은,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그대로 드러낸 황량한 멕시코의 땅은 얼마나 이질적이었을까.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했던 지형, 공기, 언어, 관습, 문화, 먹거리들은 그들이 아무 필터 없이 맞닥쳐야 했던 당혹스런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달 몇일을 거친 파도에 흔들리는 차가운 화물선 바닥에서 영역 싸움을 하는 짐승들처럼 자신의 몸 하나 누일 곳을 지키며 견디고 또 견뎌 찾아온 낯선 땅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 그 이질감과 낯섬 뿐이었으면 얼마나 다행이었을텐가. 미지의 땅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실상 노예와 다름 없는 계약 노예임을 깨닫기까지는 도착한 후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흑인 노예들처럼 줄지어져서 팔려나갔고, 오로지 먹기 위해, 아주 보잘 것 없는 까슬까슬한 옥수수 낱알로 만든 음식을 아주 조금 먹기 위해 온몸이 터지고 깨지고 피가 흐르고 진물이 나고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일해야 했다. 

     

초가삼간보다 못한, 흙바닥 토굴같은 집에서 웅크려 앉아 밥을 먹던 황족의 가장은 돌아 앉아 책을 읽고 버티며 배달되지 못할 편지를 황제에게 썼고, 아버지를 대신해 열여섯 아들은 싫어도 할 수 없이 가장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1033명의 개인이 그곳에 모질게 스며들었다. 박수무당은 신을 부르고 굿을 했다. 전직 역관은 스페인어를 배워 통역사가 되었다. 도둑은 도둑질을 하다가 관리자가 되어 농장주의 편에 섰다. 계약 기간이 끝났어도, 계약 노예에서 해방되었어도,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갈 돈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고, 돌아갈 고국도 없었다. 노예가 되어 고통스럽게 에네켄 잎을 베는 동안 고국은 사라져버렸다. 혁명의 불길이 남미를 덮쳤을 때, 황제의 군인들이었던 사람들은 흩어져 용병이 되어 고귀한 혁명 정신 대신 돈을 위해 싸웠다. 말이 없던 사내는 이발사가 되어 혁명가의 머리를 잘라주고 혁명가의 오른팔이 되었다. 노루피 냄새가 나던 황족의 딸은 끓어 넘치던 청춘의 열정을 소년에게 바치고 둘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만나지 못해 애타게 서로를 찾아 헤맸다. 

     

조금씩 그들이 가진 조선의 정체성은 희석되어 갔고, 서로를 무섭게 할퀴던 역동의 시간들이 지나, 마야족, 스페인족 두루두루 섞여 2세와 3세들이 태어났으리라. 사유하지 않는 건조한 문체가 소설을 연결하는 매체가 되었다고 해서, 그 방대한 이야기 속에 사유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한 권의 책으로 알려준 책. 사랑의 밀어가 없다고 해서 사랑의 절절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책. 문단 내에서 흡수되어 사라진 행간 속의 이야기는 시간의 간극을 넘어 아득한 상상 속에서 더욱 더 풍부한 서사를 담는다.  

     

박정훈이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데리고 이발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정은 메리다로 돌아갔다. 귓전에 다시 셀라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p348

 

대사 없이, 배경 음악도 없이, 눈물도 없이, 붉게 변해 가던 코끝 찡한  이별 장면이 더 먹먹하게 오래도록 남듯이 건조한 문체의 행간 사이로 끝내 사랑조차 엇갈린 남녀의 운명적 사랑은 그 말없음과 생략 속에 속절없이 더욱 애절하게 다가와 가슴에 닿는다. 그들의 사랑이 말없이 그렇게 막을 내릴때, 평생을 두고 이루어지지 못한 바람이 덧없는 인생 삶의 무게에 스러져갈 때, 독자는 공백으로 사라진 문장을 대신해서 그들의 삶을 채웠다.  수없이 많은 시간 속에 세대가 거듭 바뀌며 천천히 동화되어 갔을 그들 1033명 개개인의 스스로 이야기, 행간 속의 생략된 이야기를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완성했다.   


책을 읽고 난 후,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그들이 뿌리내린 곳에 제물포 거리라는 곳이 있었다. 고향을 잊지 못해 제물포 제물포 매일 노래를 부르던 망향민이 식당 이름을 제물포로 지었고, 어느 샌가 한인들이 모여들었을테지. 그리고 거리 이름이 제물포 거리가 되었다. 공간 이동을 한다고 해도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이 떠나온 제물포는 과거의 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 향수는 이루지 못할 상상이고 실현되지 않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모두 과거로부터 쫓겨난 망명객들이다. 아마도 제물포 식당에서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고향을 못잊고 고향에서 먹던 음식들을 멕시칸 음식에 섞어 팔았겠지. 그 때 그 모진 노예 생활을 끝낸 후 운좋게 돈을 모아 해방된 고국, 반토막나고 다시 또 서로 적이 되어 싸웠던 모진 역사 속으로 저벅저벅 돌아온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다시 멕시코의 뜨거운 햇볕과 지평선을 가슴에 품고 살아갔을 지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그는 벌어온 돈으로 작은 포장마차를 열었으리라, 그가 포장마차에서 팔기 시작한 음식 속에는 머나먼 땅 모진 시간을 견디게 했던, 김밥처럼 단단하게 허기진 뱃속을 채우던 멕시코 음식의 자취가 남아있었으리라.  어쩌면 떡볶이 속에, 어쩌면 흔한 야채 튀김 속에 다시 떠나 그리움이 되고 향수가 되어 버린 또다른 종류의 망향민의 먼 과거 속 자취가 담겨 아득하게 우리 삶에 스며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 서울대생 1100명을 심층조사한 교육 탐사 프로젝트
이혜정 지음 / 다산에듀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크게 실용적 부분과 정치적 부분 두 파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한 방법을 서울대 A+ 학생들 1천여명의 설문에서 끌어낸 실용서이다. 다른 하나는 이 결과로부터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은 인문사회 책이다.  첫 파트는 서울대 최우등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를 해서 그 높은 학점 유지할 수 있었던게 대한 설문 내용을 자세히 싣고 있고, 점수를 잘 받기 위해 국내 최고의 우등생들이 공부하는 방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나머지 부분은 이러한 서울대의 학생들이 미시간 학생들과 비교해 볼때 교육적으로 어떻게 다른가에 대회 사회적으로 분석해보고 문제점을 짚어보는 교육 비판적인 내용이다.  물론 제목과는 달리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를 하면 A+를 받을 것인가 하는 게 이 책에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최우등 학생들의 설문 내용을 바탕으로 수용적 교육이 만연한 한국식 대학 교육을 분석하고, 성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목적도 그것이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A+를 받는 학생들의 비결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A+를 받고 싶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같다. 하나는 교육의 대상자인 학생들을 위해, 또 하나는 교육을 실행하는 교수들과 정책 및 입안담당자들을 위해 국내 교육 현실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내용인데. 학생인 아들과 교육자인 남편 둘 중 누구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하고 싶으냐 하면, 성적이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대학생 아들이다. 


첫번째 파트에서 다룬 내용은 학점 관리가 잘 되지 않거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도 학점이 제대로 안나오는 대학생들에게 우등생의 공부법을 모방함으로써, 성적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매우 실질적인 내용들을이다. 나 역시 대학을 다닐 때 시험장에서 시험지를 받아들고는 그 텅빈 백지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막막했던 기억을 아직까지 악몽처럼 트라우마적 기억으로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학교에서 시험지를 메우고 점수를 받는 일은 일생 중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마도이 책을 읽었다면 그때 성적을 조금 더 잘 받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 비결이 있으나, 가장 압도적인 방법은 교수가 하는 말을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속기사처럼 받아적으며, 심지어는 농담이나 기침소리까지 필기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나름대로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데, 우리 언어의 속성에는 글성이 강한 글과 말성이 강한 글이 있는데, 말성이 강한 글은 쉽게 이해되기 때문에 1차 필기에는 자기 방식대로 정리해서 요점만 적는 것보다는 교수가 말하는 말성이 그대로 전달되도록 그대로 적어야 한다는 거다. 수업시간에 교수의 말소리를 그대로 필기하고 나면 심지어는 당시에 이해가 안되던 부분이라도 복습을 하면서 이해가 되기도 하고, 특히 수업시간에 이해한 내용을 그대로 재현해 내기 때문에 교수의 지식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대다수 노트필기를 자세히 하는 서울대 우등생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이다. 들을 때는 이해한 듯 싶어 요점만 적고 나면, 추후 복습을 할 때, 자세한 사항이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들은 교수의 설명 그대로를 재현해 내기 어려울 수가 있을 것이다. 


두번째 정치적인 부분이라고 내가 말한 부분은 한국의 교육 현실을 미국의 교육 현실과 비교해서 비판하는 내용이다. 서울대 우등생들의 설문 결과와 미시간 대학생들의 설문 결과를  비교, 차이점을 분석하면서, 특히 수용적 능력이 창의적/비판적 능력에 비해 월등하게 우세하다고 느끼는 한국 학생들의 차이가 실질적인 교육철학과 제도, 교습 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학생들이 노트필기를 그렇게 자세히 하면서 교수의 수업내용에만 의존해서 수용적 방식에 의존하는 식의 공부방법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각계 각층의 리더를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서울대학교 교육 취지에 그러한 방식의 수용적 공부방법이 옳지 않으며, 그러한 공부 방식이 성공하는 이유는 바로 교수들이 그런 수용적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수용적 태도는 예능학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드러내지 않고 교수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성적에 유리하기 때문에,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모든 예체능학과에서 지도교수의 취향에 맞는 예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체능과 인문, 공학 할 것 없이 비판적이거나 창의적인 내용이 답안지에 추가되면 감점 요인이 되며, 이러한 학습 방법이 낮은 창의력을 갖는 인재들을 사회로 배출하고, 결국은 국가 경쟁력을 낮추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저자의 생각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수긍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다른 의견을 갖는다. 일단 창의력이나 비판적을 객관적으로 비교할만한 잣대가 없다. 설문 내용은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결과 즉, 자신이 수용적 능력이 더 강한가 비판적/창의적 능력이 강한가에 대한 결과를 가지고 논쟁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사실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창의력이 낮다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음에도 그 결정적 근거로서는 약하다는 사실이다.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유교적 관습이 공공장소에서 남에게 누가 되는 행위를 자제하게 만드는 문화 혹은 너무 내다거나 잘난척하는 부류를 싫어하는 문화적 특징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 기자가 오바마의 특별 배려에도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는 일화를 일반화시켜 갖다 붙이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라는 생각이다. 그건 그냥 거기 나간 기자들이 똘아이들이기 때문이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판능력과 창의성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왜 그 일화가 번번히 이런 종류의 책에 계속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자학하는 방식으로 등장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되고 화가 난다. 물론 우리나라 학회가 외국의 학회에 비해 질문도 거의 없긴 하지만, 학회 내 교수들의 권위적인 태도에 주눅든 일반 대학원 학생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학생과 교수 사이가 비교적 자유롭고 친구처럼 형성되는 외국(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과는 문화적 차이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하크네스 테이블의 예를 들어 문제를 끌어내는 방식의 수업을 예찬하였는데, 정말 좋은 방법이라 하더라도, 그런 질높은 교육의 혜택이 모든 아이와 학생들에게 돌아가게 할 만큼의 예산이 있는가? 하크네스 방식의 수업은 6~12명 이내의 그룹당 한 명의 교사가 필요한데, 만일 그런 교육적 혜택이 모든 학생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하려면 인구 몇 명당 한 명의 교사가 필요할 것이며, 그런 종류의 질높은 토론 수업을 이끌만한 '훌륭한 교사'의 월급을 어디에서 충당할 것인가 하는 다층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또한 저자 자신의 아이가 학원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를 알고 보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가르친다며 분개했는데, 진정 '질높은' 교육을 원한다면 어느 면에서는 그 높은 질의 교육에 적합한 질높은 아이들의 선발권을 인정해야 하고, 만족스런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 공교육 대신 선택한 사설 학원은 거기에 맞춰 교육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어쨌든 특목고에서 우수 학생 선발권을 준 것도 그런 '질높은' 특목고에 보내기 위해 학원을 보내는 선택도 모두 '자유'라는 바탕위에서 만들어진 부작용인 것이다. 


공교육이 잘못되었다. 바뀌어야 된다 라고 하는 건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창의성과 비판력을 저해하는 교육을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건, 2009년 미국에 잠시 머물렀었는데, 그 때 TV에서 오바마가  토론 중 했던 말이 한국의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말을 한두번 한 게 아니다. 한국의 의료제도, 한국의 교육제도, 한국의 자동차 산업. 한국을 봐라. 받아들일 걸 받아들이자. 오바마가 그 유창한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는 걸 나는 들었다.  모든 아이들이 일정 수준의 수학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한국을 벤치마크 해서 낙후된 미국의 교육을 바로 잡아야 된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는 거다. 이건 TV에서 생방으로 직접 들은 말이다. 한국에 대해 본받아야 한다고 했던 건 교육 뿐만 아니었다. 제한된 예산과 현실적인 여건 하에서 보완적 교육을 찾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 한입 더 - 철학자 편
데이비드 에드먼즈 & 나이절 워버턴 지음, 노승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나만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은 자신이 무지한 대상에 대해 적대적이다. 인간 관계에서도 일단 한 번이라도 말을 섞고 나면 그 사람에게 가졌던 무언의 경계가 풀리면서 알게 모르게 형성되었던 적대감이 없어지듯, 학문이나 개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철학이 내게 적대적인 건 내가 철학을 모르기 때문이고, 그래서 내가 먼저 철학에게 적대적인 표정으로 으르렁거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금 더 알려는 노력을 한다면, 그래서 일단 철학과 한 마디라도 말을 섞고 나면 달라질 지도 모른다. 


의인화는 여기까지. "철학님,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철학 한 입 더>는 그동안 같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눈길이라도 우연히 부딪칠까 줄곳 메시지도 없는 휴대폰만 들이다보며 눈길을 피하던 낯선 이웃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눈빛을 마주하고 말을 건네는 작은 관심이다. 


영미권 언어는 이래저래 장점이 많다. 이런 주제로, 딱딱한 철학을 굳이 뼈대와 핵심을 제거해 대중의 언어로 노골노골하게 변형시켜 원형의 형체도 모르게 바꾸지 않고도, 팟캐스트 방송을 수년동안 지속하고 기록적인 다운로드를 갱신하며, 책으로 써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먼 나라의 번역판으로까지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대중을 위한 철학서, 인류 역사를 통으로 훑으며 획을 그은 철학자들의 핵심 사상을 살짝 살짝 한입씩 맛만 보게 하면서도, 그 어려운 개념들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철학의 철학을 버리지 않았다. 핵심을 비켜가, 에세이류의 말랑말랑한 정서적 치유를 지향하지 않고 철학적 개념을 이야기한다. 


표지 맨 앞장은 사과 한 입 아니 두 입을 베어먹는 그림이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페이지에 가면 사과를 모두 다 먹고 씨대만 남은 그림이 나온다. 이 그림은 책을 통해 철학이라는 사과를 한입 한입 베어먹다가 사과 한 알을 다 먹는다 라고 전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마지막 그림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림 속에는 사과 한 광주리가 있는데 그 광주리에 담긴 모든 사과가 다 한입씩 베어문 사과. 그렇게 그림을 그린다면 이 책을 더 정확히 설명해주는 것 같다. 한 입 베어문 철학자의 어떤 사상. 그것으로 그 철학자의 사상 전체의 맛을 다 알 수도 없고, 배도 부르지 않지만, 한 입이라도 먹어본 자만이 그 사과의 맛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세상에 사과는 세상의 사과나무만큼 많이 있으므로, 같은 시간 내에 한 광주리의 사과라도 골고루 먹어보려면 한 입씩 베어먹어보면 된다. 철학 한 입으로 진리를 깨닫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인류가 진리를 찾아 조금씩 걸어간 그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 그 찾기 과정이 일보 일보 진전으로만 이루어졌는지, 지금 현재 진보하고 있는 것인지.. 때떄로 후퇴와 후퇴를 거듭해서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와 원시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게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제껐 걸어왔고 계속해서 걷고 있다는 것이, 그 자취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첫장에는 (현존) 철학자들(팟캐스트 출연진)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철학자에 대한 기습 설문(?) 내용을 다룬다. 20%의 철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철학가로 데이비드 흄을 꼽았고, 편집부에서는 이를 조금 의아한 결과라고 한다. 철학과 안친한 사람들에겐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뭐 조금 더 많이 들어본 철학자가 아니라고 해도 별로 의아할 것도 없다. 세어보니 흄 외에도 눈에 띄는, 철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들은 니체, 칸트, 비트겐슈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섯명 이상의 표를 득표했고, 니체 벤덤 존 슈투어트 밀도 세 표 이상씩 득표했다. 좋아하는 이유는 뭐 훌륭하다는 거다.  


철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책을 읽고 난 후 책에 소개된 철학자 중 가장 흥미있는 철학자를 대라고 한다면 분명 데이비드 흄은 아니다. 사실 독자로서는 그들의 사상보다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방법에 따라 흥미가 좌우된다.  인터뷰어들이 얼마나 흥미롭게 자신이 관심있는 철학자에 대한 소개를 대중에게 잘 어필했느냐 라는 것 말이다. 비유가 적절해서 그 철학자가 대표하는 사상을 아하! 하고 이해할 수 있는 꼭지를 독자로서는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은 헤겔의 변증법을 전달한 로버트 스틴의 말이 가장 도움이 되었다. 변증법, 변증법, 말로만 듣던 변증법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 2500년이 넘도록 자양분이 되어 온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을 시대 순으로 나열된 철학자들의 사상의 편린 속에서 확인했다. 팟캐스트에서 진행을 맡은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나이젤 워버턴 역시 철학자들이고, 매 회마다 바뀌는 대담 대상자들도 모두 대담 속 인물을 연구한 현존 철학자들이다. 여러 해 동안의 대담을 책으로 엮은 것이고, 이미 <철학 한 입>이 전편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 마이클 샌달에게서 가끔 들었던 공리주의 철학자와 관계있는 존 롤스가 그나마 이해하기가 쉬었고, 샤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은 한 입만으로도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대체로 윤리와 도덕, 정치와 같은 현실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실용적인 내용을 담은 철학은 아무래도 이해가 쉬웠지만, 18세기 이전의 철학들은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다루는 철학은,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해서 시대를 따라 올라오면서 대표적 철학자의 대표적 사상에 대해 대담한 내용을 텍스트로 바꾼 것이다. 팟캐스트로 방송되었다고 하는데, 애플 기계가 없어서 아이튠즈에서는 확인 못했고, 안드로이드 팟빵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방법,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틱한 사랑,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몽테뉴, 데카르트의 코기토,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념에 대해, 존 로크가 말하는 관용, 데이비드 흄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버클리의 수수께끼,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인간 본성, 루소가 말하는 현대 사회, 에드먼드 버크가 말하는 정치학, 칸트의 형이상학,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 존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키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 니체가 말하는 예술과 진리에 대해, 헨리 시지윅의 윤리학에 관해, 실용주의와 진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샤르트르의 실존주의, 하이에크 자유주의, 존 롤스가 말하는 정의, 자크 데리다가 말하는 용서에 대해 총 23명의 철학자와의 대담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