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노인과 바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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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이라는 논픽션에서 상징에 관하여 이런 주목할 만한 언급을 했다. 〈만약 소설가가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다면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해도 무방하다. 정말로 그가 글을 잘 써놓았다면, 독자는 마치 그것(소설가가 일부러 생략한 것)이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는 것처럼, 그에 대하여 뚜렷한 느낌을 갖게 된다. 빙산의 움직임이 위엄을 획득하는 것은 8분의 1만이 수면 밖으로 나와 있고 나머지는 물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을 생략한 작가는 그의 글 속에 공허한 공백만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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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25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uiness님, 메리크리스마스,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
(낮에 인사를 남겼는데, 등록을 누르지 않았나봐요^^; 한번 더 남깁니다,^^)

CREBBP 2015-12-26 15:17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행복한 크리스마스연휴를 보내세요. 새해에도 좋은일 많길 바랄께요
 
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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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실어온 모래가 사구를 만들고 마을의 낡고 남루한 옛 오두막들은 조금씩 모래에 묻혀간다. 모래가 쌓이면서 마을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마을 사람들은 구청과 정부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보지만 공무원들에게 모래는 설득력있는 재난이 되지 못한다.  세상은 작은 바닷가 마을이 모래 따위에 사라져가는 위협에 주목하지 않는다. 자구책으로 쌓여가는 모래를 삽으로 퍼내지만, 자연의 힘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빈약하던가. 사람들은 사구의 구멍 속 맨 가장자리가 모래에 묻히게 되면 점차 모래가 마을을 쓸어버릴 거라는 걸 안다. 모래 언덕 맨 가장자리에 사는 사람들은 투박하고 거친 삶을 지키기 위해 밤새 모래를 푸고,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나른다. 


최근 읽은 소설 중 본의 아니게 재난 소설이 많았다. 모래의 여자도 모래라는 재난 속에 갇힌 어떤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남자는 일상에서 재난을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재난 속으로 찾아 들어간다. 삶의 권태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불현듯 생긴 염증도 아니다. 하찮은 직업 속의 나라는 존재 이유와 화해하기 위해 택한 취미가 그를 보다 모험적인 세계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 물론 곤충채집이 그리 모험적이거나 탐험적으로 보이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제는 꿈의 직업이 되어버린 '교사'라는 타이틀이 60년대 일본에선 하찮은 직업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떠남, 잠시의 물러남은 권태를 물리는 최고의 방법이다.  


남자는 떠났고, 돌아오지 못했다. 왕복티켓을 끊었는데, 그만 편도 티켓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떠난 이유 하나는 우리 중 누구라도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와 같다. 손에 쥐어진 왕복 티켓이다. 우리는 돌아옴이 보장되어 있을 때 떠남에서 자유롭다. 떠났을 때 자유로운 이유는 돌아갈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는 구속적 현실로의 복귀라는 선택지가 쥐어진 상태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몇일의 휴가동안 그는 '강물처럼 자신들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 '학생들의 흐름 밑바닥에 돌맹이처럼 남은' 선생이라는 직업을 떠나 영원히 자신의 이름을 남길 새로운 곤충의 이름을 발견할 작정이었다. 자유와 명예라는 꿈을 베낭에 담아 당시 선생들로서는 이행하기 힘든 먼곳 사구로 떠난 곤충 채집 여행에서, 그는 곧 새로운 곤충이라는 포획물을 담아 개선장군처럼 돌아올 예정이었다. 


어떤 상태를 지키는 것에 매몰되면 그것을 왜 지키는 지를 잊은채 지키는 것 자체가 삶의 이유가 되어 버린다. 풍화와 퇴적으로 점차 모래에 조금씩 잠식당하기 시작했을 초기에 모래를 퍼내 부락을 지키는 일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을 것이다. 모래 여자는 사구의 아래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온 모래가 집을 해하는 반쯤 부서진 다 썪어가는 오두막에 산다. 부락 사람들은 작당을 하여 짝짓기를 시키듯 혼자사는 모래여자의 집에 외지 남자를 내려보내고 남자는 모래 언덕을 넘지 못해 갇힌다. 밤이면 습기찬 모래에 집과 집기들은 모두 썩어들어가고 부락 사람들은 밤마다 여자가 퍼내는 모래 푸대를 길어 올려간다. 모래에 갇혀 모래를 퍼내며 집을 지키고  사는 댓가로 마을 사람들은 물과 필수품을 내려보낸다. 


서걱거리는 모래 알갱이들이 끊임없이 삶을 위협하고 코와 얼굴과 입과 눈으로 쉼없이 까글거리는 곳. 1/8mm 모래 알갱이들이 들어오고, 땀과 모래가 하염없이 작은 상채기들을 남기는 그 모래 구덩이의 집에서 남자는 두고온 일상의 자유를 떠올린다. 한 때 전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신안군 염전 노예 사건이 생각났다. 탈출을 시도하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공범이요 카르텔을 형성한 그곳에서 뜻대로 될 리가 없다.   그들은 망루까지 두고 사구 밑의 구덩이에서 모래와 씨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감시한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가장 취약한 곳에 사는 가구 주민들을 가두고 혼자사는 여자에게 배필까지 구해다 준 셈이다.  여러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신안군의 염전에서 심지어 10년씩이나 체불된 채 노예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과 경찰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까닭이 무엇이었겠는가. 신안군의 염전업자들도 그들처럼 침묵의 카르텔로 서로의 노예들을 서로 감시했을 것이다. 


소설 속의 사구 구멍과 그 구멍 속의 부락이란 게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서 아베코보와 모래의 여자를키워드로 구글링을 해보니 흑백 영화 스틸 영상 몇 컷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아베 코보를 세계적 작가로 만든 모래의 여자는 오래 전에 영화화되어 칸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흑백이지만 사진 중에는 선정적인 작품이 많다. 두 사람이 모래 위에서 사랑을 나누는 건가, 모래라는 유동의 입자들이 관능적인 육체들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에로티시즘을 영화에서라면 모를까, 책에서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모래의 여자는 집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살지만, 모래를 퍼내는 일이 삶 자체가 되어 버렸다. 다른 이유도 목적도 가치도 없다. 


삶을 지키기 위해 모래를 퍼내지만, 결국 삶 자체를 모래 퍼내기라는 아무 가치 없는 노동에 모두 묻어버리는 여자. 시간을 모래로 채우는 여자.  남자가 보기에 처음에 여자는 자신을 가둔 부락 사람들과 한패다. 자신을 가두는 일에 은밀히 동의했고, 혼자만의 노동력으로는 감당되지 않는 모래퍼내기의 삶을 계속하기 위해 그를 가두는 존재다.  그러나 그녀 역시 마을 주민들의 동맹에 의해 감금당한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녀 역시 모래 언덕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단지 순응할 뿐이다. 걷고 또 걸었으나 갈 곳이 없었고, 이곳에 왔으므로 이곳에서 살기 위해 집속으로 흘러내리는 모래를 퍼내고 사는 여자.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으나, 걸을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모래속의 집. 그 자유와 구속을 지키기 위해 모래가 된 여자. 


몇십 년 전, 저 폐허의 시절에는 모두들 한결같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찾아 광분하였다. 그렇다고 지금,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에 식상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p87)


참으로 역설적이다. 세상에 이름 세글자를 남기고 영원히 기억되고자 떠나온 남자는 그것이 떠남이 원웨이 티켓이었음을 깨달으며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으며, 살기 위해 모래를 퍼내는 여자는 모래를 퍼내기 위해 사는 여자가 되었다. 제대로 굴러가는 세상에서 온 남자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희생자였지만, 모래에 갇혀 아무런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묻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곳 남자가 온 바깥 세상은 오히려 모래마을을 외면하는 가해자들인 셈이었다. 


뫼비우스의 띠는 바깥쪽과 안쪽이 같다. 이 소설속에는 실제로 남자가 뫼비우스 띠라고 부르는 인물이 나온다. 여자와 남자의 대화도 그렇고 뫼비우스띠와 남자의 대화도 그렇고 인물들 사이의 대화는 서로 대화를 흉내내지만 각자 혼잣말을 차례대로 한다. 대충 읽으면 대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대화가 아니라 서로의 물음에 상관 없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다. 소통없이도 온기만으로 함께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비루하고 답답한 현실을 보란듯 도망쳐서 도착한 곳이 출구 없는 구속이라면 그 더 답답한 모래 구멍 속에서의 탈출은 어떤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사랑이 아니라면 아마도. 왕복티켓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날 평화로운 모래 퍼내기 노동 속에도 원초적 본능으로 그 대책없는 결실이란 걸 맞이하던 날, 그 새 생명처럼 사구 위쪽을 오를 수 있는 가마니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탈출할 수 있는 사다리는 그에게 왕복 티켓이다. 그리 오랫동안 탈출하고 싶던 곳, 돌아가고 싶던 곳으로 나갈 수 있는 수단이 생기자, 그는 그 왕복티켓에 유효기간이 없음을 안다. 아마도 사망처리를 기다리고 있을 떠나온 곳으로의 귀향은 이제 다시 모래 여자에게로 돌아올 수 없는 원웨이 티켓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남자는, 아니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남자는 그 언제가 아무때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탈출이 더이상 절실해지지 않는다. 그곳에 머무는 일과 그곳을 떠나는 일은 동시에 자유이며 동시에 또 구속일까. 돌아간다는 것은 이제 이방인으로서 처음 모래 여자에게로 왔을 때만큼이나 서걱거리고 까끌거리는 곳일 으로의 귀향을 의미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아무 때나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생겼을 때, 리턴 티켓을 가진 자로서 모래는 다시 자유와 낭만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더라도 돌아갈 수 없는 쪽을 그리워할 터이므로, 남자는 돌아갈 수 있는 세계는 그 어느 때고 돌아갈 수 있도록 간직하기로 작정한 것이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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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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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기억과 욕망과 기호를 공동체와 공유한다. 삶이 매일 새롭다면 어떨까. 여행중 만나는 풍경,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겐 진부한 곳이라 해도, 여행자에게 낯선 도시는 설렌다. 현재를 탈출해서 도달한 곳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들은 확장된 세계에 대한 인식이고, 현실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현실을 떠나 바라보는 새로운 세계가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이러한 모순을 이탈로 칼비노는 환상적 도시들 속에서 창조해 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도시들을 생각했다. 내 기억 속의 도시들을 떠올렸다. 내가 살았던 도시들, 내가 여행했던 도시들. 도시는 삶의 시작과 끝이 무한히 반복되어 현재와 과거와, 혹은 미래의 무수한 삶이 건져 올린 기억과 욕망의 자국들로 빼곡하게 채워지는 공간이다. 도시의 연기, 도시의 바람, 도시의 안개, 도시의 온도, 그 모든 것들이 과거의 울림이자, 미래를 여는 빛이다.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공간은 언제나 배경이었다. 배경 속에서 변화를 겪으며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다. 감동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배경과 인물이 바뀐 느낌이다. 안과 밖이 바뀌듯 배경과 중심이 바뀌었다. 도시는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주인공이다. 인물은 배경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위해 존재한다. 제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과 도시를 여행하는 마르코 폴로다. 폴로가 칸에게 그가 여행한 도시를 묘사한다. 탄생과 발전과 쇠퇴 그리고 명멸하여 폐허로 남겨지는 숱한 이야기들을 엮어가고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 도시이다. 책에서 묘사되는 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보이지 않기에 마치 손에 잡힐 듯 더욱 선명하고 생생하게 상상 속을 신비의 세계로 가득 채운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과 금나라, 거란족을 정복하여 몽골제국을 확장하고 원나라의 초대황제가 된 칭기스칸의 손자이며, 마르코폴로는 베네치아 공국에서 태어나 우리에겐 <동방견문록>으로 알려진 탐험가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소설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그러나 소설 말고 다른 어떤 장르에도 적합치 않으므로 그냥 소설일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이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탈로 칼비노보다 더 재능있는 사람이지 않을까라는 싶을만큼 이 책은 형식과 내용에서 새롭다.


실제로 쿠빌라이 칸은 역사 속 제국의 다른 정복자들이 대량학살과 약탈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과는 달리 정복 후 살육과 약탈과 폭력을 금지시켰고 피정복민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위키 코리아:포제어-쿠빌라이 칸 2015-10-27자 참조). 황제 칸은 패전을 거듭하며 저항했던 적들이 무너져내린 제국의  영토의 구석구석을 서양의 탐험가 마르코 폴로에게 듣는다. 각 도시들은 칸과 폴로의 대화로 이루어진 장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여러 개의 도시들이 섞이어 위치한다.


다시 우리의 인터넷 만물박사 위키의 설명을 빌리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편견과 허구가 많다는 비판(특히 중국 학자들로부터)을 받는다. 동방견문록의 내용과는 달리 실제로 중국 문헌에는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을 알현했고 황제의 칙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마르코 폴로가 칸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 전체를 구성하는 55개의 가상의 도시들이 순전히 구라라는 사실이 묘하게도 실제 인물에 얽힌 허구들과 일치하는 센스를 발견할 수 있다. 마르코 폴로가 베네치아라는 매우 뚜렷한 정체성을 지닌 지구상 유일무이한 도시에서 왔다는 사실도 서술자로서의 지위를 돋보이게 한다. 베네치아는 과거의 기억과 영광이 주민들의 현재의 삶을 책임진다.  수백개의 운하로 이루어진 물골목을 누비다보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도시가 상상의 공간인 듯 환상적인데, 이러한 베네치아의 정체성은 폴로가 전하는 가상의 도시들을 닮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동방에 도착한 이 베네치아인은 그곳의 언어를 전혀 몰랐기에, 언어 이외의 기호, 몸짓과 감탄사, 동물 울음소리, 그리고 가방에서 꺼낸 각종 물건들로 도시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쿠빌라이가 소중하게 생각한 것은 그가 전하는 정보 주위에 남아 있는 공간, 말로는 채울 수 없는 여백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유와 암시를 통해 마르코의 언어를 배워가는 황제는 완벽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오히려 그런 의사소통이 더이상 즐겁지 않다. 언어는 도시의 중요한 요소들을 열거하는 데 유용했지만 그들의 삶을 표현하는 데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들은 다시 소리 없는 몸짓으로 된 의사소통을 한다. 


'제국 자체의 무게가 제국을 짓누르고 있어(p94)'. 지나치게 성장한 칸의 도시는 풍년이 들어 창고마다 곡식이 넘쳐나고, 불어난 강물들은 왕궁 건축 자재들을 운반하고, 노예들은 산더미같은 대리석을 옮기지만, 칸은 대지와 내리누르는 제국의 무게가, 그 뒤얽힌 재화와 교통수단과 장식과 의식이 복잡함이 무겁다. 그는 그물처럼 투명하고 잎맥 같고 손금 같고, 세공품 같은 도시를 꿈꾼다. 그가 담뱃대를 입에 물고 꿈꾸듯 몽환적 표정으로 폴로의 도시들을 경청하는 이유이다. 


도시가 시작될 때 그 태초의 바람과 필요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도시는 세월의 풍화를 겪어오면서, 수없이 많은 변화를 겪으며 독특한 모습으로 형태를 갖춘다.  이탈로 칼비노가 상상한 도시들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들이다. 디즈니랜드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멀고 아득한 상상으로만 가능한 도시다. 그러나 그 환상적 풍경에는 실재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 읽으면서 조금이라도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 도시들은 상상의 도시들이면서 결국 실재하는 도시들이라는 사실이다. 존재하는 모든 도시는 칼비노가 상상한 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속성을 조금씩 내포한다. 


사실 제노비아를 행복한 도시로 분류해야 할지 불행한 도시로 분류해야 할지 결정하는 일은 무의미합니다.... 여러 해가 흐르고 변화를 거듭해도 욕망에 자신들의 형태를 부여하기를 계속하는 도시와, 욕망에 지워져버리거나 욕망을 지워버리는 도시, 이렇게 두 종류로 나누는 편이 더 의미가 있습니다. (p48)


지속되는 도시, 확장되는 도시에서 도시를 빠져나오는 것의 불가능함과 도시를 들어가는 것의 불가능함은 오늘날 서울의 모습이다. 뉴욕이기도 하고 런던이기도 하고 파리이기도 하고 토쿄이기도 하다. 번영 뒤에 남겨진 파괴와 보존과 보호에 대해서도 많은 단서를 남긴다. 폴로가 묘사하는 모든 도시들이 더할 수 없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매력적이었지만, 내게 가장 눈물겨운 도시는 죽은 자들이 사는 도시였다. 



어떤 도시를 갔는데, 그 도시들에 죽은자들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살아간다면, 그곳에 머물고 싶을까 떠나고 싶을까. 아델마는 죽은 자들의 도시다. 그 도시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생전의 부모이고 생전의 조부모이고 우연히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은 죽은 군대 동기이거나, 알고 지냈던 어부이거나 사랑에 미쳐 자살한 여자이거나 한다면. 다른 모든 도시들을 하나씩 통과하면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리움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죽은 자의 외형을 똑같이 닮은 그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 그곳에서 생전의 내 할머니 모습과 한창 때의 내 아버지, 어린 시절의 친구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바라볼 수 잇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리라. 그런데 이 도시가 기다리고 있던 반전은 화자인 마르코폴로, 도시의 방문자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가 아는 다른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생각한다. 이것은 나 역시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고, 저승세계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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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17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guiness님, 편안한 저녁 되세요.^^

CREBBP 2015-12-17 23:5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박철범의 방학 공부법 박철범 공부법
박철범 지음 / 다산에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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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때 무엇을 할까. 여러가지 계획이 있겠지만, 부모들 입장에서는 애가 공부하기를 원한다. 다 함께 똑같이 진도를 나가고 똑같은 내용을 학습하는 대신 자유롭게 주어진 한달간의 방학은 개인에게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 때 무엇을 할까. 만일 공부하기로 작정했다면, 자신만의 페이스로 공부할 수 있기에 방학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때 책을 참조한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은 공부하기로 작정한 학생들을 위한 지침서다. 


크게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는데 하나는 시간관리법이고, 하나는 공부 방법이다,.  첫 파트에는 시간 관리에 대한 지침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방학을 시작할 때 꼭 필요한 다섯 개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무엇을 공부할 건지,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학교보충수업과 방과후 수업을 들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얼마나 노는 게 적당할지에 대한 해답들이다. 박철범 저자의 대답을 들어보자. 


방학에 해야 할 공부는 방학 때 아니면 하기 힘든 공부다. 즉, 학기중 소화 가능한 과목 말고, 학기중 따라가기 어려운 수학과 같은 과목이 그렇다. 영어의 경우 독해와 듣기는 학기중에도 할 수 있으나 문법은 학기 중에 전반에 걸쳐 다룰 기회가 없이 살짝만 스치므로 방학중에 해두어야 할 적당한 공부이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도 방학 때 한다. 학원의 유무는 하루 중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충분한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학교 수업과 학원 수업의 복습 등등 모든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을만큼 결정한다. 여기에서 인터넷 강의는 그 과목을 처음 공부하는 단계에서 활용하는 것이 효과가 크고 또한 필요한 단원만 골라서 보는 것이 효과가 크다. 학교 보충수업이나 방과후 수업의 경우 최상위권 미만의 성적인 경우는 보충 수업에 가급적 참여하기를 추천하는데, 이것은 생활 관리 차원에서 추천되고 또한 다음 학기에 배울 내용의 일부를 방학에 미리 나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독서에 대해 몇 가지의 원칙을 제공하는데 첫째는 책을 직접 고를 것, 빌리지 말고 살 것, 한번에 한 권씩만 살 것, 구매한 순간부터 바로 읽기 시작할 것, 무엇을 읽을 지 모르겠다면 아무책이라도 우선 읽을 것, 도서관에서는 가급적 공부를 하고, 책은 공부를 마치고 집에 와서 자기 전까지만 읽을 것을 권한다. 노는 일에 대해서는 주말에만 놀라고 한다. 


시간관리 방법으로 집에서 공부잘된다고 하지 말고 매일 공공도서관에 가서 공부는 거기서만 하라고 전한다. 집에서 공부가 잘되는 경우는 극소수의 사람이므로 최대한 일찍 가서 늦게 돌아오고 절대 중간에 돌아오지 말라고 충고한다. 방학을 그렇게 보내면 성적을 보장한다고 까지 말한다. 방학 시간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시간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침일찍 도서관에 가기로 계획했다면 오로지 한 가지 생각, 어서 빨리 집을 나가는 것, 그래서 어서 빨리 도서관에 도착하는 것 하나만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것 저것 뭐할까 생각하지 말고 얼른 집을 나서는 것이 관건. 잠자는 것에 대한 원칙은 몇시에 자든 같은 시간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늦게 자도 예정된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핵심. 하기 싫은 일일 수록 어서 빨리 시작하라. 해야할 일과 하고 싶은 것이 충돌할 때 어떤 것을 선택할 지 미리 결정해둔다. 갑자기 생기는 일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공부가 느슨해지는 것을 막으려면 구체적인 마감시간이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마감시간은 그 시간 내에 끝내야 할 구체적인 공부 분량을 말한다. 몇시부터 볓시까지 수학 문제집 1단원 이런 식으로 계획을 세운다. 


파트 2에서는 3회독 공부법을 소개하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1회독, 즉 처음 교재를 읽을 때는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둔다. 2회독에는 암기를 시작한다. 3회독에는 사고에 중점을 두어 모르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늘린다. 이렇게 3회독을 하는 공부법이 실력도 가장 빨리 성장하고 시험에서 결과도 좋은 최고의 방법이다. 


책의 250쪽 분량인데, 학생들에게 술술 잘 읽히도록 매우 심플한 포맷으로 되어 있고 중요한 곳에는 강조가되어 있으며 분류도 잘 되어 있어 한권씩 가지고 있다가 공부가 소홀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마음을 다지는 측면에서 매우 활용할 수 있는 책으로 방학을 앞둔 학생들 중고생 및 초등 고학년생 모두에게 적당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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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독 그 사람이 힘들다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김세나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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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간들의 특성을 주로 다룬 심리학 책을 읽고 리뷰를 올린 기억이 있어서 무엇이었나 곰곰히 기억 속을 뒤져봐도 생각이 안나는데, 한마디로 그들은 성격파탄자들이다. 나르시스적 인물이 병리학적으로 분류된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나르시스적인 인물에 속하는 일반적인 유형도 있다. 즉, 인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같은 걸로 나르시스적인 성향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총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나르시스란 무엇이며, 그 원인과 나르시스즘을 이해하는 주요한 성격 유형들을 소개한다. 2부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 유독 힘들게 하는 사람들의 나르시스적 성향들을 직업군과 성격군별로 분류하고 그들을 이해하는데 촛점을 맞춘다. 3부에서는 이제 타인의 타르시스즘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기술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인간관계는 어느 곳에서나 인간을 행복하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가장 큰 요소이다. 힘들게 하는 것도 인간이고 행복하게 하는 것도 인간이다. 가족 관계나 친구 관계에서도 힘든 사람들이 있지만, 특히 이 책은, 사회 생활, 그것도 특히 사무직이나 경쟁이 불가피한 전문직과 같은 환경을 구체적으로 특성화되어 있다. 직장 내에서의 나르시스스트는 민폐1위의 상종못할 인간이다. 나르시스즘은 일반적 나르시스즘과 긍정적 나르시스즘으로 나누는데, 긍정적 나르시스즘은 능력과 추진력, 자신감 있는 태도 등에 있어 뛰어난 업무 처리 능력과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수준에 있는 사람이고, 일반적 나르시스즘은 이를 지나쳐 이기적이고 독단적이고 비생산적이고 다른 사람의 성과를 가로채는 못된 인간들의 유형이다.


나르시스즘은 어린 시절의 학대와 상처 혹은 지나친 보호 같은 심리학에서 흔히 꼽는 여러 원인들을 가지는데, 손상된 자기애에 대한 대가로 성공과 지휘 매력, 권력과 같은 것들을 추구함으로써 성공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자신의 야망을 따라 주위 사람들을 이용해 먹고, 그들의 경탄과 복종들을 연료삼이 추진력을 얻게 되므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희생양이 되기 쉽다. 


3부에서는 이러한 직장 상사나 동료를 만났을 때, 이들이 어떤 유형의 나르시스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여야 그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사실 아무리 인내력을 가지고 그들을 대한다고 한들 그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거나 그들의 성격을 바꾸려는 무리한 노력을 하는 대신 그들의 성격 유형을 파악하고, 자신의 성격 유형을 동시에 잘 파악하여 어떻게 처신하는 지를 결정하는 것만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흔한 자기계발 서적이 사람을 다룰 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얘기하지만, 이것이 모두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누군가를 이해히키기 위해 조금 더 손해보는 일이 돌이킬 수 없는 배신과 상처로 이어져 결국 자기 자신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들은 사실 어떻게 보면 딱히 이것이 해답이다 저것이 해답이다라고 말하기 힘든 것들도 많다. 성격 유형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고, 어떤 경우, 완전 상대방이 피하지 않으면 안될 인간말종이기 때문에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 것만이 답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만일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직장 상사라면 답이 없는 것이 된다. 


답이 없더라도,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 나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심리학은 때때로 도움이 된다. 몹시도 나르시스적인 사람과 나르시스적 관계의 정점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잘못된 자기애와 결핍과 손상을 이해하게 된다면, 자신에게 향하는 커다란 비난과 상처의 화살에 어느 정도는 방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인간 말종들은 제발 사라져줬으면 좋겠지만 그들의 사다리는 다른 종류의 나르시스즘적 사람들의 경탄과 복종 위에서 만들어진 경우도 있으므로 한 사람의 잘못만이라고 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인간이 가장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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