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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가 많으면 정말 글이 좋은 걸까. 아니다. 인기도와 활동을 나타낸다. 단순히 즐거운 주말을 지내라는 글에도 수십개의 좋아요와 추천과 댓글이 달린다. 우리는 그걸 불평하지 않는다.

당선작은 훌륭한 글들일까. 아니다. 여러 사람의 글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척도는 없으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기가 쓴 글의 퀄리티애 대해서는 자신이 잘 안다. 나는 아 이정도면 이달의 당선작에 되겠지 라고 생각한 글에 대해서는 당선작에 선정된 적이 없다. 글쓰기라는 행위에 큰 의의를 두지 않고 빠르게 느낌을 기록한 글이 , 내가 읽기에는 내놓기 부끄러운 글이 당선작이 된 적은 많다. 그리고 이리 저리 나름대로 살펴보고 추측한 결과 당선작 선정에는 의도적이건 아니건 활동량과 활동의 질이 큰 변수가 된다는 것을 눈치챘다. 매우 잘 쓴 글 하나만 매달 하나씩 올리는 사람의 글이 매달 당선작이 될 가능성은 적다.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일단 활동량이 적으면 노출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다. 많은 글들이 올라오는데 선정위원회가 그걸 다 읽어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애초 추천수가 몇개 확보되거나 자주 노출되는 글들로 선정단의 선정 범위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걸로 보인다. 어느 서점이라 하더라도 매달 수천건의 글들을 꼼꼼히 다 읽는 운영자는 없을 거 같다. 그러니까 알라딘 운영자가 일부러 작정하고 이 사람 활동 많이 하니까 당선작 뽑아줘야지 하는 게 아니라 활동량이 많고 공감될만한 글도 자주 올려 눈에 띄는 사람의 글들이 그만큼 선정위원회의 눈에도 띌 가능성이 많을 거라는 추측이다.

리뷰대회처럼 상금이 많이 걸린 이벤트 당선작들을 읽어보면 과연 상받고도 남을 만한 글들만 잘도 뽑는다. 당선작은 왜 그렇지 못할까.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선정에 따른 비용문제라고 생각된다. 잘 쓴 글에 대해 객관적 기준을 만들어내는 것도 어렵거니와 공감의 기준도 제각각인 자유로운 환경에서 당선작에 거는 기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때로 매우 성실히 잘 쓰는 글도 책 자체의 비대중성으로 인해 완전히 묻히는 경우도 있고. 휘리릭 쓰고 나서도 리뷰의 혀왹에 너무 어긋나서 나중에 잘써야지 생각했던 글이 많이 주목되는 경우도 겪다보니 나처럼 조용한 기록에 가까운 블로거들은 추천수의 갯수도 당선작 선정도 우연성에 기초한다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자신을 꾸준하게 노출하는 것 , 변덕스럽게 몇달씩 부재중 그런 거 하지 말고 꾸준히 성실하게 읽고 읽은 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것. 당선작이니 추천수니 하는 작은 함정에 빠지지 말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결국은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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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6-01-31 17: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객관적으로 봤을때 알라딘 이주의 리뷰 문제점 중 가장 큰것은 ˝제가 당선 되지 않는다는 것˝ 우헤헤헤헤헤헤

초딩 2016-01-31 17:40   좋아요 1 | URL
`완전 라이크` :-) 입니다. 라이크 한 다섯개씩하는 기능 넣아주세요 지니님~

CREBBP 2016-01-31 17:40   좋아요 0 | URL
제대로 뽑으려면 각 분야마다 평론가와 비평가 등등의 전문가를 대거 고용해야 함.

살리미 2016-01-31 18:28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우왕~ 객관적이시다!!

yamoo 2016-02-01 16:37   좋아요 0 | URL
뿜었습니다..ㅋㅋㅋㅋㅋ

통치약 님 최곱니다~!ㅎㅎ

2016-01-31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6-01-31 23:10   좋아요 1 | URL
네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래도 당선작이 되면 2만 포인트라는 거금의 적릭금이 기분 좋죠.

sb 2016-02-0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에서 뽑힌 당선작은 아무래도 노출빈도가 높은 사람 혹은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 유리한 건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좋은 글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비록 소설과 같은 문학적인 글은 비교가 힘들긴 하지만 더 좋은 글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규칙들이 있어요. 근거가 올바르고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은 글, 규칙에 맞는 글, 쉽게 쓸 수 있는 내용을 어렵게 쓰지 않은 글 등 말이죠. ㅎㅎ
그러기 위해서 꾸준히 성실하게 읽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연습해야 하니 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REBBP 2016-02-01 09:46   좋아요 0 | URL
네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런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독자의 취향이 좋아요 갯수 등에 많이 반영되는 걸 경험하고 나서 는 객관적인 좋은글과 독자가 좋아하는 글 사이의 갭은 필자가 알 수 없는 많은 요인에 좌우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yamoo 2016-02-0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가 쓴 퀄리티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정말입니다!

CREBBP 2016-02-01 18:28   좋아요 0 | URL
저도 잘 모릅니다 ^.^ 그래도 자기가 쓴 글은 정성껏 쓴 글과 대충 쓴 글을 알고 있지요 ㅎ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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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터뷰한 수백명의 여자 군인들은 저마다의 기억을, 저마다의 상처를, 저마다의 침묵으로 끌어안고 죽어야 끝나게 될 전쟁을 지속하고 있었다. 집필당시 이미 전후 40년이 지난 상황이었다. 침묵 속에 묻혔던 전쟁이 생생하게 목소리가 되어 나오자, 그들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자기들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40년의 세월을 전쟁의 파편들을 안고 늙어가는 동안 인생의 끄트머리쯤에 도달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죽고 난 다음에 멋대로 역사를 바꾸지 말고 물어보라고 한다.  



무엇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그들에게로 이끌었을까. 수년 혹은 수십년간 수백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육성을 그대로 담아내면서, 산문처럼 인터뷰 풍경과 자신의 생각을 곁들였다. 수많은 2차대전의 여전사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한 끝에 1983년 집필이 완성되었으나, 2년동안 출판사에서 묵혀 있었고 1985년 벨라루스와 러시아에서 동시 출간되었다. 수백명의 할머니들이 제각기 경험한 제각기 다른 전쟁의 기억이었다. 잘잘한 전쟁의 파편이  남은 생, 남은 생각의 구석구석 점령하고, 밤마다 포화 속, 시체 속에서 끝나지 않을 똑같은 일들을 겪는 그들이 직접 전해주는 각색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272

전설이 생명을 입고 살아나 땅에 발을 딛는 장면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크고 위대한 것이 작고 평범해지는 그 순간을.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 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여성이었다. 키보다도 높은 총을 들고, 자루같은 군복을 입고, 발이 두 개가 들어가는 군화를 신었지만, 그들은 여성이었다. 전쟁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여성들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그들은 치마를 벗어던졌고, 귀거리를 빼야 했고, 긴 머리카락을 싹뚝 잘라 밀어버려야 했다. 죽음이 삶보다 더 친숙한 최전방의 전선에서 여자의 삶을 위한 자리를 기대하는 건 사치다. 그러나 용감무쌍한 언니들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성을 버릴 수 없다. 늘 이야기 속에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함께 따라다닌다. " 그 아이가 죽어서 관 속에 누웠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거야". 알렉시에비치는 남자들의 임무 속에서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스스로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그리고 그 때문에 얼마나 자주 사소한 것들이 거대한 것들을  압도하는지를 묵도한다. 


그런데 왜 군대는 여성성을 억압해야 할까. 얼마 전 TV 군대 체험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느낀건데, 왜 여성들에게 군대 체험을 시키면서 남성도 아닌 여성을 가장 잘 아는 여성 교관이, 군인이지 여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걸까. 군인은 군인이고 여성으로서 군대에 갔으면 여성 군인인거다. 남성이 다수이긴 하지만, 소수인 여성이라고 해서 성 정체성을 억압하고 남성이 되어야만 각기 맡은 전투력이 향상되는 것일까. 그들은 그 참혹하고 거친 곳에서 수도 없는 죽음을 묵도하고 끔찍한 장면을 매일매일 일상 속에서 감내하면서도 여성성을 몰래몰래 꺼내보하였다. 


전우의 시체로 가득찬 이른 봄볕 아래 한줄기 민들레 꽃을 보기 위해 너덜너덜 다친 몸을 일으켜 세워 창 밖을 바라보았고, 고양이 한 마리에 감동했다. 귀고리를 숨겨두고 몰래몰래 한번씩 끼곤 했다.  내일 전투에서 죽을 것을 예감하고는 줄기차게 새 속옷을 요구한다. 죽는 것보다 죽음 후의 모습을 더 신경쓰는 여성이었다. 포탄에 맞아 몸이 갈갈이 찣겨 남겨지는 것이 더 두려운 여성들이었다. 갈아입지 못한 속옷을 입고 죽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은 여성들이었다. 대부분 이러한 여성성은 남성 대령들에게 의해 많이 묵살되었지만, 아버지 벌의 한 대령은 소녀 병사들을 위해 여자 미용사를 데려다주고, 눈썹과 속눈썹, 머리를 물들이는 것을 승낙한다. 그는 여러분이 예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전쟁은 길다. 금방 끝나지 않는다며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그 소녀병사들을 거의 대부분 죽음으로 내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예쁜 나이에 여성성을 버리고 남성의 얼굴을 한 그 거친 곳에서 병사들은 뛸 듯이 기뻐하고 행복해했다. 전투가 있는 날 아침이면 그들은 모두 안다. 그 날이 마지막일 거란 걸.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 공기도, 햇살도 마지막일 거란걸.


그러나 막상 전쟁터에서 남녀 구분이 없다. 2차대전에 참전한 구소련 여성 군인은 1백만명이 참전했다. 그들은 전차병, 보병, 자동소총병, 기마병, 저격수, 항공기 정비사, 운전병 등 똑같이 남자들이 하는 일을 할당받아, 똑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위생병, 간호병, 외과의, 빨치산, 연락병, 취사병, 건설기술병, 기계선반공들도 있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방 전선으로 뛰어들어 자기 몸무게의 두 배인 부상자들을 질질 끌어 나르고, 차디 찬 진흙바닥을 하루 종일 기어 다니며 지뢰를 제거하는 공병 소대의 지휘관이었고, 포탄이 떨어지는 속에서도 빵을 굽는 제빵병이었고, 그 무거운 물품들을 이고 지고 끌고 참호 속 병사들에게 전달하는 물품 보급병이었고.



그들은 아이들이었다.  열여섯 중학생 아이들이 서로 전장에 나가겠다고 군정치위원회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너무 어리다고 대부분은 퇴자를 맞았지만,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덜 끔찍한 후방이나 통신병 위생병으로 보내면, 또 최전방으로 보내달라고 생떼를 썼다. 뜻하는 대로 안되면, 바로 전선으로 걸어가 직접 합류한다. 여기 인터뷰한 여성 군인대다수가 징집이 아닌 자원입대였다. 그들은 스탈린 치하에서, 자신이 없는 조국은 있을 수 없다고 배운 소녀들이었다.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은 여자 아이는 처음으로 맞닥뜨린 피를 보자, 부상당했다고 소리친다.   아직 키가 다 자라지 않은 어린 아이들, '열여덟 열아홉에 전선에 나갔다면 그런대로 몸이 튼튼해졌을 텐데 성장이 끝나기도 전 열여섯에 나가 회복불가능한 손상을 입고 4년 만에 머리가 하앟게 세고 인생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노파가 되어 돌아온 상실된 무엇들이었다. 



무엇이 아이들을 그토록 용감하게 만들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열망하듯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상황으로 내몰 수 있었을까. 그녀들에게 목숨보다 더 소중한 그것은 무엇인가. 애국심은 이념과 함께 쌍동이처럼 붙어 다닌다. 이념은 때로 모정보다도 강했다. 꼬마 아이를 시켜 바구니 밑에 지뢰를 가져오게 하는 빨치산 연락병(엄마)의 강인함이 있었고, 온 몸이 까맣게 탄 채 독일놈들에게 끌려다니는 두 아들 형제의 시신을 보고도 마을을 지키기 위해 울음소리도 낼 수 없는 엄마의 모진 침묵이 있었고, 갓난 아기가 독일군들의 손에 유린당하며 죽임을 당하기 전에 자기 손으로 땅바닥에 패대기를 쳐서 죽이는 엄마가 있었다. 



조국을 위해 싸웠건만,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에 의해 숙청당한 것처럼, 이웃과 형제를 위해 싸우고 승전보를 울리며 돌아왔지만, 마을 사람들은, 가족은, 애인은 그들을 외면했다.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남자들과 똑같이 몸이 부서져라 싸우고 돌아와 평생을 안고 지고 살아야 할 중상들을 지닌 채 집으로 돌아온 그들을  상처입은 숭고한 전쟁 앞에서 차가운 외면의 벽과 마주한다. 여자들만 남은 마을에서 몇 안되는 살아돌아온 여자 병사들은 창녀 취급을 받는다. 군대의 암캐들이라며 온갖 말로 모욕당했다. 물론 그들도 사랑을 했다. 기약할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똑딱하는 순간의 죽음, 그렇게 가까이에 죽음이 있었고, 때로 사랑이 있었다. 전쟁중에는 전우로써 그렇게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던 남자들이 전후에는 군복냄새나는 여성들을 외면한다. 함께 전쟁을 치르고 어렵게 살아 돌아온 약혼남의 부모는 어떻게 전쟁터에서 데려온 여자와 결혼할 수 있느냐며, 네 동생들은 시집도 못간다며 내친다. 말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을 이겨낸 전쟁이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기대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미워한다. 


2천명이 아니다. 2만명도 아니다. 20만명도 아니고 200만명도 아닌, 2천만 명이 전쟁에서 죽거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스탈린 치하에서 죽거나, 전쟁에서 살아돌아왔다는 이유로 죽었다. 죽음을 비껴난 사람들은 상처입었다. 잘린 팔과 다리들은 의무실 구석에 쌓여갔으며, 세상 어딘가에 몸이 성한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간호병이 있었고, 죽과 국을 한 솥 가득 끓여놓았지만, 전투가 끝나고 아무도 살아돌아오지 못할 때를 자주 보았던 야전 취사장의 솥단지가 있었고, 팔다리가 끊어질락말락 덜렁거리는 상태의 부상병을 이송하기 위해, 덜 끊어진 심줄을 이빨로 끊어내야 했던 위생병이 있었다. 


죽음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40년간 눈을 감으면 훤히 보이는 풍경. 여인은 어느 봄날.. 이제 막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들판을 따라 걸으며 부상병들을 찾는 모습을 매일 마주한다. 어떤 여인은 모든 빨간색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빨간색 음식도 먹지 못하고, 빨간색 옷도 입지 못하고, 빨간색이 들어간 어떤 물건도 가지지 못한다. 그들에게 빨간색은 피였고, 전쟁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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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29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uiness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REBBP 2016-01-30 00:36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만병통치약 2016-01-29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생각하지만 전쟁불사한다는 놈들 보면 미치겠어요.

CREBBP 2016-01-30 00:35   좋아요 0 | URL
미치지는 마셔요. 전쟁나면 나라 지켜야지.. 전쟁불사할 놈들은 다 해외에 넉넉한 도피자금이 있어서 빠르게 튈테니 말에요.

2016-01-29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30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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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한국 아이를 입양해서 기르는 외국인 부모를 만난 적이 있다. 이십년에 가까운 십여년 전에, 유럽 여행, 정확히는 알프스 산자락 어딘가의 오토캠핑장에서 아주 멋진 카라반 차를 운전해서 여행하고 있던 스웨덴 부부였다. 어린 두 꼬마를 닳도록 쪽쪽 빨고 예뻐했는데, 동양인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차 한대에 내 동생, 아장아장 걷던 우리 아기를 포함한 우리 식구가 담요들과 아기용품들을 싣고 유럽 여행을 하면서 예약된 오토캠핑장에서 묵었다.   텐트는 모든 필요 시설과 가재도구들을 갖추었지만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성수기를 피해야 했다. 밤마다 춥고 비가 오면 들이찼다. 그들의 카라반은 요즘 흔히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자그마한 카라반이 아니라 번쩍 번쩍 윤이 나는 인테리어로 완벽한 1급 호텔을 재현한 대형 카라반 차였다. 아.. 저런 데서좀 자 봤으면 하는 마음에 말을 섞었는데, 알고 보니 아이들이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들이었다. 친형제들이라고 했다. 나의 관심은 그 카라반에 한 번 들어가서 구경이라도 하는 것이었는데, 그럴 기회가 있었다. 초대받은 카라반에서 휘둥그레 눈알을 굴리며 감탄하던 중 그 부모의 관심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외곽에 부잡스럽게 아장거리는 아기와 기저귀와 딸랑이와 이불보따리를 싣고 다니며, 비가 새는 텐트 속에서 자는 동양인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대형 카라반 가족이 어디있을까. 마치 중세시대 귀족과 농부 같은 차이. 그들이 우리를 사귀고 싶었던 건 바로 자기 아이들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것이었다. 


당시 아마도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이라는 고 최진실 주연의 영화가 나온 때랑도 비슷했을 거라고 추축되는데, 내가 들은 입양아의 현실과 그 부모들에게서 느낀 입양부모의 갭은 컸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아주 많이 궁금해했다. 그리고 약간의 한국어도 할 줄 알았다. 스웨덴의 학교에서는 모국어를 배울 수 있는데, 아이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학교 예산으로 한국어를 배울 수도 있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렸지만, 유치원 단계의 학교 교육을 받는 모양이었고, 특히 입양부모들끼리 모임도 있어서, 아이들이 자기 나라에 대한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이런 저런 신경을 쓰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아이에게 가끔 편지도 써주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우리와의 대화에서 관심있던 것은 한국의 아리랑이니 불고기니 하는 한국적 문화, 즉 자기 아이들의 오리지낼러티들을 입양모 모임때마다 함께 나누는데, 한국 사람이 부족해서 충분치 않고, 자기들끼리 그냥 여기저기서 본 것들을 흉내내는 것에 다름없었는데, 나를 만나니 얘기가 하고 싶은 거였다. 자신의 아이들이 온 동양적 신비가 어린 그곳에 대해. 나는 꼭 편지를 해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정말로 아직까지도 가슴 한 켠 싸아하게 저려오도록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 때 내 생각에, 그 행복한 아이에게 한국이라는 곳을 알려주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 그들을 버린 곳인데? 그들은 그것을 원할까? 정체성을 심어준다는 핑계로 거리감을 두는 것은 아닐까. 그 때 마음은 아이들을 잘 사귀어 두었다가 나중에 한국에도 올 수 있도록 주선을 해봐야지 라는 생각이었으나, 나중에는 아마도 편지쓰기가 싫어서였을까 여러가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스마트폰이 있는 세상이라면 페북을 통해 더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었을텐데. 남매로 기억하는데 여자 아이의 나이가 아마 카밀라의 나이만큼 되었을 것이다. 수줍어서 나와는 말을 별로 섞지 못했지만 우리 아기를 데리고 바깥에서 티없이 잘 놀았었다. 


제목도 시적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 책의 주인공 카밀라는 내가 만난 아이들과는 반대 상황에 있다. 입양아에 대한 집착적 애정은 입양 아이가 언젠가 친모를 찾아 떠날까 불안하게 한다. 아이에게 불행의 씨앗은 태초에 친모에게 버려졌다는 생각, 상실된 정체성으로의 갈구 때문이지 양모의 애정부족이 아니었음을 양모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사랑을 산만큼 퍼주어도 채워지지 않는 한 구석을 내가 만난 스웨덴 부모처럼 채워주려 노력했더라면 아마도 그런 것 따위 귀찮은 한복 아리랑 김밥 불고기 행사 같은 것 안중에도 없는 평범한 십대를 보내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애증 역시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밀라의 양모는 가족이 어렵게 보낸 편지를 아이에게서 숨긴다. 진실은 언제나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밝혀지는가. 카밀라의 양모는 카밀라를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존재는 안니었지만 카밀라에겐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이자 엄마였다. 주소 라는 그 한 조각 정보를 알기 위해 통과해야 했을 수도 없을 행정상의 벽, 기억의 벽,  외면의 벽, 무관심의 벽,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아이의 턱 앞에까지 아슬아슬 닿았으련만, 양모마저 떠난 세상에 덩그마니 혼자 남겨졌을 때, 카밀라에게 주어진 단서는 자신의 핏줄이 자신을 찾아 소식을 전했었다는 것 뿐. 그리고 이제 친부에게서 받은 짐 박스에서 버려질 운명에 있다가 우연히 발견된 발견된 사진 한 장이 손 안에 있다.  그 작은 단서 하나에 의지해 자신의 뿌리를 찾아온 한국. 양모의 욕심으로 감추어진 진실을 찾아 카밀라는 검은 바다를 건넌다. 



사실 책을 읽을 때는, 누가 아빠일까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집중했으나,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생각해보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열일곱살 짜리 소녀아이가 낳은 아이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만큼 멀티플한 애정행각을 벌였을까. 이미 친모가 죽은 상황에서, 카밀라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종잡을 수 없게, 엄청나고 추악한 비밀 속을 헤치고 들어갔을 때에 밝혀지는 것은 어머니의 존재다. 카밀라의 현재 나이보다도 어렸던 어머니가 쓴 시와 문학 속에서 잠들어 있는 사랑, 그리고 생명. 


이제 내가 엄마를 생각해서 엄마를 존재할 수 있게 해야만 했다.


한국의 TV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을 캐는 일은 약방의 감초같은 소재지만, 그 모든 비밀 하나 하나에는 제각기 다른 사연들이 있다. 거기에는 버려짐과 버릴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고, 버려진 후의 삶이 있고, 버린 후의 삶이 있다. 그것들의 조합은 무궁무진하다. 그렇기에 진부한 클리쉐에 불과할 지라도, 아무리 반복해서 재현하고 수정하고 따라한다고 해도, 그 나름대로 새로운 이야기로 와닿는 독자와 시청자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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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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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서 윤곽이 확실하지 않은 여자 해리엇, 근엄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남자 데이비드. 파티를 싫어하는 두 사람은 파티에서 만난다. 자유와 낭만이 들불처럼 번지던 60년대에 보수적인 두 사람의  만남과 결혼. 커다란 3층짜리 빅토리아풍의 대저택을 장만하고, 아이를 여덟 정도 낳고, 시끌벅적한 집에서 사람들의 떠들석함으로 풍족함을 채우는 행복을 계획한 그들의 삶은 딱 그들이 원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와 각종 명절에는 사돈의 팔촌까지 떼로 몰려와 몇일 몇주고 그들의 떠들석하게 지냈고, 예쁘고 사랑스런 아이들은 많은 사촌들과 이방 저방 오가며 최고로 기억될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부와 지(知)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모두 제공하는 데이비드의 이혼한 부모들의 양쪽 세트는 각기 아버지쪽 부모들은 엄청난 주택대출금과 또 엄청난 양육비용, 그리고 어마무시한 명절 식재료비들은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가 부담했고, 데이비드가 추구하는 지적인 대화는 어머니 쪽 세트와 통했다. 그리고 양육은 혼자 된 해리엇의 친정엄마가 아예 붙박이로 눌러 앉아 도와준다. 큰 살림에 따른 경제적 육체적 부담에 때로 자잘한 우려와 근심과 피곤이 따라다녔지만, 그들의 행복은 아이가 여덟명이 아니라 열여덟명이 태어나더라도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다섯째 아이가 잉태되기 전까지 말이다.


베토벤의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만일 어느 순간, 어떤 파트의 어떤 악기 하나가 음 하나를 틀리게 낸다면 대개의 경우 평범한 우리들은 아마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지 꽤 되었는데,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 받은 느낌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감정 처리를 하지 못하고 리뷰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일 후성유전학에 관련된 저 베토벤의 비유를 읽자 다섯째 아이 벤이 가진 유전학적 차이는 어쩌면 사실은, 유전 정보가 만들어내는 인간의 특성이 베토벤의 심포니보다 수천 수백만배 이상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음 하나의 차이만큼도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작은 차이에도 벤이 그렇게 끔찍한 괴물이 된 것은, 후성유전학적인 것과도 관계가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다. 바라고 원해서 잉태된 다른 네 명의 아이와는 달리 다섯째 아이 벤은 처음부터 원했던 게 아니었다. 줄줄이 연이은 아기들의 양육을 힘들어 하던 해리엇이 다음 아기는 조금 텀을 두고자 생각했을 때, 원치 않은 순간에 생겨났다. 새 생명이 잉태되는 그 순간의 거부, 그것이 유전자의 스위치에 어떤 영향을 줄 지도 모르지 않는가. 수정의 순간, 착상의 순간, 세포 분열의 각 순간 순간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간절함, 그 새생명에 대한  거부로 인해 생기는 알 수 없는 호르몬과 유전자들 상호작용들로 인해 유전자 정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화학적 표식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최대의 자구책으로서, 인간에게 숨어있던 태초의 선사시대 유전자를 활성화시켰을 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던 태아의 커다란 몸집과 지나치게 격한 발길질로 고통을 느낀 산모에게 아이는 이미 비정상으로 간주되었던 건 아닐까. 해리엇이 의사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아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병명을 얻어냈다면 해리엇은 보다 편했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아프잖아. 아프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 그렇게, 아기의 이유있는 발길질은 그녀에게 어떤 위안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아기가 태어나고, 괴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을 때, 다운증후군인 조카를 부러워하는 해리엇의 모습은 자신의 아들 벤이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가를 알게 해준다. 다운증후군은 다운증후군이라는 명칭 아래 안전하게 보호되고 설명된다. 해리엇은 그런 것을 원했을 것이다. 무언가 설명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것. 그러나 전문가에게 정상으로 보이는 아기는 어떤 병명도, 어떤 장애의 표식도 얻어낼 수 없었으며, 태아에게 돌아간 건 치료가 아닌 아기를 잠들게 만드는 진정제일 뿐이다. 축복같은 선물인 태아의 발길질, 그러나 가장 피곤하고 힘든 시기에 아기를 원치 않는 산모의 바람을 거스르고 잉태된 이 건강하고 드센 아이는 삶을 향한 움직임을 저지당한 채 자주 진정제로 잠재워지면서, 모든 감각은 생존을 위해 원시적 투쟁 본능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아이 벤이 태어난 후에도 해리엇은 아이의 행동에 이유를 붙이고 싶어했다.  벤의 존재로 인해 '가여운' 사촌은 사랑스런 존재가 된다. 웃지 않는 아이, 사람을 해할 것 같은 무서운 눈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득히 멀기만 한 아이. 다른 아이들을 해칠까봐 철창에 가두어두어야 하는 아이. 집안에서 아이의 존재는 마치 공포 영화 속의 섬뜩한 악마를 연상케 한다. 태어나자 마자 아기는 지나치게 크고, 엄청나게 먹어대고, 산모의 젖꼭지를 지나치게 강하게 빨고  씹어 멍들게 만들고, 역시 아기인 형제를 다치게 만들고, 개와 고양이의 살해 혐의를 받으며, 악의에 찬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본다.  부모와 다른 아이, 형제와 다른 아이, 주변인과 다른 아이 벤은 주변은 물론 친모가 볼 때조차도 괴물이다. 


아이는 한 때, 보호 시설에 맡겨지고, 잠시나마 가족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행복을 되찾지만, 친모인 해리엇만은 아이를 확인하고 싶어하고 결국 그 '보호시설'이라는 죽음의 공간에서 아이를 구해온다.  비록 임신 중, 아이의 거센 움직임 때문에, 아이를 가장 처음부터 저주한 사람도 엄마이지만, 아이와 가족 사이에 남은 것은 오로지 모성 뿐이다. 설령 진짜 괴물이라 하더라도 엄마는 내 속으로 낳은 자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피가 섞인 다른 가족이 모두 외면하고 버려두더라도 엄마만은 그럴 수 없다. 가족을 깨고 행복을 깨고 희망의 모든 끈들을 끊어버린 존재. 그래서 무섭고 밉지만, 모성애란 그런 것이다. 아이를 죽음으로부터 구해 낸 해리엇에게 향한 모든 사람들의 비난의 시선은 아이의 존재만큼이나 매정하게 묘사된다. 그들이 맡긴 그 보호시설이라는 곳은 사실상 친부모가 버린 아이를 조용히 죽도록 방치하는 곳으로, 아이를 맡긴 친부모나 보호자들은 그곳을 방문조차 하지 못하도록 계약된 곳이다. 차마 말로 옮길 수 없을만큼 끔찍한 곳이다. 우여곡절 끝에 똥오줌에 범벅이 된 채 강력한 주사제로 거의 주검처럼 방치된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 해리엇에게, 이제 막 벤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와져서 행복을 되찾아가고 있는 모든 가족들과 친척들로부터 비난과 질타를 받는 해리엇의 고독과 외로움과 스스로 택해야 했던 그 불행과 선택에 마음이 시려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누군가가 해야했을 일이라고 주장하는 해리엇, 벤의 재등장으로 인한 가족의 분열. 거기서 죽도록 내버려두었어야 했는데, 살려서 데려왔다는 이유로 모든 가족은 해리엇에게조차 등을 돌린다. 이제 모든 것은 해리엇의 책임이다. 벤은 모두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다.  벤 때문에 가족들은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길을 택한다. 벤이 싫어 부자인 할아버지가 등록금을 대는 사립 학교로 전학을 가고, 벤이 싫어 엘리트인 할머니와 양할아버지 집으로 가고, 벤이 싫어 다운증후군 사촌을 돌보기 위해 이모 집으로 가고, 벤이 싫어 아버지의 역할을 버리고 직장과 일에 파묻혀 지내고, 벤이 싫어 딸을 돌보던 친정 엄마가 외면을 한다. 명절마다 수십명이 테이블 가득가득 모여 떠들석하던 빅토리아식 대저택은 어둡고 음침한 장소가 되고 해리엇과 데이비드 가족은 벤의 존재로  모든 관계의 중심에서 멀어져간다. 


엄마는 아들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아이 역시 그 적대적인 표정 속에서 무언가를 이해하려 하는 듯하다.  20세기 윤리의식을 이해하려 하는 선사시대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 해리엇은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과는 그 무언가도 교감할 수 없는 인간 아닌 인간. 그가 가진 그 선사시대의 유전자는 거친 자연과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 원시적 생존 경쟁에서 생겨난 유전자로, 우리가 이제 더는 우리가 우리를 인간이라 부르고 교감하고 공감하고 하는 것들의 가치에는 필요 없어진, 그래서 아마도 유전자 표식의 저 어둡고 깊은 곳에서 몸을 숨긴 채, 꺼져 있던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일 지도 모른다. 


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그런데 벤이 어떤 형태로든 어울리는 세상이 있다. 하릴 없어 정원을 돌봐주던 한량, 동네 깡패들, 학교를 밥먹듯 빠지고, 몰려다니며 문제를 일삼는 청소년들. 아이돌보미와 친정 엄마도 손을 들고 떠난 그곳에서 해리엇은 아이를 동네 건달들 손에 맡기고, 집을 떠나 있도록 한다. 동네 건달들의 오토바이 뒷좌석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어린 벤의 하루는 무엇일까. 어째서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벤은 동네 건달들에게는 받아들여지는 존재였을까. 벤은 단지 해리엇과 데이빗이 규정하고 추구했던 그 '행복'이라는 틀 안에서 벗어난 조금 다른 인간이었을까. 


그렇다면 백인 사회의 흑인, 이성애자 사회의 동성애자, 키큰 사람들 속의 난쟁이들, 부자들의 동네에 이사온 가난한 소녀 등과 같이 그저 다수와는 다른 소수였던 건 아닐까. 우리가 옳다고 규정한 것들, 현대인이 당연시되는 모든 교감과 언어의 틀 안에는 어떤 종류의 편견이 괴물과 인간 사이를 가르고 있는 걸까. 우리가 알고 당연시 여기는 것들의 틀 속에 전혀 맞지 않은 아이, 그래서 의사도 그 어떤 전문가도 병명을 말해줄 수 없던 아이, 해리엇이 힘들어 한 건 아이가 그 어떤 전문가에게서도 어떤 뚜렷한 '병명'을 받아낼 수 없었고 학교에서조차 너무 평범한 아이여서 큰 말썽조차 없는 정상인의 범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괴물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이질적인 것들을 배척하고 동질의 순수한 것들끼리 어울려야 한다는 인간의 강박적 윤리의식이, 밤하늘의 별만큼보다 헤아릴 수 없는 유전자의 조합 속에 단지 한 가닥 다른 꼬임이 만들어 낸 차이를 괴물로 인식하도록 오랜 세월에 걸쳐 합의해왔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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