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호기심을 위한 미스터리 컬렉션 - 당신이 믿는 역사와 과학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들
맹성렬 지음 / 김영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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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미스터리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미스터리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지식은 업데이트되지 않는다면 고인 물처럼  썩는다.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것을 수십년간 써먹는 건 썩어가는 더러운 물을 마시고 사는 것과 같다. 어떤 지식이 낡은 것이 되는 과정은 과학의 패러다임의 변화다. 우리의 앎은 학교에서 배워서 알고 있던 것과, 배우지 않았는데 살면서 알게 되는 것들과, 책이나  TV를 통해 새로운 이론이나 과학으로 완전히 자리잡아 지식이 된 것들이 마구 섞인 채로 저장되어 있다.


읽으면서 저자의 주장과 문장에 여러가지 의혹이 들었는데, 결국 이런 책을 쓰는 이유가 뭘까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욕심없이, 그저 낡은 지식을 업데이트해서, 썩은 물 대신, 최소한 정수라도 한 물을 마시고자 책을 읽는 내 바람은 한낮 욕심이란 말인가. 비문학 도서를 읽는 목적이 그렇게 작은 바람일 뿐인 내 사고방식과는 다른 차원의 책이었는데 그럼에도, 긍정적인 마인드로 책이 전하는 메시지를 한마디로 전달해 보자면 그것은 아마도 앎을 의심해 보라는 것일 거다. 소제목도 ‘역사와 과학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들’이다. 여기서, 가설이란 말을 주목해야 한다. 책의 내용은 모두 가설들이다. 즉 학계에서 주류로 받아들일만한 근거나 증거가 없는 내용으로 대개 기존 과학의 틀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헛점들을 파헤치고, 이 구몽을 메울만한 다양한 새로운 가설들을  제시한다.


무엇이 이단인지를 알려면 정상을 먼저 통달하고 있어야 한다. 첫 챕터는 신대륙이 발견되기 이전 고대때부터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에 교류가 절대로 불가능했다고 믿고 있어야 미스터리의 미스터리다움을 만끽할 수 있을텐데, 내 경우, 담배와 코카, 옥, 고구마, 닭등의 유래가 어느 대륙에서 몇세기에 전해졌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고대 이집트 미라에서 코카와 담배가 발견되거나, 옥으로 만든 유물이 폴리네시아에서 발견되거나 구대륙의 닭과 고구마가 중남미에서 되거나 하는 일을 따져 구대륙과 신대륙간의 교류 증거로 추론하는 과정이 미스터리하기 보다는 이러한 이론이 현재 학계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제시되는 여러가지 이론들이 역사로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우리 주변에 한 번만 겪고 다시는 재현하지 못하는 현상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이 이론이 되려면, 그러니까 그런 현상들을 설명하려면 실험을 통한 재현이 필요하다. 재현하지 못하는 기적은 거짓말, 착각, 환상과 종종 섞이고, 부족한 설명은 미스터리는 편리하게도 전지전능하신 신의 힘이 차지한다. 신의 종류는 많다. 기독교나 불교 같은 전통적인 신 말고도 자신의 경험과 판단으로 실험으로 밝혀내지 못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이유를 만들어 믿는 것도 넓은 의미의 종교다. 뭔가를 근거없이 믿으면 그게 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학계에서 정상과학이라고 인정하지거나 비주류 이론이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주류로 편입하기에는 근거가 증거가 부족하다. 오랫 동안 주류를 형성해온 이론을 뒤집기 위한 증거가 충분하다면 이제까지 비주류의 몫이었거나 가설에 불과했던 이론은 점차 힘을 얻게 된다. 연구 과제를 찾아 헤매는 전문가들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켜 더 많은 증거들을 찾게 되고  이제까지 비주류 혹은 이단이였던 이론이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이제까지 진리라 믿었던 것은 낡은 것으로 전락하거나 더이상 발전할 추진력을 잃는다.그러므로 현재의 정상과학도 현재의 주류 이론도 오래전 언젠가는 비주류였고, 놀림감이었고 이단이었을 때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근거도 희박하고 증거도 불충분한 주장들이 추후 모두 주류로 편입되고 메인 패러다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주장들 지극히 일부만이 주류를 바꿀 중요 이론으로 바뀐다. 과학에서도 그렇고, 역사와 인문 철학 등도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관에 따라 변화한다.


사람들이 가끔 헷갈리는 게 있는데, 어떤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 딱 한번 일어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사건이며 일화다. 일화가 신화가 되는 과정에는 역사적 필연성이 관여하지만, 한 사람의 편향된 지식으로 인한0 예외적 사건의 일반화는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위상이 달라지기에 대중은 단단한 기반을 기초 지식이 필요하다.


UFO와 텔레파시, 초능력, 초심리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것들은 과학적인 추론이 불가능하다. 극이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우연히 재현된 현상을 현재 알려진 과학이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무수히 나타나는 UFO의 진실이, 실은 사진 조작과 착시와 유성과 드론 등등 여러가지 착각일 수도, 혹은 더 발달된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나타난 것이었는지, 그런 것들이 실제로 외계문명의 징후라 할지라도, 현재의 과학으로 짐작도 하지 못할 세계이다. 초능력, 초심리 등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진화론을 부정하는 듯한 컨텐츠에 최재천 교수와 리처드 도킨스를 폄하하는 내용을 실었는데 문장에 감정이 실려있다. 최재천 박사가 자신의 블로그에 자연선택설을 자연선택원리라고 부르자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부당하다는 내용이다.


“생물학자들에게는 오래전부터 물리학자들에 대한 심각한 콤플렉스가 있어왔다. (p173)

“잔뜩 주늑이 든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한때 물리학 선망이라는 표현이 공공연하게 쓰이기도 했다.


“최재천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은 리처드 도킨스다. 그의 본업은 진화생물학자 및 동물행동학자이지만 진화론자와 무신론자, 회의론자들의 전위이자, 극렬한 다윈주의자로 전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p173)

그렇다고 해서 물리학자인 저자가 진화론을 부정하고 주장하는 새로운 생물학적 이론은 무엇일까. 이런 저런 예를 들며 생명 현상은 대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으며 진화론이 설명할 수 없는 미스테리가 있다는 것이다. 카멜레온이 포식자가 나타났을 때 다른 동료들을 위해 신호를 보낼 때 가장 극적인 색깔 변화가 나타난 사례와 나뭇잎 벌레가 나무잎과 너무 똑같아 다른 벌레가 나뭇잎으로 알고 뜯어먹는 것, 산나무두더지 똥을 먹도록 진화된 변종 식충 식물들 등의 예를 들어, 새로운 진화 패러다임에 주목할 것을 얘기하는데,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과 ‘불가능의 산을 오르다’ 등 여러 책을 읽고, 제대로 이해를 하고도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물리학자가 생물학에 대해 얼마나 자신이 있는 것인지 의아하다.


우리의 과학과 여러 주류 학문, 그리고 시대를 대표하는 패러다임들은 불완전하고 때때로 독단적이다.  근거없는 사이비 과학과 일화와 소설들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그것들이 파고 들 만한 헛점이 주류 과학과 학문에 무수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상 학문도 쫓아가기 어려운 일반 독자 입장에서, 비주류 학문들과 어차피 답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초능력 현상들을 쫓을만한 여력이 남아있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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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는 척 하는 것과도 차이가 있다. 이 책에서는 이 두 가지 차이 중에서, 실제 아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주로 다룬다. 그보다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는 척 하는 것과의 차이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나는 이 두 가지의 차이 역시 실제로 아는 것과의 차이만큼이나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금은 좀 달라졌으리라 추측되지만, 어릴 때부터 우리는 사지선다형 답안지에 익숙해져있다. 문제의 답을 모르면 모른다는 의견을 표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모르더라도 네개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답을 모르는데, 네 개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 인정할 수 없으니, 네 개 중 하나 중에서 답을 추측하거나 찍어서 그게 답이라고 생각한다는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이다. 혹 네 개중 답이 없다는 확신이 들더라도, 시험 답안지에는 답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모른다. 혹은 답이 없다 라는 선택지가 더 주어진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네 개 중 반드시 답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 교육 환경에서 자란 우리는,  확신이 없어도 이게 답이다라는 강요된 선택에 의해 선택된 답을 제출하여 점수를 받아, 그 점수로 구획된 틀 내로 살아가면서,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답을 몰라도 답을 알아야 하는 세상에서, 답이 어떤 권위가 이게 답이다 라고 정해 놓은 답을 고르기 위해 애쓰면서, 이게 답이다 이게 답이다 스스로를 세뇌하며 살아간다. 태극기 집회는 그런 그릇된 자기 확신의 끝판을 보여준다. 처음 찍은 선택지 답이 답이 되려면,그게 답이 안되는 다른 모든 객관적 정보들을 무시해야 하고, 그게 답이 되는 객관적 사실이 하나도 없으면 또다른 거짓된 앎을 추스려서 그걸 만든다. 그렇게 해서 가짜 뉴스가 만들어지고 가짜 사이트가 판을 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답을 아는 게 알게 된다는 것과 동의어가 아님에도, 노인이 된다는 것은 선택한 답이 옳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아님에도, 때로 살아온 세월 자체를 지혜로 믿고 답이 거기서 나온다고 믿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나의 생각.


책 내용도 조금 하도록 하자. 믿는 바를 아는 바로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실제보다 더 많이 아는 것처럼 굴 때 문제의 심각성은 훨씬 커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게 많은 연구에서 드러났는데, 그런 잘못된 믿음을 혼자서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걸 업으로 삼아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 전체가 부담하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선거나 경제 전망에 관한 기사를 매일 쏟아내고 있는 매체와 유명 인사들의 예측은 “다트를 던지는 침팬지들”보다 별반 나은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믿고 주식을 사거나 팔고, 부동산을 사거나 팔고 또 미래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예측을 특히 잘못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한 단어로 “독단.”으로 뭔가의 진위 여부를 모를 때조차 안다고 생각하는 확고부동한 믿음이다. “모른다”라고 말하는 대신 잘못된 추측을 말해도 실제로 잘못된 추측에 대해 실질 비용이 부과되지 않는다. 추측이 맞으면 영웅이 되고 추측이 틀리면 잊혀지면 그만이다.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데다 알카에다와 연합하고 있다는 미국의 주장을 근거로 벌어진 이라크 전쟁은 8년동안 8천억 달러의 비용과 거의 4500명에 달하는 미국인과 적어도 10만 명의 이라크인의 목숨을 빼앗아갔음에도, 처음의 그 잘못된 주장 때문에 생긴 사회적 비용을 아무도 변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고 대담한 예측이 우연히 실현되는 경우에는 거대한 보상이 뒤따른다. 이것은 패널티킥을 할 때 위험을 무릎쓰고 왜 구석으로 차는지도 설명해준다. 자기 명성에 끼칠지도 모르는 타격이 줄기 때문이다.



아는 체하라고 꼬드기는 인센티브가 그토록 강력하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에는 특별한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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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를 읽었는데, 리뷰를 쓰다가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 실렸던 한 산문의 제목을 찾다가 이런 기사를 우연히 발견했다. 처음엔 '김훈 산문집 순위 조작 의혹'으로 얼핏 제목을 대충 읽어서, 김훈 작가와 문학동네 결합이라면 그 결합 자체가 마케팅인데 무슨 순위조작을 할 필요가 있었나 싶어 들어가서 읽었더니 그게 아니라는 소리였고, 무슨 이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넘어가려고 보니, 기소된 날짜가 몇일 안지났고, 출판사가 알라딘 서재에서 꽤나 낯익은 이름이다. 기소된 사람이 이방인을 직접 번역한 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새움출판사가 한동안 카뮈의 이방인의 이화영 번역서에 대한 공격적 노이즈 마케팅으로 요란했던 출판사가 아닌가 해서 뒷북이지만 기사 화면 일부를 캡쳐해왔다. 꽤 지난 일인데, 어찌된 건가 찾아보니 이미 2015년 5월에 문학동네가 새움출판사 대표 이대식씨와 이를 보도한 기자를 손해배상 청구 소송하여 승소했다는 보도가 있다.  http://www.hankookilbo.com/v/cb2c1af8a76f48fea811c5fe1d9ce094


이번엔 검찰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는 소식이다.  캡쳐된 화면의 기사 링크는 http://thel.mt.co.kr/newsView.html?no=2017031509240828438 인데, 머니투데이에(http://news.mt.co.kr/mtview.php?no=2017031509240828438) 도 같은 내용이 실렸다. 메이저 언론사에서는 실리지 않았고, 기자는 같은 사람이다. 


김훈 작가의 인지도와 대중적 명성, 그리고 출판사의 예판 사인본, 초판본, 선물 등등의 마케팅을 봤을 때, 산문집 <라면을 끓이고>의 예판이 베스트셀러에 올라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것이어서, 의혹 자체가 좀 터무니 없어보이기는 하는데, 여기에 두 가지 교훈이 있다. 아무나 건들지 말 것, 증거없이 떠들지 말 것. 시시비비를 떠나서, SNS에 사소한 의혹제기로 기소까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네티즌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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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1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7-03-24 12:25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김훈의 책은 사실 신간 홍보를 할 필요조차 없이 출간 정보만으로도 많은 독자들에게 관심을 충분히 일으키는데 말입니다. 그걸 일반 독자들도 아는 빤한 사실을 이대식이 몰랐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것 같아요. 고로 계속해서 노이즈 마케팅을 일으키는 의도로 보입니다.

시이소오 2017-03-21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뮈 이방인 새로 번역하신분이 맞습니다. 아무리봐도 이대식 이분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자신의 번역본을 비판한 블로거를 고소하기도 했더군요. 과대망상증, 피해망상증 환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

2017-03-24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이사르의 여자들 1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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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과 음모, 속임수와 협작 속에서 펼쳐지는 로마 제국에서 어제의 적은 오늘의 아군이 되고, 오늘의 아군은 다시 또 내일 내 목을 베어갈 자가 된다.  이미 결말이 알려진 역사 라는 피해갈 수 없는 스포를 갖는 역사소설은  어떤 사건을 어떤 맥락 속에서 읽느냐의 문제 속에서 읽게 된다.   역사 소설을 읽는 것은  어떤 사실의 이면에 존재하는 의문의  '왜'와 의문을 '어떻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현재에도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역사를 다양한 시각의 거울에 비추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기록이 팩트에 기반하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승자에 의해 쓰여졌다면, 그래서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할 어떤 부분이 피할 수 없는 왜곡된 형상으로 밖에 읽을 수 없다면,  역사 소설이 제공하는 다중 초점은 무수한 왜곡들의 겹침을 통해 알게 된 팩트에 진정성, 혹은 진실성 같은 살아있는 숨결과 객관성을 부여한다. 한마디로 생명이 있고 숨쉬는 현실이라는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이유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역사 소설은 오히려 이름 없는 수많은 패자들의 시선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승리는 수많은 패배들이 쌓이고 또 쌓여 겹쳐지고 겹쳐지는 정도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

콜린 맥컬로는 멀고 먼 고대 로마사에서 승자의 조건을 환기시킴으로써, 시대를 뛰어넘어 똑같이 반복되는 오늘의 현실, 우리의 현실을 거울에 비춘다.  마스터 오브 로마 네번째 시리즈의 제목은 《카이사르의 여자들이다. 술라가 스스로를 독재관에 임명하고 정적들을 제거하여 제국을 주무르던 시대는 가고 이제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가장 핫한 남자가 되어 있다. 그에게 있는 것은 대중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카리스마, 시대가 선호하던 준수한 용모, 파트리키 귀족이라는 타고난 가문, 그리고 식을 줄 모르는 정력이다.  제목이 《카이사르의 여자들이지만 사실 1편에서 비중있게 나오는 카이사르의 여자는 오로지 한 명 세르빌리아 뿐이다.  그런데 이 세르빌리아는 누구인가.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숙적들의 칼에 죽어가면서 읊었던 그 유명한 대사 '부르투스 너마저'의 주인공, 후에 카이사르가 총해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 브루투스를 낳은 엄마이다.  

부르투스는 자기 엄마의 이부형제 카토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있으면서, 카이사르가 카토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의 노선을 걷고 있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이사르의 딸과 결혼하기를 원한다.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는 전편 포르투나의 선택에서 카이사르가 열여덟살이었던 때  자기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죽은 아내 킨날라가 낳은, 카이사르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외동딸이다. 전편의 첫권을 되돌아보면, 당시 로마를 접수한 술라는 자신의 정적인 킨나의 딸과 결혼한 카이사르에게 서슬퍼런 숙청의 칼날을 피하려면 킨날라와 이혼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망명하여 죽을 뻔했던 순정파 청년이었다.  사랑하는 킨날라가 죽은 후부터 이번 편 이전까지 카이사르의 애정행각에 대해서는 전편의 2부, 3부를 읽지 못해 알수 없지만, 세월은 그를 변화시켰고 이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바람둥이로 변해있다. 가진 것은 출중한 능력과 가문 뿐 관직의 사다리를 오를 든든한 재력이 받쳐주지 않았던 카이사르는 율리아를 시집보낼만한 변변한 지참금조차 없던 형편이었는데, 마마보이처럼 보이는 허약한 부르투스는 우연히 본 율리아에게 반해 엄마 나 쟤랑 결혼시켜줘 하게 되고,  이것 저것 재보던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의 잠재력을 보고 정략 결혼을 추진한다. 브루투스는 때마침 세르빌리아가 아들에게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축재한 툴리아의 황금을 상속받게 하기 위해 법적 친동생이자 외모가 명백한 이부동생임을 말해주고 있는 카이피오를 암살한 덕에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가 되었다.

제목이 카이사르의 여자들이어서 계속 세르빌리아 얘기를 계속하게 되는데, 사실 1부인 이 책에서는 실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카이사르와 사랑에 빠진 여자들이 세르빌리아의 사적인 감정과 카이사르의 정치적 보복이라는 공통의 이익이 만나면서 정적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식들이 결혼하게 될 사돈끼리 서로의 치명적 매력에 눈이 맞아 나눈 정사는 이미 병든 남편 실라누스와 수년간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였던 실라누스에게 임신을 알려야 하는 당혹스러운 결과를 불러왔지만, 냉혈적인 세르빌리아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유약한 남편과 딜을 하고 침실을 공유하여 남들 눈에 뱃속의 아기가 실라누스와의 합방에서 온 결실로 꾸며낸다. 그리고는 카이사르와 또다른 딜을 하는데 바로 임신으로 인해 둘의 정사가 불가능한 일곱 여덟달의 임신 기간동안 카토의 아내 아틸리아와 비불리스의 아내 도미티아를 유혹해 달라는 것이다.

카토는 세르빌리아와 어머니쪽 가문의 유전자를 공유하지만, 아버지쪽으로는 천한 유전자가 섞여 있으며, 자신의 아들 부르투스와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왔던 터이다.  그리고 비불르스는 카이사르에게 이미 위험한 정적의 범위 내에 있고, 그의 아내는 세르빌리아의 또다른 이부 여동생 포르키아의 남편쪽 친척이다. 이들을 꾀어 낼라는 요청은 단지 그들의 남편들에게 수치를 안겨주기 위해서다. 그러한 수치들이 모여 카이사르의 정치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스물 한 살에 이미 시민관을 수여받은 그는 정치적 특전이 주어졌고, 10년 일찍 원로원이 되었으며 공적 장소에서 그가 나타나면 누구든 기립 박수를 쳐야 했는데, 이는 그를 젊었을 때부터 정치적으로 돋보이게 하고 차별화시켰다. 보니파의 대척점에서 변화를 갈구하던 카이사르는 급진파의 이미지를 가지고 낡고 비효율적인 제도를 개선해나가는 동시에 고등조용관으로 임명되면서, 메갈레 경기대회와 부친의 장례 경기 등의 축제를 성대한 규모로 기획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낸다. 그로 인해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고, 점점 채무자들의 압박을 받아 곤란한 처지에까지 몰렸는데, 이 위기를 극복할 묘안을 실행에 옮긴다. 술라의 장난으로 말더듬이인 채로 연설을 해야 하는 최고 신관 자리에 올랐던 새끼 똥돼지 메툴루스 스키피오가 위독해지면서 폼페이우스가 심어놓은 호민관 라비에누스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최고신관을 포함한 신관과 조점관을 트리부스의 선거로 돌려주는 법을 입법화한 것이다. 이미 이 때부터 정적들은 원로원과 기존 세력들이지 대중이 결정하는 어떤 선거에서도 그는 이길 자신이 이길 것을 알았다. 게다가 어디에 내놓아도  결점없이 완벽해 보이는 카이사르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단일화를 못해 카툴루스와 바시아 이시우리쿠스의 두 명의 후보자를 내놓은 보니파였기에 그는 이제 로마의 최고 신관 자리에 올라 그의 소비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월급과, 집과 집무실을 제공받고, 빚쟁이들에게는 신뢰와 유예를 제공한다.

이 때부터 이미 카이사르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선 자들은 로마의 전통과 관습의 수호를 자처하는 보니파로, 비불르스, 카토,  카툴루스였고, 카이사르와 죽이 맞아보이는 인물은 돈을 긁어모은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키케로 등이 있지만, 그것도 오직 필요할 때뿐이다. 카이사르에게 항상 가까이 있는 것은 민중들의 지지인 듯이 보인다. 카이사르가 협력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 인물 중 하나인 아피아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초기에 등장하는데 여기서 다시 관계가 꼬인다. 클라우디우스의 망나니 남매들이 카이사르의 두번째 아내와 어울리게 된다.  풀케르의 막내 동생 클로디우스는 매형 루쿨루스의 수하로 동방복무에 따라갔다가 교활한 행동으로 그를 실패시키고, 자신과 누이들과의 근친 관계 적나라하게 스스로 폭로하여 엿을 먹이고 와서도 꾸준하게 망나니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카이사르는 세르빌리와의 관계를 걱정하던 어머니의 의견을 받아들여 술라의 손녀 포메이아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외적 아름다움이 내적 멍청함을 오히려 돋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는 여성이다. 폼페이아에게 첫날밤에 실망한 카이사르는 다시 마주치는 게 싫어 사랑하는 딸을 만나러조차 집에 잘 안가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훗날 정신을 차리고 아내가 누구와 어울리는지 봤더니 아피아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남매들이었던 것이다.  

카이사르와 아우렐리아의 이중적인 잣대도 웃기는데, 비상식적인 세르빌리아와의 외도 뿐만 아니라, 동료 정치인들의 아내를 단순히 엿먹이기 위해 꼬여내고는 버리는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해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즐거워하면서, 아내에 대해서는 나쁜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이유로 사람을 붙여 미행을 하고, 누가 집안에 들락거리고 누구와 어울리는지를 아우렐리아가 항상 알 수 있도록 빈틈없이 감시한다. 대형사건이 일어나는 대신 엄청난 역사적 드라마가 기다리고 있는 카이사르와 삼두 정치 시대의 시대 정치적 배경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스토리여서 다음편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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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루스 과학사 -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인문학 1
정인경 지음, 강응천 기획 / 다산에듀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그리스 사상을  계승한  서구 세력이 최근 몇세기에 이르러 승자로서 결국  스스로 세계사의 주인공의 면류관을 쓰게 된 역사의 이면을 역사의 패자로서 혹은 좋은말로 후발주자로서 바라다보는 입장은 썩 편하지가 않다. 왜 그렇게 되었나. 로마 몰락 후 코페르니쿠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니 나타난 후까지도 유럽이 기독교 사상이 예술과 철학과 과학의 손발을 꽁꽁묶어 암흑같던 14C 가량까지만 해도, 아라비아 중국 이슬람 문화권은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과학혁명은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화약과, 종이와 나침반과 같은 인류 문명에 획을 그을 과학문명을 가지고 있던 중국이나 아라비아 숫자와 0의 개념과 십진법과 대수학을 일으키고 고대 그리스 사상을 나름대로 발전시키고 있던 이슬람과 인도 문화권에서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 물음은 한마디로 서구 중심의 세계관에 흠뻑 절은 우매한 질문이다. 이런 의문을 가진 서양인이 조지프 니덤(1900~1995)이었다. 중국의 문명을 연구한 그는 14세기 이전의 중국의 과학기술에 매료되어 유럽인들의 지적 자만심이 비유럽 문명의 가치를 무시하고 있으며 세계사를 유럽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에 대해 비판하며, 왜  과학혁명이 중국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유럽에서만 일어났을까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이 질문은 수십년동안 논쟁을 일으켜왔다. 결론은 질문 자체가 오류라는 것이다. 어느 집에 불이 나면 왜 불이 났는지를 질문할 수 있겠지만 불이나지 않은 집에 불이 왜 안났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불이 나는 것이 정상이라는 잘못된 세계관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 집에서 유독 어쩌다가 불이났는지에 대해서만 집중할 수 있고, 불이 나지 않은 다른 모든 집들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유럽중심의 세계사, 문명사, 과학사 등등에 대해 크게 할 말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중국에서 천문학이 그리 발달해서 혼천의와 같은 뛰어난 관측기구가 고대부터 존재했으면 뭘하겠으며 유럽에서는 존재조차도 부정되었던 초신성에 대한 기록을 가졌으면 뭘할 것인가. 거기서 이끌어낸 생각은 천자의 통치 이념일 뿐 그걸로 날씨라도 예측할 수 있었나, 결론적으로 현재 관점으로 볼 때는 한마디로 괜한 삽질이었는데 말이다. 


다산에듀의 <보스포루스 과학사>에는 '동서양을 넘나드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보스포루스는 아시아 대륙과 유럽대륙 사이를 흐르는 터키의 해협으로, 고대로부터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풍요롭게 했다. 과학사에서 유럽 이외의 위치는 어떻게 될까.  책의 분량이 말해주는 결론은 초라할 뿐이다. 전체 400여페이지 중 유럽 이외의 부분에 대해 기술된 부분은 약 60쪽 정도에 불과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유럽이 암흑기였던 14C 이전까지의 과학 기술까지만 찬란했고 그 이후에는 예수회에서 보낸 유럽의 과학기술을 중국이 받아들여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계사의 관점에서 중국의 과학기술이 갖는 위치가 한 때의 영광 뿐인 이유를 꼭 유럽중심의 가치관이라는 비판적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책의 몇 가지 특징들을 열거해보면 이렇다. 첫째, 평소 궁금했던 과학사의 핵심 지식들을 포괄적으로 대부분 다루고 있다. 시대순으로 배열된 세계사의 지식들인만큼 까마득한 옛날 학교에서 배운 것도 있고 안배운 것도 있고, 다른 과학책이나 세계사 인문서에서도 많이 접했던 내용도 있고, 처음 보는 내용도 있지만, 과학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건들과 이야기를 하나씩 다루어가면서 이야기의 과학적 디테일들을 생략하지 않고 쉬운 말로 잘 풀어서 설명한 것이라서 재미있게 읽힌다.  


같은 맥락에서 두번째 특징으로 본다면 친절한 그림과 도표 사진 같은 시각자료들이 적재 적소에 배치되어 있다. 본문을 읽다가 조금이라도 시각적 보충자료가 필요하겠다 싶은 부분이 나오면 관련 그림들이 있다. 이 건 매우 중요하다. 말로만 한페이지 줄구장창 아무리 잘 설명해 놓아도 그림이 없으면 개념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있음을 모두다 알고 있다. 그림을 안그리는 이유는 귀찮아서일거다. 그림을 적재적소에 넣어놓는 것은 독자에 대한 배려다. 


우리에겐 지식의 단편적 습득이 아닌 지식의 결합이 필요하다. 장하성의 <과학 철학과 만나다>에서는 과학사에 있어 토마스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설명하면서, 그 패러다임 변화를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 정인경님은 직접적으로 그런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과학사에서 하나하나 이루어간 과학적 혁명을 전체적인 진보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과학사의 패러다임 변화를 상세하고 세밀한 과학사의 개요와 함께 읽으면 더 입체적인 세계관을 갖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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