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 제21회 전격 소설대상 수상작
기타가와 에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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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나, 한국이나 극심한 청년 취업난을 이용하여, 인격을 침해하고 모독하는 사주와 나이만 먹은 선배들이 있다. 어렵게 중소 기업에 입사하여 영업사원을 뛰고 있으나 폭력적 언어와 때로 물리적 폭력에 가까운 상사의 대우를 참고 견디는 일이 힘겨워 매일 힘겹게 지하철에 몸을 싣는 대신 그곳에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일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인류 역사 이래로, 가장 찬란한 나이의 청춘들이 가장 많은 자살을 꿈꾸고, 또 실제로 자살로 이어지는 비율이 오늘날만큼 압도적으로 많아진 적이 없었다. 얼마전 사피엔스에서 읽은 내용을 돌이켜보면, 전쟁에서 죽는 청년과 자살로 죽는 비율을 비교해볼 때, 인간이 모질게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은 그 모든 일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신앙과도 같은 개인주의 사상이다.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달려오는 철로에 몸을 던지고자 눈을 감고 의식을 놓고 있는 아오야마와 같은 순간과 비슷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수많은 청년들, 직장 초년생들이 있을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애를 쓰다가 겨우겨우 바늘구멍 같은 정규직 직원이 되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경쟁 현실은 자주 가혹하다. 널리고 널린 실업자들을 아무때나 갖다 쓰면 된다는 마인드를 가진 사측에게 초년생들은 때로 아무렇게나 불쏘시개처럼 쓰다 버릴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떻게 적응을 하여 실적이라도 높이려니, 이젠 그를 음해하고 시기하여 음모를 꾸미는 선배가 나타난다. 어렵게 따낸 주문이 잘못되어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힐뻔한 아오야마는 철로에서 자신을 구해준 동창생에게서도 더 이상 아무 위로를 얻게 되지 못하고, 옥상의 철문이 열리는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다. 


죽음이 삶보다 더 아늑해보이는 현실. 그것이 다른 이의 죽음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삶을 하루 하루 채워가기 위해 일하는 직장에서 똑같은 사람들끼리 경쟁하는 사회라는 그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면,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런 처지에 내몰려, 앞으로도 나가지도 뒤로 빼지도 못한채 낙오되었다는 생각만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그렇게 힘겹게 채우고 있을 오늘날의 청년들을 생각하니 늙으신 부모님들 이상 마음이 아파온다. 세상은 속상한일 천지다. 


이 소설은 약간은 자기계발적인 마인드로,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듯하다. 인간 취급을 하지 않고, 이직률이 높은 회사는 관두면 되는 거다. 다행히도 아오야마는 임상심리사라는 새로운 분야의 인턴으로 일을 하는 것으로 훈훈하게 끝나지만, 몇년씩 직장을 구하다가 겨우 구한 직장을 그만두는 일이 대개는 죽음 만큼이나 힘겨울 것이다. 게다가 아오야마의 부모가 따스하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현실의 부모들이라면 돈 벌기가 어디 쉬운 줄 아냐, 몇 달도 견디지 못하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거냐고 등떠미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만큼 참고, 노력하다가 그만둘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전적으로 다시 개인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만둔다고 누가 대신 밥값을 벌어다줄 것도 아니니 말이다. 알바와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끊임없이 정규직으로의 꿈을 꾸는 대신 다른 대안이 없을까. 찹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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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 - 1 - 식민지의 어둠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 1
황석영 엮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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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편의 한국 단편 선집이라면 한국의 현대 문학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에 이르는 모든 단편들을 대표하는 선집인데 이런 것을 문단의 어른인 황석영 작가가 기획하게 된 것은 2000년부터이나 신수정 평론가와 함께 작품 선정과 설명의 공동작업을 하게 되면서 진척이 생겼다고 한다. 기존 선집들이 '신문학 형성기 이후 작단에 이름을 올린 거의 모든 작가들의 잘 알려진 작품' 위주로 소개하고 있어서 지난 시대에 나온 작품집들과 차별화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이 작품집을 기획하게 된 계기인 것 같다. 


그러니까 중고등학교에서 정해준 모두 알고 있는 그 제목의 소설만 계속 이런저런 이름으로 계속 재출판되고 다른 작품들은 선집을 통해 읽어볼 기회도 없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내가 학교다닐때는 염상섭 하면 표본실의 청개구리, 김동인 감자 이런 식으로 항상 작가와 작품을 한쌍으로 해서 자동 생각나도록 외우게 했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교과서도 아닌 선집에서조차 그런 형태를 보였다면 작가가 단편 한편만을 쓰고 죽은 것도 아닐텐데 설사 여러 작가의 대표작들을 앵무새처럼 말하지 못하더라도 작가와 작품을 연결하거나 작품의 제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시대에 지어진 작품을 그 때의 역사와 당대 사회 구조와 사람들의 의식들이 반영된 작품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보는 일이 훨씬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기를 작품의 선정은 작가를 먼저 선정하고 그 작가의 작품 하나씩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80년대까지 70명의 작가를 그 이후 31명의 작가를 신수정 평론가가 주로 골랐고 그 작가의 작품은 가장 잘 알려진 것보다는 덜 알려진 것으로 황석영 작가가 주로 골랐다. 1편은 식민지의 어둠이라는 주제로 염상섭 이기영 현진건 채만식 김유정 이태준 박태원 강경앵 이상 김사랑의 작품이 각각 실렸고 매 작품마다 낱말풀이와 황석영 작가의 작품해설이 함께 실려있다. 내 경우 단편 뒤에 실린 평론가의 평론은 뭔소린지 너무 현학적이어서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득도 납득도 안되는 말도 많아 잘 안읽게 되는데 황석영작가가 직접 쓴 해설은 일단 쉽게 읽혀서 좋다. 

 첫작품은 염상섭의 《전화다. 식민지 시대의 문학은 어둡고 가난과 절망만이 짙게 깔려있을 곳 같아 읽기가 망설여지는데, 그 거친 돌틈에서도 서민들의 생활은 언제나 계속된다. 역사의 장막에 가려진  소시민들의 삶, 이 작품은 소세키 풍의 유머를 찾아볼 수 있는 유쾌한 작품이다. 옛날에는 전화 개통을 하려면 신청자가 공급보다 훨씬 많아서인지 추첨을 해서 당첨되어야만 가능한데 이주사가 바로 운이 좋아 전화기를 들여놓게 된다. 전화를 놓고도 걸려오는 전화가 없어 이틀이나 기다리지만 처음으로 온 전화는 남편 이주사가 마음을 두고 들락거리는 채홍이라는 기녀다. 당시 전화기는 지금으로 따지면 최신 기술을 갖춘 뭐 대문짝만한 곡선 형 LED티브이보다도 더 귀한 물건이었을테지만 빚을 내어 들여놓은 전화기가 결국은 이주사의 기녀 출입의 수단이 되고 어쩌다 보니 주인아씨는 전화로 그들을 매개해주는 꼴이 되어버린다. 

바가지를 벅벅 긁으면서도 비꼬는 건지 체념한 건지 한편으로는 기방 출입을 묵인하는 것 같은 아내도 재미있는 캐릭터지만 기녀 한 명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남자들 사이의 쟁탈전에서도 전화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백석 평전을 읽다 보면 일제가 어느 순간 아예 한국어로 된 글을 어느 잡지에도 싣지 못하게 막는 때가 오는데 아마 그 전에 출판된 것이것이고 탄압을 우회하기 위해 소재에 많은 제약들이 있었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일제 치하의 어두움보다는 소시민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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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작가수업 2
김형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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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한강 작가가 팟캐스트 방송에서 했던 말들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다. 5.18 피해자들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보니, 그들을 가슴에 담고, 그들에게 고스란히 자신을 투영한다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작가수업 시리즈의 두 번 째 책인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에서 김형수 작가는 소설가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단순히 소설이라 부르는 것, 읽히는 것, 그리고 시라 부르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닌, 예술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가 갖추고 닦아 나가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강 작가의 말 중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작중 인물이 소설가에게 하나의 살아 있는 거기 그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는 유기체로 느껴지는 시간들에 대한 것이었었다. 소설가는 작중인물들이 그냥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가상의인물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도중 생생하게 살아 작가와 함께 울고 웃고 하면서 성격이 부여되는 하나의 유기체로 느낀다는 말을 김형수 작가도 언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몇 몇 소설가의 후기라든가 인터뷰 기사들을 예로 들면서 작가가 소설을 끝낸 후 작중 인물과 이별을하는 의식, 그리고 또 그 작중 인물을 이야기할 때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이야기하듯 사람 취급을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들이 일부로 똥멋을 부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 결국 독자에게 한 방울의 눈물은, 작가에게는 한 양동이의 눈물을 쏟아냈을만큼 작중 인물들과 그 삶을 동거동식하며 똑같이 느끼며 살아 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의 경우, 마치 소설이 끝난 후, 자기는 그 주인공이 자살했을 거다. 아니다. 살아있을거다. 뭐 이런 식으로 그 이후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좋은 소설의 경우 이것은 독자들에게도 비슷한 일을 겪게 된다. 흔히 울림이 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읽고 나서도 책을 덮고 나서 오랫동안까지 작중인물들의 이후 삶이 궁금해지고 그립고 보고싶어지고, 때로는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전 읽은 스토너가 바로 그 중 하나였다. 내가 리뷰를 쓰면서 주인공의 아내 이디스를 이해못하겠다고 적었는데,에 이바님이 아마도 아버지의 폭력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라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부모의 폭력, 학대 혹은 잘못된 사랑으로 인해 아직 어떤 찬란한 앞길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무한한 가능성의 젊은 영혼들이 청춘을 만났을 때 스러지고 바스러지다가 심지어 생을 포기하는 경우까지도 흔한 세상, 분명 어떤 상황이 이디스의 현재를 감옥으로 만들었을 것이었고, 자신의 그 살아내기의 힘겨움 때문에 착한 남편마저도 희생물이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녀의 삶이 궁금하다. 소설 이전의 문제, 그녀가 감내했어야 했을 어떤 학대 같은 걸 생각하면 나중에 남편이 죽을 때 울면서 간호하던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그 착한 남편과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지옥같은 생을 보냈어야만 했을 마음의 병이 안타깝다. 

《삶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1편의 제목이 삶이 언제 예술이되는가 였는데, 그 때 했던 이야기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공적인 것의 바탕위에서 사적인 것의 디테일들이 만들어진다는 내용이었다. 민주화 투쟁에 몸을 담았던 사람의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문장이 주옥같았다고 느껴서 다음 편이 나오면 기필코 읽어야지 라고 기대했던 마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은, 더 잘 다듬어지고 많이 준비하고 응축된 핵심들을 주옥같은 언어로 만들어낸 강연집이다. 강연체로 되어 있는 경우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대체로 한 말 또하고 다시 정리하는 식으로 가독성을 높이는 책들이 많고 그런 방식 역시 좋아하는 편인데, 왜냐면 줄치고 나중에 다시 보지 않아도 중요한 말을 책을 읽으면서 반복적으로 받아들이다보니 기억되는 게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대표적인 경우가 얼마 전 읽은 고종석의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이고, 그렇지만 이 책은 엑기스만 정제한 느낌이다. 강연체임에도 허투른 말 하나마나한 대목 한 구절 없고 그래서 200쪽 남짓 얇은 책임에도 300쪽 이상의 내용이담 있다. 


소설을 쓸 것도 아니고, 시를 쓸 것도 아니고, 왜 이런 책을 읽어야 하지? 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는 언젠가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겠나 라는 생각으로 시리즈의 첫권을 읽었고, 그 책을 읽고 나서는 책을 읽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고 시를 읽을 때 자잘한 상식적인 것들만으로도 안목이 생기지만, 소설가나 시인의 근본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해했을 때에 소설을 보는 새로운 눈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을 읽은 후 그 소설을 해석하는 데에도 한몫하고,또한 리뷰를 쓸 때에도 도움이 된다. 줄거리만 요약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떨 때는 왜 어떤 작중 인물이 그토록 작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은지 몇달 혹은 몇년이 넘도록 마치 친구처럼 혹은 떠나보낸 애인처럼 그토록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건지 그 은밀한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는데, 엑기스만 발췌한 폭풍 인용문이 보너스로 제공됨

경험한 세계만 그리려고 고집했을 때 생겨나는 문제... 첫번째, 사적 감정이 제어되지 않습니다. 자기 연민 속으로 끝없이 익사해요... 공주병? 왕자병? 또하나는 나의 한계로 주인공의 한계를 그어버린다는 겁니다. p47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장르의 틀'이 아니라 '감동의 틀'입니다... 우리 문학에서 나타나는 아쉬운 현상 중의 하나가 신춘 문예 당선 작품집을 보면서 공부하여 형식이나 분량까지 거기에 맞춰서 쓰는 경우가 많다는 거에요... 낡은 제도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틀 속에 스스로 구속당하기 위해서 줄을 서는 것과 같습니다. p49


고교 백일장에 도둑처럼 끼어든 시인이, 청춘 그 자체로 시인이라 불리는 세대의 감정을 복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p56


철도는 여행의 불편이나 위험만 제거시킨 게 아니라 여행자의 지각 자체를 구조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깊이와 음영의 소실 , 풍경으로부터 공간성의 제거, 이런 것들로 인해 산업혁명 이전까지 지각할 수 있었던 풍경들이 열차의 속도에 의해 날아가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망각합니다...  별로 두텁다 할 수 없는 어둠의 커튼 하나를 통과하면 울란바토르에 닿아요. p65


그래서 그 '아무것도 없음'을 눈이 빠지게 견디느라 유목민의 시력은 5.0이 되었습니다. p66


착시 현상에 의해서 '넘실거리는 바람결' 같은 표현들을 생각해내고 써나갈 게 아니라 각자 생애의 발자국 위에 얹힌 시월의 모습을 살펴보는 게 훨씬 빠르고 쉬운 길이에요... 내 발자국을 뒤져도 '시월'이 없으면 나와 밥상을 같이 사용한 엄마, 할머니, 아버지, 형, 언니의 발자국에 얹힌 것을 다시 찾아보세요. 거기에 내가 쓸 이야기가 놓여 있을 거에요.p70


대부분의 독자는 아주 미세한 디테일 하나에서 실감을 전해받습니다. ... '세부의 비진실성은 작품 전체의 진실성에 파탄을 가지고 온다'는 거에요. p76


창작 동기가 내 안에서 솟구쳐 나와야 열정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올라요. 그래서 작품의 밑바탕에는 작가의 삶이 알리바이로 깔려 있어요. p76


거창한 것보다 하찮은 것이 더 좋은 소재입니다. 매우 하찮아 보이는 계곡을 타고 들어가면 거창한 진실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 즉, 하찮아 보이는 데 ㅡㄴ 것, 이게 굉장히 좋은 글감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p79


...우울함의 진정성이 안 느껴진단 말입니다. ... 이런 걸 사적 감정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기적 감정, 배타적 감정, 이런 건 개인적 내면에서 크게 절실히 굽이쳐도 노래가 될 수 없어요. 080


탄광 벽면에 "엄마 배고파요".. 이런 낙서 말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땅에서 뿌리 뽑힌 자들,... 근거지를 잃어야 했던 한 공동체의 슬픈 역사가 아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하찮아 보이는 사감들, 개인의 삶에 담긴 슬픔이나 기쁨도 어떤 것은 세상에 널리 이롭고 어떤 것은 이웃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p81


앞에서 뒤 문장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줘야 다음 문장이 들어올 수 있어요... 앞 문장이 어떤 자리를 만들어주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 작품은 독자적이고 유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인지라.... 순간에 생겨나는 감수성에서 발생... 즉 앞문장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뒤 문장에 치고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에요. 이걸...'표현의 순차성'이라 해요 p97


작가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작품이 가득 들어있어요. 그 중에서 가닥 하나를 잘 잡으면 뒤 문장이 줄지어 나오는데 그 가닥이 어디 있는지는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p99


형상언어를 모르고는 살아 있는 성격을 그릴 수가 없어요... 첫 문장은 느낌의 순차성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소설 쓰는 사람들이 시집을 많이 읽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신이 내리는 말이 어떤 식으로 오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서정적 환기력이 크지 않으면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끌고 가기가 어렵기 때문이에요.p102-103



고향을 상징하는 정서적 등가물이 있어야 고향 추억에도 주봉이 있게 되고, 그래야 마음도 추억의 길을 잃지 않거든요. 사물로서의 양철북은 권터 그라스의 서사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도구에 불과해요. 그러나 양철북 때문에 이 작품은 주봉을 잃지 않아요. 주인공이 들고 있는 사물이잖아요. 주인공은 미숙아입니다. 나치가 천하를 장악하고 있던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성장이 멎어버린 인간이에요. 이렇게 성장이 멎은 자가 나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까 갑자기 쑥 커버립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삶의 표현의 도구가 양철북이에요.... 정서적 등가물을 찾아내기 전에는 첫 문장을 확정짓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웰컴투동막골>.. 소녀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된 정서적 등가물이 나비에요. 그 작품의 정서적 등가물로서의 나비 형상은 이야기의 질을 갑자기 동화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립니다.... 그 작품이 유지하고 있는 긴장의 깊이와 사회의식의 심화수준에 비추어 상징의 무게를 조금 떨어뜨렸다고 보이는 거에요. p122



인간의 의식이 집중을 우선하느냐 개괄을 우선하느냐의 문제... 집중을 우선하는 자는 구성을 중시하지만 개괄을 우선하는 자는 총체적 인식을 중시합니다... 개괄과 집중을 수행하지 않으면 독자가 객관 대상을 파악할 수 없을 뿐더러 쓰는 자가 스스로의 문맥 속에 갇혀 길을 잃는다... 카메라에 비요한다면 앵글이 하늘 높이 떴다가 코앞에 맞닥뜨릴 만큼 이동합니다. 이 이동을 능란하게 자유자재로 하면 할수록 실감의 크기가 커집니다.... 문장을 밀고 당기는 거에요... 개괄과 집중이 잘된 소설이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입니다... 소설의 행간에서 수많은 조선의 어머니를 사유하게 됩니다. 한 번도 자기 운명의 주인인 적이 없었던 사람들....모든 집중은 훌륭한 개괄 위에서 가능합니다.... 개괄과 집중의 요령은... 문장 하나하나에서도 구현되어야 합니다. p135


사적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내면 남들이 징징거린다고 생각할 겁니다.... 징징거리는 것은 시가 아니다, 큰 슬픔을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감정이란 지극히 공에 이르러야 '전형'이 되고 '시대적인 것'이 된다는 얘기... 이게 서정이라고 하는 어떤 정서적인 형태를 예술 재료로 사용하고 있는 장르의 운명입니다.... 밀란 쿤데라의 말입니다. '이제껏 알려져 있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삶의 새로운 측면을 밝혀내지 않은 소설은 아무리 새로운 의상을 걸쳐도 낡은 소설인 것이고...p152


도시빈민 문제로 시위를 할 때입니다. 학생들이..."도시빈민 탄압하는 X태우를 불태우자" 이랬어요....

당시 노점상들이 구호를 어떻게 외쳤냐 하면 "애태우고 속태우는 X태우를 불태우자" 이래요. 개념적인 사유에 훈련된 사람들은 4.4.조에 맞춘거고, 개념화 습관이 안되어 있는 사람들은 생활 감정을 운율에 타운 거에요....<석탄가>라는 민요에서...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풀풀 나고요. 우리네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아니 나네"  언어공동체에 의해서 수많은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혀와 입술이 만져서 닳고 닳은 나머지 운율 상으로 거의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던 겁니다... 운율의 생명감, 이것이 개념적으로 말을 만들어서 생겨나지 않아요.p154


낯설게하기는 어떤 유파의 몫이 아니라 문학의 본질과도 같은 것입니다 맨 처음에 만난 것처럼 떨림과 두근거림과 생소함을 되찾게 하는 것, 이것이 낯설게하기입니다.김산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아리랑>의 도입부... 봄볕이 쌓일 때 그 적막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고요해서 햇살이 쌓여서 겹치는 것이 귀에 감지될 정도지요. 이런 적요는 그 속에 담긴 모든 사물을 굉장히 아름답고 조용하고 슬프게 만들어요.p161


행정언어, 법률언어, 의사들이 사용하는 언어... 이런 것들 중에 삶의 실감하고 동떨어진, 일부러 화석화된 언어를 사용해서 일상적 소통을 차단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168


생득된 형식의 저수지이자 창고인, 민요, 속담, 구비문학의 여러 전통들을 사실은 게속 읽고 써야 해요. 178


세익스피어가 구축한 그런 어문 구조들 때문에.. 능력있는 언어를 구축하게 됐어요. .. 러시아어의 능력을 확대한 이로 푸쉬킨을 꼽고 한국어의 능력을 확장시킨 이로 김소월을 꼽습니다. 시라고 하는 장르는 짧은 문장으로 복잡한 세계를 담아놓기 때문에 각기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어문구조들을 확보해서 재산으로 간직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p181


무사가 칼을 휘두르듯 언어를 다뤄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동력이... 진정성에서 나와요... 마음을 글로 옮겨 놓으면 거기서 풍겨나는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독자를 속일 수 없어요 210


21세기 문화로 넘어오면 묘사의 축소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서사 자체는 계속 약화되고 묘사만 강화되어 가분수가 되고 마는 경향 때문에 묘사가 약해지면서 서술이 강해지는 쪽으로 작품이 흘러가고 있어요. 밀란 쿤데라도 농담 이후 변화 과정을 보면 불멸을 지나면서부터는 확실히 묘사 중심주의가 아니에요..... 묘사의 강화를 통해서 서사가 강화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서사의 강화로 인해 묘사를 축소해가는 경향으로 흘러가는 게 지금 소설의 흐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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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고등 세트 (최신판, 전5권) (특별부록 :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고등 가이드북)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시리즈
고화정 외 엮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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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가 여러 종류이고 또한 개정을 계속 하다보니 어떤 작품이 실렸는지 몰라 궁금햿는데 이 세트에 모두 실려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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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1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uiness님, 좋은밤되세요.^^

CREBBP 2016-01-10 22: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굿나잇 서니데이님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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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지만, 뒤돌아 보면 대개는 자잘한 일들이고, 무엇 하나 예를 들어,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담을 만한 일들이 없이 평범하게 지루하게 지나간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는 죽을 것처럼 힘들고 또 어떤 순간에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쁘다.  그런 기쁨과 슬픔과 행복과 불행과 같은 감정들을 모두 잘 모으고 배치하면 누구의 삶도 소설이 될까. 그것을 배열하고 어떤 곳에 쉼표를 찍고 또 적절한 감정에 확대경을 들이대어 완성한 소설은 겉으로는 비루한 초라한  인생살이도 조용한 빛이 아름다은 조명 아래 한 사람을 비출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소설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스토너의 인생은  그의 동료, 그의 가족, 그의 학생들에겐 그저 한 조각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었겠지만, 그렇게 조용히 살아간 인생이 독자에겐 모진 풍파와 시련이 할퀴고 간 숨가쁜 순간들로 그려진 아름다운 알프스 산 같은 그림이 되었다. 


대학 교수라고 해서, 평범하지 않은 인생밖에는 살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스토너가 영문학을 하게 된 배경에도 극적인 전환은 없다. 침묵과 인내와 노동만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믿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어느날 아버지를 방문한 구청 혹은 동사무소 쯤 되는 직원에게서 권유받은 농업대학입학이라는 옵션이 그의 인생을 바꿔주었을 때도, 스토너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 아직. 먹고 자는 댓가로 감내해야 했던 이모집살이의 노동과 단벌의 시골출신 외톨이에게 찾아온 첫번째 사랑은 영문학이다. 그것이 뼈마디가 부스러질 때까지 노동으로 평생을 바치게 될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고 한다면 극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의 사랑을 알아차린 교수처럼, 그 역시 일생을 교정에 몸과 정신을 맡기고 지나간 시대의 문학 작품들을 읽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논문을 쓰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인 그렇게 아무 변화없는 일생을 지내게 될 터였다. 


이디스와의 사랑은 시련이었을까. 힘든 농사일에서 벗어난 그에게 주어진 댓가였을까. 한 달 만에 실패임을 알아차린 결혼. 그녀의 행동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화가날 지경이지만,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자집 딸에게 가난에 쩔고 궁색함이 몸에 밴  어떤 띨한 남자가 청혼을 했는데, 사랑하는지 어쩌는지 확신도 없으면서 부모에게 소개를 하고, 또 그 부모는 바로 그 자리에서 허락을 하는 결혼이라면, 무엇이 그렇게 서둘러 이디스를 남자에게 보내도록 만들었을지 그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그들의 딸이 같은 운명을 살게 된 다음에야 생각해 보앗다. 딸은 부모를 견딜 수 없고, 부모는 딸을 견딜 수 없고, 그렇게 서로 도망쳐야 했을 사연이 있을 것이다. 존 윌리엄스는 끝까지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의 우리라면,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서로에게 자신을 깎아먹고 스스로를 욕보이는 것이며, 또 얼마나 모질게 스스로를 벌주는 것인지를 충분히 인지했을 것이다. 헤어졌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헤어졌을 것이다. 어느 쪽이 원하든. 서로는 서로에게 불행일 뿐이었다. 이런 저런 심리학 책도 많이 나와 있고, TV에서 매일 떠드는 상식도 있고, 최소한 어릴 때의 뿌리 깊이 각인된 어떤 상처, 어떤 학대 그런 것을 찾아내려는 노력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뭐 식탁을 뒤엎거나 서로를 때리거나 증오로 가득찬 말다툼을 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런 행동들이 선행랬다면 최소한 서로에게 인간적인 기대와 실망이 함께 했을 것이므로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너무 쉽게 성사된 결혼이 끝난 후, 결혼날에도 치르지 못한 딱딱하게 굳어진 초야를 겁탈당하듯 혹은 참아 내야 하는 시련 쯤으로 여기고 끝내고 화장실 가서 토하는 여자. 이보다 더 절망스러운 관계가 어디에 있을까.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걸 알고 나서 오히려 조금은 덜 쌀쌀맞아지고 관계가 나아지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여자. 독자로서 마음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 이디스는 스토너의 인생 곳곳에 불행을 심어놓는 여자로 밖에는 묘사되지 않지만, 그것이 그대로 딸을 향해 반복되었을 때는 분노보다는 딱했다. 


첫번째 사랑, 영문학, 두번째 사랑 결혼 한 달 만에 실패를 깨달은 이디스, 그리고 세번째 사랑은 딸이었다. 아이를 돌보지 않고 아이의 기저귀 냄새조차도 견딜수 없어했던 이디스는, 그래서 아기에서 아이가 될 때까지 아이를 남편의 보살핌 아래 두고 자신은 시체처럼 스스로를 가두고 지냈던 이디스는 이제 아이가 크자 아빠와 딸의 그 조용한 교감도 참지 못하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신했다. 아이와 아빠의 관계를 견딜 수 없던 이디스는, 아이가 크자 사사건건 자신이 어릴 적 부모에게서 강요받았던 방법으로 아이를 다룬다. 아빠와의 대화를 차단하고, 서로 함께 있는 시간을 막고, 예쁜 옷을 입히고, 파티에 내보내고, 책을 못읽게 막고, 남자들에게 사랑받아야 한다고 강요하고. 아이는 엄마가 원하는 방법대로 아무 저항없이 커나간다. 그리고 임신을 하자, 당장 남자를 불러들여 결혼을 강요하는 엄마의 말 또한 잘 듣는다. 스토너와 같은 부류의 또다른 피해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임신을 하고, 집을 나가기 위해 결혼을 하고, 그 불행한 결혼을 견딜 수 없어 자원입대했던 아기 아빠는 스토너보다도 더 기구한 운명으로 전장에서 사라지고, 아기는 시댁에 맡긴 채 아이는 알콜중독자가 되었으나, 스토너는 그 딸에게 말한다. "네가 술을 마실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이 얼마나 기가막힌 말인가. 현실을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알콜 중독자가 된 딸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고 하는 대신 진정 가슴에서 술이라도 마실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이디스 말고 그의 인생을 엿먹이는 또다른 동료교수는 거의 100여젼전의 반대쪽 땅 교수사회와 현재 한국의 교수사회가 그닥 다를 바 없다는, 아니 교수 사회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집단 속에서 생기는 관계라는 것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읽고 나서, 너무나도 아쉬워서,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서,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찾아 들었는데, 그런 말을 했다. 진행자 이동진이 큰 정의와 작은 정의가 있는데 스토너 같은 경우는 입대와 같은 큰 정의는 외면하지만, 수준 미달인 학생을 합격시켜야 하는 아주 작은 정의에 대해서는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잖아요? 라고. 그렇지만, 그런 작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도 우리 사회에는 필요하다는 것. 반드시 나라를 위해 싸우고, 큰 일을 위해 압장서고 그것만이 정의이고 그 밑의 사사로운 일들은 정의롭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만이 지배적이면 안되지 않나. 그 말에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하지만 큰 정의이건 작은 정의이건, 그 정의를 정의하는 것은 개인이기에, 특히나, 그가 다룬 인간은 장애라는 벽을 가졌기에, 어떤 사람의 잣대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가늠하는 일은 어렵다. 


그의 인생이 우리들의 인생보다 더 불행했을까 혹은 더 행복했을까 그의 고통은 극적인 클라이맥스가 아니어서 불행이라 칭할만큼 돗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이 늘상 겪어내는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하고 자잘한 인관관계의 실패들과 닮았다. 많은 사람들을 쓸어 모으는 매력을 지니지 않은 그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한 인간의 주변 관계는 한두 사람의 헌신적 관계에 의해 많은 삶의 부분을 영향받는다. 그 속에서 더 행복해졌을 수도 있었을 사람을 사랑을 놓친 것이 안타깝지만, 또한 그렇게 떠남과 이별을 경험하는 것 역시 인생이다. 하지만 영문학 교수로서 자신의 별 것 아닌 정의를 지킨 결과가 그의 입지를 평생동안 쪼그라뜨렸을 망정, 그의 첫번째 사랑 영문학만큼은 평생 그의 열정이고 행복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하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그렇게 불가능한 환경에 주어졋다는 것, 어쩌면 처음의 그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면 훌륭한 학자로서의 가치를 평생 일구어간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잘 읽히면서도, 길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마음을 적신다. 쓸쓸한 가을에 어울리는 소설이다. 참고로, 50년간 묻혀있던 소설이다.  어렵게 어떤 출판사 사장이 오랫동안 친구였던 중고서적 주인에게 이런 소설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절판된지 몇십년만에 재출간했으나 10년동안 4천권 팔린 책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떤 티핑포인트를 갑자기 지나면서 그야말로 책을 읽는 독자들의 눈에 띄었고 폭발적으로 판매가 늘어난 모양이다. 그 시작점은 유럽이었다. 미국에서는 4천권 팔리는 동안 유럽으로 번역되어 퍼졌고, 유럽에서 먼저 베스트셀러에 진입해서 다시 미국으로 추세가 이어진 모양이다. 앞으로 존 윌리엄스 책이 더 많이 출판될 것 같고. 기대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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