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비아토르의 독서노트
이석연 편저 / 와이즈베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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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의 말이 강한 메시지와 울림을 줄 때가 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적거나 줄을 긋는다. 깨달음을 붙잡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글자로, 밑줄로, 기억으로 남긴다.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을 계속 걸어가도 될 것인가. 혹 습관처럼 매일 하는  행동이 혹시 잘못된  건 아닌가 의심과 선택의 기준은 어디에서 나올까.  삶의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시기에 그 기준은 선생님이나 부모님과 같은 어른들에게서 받은 세계관이 될 때도 있지만,  책은 가장 가까이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  먼 옛날부터 2천년을 넘게  오래도록 살아  남은 선조들의 가치 철학들에서 옮겨 적은 삶의 기준은  결단의 순간마다 내가 내 자신이 되도록 도와주는 등불이 될 수 있다. 훌륭한 명언이 주는 메시지가 파동이 되어 인생을 살아가는 원천이 되기도 하고, 때로 삶을 헤치는 지혜가 되기도 한다. 


책은 책이다. 일기장은 일기장이다. 노트는 노트다. 각자의 목적은 다르다. 이들의 목적에 대해 다시 토론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노트다. 책인데 노트다. 무슨 말이냐 하면, 책을 읽고 뭐 아주 엄청나게 감명받은 내용을 노트에 적었는데, 그 내용을 그대로 아무 사견 없이 노트 내용을 책으로 '잘' 엮은 것이다. 여기서 '잘'은 여백의 미를 잘 활용했다는 뜻이다. 여백이 많다보니 내용(글자수)에 비해 책의 두께가 엄청 두껍다. 일반책처럼 편집했으면 1/3 정도로 압축 가능했을 것 같은데, 두꺼워서  뽀대난다. 그리고 두꺼워서 비싸진다. 


어릴 때도 이런 책이 집에 있었다. 각종 명언들만 모아 놓은 책들. 대개는 출판사에서 기획하지만, 이 책은 독서광으로 알려진 이석연 변호사가 직접 자신의 노트에서 골라 뽑은 것들이다.  영국에서 '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건강 프로그램이 유행했었다고 하는데, '먹는 것' 대신 온갖 다른 것들을 넣어도 말이 된다. 구글에서 you are what you 까지 입력하면 더 그럴 듯한 것들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 나는 You are what you belive 라는 말이 쫌 맘에 든다.  내가 최초는 아니겠지만 나는,  'You are what you read'라고 생각한다. 


무슨 책을 읽고 사는지, 그의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을 조금 알 수 있다. 그가 읽은 책의 어디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조금 더 알 수 있다.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그 책과 소통하고 교류하여 자신만의 생각을 자기만의 언어로 다시 엮어낸다면 그 사람을 만나 10분동안, 혹은 1시간 동안이라고 하더라도 돌아서면 잊어버릴 호구조사 따위의 빤한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그의 일부 측면에 대해 훨씬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다. 그의 생각 혹은 그의 가치관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책은 저자를 조금에서 더 알려준다. 이 책에 저자 자신의 언어는 서두 밖에 없다. 말하자면 출판사의 편집인 같다고나 할까. 얼굴 없는데, 이름은 있는. 아니다 이름은 있는데, 저자의 생각(가치관)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책을 읽었는지, 그 책의 어느 부분에 밑줄을 그었는지를 읽으니 대략, 어떤 인생을 추구하고 있는지가 그려진다.  그래서 그가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대략 추측할 수 있다. 1부는 법률, 역사, 리더쉽에 관련된 명언집이다. 사마천, 세익스피어, 칼릴 지브란, 센델의 말들 법률 부분에,  헤로도토스, 에드워드 기번, 시오노 나나미, 이덕일, 유성룡, 마오쩌뚱 등이 역사 부분에, 월간조선을 비롯하여 논어와  링컨의 연설문들을 비롯한 다양한 출처에서 리더쉽에 대한 문장들을 가져왔다. 2부 역시 세가지 주제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에 비해 내용이 명확히 분류되지 않지만 처음(4장은)은 실패와 성공이라는 주제로, 5장은 야심, 욕망, 소유, 인생 등 전반적인 가치 철학에 대한 내용이고 6장은 글쓰기에 관련된 말이다. 6장이 가장 흥미로왔다.


제목인 호모 비아토르가 무슨 말인가 했는데 5장에서야 나온다. 비아토르란 떠도는 인간을 말하는 모양인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5>에 나오는 말이다. 호모 비아토르는 나그네 길에 머물 때 아름답다. 아르고 원정 대모험을 끝내고 이올코스에 정착한 그리스의 영웅 이아손의 뒤끝은 이렇듯이 누추하다. 영웅은 머물지 않는다.


앞뒤  문맥 없이 이 말만으로는 작가가 애지중지 노트에 옮겨적고 했던 만큼의 감동이 전해지지 않는다. 내게는. 


3부에서는 조금 노골노골한 주제들을 다룬다. 3부 부제도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이 있었던가>(이기철의 시 제목)이고, 3부 첫장인 7장은 인생의 고통에 대한 말들이다. 이웃 블로거 중 홈에 쓰는 문패에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라는 말을 달고 계신 분이 적**장님이라고 계신데, 나는 이 말이 코메디언 박명수가 라디오 방송에서 처음 한 걸로 알고 있었더만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생떽쥐베리의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거야. 근본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란다'도 이곳에 나온다. 법정 스님의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알지 않아도 될 일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가'라는 짧은 말도 마음을 만져준다. 공지영의 책 제목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불교 초기 경전인 수타니타파에 나오는 말인 것도 여기에서 알게 된다. 나는 절에 가면,무슨 소린지 알아먹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그나마 요즘은 잘 못듣지만) 스님들 독경 소리  잔잔한 음악처럼 너무 좋은데, 그 내용이 대략 이런 내용이었음에 놀란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불교 경전은 그토록 아름 다운 시였구나...

그리고 7장에는 법정스님의 독보적으로 많았다. 이어지는 8장은 예술적 상상력과 종교에 대한 말들이 주를 이루고, 9장은 배움에 대한 내용들이다. 1부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목적있는 글들이라면 2부, 3부가 훨씬 부드러운 살아가는 데 자잘한 지혜가 될만한 내용이다. 이런 류의 단편적인 글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이 자기계발적인 것보다는 후자에 더 관심이 많을 것 같아서, 순서를 바꾸었다면 더 나았을 것 같다. 


글자수로 따지면 얼마 안되기 때문에 맘잡고 읽으면 후루룩 1시간이면 족히 읽을 수 있지만, 서로 연결되지 않는 짧은 독립적 단문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틈틈히 조금씩 필요에 따라 주제를 정해 읽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쉴 새 없이 여기저기 아무거나 퍼다 나르는 카톡 친구에게 복수(혹은 보답)하기 위해 하나씩 베껴 써도 좋을 듯하다. 그런 면에서 사이즈와 책의 두께가 부담스러워 아쉽다. 포켓 사이즈로 종이도 얇은 것으로 사용했다면 휴대가 용이했을텐데. 1부는 쫌 별로였고 2부와 3부는 좋은 말들도 많았지만, 출처없이 떠돌던 흔한 말들의 출처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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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과학 - 오류와 편견, 논쟁 속에 숨은 진실 찾기
브라이언 클레그 지음, 홍성완 옮김 / 프리렉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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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상품과, 정보에 파묻혀 때로 숨쉬기가 힘들어질 때가 있다. 평범한 일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순간순간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고, 그 선택의 조건은 방금 전 인터넷에서 받은 정보, 어제 TV 고발 프로그램에서 본 정보, 몇일 전 신문의 건강 코너에서 본 정보, 그리고 책에서 본 정보들이 서로 다른 주장들을 하며 팽팽히 맞서는 형국에 부딪치기도 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정보인가. 햄릿 증후군은 마음이 나약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근거없는 학설, 정치적 사회적 목적으로 악의적으로 퍼트린 정보들은 언제느 우리 주변을 맴돌며 매연처럼 뿌옇게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우선 건강에 대해, 학교때 배운 지식과 그 이후에 연구된 새로운 학설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뿐더러,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주장하는 것들과 정반대의 상식들을 접할 때도 많다. 비타민 보충제는 도대체 먹으라는 소리인가 말라는 소리인가, 의사들끼리도 TV에서 서로 논쟁하는 걸 보면서, 단순히 살고자 하는 우리를 괴롭히는 이런 사소한 논쟁에서 멀어지려면 근거있는 증거를 찾기 위해 국회도서관에 들어앉아 평생 논문을 찾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엄마의 '손맛'을 뇌의 미각 시스템에 각인시켜온 MSG는 우리 세대에 자연의 맛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상한 음식의 맛을 복구하는 싸구려 식당의 맛으로 변해왔지만, 요즘 다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20년동안 안쓰고 살았는데, 각종 요리 프로그램과 블로그들에서는 조금만 넣어보면 맛의 새로운 차원이 온다고 말한다. 그렇게 후쿠오카 신이치의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읽은 내용을 상기해보면 글루탐산은 뇌안에서 신경전달물질을 주고 받을 때 쓰이는 신호물질로 뇌 안에서 합성된다. 한 때, 이러한 이유로 글루탐산나트륨이 뇌를 활성화시켜 머리가 좋아지는 것으로 인식되어 잘 팔린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량의 글루탐산이 뇌의 수용체들과 반응하는 것도 문제가 생기려니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뇌의 방어 시스템이 작동해 뇌 속으로 직접 흘러들어가는 일은 없다고 읽었다. 이제껏 안넣고 먹어도 잘 살았는데 괜찮다 괜찮다 하며 자꾸 부추기는 것은 영 달갑지 않다.

영국의 과학작가 브라이언 블레그는 <건강한 과학(원제목 : Science for Life)>에 건강과 음식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들을 백과사전처럼 엮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여러가지 건강 정보들을 하나씩 표제어로 골라, 무엇이 어떻게 검증된 것이고 무엇이 근거 없는 낭설인지를 밝힌다. 잘못된 고정관념과 진실과 반대되는 주장들, 그리고 조작되거나 악의적 목적으로 퍼뜨려진 사실들이 상품 판매의 미끼로서 조작되어 이용되는 것들을 하나씩 다룬다. 저자는 박사나 뭐 이런 학문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책을 많이 썼다. 그리고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영미권 과학저서가 대부분 갖는 수십페이지의 참고서적을 갖지 않는다. 많은 부분은 매우 상식적이고도 일반적인 내용으로 알고 있으나, 일부 사람들에게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마시는 자외선 차단제, 이어캔들, 동종요법, 과잉행동과 설탕과의 관계성, 척추교정술, 백신접종으로 인한 자폐증 주장, 체중감량제, 비타민C의 만병통치약설 등이 그것이다. 마시는 자외선차단제는 바르는 대신 마시면, 무슨 분자가 자외선 광자의 파동을 막아준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이고, 이어캔들은 캔들을 이용해 귓속에 있는 귀지와 각종 분비물을 배출한다는 건데 위험하게 들린다. 동종요법은 분자 하나도 거의 안남을 때까지 희석시킨 원인균 희석액을 약물로 이용해 치료한다는 거라는데, 영국 NHS는 팔랑귀인 모양인지, 이런 것들에게까지 지원했던 것 같다.

레드와인이 몸에 좋다고 하는 소문에 힘입어 어느 은퇴교수가 주장한, 매일 와인 한 병까지 마셔도 괜찮다는 설이 널리 퍼졌었던 모양인데, 그럴리가 없다. 항산화제와 비타민 는 많이 먹을 수록 좋다고 알고 있지만, 보충제를 많이 먹으면 체내에서 생산되는 항산화제의 양이 감소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저자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우리가 멀리하는 화학제품들을 옹호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MSG, 인공감미료, 각종 의약품 등이 그것이다. MSG는 천연에서 존재하는 성분이므로 해롭지 않고, 해롭다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고, 인공감미료의 경우는 아스파탐은 유럽에서 전적으로 안전하다고 명확한 과학적 합의에 도달했으며 아주 빨리 분해되고, 1980년대에 암공포를 야기시켰던 사카린 역시 오명이다. 설탕을 대치가능한 저칼로리 천연감미료 스테비아 나무 추출물인 트루비아, 레비아나는 더 많은 연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섭취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조언한다.

전체가 식생활, 운동, 뇌, 심리학, 건강, 환경, 즐거움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거의 대부분 건강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430여쪽에 거의 2쪽에 하나 꼴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깊이있는 정보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무엇이 근거 있는 것이고 무엇이 근거없는 것인지는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사전식으로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참고서적이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해서, MSG를 지지하고, 또한 우리가 약용으로 알고 있는 어떤 허브류의 식물에서 유효성분만 추출한 알약을 먹는 것이 해당 허브류를 직접 먹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저자의 주장 역시 완전하게 동의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과학적 근거는 맹검테스트를 포함한 정확한 실험으로 증명된 것만 말하는데, 그러한 과학이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상품화된 모든 것이 모두에게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알아서 유의해서 읽는다면, 한권 쯤 갖추어놓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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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2-11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전에 먹는 사과는 독이라는 통설은 사실무근이라는 어느 의사 분의 말을 듣고 그동안 사과를 먹지 않고 참고 잤던 밤들에 대해 화가 났었다능!

CREBBP 2015-12-12 16:49   좋아요 0 | URL
아침에 먹는 사과는 만병 통치약이라는 설도 있던데. 그 의사분 말이 또 전적으로 맞다고 할 수도 없구요. 그 분이 그 설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못봤다라는 거니 말입니다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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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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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코드 - 생명의 비밀을 풀어가는 유전체학의 새로운 시대
던 필드.닐 데이비스 지음, 김지원 옮김 / 반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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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유전자 관련 책을 읽었을 때 리뷰 중 유전체는 우리가 아주 일부만 이해할 수 있는 외계인의 언어로 된 책이 아닐까 하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이제 그 책이 외계인의 책이라면 우리는 외계의 언어를 꽤 많이 해독했으므로 그 해독된 부분을 단서로 해서 더욱 더 빠르게 책의 비밀이 밝혀지고 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 인간 유전체의 염기 서열을 밝혀냈을 때, 그 알쏭달쏭한 나선형 구조 속의 A,C,G,T의 순서가 인간 개체의 무엇과 어떻게 연결시킬지 막막했으나, 먼 우주 속을 광속의 속도러 여행하다 몇 년에 한 번씩 지나가는 별처럼 성긴 지식의 발견은 빠른 속도로 자라나 틀을 만들었고, 이제 지식 사이 사이의 구멍은 조금씩 메워지고 있다.

 

익명의 한 인간의 유전체 프로젝트. 시작에서 완성되기까지 여러개 국가의 협력과 13년동안 30억 달러라는 어마무시한 투자로 완성된 생물학계 최초의 거대과학 프로젝트가 들어간 이후, 그 익명의 염기 서열은 미래를 비추게 될 한줄기 서광으로 기대할 수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질병 하나에 하나의 유전자가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가정은 무참하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뒤죽박죽 엉켜있는 유전자 염기 서열로부터 질병의 경로를 찾아야 했다. 13년동안 수십 수백명의 과학자가 30억달러를 들여 분석한 한 명의 유전자 염기 서열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유전적 차이를 이해하려면 유전적 서명(genetic signature)과 핵심 형질 사이의 연구를 밝혀내야 하고, 그러려면 유전체의 어떤 위치에 있는 어느 DNA의 변이체가 특정 형질을 공유하는 사람들 집단에서 항상 발견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한 명의 유전체로 가능하지 않다. 특정 질병이 유전자의 특정 부분에 의한 것이라면 동일 질병을 가진 몇몇과 대조군 서열들만 있어도 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한 인간의 어떤 특징은 그렇게 간단하게 30억쌍의 염기 서열 중 하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다행히 우리 모두는 인간이므로, 인간인 이상 광범위한 유전체들은 대부분 동일하다. 우리 개인 개인이 모두 남과는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이유, 똑같이 생기지 않고, 목소리와 웃는 모습이 다르고, 눈을 깜빡거리는 습관이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과 이상형이 다르고, 무엇을 잘 외우는 사람과 새로운 무엇을 잘 생각해내는 사람들이 각기 존재하는 이유는 나머지 0.5퍼센트의 유전자들이 한다. 그 중에서 과학자들이 집중하는 것은 무엇이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 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평균300 개의 핵산마다 하나씩 유전체 염기 서열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는데, 이 특정 영역은 SNP(Single Nucleotid Polymorphism)이다. 이들 변이는 대개 건강에 무해하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그 중 10퍼센트가 그 인간의 유일무한 개체로서 발현한다. 지금까지 인간 유전체에서 1천만 개의 SNP가 파악되었지만, 생물학적 형질이 파악된 것은 아직 극소수다. 이것은 대양과도 같은 유전적 다양성에서  한 방울의 물이라는 것이 필드와 데이비스의 견해다. 대양에서 한 방울의 물, 모래사장에서 한 알갱이의 모래보다 더욱 희소한 양이지만, 어쨌든 무언가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더 많이 알려면 더 많은 인간의 유전체 분석이 필요하다.

 

2011년 한 유전체 회사는 69개의 인간 유전체 전체를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했고,  덴마크 자치섬 파로섬은 5만명의 시민 모두의 전체 인간 유전체 염기 서열을 제공하는 나라가 되겠다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2014년 영국 보건부 산하의 자회사는 8천개의 유전체 분석을 완료했고 2015년에는 3만개의 유전체를 분석할 예정이다. 이제 스텐포드 의대의 학생들은 면봉으로 검체를 체취해 실리콘벨리의 유전체 염기서열 분석회사 23앤미로 보내고 그 댓가로, 자신이 가진 네안데르탈인 DNA양, 각종 암에 걸릴 가능성, 심지어는 자신의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알게 된다.

 

유전체학은 주류 산업이 되어가고 있다. MIT가 매년 선정하는 50대 기업의 목록에 2013년 베이징유전체연구소(BGI)가 순위에 들었고 2014년  MIT에서 가장 유망한 회사고 점찍혔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유전체 서비스 공급자가 된 BGI는 2013년 5만명 가량의 유전체 전체를 서열분석했고, 책이 나온 시점에 약 10만명의 전체 유전체가 분석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전자와 인간 개체의 특징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려면 완전한 인간의 유전체 수가 많아야 가능하다. 몸무게와 유전자와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뚱뚱한 사람 유전체 3천명과 마른 사람 3천명의 유전체를 보유하여, 덴마크 연구원들과 함께 분석했고, 지능의 유전적 기반을 조사하기 위해 런던 킹스칼리지 연구소와 함께 아이큐 160 이상 되는 사람 2천명의 유전체를 분석하는 회사도 BGI다.

 

 

그러면 이제 다 된걸까. 우리는 언제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가장 완성된 단계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믿지만 과학적 패러다임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안된다. 이중 나선이 유전자를 켜고 끄고 어떤 조합을 이루는 지 그 방법을 바꾸는 후성유전학, 그리고 '한 사람당 여러 개의 유전체'라는 모자이크 유전체는 조금 알아낸 사실 뒤에 아직 파악도 되지 않은 엄청난 사실이 결코 넘을 것같지 않은 거대한 산처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유전체 염기서열을 읽는 것은 신탁을 구하는 것과 비슷하다(p65)'. 그것들은 때로 모호하고 정보가 제한적이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유전적 메시지는 '유전자들의 상호작용과 환경적 요소, 무작위적인 사건들 그리고 과거의 우발적인 사건들이라는 복잡한 미로를 뚫고 나가야 에측할 수 있다(p66). 우리가 지금 보는 유전체의 모습을 세계지도에 비유하자면, 조만간 구글 스트릿뷰 같은 게 나올 거라는 거다. 70쪽

 

시험관 배아시술은 선별된 아기를 고를 수 있는 기술로 2013년 코너 리바이는 이 기술로 태어났다. 수정직후 유전자 염기 서열 분석을 하면 유전적 특성을 기반으로 한 배아 선별이 가능해진다. 23앤미는 주문형 아기 생산 체계의 첫걸음으로 '유전적 계산을 기반으로 한 생식체 기증자 선별 특허'를 냈다. 저자는 반문한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좋은 유전자를 전해주지 않은 것은 아동학대에 해당된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 유전자의 37퍼센트는 박테리아에서 왔고 28퍼센트는 진핵생물에서 16퍼센트는 동물에서, 그리고 13퍼센트는 척추동물에서 왔다. 겨우 6퍼센트만 우리가 진화해 영장류로 본화할 때 새로 나타난 것이다. (111)

인간은 몸 속에 인간 세포보다 최소 10배 더 많은 박테리아 세포를 가진다. 미생물은 음식에서 에너지를 얻는 것을 도와준다. 현대 사회에 살균된 음식을 먹고 살균된 삶을 살고, 농약잔여물과 항생제 보존제의 과도 사용은 인간 몸 속에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미생물의 삶을 위협한다. 아기를 위해 공급되는 모유 속의 당은 아기를 위한 물질이 아니라, 아기의 장 내 가장 많은 선량한 박테리아를 먹여살린다. 저자는  '인간은 미생물적 키메라'라고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바이오코드라는 말은 연관된 생물학적 중여성을 가진 유전체 집단이라는 정의를 가지고 있지만 단어의 의도적인 유연성으로 인해 바이오코드의 범위는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지구 전체 그리고 우주적 생명의 근원을 찾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다. 유기체, 생물반응기, 건물, 섬 등 더 큰 체계의 유전체가 바이오코드가 될 수 있다. 책이 전해주는 지식의 집적된 상태가 압도적이고, 그 범위가 커서 리뷰에 다 적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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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작가수업 2
김형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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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한강 작가가 팟캐스트 방송에서 했던 말들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다. 5.18 피해자들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보니, 그들을 가슴에 담고, 그들에게 고스란히 자신을 투영한다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작가수업 시리즈의 두 번 째 책인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에서 김형수 작가는 소설가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단순히 소설이라 부르는 것, 읽히는 것, 그리고 시라 부르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닌, 예술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가 갖추고 닦아 나가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강 작가의 말 중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작중 인물이 소설가에게 하나의 살아 있는 거기 그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는 유기체로 느껴지는 시간들에 대한 것이었었다. 소설가는 작중인물들이 그냥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가상의인물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도중 생생하게 살아 작가와 함께 울고 웃고 하면서 성격이 부여되는 하나의 유기체로 느낀다는 말을 김형수 작가도 언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몇 몇 소설가의 후기라든가 인터뷰 기사들을 예로 들면서 작가가 소설을 끝낸 후 작중 인물과 이별을하는 의식, 그리고 또 그 작중 인물을 이야기할 때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이야기하듯 사람 취급을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들이 일부로 똥멋을 부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 결국 독자에게 한 방울의 눈물은, 작가에게는 한 양동이의 눈물을 쏟아냈을만큼 작중 인물들과 그 삶을 동거동식하며 똑같이 느끼며 살아 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의 경우, 마치 소설이 끝난 후, 자기는 그 주인공이 자살했을 거다. 아니다. 살아있을거다. 뭐 이런 식으로 그 이후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좋은 소설의 경우 이것은 독자들에게도 비슷한 일을 겪게 된다. 흔히 울림이 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읽고 나서도 책을 덮고 나서 오랫동안까지 작중인물들의 이후 삶이 궁금해지고 그립고 보고싶어지고, 때로는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전 읽은 스토너가 바로 그 중 하나였다. 내가 리뷰를 쓰면서 주인공의 아내 이디스를 이해못하겠다고 적었는데,에 이바님이 아마도 아버지의 폭력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라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부모의 폭력, 학대 혹은 잘못된 사랑으로 인해 아직 어떤 찬란한 앞길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무한한 가능성의 젊은 영혼들이 청춘을 만났을 때 스러지고 바스러지다가 심지어 생을 포기하는 경우까지도 흔한 세상, 분명 어떤 상황이 이디스의 현재를 감옥으로 만들었을 것이었고, 자신의 그 살아내기의 힘겨움 때문에 착한 남편마저도 희생물이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녀의 삶이 궁금하다. 소설 이전의 문제, 그녀가 감내했어야 했을 어떤 학대 같은 걸 생각하면 나중에 남편이 죽을 때 울면서 간호하던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그 착한 남편과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지옥같은 생을 보냈어야만 했을 마음의 병이 안타깝다. 

《삶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1편의 제목이 삶이 언제 예술이되는가 였는데, 그 때 했던 이야기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공적인 것의 바탕위에서 사적인 것의 디테일들이 만들어진다는 내용이었다. 민주화 투쟁에 몸을 담았던 사람의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문장이 주옥같았다고 느껴서 다음 편이 나오면 기필코 읽어야지 라고 기대했던 마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은, 더 잘 다듬어지고 많이 준비하고 응축된 핵심들을 주옥같은 언어로 만들어낸 강연집이다. 강연체로 되어 있는 경우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대체로 한 말 또하고 다시 정리하는 식으로 가독성을 높이는 책들이 많고 그런 방식 역시 좋아하는 편인데, 왜냐면 줄치고 나중에 다시 보지 않아도 중요한 말을 책을 읽으면서 반복적으로 받아들이다보니 기억되는 게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대표적인 경우가 얼마 전 읽은 고종석의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이고, 그렇지만 이 책은 엑기스만 정제한 느낌이다. 강연체임에도 허투른 말 하나마나한 대목 한 구절 없고 그래서 200쪽 남짓 얇은 책임에도 300쪽 이상의 내용이담 있다. 


소설을 쓸 것도 아니고, 시를 쓸 것도 아니고, 왜 이런 책을 읽어야 하지? 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는 언젠가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겠나 라는 생각으로 시리즈의 첫권을 읽었고, 그 책을 읽고 나서는 책을 읽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고 시를 읽을 때 자잘한 상식적인 것들만으로도 안목이 생기지만, 소설가나 시인의 근본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해했을 때에 소설을 보는 새로운 눈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을 읽은 후 그 소설을 해석하는 데에도 한몫하고,또한 리뷰를 쓸 때에도 도움이 된다. 줄거리만 요약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떨 때는 왜 어떤 작중 인물이 그토록 작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은지 몇달 혹은 몇년이 넘도록 마치 친구처럼 혹은 떠나보낸 애인처럼 그토록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건지 그 은밀한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밑줄 참조. 


경험한 세계만 그리려고 고집했을 때 생겨나는 문제... 첫번째, 사적 감정이 제어되지 않습니다. 자기 연민 속으로 끝없이 익사해요... 공주병? 왕자병? 또하나는 나의 한계로 주인공의 한계를 그어버린다는 겁니다. p47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장르의 틀`이 아니라 `감동의 틀`입니다... 우리 문학에서 나타나는 아쉬운 현상 중의 하나가 신춘 문예 당선 작품집을 보면서 공부하여 형식이나 분량까지 거기에 맞춰서 쓰는 경우가 많다는 거에요... 낡은 제도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틀 속에 스스로 구속당하기 위해서 줄을 서는 것과 같습니다. p49

고교 백일장에 도둑처럼 끼어든 시인이, 청춘 그 자체로 시인이라 불리는 세대의 감정을 복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p56

철도는 여행의 불편이나 위험만 제거시킨 게 아니라 여행자의 지각 자체를 구조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깊이와 음영의 소실 , 풍경으로부터 공간성의 제거, 이런 것들로 인해 산업혁명 이전까지 지각할 수 있었던 풍경들이 열차의 속도에 의해 날아가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망각합니다... 별로 두텁다 할 수 없는 어둠의 커튼 하나를 통과하면 울란바토르에 닿아요. p65

그래서 그 `아무것도 없음`을 눈이 빠지고 견디느라 유목민의 시력은 5.0이 되었습니다. p66

착시 현상에 의해서 `넘실거리는 바람결` 같은 표현들을 생각해내고 써나갈 게 아니라 각자 생애의 발자국 위에 얹힌 시월의 모습을 살펴보는 게 훨씬 빠르고 쉬운 길이에요... 내 발자국을 뒤져도 `시월`이 없으면 나와 밥상을 같이 사용한 엄마, 할머니, 아버지, 형, 언니의 발자국에 얹힌 것을 다시 찾아보세요. 거기에 내가 쓸 이야기가 놓여 있을 거에요.p70

대부분의 독자는 아주 미세한 디테일 하나에서 실감을 전해받습니다. ... `세부의 비진실성은 작품 전체의 진실성에 파탄을 가지고 온다`는 거에요. p76

창작 동기가 내 안에서 솟구쳐 나와야 열정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올라요. 그래서 작품의 밑바탕에는 작가의 삶이 알리바이로 깔려 있어요. p76

거창한 것보다 하찮은 것이 더 좋은 소재입니다. 매우 하찮아 보이는 계곡을 타고 들어가면 거창한 진실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 즉, 하찮아 보이는 데 ㅡㄴ 것, 이게 굉장히 좋은 글감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p79


..우울함의 진정성이 안 느껴진단 말입니다. ... 이런 걸 사적 감정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기적 감정, 배타적 감정, 이런 건 개인적 내면에서 크게 절실히 굽이쳐도 노래가 될 수 없어요. 080

탄광 벽면에 "엄마 배고파요".. 이런 낙서 말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땅에서 뿌리 뽑힌 자들,... 근거지를 잃어야 했던 한 공동체의 슬픈 역사가 아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하찮아 보이는 사감들, 개인의 삶에 담긴 슬픔이나 기쁨도 어떤 것은 세상에 널리 이롭고 어떤 것은 이웃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p81

앞에서 뒤 문장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줘야 다음 문장이 들어올 수 있어요... 앞 문장이 어떤 자리를 만들어주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 작품은 독자적이고 유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인지라.... 순간에 생겨나는 감수성에서 발생... 즉 앞문장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뒤 문장에 치고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에요. 이걸...`표현의 순차성`이라 해요 p97

작가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작품이 가득 들어있어요. 그 중에서 가닥 하나를 잘 잡으면 뒤 문장이 줄지어 나오는데 그 가닥이 어디 있는지는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p99

형상언어를 모르고는 살아 있는 성격을 그릴 수가 없어요... 첫 문장은 느낌의 순차성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소설 쓰는 사람들이 시집을 많이 읽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신이 내리는 말이 어떤 식으로 오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서정적 환기력이 크지 않으면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끌고 가기가 어렵기 때문이에요.p102-103

고향을 상징하는 정서적 등가물이 있어야 고향 추억에도 주봉이 있게 되고, 그래야 마음도 추억의 길을 잃지 않거든요. 사물로서의 양철북은 권터 그라스의 서사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도구에 불과해요. 그러나 양철북 때문에 이 작품은 주봉을 잃지 않아요. 주인공이 들고 있는 사물이잖아요. 주인공은 미숙아입니다. 나치가 천하를 장악하고 있던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성장이 멎어버린 인간이에요. 이렇게 성장이 멎은 자가 나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까 갑자기 쑥 커버립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삶의 표현의 도구가 양철북이에요.... 정서적 등가물을 찾아내기 전에는 첫 문장을 확정짓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웰컴투동막골>.. 소녀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된 정서적 등가물이 나비에요. 그 작품의 정서적 등가물로서의 나비 형상은 이야기의 질을 갑자기 동화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립니다.... 그 작품이 유지하고 있는 긴장의 깊이와 사회의식의 심화수준에 비추어 상징의 무게를 조금 떨어뜨렸다고 보이는 거에요. p122

인간의 의식이 집중을 우선하느냐 개괄을 우선하느냐의 문제... 집중을 우선하는 자는 구성을 중시하지만 개괄을 우선하는 자는 총체적 인식을 중시합니다... 개괄과 집중을 수행하지 않으면 독자가 객관 대상을 파악할 수 없을 뿐더러 쓰는 자가 스스로의 문맥 속에 갇혀 길을 잃는다... 카메라에 비요한다면 앵글이 하늘 높이 떴다가 코앞에 맞닥뜨릴 만큼 이동합니다. 이 이동을 능란하게 자유자재로 하면 할수록 실감의 크기가 커집니다.... 문장을 밀고 당기는 거에요... 개괄과 집중이 잘된 소설이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입니다... 소설의 행간에서 수많은 조선의 어머니를 사유하게 됩니다. 한 번도 자기 운명의 주인인 적이 없었던 사람들....모든 집중은 훌륭한 개괄 위에서 가능합니다.... 개괄과 집중의 요령은... 문장 하나하나에서도 구현되어야 합니다. p135

사적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내면 남들이 징징거린다고 생각할 겁니다.... 징징거리는 것은 시가 아니다, 큰 슬픔을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감정이란 지극히 공에 이르러야 `전형`이 되고 `시대적인 것`이 된다는 얘기... 이게 서정이라고 하는 어떤 정서적인 형태를 예술 재료로 사용하고 있는 장르의 운명입니다.... 밀란 쿤데라의 말입니다. `이제껏 알려져 있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삶의 새로운 측면을 밝혀내지 않은 소설은 아무리 새로운 의상을 걸쳐도 낡은 소설인 것이고...p152

도시빈민 문제로 시위를 할 때입니다. 학생들이..."도시빈민 탄압하는 X태우를 불태우자" 이랬어요....
당시 노점상들이 구호를 어떻게 외쳤냐 하면 "애태우고 속태우는 X태우를 불태우자" 이래요. 개념적인 사유에 훈련된 사람들은 4.4.조에 맞춘거고, 개념화 습관이 안되어 있는 사람들은 생활 감정을 운율에 타운 거에요....<석탄가>라는 민요에서...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풀풀 나고요. 우리네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아니 나네" 언어공동체에 의해서 수많은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혀와 입술이 만져서 닳고 닳은 나머지 운율 상으로 거의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던 겁니다... 운율의 생명감, 이것이 개념적으로 말을 만들어서 생겨나지 않아요.p154

낯설게하기는 어떤 유파의 몫이 아니라 문학의 본질과도 같은 것입니다 맨 처음에 만난 것처럼 떨림과 두근거림과 생소함을 되찾게 하는 것, 이것이 낯설게하기입니다.김산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아리랑>의 도입부... 봄볕이 쌓일 때 그 적막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고요해서 햇살이 쌓여서 겹치는 것이 귀에 감지될 정도지요. 이런 적요는 그 속에 담긴 모든 사물을 굉장히 아름답고 조용하고 슬프게 만들어요.p161

행정언어, 법률언어, 의사들이 사용하는 언어... 이런 것들 중에 삶의 실감하고 동떨어진, 일부러 화석화된 언어를 사용해서 일상적 소통을 차단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168

생득된 형식의 저수지이자 창고인, 민요, 속담, 구비문학의 여러 전통들을 사실은 게속 읽고 써야 해요. 178

세익스피어가 구축한 그런 어문 구조들 때문에.. 능력있는 언어를 구축하게 됐어요. .. 러시아어의 능력을 확대한 이로 푸쉬킨을 꼽고 한국어의 능력을 확장시킨 이로 김소월을 꼽습니다. 시라고 하는 장르는 짧은 문장으로 복잡한 세계를 담아놓기 때문에 각기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어문구조들을 확보해서 재산으로 간직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p181

무사가 칼을 휘두르듯 언어를 다뤄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동력이... 진정성에서 나와요... 마음을 글로 옮겨 놓으면 거기서 풍겨나는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독자를 속일 수 없어요 210

21세기 문화로 넘어오면 묘사의 축소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서사 자체는 계속 약화되고 묘사만 강화되어 가분수가 되고 마는 경향 때문에 묘사가 약해지면서 서술이 강해지는 쪽으로 작품이 흘러가고 있어요. 밀란 쿤데라도 농담 이후 변화 과정을 보면 불멸을 지나면서부터는 확실히 묘사 중심주의가 아니에요..... 묘사의 강화를 통해서 서사가 강화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서사의 강화로 인해 묘사를 축소해가는 경향으로 흘러가는 게 지금 소설의 흐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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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04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 결말 다음의 이야기를 작가들도 상상하는군요. 어쩌면 독자보다 더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아요. 한 시기에는 가장 가깝게 느꼈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잘 읽었습니다. guiness님, 즐거운 금요일 밤 되세요.^^

CREBBP 2015-12-04 23: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