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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2015년 1월, 비판과 풍자로 만평 작품을 게재해온 《샤를리 에브도》회의실은 중무장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받았다. 이 총격으로 프랑스의 대표적 만평가들을 포함한 언론인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공교롭게도 사건은 미쉘 우웨벡의 이 책 《복종》이 출간되던 날 발생했고, 피해자 중에는 우엘벡의 친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폭력적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세력이 커져가는 것을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될 중대 정책적 결정을 내려야 할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질은 단순하지 않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왜 샤를리 에도브를 공격했을까. 그들이 믿는 신을 모욕했기 때문이다. 목숨처럼 떠받드는 그들 소수 이민자들의 신을 카톨릭과 기독교와 무신론자들이 대다수 사는 땅에서 믿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프랑스는 한 때 이슬람의 여성 복장인 부르카 착용 금자법안을 놓고 여성의 인권 억압과 종교적 원칙이라는 두 상이한 가치로 세상을 분열시키기도 했다. 그들은 왜 그들 사회 내의 이슬람들을 눈의 가시처럼 여기는가. 남녀 차별적 가치관이 거대한 뿌리로 박혀 흔들리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그로 인한 일부다처와 부르카 착용의 관습의 이질적 문화가 토박이 유럽인들의 눈에는 공정하지도, 편치도 않을 것임이 당연하다.
원인과 결과는 서로 순환한다. 하지만 두 집단은 통하는 게 있다. 프랑스의 극우들은 이민자들을 싫어하고, 이슬람인들은 여성을 억압한다. 그들은 모두에게 타고난 권리를 태생적 우월함으로 해석하고, 힘없거나 소수자들에게서 그들에게도 똑같이 누려야 할 권리를 신의 이름으로, 선진화된 가치관이라는 핑계로 빼앗는다. 남녀 평등의 가치관이 문화로 완전히 정착한 나라라고 해서 그들의 문화가 그 어떤 다른 문화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는가. 지구상에 남성이 우월한 위치를 차지한 집단도 있고, 여성이 지배하는 집단도 있으면 안되는건가. 한 집단의 가치관은 다른 집단의 가치관을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 종종 우리는 국력과 경제적 풍요를 문화의 우월함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건 아닐까.
유튜브에는 <무슬람 데모그라픽스>라는 흥미로운 영상 하나가 돌아다니는데, 그 주장은 이렇다. 어떤 문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구당 평균 2명 이상의 출산률이 필요하고, 유럽 연합의 여러 나라들은 이러한 출생률에 못미치기 때문에 대안으로 이민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유입 인구의 대다수인 이슬람들의 출생률은 8%를 상회하며,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의 몇몇 나라는 이미 50% 이상의 신생아가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나고,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면 37년 내에 유럽 전체가 이슬람 공화국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강한 어조로 다큐 프로그램처럼 담은 비디오다. 이 비디오의 주장과는 달리 (확증할 수는 없으나) 실제로 유럽 각국의 이슬람 인구는 4~6%에 불과하고, 터키와 이집트 등 유럽으로 유입되는 이슬람권 나라 본국의 출생률은 세계 평균인 2.5%에도 크게 못미친다. 이런 왜곡된 동영상을 올려, 무언가를 선동하려는 이유는 뭘까. ‘누구’인지는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왜 라는 대답은 쉽게 예상가능하다. 그들은 섞이는 게 싫은 것이다. 이슬람 문화가 유럽과 자국 깊이 침투해 들어오는 현상이 못마땅한 것이다. 이 추세로 가면 유럽 연합이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뀔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함으로써, 이민정책을 바꾸고 그들 땅에 들어온 이방인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히틀러가 1차 대전 패망의 이유를 유태인에서 찾은 경험을 돌이켜보면 등줄기가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는 비디오다.
소수민으로서 보이지 않는 억압과 불평등 속에서 민족과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고 사는 이슬람 이민자들이 유럽에서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있을 턱이 있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에밀 보렐의 이론에 따르면, 불사의 무한 원숭이가 사는 무한 가능성의 우주에서는 원숭이가 누른 키보드 철자들의 우연한 조합이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쓸 수도 있다지 않은가. 그러니 미래의 세상이 지금과는 어떻게 다르게 될지를 상상하는 것은 무한 가능성의 세계이다. 유태인들이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기까지 히틀러의 생각을 지배한 배경에, 선량한 (유태인) 개인의 삶이 관여하지 않았다. 강렬한 책의 표지와 제목 때문에 끌리는 책이었지만 읽을까 말까를 고민했다. 어떤 정치 사회적 조합의 우연성이 선택하는 미래 세상의 돌출된 가상의 이미지가 특정 종교를 왜곡하고 비난하지는 않을까.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미지를 훼손시키기 위해 여성 억압을 강조하고 그 종교의 비합리적인 부분을 부각시킴으로서, 인종 차별적이고 문화 우월적 생각을 교묘하게 미화시킨 위장은 아닐까. 미쉘 우엘벡이 공공연하게 이슬람교에 대한 부정적 발언을 해왔다고 한다는 사실은 책을 읽고 나중에 알았지만, 영예로운 콩쿠르 상까지 수상한 본인의 명성과 문학성을 손상시켜가며 앞서 왜곡된 시각을 작품에 심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이 앞섰다. 위장은 기우였지만 책은 더욱 심층적이고 다면적 고민을 안겨주었다.
정확히는 2022년이다. 우웰벡이 창조해낸 이슬람 프랑스 정권의 탄생은 앞으로 7년 후의 일이다. 사실 7년이라면 ‘팽창하는 이슬람 인구’라는 관점에서 이슬람 정권의 탄생을 설명하기에는 크게 부족하다. 우웰벡은 보다 우아하고 지적인 방법으로 프랑스의 현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사회를 변형시키는 힘은 다름 아닌 시스템 자체의 모순에 따른 스스로의 붕괴에 가까워 보인다. 현재라는 거울이 비친 미래에 가장 큰 가능성은 그런 종류의 것이다. 우와 좌의 반목과 대립은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그 반목의 원인은 아이러닉하게도 극우 세력의 확대와 포화점에 이른 성장기반의 경제체제다. 성장둔화, 빈부격차, 파산 직전까지 다다른 국가 채무, 청년 실업. 누구는 너무나도 못살고 누구는 너무나도 못사는 걸 참을 수 없었던 마르크스 혁명과 달리, 이제 민주적 절차에 의한 자발적 선택이 혁명적 결과를 수반한다. 성장의 병목 지점 맨 끝에서 갈 길을 잃은 체제는 이제껏 해온 어떤 온건한 정책으로도 극복 불가능한 것이 된다. 복종에서는 프랑스의 머지 않은 미래의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의 온건적 정책이 낡은 시스템의 모순과 부작용을 견뎌내지 못하고 스러지고 타협하는 과정을 담았다. 어떤 식으로도 체제를 바꾸기를 원하는 극우의 국민전선당이 오른쪽에 선 국민들의 선택지가 되면, 실패한 사회당은 물론이고 모든 오합지졸들이 힘을 모아 좌파 정권을 탄생시킨다. 다른 대안은 없다. 인류사에 극우의 민족주의 정권들이 어떤 종류의 전쟁과 학살을 자행했는지는 이미 겨우 한 세기 전에 경험하지 않았는가. 그 오합지졸들의 선두가 이슬람박애당이라는 이름으로 극우의 국민전선과 경합하여 이겼다.
기존의 가치관들이 깨어지는 과정은 때로 급작스럽다. 권력 투쟁의 선두를 지위한 어떤 급격하고 이질적인 사상은 던처럼 돌처럼 날아와 투명한 유리창을 쫙 쪼개며 깨뜨린다. 선거 전부터 전운을 감지한 언론들은 입을 닫고,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긴치마를 입고, 부르카를 입은 여학생들은 '복도 벽 쪽에 붙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들이 이 땅의 여주인인양 셋이서 나란히 한가운데로(p96)’ 걷는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사는 우리 인간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만 그런 과정을 묵도하지만, 천천히 스민 삶 속에서 문득 깨닫게 되는 경우도 많다. 목전의 변화는 빠르게 받아들이지 못해도, 시간의 설득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되는가. 수천년에 걸쳐 공들여 쌓아가고 있는 여성인권의 평등이라는 공든탑이 폭력이 아닌 민주적 선택에 우르르 무너지는 것이 가능한가. 만일 청년 실업이 만연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남녀 평등의 사회 가치가 강요하는 것이 값싼 노동을 짊어지고 사회의 어두운 구석에 루저의 옷을 입고 처박히는 선택지만을 강요한다면 남자든 여자든 차라리 ‘가정‘이라는 포근한 이름표를 달고 그 작은 안락한 곳에서 모든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의 노예가 되는 편을 선택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는가.
각 공립대학은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예산을 확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석유 제국은 유럽 대학의 역사와 명예를 원하고, 대학은 석유제국의 돈이 필요하다. 명예와 돈, 대학을 지키는 이 두 요소는 파리의 소르본 공립대학이 이슬람 사립 대학으로 전환하고 학제로서 인정받게 하는 정책적 결정으로 만나게 된다. 부르카 착용, 개종 등의 민감한 문제들이 선행조건이지만, 교수들에게 제안되는 엄청난 대우와 연봉은 개종이라는 부담을 상쇄시킨다. 더욱이 해직 후 맛보았던 오랜 기간의 고독감과 상실감, 그리고 몸담고 있던 사회의 빠른 이슬람화라는 변화는 추후 제공되는 대학 총장의 재임명 제안을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던진다.
그럼에도 나는 자살을 분명히, 가깝게 느꼈다. 절망감이나 심지어 특별한 슬픔을 느껴서가 아니라, 단지 비샤가 말한 “죽음에 저항하는 활동의 총체”가 서서히 쇠락하고 있었기 때문에.(p251)
저자는 인터뷰에서 이 책이 이슬람 혐오를 담은 소설은 아니라고 했다. 샤를리 에도브 에서와 같은 직접적인 풍자와 비난은 없다. 이슬람교에서 추구하는 신에 대한 인간의 복종이, 남자에 대한 여자의 복종과 동일한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신임 총장의 설명과 이를 받아들이는 화자이자 주인공 교수의 대화는 충격적이다. 이 때 '복종'은 신에 대한 복종이자,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이자, 주인공의 이 모든 변화와 새로운 체제에 대한 복종이다. 이슬람이 정권을 잡자 사회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실업률 감소와 국가 경제 활성화, 국가 예산 절감 등의 여러 목표가 이슬람당의 승리로 인한 변화다. 여성의 잠재 노동력이 실업 수당 대신 가족 수당으로의 전환으로 인해 실업률이 감소하고 석유 강국들에게서 흘러들어오는 막대한 자금이 (사립) 교육을 책임지므로 정부는 작고 단단해진다. 기존의 가치관을 침묵으로 억제하고 복종으로 화답한다면 오늘날 모든 정체된 선진국들이 갖는 문제들을 단 한 방에 날려줄 최고의 대안이 된 것이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저명한 교수는 학기초마다 섹스파트너로 학생들을 바꿔가던 수고가 필요없이 마담뚜가 발가벗겨 엄중하게 심사한 더 어리고 더 에쁜 소녀들을 동시에 네 명이나 소유할 수 있다. 기차에서 본 이슬람의 어린 부인들이 사업상 통화에 여념이 없는 늙은 남편을 사이에 끼고 무거운 밥벌이의 의무를 면제받은 채 천진하게 까르륵 거리던 모습처럼 복종의 대가는 교수에게도 달콤하다.
이것이 진정 이슬람교의 원칙이며 가치라면 아마도 이 소설은 이슬람 혐오 소설이 아닌, 이슬람 홍보 소설일 것이다. 그러나 우웰벡은 샤를리 에도브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홍보 활동을 접고 프랑스를 떠났다. 이 소설이 비록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그린 미래처럼 감시와 폭력으로 얼룩진 끔찍하고 암울하기만 한 미래를 그린 것은 아니지만, 분명 오늘의 프랑스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섬뜩한 불안을 안겨주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선조들은 프랑스의 식민지 치하에서 또 그들의 후손들은 본토의 청년들이 마다하는 힘겨운 노동을 위해 이주하여 자신의 가족 내에서 종교가 가진 긍정적 가치들을 섬기며 선량하게 살아가는 모로코, 알제리, 터키, 튀니즈 계의 이슬람인들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될 지를 우리는 아직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