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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지만, 뒤돌아 보면 대개는 자잘한 일들이고, 무엇 하나 예를 들어,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담을 만한 일들이 없이 평범하게 지루하게 지나간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는 죽을 것처럼 힘들고 또 어떤 순간에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쁘다. 그런 기쁨과 슬픔과 행복과 불행과 같은 감정들을 모두 잘 모으고 배치하면 누구의 삶도 소설이 될까. 그것을 배열하고 어떤 곳에 쉼표를 찍고 또 적절한 감정에 확대경을 들이대어 완성한 소설은 겉으로는 비루한 초라한 인생살이도 조용한 빛이 아름다은 조명 아래 한 사람을 비출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소설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스토너의 인생은 그의 동료, 그의 가족, 그의 학생들에겐 그저 한 조각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었겠지만, 그렇게 조용히 살아간 인생이 독자에겐 모진 풍파와 시련이 할퀴고 간 숨가쁜 순간들로 그려진 아름다운 알프스 산 같은 그림이 되었다.
대학 교수라고 해서, 평범하지 않은 인생밖에는 살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스토너가 영문학을 하게 된 배경에도 극적인 전환은 없다. 침묵과 인내와 노동만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믿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어느날 아버지를 방문한 구청 혹은 동사무소 쯤 되는 직원에게서 권유받은 농업대학입학이라는 옵션이 그의 인생을 바꿔주었을 때도, 스토너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 아직. 먹고 자는 댓가로 감내해야 했던 이모집살이의 노동과 단벌의 시골출신 외톨이에게 찾아온 첫번째 사랑은 영문학이다. 그것이 뼈마디가 부스러질 때까지 노동으로 평생을 바치게 될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고 한다면 극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의 사랑을 알아차린 교수처럼, 그 역시 일생을 교정에 몸과 정신을 맡기고 지나간 시대의 문학 작품들을 읽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논문을 쓰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인 그렇게 아무 변화없는 일생을 지내게 될 터였다.
이디스와의 사랑은 시련이었을까. 힘든 농사일에서 벗어난 그에게 주어진 댓가였을까. 한 달 만에 실패임을 알아차린 결혼. 그녀의 행동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화가날 지경이지만,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자집 딸에게 가난에 쩔고 궁색함이 몸에 밴 어떤 띨한 남자가 청혼을 했는데, 사랑하는지 어쩌는지 확신도 없으면서 부모에게 소개를 하고, 또 그 부모는 바로 그 자리에서 허락을 하는 결혼이라면, 무엇이 그렇게 서둘러 이디스를 남자에게 보내도록 만들었을지 그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그들의 딸이 같은 운명을 살게 된 다음에야 생각해 보앗다. 딸은 부모를 견딜 수 없고, 부모는 딸을 견딜 수 없고, 그렇게 서로 도망쳐야 했을 사연이 있을 것이다. 존 윌리엄스는 끝까지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의 우리라면,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서로에게 자신을 깎아먹고 스스로를 욕보이는 것이며, 또 얼마나 모질게 스스로를 벌주는 것인지를 충분히 인지했을 것이다. 헤어졌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헤어졌을 것이다. 어느 쪽이 원하든. 서로는 서로에게 불행일 뿐이었다. 이런 저런 심리학 책도 많이 나와 있고, TV에서 매일 떠드는 상식도 있고, 최소한 어릴 때의 뿌리 깊이 각인된 어떤 상처, 어떤 학대 그런 것을 찾아내려는 노력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뭐 식탁을 뒤엎거나 서로를 때리거나 증오로 가득찬 말다툼을 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런 행동들이 선행랬다면 최소한 서로에게 인간적인 기대와 실망이 함께 했을 것이므로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너무 쉽게 성사된 결혼이 끝난 후, 결혼날에도 치르지 못한 딱딱하게 굳어진 초야를 겁탈당하듯 혹은 참아 내야 하는 시련 쯤으로 여기고 끝내고 화장실 가서 토하는 여자. 이보다 더 절망스러운 관계가 어디에 있을까.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걸 알고 나서 오히려 조금은 덜 쌀쌀맞아지고 관계가 나아지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여자. 독자로서 마음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 이디스는 스토너의 인생 곳곳에 불행을 심어놓는 여자로 밖에는 묘사되지 않지만, 그것이 그대로 딸을 향해 반복되었을 때는 분노보다는 딱했다.
첫번째 사랑, 영문학, 두번째 사랑 결혼 한 달 만에 실패를 깨달은 이디스, 그리고 세번째 사랑은 딸이었다. 아이를 돌보지 않고 아이의 기저귀 냄새조차도 견딜수 없어했던 이디스는, 그래서 아기에서 아이가 될 때까지 아이를 남편의 보살핌 아래 두고 자신은 시체처럼 스스로를 가두고 지냈던 이디스는 이제 아이가 크자 아빠와 딸의 그 조용한 교감도 참지 못하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신했다. 아이와 아빠의 관계를 견딜 수 없던 이디스는, 아이가 크자 사사건건 자신이 어릴 적 부모에게서 강요받았던 방법으로 아이를 다룬다. 아빠와의 대화를 차단하고, 서로 함께 있는 시간을 막고, 예쁜 옷을 입히고, 파티에 내보내고, 책을 못읽게 막고, 남자들에게 사랑받아야 한다고 강요하고. 아이는 엄마가 원하는 방법대로 아무 저항없이 커나간다. 그리고 임신을 하자, 당장 남자를 불러들여 결혼을 강요하는 엄마의 말 또한 잘 듣는다. 스토너와 같은 부류의 또다른 피해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임신을 하고, 집을 나가기 위해 결혼을 하고, 그 불행한 결혼을 견딜 수 없어 자원입대했던 아기 아빠는 스토너보다도 더 기구한 운명으로 전장에서 사라지고, 아기는 시댁에 맡긴 채 아이는 알콜중독자가 되었으나, 스토너는 그 딸에게 말한다. "네가 술을 마실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이 얼마나 기가막힌 말인가. 현실을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알콜 중독자가 된 딸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고 하는 대신 진정 가슴에서 술이라도 마실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이디스 말고 그의 인생을 엿먹이는 또다른 동료교수는 거의 100여젼전의 반대쪽 땅 교수사회와 현재 한국의 교수사회가 그닥 다를 바 없다는, 아니 교수 사회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집단 속에서 생기는 관계라는 것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읽고 나서, 너무나도 아쉬워서,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서,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찾아 들었는데, 그런 말을 했다. 진행자 이동진이 큰 정의와 작은 정의가 있는데 스토너 같은 경우는 입대와 같은 큰 정의는 외면하지만, 수준 미달인 학생을 합격시켜야 하는 아주 작은 정의에 대해서는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잖아요? 라고. 그렇지만, 그런 작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도 우리 사회에는 필요하다는 것. 반드시 나라를 위해 싸우고, 큰 일을 위해 압장서고 그것만이 정의이고 그 밑의 사사로운 일들은 정의롭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만이 지배적이면 안되지 않나. 그 말에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하지만 큰 정의이건 작은 정의이건, 그 정의를 정의하는 것은 개인이기에, 특히나, 그가 다룬 인간은 장애라는 벽을 가졌기에, 어떤 사람의 잣대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가늠하는 일은 어렵다.
그의 인생이 우리들의 인생보다 더 불행했을까 혹은 더 행복했을까 그의 고통은 극적인 클라이맥스가 아니어서 불행이라 칭할만큼 돗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이 늘상 겪어내는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하고 자잘한 인관관계의 실패들과 닮았다. 많은 사람들을 쓸어 모으는 매력을 지니지 않은 그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한 인간의 주변 관계는 한두 사람의 헌신적 관계에 의해 많은 삶의 부분을 영향받는다. 그 속에서 더 행복해졌을 수도 있었을 사람을 사랑을 놓친 것이 안타깝지만, 또한 그렇게 떠남과 이별을 경험하는 것 역시 인생이다. 하지만 영문학 교수로서 자신의 별 것 아닌 정의를 지킨 결과가 그의 입지를 평생동안 쪼그라뜨렸을 망정, 그의 첫번째 사랑 영문학만큼은 평생 그의 열정이고 행복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하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그렇게 불가능한 환경에 주어졋다는 것, 어쩌면 처음의 그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면 훌륭한 학자로서의 가치를 평생 일구어간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잘 읽히면서도, 길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마음을 적신다. 쓸쓸한 가을에 어울리는 소설이다. 참고로, 50년간 묻혀있던 소설이다. 어렵게 어떤 출판사 사장이 오랫동안 친구였던 중고서적 주인에게 이런 소설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절판된지 몇십년만에 재출간했으나 10년동안 4천권 팔린 책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떤 티핑포인트를 갑자기 지나면서 그야말로 책을 읽는 독자들의 눈에 띄었고 폭발적으로 판매가 늘어난 모양이다. 그 시작점은 유럽이었다. 미국에서는 4천권 팔리는 동안 유럽으로 번역되어 퍼졌고, 유럽에서 먼저 베스트셀러에 진입해서 다시 미국으로 추세가 이어진 모양이다. 앞으로 존 윌리엄스 책이 더 많이 출판될 것 같고. 기대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