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글라스 아티초크 픽션 1
얄마르 쇠데르베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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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없이 배회하며 스치는 바람처럼 머리 속은 온갖 상념들로 채워졌다 비워졌다를 반복하지만, 그것을 온전하게 기록하기는 어렵다. 그 스치는 생각 한 자락에서 단어 하나만 건져내도 뭔가 대단한 정신적인 걸 이룬 것 같은 건, 백일몽은 그야말로 꿈처럼 스르륵 기억과 흔적들로부터 완전하게 떠나가기 때문이다. 얄마르 쇠데르베리는 이렇게 머리속을 드나드는 떠돌이 생각들을 너무나도 실감나게 닥터 글라스의 일기장에 잘 포착하였다. 독자는 스스로를 잊고 글라스의 머리속 상념을 따라 이리저리 시대의 벽을 넘어 현재 내게도 유효할 번뇌와 사색속을 거닌다.


얄마르 쇠데르베리는 19세기 스웨덴 작가이다. 북유럽 고전문학은 어쩐지 좀 생소한듯 한데, 고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깔끔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고, 작품속에서 작가가 사고하는 방식과 독자에게 질문하는 내용 때문이기도 하다. 죄와벌을 상기시키는 어두운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있지만 작가의 독백이 심각하다기 보다는 유머러스하게 다가왔다. 본문에 언급된 스톡홀름 시의 거리와 예술작품들을 담은 작은 흑백 사진들을 삽화처럼 싣고 있어서 읽는 내내 배경에 대한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마음에 들었던 건 작품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두서없이 스치는 머리속의 생각들을 점점이 이어서 충격적인 방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글의 형식이었다.


글라스의 일기는 6월 12일에 시작해서 뜨거운 여름을 다 보내고 깊은 가을 속, 더 깊고 어두운 겨울의 초입으로 들어가기 전 10월 7일에서 끝난다. 일기는 독신으로 혼자사는 글라스의 똑같이 되풀이되는 매일의 일과지만, 그 똑같은 의사의 일상속에서 그가 생각하는 것들,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가 하는 행동들은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안과 겉이 다른 사람이라면 위선적이고 사악한 사람들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글라스의 일기를 통해 마주하게 되는 한 사람의 내면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의사로서 지역 사회의 존경을 받고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일구고 있지만, 그의 머리속은 이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적 관습과 규범에 저항한다. 때문에 그의 일기장은 투덜투덜,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말들, 다르게 행동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던 행동들, 극복하지 못한 좌절과 상처들로 채워진다.


순간처럼 짧았던 사랑의 비극적 종말. 그것 때문이었을까. 그가 목사 부인에게 품는 감정은 지금 낯설다. 정신적 사랑만으로도 충만했던 낭만주의 시대의 사랑과도 다르다. 그는 목사부인이 그녀의 남편인 늙은 목사에게서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부간에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생각은 19세기에도 유효했을까. 동의하지 않는 섹스는 폭력이 동반할 수밖에 었으므로, 성폭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뭐 이런 개념도 아니다. 젊은 아내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자 친구에게 성적 욕망을 품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고는, 그 죄책감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늙은 목사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사랑과 나이의 편차에서 생기는 성적 욕망과 애정의 조건을 외도로 채운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인생인가.


그런데 그것과는 별도로 글라스는 그레고리우스 목사를 싫어한다. 그가 목사를 싫어하는 피상적 이유는 그의 외모다. 그의 백일몽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젊고 예쁜 부인과 함께 사는 것이 부인에게 부당하다는 생각이 그의 외모에 대한 집착적 혐오로 바뀌는 것 같다. 소설의 초반, 검진을 끝내고 산책을 나갔다가 매일 만나는 지겨운 늙은 목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마주치지 않기 위해 다리 난간에 기대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목사가 그를 알아채고 옆에 다가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젊고 예쁜 아내를 괴롭힐 것이 뻔한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목사에게 인사를 건넨다. 못생겼다. 아내가 젊고 예쁘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이 둘은 죽이고 싶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젊은 아내가 찾아와서 자신이 외도중이라 목사와 섹스를 하기 싫은데, 자꾸 섹스를 하려고 해서 미치겠다는 말을 듣자, 그를 죽이고 싶은 피상적인 욕망을 더욱 구체화시키기 시작한다. 물론 백일몽 속의 일이다. 


막연한 상상을 구체화한 상상으로 디테일을 구현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그에 대한 혐오심을 심적으로 조절하는 수단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 예전에 남편이랑 싸우던 날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차가 주차된 걸 보자, 영화 <봄날은 가다>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그 반짝반짝 윤나는 남편의 차를 스윽 긁고 가는 상상을 하자, 약간의 죄책감이 증오감을 희석시켜주었었다. 의사는 그레고리우스와 싸운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악감정도 없으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근거없는 분노를 희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코믹하게 느껴졌던 그 때문이었다. 누구나 상상 속에서는 살인도 하고,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야기의 전개와는 별도로 의사의 일기를 통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논란이 될만한 생각이 다루어진다. 안락사와 낙태 등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모두 의사의 머리속에만 있다. 그의 환자들이 울며 불며 선생님 살려주세요 라고 늘어질 때 사실은 죽여달라는 소리다. 뱃속의 아기를 죽여달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에게는 의사로서의 사명과 임무, 책임 등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도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선택일 뿐 속으로는 수없이 논쟁한다. 의사로서 주어진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의무, 그리고 한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결정. 뱃속의 아이를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는 고객들과 의사로서 뱃속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무감, 이러한 상반적 상황은 . 하지만 그는 준비된 똑같은 멘트로 그런 부탁들을 거절하고, 일기장에 그 일에 대해 혼자서 논쟁한다. 그리고 후에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고객들을 보면서 또다시 깊은 상념에 빠져들어간다.


그런데 그리고리우스 부인에게만은 예외다. 그의 글 속에서 드러난 그의 신중한 성격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가 늙고 추한 목사와 엮여, 밤마다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섹스를 해야 하는 일에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자는 실제로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남자에게 느낀 관능적 사랑에 대한 종교적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청춘이 선물한 푸르른 사랑을 저버리고 늙은 목사에게 아무렇게나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회개하듯 바쳤다. 그레고리우스가 생각하기에 그 잘못된 선택의 근원은 아무 죄도 없는 인간에게 죄책감을 심어준 종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을 '더렵'히고 마음을 '더럽'히게 될 지 모른다는 우스꽝스러운 죄책감은 탐욕스런 늙은 목사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걸로 '용서'되는 건가.


의사 글라스가 모순적인 관습과 규율 때문에 비롯된 한 여자의 불행한 인생을 바로잡고 싶어한 것은 그녀를 향한 정신적인 사랑인 것 같지만, 일기장에는 그렇게 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닥터 글라스 자신의 불행한 과거와 엮여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풋풋한 첫사랑을 잃었다는 공통점, 그가 이제껏 혼자인 이유일 지도 모를 상실 저편에서 목사 부인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위안을 얻으려는 갈망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목사가 죽는다고 해서 그 여자를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그 부럽도록 잘생긴 레케와 목사 부인을 위해 남몰래 살인을 계획한다. 사랑하지만, 자신과는 말고 그녀가 원하는 남자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런 헌신적인 사랑인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닌 것도 같고. 애초에 목사 부인에 대한 어떤 연정도 있지 않은 것도 같다.


뒤편 설명에 최근 읽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와 문체 면에서는 비슷한데도 없지만 알 수 없는, 일 길이 없는 인간의 심리 라는 측면에서 공감한다. 하지만 또 알 것 같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사의 회전>과 다르다. 사랑은 반드시 육체적이어야 하느냐라는 진부한 질문을 던질 게 아니라, 의사가 왜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그레고리우스를 죽이고 싶어했는지, 의사가 젊은 목사 부인을 위해서 했던 행동은 (당연히 잘못된 거지만)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거 같다.


애초에 왜 사랑은 죄책감을 동반해야 했을까. 때로 그 동반으로 인해 '그리고'로 이어지는 숙명적 불행은 수많은 불행을 낳은 '그리고'를 설명한다.

놀랍다. 19세기에 이런 소설이 나왔었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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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티브 -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을 위한 섬세한 심리학
일자 샌드 지음, 김유미 옮김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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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하다는 말이 때로 부정적인 의미로 들릴 때가 많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스스로 민감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민감한) 권리를 행사하려 하는 경우 민감성을 존중받기 보다는 이기적으로 비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얼마전 서울대 병원에서 있었던 일인데, 외래 환자와 입원 환자들을 위해 가벼운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일반 카페 정도만한 크기에 천장까지 책이 꽂혀 있고, 신간을 비롯해 읽을만한 책이 꽤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편이다. 먹을 것을 가지고 들어오거나 전화통화는 금지되어 있지만, 카페 분위기처럼 되어 있으므로 소곤소곤 떠드는 것은 허용되는 편이다. 또한 개방되어 있는 도서관 구조상, 바깥의 일반인의 소음이 들어오고, 바로 옆에서 공사중이어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 때 나는 PC를 하기 위해 컴퓨터에 앉아있는데 네 대의 PC 중 내 왼쪽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내가 앉기 전부터 전화통화를 소근소근하고 있었다. 


관리자가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내보내고 주의를 주었지만 구석에 있어서 관리자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나는 굉장히 신경이 민감해져서 뭔가를 읽는 일을 포기하고, 블로그 답글을 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화통화하는 사람의 반대쪽 옆편에 앉아있는 사람이 흘끔흘끔 계속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옆사람의 통화가  방해되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특히 전화 통화에 민감해지는 편이다. 계속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끝나지도 않은, 끊어졌다 이어졌다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전화통화는 계속해서 집중을 방해하고 언제 끊나 언제끊나 계속 기다리게 되고 모든 신경을 그 전화소리에 끌리게 만든다. 버스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때, 이어폰이 없다던가 하는 경우는 버스에 탄 내내 지옥같은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통화하던 사람이 주의를 당하고 나간 후에도 오른쪽 옆사람이 계속해서 자꾸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중에는 흘끔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한참 쳐다보고 한숨을 푹푹쉬고 그러는 게 내가 뭔가 그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 나는 혹시 내가 목에서 가르랑 소리를 내거나 콧물을 훌쩍거리거나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소리를 내거나 혹시 화장품 냄새 같은 게 진하게 나거나 하는 건가 해서 나 자신을 주시했지만 알 수가 없었는데, 결국은 옆에서 한마디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 진짜 여기가 도서관인데... 내가 잘못된건가.. 하는 거다. 혹시 저한테 하는 소리세요? 하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알고보니 키보드 소리가 자기 신경을 자극한다는 거다. 내가 수십년동안 하루종일 키보드와 지내다보니 키보드 타이핑 속도가 빠르고, 그러다보니 일반인들이 딱 딱 딱 딱 누르는 소리 대신 드르르르륵 하는 소리로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유난히 키보드 소리가 크게 나는 키보드인가 여러가지로 생각을 해봤지만, 컴퓨터를 하라고 갖다놓은 도서관에서 컴퓨터를 하는 것이 잘못인지 판단이 안섰다. 


나는 어쨌든 쓰던 답글은 마저 끝내야 하겠기에 내가 전화통화에 민감하니 키보드에 민감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먼지 푹푹 쌓인 키보드 덮개를 씌우고 끌어다가 씌워보기도 하고 (별로 소용이 없었다) 한글자씩 천천히 처보기도 하면서 겨우 끝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내 키보드 소리를 지적한 그 사람은 자신이 내는 마우스 클릭 소리는 안들리나부다. 내게는 키보드 소리가 안들렸지만, 그는 마우스를 계속해서 딸깍 딸깍 누르면서 인터넷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 마우스 소리도 시끄럽거든요? 하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싸움을 잘 못한다. 일단 그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나서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손발이 떨려오는데, 모르는 남자랑 어떻게 말싸움을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폭력이라도 쓰는 남자면,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나, 여자라고 해도 질 것이고, 설사 애라 해도 질 거다. 


이거 리뷰 쓰다가 갑자기 내 얘기가 길어졌는데 이 책이 사실 얇고, 다루는 내용도 크게 깊이있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섬광같이 꽂히는 부분이 있는 책이었다. 저자는 민감함이 내향적인 성격과 같이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민감하면서도 외향적인 사람이 30%라는 점을 지적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스스로가 외부 사람들에게 외향적으로 비추는 까닭에 그것에 가려 나의 민감함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고 결론내렸다. 


이 분야의 심리학에서 분류상하는 성격의 유형에 내향성이 외향성의 부족을 뜻하는 부정적은 용어로 자주 쓰이고 또한 그러한 부정적인 성격 분류가 다시 민감함과 공통점이 많기에 민감한 사람들의 정체성이 종종 종중받지 못하고, 또한 그러한 개인이 문화 사회적 활동에 밀려 문제시되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거나,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을 힘겨워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문제있다고 폄하하는 사회이지 않은가. 하지만 민감함이건 무엇이되었건 어떤 성격을 규정짓는 분류에는 장단점이 함께 따라오기 마련이다. 


자신이 민감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면, 민감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게 되면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또한 주변 관계도 재정립할 수 있다. 민감한 사람들은 '숨어있는 뉘앙스를 남들보다 더 많이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들어오는 인풋은 더 깊은 곳에 입력함으로써, 내부 세계로부터 받아들인 인풋과 느낌이 무수한 개념과 연상 사고를 불러 일으킬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민감한 사람들은 창의적이도 하지만, 세상이 외향적인 것을 더 정상으로 놓고 평가하기에 그런 자신을 사회에 맞추기 위해 상처받기도 쉽고, 고립된 감정을 느끼기도 쉽다. 


성격이란 것이 한마디로 민감하다 안하다 이렇게 내향적이다 외향적이다 이분법적으로만 구분할 수는 없으므로 내가 민감하다, 혹은 외향적이고 민감한 성격이다 라고 정의 내려 그 틀에 모든 것을 맞추려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하지만 나의 민감함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그것 때문에 생기는 인간 관계와 일상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지혜롭게 이용할 수 있겠다. 그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 라는 한 구절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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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3-14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타인보다 민감한 사람> 이란 책을 읽고 위안을 얻은 민감한 사람입니다. 공감하며 글을 읽었습니다. 저도 도서관에서 다른 사람들이 시끄럽게 구는걸 못참습니다. 저도 작은 소리에 굉장히 예민한 편입니다. 그리고 저도 도서관에서 키보드로 타자를 치면 소리가 커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죄송하더라고요ㅠ 키보드가 워낙 뻑뻑해서 조심히 해도 소리가 나서요. 아무튼 민감한 사람은 세상살기 피곤한거 같습니다ㅠㅋ 그래도 파이팅입니다^^

CREBBP 2017-03-14 15:08   좋아요 1 | URL
저는 스스로 민감하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위안이 되었어요. 민감하다는 것과 성격 나쁜 것과 동일어가 아니며, 민감한 걸 인정해도 나쁜 게 아니라는 걸,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주어야겠다는 거였거든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3-14 18:17   좋아요 1 | URL
저도 최근에 들어서야 제가 예민하고 민감하다는 사실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민감한 사람들 중에 창조적인 사람이 많다는 말에 위안을 얻고 있습니다^^
 
대논쟁! 철학 배틀
하타케야마 소우 지음, 이와모토 다쓰로 그림, 김경원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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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을 읽으면 가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이유는 결론도 없고 답도 없고 쓸모도 별로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만든 여러가지 개념들은 그 철학자의 생각을 그 철학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여 깊이 있게 파고 들어야 대체로 가능하다. 고등학교 때도 윤리 시간에 철학을 조금 배웠고 대학때도 교양 시간에 배운 것 같긴 한데, 그 때 배운 건 개념의 나열에 불과했을 뿐, 그 개념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이 실생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수학이나 뭐 과학 심지어는 역사 같은 것 조차 학교 때 배워서 아는 거랑 성인이 되어 특정 주제의 책을 통해 아는 것은 천차만별인데, 유독 철학에 있어서 만큼은 책을 읽어도 학교 때 배운 것에서 별로 나아가는 게 없다. 


그러니까 어쩌다 얻어 걸려 읽는 철학책이라고 하더라도 특정 철학자의 개념을 독파하는 게 아니라, 지식을 좀 채울 욕심으로 개론적인 것을 읽는 편인데, 읽을 때는 뭐 대략 그렇구나 알겠지만 그렇다고 썩 심금을 울린다거나 하지 못했다. 표지에서도 대략 짐작이 갈만한데, 이 책이 기존에 읽었던 개론서와 다른 점은 철학자들끼리 어떤 주제를 놓고 가상의 설전을 벌이는 것이다.빈부격차는 정말 불공평한 것인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살인은 절대악일까, 소년범죄 엄벌로 다스려야할까, 인간의 본성은 선할까 악할까, 전쟁은 절대악일까, 중요한 것은 세계인가 국가인가 아니면 자기자신인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일까 다른 법칙이 있는 걸까. 행동을 정하는 것은  사회와 자신 중 어느 쪽인가, 양적 만족과 질적 만족 어느쪽을 추구할까. 자유인가 규제인가. 경험이 먼저인가, 이성이 먼저인가, 일원론과 이원론, 신은 존재할까,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렇게 총 15개의 주제를 놓고, 인류 역사상 획을 그은 철학가(혹은 작가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의 이론과 실천정신을 들고 나와 설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 책을 보고 각 철학 배틀에 사용된 주제들을 살펴보니 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맞구나 하고 수긍하게 된다. 생각을 똑바로 하고 살아야 한다. 나 혼자 잘 살자고 권력과 돈에 혈안이 된 위정자들을 보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의 일부는 가치관의 부재이자 철학의 부재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을 뽑고 그들에게 정치를 맡긴 우리들 역시 똑같이 잘못한거다. 철학의 부재, 생각의 부재가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고 살펴보지도 않은 채 필요한 논쟁은 피하고 무슨 좋아하는 연예인 고르듯 피상적으로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을 고른 대가이지 않은가.

첫번째 주제가 빈부격차는 어디까지 허용될까. 빈부격차는 정말 불공평한 것일까?다.  만일 술집에서 이 질문을 답하려고 한다면 민감한 사상논쟁까지 확대될 것이다. 아르스토텔레스는 격차는 능력에 따른 배분이며 정의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격차란 자본가의 착취에 의해 생겨나는 불공평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주의에서 기회의 균등과 약자 구제 시스템이 가능해야 격차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한 사람은 롤스였다. 또 중요한 한 사람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이 격차를 낳는데 그것이 결국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돌아간다며 격차를 옹호했다. 

살인은 절대적일까? 벤담은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인정될 수 있다고 했다. 바로 얼마 전에 본 영화 아이 인더 스카이에서 한사람의 사랑스럽고 무고한 아이가 수많은 사람들의 폭탄테러를 대신해서 희생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었다. 경험이 먼저인가 이성이 먼저인가와 같은 주제를 몇 페이지에 걸친 토론을 통해 심도있게 다루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지만, 쉽게 머리를 싸매고 깊이있게 들여다보기 어려운 독자들에게는 맛보기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베이컨은 자연과학의 수식도 경험에 의해 획득된 진리라고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진리는 인간의 선천적인 이성에 의해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1+1=2라는 공식이 경험과 함께 작용하는 감성과 합리적 오성의 공동 작업에 의해 생겨난 이론이성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각 철학자들을 따로따로 볼 때는 지루하기만 한 철학적 개념들이 어떤 한 주제에서 여러 사람이 만나니까, 상호 비교가 되고 또한 일상에서 늘 만나고 생각할만한 주제로부터 개념을 알 수 있게 해서, 상대적으로 쉽고 친절한 철학책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철학자들의 얼굴 그림 카툰과, 토론에서 사용된 용어의 해설 및 요점 정리 등 전반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 읽고 펼쳐보기 편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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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3-1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어보여요ㅋ

CREBBP 2017-03-14 15:08   좋아요 1 | URL
제가 철학책 별로 안좋아하는데, 이 책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 누구나 대통령을 알지만 누구도 대통령을 모른다
강준식 지음 / 김영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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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래로, 그 어떤 사상을 추종하건, 그 어떤 종교를 따르던, 혹 그 어떤 정치 체계를 선택하건, 인류 모두가 공동으로 동의하는 가치가 있다면 무엇일까. 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헌법상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주요 가치로 채택하고 있는 근본 가치가 아닐까 생각된다. 헌법이 안지켜지는 문제는 별도의 문제로, 예를 들어 강력한 신분제로 사회 질서를 이루고 있는 인도에서조차 헌법 자체로는 이를 부정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개인의 자유와 평등 인권 등의 가치는 인류 공동의 가치다.  대한민국 헌법 1조에 따르면, 1장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1항과 2항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선포한 이 주권과 권력을 국민이 언제 가졌으며 지금은 가지고 있을까. 


이승만(1대, 제1공화국) - 이승만(2대) -이승만(3대) - 장면/윤보선(4대, 제2공화국, 11개월) - 박정희(구테타 정권, 5대) - 박정희(6대, 제3공화국, 4년제 재선 1회가능) - 박정희(7대, 재선 2회 가능) - 박정희(8대, 유신, 임기 6년 재선 무제한) - 박정희(9대) - 최규하(10대) - 전두환(11대, 12대) - 노태우(13대) - 김영삼(14대) - 김대중(15대) - 노무현(16대) - 이명박(17대) - 박정희딸(18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6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거의 40년이 흘렀을 때까지 역대 대통령의 숫자는 겨우 11개월을 통치했던 윤보선/장면 정권을 제외하면 단 2명에 불과했다. 그 때 현대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역대 대통령의 이름을 외울 필요가 없었음이 유일한 이유는 혜택이다. 나 역시 태어나서부터 어린 시절 내내 박정희가 집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권력이 개인을 눈멀게 하고 귀먹게 한 나 같은 시대의 학생들에게 학생시절의 어느 기간까지는 태어날 때부터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절대적 권력은 권력은 민족과 국민의 생존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을 보장해주는 신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가 권총에 맞았을 때 그 소식을 전하던 선생님도 울고, 아이들도 울었다. 그 죽음이 역사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십년간 박정희의 권력 아래에서 그가 가린 모든 것들을 보지 못했던 개인이 앞으로 펼쳐질, 헌법의 1항과 2항이 제시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권력을 국민이 갖게 될 것이라는 당연한 희망 앞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알지 못했음이 지금 생각하면 애석하다. 


만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지 않았다면, 현재의 우리 나라는 어떤 형태의 나라를 이루고 있을까. 남과 북이 공동으로 생존 기간 내내 왕위에 올라 있는 것도 모자라 대대손손 왕권을 물려 받는 민주주의건 공산주의건 세계의 어느 국가에서도 유래가 없는 상속적 권력을 나란히 이루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학생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정희의 장기 집권이 의미했던 것들을 박정희의 죽음을 애도하던 모든 이들이 이해하고나서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박정희가 단단하게 구축해 놓은 군부의 총칼 앞에 놓여있었다. 박정희가 나쁜 건 그가 자신만의 성공 방식을 그를 모방하는 또다른 독재자들, 또다른 위정자들에게 학습시켰다는 거다. 그에게 학습된 많은 정치 대결의 논리가 더욱 세련되게 보이도록 발전하여,  민간정부가 출범된지 20년이 넘도록 아직까지도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혼탁한 정치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것을 보면, 박정희와 이승만의 독재는 당대의 독재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를 후퇴시긴 것에 대해서도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민간 정부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실 어떤 대통령을 진정한 민간 정부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대통령 직선제에 의해 출범한 대통령과 그의 내각을 민간 정부라고 치면 박정희의 정권 유지를 위해 구축된 신군부하에서 세력을 잡았던 노태우가 영호남 두 야당 후보의 단일화 실패를  기회로 정권을 잡은 것도 민간 정부라 할 수 있는지, 또 국민의 뜻과 반대로 야합으로 출범된 김영삼 역시 민간 정부는 민간 정부이니 민주적 방식으로 선출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 아직 판단이 서지 못한다. 비록 박정희의 구테타가 내각 책임제 하에서 실권을 갖지 못한 대통령 윤보선이 실권을 잡기 위해 그의 구테타를 지원했고, 당시의 모든 상황이 쿠테타를 용인하는 분위기였다는 말을 수용한다 하더라도(이 책에서는 그렇게 쓰여 있지만 내가 그걸 수용하겠다는 건 아니다) 박정희는 1인 독재가 국가와 국민의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결정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결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그의 가장 위대한 치적으로 알려진 경제개발 계획은 전적으로 그의 생각이 아니었으며 그가 총으로 뒤집어 엎은 2대 내각 책임제 상에서 장면을 국무총리로 움직였던 장면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아직까지 태극기 부대들의 영혼까지 삼키고 있는 박정희의 치적들의 대표적인 것들은 장면 정권이 민주적 절차로 만들어 놓은 것들이었으며, '못살던 나라가 잘살게 된' 사실 뒤에는 수많은 노동자 농민들의 피와 땀이라는 대가 뿐만 아니라 서슬퍼런 독재가 몰아주던 정경유착의 깊은 고리가 더욱 더 심화되는 자본주의 내에서 국민의 고통을 담보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평가하거나 언급할 때, 한 개인에게 촛점을 맞춘다면, 역사를 배반한 많은 실책과 오판, 과오들이 희석될 우려가 있다. 누구든(대통령이든 대통령이 아니든) 한 인간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본다면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핑계가 있고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서 지금처럼 어수산하고, 또 지금처럼 중요한 결단이 필요한 시기에 대선 후보로서의 한 개인을 조명하는 일은 그 개인을 이해하는 일과도 닿아있으므로 책을 선택할 때, 읽을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  책에서 조명한 부분은 드러내고 싶은 일부일 뿐이고, 책에서 그 어두운 이면에 무엇이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나간 대통령의 경우 다면적인 평가가 가능하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대선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준오르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줄 수 있다. 


건국이래, 국민이 거쳤던 모든 대통령들에 대한 미니 자서전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대통령이 되기까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태어나고 자란 배경과, 젊음을 바친 가치와 행적,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선택했던 수많은 결정들에 대해 떠돌았던, 지금도 떠돌고 있는 이야기들을 모아놓았다. 여기 모인 역대 대통령의 인생 모음의 일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결정했고, 또 어떤 대통령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까지도 결정했으며, 또 특정 대통령의 경우 그렇게 많은 시민을 학살하고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아이러닉하게 국제적 경제 호황이라는 기회와 결단력 실행력으로 사상 유례없는 최고의 호황기를 맞아 높은 수준의 경제 도약을 기록한 경우도 있다. 


이렇게 통으로 대통령 개인 한 사람 한사람을 조명하면서 역사를 바라보니, 대한민국의 민주 발전에 먹칠을 하고 장기집권한 두 사람의 이승만/박정희, 그리고 40여년만에 비로소 찾아온 서울의 봄을 짓밟고 광주학살로 정권을 다진 전두환이 만든 어두운 흑역사는 면면히 이어온 친일들의 후손들에게 정권을 내어주기 전인 16대까지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개선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할 말 하고 살 수 있는 것도 잔인한 순환의 역사 속에서도 시민과 민중의 거센 저항이 이룩해낸 위정자들의 양보가 조금씩 쌓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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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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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목적 중 하나는, 시간과 공간이 묶어놓은 좁아 터진 관계망과 문화적 경계 밖으로 어슬렁거리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생활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기원후 20세기와 기원전 10세기 전체 3천년 전에 쓰여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는 초기 인류 문명의 풍경을 그 어떤 자료보다 매우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보물단지다.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딧세우스는 양적 방대함이나 완벽한 예술성, 그리고 오래 전에 쓰여진 점까지 모두 합쳐 서구 문학의 기원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리아스가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의 전쟁을 주로 다루고 있다면 오딧세이아는 귀향을 다루는데, 두 개의 스토리는 신화적으로, 작중 인물과 성격 모두 일관성있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야기상 약 10년간의 시간 차이가 있다. 전투장면에 대한 묘사가 많은 일리아스에 비해 오딧세이아는 그동안 우리에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어떤 변화를 통해서건 접해본 적 있을 법한 기이하고 신비한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전편인 일리아스에서는 오딧세이아가큰 비중이 없고, 노획물(여자)을 둘러싼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과의 갈등 속에서, 아킬레우스 없이 트로이아에게 참패를 거듭하는 와중에 신들이 패가 갈려 서로 자신들의 팀을 돕고, 신들 자체가 직접 전장에 끼어드는 모양새로 돌아가는데, 그리스 군은 여러 종족에서 징집된 여러 전사들의 가문과 각 등장 인물들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성을 띄며 가문과 신화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사연들을 수도 없이 열거되어 전쟁 중간 중간에 신들과 인간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중간 중간 들려주는 인물이 가진 여러 사연들이 플래시백처럼 기능하긴 하나, 시간순으로 연결되어 있다. 


일리아스 편이 배경 자체가 전쟁터이고, 전쟁의 참상을 세세하게 리얼하게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야기라기 보다는 신과 인간의 이야기라고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로 사실 누가 이겼는지 결론이 나지 않고 끝났다 사실을 들 수 있다. 즉 이 서사시의 목적은 그리스 군이 연합해서 트로이아를 함락했다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전쟁을 조직하기까지의 배경, 신들의 질투와 개입, 그리고 노획물을 둘러싼 내부 분열 및 신들 자체의 이해 관계에서 비롯된 갈등으로 전투가 점점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는 상황 그 자체로 보여진다. 신의 몸에서 태어난 아킬레우스는 필멸의 생을 선택한 댓가로, 영웅이 되지만 아가멤논에게 노획물마저 빼앗긴 후, 삐져서 무슨 전쟁 놀이도 아니고 그럼 나 이제 안해 하고 함선에서 뒹굴거리며 논다. 그동안 트로이아의 영웅 헥토르는 연합군을 떡주무르듯 주무르고 양편으로 갈라진 신들의 다툼은 더욱 거세게 전쟁의 흐름을 좌우하는데, 결국 결말은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에게 친구를 잃은 후 헥토르를 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전세가 바뀌어 트로이아의 패배가 눈앞에 보일 뿐이었다. 


오딧세이아는 이와 달리 구성부터가 흥미롭다. 귀향이라는 주제에 집중되어 있을 뿐더러, 일리아스와 인물들과 이야기들이 연장선상에 있어서 훨씬 읽기가 수월했다. 이야기의 내용은 오딧세이아가 전쟁이 끝난 후부터 귀향하기까지의 과정이지만, 서사시는 이야기를 안이하게 시간순으로 풀어놓지 않는다. 겹겹이 쌓인 액자 구조 속에서 시간과 시간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 그리고 다양한 시점에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오딧세이아의 귀향이 조금씩 밝혀지는 형태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주인공은 오딧세이아이고, 초반의 무대는 오딧세이아의 고향 이타카이고,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 무대에는 오딧세이아가 나타나지 않는다. 트로이아 전쟁의 승리와, 트로이아 전쟁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고 누가 얼마나 그 전쟁의 공로가 컸으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었느냐 같은 중요한 문제들은 이미 끝난 상태여서 그 유명한 트로이아의 목마는 여기 저기를 떠돌며 오딧세이아의 소식을 이야기하는 구절이나 오딧세이야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부분적으로만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는 살아남아 있는데, 트로이아가 함락되면서 메넬라오스가 다시 찾아온 모양으로, 오딧세이아의 활약을 상기하는 형식으로 알려준다. 자기 몸을 몹시 매질하고 상처 투성이로 만들고 누더기를 걸쳐 거지로 분장해서 트로이아로 침투한 후, 정보를 얻어 가지고 나오고, 목마 속에 군사들을 태우고 숨어 들어갔을 때에도 지략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딧세이아는 전설처럼 활약상이 떠돌뿐,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와 함께했던 전사들과 그는 돌아오지 못하고, 집에는 아내에게 구혼하는 구혼자들이 매일 모여 파티를 벌이며, 오딧세이아의 아내에게 결혼을 요구하면서 오딧세이아의 집을 거덜내고 있다. 그는 이타케의 왕인데, 말이 왕이지, 당시의 왕이라고 하면 이장이나 동장, 면장 정도 되는 것 같다.  훌륭한 장수가 왕이 되어 결혼해서 막 아들을 낳아놓고는 전장으로 떠났다. 살면서 늘 입을 조심해야 하는데, 알고 보니 비극의 트로이아 전쟁의 원인 역시 오딧세이아가 일부 제공했다. 헬레나가 미인이라 그녀에게 청혼한 구혼자들이 엄청 많았던 모양인데, 자기들끼리 딜을 해서 헬레나가 누구를 선택하든 그 남편의 권리를 지켜주자고 맹세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바로 오딧세이아였던 것이다. 


이로서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 도대체 어떻게 여자 하나 때문에 그리스 전역에서 군대를 그토록 많이 모을 수 있었으며, 남의 일에 그토록 목숨을 걸고 싸우는걸까. 당시 전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다. 아름다운 여자를 갖는다는 것은 그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소유의 문제, 명예의 문제였고, 누가 차지하건 그 명예를 함께 존중해주기로 한 이상 그들과 같은 운명 공동체 속에 속했던 것이다. 어쨌든 오딧세우스 편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음에도 전쟁의 당사자인 메넬라우스와 헬레나는 살아있다. 헬레나 한 명을 구해오기 위해 그 숱한 그리스의 전사들이 죽었음에도 당당하게 살아있는 헬레나, 수많은 전사들의 가족들은 어쩔껀가. 3천년 전 버전의 라이언일병 구하기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났는데 왜 돌아오지 못하는 걸까.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아버지는 아기가 갓난 아이일 때 전장으로 떠났고, 그 아비를 기다리며 아기는 어른이 되었다. 그 아기가 텔레마코스다. 왕이 집을 비운지 오래되었으니, 왕이 가진 여자와 재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타카의 많은 훌륭한(?) 장수들이 페넬로페(오딧세이아의 아내)에게 구혼을 한답시고 집안으로 몰려와 집안의 살림들, 먹을 것들을 거덜낸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시아버지는 이미 은퇴를 하고 시골에 내려가있고, 아버지가 떠났을 때, 아이는 어렸으며, 페넬로페 역시 어린 색시에 불과했으므로 짧은 신혼의 추억을 뒤로 한 채, 아무 힘없이 왕없는 왕가를 지켜야 했을 것이다. 


수많은 신들의 진흙탕 싸움이었던 일리아스와는 달리, 오딧세이아의 주인공 신은 아테나이다. 오딧세이아의 귀향을 진정으로 바라는 아테나는 제우스에게도 조금씩 도움을 받아 물심양면으로 오딧세이아를 돕는다. 서사시는 텔레마코스가 아테나가 준 용기를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 섬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가 여기 저기 들러 찾아온 곳은 바로 오딧세우스와 전쟁을 함께한 메넬라오스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오딧세이아의 이야기는 메넬라우스와 헬레나의 입을 통해 재현되지만, 그들이 헤어진 지는 오래되었고, 단지 메넬라우스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전쟁이 끝난 후 전사들이 분열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소식 뿐이다. 메넬라우스가 하는 이야기 역시 프로테우스를 잡아 들은 이야기인데 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귀향중에 세상을 떴다. 아이아스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파멸했고, 아가멤논은 아내가 아이기스토스와 바람이 나서 귀향하자마자 암살당했다. 한편 오딧세우스는 살아서 바다 어딘가에 붙들려 있다는 것인데, 이 때 그는 배도 없고 전우도 없이 요정 칼립소 궁전에 붙들려 있는 중이다. 오딧세우스의 극적인 등장은, 이렇듯 떠도는 소문에 의해 현재 오딧세우스가 오귀귀 섬의 칼립소에게 붙들려 있는 장면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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