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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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잘생겼냐 못생겼냐 하는 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관점이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준이 오락가락하기에 누가 잘생겼다 누가 못생겼다 라고 말하는 건 개인의 한 편협한 견해라는 데 뜻을 모아야겠지만, 개인이 자기 자신을 향해 못생겼다는 할 때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이어서, 맞아요 맞아 하고 동의해 주어야 할지 흠 아니야 그정도는 아니야 하고 반대 의견을 내야 할 지 살짝 고민된다. 우리에게 그 모습도 친근한 서민 교수는 스스로 못생겼음을 즐겁게 희화화한다. 한 번 태어나는 인생 평생 가지고 살 얼굴이 남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게 되면 그 얼굴로 살아가는 내내 인간 관계, 특히 이성 관계의 약점이 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요즘은 못생기면 취업하기도 힘들어 취업 성형을 한다고도 하지만,  못생긴 정도에 비례해서 경쟁력이 생기는 분야가 있다. 바로 웃기는 게 그렇다. 못생긴 사람은 어딘가 친근하고 웃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건 어디까지나 근거 없는 내 생각이지만, 개그맨도 못생길수록 잘나간다. 천성이 웃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못생긴 건 소품이다. 사실 저자가 그렇게까지 못생겼다는 생각은 (내가 눈이 낮아요) 해볼 새도 없이 본인 입으로 못생겼다는 말을 하는 걸 너무 많이 들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저자는 천성적으로 웃기는 걸 좋아한다. 글쓰기 책이라 글에 대한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데,  역시 웃겨야 한다는 것이 제 일순위인 듯하다. 


스마트폰이 대세이지만, 우리는 많은 말로 하는 통화보다는 더 많이 텍스트를 만들어내고 텍스트를 읽으면서 산다. 같은 텍스트라도 잘 쓰면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웃음을 줄 수 있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의 글로 시작하는 이 책은, 본인의 (실패한) 글쓰기 책쓰기 경험을 토대로 수없이 많은 나쁜 예들을 나열하고 분석하면서 실질적인 글쓰기 사례를 제시한다. 거의 본인 얘기인데, 대부분의 자기계발서 계열의 책들이 자기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데 반해, 서민 교수가 이 책에서 말하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물론 이 책도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무수히 많은 실패를 딛고 결국에는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자찬의 순으로 흐르긴 하지만, 이미 TV며, 칼럼이며 성공한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그러므로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우리가 모르고 아 원래 잘쓰는 분이었구나 라고 생각했을 그의 어두운 과거를 치부를 드러내듯 고백하고 조목조목 이러면 안된다라고 비판하고 있으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의 실패를 함께 경험하는 셈이다. 


그의 실패란 것은, 학부때, 웃기려고 무리수를 쓰느라 유치하기 짝이 없던 회지에 낸 원고들을 포함해서,  제대로된 창작 훈련 과정 없이 쓴 소설은 스웨터에 난 구멍이 스웨터보다 커보일만큼 헛점 투성이었고, 논문으로 교수 점수를 맞추지 못해 책쓰는 걸로 때우려는 나쁜 의도로 대충써서 출간한 낯뜨거운 책들, 그리고 깊이 없이 아주 얕고 얕은 내용으로 대충 써낸 책들을 포함하기에 훗날 그것이 너무 부끄러워 돈 주고 다 사서 없앤 것들도 있다. 자고로 책을 내려면 글쓰기 연습을 많이 해야 하고, 자신이 아주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 깊이있게 쓰되,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게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쉽게 쓰는 한 가지 방법으로 자기도 잘 모르는 내용은 쓰지 말라는 것, 그리고 완전히 이해한 내용이라도 좋은 비유를 통해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라고 한다. 반면 <기생충 열전>과 <기생충 콘서트>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의 말이 없는 걸로 봐서, 이 때 쓴 글들은 피나게 글쓰기 수련을 마친 상태에서 제대로 쓴 글인 것 같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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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보는 미국사 - 아메리칸 시티, 혁신과 투쟁의 연대기
박진빈 지음 / 책세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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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들이 가진 역사는 길지 않지만 그래도 미국 내에서 굵직한 도시들은 각 도시마다 환경에 차이가 있고 개성을 가진다. 특정 도시는, 도시 계획 쪽에 치중한 역사가, 또 다른 도시는 무차별한 유색인종 차별의 역사가 다른 도시는 한 때의 산업 중심 도시로서의 영광을 뒤로한채 천천히 망해간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이방인으로서 어떤 도시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먼저 주목한다. 도시의 풍경은 무엇보다도 구획되거나 자연스럽게 형성된 거리와 그 거리 사이의 건물들, 멀리 보이는 랜드마크가 지배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사람을 본다. 사람들의 모습 사람의 차림새, 그 사람들이 반대로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나서, 만일 자유여행이거나 방문이라면 도시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자잘한 도시의 디테일들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아마도 도시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이 중에서 마지막 일상을 지배하는 자잘하고 세부적인 풍경들일 것이다. 


세계 어느 도시나 우리에게 길거리에서 가장 먼저 (친근하게도) 눈에 띄는 것은 스타벅스 커피숍이나 바디숍, 맥도널드 같은 다국적 기업의 체인점일 것이다. 그것들이 친근한 것은 그 샵들이 우리에게 친절해서가 절대로 아니다. 골목 상권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다국적 기업들이 전통과 특색이 가미된 전통적 1인 샵들을 몰아낸 것이 단지 그 어느나라에게도 뒤질세라 친세계화의 궁극을 달려, 친기업적 친자본적 생리에 닳고 닳아 무감각해져버린 대한민국의 일, 단지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니라서, 그것이 세계적인 일이라서 안도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일 게다. 


책은 미국의 대표적 8개의 도시의 역사를 다루는데, 비교적 100~200년 사이에 일어난  핵심적이고 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미국이란 사회, 더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속에서 현재 인류가 걷고 있는 사회적 공간에 대해 비판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유럽이나 아시아처럼 나라와 정권이 바뀌었어도 도시 공간 자체가 오래된 역사를 가지는 것과는 달리, 미국은 침략 이후 인디안들을 몰아내고 그 땅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기에, 도시라는 사회 문화적 공간 속에 구석 구석 스며든 긴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그들이 나무를 베고, 숲을 태워 경작을 하고, 소떼들을 죽이고, 전염병을 옮기고 땅을 빼앗아 도시를 만들기 전에도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곳은 그렇게 태고적부터 존재하던 공간이었을 터인데, 패자는 역사마저 없었던 것처럼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혀지고 지워지고 사라지고 없다. 


독립전쟁 이전에도 꾸준히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의 유입이 있었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미국 각 대도시의 '참된 역사'는 미국이 자유와 해방의 정신 아래 독립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 자유와 해방의 정신 아래 백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편견과 차별과, 편파 속에서 자유를 박탈당하고 살아왔는지를 환시시켜준다. 미국의 화려함을 한눈에 확인시켜주는 대도시들. 그 공간들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흑역사로 요악된다. 흑인 및 유색 인종에 대한 폭력과 박해에 대한 역사이기도 하고 부동산 투기와 특혜 정경 유착을 통해 소수 특권층의 새로운 귀족 계급을 양산해 낸 역사이기도 하다. 


아메리칸 드림이 펼쳐지는 이민자들의 천국처럼 여겨지는 로스앤제레스를 먼저 보자. 사막의 한 가운데 건설된(1905~1913) 로스앤젤레스는 경제 급성장 시기에 인구가 늘자, 544킬로미터나 떨어진 시에라네바다 산맥 기슭에서 물을 끌어오기 시작했고, 그것은 산업화를 가속화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때 시장과 주변인물들은 도수관 건설과 관련된 지역에서 부동산 투기를 했고, 도수관 덕분에 현재가지도 이 도시의 물리적 경제적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산업을 끌어모았고, 구엘리트들이 없는 이 지역에서 그들은 그렇게 만든 검은 돈으로 유력가문을 형성하였다. 부패와 투기로 만들어낸 신흥 귀족들은 그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날이 가고 해가 가고 세대가 바뀔수록 더욱더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며 대대손손 천년만년이라도 살 것 같은 부를 누리고 세상을 주무르고 있다. 


겉으로 보이기에 평온해 보이는 로스앤젤레스의 문제는 자동차 중심의 도시라는 것이다. 부동산 이해집단과 개발자본주의의 끊임없는 공세에 도시는 대부분의 대도시가 수직으로 높이 솟은 마천루들을 갖는 데 반해 한도 끝도 없이 수평으로 확장했고, 교외 지역의 밀집 주거 단지 건설된다. 자가 자동차 위주의 계획도시이다보니 대중교통은 미비하다. 고속도로를 따라 형성된 쾌적한 교외 지역으로 자동차를 가진 백인 위주의 중산층은 탈출했고 도시에는 빈민만 남았다.


"이 길(기적의 마일)은 철저히 자동차 운전자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 심지어 거리의 간판과 건물 등은 시속 30마일로 달려가면서 볼 때 가장 잘 식별되었다."


뉴욕은 도시 공간의 역사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런던 시내에서 노동자 계급의 거주지에 중산층이 유입하면서 기존 거주자들인 노동자들이 밀려나는 현상을 보고 붙인 용어였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는 흔하고 흔한 현상인데, 낙후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유색인종, 예술가 집단, 이민자들)을 정책적으로 교묘히 내쫓고 재개발하거나 건물을 수리하여, 그 곳에 있던 이민족의 정서나 혹은 급진적 예술가적인 정체성의 일부들을 흡수하여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흔하디 흔한 재개발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더 속상한 것은 그들이 먼저 살고 있던 사람들을 밀어내고, 그 곳의 독특한 분위기를 부동산과 관광 산업에 이용한다는 것이다. 


도시 빈민과 노숙자들을 도시의 중심에서 내쫓는 현상은 1994년 줄리아니 시장의 "깨진 유리창 이론"으로 알려진 불관용정책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도시빈민과 노숙자들을 젠트리피케이션의 결과로 나타난 사회적 약자나 피해자로 보지 않고, 도시 공간의 약탈자로 보는 것이다. 버려져있다시피한 할렘이 시정부보증을 담보로 투자가 시작된 때도 1990~1998년 미국의 경제활황기였다. 낙후되고 허름한 거리들은 오래된 상태로 그대로 있다는 이유로 옛정취와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젠트리피케이션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할렘에 정체성을 부여했던 사람들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떠나야 했다. 그곳에 있던 독특한 소규모 상점들은 전국,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브랜드 상점으로 교체되고, '쾌적한 문화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이득을 본 사람들은 물론 부동산 투기자들이다.  로어이스트사이드의 한 버려지다시피한 싸구려 임대 아파트는 어떤 부동산 투자자가 경매에서 2500달러에 낙찰되었는데, 약 10년뒤 개보수 후 총 86세대, 세대당 120만 달러 팔렸다.


반대로 낙후된 상태의 공간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공간의 흑백 분리라는 문제를 유발한다. 세인트루이스의 푸루잇 아이고를 전에 정지돈의 단편집에서 읽고 인터넷 찾아보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역시 같은 시나리오다. 백인들이 빠져나간 한 마을이 공동화되면서 범죄가 끊이지 않자, 임대주택을 지었는데, 애초 엉터리로 지은 것, 제대로 마무리가 되지 않아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도 망가지기 일쑤. 그곳에 사는 흑인들은 나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도 많았고, 자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관리가 너무 엉망이어서 점점 더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스콤은 게을러 빠진 흑인들 잘못이라고 사람들 탓을 했다는데, 우리나라 주요 보수 일간지들이 보수 정치인들과 함께 약자와 빈곤층을 향해 퍼붓는 독설과 어찌 그리 쌍둥이 같이 똑같은지. 정부는 입주자들을 계속 속였고, 입주자들이 계속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은 입주자들도 있었다는 것.


아틀란타와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다른 남부지방의 많은 도시들의 경우 도시에는 가난한 흑인들이 살고, 중산층 이상의 백인 부자들은 잘 정비된 고속도로를 끼고 외각으로 나가 사는데, 그렇게 된 시나리오는 이렇다. 도시에 산업이 발달하면 흑인들(혹은 유색인들)이 인구집단을 형성하고, 1950년대까지만 해도 백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동네에 흑인들이 이사오면 보이콧했다. 집을 부수고, 폭력을 행사하고, 그 부동산을 파는 부동산 사무실을 불지르는 등의 과격한 분리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유색인들이 한둘이라도 들어오면 부동산 가격은 폭락하고 백인들은 집을 팔고 외곽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 외곽의 부유한 주택지 개발을 위해 주정부는 혈세들을 펑펑 쏟아 고속도로를 정비하고 각종 편의 시설을 지어대는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주변도시가 형성되면, 이제는 그 자신들이 버리고 왔던 주도시를 위해 세금을 내고 싶지 않으니 도시를 분리해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많은 도시들 중 8개 도시들만 다루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환경에서 생긴 다른 도시들도 비슷한 역사를 가졌을 거다. 미국의 역사는 차별과 편견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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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통령의 모자
앙투안 로랭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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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모자가 가는 곳에 함께 따라다니는 것은 결국 행운이다. 첫번째 남자에게 모자는 자신감이었고, 두번째 여자에게는 결단이었고, 세번째 남자에게는 용기였다. 그리고 네번째 남자에게 모자는 혁신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말을 고르느라 헛수고를 했지만, 사실은 그게 그거다.  미테랑 대통령이 식당에서 두고 간 모자가 우연히 누군가에게로 오면 그 모자를 가진 사람의 인생에는 행운이 뒤따랐다. 다니엘이 그 모자를 처음으로 경험(?)하고 기차에 두고 내렸을 때는 저런 이걸 어째 싶어, 내 일처럼 안타까왔으나,  그런 식으로 모자가 돌고 돌아 다른 사람에게도 다른 종류의 행운을 가져다 줄 거란 건 충분히 짐작할만 하다. 자주 물건을 잃어버리는 나지만, 내게 만일 이런 행운이 생긴다면, 잊어버리지 않을 텐데 말이다. 모자를 쓰게 되면, 나에겐 어떤 일이 생길까.


늘 동료에게 치이기만 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최신영화 케이블 채널 이용권도 없는 찌질남이 아내와 아들이 여행간 사이에 밥해먹기가 귀찮아 들른 곳이 값비싼 식당이었다. 젊었을 때는 돈이 없어서 못간 곳에는 나중에 돈이 있어도 그 젊은 시절 못갔던 시간들을 묘한 마음으로 뒤돌아보게 된다. 그 때 가지 못했던 곳은 지금 가봤자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내도 없는데.. 그래도 다니엘은 저벅저벅 들어가서 물쓰듯 해산물 모둠 요리를 시키고 값비싼 와인을 시켰다. 그리고 미테랑 대통령 일행이 자신의 옆자리에 동석하는 걸 지켜본다. 이런 절묘한 우연에 다니엘은 가슴뛰는 경험을 했는데, 더욱 더 큰 행운은 대통령이 자신의 좌석 위에 두었던 모자를 챙겨가지 않은  그는 대통령의 모자를 쓰고, 모자 속의 무언가, 자신도 모르고 보이지도 않는 어떤 '나노입자'가 정신에 작용을 해서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풍부한 영감과 생각과 아이디어와 유창함과 자신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그는 중요한 발표에 핵심을 찌르고 잘 발표해서 자신을 눌러 찍던 동료를 물리고 승진을 거듭한다. 머리카락에서 힘이 생기는 삼손처럼, 그는 모자에서 자신감과 능력이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사 그것을 기차에 두고내린 것이다. 


결혼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이름은 파니. 몰래 하는 사랑이 괴로워진 것은 어느 날 남자가, 사랑한다고, 아내와 이혼할 거라고 말하면서부터다. 가볍던 만남에 던진 감언이설은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환상을 심고 이제 여자에게 남자는 더이상 가벼운 오락 거리가 아니다. 몇평짜리 작은 호텔방 이외의 공간에서는 서로를 만날 수 없는 처지에서 오로지 기댈 것은 남자의 결단이다.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해. 그 시간이 의미하는 것, 그리고 시간이 가져오게 될 결과를 왜 사람들의 눈을 속여, 밝은 대 함께 걸을 수도 없는 처지의 결혼한 남자에게서 예측하지 못했겠는가. 만남은 관성을 낳고, 그 관성 속에서 같은 속도로 반복되는 일상을 깨뜨릴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기차에서 주운 모자가 그 여자에게 씌어졌을 때, 소설가 지망가인 그 여자는 호텔방에서 바지벗고 기다리던 남자가 웬 모자냐, 누구 모자냐, 어떤 남자가 줬느냐고 하자, 즉석에서 소설을 만들어낸다. 섹스가 끝나면 타인의 사람이 되어 버리는 남자에게 질투할 수 없었던 여자는 모자의 존재로 인해 자신을 질투하는 남자에게 가상의 모자의 주인을 만들어낸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끝나는 거 쉽다. 그 길로 남자는 바지를 주워입고 냉정하게 호텔을 떠난다. 한 번도 붙잡지 않은 채로. 모자의 주인이 가상의 남자라는 말이 사실인지 한 번도 다시 묻지 않은 채로. 모자는 그녀에게, 결단을 주었다.


피에르는 8년째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우울증 상담을 받고 반폐인인 채로 살고 있는 조향사다. 절대 후각의 지존으로, 코로 들어오는 공기중에 포함된 단 하나의 분자까지 정확하게 감지하여 성분을 알아낸다. 공원 벤치에서 발견한 모자 덕에 그는 우울증에서 빠져나와 획기적인 새로운 향기를 만들어낸다. 보수적 프랑스 귀족들과만 사교하며 화석처럼 변하지 않을 낡은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알며 살아가던 베르나르의 모자가 어느 식당에서 바뀌었을 때 그는 기적적으로 자신이 그 화석을 부수고 나와 살아있는 생명이 되고자 했다. 처음으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분명히 하고, 무엇을 지지하는지를 확실히 한다. 


그자들은 화석이야 영원히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만을 바라며 오래된 아파트에서 예전과 똑같은 실내장식 안에 머물러 있는 화석들 185


그가 속한 세계는 더 이상 그를 자기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혹, 인생이 당신을 어디론가 인도하면 당신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갈림길로 들어서게 된다. 운명의 gps가 정해 준 경로를 따라가지 않게 되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음을 알려주는 표지판도 없다. 이를테면 우리 존재의 버뮤다 삼각지대는 신화이면서 동시에 현실인 것이다. 유일하게 확실한 한가지는 이 난기류 지역에 일단 들어서게 되면 당신은 절대로 원래 가려던 항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지옥은 바로 타인이라고 좌파의 거두 사르트르가 말했는데, 그의 말이 옳았다. (...) 익숙한 바위에만 딱 달라 붙어 사는 홍합들처럼 자기들의 신념에만 매달리는 편협한 정신의 빈대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신봉해 왔던 원칙들이 그가 가하는 비판에 의해 하나씩 차례로 무너져 내리면서 그는 날개가 솟아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2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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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2016-11-0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감, 결단, 용기 라고 이야기해 주신 부분.. 그리고 결국 모두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신 부분에 공감합니다. <모자>라는 물성을 지닌 하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준 게 참 아이러니하죠. 인간은 스스로는 그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약한 존재인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쉽게 읽히는 짧은 소설이었는데 뭔가 씁쓸하게 끝났던 기억이 납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CREBBP 2016-11-09 14:34   좋아요 0 | URL
짧은 단편 여러개를 모아놓은 것 같기도 했지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스토리이니까요. 모자 하나로 자신의 신념과 자신감과 결단과 용기를 물론 바꿀 수는 없겠지만, 편협한 자기 생각에만 갇혀서 무언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지지부지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에 대한 비유로 보아도 될 거 같아요. 답글 감사합니다.
 

시대를 주름잡았던 한 천재 야구선수가 마지막 게임에 임하고 있다. 선택받은 투수 우태진의 인생에 빠르고 강속구는 그의 정체성이자 마지막까지 끌어안고 가야할 자존심이다. 한국 야구의 전설이 되어 메이저리그에서까지 활동하던 그는 힘이 많이 들어가는 무리한 동작으로 여러번의 부상을 입고 퇴물이 되어가고 어쩔 수 없이 은퇴를 결정한다.한 때 타자들을 번번히 삼진아웃시켜 야수들을 심심하게 했던 그의 힘찬 공은 부상 이후 야수들을 흙먼지 뒤덮히게 한다. 하지만 그는 부상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같은 공만 고집한다. 그에게 다른 방식의 공을 던진다는 것은 그가 아닌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죽기보다 싫었고 그는 무덤에 서 있다.

은행에 강도가 들어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데 인질이 총 27명이다. 그의 요구가 황당하다. 우태진이 세명의 타자를 아웃시키고 마운드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한 회를 버텨낼 때마다 세명의 인질을 내보내겠다는 거다. 부상으로 공이 위력을 잃은 우태진은 느려터진 자신의 공을 만만히 보고 마구 배트를 휘두르다가 아웃당한 타자들 덕분에 초반을 견뎌냈지만 더는 그의 맥아리 없는 직구와 변화구로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제까지 포수의 사인을 받지 않고 왕년에 아무도 받아내지 못했던 직구만을 고집하던 그는 이제 은행의 인질 구출에 따른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포수와 협력한다.

그가 무덤에 서서 포수가 원하는 공을 던진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아닌 자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자고 생각했던 이제까지의 야구 인생. 인질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고 나를 죽이고 그 무덤 위에 서서 패수가 골라주는 공을 치자 팬들이 환호한다. 그리고 당황해한다. 대체 나다운 것이 무엇이라고 이제까지 외면하고 무덤위에 서고 나서야 이런 공을 던지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포수와의 협력도 9회를 방어하기엔 역부족이다. 감독은 그가 몰래 너클볼을 연습했던 걸 눈여겨보았다가 시도해보라고 말한다. 너클볼은 회전이 없이 던지는 볼로 모든 힘과 의지를 내려놓고 바람에 공의 방향을 맡기는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한회 한회 마운드를 버텨가는 동안 우태진은 뜻하지 않은 퍼펙트 데임에 다가가게 된다. 퍼펙트 게임은 투수가 타자를 1루로 내보내지 못하고 거두는 승리다. 우태진이 위력있는 강속구로 세기를 주름잡을 때 같은 편 선배의 실책으로 8회에서 퍼펙트 게임이 실패했다. 기고만장했던 그는 그 선배를 팀에서 쫓아내버리고도 평생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한편 은행에서 인질을 잡고 있는 은행 강도는 약속한 대로 한 회가 끝날 때마다 차례로 세 사람씩 내보내지만, 보통 은행 강도 같지 않고 매우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돈도 강탈하지 않는다.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하필이면 날개 부러진 퇴물 선수에게 그가 잡고 있는 인질들의 생명을 담보로 게임을 계속하도록 하는 걸까.

왜 라는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찾는 것이 순수문학이라고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에서 본 기억이 난다. 왜라는 답을 얻기 위해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독자로서 나는 8회까지 이르는 퍼펙트 게임을 지켜본다. 게임의 룰이 그리 복잡하지 않으므로 충분히 흥미로와소다. 야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종류의 스포츠는 인생에 비유되고 삶의 많은 순간을 은유한다. 야구는 특히 9회에 이르는 공격과 수비가 인생의 각 십년주기를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퍼펙트 게임을 포기한다는 것, 혹은 퍼펙트 게임의 막바지에 실패하는 것은 그의 야구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게 할 뻔한 기회를 영영 날려버리는 것이다. 우태우가 서야 했던 초라한, 무덤같은 마지막 무대, 마지막 경기는 인질범의 구출과 처음으로 강직구를 포기하고 시도하는 여러가지 다른 형태의 공이 선보이는 화려한 무대가 될까. 하지만 은행에서는 인질들의 목숨이 그의 손목에 달려있다.

범인의 윤곽은 게임이 지속되는 동안 서서히 드러나지만 도무지 그런 일을 벌이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게임을 지켜보는 이유는 범행동기를 알기 위해서다.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소설은 갑자기 힘을 잃는다. 구조적으로나 소설적으로 뭔가 부족해서가 아니러, 그동안 소설을 읽게 했던 호기심이 이제 인질범과 두태진과 경찰 간에 벌어지는 액션으로 긴장감을 유발하기에 너무 그 감각의 강도가 너무 크게 차이나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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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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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사람에게 단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타인의 상실감일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개인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에게 엄청난 슬픔이다. 분명 죽음 근처에서는 엄청난 양의 애통과 비애가 있어 영원한 떠남을 배웅하지만, 그 배후에는 이미 떠난 사람이 두고 가게 될 모든 것들과 그 소멸로 인해 발생하게 될 유형 무형의 가치들에 대한 실리적 계산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판사 이반 일리치의 부음을 듣자, 그와 함께 자주 모이던 친구들은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렸을까. 유능한 고위 판사 자리가 비게 되면 그 자리에는 새로운 사람이 채워지게 된다. 그 자리를 채울 새로운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는 다시 또 사람이 비게 되고, 그런 식으로 자리 이동과 승진이 발생된다. 개인 집무실이 생기고, 연봉도 오르게 될 생각으로 마음이 바쁘다. 그것 뿐만 아니다.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평범하면서도 성공적인 삶과, 어떤 일을 계기로 갑작스레 닥친 치유할 수 없는 병과, 그 병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가는 동안의 시간을 다룬다. 미망인인 일리치의 부인은 일리치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일리치에게 할 말이 있다며, 그가 죽기전에 겪은 고통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지만, 그 고통이란 것이 일리치가 아니라 부인 스스로의 신경을 얼마나 자극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의논하고 싶어하는 것은 연금 문제와 같이, 사망으로 인해 받을 수 있는 지원과 혜택에 관한 것인데, 그것 역시 이미 환히 꿰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더 뜯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차원이다. 가족들 역시 가장의 죽음 앞에서, 개인 가장된 슬픔 뒤로 실리적인 문제가 우선이다. 


소설을 통해 일리치의 죽음을 진실로 슬퍼하거나 그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은 열세살 짜리 아들과 하인 게라심 뿐이다.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관직을 마치 귀족 작위처럼 받아서, 크게 하는 일 없이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앉아 죽을 때까지 국고에서 꼬박꼬박 거액을 챙겨가며 보장된 삶을 살아가는 낡아 빠진 제정 러시아의 전형적인 행정 관료. 훌륭한 처세와 성실함과 세련됨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때로 적수를 만나 본인이 생각하기에 부당한 인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런 일들은 잠시 동안의 고난이었을 뿐 더욱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꿈에 그리던 저택을 구입하고 집의 구석구석을 꾸리는 재미로 권태로웠던 부부 사이 마저 달라질 즈음, 도배공에게 시범을 보여주러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면서 창틀에 튀어나온 손잡이에 옆구리를 부딪히지고 이를 가볍게 넘기지만 이는 점점 더 고통을 불러 일으켜 죽음으로 이르는 계기가 된다. 치열하게 살아 중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고풍스럽고 멋진 집을 갖게 되고, 그것을 원하는 대로 꾸미면서 완벽한 삶에 가까와진 일리치는 그 사고 이후로 조금씩 건강에 이상이 오고, 철근처럼 단단했던 그의 몸은 약해져가고 그의 모습은 점점 누가 봐도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흔들려간다.  


이제 삶은 병과의 전쟁이다. 그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포기하지 못한다. 온갖 치료 방법을 동원해서 병과 싸우며, 식구들을 못살게 굴고 화를 내고 직장에서건 카드놀이를 하는 친구들 모임에서건 자신의 부재를 스스로 못견뎌한다.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토록 힘들어 하는 그에게 가족들의 모습은 비정하게만 비쳐졌다. 아픔을 함께 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이바노비치가 느꼈던 것처럼, 죽음에 가까운 존재의 고통이 가족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잿빛으로 만드는 것이 싫은 것이다. 


만일 급작스런 폭발이나 교통 사고와 같이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죽는다면 이러한 단계는 생략될 것이지만, 오히려 그런 죽음에 따르는 전쟁과도 같은 단계를 함께하지 못한 가족들에게는 비통한 마음만 남을 뿐, 죽음의 고통을 나누거나 적어도 나누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단계를 건너 뜀으로 인해 보낸 사람에게 더하는 죄책감을 최소화할 수 있다. 시대도 공간도 멀고 먼 이야기이지만 오늘날 바로 우리들, 특히나 낳아주고 길러주고 이제껏 함께 했던 숱한 시간들로 내 생의 일부이기도 한 부모님의 연세가 평균근처에 맴도는 내 세대에게는 더욱 더 우리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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