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세트 (반양장본) - 전3권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4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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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꾸려진 사신단이 애초에 열하에 갈 생각은 아니었다. 게다가 연암은 사신단의 꼽사리였다. 열하는 중국의 한 변방의 이름이다. 연암 박지원은 개인 여행자의 자격으로 사신단을 따라 북경 여행을 갔는데, 고생고생 그 먼길을 갔건만 황제는 그곳에 없었다. 애타게 기다렸는데 수행단의 예법이 뭔가가 거슬렀는지, 황제는 그들에게 날짜를 정해주며 짐을 줄이고 수행단 규모를 축소해 자신이 있는 여름 별장인 열하로 오라고 명한다. 북경의 선진 문물에 눈이 휘둥그레해진 연암은 처음엔 북경 구경할 기회가 줄어들 것을 우려해 북경에 남기로 결심하지만,  황제에게로 향하는 험한 길을 다시 따라나서기로 한 것은 당시 조선에 북경을 다녀온 사람들은 많지만 열하에까지 다녀온 사람은 없기에 연암이 다녀와서 열하를 소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주위 사람의 권고다. 이런 팔랑귀에서도 엿볼수 있듯, 연암의 여정을 넘치게 풍부한 컨텐츠로 채우는 것은 꽃중년 연암의 천방지축 귀엽귀엽 캐릭터다.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가는 다른 관료들과 달리, 청국 여행이라는 목적만을 가진 연암은 첫 해외 여행, 길거리와 여정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 담았다. 말 위에서 자느라 기린이 지나간 것을 놓친 것을 그토록 안타까와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자느라 구경을 놓친 이국의 동물을 안타까와하는 연암은 그렇게 보고 느끼고 말하고 쓰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하나도 놓칠 세라, 다가가서 말을 섞고, 배우고 전하며 지적 세계를 넓혀가는 경험을 한다. 중국말과 한국말이 다르지만, 한자를  공유하던 당시, 필담은 말이 달라도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도구였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시의 가치관으로서는 도발적이기까지 한 연암의 세계관 뿐만이 아니다. 이미 망한 명에 대한 환상 속 명의 숭배와 새로운 세계로 떠오른 지 오래된 청에 대한 배격 사상을 틈틈히 비판하면서, 변화하는 세계 정세를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 속에 깊이 침잠한 채 고립되고 가난한 채로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있던 조선을 비추었던 거울이기도 하다. 명이 청으로 바뀌었고, 변발을 강요당한 채로 죽음을 선택한 명장들과 왕족들은 그 때로부터 100년도 더 지난 과거였으나, 여전히 조선인들은 청의 만주족들을 되놈들이라고 지칭했고, 오랑캐로 취급하지만, 연암은 가는 곳마다 발달된 청의 문명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여행을 하며 적은 것이라 일기니 풍경과 느낌의 산문이려니 생각할 수 있지만, 연암은 말하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적었다. 그의 글에는 오만가지 잡다한 분야의 지식들이 따라다니는데, 그 분야는 문학, 사상, 과학, 예술에서부터 정치 사회 언어학까지 정말로 방대한 분야의 지식들이 자유럽게 넘나들며 유연한 사고의 과정을 보여준다. 뭐 조선의 세익스피어라고 하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몽퇴스키외에 비유된 적이 있다 하는데, 내가 읽으면서 생각난 사람은 움베르토 에코였다. 무엇보다도 에코의 유머러스함과 엉뚱함을 지녔고, 중국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면서 음과 훈의 차이로 인한 언어적인 놀이,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 골동품(서적)에 대한 애정까지. 특히 비상한 암기력이 아니면 아무리 사고의 틀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도 가능하지 않는 대화 중 툭툭 튀어나오는 선인들의 말에 대한 인용 같은 것들을 보면서 에코의 책을 볼 때 하는 감탄사가 같이 나온다. 


책은 어떤 시대의 가치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 시피, 조선시대의 유교관 속에서 그 숨막히는 고리타분함이 세계관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을 고전을 겁내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유다. 아프리카나 아랍, 남미와 같이 먼 공간의 문학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먼 시간 속의 글귀들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이렇게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서로 다른 시대적 가치라는 벽이 소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전이 살아남은 까닭은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그 때의 가치 속에서 열광했던 어떤 것들이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열하일기의 명성은 바로 우리가 판타지 속에서나 재밌게 바라볼 수 있는 조선시대 실제했던 한 개인이 엄청난 지식과 해학과 풍자로 그 어느 여행서도, 일기도, 혹은 산문집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문학을 완성시킨 것이다. 

 

의주에서 국경을 넘는 때로 시작해서 사신단들과 함께 중국에서 북경으로 향하는 여정이 담겨 있다. 의주에서 국경을 넘기 전, 밀반출 차단을 위해 철저하게 몸검사를 받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압록강을 건너 무인지대를 지나 각 도시를 통과해가며 베이징에 도착하는 여정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이 때 사신들은 어디서 무얼 먹으며 어떻게 여행을 했는지, 또 연암이 길에서 혹은 성에서 만난 중국 사람들은 조선인들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연암과 어떻게 인연을 만들었는지 등등 수많은 흥미로운 요소들로 가득하다. 특히 윗선의 명을 어기고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도시를 구경하고, 낮에 만났던 사람들과 밤새 필담하며 대화하는 모습은 하나의 짧은 소설만큼 재미있다. 


연암은 특히 발달된 청의 기술문명을 속쓰리게 바라보았는데,  속히 본받아야 할 것을 촉구하는 것 중 몇가지가 수레와 도량형 통일, 벽돌, 난방 구조 등이다. 리처드 불리엣의 <바퀴 세계를 굴리다>라는 책을 얼마 전에 읽었었는데, 그것을 읽으면서도 중국의 바퀴 사용에 대한 의문점이 가시지 않았었고, 이 책을 통해 보다 현실적이고 풍속적인 차원에서 중국의 수레 사용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연암의 글을 통해, 조선에서도 수레 사용을 본받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던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연암은 글을 통해 중국의 험한 골짜기 까지 다채로운 수레들이 다니는 것을 보라며 길은 다녀야 생기는 것이라고, 바퀴와 도량형 통일을 받아들여야할 시급한 과제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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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독서 - 완벽히 홀로 서는 시간
김진애 지음 / 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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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취미로 하다 보면 책이 책을 부르는 경우가 많아진다. 책 속에서 등장 인물이 읽고 있거나 저자가 특별히 좋아하는 칭찬하는 책들은 당연히 관심이 생기고 같은 책이 여러 책에서 언급되거나 하면 더욱 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 때문인지 독서에 관련된 책도 많이 출간되고 있고 때로 이런 책들은 책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독서 가이드 책들도 그 가짓수가 많아지면 또다시 선택의 어려움에 직면하는 딜레마가 생긴다. 나에게 맞는 책을 선택하기 위한 책을 선택하는 수고까지 감수해야 한다면 독서가 너무 어려워지는 거 아닐까. 

최근 읽은 몇몇 독서 관련 책들을 돌이켜보면 이현우의 < 러시아 문학 강의>가 20세기 격동의 러시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작가와 작품 세계를 쉽고도 체계적으로 전달해서 매우 도움이 되었고, 첫 권의 성공으로 두번째 버전까지 출간된 <책은 도끼다>가 잘 알려진 고전 및 양서들을 소개하고 작가 자신이 독자로서 느낀 감동과 대략의 깊이있게 전달하고 대략의 스토리까지 소개하고 싶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때로 읽었다는 착각까지 안겨주었다.최근 몇년간 그 밖에도 책에 관한 책들을 여러권 읽었지만 딱히 기억나는 건 여기까지고 가장 좋았던 건 꽤 오래전에 읽은 <여행자의 독서>라는 책이다. 작가가 읽었던 책에서 나온 장소를 여행하면서 책에서 받은 감동을 다시 느끼고 그 아스라한 감상을 다시 자신만의 언어로 정갈하게 전달했던 걸로 기억난다. 

세상에 책은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자신의 취향에 딱 맞는 책을 읽는 일 역시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장르 소설을 좋아한다면 해당 장르만 파면 그나마 범위가 줄어 나름 고충이 있을지는 몰라도 책의 선택에 대대적으로 실패하는 경우는 줄어들 것 같다. 반면 잡식성의 나같은 독자들은 때때로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장르에서도 흥미를 발견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에 이것 저것 시도해보는 편이고 그러다가 읽는 책이 중반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럴 때는 좋아하는 작가만 골라서 읽으면 되지 하겠지만 잡식성이 괜히 잡식성이 아니다. 여러 작가의 책을 골고루 읽어보고 싶고 국내에서 많이 안읽힌 책도 개척해보고 싶고 욕심은 점점 자라난다. 

제목이 여자의 독서여서 잠시 여성과 독서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시청한 효리네 민박에서 아이유랑 똑같이 생긴 민박집 가사 도우미가 손님들이 모두 외출하고 효리네 식구들도 모두 동반기절(낮잠)한 평화로운 시간에 조용히 뜰에 나와 책을 읽는 장면이 있었는데 얼핏보니 민음사 세계문학이었다. 요즘은 남여 시청율에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티브이 연속극 시대에 일일 드라마는 여성들이었다. 혹시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스토리텔링을 더 좋아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은 건 딱히 이 두가지 사실에만 기반한 건 아니고, 블로거들 중에서도 소설을 '가볍게' 읽는다며 폄허하는 분들도 있고, 많은 스타 드라마 작가들이 여성인 것도 그렇다. 그래서 여성의 독서 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여성의 독서의 서회적 패턴같은 걸 연구한 것이거나 혹은 패미니즘적인 내용일까 했는데, 알고 보니 책에 대한 책이다. 작가가 어릴 때부터 즐겨 읽고 좋아하는 여성 작개들의 책을 작가 자신의 이야기 반 책 줄거리 반 섞어서 소개한다. 문학 뿐만 아니라 만화 캔디캔디에서부터 수전 손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본인 얘기 했다가 책 얘기 했다가 좀 두서 없고 산만한 게 특징인데 다양한 여러 분야의 여성 작가의 책과 그것들을 작가가 어떻게 읽었는지가 소개된다.

내가 읽은 책들을 한 권에 압축시켜, 내 인생의 책들이라는 책을 쓴다면 내가 읽은 많은 책들 중에서 어떤 책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택되고 어떻게 쓰게 될까.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했던 말인 것 같은데 책이 단일한 작가의 의도를 갖지 않는다. 백만명이 읽었다면 백만개의 해석과 뷰가 존재하는 것이다. 김진애는 캔디캔디에서 스테아가 죽어가던 모습을 기억했는데 모두의 기억속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캔디가 테리우스를 떠날 때 두이서 백허그를 하며 시간이 이대로 멈추어주었으면 이라고 되뇌던 장면과 스테아가 전투에서 적의 공격에 추락하면서 죽어가는 순간 캔디와 그의 연인을 함께 생각하며 이 아름다운 석양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다 이 때 스테아의 얼굴은 ㅇ이미 뒤집혀져 추락하고 있지만 추락하는 장면은 마치 전쟁이 멈춘 듯 고요하고 평화롭다. 생과 사가 교차하는 그 끔찍한 시간에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지만,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고 그 때의 연합군이 믿은 그 전쟁의 명분은 결국 평화였으므로 전쟁은 평화로 귀결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응 위해 싸우는 스테아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살육의 현장에서도 아름답게 저무는 석양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당시 10대 소녀들의 마음을 모조리 빼앗았었다. 나에겐 또한 캔디캔디라는 만화와 관련해서 결코 잊지 못할 사연이 하나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 책을 돌려 읽으며 감성을 공유하던 친구. 잊혀진 시간을 떠올리는 기회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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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지독한 오후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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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같은 일상의 디테일과 대화가 어느 한 사건이 일어나던 날의 하루와 이미 사건이 일어난 후의 두 개의  병렬된 시간 위에 나란히 배치된다. 한 편으로는 사건을 향해 진행되는 과거의 그 '정말 지독한 오후'의 아침부터 다음날 아침까지의 하루동안 사건의 발생 경위가 느린 속도로 천천히 드러내고, 또 한 편으로는 몇달 후인 현재 시점에서 그 끔찍한 하루로 인해 달라진 오늘이 과거의 사건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무한 떡밥을 던지며 흘러간다. 이 두 시점은 서로 교차되며 계속되는데, 과거의 시점은 현재를 현재의 시점은 과거를 서로 설명한다. 삶의 우연과 필연, 그리고 선택이라는 명제 앞에서 과거와 현재의 연속된 삶이 서로를 어떻게 간섭하고 연결하는지를 암시한다.


그 날, 서로 이웃인 두 커플과, 서로 베프인 두 커플은 양쪽을 다 아는 커플인 에리카와 올리버 커플을 매개로 알게 되어 세 커플은 바베큐 파티를 즐긴다. 에리카는 첼리스트인 클라멘타인에게 어릴 때부터 헌신적인 단짝 친구이고, 티파니는 에리카의 옆집에 사는 부자 커플이다. 에리카와 샘  부부에게는 아장거리는 두 딸 홀리와 루비가 있고, 티파니와 비드 커플에는 10세 정도되는 딸이 한명 있고, 에리카와 올리브 커플은 아이가 없다. 그리고 비드네 옆집에는 해리라는 매우 심술궂은 독거노인이 한 명 있는데, 이 독거노인의 사망은 초반 현재의 시점에서 계단을 굴러 고독사한 노인으로 무심하게 그려지고,  바베큐 당일의 과거 시점 아침에는 살아있는 심술궂은 모습으로 잠시 등장한다. 

초반의 느린 진행과 두서없는 산만함은, 후에 빈틈없이 계산된 사건과 주제를 설명하는 장치들이며, 알고 보면 주제를 설명하거나 사건의 배후를 부연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의미없어 보이는 수다들은 후에 인물의 성격과 트라우마, 혹은 심리적 상태를 짜임새 있게 설명한다. 패미니즘, 우정, 수집벽, 양육, 상처, 트라우마에 인공수정과 난자 기증에 대한 윤리적 성찰이라는 무거운 주제까지 소설이 다루는 전방위적인 주제는 책읽기를 마친 후에도 여운을 준다.

우정에 대하여. 
에리카는 클라멘타인에게 둘도 없는 친구다. 에리카와 클라멘타인 사이는 상식적인 베프와는 다르다. 가족 이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 큰 의지가 되고 외롭지 않겠다는 점에서는 부럽지만, 클라멘타인이 에리카에 대해 느끼는 구속감, 또 에리카가 클라멘타인에 대해 느끼는 집요함은 그 둘 사이의 우정을 답답하고 숨막히게 보이게 한다. 에리카는 클라멘타인에게 헌신적인 친구고, 둘은 거의 매일 통화를 하고 자주 만난다.  클라멘타인이 양육하는 방식을 에리카가 일일히 참견하고 교정할만큼 밀착된 관계에 있지만, 클라멘타인은 그것을 좀 불편하게 여기는데,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 

에리카는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양육되지 못했다. 그의 엄마는 바깥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집안에서는 강박적 수집벽(hoarding)이 있는 사람이다. 전에 TV에서 이런 강박적 수집벽 때문에 썩은 물건들 사이에 파묻혀 죽은 형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에리카의 엄마가 그렇다. 어릴 때부터 그런 자신의 엄마와 집이 부끄러워, 누가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은 채로, 몸에는 벼룩에 깨물린 자국을 드러내며 자란 것이다. 이 때 구세주가 된 것이 클라멘타인의 부모이고, 그 부모의 압력(?)으로 클라멘타인은 에리카에게 친절한(?) 친구가 된다. 에리카의 부모가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 아이를 집으로 초대하고 함께 휴가를 다니며 클라멘타인을 붙여주어 함께 놀게 하면서 제2의 부모 노릇을 해온 것이다. 변변한 친구도 없는 에리카에게 그 부모가 준 가장 큰 선물은 클라이멘타인이라는 친구다. 하지만 클라멘타인은 그녀가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는 것을 부담스럽고, 또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 속상하기까지 한데,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다.

꼼꼼하고 성실하고 똑똑한 에리카가 클라멘타인처럼 자유분방한 성격에게는 조금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클라멘타인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녀가 한 말을 꼼꼼히 기억하고 덤벙대고 실수하는 그녀를 보살피는 것이 에리카이기 때문에 클라멘타인은 습관적으로 그녀를 의지한다.  그러던 날, 바베큐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에리카와 올리브가 2년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말하면서 상상도 하지 못한 큰 부탁을 한다. 

지켜야 할 선과 넘어도 되는 선 사이에서
여기서 나는 다시 우정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는데, 만일 난자의 문제 때문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난자 제공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베스트 프랜드라고 정의할 수 잆을까. 아니 질문이 바뀌었다. 정말로 아주 친한 친구라면 난자 제공을 부탁할 수 있을까. 게다가 에리카는 자신의 아이가 자신의 엄마의 유전자를 받아 강박적 수집벽이 있게 될 공포가 있는 데다가, 클라멘타인의 외모와 성격을 닮으면 완벽하게 원하는 아이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 점이 역겨웠다. 클라멘타인은 이 부탁을 받은 후, 더럽혀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하는데, 하필이면 그 말을 엿듣게 되고 더욱 상처를 받게된다. 


집을 쓰레기더미로  만들고, 수도와 전기까지 떨어진 집에서 아이를 거의 방치 상태로 두었던 에리카의 엄마가 아직도 철딱서니 없는 행동과 말을 하고 다니는데, 이 난자 제공 문제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녀 한명 뿐인 것 같다. 아무리 과학이니 뭐니 해도 너무 나간 거 아니냐고...늘 에리카에게 받기만 하는 클라멘타인은 자신이 한 말을 엿들었을지 모른다는 죄책감과, 그 정말 지독한 날의 오후에 있었던 사건의 영향으로 난자 제공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난자로 두 사람에게 태어난 아이는, 자신의 아이 같은 느낌이 들을 거라는 거다. 그러니까, 완벽한 에리카에게서 완벽한 양육을 받지만, 사실은 자신의 아이라는 느낌이 들 거라는 거다. 


내 유전자를 받은 남의 아이라는 점을 어떻게 감당할까. 그들이 아무리 완벽한 부모라고 할 지라도, 그들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는 동안 남의 남편이 자신이 자기 아이라고 생각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아이인 남의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 그 친밀감? 혹은 가까움은 에리카는 어떻게 감당할건가. 우정이란 그런 것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우정이란 사랑과는 달라서 한 쪽이 한 쪽을 일방적으로 좋아할 수 없다. 물론 그렇게도 약한 우정 혹은 우정같은 관계가 생길 수 있겠지만, 두 사람 사이의 균형과 질서가 필요하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비중으로 여겨지는 심적 친밀감. 그런 거 말이다. 그것이 불균형을 이루면, 우정은 겉돌고, 베프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 


잘못되면 엄마 탓인 세상

클라멘타인이 조금 덜렁대는 성격이고, 자상한 샘이 아이를 주로 돌보는 쪽이다. 하짐나 그녀의 첼로 레슨과 앙상블 행사 연주는 클라멘타인의 자아 실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보탬이 된다. 많은 것을 남편이 돕고 있지만, 돕는 것과 생활의 주체가 되는 것은 입장이 다르다. 그녀는 아이들이 없는 곳, 조용한 곳에서 원없이 연습을 하고 싶다.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곳에서 남편의 헌신에 기댄 채 오케스트라 오디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고 있는 상태라는 사실은 슈퍼워먼 컴플렉스 시대에서 크게 나아간 게 없다. 자상하고 착한 샘이 아이들을 주로 돌보고 클라멘타인의 오디션 연습도 시키는 것이 굉장히 훈훈하고 부럽고 좋았지만 결국 아이가 잘못되면 그 모든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쪽은 엄마라는 보편적인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를 소설은 매우 잘 반영한다.  게다가 그토록 민주적이고 훌륭한 부모까지 클라멘타인의 탓을 하는 것이 마치 내 일처럼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다. 페미니즘은 멀리 있지 않다. 아주 작디 작은 일에서 매순간 분하고 원통한 일이 일어나고, 그 때마다 자신을 죽이고 또 죽이며 살아가는 것이 여성의 인생이다.


사람들이 베프를 만들고, 베프를 챙기고, 서로를 너무 강하게 의지하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어떤 만족감, 자신의 파워. 그런 것들.. 그 정말 지독한 오후의 일을 계기로 매일 똑같은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반성없이 살던 이 호주의 중산층 사람들이 상처와 용서, 진실을 대면함으로써 생기는 반성 등으로 인해 서로와 서로의 관게에 대해 다시 확인하게 한다. 바른생활처럼 끝나기는 결말이기는 하지만, 엿보는 삶이 주는 인간이란 것의 보편성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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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8-06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즈번드 시크릿 재밌게 봤는데 CREEP님의 평점때문에 이 책도 기대되네요^^

CREBBP 2017-08-07 12:50   좋아요 0 | URL
매번 리안 모리타이의 소설을 재미있게 보는 편인데 이 책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도 많았구요.

고양이라디오 2017-08-07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빌려서 조금 읽었습니다^^ 이 책이 작가의 두번째 책이네요ㅎ
 
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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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사람이 ,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다. 스스로 죽거나 타협하거나다. 차선으로 망명의 길을 택할 수도 있었겠지. 아마도 그건 배반이고, 체제에 순응하는 것 이상으로 역겹긴 마찬가지일 터였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양분된 세계에서 어느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선택한 서방 체제에 충성한다는 전제가 필요할 터이니 말이다. 만일 그랬다면 그 작곡가는 자본가들이 열광하고, 서방 체제가 선호하는 곡을 써야 했을 지 모른다. 얼마 전 읽은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도 망명을 택할 것인지, 작품 활동을 금지당한 채로 전제 정권이 망할 때까지, 혹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살아 남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던 스탈린 시대의 수많은 문학가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었는데, 예술가들이 스탈린 공산 치하에서 '양심껏 '살아남는 일은 살얼음판을 걷는 일이었을 테다. 공산진영에서는, 노동을 찬양하지 않아서 감옥에 가고,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노동을 찬양해서 감옥에 가고(70~80년대 한국), 예술가들이 정치 선전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살아남기가 어려웠던 냉전 시대, 망명을 선택하지 않은 한 위대한 예술가들 초상이 일기장에 쓴 글처럼 띄엄띄엄 그의 삶을 조명한다.



포르테시모에 장조로 끝나는 음악, 낙관적이고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음악이 당이 원하는 음악이다. 러시아 인민의 진짜 삶은 비관적이고 어둡다. 형식주의라는 비판아래 예술가들이 하루 밤사이에 체포되어 사라지는 예술가 대숙청 시기에 쇼스타코비치는 프로크피예프를 비롯한 몇 안되는 음악가들과 함께 살아남았다. 문제는 스탈린 스스로가 예술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이 독재자는, 예술을 사랑하고 장려했다. 첫 불은은 그렇게 찾아왔다.


이미 당 예술 기관지<프라우다>에 호평을 받은 그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보러왔던 스탈린과 측근은 그들이 보고 있다는 긴장감에 금관악기를 시작으로 소리가 커져버린 연주를 보다 중간에 나가버리고, 이후 <프라우다>지는 그의 음악이,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며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 일을 계기로 주변의 인물들이 하나둘씩 처형되어 버리고, 그의 차례가 오자, 스탈린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올가미가 쒸워졌고, 함께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은 대원수는 이미 처형되었다. 이제 심문을 받기 위해 매일 밤마다 승강기 앞에 스스로 가서 기다리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를 기대리는 심문은 더이상 없었고, 살아남는다. 


4번으로 끝날 뻔했던 그의 교향곡이 5번을 붙여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되었고 대중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다. 숙청의 공포를 경험한 후 보란 듯 내놓은 권력이 원하는 음악, 프로테시모에 장조로 끝나는 음악에, 매체는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의적 답변'이라는 평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말이 음악을 더럽힐 수는 없으며, 음악은 음악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음악을 모르는 권력층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게, 거기에 그 권력의 더러운 말들을 갖다 붙일 수 있게 해 주는 눈속임, 혹은 귀속임일 뿐이다. 그의 음악의 난해함, 끽끽거리는 아이러니는 음악의 그 순수함이 갖는 승리의 조롱이다. 교향곡 5번의 대성공에 대한 분석적 설명은 '낙관적인 비극'이라 불린 것을 보면 그의 의도를 권력은 알아챘다는 것일까.


어쨌든 그가 살아남게 된 것은 아이러닉하게도 예술을 탄압했던 스탈린이 예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점이었다. 또한 당의 선전 도구로 이용하기를 원하고, '썩은 마인드를 가진' 예술가들을 탄합했던 했던 스탈린이 특별히 사랑해서 더 듣고 싶었던 음악가들 중에 그가 속해 있었다는 점이었다. 살아남은 것에 대한 대가. 그는 당의 선전 도구에 철저히 이용당한다. 그러나 괜찮았다. 당이 써준 연설문,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연설문을 서방 세계에서 그대로 앵무새처럼 읽는 것도, 당이 원하는 음악, 형편없는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것도 괜찮았다. 어쨌든 그는 음악은 음악일 뿐이며, 그 음악을 말이 소유하고, 정권이 소유하고, 인민이 소유하고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나보코보와의 만남은 그 인생에 최대의 치욕을 안겨준다. 쌀벌한 냉전의 그늘 아래 당의 선전도구로서 친선 연주를 위해 북미 여행을 간 그가 공개석상에서 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그곳에 온 자신을 비판하는 인터뷰 질문을 받았을 때,  세계가 보고 있는 그 인터뷰 상에, 질문은 쇼스타코비치의 심장을 찌르고 양심을 찌른다. (나중에  작가 노트에서인가 보니 나보코보가  CIA에서 지원을 받았다고).  


진실을 말하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세상에서,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질문에 또박 또박 대답한다.  "예 개인적으로 그런 의견에 동의합니다. " "예 그런 조치에 동의합니다. ".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스트라빈스키를 공격하는 연설문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대중 앞에서 (성의없게) 읽지만, 나보코보는 확인 사살을 시도한다. 연설문 원고를 검토하지도 않고 읽으면서 예리게 찔린 양심은 이제 나보코보의 질문에 무참하게 짓이겨진다. 오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대하여 당신의 연설에서 피력한 견해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십니까?" "예 그런 견해에 개인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심정으로 그는 전세계가 보는 대중 앞에서 비굴하고 겁쟁이인 자신의 민낯, 발가벗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야 만다. 그는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싸우기를 바랐고, 싸워서 피흘려 쓰러질 순교자를 원했고, 그리고 그렇게 많은 순교자로 그 체계의 끔찍함과 잔혹함과 사악함을 입증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피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권력층과 더 닮았는지 생각한다.



그것은 배신이었다. 그는 스트라빈스키를 배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을 배신했다. (162)


윤년마다 치욕을 겪는 쇼스타코비치에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치하에서 가장 큰 사건이 기다린다. 당에 가입하라는 압력이다.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회유와 압력을 받던 그는 스탈린 치하에서도 타협하지 않았던 당원으로서의 길을 가게 되고, 이제 순교자가 되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한다. 승강기 문 옆에서 심문과 처형을 기다리던 시절, 공포 속에 한편으로 제거되어 버리고 싶었던 가슴 두근거리던 욕망을 기억했다.

늙어서는 젊은 시절에는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233)

전기는 굉장히 많이 따로 있고, 그것들을 참조하여 쓴 소설이다.  우리는 어떤 위대한 예술가의 생을 읽으며 한쪽 귀만 보이고 반대쪽 귀는 가려서 보이지 않는 택시 운전사를 상상해야 한다.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보이지 않는 부이 주변에 남긴 여운들을 통해 시대가 남긴 소음을 만난다. 그 소음과 협력한 한 음악가의 치열했던 삶, 삶속의 양심, 자존감을 안타깝게 지켜본다. 스탈린 시대에 탄압의 주체가 되거나 권력의 우두머리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협력함으로써 비겁자로 남아야 했던 한 예술가가 남긴 음악을 들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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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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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기억의 누적이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잃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누적된 시간 속에 켜켜히 박혀 있는 추억과 경험과 생각의 사슬들이 엮어낸 현재의 나가 그 현재를 가능하게 한 모든 과거를 잊는다면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노아와 할아버지가 길을 잃은 것은 기억을 잃어 가는 것에 대한 가장 적절한 비유일 것이다. 기억을 잀으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 축적되는 시간과 시간이 갭 없이 연속되고 있으므로, 그 연속성이 우리에게 삶의 목적과 이유를 밝혀주며 삶의 방향을 알려주지만 만일 기억의 결함으로 그 연속이 점점이 여기 저기 끊기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길을 잃는 경험일 것이다. 

그렇다. 기억은 과거와 연결되지만 과거는 미래를 향해가는 방향을 결정한다. 기억은 과거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생각이다. 시간을 예측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에 새로운 경험을 덧씌워서 합치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돤전 별개의 경험이 아닝 것이기 때문이다. 걷다가 문득 어디로 향하고 있던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즉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던 방향을 상실한 것을 말하며 이것은 과거에 어디로 갈까 정했던 기억을 잃음으로 인해 미래가 사라진 미래의 상실을 뜻한다. 그러므로 기억의 상실 즉 과거의 상실은 길을잃음을 뜻하고 미래의 상실을 뜻한다. 


매우 짧고 동화책 같은 포맷에 그림도 예쁘고 술술 잘 읽히기는 하는데, 문맥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노인이 손자와 대화를 나눈다. 손자를 끔찍히 사랑해서 이름을 두 번 노아노아라 부르는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실제로 이루어지는 대화라기보다는 치매(이 말은 옳지 않다고 하는데 대치할만한 단어가 마땅치가 않다)에 걸린 할아버지의 머리 속을 오가는 환상이나 혹은 꿈 혹은 회상으로 여겨진다.

반전처럼 아이의 나이가 밝혀지고 노인의 병상이 밝혀지는 마지막 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이 모든 몽환적이고도 길을 잃은 듯한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둘은 어디에 있는 건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지 눈치채기 어렵고 현실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노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어디가 현실인지 어디가 환각인지 알 수 없다. 노아는 본문의 대부분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기로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환각 속인 대화 속에서는 아주 어린 아이이지만 실제로 병실에 누워있는 노인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현실이 맨 마지막 페이지에 공개될 때에는 실제로 아이가 있는 청년이고 그를 그토록 된 모습으로 아끼던 노인은 손자 노아에게 치매 레퍼토리인 '댁은 뉘슈?' 하는 노인이었던 것이다. 

슬프다. 현대인이 장수하는 대가로 발병률이 높아진 무서운 질병이지만 이미 기억을 잃어 가기 시작하면 광장의 한복판에서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어딜 향해 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청년은 누구슈라고 묻고, 거울에 비친 낯선 자신의 모습이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을 삶을 기억하지 못한채 얼음이 되어버린다. 그레고 이제 죽을 수조차 없다. 천천히 기억이 숨쉬는 것조차 이러을 때까지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견딜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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