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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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멋진 경험을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치자. 욕망을 충족할만큼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돈을 많이 벌면 그 돈을 '제대로' 쓸 시간은 줄어든다. 돈이 쌓여 있으면 뭘하나, 돈을 쓸 시간이 없는데.. 바쁜 사회 유흥점들이 판치는 이유다.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하면서 살겠다고 해보자. 이번엔 돈이 없다. 뭔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의식주가 기본으로 먼저 충족되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그 뭔가를 위한 자본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무슨 운동을 하려 해도 각종 장비가 필요하고,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유유자적 삶을 즐기고 싶어도 땅과 시골집이라는 기본이라고 할 수 없는 비용이 소비된다. 더욱이 뭔가를 ‘제대로’ 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는 건 돈을 버는데 그 시간을 쓰지 않았다는 소리인데, 이 경우 요행이 따르지 않는 한 인생을 즐기고자 했던 광활한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궁핍과 불안이다.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며 아무리 큰 돈이 주어져도 시간을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간을 돈과 바꾸는 건 손해보는 짓이라 생각하기 쉽다.  돈은 요행이 따르거나 구조적으로, 합법적으로 남을 약탈하는 방법으로 벌 수 있는 방법이 차고 넘치니 역시 시간이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고 해야 옳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역시 오판이다. 요행은 일부 극소수에게만 주어지며 그 특별한 요행이 신화가 되고 책이 되고 희망이 될 만큼 큰 성공을 이루려면 대다수의 불운을 모두 합쳐 한사람의 그 요행에 기여해야 하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폴의 창백한 청춘은 이 시간과 돈의 시이소오에서 극단을 오갔다. 작가와 이름도 같은 주인공 폴이 작가의 페르소나의 일부임을 부인할 할 수 없는 이 소설 바깥쪽에서  볼 때는 긴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 오판마저도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생은 짧고, 그의 무명의 작가로서의 고생은 길었다.


젊은 날, 돈 대신 자유로운 시간을 선택한 그는 그 자유가 글을 쓰는 시간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시간동안도 실존의 시간은 흘러가고 글을 쓰기 위해 먹고 입으며 잠을 자는 생존의 책임에서 면책되지 않았으며 글이 되돌려주는 금전적 가치는 너무 하찮아서 먹고 살기에 빠듯핬다.  먹고 살만큼 글을 쓰기 위해 그는 너무 많은 글을 써야 하고, 그렇게 글을 쓰는 일이 더 이상은 즐거운 일이 아닌  일이 되어버린다.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일은 지극히 일부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한국에서도 외국 어느 곳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작가들 중에서도 생존에는 궁핍하게 숨을 이어갔던 인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이 모두 잘살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읽지만 읽는 사람들의 다수는 소도 키우고 종이도 펜도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까 정말로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폴과 같은 개고생이 앞날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쩔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회에서는 교수들의 월급이 일용 노동자들의 월 급여만큼 짠 곳도 있다. 조용남이 그 자신의 이름으로 몇억에 팔 그림을 대신 그린 예술가는 딱 먹고 숨쉴수 있을 만큼만의 돈을 벌기 위해 하루 종일 밤을 새며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길을 선택하여 사는 것의 그 상세한 실체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폴 오스터의 실제 그대로의 경험인지 소설적으로 많이 극적인 부분이 가미된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무엇을 지키고 추구하기 위해 잃는 것이 추구하는 것과 점점 더 멀어져갈 때의 초조함이라는 것의 일반성에 공감을 느낀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먹고 사는 일이 충족되어야 하고, 먹고 사는 일을 좋아하는 일을 해서 충당하기에는 좋아하는 일이 좋아하는 일이 아닌 피곤한 일이 된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가장 중요한 청춘의 시간들은 서서히 내 삶에서 빠져나가고, 남는 것을 초조해하면서 이런 삶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돌아보는 동안, 그 방황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며 먹고 살아야 하고 시간을 잃어버려야 한다.


원제는 조금 다른데 한국에서 번역하면서 책 제목을 빵굽는 타자기로 바꿨다. 타자를 쳐서 빵을 구워 먹고 사는 이야기라는 절묘한 제목이 내용과 잘 들어맞는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폴 오스터의 이런 류의  이야기, 그러니까 어떤 평범해 보이는 상황을 극단에까지 몰고 가는 이야기에는 묘하게 힐링을 주는 데가 있다. 이렇게 치열하게 먹고 사는 이야기임에도, 그는 사회 질서에 저항한다.  처참히 무너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비참해지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는 그 무언가, 타협하지 않고 버티고, 무너지지 않는 주인공의 어떤 힘이 수많은 타협된 현실속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걸까 혹은 그 험난한 가지 않은 길, 집중하지 않았기에 고생도 덜했던 인생을 돌아보며 안도감을 느끼는 걸까. 어쨌든 우리는 노력하지만 끝내 우리를 배신하는 것들의 일반적인 속성을 작품을 통해 확인하고 동질감을 느끼고 다독이는 듯한 위로감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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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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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거지 뭐. 

100번 이상 등장하는 이 문장은 떼죽음이거나 개인의 죽음이거나 어떤 비극이거나 피할 수 없는 순간에 죽어간 사람들을 묘사한 모든 문단에서 등장한다. 어차피 다 가버릴 인생 허무한가.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사람들은 한 번 죽지만 죽지 않은 모든 순간은 살아있는 것이니 죽음 역시 삶의 일부이며, 그것은 아주 작은 조각일 뿐이라고. 모든 시간을 1초 단위로 잘라서 넓은 평면위에 널어놓으면 죽음에 해당되는 순간은 티끌만큼 작으므로, 죽음 말고 활발하게 살아있는 상태를 생각한다면 삶이 허무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 빌리 필그림은 그렇게 시간의 축이 부재한 삶속에서 유영한다. 유영하는 수많은 조각의 삶 속에서 체념을 담은’ so it goes’는  비극을 비껴갈 수 없는 운명론적 체념을 담고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비극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으로 다룰까.


뒤죽박죽이다. 저자의 페르소나인 화자는 이 책을 쓰는 시점에서 23년전에 전장에서 살아돌아왔을 때, 드레스덴 파괴에 관해서 쓰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믿을 수 없게 압도적인 사건이라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큰 돈을 손에 쥘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들이 장성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되풀이되는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그는 쓸 말을 고르지 못했다. 마침내 출간된 책은 시간이 뒤죽박죽이고 거슬린다. 그는 출판인에게, 대학살이란 모두가 죽어야 하는 거고, 어떤 말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거고, 다시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그래서, 뒤죽박죽이고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서사가 시간을 따르지 않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뒤죽박죽 섞이는 서술 방식은 대개 각 인물이 회상을 통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형태로 작품 전체에서 고정된 현재의 시간 시점이 있다. 이 작품은 나뉘어진 시간의 덩어리가 매우 짧고, 현재 시점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의식의 앞뒤로 다니는 기준 시간의 축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독자로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긴 시간 배경은 1944년 2차대전에 참전해서 군모도 군화도 없이 총도 한 번 못들어보고 낙오되어 헤매다가 포로가 되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드레스덴으로 옮겨져 폭격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의 시간 배경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의 배열을 따라 조각조각 맞추어 연결한, 퍼즐 조각을 이어붙인 그림 덩어리의 일 뿐으로 기준점이 되는 시간이라 할 수 없다. 


들어보라 :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났다. 빌리는 노망이 든 홀아비로 잠이 들었다가 결혼식 날 깨어났다. 1955년에 하나의 문으로 들어갔다가 1941년에 다른 문으로 나왔다. 그 문으로 다시 들어가니 1963년의 자신이 나왔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여러 번 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 사이의 모든 사건과 무작위로 만난다. (p39)


시간에서 풀려났다는 표현은, 빌리가 시간이라는 단일 방향의 구속된 차원이 아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빌리 필그림은 누누히 강조한다.  지은탁과 도깨비는 문을 통과해서 캐나다와 메밀밭 등 이곳 저곳으로 임의의 공간과 임의의 시간을 여행하지만 누적되는 시간의 결과가 다른 시간이 된다늠 일반적인 규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도깨비가 판타지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3차원 세계에 살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인과 관계의 연속된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드라마에서 인연은 전생의 업으로 설명이 되며, 운명조차도 과거와 연결되는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이런 세계에서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변형된 형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세상에서 원인을 찾으면 결과를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적 비극은 원인을 제거하면 더 나은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빌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다르다.


빌리는 딸의 결혼식에 트라팔마도어라는 외계 행성에 납치되어 동물원에 전시된 상태로 몇년간 지나다가 돌아오는데, 그 때부터 그는 과거와 미래속을 유영하며 살아간다. 시간 여행을 다루는 많은 서사가 과거로 가서 그 과거의 행동을 바꿈으로써 과거의 미래인 현재를 바꾸어 다시 현재의 어떤 재앙을 피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타임 리프는 필연적으로 판타지물, 가능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공상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빌리가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현재라는 축이 없이 과거와 미래가 섞여 있으며, 어느 곳에 시점의 축을 고정시켜 놓고 과거로 간다 해도 그 과거를 변형시키지 않는다. 변형시킬 수 없다. 이미 완성된 그림의 이미지처럼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빌리의 생은 읽기 전용이다. 그는 트라팔머도어에서 외계인이 그를 시간이라는 굴레에서 풀어주었다고 믿는다. 소설은 이 믿음이 사실인지, 혹은 그가 비행기 사고로 뇌가 잘못되어 환각을 보는 것인지 논쟁할 여지를 남겨놓는다. 



트라팔마도어인은 우리가 쭉 뻗은 로키산맥을 한 눈에 보듯 모든 시간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들은 지구인들이 '이 순간'이라는 호박에 갇혀있으며 여기에는 어떤 '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트라팔마도어인의 방식으로 시간이라는 족쇄가 풀린다면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왜'도 없으며 모든 것 사이의 관계는 부재한다. 시작도 끝도 원인도 결과도 없다. 커트 보니것이 이 책에서 드레스덴의 비극의 알레고리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반전(anti-war) 소설이라면 사실적인 묘사로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낱낱이 고발함으로써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기대하기 쉬운데, 작가는 그런 방식이 오히려 대학살의 본질을 흐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사실적인 묘사가 자극적 소재의 소비로 이어진 상업 영화들을 상기한다면 작가의 이 낯선 방식을 통한 대학살의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동의하게 된다. 특히 출간된 시기에는 베트남전에서 또다른 종류의 폭격이 수많은 도시를 불태우고 있었다. 오히려 전쟁을 극구 반대함으로써 그러한 현상과의 공존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것이 아닌, 그것에 절대로 맞설 수 없는 체념적 심경을 빌리라는 남자로 표현함으로써, 전쟁이 얼마나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인지, 되풀이되는 역사에 개인들은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이는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작품 전체의 알레고리와도 통한다. 


전쟁에서 빌리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없다. 적진 깊숙한 곳에서 낙오되어 힘겨운 생을 마감하고 싶어도, 후에 낙오병을 자신의 힘으로 구했다는 영웅담을 꿈꾸는 동료가 그를 내버려두지 않고 때리고 나무에 머리를 박고 흔들어 깨워 굴리고 들쳐매고 욕을 하며 질질 끌고 간다. 죽는 일조차 뜻대로 할 수 없다.  살려고 하는 노력, 살리고자 하는 노력, 인정받고자 복수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과 무관하게 모두가 곧 어마어마한 대 학살 앞에서 일시에 죽음을 맞게 되고, 거기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소수가 생기는 것과 상관없이 말이다. 안다고 바꿀 수 없고 살려낼 수도 없다. so it goes. 다 그런 거다. 원래 그런거다.  그로부터 미래의 어느 시점에 드레스덴을 기억하는 빌리가 똑같은 종류의 학살과 떼죽음을 베트남전에서 수수방관 목격하게 된 것을 보면 어떤 규모의 희생도 반복을 막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액자 맨 바깥쪽 프레임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소설 속의 작가는 빌리를 주인공으로 하고 드레스덴 폭격을 주제로 소설을 쓴다. 비극적 역사의 상업적 소비가 이루는 문학의 위치에서 스스로를 조롱하듯 작가를 등장시킨다. 작가인 화자는 소설 내에서 주인공 빌리와 전장에서 종종 만나거나 눈에 띄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소설을 수십년동안 기획했고, 결국은 대박을 터뜨려 많은 돈을 번다. 자본의 생태계 내에서 역사적 비극이 문학적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조롱인데, 그러한 문학에 대한 풍자와 조롱은 빌리가 만나는 SF 소설가와의 인연들을 통해서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문학이 역사와 만나는 아이러닉한 지점을 직접적으로 문학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빌리가 만나는 트라우트라는 소설가는 숱하게 많은 SF 소설을 써대지만 서점의 진열대 위에 장식용으로만 꽂혀있을 뿐 아무도 읽지 않고 심지어 서점 주인조차 그의 책을 사러 오는 사람을 믿지 않으며 오직 빌리와 정신 병동 병실에서 만난 로즈워터만이 읽는다. 책을 써서 먹고 살 수 없으므로 신문배달 아이들을 고용해 약탈적 방법으로 먹고 사는 모습, 그리고 그가 만난 소설가들이 이 시대에 소설은 이미 죽었네 묻었네 하는 소리들을 하는 장면 속에서 소설가들을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의미심장하다.


다시 액자 속 소설로 돌아가 보자. 2차세계대전의 막바지에서 시작되며 시간여행 속에서 주로 만나는 때는 2차대전과 베트남전의 기간이다. 현재와 과거, 혹은 현재와 미래의 두 축으로 구성된 시간 속에서 전쟁은 상반된 양상을 띤다. 젊은 날의 그는 혹독한 전장 속에서 총 한 번 못들어보고 낙오되어 죽어가지만, 드레스덴 폭격이라는 어마어마한 학살에서는 살아남았다. 반면 아들이 자원해서 나가 있는 베트남전 때에는 전쟁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 1967년 딸의 결혼식날 변기뚫는 도구처럼 생긴 트라팔마도어인에게 잡혀가 외계행성의 동물원에 갇혀 몇년을 있다가 되돌아오며, 그 몇년 동안의 시간은 지구에서 흐르지 않았다. 외계생물이 빌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자신들이 보는 방식인 4차원의 세계다. 그들의 세계에서 시간은 단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향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방식대로 본다면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모든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봐서 알 수 있고, 그 가운데 관심이 있는 어떤 순간에도 시선을 돌릴 수 있다. (p43)


그들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 다음에는 또다른 순간이 뒤따르고 그 순간이 흘러가면 그 순간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은 지구 사람들의 착각이라는 것이 이 외계행성에서 트라팔머도어인에게 배워 온 ‘진리’며 능력이다.  '트라팔머도어인은 주검을 볼 때 그냥 죽은 사람이 그 특정한 순간에 나쁜 상태에 처했으며, 그 사람이 다른 많은 순간에는 괜찮다고 생각한다(p44)'. 빌리 역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뒤죽박죽 오간다. 테드 창의 중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자, 외계인의 방식으로 세계를 볼 수 있게된다는 설정과 비슷하다. 빌리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여행한 후 지구인의 현실에서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빌리가 보는 세계에서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죽지 않은 다른 모든 순간에는 살아있다. 시간여행을 한 현재 죽는다고 해도, 여전히 과거에 살아있으므로 모든 순간은 영원하다. 


현재는 과거의 시간에 대한 결과가 아닌가. 그러니까 미래는 오로지 현재에 혹은 현재를 포함한 과거에 종속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듯 모든 순간이 존재하므로 영원하다는 트라팔머도어인들의 상상은 경이롭다. 삶이 유한하다는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명제에 수많은 가정의 세례들이 쏟아져서 생각도 하지 못한 풍부한 상상 속을 유영한다. 


외계행성에 다녀온 후 빌리는 ‘시간의 개념’을 배운다. 시간에서 풀려난다는 것은 시간을 묶은 1차원적 선에서 벗어나 과거와 미래의 모든 방향으로 가는 게 가능한 것을 말한다. 외계 행성에 다녀왔을 때가 1967년 딸의 결혼식이었으며 만일 그 때부터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그의 시간 여행은 현재에서 과거로 흐르게 된다. 하지만 그 스스로 밝히기를 처음으로 시간에서 풀려난 것은 1944년이다(p47). 그러므로 트랄파마도어인은 시간여행의 통찰을 제공했을 뿐이지, 애초부터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래와 과거를 지칭할 기준이 될 현재 축이 1944년인 것도 같고, 1968년인 것도 같으며 또 그도저도 아닌 것 같이 모호하다. 


혹독한 겨울 적의 후방에서 낙오병이 되어 군모도 군화도 없이 동료에게 질질 끌려 가는 동안 그가 첫번째로 방문한 곳(시간)은 죽음의 순간이다. 외계행성에는 미래에 다녀오는데, 현재의 시점에서 이미 시간여행을 하는 것은 이미 미래에 과거의 시간 마저 자유롭게 놓아주었으므로 가능하다. 죽음 이후 다녀간 곳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 '붉은 빛과 거품이 보글거리는 소리(p63)'가 나던 곳, 아버지가 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치겠다며 던져버린 수영장 밑바닥이라는 드레스덴 폭격 이전의 과거에서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늙은 건지를 묻는 노모를 만나는 양로원의  1965년의 미래, 파티에서 만난 여인과 세탁소에서 정사를 벌이다 발각되는 또 1961년의 미래로 다양하다. 떠났던 시간으로 돌아온 그는 독일군 방어선 뒤편에서 잠든 채, 그를 흔들어 깨우는 동료에게 끌려가며 계속해서 1967년 얹어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환각 사이를 맴돈다.  


화자가 기술하는 빌리의 인생은 인생을 사는 건지 기록된 인생을 읽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다. 비행기 추락으로 자신을 제외한 승객 전원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비행기에 오른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전쟁과 전쟁의 명분이 행한 무참한 학살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삶이 종속된다. 전쟁의 무수한 명목 앞에서 개인의 삶은 한없이 무력하다. 비극이 일어났던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예정된 비극 앞에서 아무 손도 쓸 수 없는 무력한 한 명일 뿐이다. 전쟁 앞에서 무력한 인간은 제 삶에 개입할 기회가 없다. 그걸 아는 개인은 자국의 북베트남 무차별적 폭격에 항의할 마음도 없이  무심하게 점심을 먹는다. 세상에는 한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1967년도에 검안사였던 빌리의 사무실에 걸려있는 기도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빌리의 삶은 현재도, 미래도, 과거도 바꿀 수 없는 것, 고정되어 있는 이미지다. ‘다 그런거지 뭐’는 바꿀 수 없는 비극을 맞는 체념적 상태를 그 거대 비극을 대하는 역사적 사건의 크기 만큼이나 자주, 하지만 역설적으로 경쾌하게 반복한다. 다 그런거지 뭐. so it goes.


빌리는 소설 내 소설 속 주변 인물들에 의해, 망령이 들어 의식의 경계에서 돌아다니는 것으로 인식되며, 그런 맥락에서 그의 시간여행은 정신착란으로 설명될 수 있지는 않을까. 더욱이 그는 비행기에서 추락한 후에 라디오 쇼에서 트라팔마도어 행성에 다녀온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는데, 그것 때문에 딸과 주변인들은 그가 추락 외상으로 인한 뇌수술 후유증이라고 믿는다. 물론 소설 속의 소설가가 그러한 믿음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남득시키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포함해서 유난히 위기를 많이 겪은 빌리가 의식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면서 수많은 꿈을 꾸고 환각을 보는 것도 사실이지만, 작가는 환각을 비롯한 꿈과 진실을 분명하게 분리한다. 


"이틀간 의식을 잃었고 수많은 꿈을 꾸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진실이었다. 진실한 것들은 시간여행이었다 (p167)


소설 내에서 인용된 바에 의하면 영.미 폭격기가 1945년 봄 드레스덴 공격에서 살상한 인명은 13만 5천명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은 71,379명을, 고성능 소이탄을 이용한 도쿄 공중전으로 죽인 인원은 83,793명을 죽였다. 역사는 이 사람들을 죽여야 했을 이유는 죽은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쟁을 끝내야 했으므로, 역사는 이러한 파괴를 승리자의 필연적 선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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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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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들이 흩어진다. 거리의 이름, 사람들의 이름, 도시의 이름. 기억에 천착하는 소설가 패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속에 무수히도 많은 이름들이 봄날 벗꽃잎처럼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이름들을 만나지만  몇몇 특별한 이름들을 제외하고 그 이름들은 상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인생의 어느 순간 함께 했던 어떤 장소, 어떤 거리, 어떤 얼굴들이 퇴적되는 시간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얼마나 묻혀 버렸던가. 그래서 갑자기 떠오른 오래된 사건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기억나?’ 라고 묻는다. 그 통상의 질문 속에서 기대하는 긍정형 대답은 크지 않다. 나는 기억하지만 너는 기억할 지 모르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이 우리 인생을 다가왔지만 또 그렇게 멀어져갔고 어떤 사실, 어떤 시간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처럼 잊혀졌다.


다라간에게 갑자기 나타난 남녀 질 오톨리니와 샹탈은 다라간이 떨어뜨린 수첩을 주었다며 다라간에게 접근한다. 다라간에게 잃어버린 수첩은 잊어버린 기억이며, 찾고 싶지 않은 수첩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다. 하지만 오톨리니는 그 수첩 주소록 속에 기록된 한 남자의 행방을 찾기 위해 홀로  몇 달째 아무도 만나지 않은 그를 찾아온다. 그들의 목적은 다라간의 기억을 쥐어 짜서 수십년도 전에 무심코 수첩에 적었을 한 남자 기 토르스텔에 대해 알아내고 싶은 것이다.  다라간의 눈에 남자는 의뭉스럽고, 동행했던 여자 샹탈은 혼란스럽다. 오톨리니의 남자친구 샹탈은 남자의 부재 중 홀로 다라간을 찾아와 오톨리니가 모아온 자료를 복사해 주는 등 정보를 제공하고 그를 위해  협조할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방문이 거듭될 수록 샹탈은 오히려 질 오톨리니에 대한 석연찮은 사실들을 얘기하며 남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다라간은 그녀가 진실을 말하는지 혹은 그와 한패로 짜고 치는 것인지 확신하지도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여자의 무례한 부탁은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의 계획에 끌려가는 듯하다. 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은밀히 다라간에게 접근해서 목적을 이루려는 건가 싶었는데, 곧 그녀가 하는 말 중 얼마간은 거짓말임이 드러나고 그녀가 사용하는 샹탈이라는 이름 역시 본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야기가 흐를 수록 수첩 속 인물을 찾는 두 사람의 목적은 본질에서 멀어지고, 이야기는 더욱 알 수 없는 지점을 향해 의문스러운 기억 조각을 따라 부유한다. 


다라간은 이미 소설가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로, 대인기피증이 있는 것처럼 몇달 째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지낸다.  작품은 두 사기꾼이 유명인에게 접근하여 그가 연루된 어떤 사건을 파헤치는 것처럼 전개되지만, 이야기가 진전될 수록 비밀은 점점 더 묻히는 느낌이 들고,  좀처럼 이야기는 앞을 향해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샹탈이 복사해 준 자료 속에는 마치 이름 속에 묻힌 어떤 과거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듯 묻혀있다. 이름과 이름 사이에서 아득히 먼 시간 저편 깨알같이 작은 디테일들이 떠오르고, 그녀가 준 자신의 첫번째 소설의 일부 페이지에 잠시 아무 의미 없는 이름으로서만 등장하는 '기 토르스텔'은 기어이 어떤 날의 다른 기억을 부른다.


어떤 지점에서도 그 남녀가 누구인지 왜 그를 혹은 기 코르스텔을 쫓는지 밝히지 않는다. 이들이 왜 그를 괴롭히는지 그것이 괴롭히는 것인지 혹은 기 토르스텔을 어떤 목적으로 추적하고 있는지 분명치 않다. 기억이 찾아가고자 하는 이야기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끝날 때까지 모호하다. 오톨리니는 샹탈을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 등장한 듯이 보이고, 샹탈은 다시 다라간 자신이 쓴 과거의 소설과의 조우를 위해 등장한 듯이 보인다. 즉 그들의 등장은 단지 다라간의 어떤 기억을 환기시킬 목적일 뿐이다. 그들은 단지 그가 기 토르스텔이라는 이름을 통해 과거의 어느 가을날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이 자신들의 역할이 끝났다는 듯이 무대에서 사라진다. 


기 토르스텔이라는 이름 역시 다라간에게 기억의 미끄럼틀 위에서 손을 잡아주는 역할에 불과하다. 그는 샹탈이라는 여자의 이름에서 자신이 청춘 시절 함께 있곤 했던 동명의 여자를 떠올린다. 과거의 샹탈과 현재의 샹탈은 유사점이 있는데 하나는 과거의 샹탈이 주말이면 도박하러 다니는 남자친구를 두고 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그들의 파트너가 없는 사이에 어떤 목적으로든 다라간을 만난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샹탈의 남자친구가 도박하러 갔던 장소와 질 오톨리니가 간 곳은 공교롭게도 같은 곳이다. 그는 젊은 시절 폴이 샹탈을 떠났을 때마다 그 과거의 샹탈과 자신이 함께 시간을 보냈음을 떠올린다. 대인기피증에 가까운 다라간이지만,  좋았던 기억의 사람과 이름을 공유하는 때문인지, 의뭉스럽고 다소 위험한 현재의 샹탈에게도 좋은 감정을 갖는데, 이러한 다라간의 심리는 독자에게 의문의 조각이다. 


하지만 샹탈과 오톨리니가 밀어넣고 떠난 기억의 미끄럼틀은 직선 코스가 아니라 나선형이다. 최종 목적지는 최초의 방기가 시작된 곳,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리움과 따뜻함의 또다른 이름인 어머니와 버려진 어린 시절들의 분절된 기억이다. 다라간에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죽은 것도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닌 채로 방치해, 이 사람 저사람의 손에 맡겼졌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기 토르스텔이 그의 어머니라고 기억했던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아나 아스트랑이라는 여성이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잠시 돌보아주었던 보호자였음이 뒤엉킨 기억의 한자락 끝에서 드러나게 된 것은 최초 샹탈이라는 여성을 통해 튀어 오른 오래된 샹탈에 대한 기억이 트랑블레 경마장을 다녀오는 차 속의 장면을 환기시킴으로서 시작된다. 기억의 여로를 따라, 그들이 그토록 찾던 ‘기 토르스텔’이라는 사람이 샹탈-폴 커플과 함께 트랑블레에서 돌아오는 길 자동차를 운전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가 그 커플을 내려준 후 조수석에 있던 다라간에게 자신은 한 번도 함께 시간을 보낸 적 없는 그의 어머니에 대해 말하던 것을 떠올리면서, 꽉 막혀 흐르지 않던 서사가 다시금 과거를 찾는 희미한 여정 속에서 계속되는데, 어느 국경의 도시에서 유기된 어린 아이가 거기에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나 아스트랑이라는 여인을 찾던 그의 청춘시절의 어느 가을날을 찾아 가서, 그 시절에 자신이 쫓던 아나 아스트랑, 그 과거에 자신이 떠올렸던 더 깊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이중 삼중의 중첩된 기억의 구조를 갖는다. 


다시 말해, 시간의 시점은 6세 정도의 아주 어린 과거, 그 후로부터 15년이 흐른 후의 어느 가을날이라는 과거, 그리고 현재 이렇게 세 개로 분절되어 있으며, 그 기억으로 미끄러져 가는 과정 속에서 처음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지명과 인명들은 그 시간 여행을 더듬는 지팡이에 불과하다. 세상과 동떨어진 채로 몇달 동안 전화 통화조차 하지 않으며 홀로 살아가던 그에게, 현재라는 시간 또한 그를 과거 혹은 미래로부터 고립시킨다. 인과 관계 속에서 현재란 누적된 과거들이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를 품지 못하고 덩그러니 섬같이 격리된 현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어 유일한 모성애를 찾을 수 있는 아나 아스트랑이 연결된 것은 결국 다른 형태의 방조와 유기였음이 드러나는 기억보다는 망각이 쉬운 선택이었으리라. 


<지평>과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두 편의 패트릭 모디아노 작품을 읽었는데, 전작들이 꽤 오래전에 쓰여진 것에 비해 이 소설은 노벨상을 받던 해에 쓰여진 비교적 최근작이다. 그 전에 읽은 두 편의 소설이 과거의 시간, 잊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기억이라는 주제의 깊이를 더욱 입체적이고 깊이있게 다루고자 했던 것 같다. 여기서 모디아노가, 혹은 다라간이 찾는 것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며 과거의 어떤 날 그가 찾던 과거 혹은 과거에 잊혀졌어야 했던 더 깊은 과거이다. 


삼중의 시점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청춘 시절의 자신, 한 때 어린 자신을 보살피고 또 방기했던 어머니로서의 혹은 연인으로서의 아나 아스트랑의 행방을 찾던 청춘의 모습, 그리고 어린 시절 아나 아스트랑과 함께 이사를 다니고 학교에 입학하고 했던 기억을 찾고자 어떤 이름 붙여진 거리들을 찾아 다니던 청춘 시절의 자신과 현재와의 설명할 수 없는 거리다. 청춘 이후 35년여간 어떻게 그 중요했던 이름들을 모두 잊어 자료 속의 검은 글씨일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이름들이 되었는지에 대한 아무 설명도 없다. 현재의 그 아득한 고립적 상태는 오히려 다라간의 인생 혹은 파트릭 노디아노의 인생의 어떤 미세한 부분 혹은 전체일지도 모를 어떤 것을 장황한 삶의 이야기 서서가 말해줄 수 없는 깊이에서 설명한다. 


그에게 청춘 시절은 아마도 아나 아스트랑을 쫓던 날들로 채워져 있을 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결핍의 상징이 되었지만, 방기하고 내버려둔 어머니 대신 어떤 기억 속에서 어린 소년이 의지했을 대상은 아나 아스트랑이었다. 그의 청춘 어느 가을날 그 사무치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 혹은 원망 혹은 알 수 없는 감정은 그녀에게 내가 여기 있음을 알리기 위해 책을 쓰게 만든다.


"다라간은 자신에게 소중했던 사람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인물이 일단 거울을 통과하듯 소설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오고 나면 영원히 저자의 수중에서 벗어나고 마는 것을. 실제의 삶에는 존재한적 없던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을. 사람들에 의해 무로 환원되고 마는 것을. (p78)"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씀으로서 그녀를 영원히 소멸시키는 선택 대신 그녀와 자신만이 공유했을 어떤 순간을 묘사한다. 국경을 넘기 위해 위조 여권용 즉석 사진을 함께 찍는 장면이 그것이다. 둘이 했던 대화, 미세한 행동, 번쩍이는 플래쉬에 눈을 감아버려 다시 찍던 일 등 둘만 알 수 있는, 소설의 나머지와 어울리지 않는 소설 속 '남몰래 삽입한 현실의 한 조각'은 아나 아스트랑을 그에게 닿게 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청춘 시절의 그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가 그 흩러진 이름들 속에서 아나 아스트랑의 이름조차 단번에 붙잡아 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잊고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 어린 시절의 그는 절대로 혼자서 방치되면 안되는 나이의 어린 그는 그렇게 낯선 국경지대의 한 호텔 방에 홀로 남겨져 버려지면서 언젠가 그녀를 그런 방식으로 다시 만날 거라고 그리고 또다시 영원할 것처럼 잊혀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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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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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신념이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중심의 가치가 있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흔들리지 않게 그것이 옳음을 믿고 숭배하는 어떤 것이다.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인지혁명, 농업혁명, 그리고 최근의 과학혁명으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해가면서 숭배해온 종교적 가치들을 탐구하면서, 국가와 민족과 자본주의와, 회사 등 인류가 만들고 적응해 온 사회적 시스템들을 ‘상상의 질서‘라고 불렀다. 

새 책 <호모데우스>에서는 이러한 상상의 질서가 숭배하는 가치들을 더욱 심화시켜,종교에 비유하였다. 


전작 사피엔스를 다 읽고 덮으면서도, 한 숨이 나오도록 글 정말 잘쓴다고 느꼈었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호모데우스에서도 인류라는 스스로의 얼굴을 비추어보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매우 먼 생물학적 조상이 시작되는 호모 사피엔스를 기점으로 한 거시적인 역사다. 전작 사피엔스가 현재를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보았다면, 이번 작품이 인류의 거시적 역사를 통해 조명을 비춘 곳은 다름 아닌 인류의 미래,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류다. 유발 하라리의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사회적 속성들을 유려한 문학적 비유로 기술하는 것이다. 


복잡도가 증가하는 세상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너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쉽다. 누구도 예측된 미래가 100퍼센트 들어맞을 것이라고 전적으로 믿게 할 재간이 없기 때문에, 예측자는 그저 자신의 예측 혹은 조망한 택한 전략은 어떤 근거인지에 대해 납득시키면 된다. 독자는 그 근거의 정당성을 판단할 뿐이어서, 아님 말고의 말고의 전략이 실패한 예측자에게 비난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먼 과거 오랜 기간 동안 인류의 정신적 세계를 지배해온 가치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어떻게 무엇에 의해 붕괴되어 왔는지의 과정을 통해 현재 모든 인종과 국가, 종교와 정치방식에 걸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대의 가치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불멸, 신성, 행복이라는 것을 납득시키고, 이 최우선 과제지만 실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격변들이 어떻게, 왜, 우리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를 전망한다. 즉 우리 시대의 최고 가치인  인본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이며, 왜 인본주의 꿈을 이루려는 시도가 그 꿈을 해제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현재의 최고 가치가 그 어느 과거의 가치보다 낮을 수 없고 궁극의 가치는 항상 미래의 현재에 선택하게 될 가치이다. 고대 이집트를 수천년간 지배했던 파라오의 붕괴가, 과거 천년을 지배했던 신의 죽음이 인본주의로 이어졌지만 이 인본주의는 고작 이제까지 3백년을 지배해온 종교로서, 언젠가는 신의 죽음을 이끈 것과 같은 논리 즉 새로운 가치가 낡은 가치를 몰아내는 원리에 의해 몰락할 것이고, 그게 더 좋은 것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일 무엇을 선택하든 내일의 신이 궁극의 신이 될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오늘 알고 이해하는 것과는 완전하게 다른 차원이 되더라도 현재로서는 경험하지 않은 세계가 형성한 그 보이지 않는 가치 체계를 이해할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동물은 나무, 바위, 강 같은 외부의 객관적 실재와 두려움, 즐거움, 욕망 같은 내부의 주관적 경험이라는 두가지 커다란 이중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에 비해 사피엔스는 돈, 신, 국가, 기업과도 같은 상상의 질서가 추가되어 삼중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데, 역사는 바로 이러한 허구의 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전작 사피엔스에서도 커다란 주제 중의 하나였다. 고대와 중세 도시에서 신들은 법적 실체로 기능했는데,  예를 들어 나일 계곡의 실질적 통치자는 수백만 이집트인이 공유한 이야기들 속에 존재한 상상의 파라오였다는 것이다. 문자와 돈 같은 강한 허구적 실체들의 출현은 추상적 상징을 통해 인간의 삶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실재를 기술하는 문자 언어는 서서히 실재를 고쳐쓰는 강력한 방법이 되었으며, ‘공식 보고서와 실재가 충돌할 때 물러나야 하는 것은 대개 객관적 실재(p232)였다. 


문서 기록의 힘은 수천년동안 권위를 유지해온 성경의 출현으로 절정을 이루었다고 보는데,  성경은 일신론적 역사이론을 널리 집요하게 퍼뜨리며 실재의 진정한 본성을 오도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본성은 무엇이며, 성경과 일신론이 어떻게 본성을 오도했다는 것일까. 성경은 좋은 일은 내 선행에 대한 보상이고, 재앙은 내 죄에 대한 처벌이라는 사상을 퍼뜨리는데, 당연하게도 이 인과관계는 상호관계의 모순 때문에 있을 수 없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유년기에 보이는 특징일 뿐이다. 성경 의 구약 시대에 고대 유대인들의 가뭄과 네부카드네자르의 추방이 기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믿은 것은 그들이 지구 생태계, 바빌로니아의 경제, 페르시아의 정치 체제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의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오류가 넘처나는 책은 아직까지도 미국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할 때 손을 얹어 진실을 맹세하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며, 강력한 힘으로 인류의 대규모 협력을 도왔다. 


성경시대에 신들은 인간에게만 불멸의 영혼을 주었다. 불멸의 영혼을 주는 것이  그리스도교 세계가 존재하는 목적이므로 창조의 정점은 인간이었고, 영혼이 없는 동물들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애니미즘에서 유일신으로 넘어갔을 때 40억 세월을 함께 진화해온 사피엔스 이외의 동물은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가축화된 동물만이 인간의 생존을 목적으로 지구 동물의 주류를 이루게 된 거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작가 하라리가 인본주의를 종교라고 규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를 창조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고, 종교를 규정하는 것은 사회적 기능이다. 종교는 인간의 사회구조에 초인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으로 거기에는 초인적 법칙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규범과 가치를 정당화하는데, 불교와 도교부터 공산주의 나치즘, 자유주의에 이르는 다른 종교들은 이 초인적 법칙을 자연법이라고 주장한다. 나치 친위대 장교는 아들이 왜 유대인을 죽이냐고 물으면 그것이 세상의 작동원리라고 설명했다. 그들을 살려두면 인류가 타락해 멸종할 것이며, 히틀러는 그 작동원리를 해독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미신이나 초자연적인 힘과 동일시하며 그 이념을 종교라고 말하면 싫어하겠지만, 그들이 믿는 것 역시 복종해야 하는 어떤 도덕법 체계이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각각 체계가 추구하는 믿음, 신념, 가치를 숭배하는 도덕적 체계가 있으며, 왜 라고 질문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작동원리가 세계와 우주를 지배하는 단일한 규칙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므로 이념은 종교라는 것이다. 


근대사에 등장한 과학은 필연적으로 전통적인 종교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각기 다른 진리를 지지하므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둘은 실제로는 진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타협하고 공존하고 협력한다. 진리는 개인에 의해 우선시될 수 있으나, 집단적인 제도로서 과학과 종교는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우선시한다는 것이 하라리의 통찰이다. 더 나아가 근대사를 과학과 종교의 계약과정으로 본다. 여기서 종교는 인본주의라는 근대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종교를 뜻한다. 근대 이후의 사회는 인본주의 교의를 믿고 그 교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과학을 이용한다.(p275) 인본주의는 교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과학을 이용하지만 이 계약은 21세기에 깨지고 매우 다른, 어떤 ‘포스트인본주의’ 종교 사이의 계약이 될 것이라는 거다. 


경제 성장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인본주의의 교의다. 이에 대해 하라리는 경제 성장에 대한 집착은 지구라는 한정된 자원 앞에서 제로섬 게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모든 곳에서 당면한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해주는 구원자로 여겨지며 종교적 지위를 획득했는데, 특히 요즘에는 장기적 성장을 확보하는 특정 형태의 자본주의가 인정받음에 따라 탐욕스러운 재벌, 부농, 표현의 자유가 보호받고, 생태환경, 사회주의 전통가치들은 해체되고 파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방대한 텍스트들을 통해 하라리는 계속해서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종교가 지위를 획득해서 과학과 타협하며 새로운 교의들을 탄생시켰는지를 고찰하고, 나아가 다음 장의 수백 페이지를 통해 과학이 이 인본주의를 밟고 어떠한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킬 것인가를 전망한다. 즉 유전자 과학과 신경과학, 빅 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 등의 새로운 과학이 그 어떤 속도보다 빠르게 대다수의 인류를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잉여로 전락시키고, 자원을 획득한 지극히 소수의 인류가 신의 지위에 오르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는 것, 우리가 종교처럼 철썩같이 인본주의적 사상에 따라 자아 내부의 목소리들이 유전자와 생화학의 결합이 만들어낸 알고리즘임을 인정하고 결국은 세상은 대다수의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알고리즘과 빅데이터가 만들어내는 무엇이 될 것임을 지적하며, 이러한 역사 고찰과 미래의 전망이 전속력으로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이 세상에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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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언트 - 영어 유창성의 비밀
조승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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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해당 언어권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몇년 전 <이방인>의 번역 논쟁으로 이 곳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는데, 내가 불어를 아는 것도 아니고, 문학 번역에 무슨 생각이나 신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충 흘려 보면서 다 잊어버렸다. 얼핏 생각나는 게 siren(?) 대한 국내 모든 번역을 비교한 내용이었는데, 내게 들은 생각은 논쟁 자체에 대해 좀 시니컬했다. 그 글이 쓰이던 당시 공간, 당시 시간에서 통용되는 그 말의 뜻을 어떻게 정확하게 국내어로 1:1 대응시키는 표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한자어랑 자주 사이는 순수어랑 그 설명 불가능한 미묘한 차이를 다른 모든 언어들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그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들의 차이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많을 거다. 하나의 언어와 표현이 자아낼 수 있는 천차만별의 뜻이 있고,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 톤과 공기의 미세한 흐름과 웃을 때 나타나는 주름의 차이와 같은 아주 사소로운 차이 속에서도 전혀 반대의 뜻을 표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 그 자체로서 완벽하게 다른 언어로 1:1 번역될 수 없으며, 정확한 기준이 있기도 어렵다.  번역은 원전에 대한 번역자 개인의 해당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해석과 그 해석을 유려하게 현지어로 번역하는 능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므로 번역을 잘 하려면 어떤 문장의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닌, 전체 작품 내에서의 의미를 알아채야 하고, 그 알아챔은 해당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이것을 무시하고, 모든 단어와 뜻을 1:1로 매치시키고 하나의 문장을 하나의 또다른 문장으로 바꾸는 식민지식 영어 학습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취지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영어를 배울 때 그토록 어려움을 겪는 언어는, 언어의 구조가 달라서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언어는 문장의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정확한 문법은 천천히 배워도 (상대적으로) 쉽게 말 자체를 배우고 따라할 수 있다. 그러나 영어와 한국어의 관계는 매우 다르다. 그 다른 점을 그냥 문장의 순서 라고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정확하게 무엇의 차이가 이토록 문장 구조를 다르게 느끼는지를 알려준다. 즉 영어는 동사중심의 언어이고, 우리는 명사 중심의 언어라는 건데, 우리가 주어+동사라는 초간단 문장을 만드는데도 그토록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아마도 우리의 사고가 우리의 언어순으로 배열되면서 어떤 말을 영어로 옮기기 위해 명사를 먼저 생각하고, 그 명사를 어떻게 했다는 동사를 그 다음에 생각한 다음 그 명사를 수식하는 동사를 역으로 찾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치는 사고의 지연 때문인 것 같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영어가 주어+동사의 틀을 가지고 있으며 그 동사가 문장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정보를 전달하고 있음을 생각하라는 거다. 책을 읽은 지 꽤 되어 상세한 사항은 잊었지만, 이 부분을 다루는 장은 가볍게 설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영어를 대해왔음에도 영어 문장을 대하면, 주어와 동사를 찾은 후, 목적어들이 어디에 있나 그 구성관계에 연연했던 걸 생각하면, 동사 그 자체를 먼저 인식하고, 동사 위주의 사고를 하면서, 굳이 목적어를 찾아 한국말로 거꾸로 옮기지 않고 읽어나가는 것이 전체적인 뜻을 한눈에 파악하기에 훨씬 빠르다는 걸 늘 주지하고 있어야 겠다.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터득되는 '은는이가'의 사용이 외국인들에게는 문법적 틀 내에서 매우 어려워하는 문제인 것처럼 우리에게 관사의 사용은 정말 어렵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고, 대개 들 다 어려워한다고 한다. the와 a 를 사용하게 된 어원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훨씬 그 까다로운 사용법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한국어가 직관적인 데 비해 영어는 추상적 언어라는 설명이 무척이나 공감되었다. 화면에 검은 소들이 너른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다. (1)Cows are black, (2) The Cow is black. 무엇이 맞을까, 우리는 그냥 소들은 검다라고 말하면 되지만, 그 한국말을 그대로 영어에로 옮겨 (1)로 쓰면 전세계에 있는 모든 소들이 검다는 뜻이 된다. 


한국문학을 읽을 때 마음을 만져주는 느낌을 종종 받는데, 한국어는 감각적이고 직관적이어서 하나의 어근에서 비롯된 작은 어미의 차이가 무수히 많은 다른 직관적 느낌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문학의 풍요로운 감각적 언어의 선택이 낳은 미학적 우수성이 번역어로 표현 불가능한 관계로,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리기 어려운 점도 이해하겠다. 반면 추상명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한자어에서 얼마든지 만들어 쓸 수 있고, 일본에서 열성적으로 만들어 쓰는 말도 가져다 쓰고 있으므로 뭐가 문제가 될 게 있나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나 학술용 문장에서 한국어가 오히려 어렵게 생각되는 이유는 바로 그 추상적 언어라는 영어의 특성에 있다. 


라틴어와 칼트어 등 다양한 어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영어는 그 때문에 단어의 종류도 굉장히 많고, 어근이 라틴어냐 아니냐에 따라서 문장의 품격도 달라지고 그 의미의 배경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는데, 이런 차이를 단어 사전만으로 인식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당연히 다양한 종류의 영어에 얼마나 노출되었느냐가 관건인데, 영어를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는 방법으로 연관어 사전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과 시를 읽으라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문법적 틀 내에서만 영어 해석이 가능한 나로서는 시를 읽으면 당췌 이게 뭔뜻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시를 읽으라니. 하지만 시는 축약된 형태로 느낌을 전달하는 서정적 언어로서 시를 많이 읽으면 언어의 사용이 더욱 융통성있게 됨을 강조한다. 


내가 뭐 갑자기 영어 공부를 하려고 이 책을 읽은 건 아니고, 집에 있는데 표지도 산뜻하고 가볍게 읽기에 좋겠다 싶어 집어 들었는데 평소 관심있던 언어학에 관련된 내용도 나오고, 영어 학습서라기 보다는 언어와 문화의 이해라는 차원에서 기술된 책이어서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재미도 재미지만, 몇몇 부분은 영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두고 두고 참고할만한 내용도 많기에 추천한다.


#플루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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