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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사람들 사이에서 윤곽이 확실하지 않은 여자 해리엇, 근엄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남자 데이비드. 파티를 싫어하는 두 사람은 파티에서 만난다. 자유와 낭만이 들불처럼 번지던 60년대에 보수적인 두 사람의 만남과 결혼. 커다란 3층짜리 빅토리아풍의 대저택을 장만하고, 아이를 여덟 정도 낳고, 시끌벅적한 집에서 사람들의 떠들석함으로 풍족함을 채우는 행복을 계획한 그들의 삶은 딱 그들이 원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와 각종 명절에는 사돈의 팔촌까지 떼로 몰려와 몇일 몇주고 그들의 떠들석하게 지냈고, 예쁘고 사랑스런 아이들은 많은 사촌들과 이방 저방 오가며 최고로 기억될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부와 지(知)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모두 제공하는 데이비드의 이혼한 부모들의 양쪽 세트는 각기 아버지쪽 부모들은 엄청난 주택대출금과 또 엄청난 양육비용, 그리고 어마무시한 명절 식재료비들은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가 부담했고, 데이비드가 추구하는 지적인 대화는 어머니 쪽 세트와 통했다. 그리고 양육은 혼자 된 해리엇의 친정엄마가 아예 붙박이로 눌러 앉아 도와준다. 큰 살림에 따른 경제적 육체적 부담에 때로 자잘한 우려와 근심과 피곤이 따라다녔지만, 그들의 행복은 아이가 여덟명이 아니라 열여덟명이 태어나더라도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다섯째 아이가 잉태되기 전까지 말이다.
베토벤의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만일 어느 순간, 어떤 파트의 어떤 악기 하나가 음 하나를 틀리게 낸다면 대개의 경우 평범한 우리들은 아마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지 꽤 되었는데,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 받은 느낌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감정 처리를 하지 못하고 리뷰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일 후성유전학에 관련된 저 베토벤의 비유를 읽자 다섯째 아이 벤이 가진 유전학적 차이는 어쩌면 사실은, 유전 정보가 만들어내는 인간의 특성이 베토벤의 심포니보다 수천 수백만배 이상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음 하나의 차이만큼도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작은 차이에도 벤이 그렇게 끔찍한 괴물이 된 것은, 후성유전학적인 것과도 관계가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다. 바라고 원해서 잉태된 다른 네 명의 아이와는 달리 다섯째 아이 벤은 처음부터 원했던 게 아니었다. 줄줄이 연이은 아기들의 양육을 힘들어 하던 해리엇이 다음 아기는 조금 텀을 두고자 생각했을 때, 원치 않은 순간에 생겨났다. 새 생명이 잉태되는 그 순간의 거부, 그것이 유전자의 스위치에 어떤 영향을 줄 지도 모르지 않는가. 수정의 순간, 착상의 순간, 세포 분열의 각 순간 순간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간절함, 그 새생명에 대한 거부로 인해 생기는 알 수 없는 호르몬과 유전자들 상호작용들로 인해 유전자 정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화학적 표식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최대의 자구책으로서, 인간에게 숨어있던 태초의 선사시대 유전자를 활성화시켰을 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던 태아의 커다란 몸집과 지나치게 격한 발길질로 고통을 느낀 산모에게 아이는 이미 비정상으로 간주되었던 건 아닐까. 해리엇이 의사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아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병명을 얻어냈다면 해리엇은 보다 편했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아프잖아. 아프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 그렇게, 아기의 이유있는 발길질은 그녀에게 어떤 위안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아기가 태어나고, 괴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을 때, 다운증후군인 조카를 부러워하는 해리엇의 모습은 자신의 아들 벤이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가를 알게 해준다. 다운증후군은 다운증후군이라는 명칭 아래 안전하게 보호되고 설명된다. 해리엇은 그런 것을 원했을 것이다. 무언가 설명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것. 그러나 전문가에게 정상으로 보이는 아기는 어떤 병명도, 어떤 장애의 표식도 얻어낼 수 없었으며, 태아에게 돌아간 건 치료가 아닌 아기를 잠들게 만드는 진정제일 뿐이다. 축복같은 선물인 태아의 발길질, 그러나 가장 피곤하고 힘든 시기에 아기를 원치 않는 산모의 바람을 거스르고 잉태된 이 건강하고 드센 아이는 삶을 향한 움직임을 저지당한 채 자주 진정제로 잠재워지면서, 모든 감각은 생존을 위해 원시적 투쟁 본능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아이 벤이 태어난 후에도 해리엇은 아이의 행동에 이유를 붙이고 싶어했다. 벤의 존재로 인해 '가여운' 사촌은 사랑스런 존재가 된다. 웃지 않는 아이, 사람을 해할 것 같은 무서운 눈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득히 멀기만 한 아이. 다른 아이들을 해칠까봐 철창에 가두어두어야 하는 아이. 집안에서 아이의 존재는 마치 공포 영화 속의 섬뜩한 악마를 연상케 한다. 태어나자 마자 아기는 지나치게 크고, 엄청나게 먹어대고, 산모의 젖꼭지를 지나치게 강하게 빨고 씹어 멍들게 만들고, 역시 아기인 형제를 다치게 만들고, 개와 고양이의 살해 혐의를 받으며, 악의에 찬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본다. 부모와 다른 아이, 형제와 다른 아이, 주변인과 다른 아이 벤은 주변은 물론 친모가 볼 때조차도 괴물이다.
아이는 한 때, 보호 시설에 맡겨지고, 잠시나마 가족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행복을 되찾지만, 친모인 해리엇만은 아이를 확인하고 싶어하고 결국 그 '보호시설'이라는 죽음의 공간에서 아이를 구해온다. 비록 임신 중, 아이의 거센 움직임 때문에, 아이를 가장 처음부터 저주한 사람도 엄마이지만, 아이와 가족 사이에 남은 것은 오로지 모성 뿐이다. 설령 진짜 괴물이라 하더라도 엄마는 내 속으로 낳은 자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피가 섞인 다른 가족이 모두 외면하고 버려두더라도 엄마만은 그럴 수 없다. 가족을 깨고 행복을 깨고 희망의 모든 끈들을 끊어버린 존재. 그래서 무섭고 밉지만, 모성애란 그런 것이다. 아이를 죽음으로부터 구해 낸 해리엇에게 향한 모든 사람들의 비난의 시선은 아이의 존재만큼이나 매정하게 묘사된다. 그들이 맡긴 그 보호시설이라는 곳은 사실상 친부모가 버린 아이를 조용히 죽도록 방치하는 곳으로, 아이를 맡긴 친부모나 보호자들은 그곳을 방문조차 하지 못하도록 계약된 곳이다. 차마 말로 옮길 수 없을만큼 끔찍한 곳이다. 우여곡절 끝에 똥오줌에 범벅이 된 채 강력한 주사제로 거의 주검처럼 방치된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 해리엇에게, 이제 막 벤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와져서 행복을 되찾아가고 있는 모든 가족들과 친척들로부터 비난과 질타를 받는 해리엇의 고독과 외로움과 스스로 택해야 했던 그 불행과 선택에 마음이 시려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누군가가 해야했을 일이라고 주장하는 해리엇, 벤의 재등장으로 인한 가족의 분열. 거기서 죽도록 내버려두었어야 했는데, 살려서 데려왔다는 이유로 모든 가족은 해리엇에게조차 등을 돌린다. 이제 모든 것은 해리엇의 책임이다. 벤은 모두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다. 벤 때문에 가족들은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길을 택한다. 벤이 싫어 부자인 할아버지가 등록금을 대는 사립 학교로 전학을 가고, 벤이 싫어 엘리트인 할머니와 양할아버지 집으로 가고, 벤이 싫어 다운증후군 사촌을 돌보기 위해 이모 집으로 가고, 벤이 싫어 아버지의 역할을 버리고 직장과 일에 파묻혀 지내고, 벤이 싫어 딸을 돌보던 친정 엄마가 외면을 한다. 명절마다 수십명이 테이블 가득가득 모여 떠들석하던 빅토리아식 대저택은 어둡고 음침한 장소가 되고 해리엇과 데이비드 가족은 벤의 존재로 모든 관계의 중심에서 멀어져간다.
엄마는 아들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아이 역시 그 적대적인 표정 속에서 무언가를 이해하려 하는 듯하다. 20세기 윤리의식을 이해하려 하는 선사시대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 해리엇은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과는 그 무언가도 교감할 수 없는 인간 아닌 인간. 그가 가진 그 선사시대의 유전자는 거친 자연과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 원시적 생존 경쟁에서 생겨난 유전자로, 우리가 이제 더는 우리가 우리를 인간이라 부르고 교감하고 공감하고 하는 것들의 가치에는 필요 없어진, 그래서 아마도 유전자 표식의 저 어둡고 깊은 곳에서 몸을 숨긴 채, 꺼져 있던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일 지도 모른다.
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그런데 벤이 어떤 형태로든 어울리는 세상이 있다. 하릴 없어 정원을 돌봐주던 한량, 동네 깡패들, 학교를 밥먹듯 빠지고, 몰려다니며 문제를 일삼는 청소년들. 아이돌보미와 친정 엄마도 손을 들고 떠난 그곳에서 해리엇은 아이를 동네 건달들 손에 맡기고, 집을 떠나 있도록 한다. 동네 건달들의 오토바이 뒷좌석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어린 벤의 하루는 무엇일까. 어째서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벤은 동네 건달들에게는 받아들여지는 존재였을까. 벤은 단지 해리엇과 데이빗이 규정하고 추구했던 그 '행복'이라는 틀 안에서 벗어난 조금 다른 인간이었을까.
그렇다면 백인 사회의 흑인, 이성애자 사회의 동성애자, 키큰 사람들 속의 난쟁이들, 부자들의 동네에 이사온 가난한 소녀 등과 같이 그저 다수와는 다른 소수였던 건 아닐까. 우리가 옳다고 규정한 것들, 현대인이 당연시되는 모든 교감과 언어의 틀 안에는 어떤 종류의 편견이 괴물과 인간 사이를 가르고 있는 걸까. 우리가 알고 당연시 여기는 것들의 틀 속에 전혀 맞지 않은 아이, 그래서 의사도 그 어떤 전문가도 병명을 말해줄 수 없던 아이, 해리엇이 힘들어 한 건 아이가 그 어떤 전문가에게서도 어떤 뚜렷한 '병명'을 받아낼 수 없었고 학교에서조차 너무 평범한 아이여서 큰 말썽조차 없는 정상인의 범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괴물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이질적인 것들을 배척하고 동질의 순수한 것들끼리 어울려야 한다는 인간의 강박적 윤리의식이, 밤하늘의 별만큼보다 헤아릴 수 없는 유전자의 조합 속에 단지 한 가닥 다른 꼬임이 만들어 낸 차이를 괴물로 인식하도록 오랜 세월에 걸쳐 합의해왔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