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댓 이즈
제임스 설터 지음, 김영준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필립 보먼은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후 하버드로 편입해 졸업 후 기자를 꿈꾸지만 이루지 못하고 작은 출판사에 들어가서 판촉을 하다가 편집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과 사적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뉴욕에 놀러온 남부 출신의 비비안과 결혼하지만 짧게 끝난다. 이후, 약간의 연애를 하지만,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애매한 불륜놀이를 하다가 그도저도 배신과 복수로 끝나고 더는 가정을 꿈꾸지 않을 중년이 된 채로 다시 간간히 연애를 하는 인생을 큰 사건 없이 천천히 나른하게 보여준다.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소설 속에 붙박이 처럼 어떤 구조를 형성하지 못하고 등장해서 주인공이 되었다가 가지치듯 사라진다. 어떤 관계 때문에 인물이 새로 등장하면 그 사람의 배경, 결혼생활, 직업, 성격 같은 것들이 서너 페이지 정도에 걸쳐 기술되고, 그 사람과 관련된 또다른 인물, 그의 배우자, 부모, 친구 등과 같이 연결된 인물의 단편적인 이야기가 다시 또 기술되는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사람들의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가 흥미로운 하나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등장하는 사람들의 굵직한 배경들을 기술하는 식이다.


보면의 아버지는 보먼이 태어난지 2년만에 가정을 떠났고 세 번 더 결혼했으며 결혼할 때마다 매번 더 부자와 결혼했다. 보먼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결혼한 여자가 죽었을 때 우연히 신문 기사를 보고 그의 아버지도 2년 전에 죽었음을 알게 된다. 보면의 어머니는 선생이었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비비안과 결혼한다고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을 때 아들이 떠나는 것에 대해 막연한 상실감을 느낌과 동시에 대영지를 가진 며느리가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직감적으로 안다.


보먼의 첫번째 여자, 비비안은 남부의 땅부자집 딸이다.  아버지의 반대에 상관 없이 결혼을 하고 결혼 전엔 좋다며 섹스를 잘만 하다가, 결혼 후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의 일상에 대해 별 노출이 없지만, 대략 뭔가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은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단지 그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간병하러 외할아버지 집에 갔다가 이혼 요구를 하는 편지를 받고 보먼이 충격을 받고 슬퍼하는 내용으로 볼 때, 그가 어쩐지 조금 눈치 없는 인간일 것 같다는 추측을 해볼 수가 있을 뿐이다. 보먼이 볼 때, 비비안의 이런 알 수 없는 행동은 <스토너>의 아내를 연상시키는데, 보면의 눈에, 그녀가 하는 일도 없으면서 책도 안읽고 그렇다고 집안 일에 열심인 것도 아닌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갸 볼 때 어질러진 집을 좀 치우면 좋겠다고 말하자, 자기의 인생은 그런 일보다 더 가치있다고 말하고, 그 말에 보먼은 그럼 '나의 인생은?'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으로 보아, 둘 사이에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관과 생각의 갭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비비안을 사랑했다고 생각했고, 그 이별에 꽤나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독자는 비비안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말과 사냥과 그런 종류의 남부 상류층 라이프를 살다가 잠시 뉴욕이라는 도시의 화려함에 눈이 팔려, 작은 아파트에 살아보니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을 수도 있고, 보먼이 비비안의 요구에 맞춰 자주 그녀의 친정 아버지, 친정 어머니를 보러 다니고 어울렸음에도 불구하고 클래스의 차이가 비비안에게 눈에 가시처럼 박혔을 수도 있다.


이후 런던에서 만난 유부녀는, 보먼이 그녀와 미래를 꿈꾸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편과 비공식적으로는 끝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지지부진하게 남편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보먼과도 흐지부지 사귀다가 다른 남자로 옮겨 탄다. 이후 보먼은 또다른 여자를 만나서 깊이 사랑을 하고 바닷가 시골 마을에 멋진 집도 함께 구입해서 미래를 설계하지만 여자의 배신으로 집도 빼앗기고, 또 한번의 깊은 상처를 받는데, 이후 그녀의 딸과 우연히 만나게 되자 어린 딸을 데리고 자고, 파리까지 여행갔다가 버리고 오는 방법으로 치사한 복수에 성공한다.


시대적 배경도 공간적 비?도 비슷한 <스토너>를 얼마전에 읽어서 자꾸 비교되고 겹쳐보였는데, 보먼은 <스토너>와 비슷한 듯하면서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다. 필립 보먼의 건조한 삶의 여정에는 뭔가가 빠진 듯 공허하다. 엄청나게 잘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맺으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어하지만 여자를 다루는 데 미숙하고 어떤 결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독자(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갈이 없다. 단지 그가 섹스까지 하는 여자들을 묘사하는 방법은 남자들이 흔히 피상적으로만 생각하는 어떤 기준 그러니까 예쁘고, 섹시하고, 다리가 길고 하는 것들만을 묘사하고 구체적인 갈등의 실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그리고 이 책이 주는 전반적인 공허함은 아마도 이런 것들일 것 같다. 피상적인 것들의 세계에서 한 발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바깥쪽 세계에서만 맴도는 것이다. 어떤 인물이 나오면, 호구조사 차원의 모든 정보들이 디테일하게 까발려지지만, 실제로 둘 사이에 어떤 긴장이나 갈등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못된 남자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듯 보이지만, 자신 만만하게 믿고 있던 대상에게 갑작스레 배반당하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자신을 채워거는 방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사적 맥락과 큰 관계없이 계속해서 나오지만, 그런 류의 소설이구나를 이해하고 나서부터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느긋하게 읽는 묘한 맛이 있었다. 얽히고 설킨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돌아서면 잊혀질 사람들과 하는 대화들, 섹스들. 우연과 필연이 교차된 시간들 속에서 짧막 ?막한 말뭉치들이 허공을 채우는 세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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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16-02-14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네요^^

CREBBP 2016-02-14 20:14   좋아요 1 | URL
밍숭맹숭해요 ㅎㅎ

만병통치약 2016-02-14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포츠와 여가˝에서 이야기 했나요? 무슨 책이 이리 민숭맨숭해요......라고 말하면 무식한건가요 ㅋㅋ 표지는 뭐라 표현은 못하겠지만 이유없이 자극적이네요. / 그놈의 100자평이벤트 때문에 여기 저기 벌집 쑤신것처럼 난리군요.

CREBBP 2016-02-14 20:14   좋아요 1 | URL
100자평 이벤트 어딨어요? 이번달에 2만원을 못받았더니 1천원이라도 아쉽네

만병통치약 2016-02-14 20:23   좋아요 0 | URL
몰라용 추첨으로 주나 본데 어떤 책은 100자평이 몇 백개 달린것도 있어요 그정 도 안 팔릴것 같은 책인데 말이죠. 그래서 나의 아름다운 100자평이 파묻혀......ㅋㅋ

CREBBP 2016-02-14 20:40   좋아요 0 | URL
100명까지 주는 건가보다... 그런 거 전에 잘못 알았는데 유효기간이 30일 정도 돼요. 열개 정도 찾으면 만원. 골라잡아 만원!! ㅋㅋ 근데 어딨냐구요 ㅋㅋㅋㅋ

[그장소] 2016-02-1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허하달까요...설터의 글은..읽으면서 아..공허해
가득찬 공허를 주체 못하겠어...하는 울림 땜에..막
슬퍼져 버려요.

CREBBP 2016-02-14 20:41   좋아요 1 | URL
그쵸 공허하면서도 나른하고.. 전 이 책 하나만 읽었는데 다른 것도 다 그런가봐요?

[그장소] 2016-02-14 21:16   좋아요 0 | URL
저는 셜터..전부~~~다 가지고 있는데.
스포츠의 여가 만 아직 읽는..중..이고..
다른건 ..다 읽었어요.
습습함..딱! 그 작가를 대표하는 단어 같아요.
공허 ㅡ찬 허기.광기 없는 이상한 폭발 이랄까..
그런게 대부분 ㅡㅎㅎㅎ


CREBBP 2016-02-14 21:23   좋아요 1 | URL
우와 언강님 독서 정말 많이 하시네요

[그장소] 2016-02-14 21:41   좋아요 0 | URL
아..좋아하는 것에 편식이 좀 심해서..!!
저는 다양한 분야로 읽는guiness 못따라가는데
...~~;;

에이바 2016-02-15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네스님 프로필 사진 바꾸셨어요? 리뷰 잘 읽었어요. 설터 작품 하나도 읽지 않았는데 그 내용은 감각적인 표지와 일맥상통할 것 같단 편견이 있어요.

CREBBP 2016-02-15 15:52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표지의 숸태롭고 나른한 현대인의 일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요. 소설도 그래요. 아무 의미 없는 것들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생 같은 거죠. 프필은 젠더프리로 바꾼다는 생ㄱㄲ에 아무거나 얻어걸린 거로..

CREBBP 2016-02-15 15:53   좋아요 0 | URL
프필이 서재에서 바꾼게 북플에 연동 안되는군요 ㅋ

2016-02-15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5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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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서 태어난 라일라는 어릴 때 납치되어 모로코 쯤으로 생각되는 도시에서 랄라 아스마라는 노인의 집안일을 해주며 살아간다. 라일라는 랄라 아스마와 꽤나 친분있는 유대관계를 유지하는데, 그것은 의지할 곳도 없는 어린 소녀 라일라에게 랄라 아스마는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며 가족으로서의 친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어서 그렇다. 그러나 나이 많은 랄라 아스마는 그녀가 성인이 되기 훨씬 전에 죽고, 라일라는 거친 세상에 홀로 맞서게 된다. 


랄라 아스마의 재산과 라일라를 탐하는 그 집 아들 며느리 조라를 피해 도망온 곳은 매춘굴이다. 오래된 옛성의 구석구석에 방을 차리고 매춘굴에 사는 온냐들은 어린 라일라를 예뻐하고, 그 곳 자밀라 아줌마 역시 그녀에게 애정을 쏟고, 그녀 역시 그 '공주'들과 어울려서 도둑질도 배우고 매춘이 어떤 것인지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지만, 조라의 추적으로 발각되어 다시 조라의 집으로 보내지고, 학대받다가 도망친다. 


라일라의 인생은 같은 여정을 계속 반복한다. 인생 곳곳에서 만나는 위기는 새로운 사람의 등장과 도움으로 해결되고, 서로 돕고 어울리는 동안 다시 그들은 인생의 위협으로 등장하고, 라일라는 떠남과 만남을 반복한다. 조라의 집에서 도망친 라일라는 매춘굴에서 알게 되었던 후리아를 찾아 함께 스페인 밀입국을 하고, 거기서 다시 프랑스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에 동행한다. 조라에게서 도망 나와 후리아의 집에 얻어 살면서 많은 신세를 졌지만, 밀입국 중에는 임신중인 후리아를 라일라가 많이 보살펴주게 되고, 프랑스에서 자리잡은 후에도, 후리아는 전적으로 라일라에게 의지하고 라일라가 자신을 떠날까봐 전전긍긍한다. 


이후의 인생도 계속 마찬가지다. 떠돌며 만난 사람들은 예외없이 친절을 베풀지만, 라일라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로부터 도망치게 된다. 사람들이 라일라에게서 베푼 친절들은 그녀에게 그대로 짐이 되고, 그녀는 늘 떠난다. 실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고, 남자친구에서부터 동성 친구며,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그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들로 전체 스토리는 계속된다. 그녀의 여정은 결국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황금물고기로 정리할 수 있는, 그녀가 태어난 고향으로 회귀하는 과정이다. 


그녀는 아프리카의 음악에 반응하는 등 원초적으로 자신이 속했던 곳으로 회귀하려는 강한 본능을 가지고 그 숱한 위기들을 넘기고 끝끝내는 고향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문명화된 사회에서 프랑스어와 아랍어등을 배우고 책을 읽은 그녀가 황폐한 그 땅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을 납치해서 팔아먹은 사람들이 있는 땅, 그 그 황폐한 땅으로의 회귀가 라일라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까지 할말이 없는 책도 드물다. 문체는 건조하고, 라일라는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이 계속해서 의미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떠나는 스토리만 이어진다. 작품 속 캐릭터들은 포커 페이스를 한 채 소리나지 않는 영상만을 제공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그 많은 인물들 중 누구도 그들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으며, 친밀감을 느낄 수도 없다. 읽고 나서도 리뷰 쓰려니 한 마디도 쓸 말이 없어, 미루다 말았는데 오래 묵혔는데도 쓸 말이 별로 없기는 마찬가지어서 스토리만 쥐어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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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2-15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그래서 전 별 세개 줬어요. 피아노 치는 여자도 읽는 중인데 음...

CREBBP 2016-02-15 17:54   좋아요 0 | URL
그래도 에이바님은 저보다는 뭔가 깊이있게 읽으셨더라는... 저는 정말 피상적으로만 읽게 되고 의미니 뭐니 이런 걸 찾을 생각을 못했어요.
 
프루프 - 술의 과학 사소한 이야기
아담 로저스 지음, 강석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페이퍼에 잘못 올라가서 중복으로 올립니다.(답글과 좋아요 좋아요~)


술은 한 때 생명의 물이라고 불렸었다. 인류 역사를 통털어봤을 때, 술과 같은 만병통치약이 있을까. 그러나 술은 약주고 병주고 약주고 병주고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울렁거리는 속과 두통을 구제하고자 약국을 찾는 후회에 찬 아침을 선사한다.  술이 뭐길래. 술꾼에게 술은 생명이다. 그 생명은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효모의 정체가 화학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때 그들은 그럼 술이 효모가 포도당을 먹고 싼 똥이냐고 했다. 오줌에 해단하는 건 이산화탄소다. 효모는 포도당을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만든다. 사람들이 빚지 않아도 효모가 당분을 공급받으면 자연적으로 술이 만들어졌으나, 1만여년전부터 야생 효모를 길들여 술에 최적화된 효모를 길러 술을 빚어 왔으면서도 19 까지 술을 만드는 원초적인 힘이 효모라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과 효모가 만나면 기본적인 발효가 일어나기에 과실주는 쉽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곡주의 경우, 탄수화물이 당분으로 분해되어야 가능하다. 그 일은 효소가 담당했다.  맥주는 효모가 보리를 먹고 만들고 청주와 같은 전통주들은 쌀을 비롯한 여러 곡물로 만든다. 두 종류의 술을 만드는 공정에서 주요 차이점은 곡물에서 당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것에 있다. 맥주는  보리가 싹을 튀우는 과정에서 탄수화물을 당으로 바꿔주는 아밀라제 효소가 만들어지는 성질을 이용한다. 보리를 적셔 몇일동안 따뜻하고 습한 곳에서 살짝 싹을 튀운 후 발아를 정지시켜 만든 것이 맥아다. 당화가 끝난 맥아는 쓴맛을 결정하는 홉과 알코올 제조를 담당하는 효모와 함께 발효되어 맥주가 된다.

 

아시아의 전통술은 누룩 곰팡이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누룩을 알기 전에는 곡물을 씹어서 침에서 나오는 아밀라아제 효소에 의한 당화를 이용했었다고 한다. 우웩. 당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누룩 '코지'는  2005년에나 유전자 염기서열이 분석된, 2만년 이상된 미생물로, 이 역시 술을 빚는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길들여져 유해한 유전자들이 소실되었다. 타카미네는 맥아를 만드는 번거로운 절차를 단축할 수 있는 당화 효소를 누룩곰팡이에서 축출했는데 몇일씩 걸리는 몰팅 과정을 생략할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거대한 맥아 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맥주 산업은 아마도 나름 타당한 이유로 외면했고,  그는 만든 효소로 소화제를 만들어 팔았다. 소화 효소는 누룩 곰팡이의 유효성분만 축출해낸 것이다.

 

균류는 150만에서 500만종 이상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10만종이 학명을 부여받고 특성이 기술되었다. 이 중 200여종의 게놈이 완전 해독되었는데 대부분이 상업적으로 유용한 효모다. 효모는 길들여진 늑대가 선택적 유전자에 의해 온순하고 사랑스러운 개가 되듯, 야생 효모의 선택적 배양에 의해 오늘날 청량한 라고를 만들어내는 사카로미세스 파스토리아누스 품종을 만들었다는 것일까. 맛과 향이 좋은 술이 나오면 그 찌꺼기를 잘 보관했다가 다음 발효를 할 때 넣어주고 안 좋은 술이 되면 버리고 통을 깨끗이 씻는 방식으로 선별을 해온 셈이다. (라거맥주를 만드는 효모는 사카로미세스 세레지비지에가 아니다! 빵효모는 에일맥주를 만드는데 색이 짙고 향이 풍부하지만 맥주 특유의 알싸한 느낌은 덜하다.)


프루프는 알코올 함량을 나타내는 옛용어다. 미국에서 프루프는 알콜 부피 %를 두배한 값으로 80프루프는 알코올 부피로 40%다. 영국에서는 좀 더 복잡하다. 앞에서 술은 생명의 물이라고 했는데, 이건 은유나 비유가 아니라, 1280년대 이후 증류주를 일컫는 말이었다. 증류주는 12세기 쯤 의료에 쓸 목적으로 처음 만들어냈으며, 볼로냐의 한 의사가 <의료조언>이라는 책에서 증류주를 만드는 방법을 수록하고 이를 생명의 물이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했다. 어쨌거나 이 생명의 물은 '병을 고치고, 통증을 줄이고 구취도 없애고 상한 와인도 정제하고 고기를 보존하고 식물의 정수를 뽑아낼 수 있었다(p144). 한 때 흑사병이 유행이었을 때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생명의 물'을 처방해 환자들의 기분을 낫게 해주는 일 뿐이었다.

숙성은 증류주의 품위를 결정한다. 물론 그 품위는 시간이 가져다준 향기와 입안을 감도는 맛과 브랜드를 포함한다. 중요한 건 가격인데 오래될 수록 가격이 올라가는 이유는 설명이 필요없다. 수요는 많아지고, 수십년 전에 만들어둔 술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품은 액체(맥주)를 거품층으로 끌어올리지만 중력 때문에 대부분은 수 분 만에 다시 밑으로 내려간다. 거품들이 합쳐서 커지고 결국엔 터진다... 


괜찮은 아이리쉬 바는 기네스 맥주를 따를 때 다른 트릭을 쓴다. 수도꼭지에서 술잔을 가득 맥주를 따른 뒤 3분동안 둔다. 그리고 잔에 가득 따른 뒤 손님 앞에 내놓는다. 이중 분사 라고 부르는 이 방법은 두번째 따를 때 생기는 거품이 처음 따를 때 형성된 거품 층 아래 자리하게 한다. 위에 있는 거품 층이 아래 거품층을 공기와 닿지 않게 해 이산화탄소가 천천히 빠져 나가게 한다. 123

 

 

맥주가 차가울수록 거품 층이 더 오래 간다 그리고 높은데서 따를수록 공기 중의 질소를 더 많이 끌고 들어가 거품 중이다 안정해진다 123

 

우리는 산만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뽑아내고 막연한 곳에서 핵심을 뽑아 낸다. 과실주에서 브랜디 맥주에서 위스키 사탕수수 발효액에서 럼을 증류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식에서 핵심을 뽑아 낸다. 작가 프리모 레비는 증류 과정에서 액체가 기체를 거쳐 다시 액체가 되는 일련의 변화를 두고 삶의 근본이 되는 영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술적 변형이라고 불렀다.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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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2-1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과 좋아요 좋아요 ㅎㅎㅎㅎ
ㄷ ㄷ ㄷ 한 선정이네요~

CREBBP 2016-02-13 22:14   좋아요 1 | URL
ㅎㅎ 페이퍼에 달린 답글과 좋아요가 좋아서 중복 페이퍼를 지울 수 없다는 뜻이었어요 ^.^ 중복 좋아요도 좋네요 ^^

2016-02-13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4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병통치약 2016-02-13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취하면 한소리 또하고 또하고 술리뷰는 올리고 또 올리고 푸헤헤헤~~~~

CREBBP 2016-02-13 23:03   좋아요 0 | URL
아 진짜.. ㅋㅋㅋㅋㅋ
 


술은 한 때 생명의 물이라고 불렸었다. 인류 역사를 통털어봤을 때, 술과 같은 만병통치약이 있을까. 그러나 술은 약주고 병주고 약주고 병주고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울렁거리는 속과 두통을 구제하고자 약국을 찾는 후회에 찬 아침을 선사한다.  술이 뭐길래. 술꾼에게 술은 생명이다. 그 생명은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효모의 정체가 화학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때 그들은 그럼 술이 효모가 포도당을 먹고 싼 똥이냐고 했다. 오줌에 해단하는 건 이산화탄소다. 효모는 포도당을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만든다. 사람들이 빚지 않아도 효모가 당분을 공급받으면 자연적으로 술이 만들어졌으나, 1만여년전부터 야생 효모를 길들여 술에 최적화된 효모를 길러 술을 빚어 왔으면서도 19 까지 술을 만드는 원초적인 힘이 효모라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과 효모가 만나면 기본적인 발효가 일어나기에 과실주는 쉽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곡주의 경우, 탄수화물이 당분으로 분해되어야 가능하다. 그 일은 효소가 담당했다.  맥주는 효모가 보리를 먹고 만들고 청주와 같은 전통주들은 쌀을 비롯한 여러 곡물로 만든다. 두 종류의 술을 만드는 공정에서 주요 차이점은 곡물에서 당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것에 있다. 맥주는  보리가 싹을 튀우는 과정에서 탄수화물을 당으로 바꿔주는 아밀라제 효소가 만들어지는 성질을 이용한다. 보리를 적셔 몇일동안 따뜻하고 습한 곳에서 살짝 싹을 튀운 후 발아를 정지시켜 만든 것이 맥아다. 당화가 끝난 맥아는 쓴맛을 결정하는 홉과 알코올 제조를 담당하는 효모와 함께 발효되어 맥주가 된다.

 

아시아의 전통술은 누룩 곰팡이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누룩을 알기 전에는 곡물을 씹어서 침에서 나오는 아밀라아제 효소에 의한 당화를 이용했었다고 한다. 우웩. 당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누룩 '코지'는  2005년에나 유전자 염기서열이 분석된, 2만년 이상된 미생물로, 이 역시 술을 빚는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길들여져 유해한 유전자들이 소실되었다. 타카미네는 맥아를 만드는 번거로운 절차를 단축할 수 있는 당화 효소를 누룩곰팡이에서 축출했는데 몇일씩 걸리는 몰팅 과정을 생략할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거대한 맥아 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맥주 산업은 아마도 나름 타당한 이유로 외면했고,  그는 만든 효소로 소화제를 만들어 팔았다. 소화 효소는 누룩 곰팡이의 유효성분만 축출해낸 것이다.

 

균류는 150만에서 500만종 이상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10만종이 학명을 부여받고 특성이 기술되었다. 이 중 200여종의 게놈이 완전 해독되었는데 대부분이 상업적으로 유용한 효모다. 효모는 길들여진 늑대가 선택적 유전자에 의해 온순하고 사랑스러운 개가 되듯, 야생 효모의 선택적 배양에 의해 오늘날 청량한 라고를 만들어내는 사카로미세스 파스토리아누스 품종을 만들었다는 것일까. 맛과 향이 좋은 술이 나오면 그 찌꺼기를 잘 보관했다가 다음 발효를 할 때 넣어주고 안 좋은 술이 되면 버리고 통을 깨끗이 씻는 방식으로 선별을 해온 셈이다. (라거맥주를 만드는 효모는 사카로미세스 세레지비지에가 아니다! 빵효모는 에일맥주를 만드는데 색이 짙고 향이 풍부하지만 맥주 특유의 알싸한 느낌은 덜하다.)


프루프는 알코올 함량을 나타내는 옛용어다. 미국에서 프루프는 알콜 부피 %를 두배한 값으로 80프루프는 알코올 부피로 40%다. 영국에서는 좀 더 복잡하다. 앞에서 술은 생명의 물이라고 했는데, 이건 은유나 비유가 아니라, 1280년대 이후 증류주를 일컫는 말이었다. 증류주는 12세기 쯤 의료에 쓸 목적으로 처음 만들어냈으며, 볼로냐의 한 의사가 <의료조언>이라는 책에서 증류주를 만드는 방법을 수록하고 이를 생명의 물이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했다. 어쨌거나 이 생명의 물은 '병을 고치고, 통증을 줄이고 구취도 없애고 상한 와인도 정제하고 고기를 보존하고 식물의 정수를 뽑아낼 수 있었다(p144). 한 때 흑사병이 유행이었을 때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생명의 물'을 처방해 환자들의 기분을 낫게 해주는 일 뿐이었다.

숙성은 증류주의 품위를 결정한다. 물론 그 품위는 시간이 가져다준 향기와 입안을 감도는 맛과 브랜드를 포함한다. 중요한 건 가격인데 오래될 수록 가격이 올라가는 이유는 설명이 필요없다. 수요는 많아지고, 수십년 전에 만들어둔 술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품은 액체(맥주)를 거품층으로 끌어올리지만 중력 때문에 대부분은 수 분 만에 다시 밑으로 내려간다. 거품들이 합쳐서 커지고 결국엔 터진다... 


괜찮은 아이리쉬 바는 기네스 맥주를 따를 때 다른 트릭을 쓴다. 수도꼭지에서 술잔을 가득 맥주를 따른 뒤 3분동안 둔다. 그리고 잔에 가득 따른 뒤 손님 앞에 내놓는다. 이중 분사 라고 부르는 이 방법은 두번째 따를 때 생기는 거품이 처음 따를 때 형성된 거품 층 아래 자리하게 한다. 위에 있는 거품 층이 아래 거품층을 공기와 닿지 않게 해 이산화탄소가 천천히 빠져 나가게 한다. 123

 

 

맥주가 차가울수록 거품 층이 더 오래 간다 그리고 높은데서 따를수록 공기 중의 질소를 더 많이 끌고 들어가 거품 중이다 안정해진다 123

 

우리는 산만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뽑아내고 막연한 곳에서 핵심을 뽑아 낸다. 과실주에서 브랜디 맥주에서 위스키 사탕수수 발효액에서 럼을 증류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식에서 핵심을 뽑아 낸다. 작가 프리모 레비는 증류 과정에서 액체가 기체를 거쳐 다시 액체가 되는 일련의 변화를 두고 삶의 근본이 되는 영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술적 변형이라고 불렀다.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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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6-02-13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5세 이전에는 퍼 마셨는데 점점 싫어 지더니 어느날 부터는 맥주 한 캔에 헤롱데요 ㅋㅋㅋ 설날에도 와인 세 잔 마시고 이틀을 뻗었네요. 아직 미각은 살아 있어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넘기면 죽어요......

CREBBP 2016-02-13 20:10   좋아요 0 | URL
와인 세 잔 마시고 이틀을 뻗다니 대다나다~!ㅋㅋㅋㅋ

북프라기 2016-02-13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좋아요

CREBBP 2016-02-13 20:09   좋아요 0 | URL
저도요~

CREBBP 2016-02-13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게 왜 리뷰로 안올라가고 페이퍼로 ㅠㅠ. 좋아요와 댓글 땜에 놔두고 리뷰로 중복 올립니다~ ㅋ

오거서 2016-02-13 20:11   좋아요 0 | URL
리뷰와 페이퍼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CREBBP 2016-02-13 20:23   좋아요 1 | URL
제 경우 책 한권에 대한 얘기만 집중적으로 할 때에는 리뷰로.. 이런 저런 잡 얘기와 더불어 여러 책 얘기를 할 때에는 페이퍼로 올린답니다. 알라딘에서는 사실 책 상품 보기에 리뷰와 페이퍼가 다 나오기 땜에 별 차이는 없지만 습관상 페이퍼보다는 리뷰로 올려버릇해서요.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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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여인을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을 생각하듯 육체 없이도 정열적으로 생각했다 149

마지막 문장이다.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중 슈테판 츠바이크 단편 두개가 실려 있는 이 책의 두번째 소설 《낯선 여인의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작가 '그'에 대해 서술하는 유일한 문장이다. 낯선 여인이 보낸 길고 긴 편지를 읽은 '그'라는 존재에 대한, '그'라는 인격에 대한 작가의 유일한 시각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에게 보낸 낯선 여자의 편지 속에서만 생생하다. 편지 밖에서의 그, 조금 더 객관적인 그의 부재를 통해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평생을 사랑했던 여자의 시점이 쫓은 어쩌면 환상뿐일 지도 모를 모습 뿐이다. 그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를 13 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에 걸쳐 사랑했다.

 

이렇게 자신을 끝판까지 몰고 가는 사랑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언어의 마법이 그녀를 이해하게 한다. 자신을 알아보기만을 바라며 어떤 헌신도 마다하지 않은 매력적 여성의 한결같은 순애보 속에는 어딘지 여성적 수동성이 전제되어 있어 정치적으로는 불편하다. 그러나 어쩌리. 사랑이란 것의 본질이 어쩌면 자기 헌신과 연민, 슬픔 따위의 가학적 감정 없이는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되지 않는 것을.

 

학창 시절 짝사랑에 빠져봤지만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었음을 알았다. 나는 상대방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게 주고받는 사랑의 기본 법칙이다. 내가 바라보는 만큼 나를 보지 않는다면 내가 반한 것만큼 내게 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마음 속 사랑이 떠날 때까지 인내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그러면서도 우물 속 물처럼 똑같은 생각은 끊임없이 퍼올려 버려도 끊임없이 솟아 고였다. 그런데 마찬가지. 이런 태도 역시 여성의 수동성이다. 애초에 채찍은 먼저 반한 사람이 상대에게 바친다. 남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낯선 여인'만큼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쳐 사랑했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그를 향한 사랑을 철저히 숨기는 일이 왜 필요할까.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 비해 13세의 그녀는 너무 어리고 '못생겼'다. 감히 범접하지도 못할 대상이다. 수줍음은 그녀를 앞집에 사는 그와의 수많은 만남에 가림막이 되어 왔다. 이제 숙녀가 되고 아룸다와진 그녀가 왜 또 그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그가 숭배의 대상이었다고 말하지 못하나. 그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편지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괜찮다고 자유로운 당신을 구속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자기 때문에 마음 쓰일 일이 두려웠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너무나도 매력적인 바람둥이인지라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그에게 닿늘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녀의 직감처럼 그리고 그녀의 간절한 소망과는 반대로 매번 인생 곳곳에서 그들운 마주치지만 매번 그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매번 그는 그녀를 처음보는 여성으로 그녀를 유혹해내고는 또다시 잊는다.

 

자 이제 왜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걸까. 아래 인용문은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책을 읽으실 분은 여기서 멈춤 해 주세요.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의 아이, 당신의 밝고 맑은 아이가 더 밑바닥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곰팡내 나는 음침한 곳에서 비천하기 그지 없는 골목길에서? 병균이 오글거리고 악취가 풍기는 후미진 뒤채에서 자라는 일이 없게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의 부드러운 입이 시궁창의 말들을 알게 해서도 안 되며, 그 하얀 몸이 가난뱅이의 구질구질한 속옷을 걸치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부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했고, 그러면서도 당신에게로, 당신 삶의 영역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133

 

당신을 위해서 언제라도 자유롭게 남아있고 싶었습니다 134

 

당신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거의 익숙해졌는데도 갑자기 그 사실로 인해 속이 타는듯한 고통을 느꼈습니다.135

저를 결코 결코 알아보지 못한 당신. 물처럼 제곁을 그냥 스쳐지나가는 당신. 거리의 돌을 밟고 지나가듯 저를 밝고 지나가는 당신. 늘 멀리 떠나서 저를 영원히 기다리게 하는 당신은 제게 어떤 존재인가요? 한때는 당신을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떠다니는 공기처럼 덧없는 당신을.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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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2-13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guiness의 글로 다시 읽으니 참 좋네요~~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못 알아보는지, 가끔 남자주인공들 미워한적 있었지만, 이 책의 남주가 진짜 갑입니다. 그녀의 애절한 사랑에 맘 아픈것보다 무심한 남주 미워하며 책장 넘겼던 기억이...^^

CREBBP 2016-02-13 20:29   좋아요 0 | URL
오죽 바람둥이라면 못알아볼까 싶은데, 이 책으로 독서토론을 했거든요. 남자분이 말씀하시기를 거리의 여자로 보이게 행동했기 때문에 못알아봤다, 그리고 그런 여자들은 계속 봐도 못알아본다 그러시더라구요. 아무튼 바람둥이들은 그런가부다 싶은데,.. 바라보지 않는 남자, 기억도 못하는 남자를 어떻게 그렇게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비로그인 2016-02-13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완성은 상실에 있다고 하죠. 욕망의 변증이라고 할까요. 라캉은 존재는 언제나 결여-존재라고 해요. 그러니까 존재는 언제나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 결여가 이 남자를 평생동안 욕망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

CREBBP 2016-02-13 22:12   좋아요 0 | URL
우왕 멋진 말씀~. 결핍이 욕망을 낳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성립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