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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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가다> 이후, 이 말은 사랑을 역설하는 고전이 되었지만, 때때로 우리는 여전히 사랑의 불변성을 종교처럼 믿는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이 것이 나의 사랑이다. 이렇게 각인해버린 사랑이 변해가는 모습은 때로 아름답고 때로 추하다. 사랑의 본질은 그 사랑의 모습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퇴색하는 데 있다. 가끔 천천히 옅어진 그 빛바랜 사랑은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과도 만난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설령 사랑이 변해도, 앓도록 원하고 가슴 뛰는 순간이 지나가도, 그럭저럭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흔히 고전을 읽으려면 숨을 한 번 고르고 시작하게 되는데, 그 치밀한 묘사 때문에 책장 진도가 팍팍 안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가끔은 너무나 지루한 묘사 때문에 전개가 끝나기도 전에 미리 질려버리는 경우가 많아서다. 시작해 놓고 끝내지 못한 고전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이유다. 이 책은 반대다. 프랑수아즈 사감은 최근 인기 작가 아멜리 노통브를 떠올리게 한다. 전체 페이지 수가 160쪽으로 짧기도 하거니와 배경과 인물 묘사 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과 공간적 배경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주로 삼각 관계에 놓인 세 사람의 짧은 동선을 왔다 갔다 하며 연극 무대 위의 제한된 공간 내에서 극을 보여주듯 그들의 생각을 들려준다.


오래 사귄다고 해서 권태의 순간이 갑자기 천둥 번개치듯 들이 닥치는 건 아니다. 숨막히는 떨림이 시간에 희석되더라도 남녀는 서로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인 존경과 친밀감, 정 같은 걸로 살아간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문화권에서 정식 결혼은 드문 현상이 되어 버렸지만, 1950년대라면 다르다. 5년쯤 사귀었으면서 싸우고 헤어지는 일 없었다면 이제 그만 살림을 합치거나 그만 관계를 끝내거나 해야지, 계속 찜해서 침발라 놓고 오도가도 못하게 하는 건 둘 중 한 사람을 몹시도 지치게 할 것 같다. 5년을 만났음에도 권태 때문이 아닌 혼자 있는 텅 빈 시간과 공간 때문에 몸부림쳐야 한다면 둘은 서로에게 무엇일까. 연애할 때 주말을 혼자 지내야 하는 일만큼 맥빠지는 일이 또 있을까. 폴은 외롭다. 풀의 남자친구 로제는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함께 있기를 원하는지 알면서, 그리고 그 또한 그녀를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만족스러운 교제를 하면서도, 풀의 집에 들어갈 땐 `혼자 있어?`라고 묻는 교활한 방법으로 거리를 유지한다. 서른 아홉 살의 폴은 `두 사람 사이에 하나의 규율처럼 자리 잡은 이 자유’를 ‘로제만 이용하고 있고, 그녀에게는 자유가 고독을 의미할 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한다.


사랑은 자유의 반납이라는 대가가 필요하다. 헌신은 보상을 요구한다. 남녀간의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기에, 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랑, 자유 둘 다를 가질 수는 없다. 스토리는 참으로 단순하다. 로제가 끝내 자유를 포기하지 않은 채, 새로 사귄 `창녀`들과 놀아나는 동안 폴은 15살 연하의 엄친아와 엮인다. 그는 너무 잘생겼고,직업도 변호사지만, 어쩐 일인지, 15살 연상의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고 죽기 살기로 그녀를 사랑한다. 로제의 비행을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이 매력적인 어린 시몽에게 조금씩 빠져 들어간다. 꿈처럼 달콤한 폴과 시몽의 사랑을 깨는 건 언제나 그녀를 외롭게 했던 로제다.용서를 구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로제를 폴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임으로써, 그 반대편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헌신한 15세 연하의 시몽을 버리는 폴을 지켜보는 독자는 착잡하다. 로제의 사과 한마디에 폴이 넘어가자, 로제는 다시 습관적 약속 깨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만을 끝없이 바라보고, 만지고, 키스하고, 기다리고, 온 시간을 다해 온 영혼으로 사랑했던 젊은 애인을 돌려보내고 난 자리에 황망하게 남아있는 로제의 약속 어김. 그것이 폴의 선택이다. 함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그녀는 그 쓰라린 그의 부재를 경험했고, 상처받았지만, 그리고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결국 그녀는 로제에게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폴은 시몽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사랑했다. 무척 사랑했다. 소설은 폴이 거울 속 주름진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시작된다. 젊은 시절부터 함께 했던 남자들을 추억하기도 한다. 시몽의 나이었을 때 함께였던 남자도 있다. 시몽의 헌신적인 사랑과 넘치는 매력은 오히려 그와의 나이차에 대한 콤플렉스를 키웠을 것 같다. 그 콤플렉스는 알게 모르게 폴의 마음에 상처와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너무나 싱그러운 어린 남자와의 완벽한 사랑에 대한 훼손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으리라. 단순한 연애소설 같으면서도 사랑이란 것의 어쩔 수 없는 본질을 한 껍질씩 벗기어내는 사강 특유의 문장은 섬세한 내면을 잘 묘사한다.


길고 긴 결혼 생활 중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고 할퀴어온 부부라도, 만일 다른 배우자와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고 한다면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과 살면서 사랑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결국은 사랑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는 것들 사이에는 함께 지내온 시간이라는 축이 있다. 사랑을 위해, 공동의 행복을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런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바로 그 자존심이 시련을 양식 삼아(p139)` 둘을 함께 계속 살도록 하는 체념적 선택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과 사람, 하나가 변하면 다른 하나도 함께 변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긴 세월동안 그것이 함께 버무러져 둘 사이에 따로 떼어버릴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아졌다면, 변해버린 사랑을 변하지 않는 사람의 합체로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페이퍼로 잘못 올라가서 리뷰로 다시 올립니다. 피같은 '좋아요'가 함께 지워질까봐 페이퍼도 남겨 놓습니다.고로 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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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07-10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로 변경이 안되는 글인가봐요, 좋아요 한 번 더 할게요^^; guiness 님,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CREBBP 2015-07-10 20:32   좋아요 1 | URL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잘못 건드렸다가 지워질까봐요.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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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권태는 현실과 환상의 교차점에서 생긴다. 애초 환상이 없었다면 어떤 환경이었다고 해도 현실은 그런대로 적응해서 살 만했을 것이고, 또 그 현실이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 바쳐지는 고단한 노동을 짊어지고 있다면 더더욱 환상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을 것이다. 19C 프랑스, 농부의 딸로 태어나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고, 낭만적인 연애소설들을 책으로 접한 엠마는 애석하게도 자신이 처한 현실의 삶보다는 몽상에 가까운 화려하고 감미로운 연애를 꿈꾸며 불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끝내 만족되지 않는 욕망과 바꾸고 파멸해가는 길을 택한 여성이다.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통속적이고 진부한 불륜 스토리일 수도 있는 이 소설이 왜 문학적으로 그토록 중요할까. 그것은 스토리 그 자체가 작품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자신 깊이 내제되어 있는 욕망의 본질을 만난다. 플로베르가 바라본 엠마의 세계에는 시대적, 사회적, 심리학적 통찰이 깊이 배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철학자 쥘 드 고티에는 <보바리즘, 플로베르 작품 속의 심리학>에서 보바리즘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냈고, 이후 ‘보바리즘’은 일반명사가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성향'이다.

수녀원에서 꿈꾸었던 몽상이 도착한 곳은 다시 자신이 자란 농가. 사별로 인해 때맞춰 늙은 과부와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의사의 눈에 들어 빠져 나오듯 결혼을 했으나, 결혼이 그녀를 구원해주지는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만큼 그녀 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없다. 무미건조한 시골의사와의 결혼 생활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병들게 할만큼 권태롭다. 아기는 유모가 맡았고, 집안 일은 하녀가 한다. 읽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많지만 가족과 주변에 자신의 고상한 지적 예술적 수준을 따라가고 교감을 나눌 상대는 없다. 몸에 두르고 집안을 치장하고 향기를 담을 물질적 욕망을 쫓지만, 한심한 의사 남편은 하마터면 그녀가 남편으로서 존경할 만한 가치와 희망을 걸 뻔 했던 이웃의 안짱 다리 수술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위기에 몰린다.

모든 여자가 소설 속 왕자처럼 자신의 이상을 만족시켜줄 멋있고 근사한 남성을 남편으로 가질 수는 없다. 성실함의 대가는 경제적 안락함뿐이어서, 짜릿한 욕망의 충족을 보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성실함은 성적 매력의 부재라는 남편으로서의 무능을 보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엠마의 애정 행각은 그 어느 독자에게도 큰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일부일처제의 남녀 중 어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배반하는 일에 그 누구도 그리 너그럽지 못하다. 아무리 자유의 기치가 우리 머리 위의 애드벌룬처럼 둥둥 떠다니는 21세기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 독자들에겐 평온하고 안온한 일상 중 운명처럼 다가와 삶을 뒤흔들어 놓는 사랑이 작품 속 동경하는 사랑의 공식이지, 권태의 늪에서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는 한 유부녀의 파멸을 향한 불륜이 공감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를 둘러싼 윤리의 벽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 비련의 주인공은 외면받고 소외된다. 두꺼운 책을 통해 고스란히 속을 보여주었건만 허락되지 않은 것, 금기시된 것을 탐한 것에 대한 응징, 외면, 그리고 소외, 그것이 주인공 혼자 영원히 감당해야 할 몫처럼 보인다.

이왕 엠마의 허영을 따라 읽는 독자가 되었으니, 우리도 한 번 허울좋은 윤리의 가면을 벗어보면 어떨까. 삶의 실존적 고단함을 알지 못하는, 책에서 본 호화롭고 허황된 세상과 정직하고 누추한 현실과의 본질적 갭 사이에서 엠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가두고 있는 일생동안 교육과 사회적 활동을 통해 축적해온 보편적 삶의 가치와 윤리들을 벗어 던지고 우리 자신, 고유의 은밀한 자신의 내면 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보바리즘을 찾아보면 어떨까. 인간은 누구나 그 갖지 못할 가상의 세계를 꿈꾸지 않는가. 우리는 때때로 아직도 가끔은 이런 누추한 현실이, 선악과를 잘못 따먹은 것 따위의 자잘한 죄에 대한 대가로 잘못 내던져진 벌이며, 내가 있어야 할 나의 자리는 저 먼 곳 꿈같이 아늑한 천상의 어느 곳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는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러는 동안 이제 몸과 마음은 늙어 이 구차스런 현실이 내가 사는 동안 머무는 진짜 현실이란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들을 존재하지 않는 다른 나 자신을 찾아 헤매었던가.

우리는 그렇게 배웠고 지금도 우리 자녀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큰 꿈을 가지라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그런데 당시 여자로서 무엇을 꿈꿀 수 있나. 소망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큰 돈을 직접 버는 것도, 명예를 쟁취하는 것도, 정치적 야망을 가지는 것도, 자아를 실현하는 것도 아니라는 데 인간의 욕망의 갈 곳 없는 공허함이 있다. 목적없는 인간이,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 인간이, 현재 나에게 주어진 누추한 현실에 단지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안정된 삶이 최고의 가치이고 그것이 충족된 현대의 '마담'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무엇으로 '더이상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는 공허한 삶'을 위안받는가. 명품백 쇼핑, 피부관리, 자녀교육과 내조처럼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무언가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쫓는 행위들 속에는 엠마가 가졌던 권태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완벽한 자아실현을 거둔 여성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그것을 위해 희생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한처럼 깊고 어두운 구석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당시 여자의 삶이라면 무엇을 꿈꿀 수 있었을까. 왕자를 기다리는 숲 속 잠자는 공주나 재투성이 아가씨 같은 요행적이고 운명적 기다림 말고 말이다.

그 숱한 남녀들 중 어찌 인연이 닿은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서로 만나 결혼이라는 굴레 속에서 서로에게 구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 스스로가 자연의 생물로서 주어진 자유를 반납한 어리석은 제도일 수도 있다. 나는 우리 모두 반, 내가 속한 집단에서 제일 잘나가는 암컷이거나 수컷인 적이 있었던가? 가장 예쁘고, 가장 힘세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우아하고 그렇게 모든 것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개체 말이다. 한 둘의 우월한 개체만이 경쟁에서 선택되는 것보다는 조금 못난 남자도 여자도 평생 일부일처제를 한다는 규칙에 대한 보답으로 평생 짝짓기를 보장받는다면 진화적 종의 다양성에서 볼 때 더 유리하게 작용했었을 수도 있다. 결국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일부일처제라는 안타까운 사회적 관습은 가장 잘나가지는 않는 다수의 이기심을 구겨 넣은 인위적인 규칙은 아닐까. 어쨌든 외모도, 두뇌도, 힘도 모든 것이 그저 중간쯤 되는 모든 사람들도 두루두루 한 명씩 일단 콩깍지 씌운 자신의 한 번만 찾으면 평생 힘 안들이고 경쟁하지 않아도 같이 의지하고 살수 있게 되었으니, 엠마처럼 여러 남자가 필요한 불행한 여성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다.

신경외과에서 정신병을 확인하는 세 가지 요소에 자기자각, 공간자각, 시간자각이 있고, 추가로 현상자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두뇌와의 대화> 페이지 및 내용 확인요망). 어찌 보면 마담 보바리는 자신을 기사로 잘못 착각하는 돈키호테의 또 다른 버전일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한다. 현대 의학에서 자기자각이라는 정신적 요소 하나에 대해 살짝 결핍을 가진 것이다. 스스로 제대로 잘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현실 속의 자신을 엠마는 저주하고 외면한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뿐만 아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과 남편의 돈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지, 모든 것을 서늘한 망각의 강물에 흘려보낸다. 심지어는 따분하고 권태로웠던 과거 농가와 수녀원 기숙사에서의 시간마저 미화하며 그녀 삶에서 현재를 쫓아내 버린다. 현재의 삶, 그것은 지겹고, 싫증나고, 권태롭고, 짜증나서 떨쳐버리고 싶은, 도망가 버리고 싶은 현실일 뿐이다.

돈키호테나 정신병자처럼 정체성 자체를 완전히 상실한 채 정신병자처럼 행동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늘 현실이 아닌 과거와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 떠돈다. 현재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이 답답해 빠진 시골구석이 아니라 파리의 호화로운 무도회장이었어야 했고,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은 뚱뚱하고 아무데서나 졸고, 몰취향적인 현재의 남편이 아니고 지적이고 감정적 교감이 가능한 귀족이었어야 했다. 낭만 소설 속 주인공이 되지 못한 그녀는 병이 들고 시름시름 앓아 죽을 것 같지만, 그녀가 비로소 그 환상적 사랑에 매몰되었을 때마저, 그녀가 행복한 것 같지는 않다.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그녀는 종종 로돌프와 레옹을 직접 눈앞에 보면 그 명상의 쾌락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낀다. 몰래 만나는 불륜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머리카락이나 상징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상대를 질리게 만든다. 그녀의 욕망은 마치 중독 같은 것이어서 일시적 쾌락은 더 큰 욕구를 부르고, 그것은 절대로 만족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죽을 때까지 약물을 하고, 술을 마시며, 도박에 모든 것을 거는 중독자들처럼 그녀는 파멸할 때까지 대담무쌍한 밀회와 욕망을 향해 거침없는 행보와 요구를 계속한다. 다른 중독들과는 달리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녀의 그러한 물불 안가리는 욕망의 끝이 어떠한 비참한 결과를 불러올지는 누구든 예측 가능하다. 행복해야 할 '사랑'을 하면서도, 정염에 휩싸여 불안하고 초조하고 비참하고 권태로운 결혼 제도 속에 속박되고, 물질적 욕망으로 보상받으려는 듯한 낭비와 무절제적인 생활의 끝은 뻔하다.

엠마가 남편에게 위임장을 남겨받아 서서히 파산해 가는 과정은 마치 골인 지점을 표시해두고 그곳까지만 힘껏 달려 스스로 파멸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다. 현실적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와 미래를 미화하고 환기하지만, 그 미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은 전혀 없다. 소설의 중반 쯤에서, 나는 비소를 둔 약국의 다락방 장면이 나올 때 그 비소가 이야기의 전환에 큰 역할을 하게 될 암시를 받았다. 그러나, 김화영님도 작품 설명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작품에서 시점의 전환과 의도적 사용은 전체 작품을 이해하는 큰 장치다.

독자는 그 비소에 주목하지만, 엠마의 시점에서 그것을 주목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어음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로돌프에게 거절당한 후, 갑작스레 음독을 결정한 마음을 전혀 읽을 수가 없다. 언제부터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그 비소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구체적으로 무엇이 가장 두려웠던 건지. 그녀는 어음을 연장시켜주면 어떻게 해서든 남편을 더 속여먹일 궁리를 할 작정이었다. 교활하게도, 약국 다락방 키를 가진 사환인 쥐스탱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엠마는 이미 그 어린 사환의 순애보 같은 사랑을 이용해 음독에 사용될 비소를 취하는 사악한 이기심을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미래도 계산하지 않은 채 애인선물과 자질구레한 사치품들로 유혹하여 그녀의 재산을 갈취하고자 하는 고리대금업자에게 이용당하는 어리숙한 엠마와는 대조적이다. 생의 끝에 도달해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몰려 있으며, 어떻게 해야 그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를 아는 똑똑하고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엠마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결심하기 전, 어음이 부도나기 바로 전 그 방탕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위치와 자신이 어딜 향해 가고 있는 지에 대한 인지 역시 충분히 하고 있었다고 보아진다.

파산이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비참한 위치로 바꾸어 놓을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이었기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탐탁지 않다. 그런 자기자각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 마지막 파국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왜 죽었을까. 나는 그녀가 자신의 생의 어느 지점에 깃발을 꽂아 놓았다고 생각한다. 인생 종착역에 인위적으로 세운 깃발 앞 까지만 가고 거기서 더는 공허한 삶을 계속하지 않으리라. 그것이 화려한 삶을 꿈꾸었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구차한 현실을 외면하고 그 허황된 가짜 인생을 살면서 세운 종착역이었을 것이다. 오래 전, 어떤 영화에서 본 장면이다. 어떤 교수가 학생들에게 묻는다. 60이 되면 어떨 것 같냐고. 푸르른 청춘이 낡은 것들을 빨아들일 듯 공기를 가르고 젊은 여대상은 말한다. 전 60세까지 살지 않을 거에요. 그 여대생은 내 기억에 아마도 30, 더 많으면 40 정도에 죽을 거라고 했다. 청춘이 가득한 젊음의 어떤 시기에 늙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늙음이라면 거부하겠다는 청춘의 한 마디는 젊다는 것, 아름답다는 것,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미래를 가졌다는 것, 그것이 전부인, 그 이상을 살아보지 않은 청춘에게만 공감된다. 허영과 사치와 사랑과 우아함이 최고 가치인 한 불행한 개인에게, 그것이 없는 삶은 죽음보다 못한 것이기에 살아보면 어쩌면 다른 삶의 가치를 발견했을지도 모를 깃발 바깥의 세상, 그 이후에 있는 시간들을 부정하고 준비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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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09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망의 종료는 순식간에 이뤄진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 느꼈습니다. 엠마의 징벌은 개인적인 것이고 샤를이 제일 불쌍한.. 이 소설을 10년마다 읽으면 너무도 다르다고 하는데 정말 그래요. 그냥 철없는 여인의 불륜 얘긴 줄 알았는데 `인생의 베일`과 더불어 통찰력있는 작품이죠..

CREBBP 2015-07-10 00:25   좋아요 0 | URL
저는 10년에 한번은 커녕 벼르고 벼르다가 생전 처음 읽었는데 좋았습니다. 확실히 십년 전이나 이십년 전에 읽었다면 그 깊이를 느끼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려구요. 몇일 제주도에 있다가 막 집에 도착했습니다

에이바 2015-07-1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 다녀오셨군요. 전복 드시고 오셨나요?ㅎㅎ 석영중 교수 강연은 볼만하더군요 톨스토이에 관한 거요. 전 안나 카레니나 펭귄 버전이 좋아요.

CREBBP 2015-07-10 13:51   좋아요 0 | URL
최근 올린 세 개의 민음사 고전 중 하나가 민음사에서 주는 이벤트에 당첨돼서 민음사 고전 10권을(20만 포인트와 함께) 상품으로 선택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세권짜리 민음사 버전이 생기게 돼서 읽으려구요. 셋 중 뭐로 당선됐는지 궁금해요. 뭐가 제일 낫나요? ㅎㅎ

2015-07-10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5-07-10 14:03   좋아요 0 | URL
흐 감사합니다. 예스24에서 고전 책 사고 리뷰쓰면 2000포인트 돌려준다고 해서 세 개나 사서 열심히 썼는데 나중에 두당 이천원이라고 해서 투덜거리다보니 출판사서 전화오더라구요. 당첨됐다고 책 10권 고르라고. 공짜책 10권 고르는 재미가 어찌나 짜릿하던지요. ㅎㅎㅎ

에이바 2015-07-10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당 이천원 ㅋㅋㅋ 근데 리뷰 퀄리티가 다 우수해요 전화받으실만 해요! 사실 제가 첨 읽은 기네스님 리뷰가 가시내 였는데 저 진짜 한동안 그 글만 머릿속에 둥둥 떠 다녔다니까요. 너무 멋있어서ㅎㅎ

CREBBP 2015-07-10 14:09   좋아요 1 | URL
앗 그랬나요. 저도 다시보고 와야 겠어요. 스쳐 지나갈 생각들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릴 생각의 단초들을 책 속에서 찾고 기록해 내는 것의 즐거움은 훗날의 내가 그 독자가 되는 일이 커요. 이렇게 나누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큰 기쁨이구요.
 
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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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실레의 그림 중에서도<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는 특히 소설 표지에 인기가 많다. 이 책 말고도 라이너 마리어 릴케의 말테의 수기(펭귄클래식의)와 장 폴 샤르트르의 구토(문학동네)의 표지에도 쓰였다. 네번의 자살기도와 다섯번째의 자살성공으로 39세에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의 사진 속 얼굴은 실제로 표지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겨우 서른 아홉째 해를 넘기기까지 다섯 차례나 죽음 속으로 겁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던 남자의 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소설 속 주인공의 행적이 저자의 삶의 자취와 닮았을 때, 소설은 얼마나 소설가 내면의 삶을 반영할까. 실제의 죽음과 소설 속의 죽음은 어떻게 닮았고 어떻게 다를까. 소설 속에서처럼 그렇게 시크하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비타민을 먹듯 수면제를 털어넣고, 수영하러 들어가듯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을까.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선택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함께 경우에 따라서는 경외감마저 주는 게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우리에게 ‘잘못된 선택’으로 각인되어 왔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했을까. 어떤 시대, 어떤 문화권에서는 종종 자살이 미덕인 곳과 자살이 추앙되는 곳이 있었다. 열녀가 나온 정절이라는 이름으로, 가문의 영예를 위해 남편을 따라 죽는 일을 미덕으로 삼던 왜곡된 유교적 사고관이 폭력적으로 군림했던 때도, 순사(殉死)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위해 스스로 죽는 일이 영웅시 되던 이웃 나라도 있었다. 자살에 대한 금기가 보편화된 것은 신이 내려주신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기독교적인 사고관이 세계를 지배하면서부터라고 더욱 뚜렷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자살이 윤리적으로도 사회문화적으로도 금기시되지 않는 문화가 있다면 편안한 죽음을 맞기 위해, 21세기의 눈부신 의료과학적 성과를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 의료기기로 연명하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 합법적인 것이라면, 가족이나 사회적 도움이 목숨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 역시 합법일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사회안전망이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관심이 없다면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는 데에 있어 편안한 선택을 하도록 지원해주는 것은 비상식적인 발상일까. ‘저는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로 시작되는 첫 번째 수기와 그에 이어진 두 번째, 세 번째 수기, 그리고 그 수기를 읽는 ‘나’의 서문과 후기 이렇게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다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다자이 오사무의 생의 많은 부분들이 사실적으로 겹쳐 있다.

소설 속에는 소설가의 삶이 얼마건 투영된다. 그 속의 나는 일상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깊숙한 곳의 나 자신,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나를 끄집어내어 완성한, 새로운 자신이 들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그 속의 나는 글을 쓰면서야 비로소 깨달은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언제이든, 누구이든, 무엇이든 알 수 없는 대상에 이름을 붙이면 이제 그것의 이름을 부르고 그것과 교감할 수 있다. 알 수 없는 내 자신을 한 글자씩 끄집어 내어 그 감정, 스쳐 지나간 생각들을 단어들의 조합으로 완성해 놓은 인격에는 작가가 막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분신이 사랑스럽게 자리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스러질 듯 나약한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표지로 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그 자신의 어떤 한 버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을 읽을 때 발견한 또 다른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상이 두려워서 익살꾼이 되기로 작정한 요조, 무섭고 두려운 세상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커다란 눈을 뜬 채 태연한 척 하는 바스라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에곤 실레의 자화상에서 겁먹어 흔들리는 요조와 나 자신을 보고 또 태연한 척 웃으며 쾌활하게 살지만 그 속에서 흔들리는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할까. 돈이 없는 상태, 건강을 잃은 상태, 고통, 죽음 같은 절대적인 불행이 가까이오지 않는 이상 안정된 의식주가 어느 정도 보장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왜 살기 어려웠던 선조들보다 더 많이 자살하고 더 많이 두려워하고 더 많이 우울증을 앓는 것일까. 요조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우리 역시 사회적 고립을 두려워하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한다. 부잣집 도련님, 잘생기고 최우수 성적을 유지하는 요조가 어릴 적부터 돈과 건강과 고통이 두려워서 익살꾼이 되기로 작정한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좋아하고 어느 것 하나 모자라는 점 없이, 공부하지 않아도 성적까지 좋았던 요조에게 근원적 두려움은 아마도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 사랑을 잃을지도 모를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는 역설적인 인간이다. 마치 화성에서 떨어진 외계인처럼 요조는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과 활달하게 어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그들을 웃기고 재미있게 한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소통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특히 여성의 복잡 심리는 그에게는 완전히 이해 불가능한 것인데, 그것 때문에 더욱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모든 여성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결국은 그 여성들에게 빌붙어 사는 신세가 된다. 그 스스로가 인민의 적, 민중의 피와 땀으로 대대로 군림하는 귀족인 가문의 태생이고,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진탕 술을 마시고 화류계 여성들과 만나고 지내면서도,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가장 위험한 활동책을 맡는다. 돈을 증오하는 공산주의자가 돈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제적인 빈궁을 두려워하면서도 또 보내주는 돈을 마구잡이로 쓰고 다니고, 막상 집에서 지원을 끊자 경제력을 상실한 채 무용한 인간으로 변신하고, 어렵게 삽화를 그리며 연명하면서 이 여자 저 여자, 자신을 동정하거나 좋아하는 여성들의 필요에 의해 빌붙어 살게 된다. 그의 자살 미수는 즉흥적으로 보인다. 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동거녀의 옷가지나 물건들을 전당포에 팔아 술값을 마련하고, 그러다가 약물 중독으로 정신병원까지 입원하는 동안 요조는 어느날 자신이 두려워하던 세상이란 바로 앞에 있는 한 개인이란 것을 알아버린다.

그렇다. 세상이란 자신을 대하는 하나의 개체 개체인 것이다. 그로 인해 그에게 세상은 덜 두려워졌을까? 서장과 후기에 등장하는 나는 세 장의 사진과 세 개의 수기를 읽는다. 세 개의 수기가 모여 하나의 소설을 구성했고, 세 장의 사진이 '나'를 통해 바라보는 그 소설 속 요조의 모습을 설명한다. 익살스럽지만 어딘가 섬뜩한 어린 시절의 사진, 훤칠하게 미소짓는 고교생의 사진이지만 어딘가 영혼이 빠져나온 듯한 사진, 초라한 백발의 마지막 사진. 세 개의 사진과 세 개의 수기는 각각 요조의 삶을 세 영역으로 구분한다. 어떤 모습이 진짜일까 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배우고 또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형성해간다. 세상 속의 나와 내 속의 나, 그 어떤 것이 진짜라고 할 수 없으나, 가끔은 웃고 떠들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혼자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나로 되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러나 혼자 있어야만 고유한 나 자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럴 때 가끔은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 속의 나와 혼자만의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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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09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 우울하대서 안 읽어봤는데.. 이지메를 다룬 동명의 일드는 봤어요. 일문학을 관통하는 어떤 미적 의식? 감성? 그런게 이 작품에도 있을 것 같네요. 말씀하신 조력자살은 스위스 등지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에서 봤어요. 그 리뷰 쓰다가 놔버렸어요ㅠㅠ 인간의 죽음과 존엄성에 대해 확장하다 길을 잃었습니다..

CREBBP 2015-07-09 21:00   좋아요 0 | URL
우울해야 라는 건 맞는데.. 문체가 그리 우울하지만은 않아서.웃긴 구석도 없지 않고.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죽음을 근처 여행 떠나듯 쉽게 선택하다 보니..

에이바 2015-07-09 21:0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우국 사태 이후로 고전으로 꼽히는 일문학을 좀 봐야겠다 싶더라고요. 이 작품도 봐야겠어요

CREBBP 2015-07-09 21:10   좋아요 0 | URL
그리 길지 않아서 부담도 없구요. 독특하고 유니크한 작품인 것 같아요. 서양문학과는 다른 동양적 감수성 - 약간의 동질감 같은-도 느낄 수 있었어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가다> 이후, 이 말은 사랑을 역설하는 고전이 되었지만, 때때로 우리는 여전히 사랑의 불변성을 종교처럼 믿는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이 것이 나의 사랑이다. 이렇게 각인해버린 사랑이 변해가는 모습은 때로 아름답고 때로 추하다. 사랑의 본질은 그 사랑의 모습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퇴색하는 데 있다. 가끔 천천히 옅어진 그 빛바랜 사랑은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과도 만난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설령 사랑이 변해도, 앓도록 원하고 가슴 뛰는 순간이 지나가도, 그럭저럭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흔히 고전을 읽으려면 숨을 한 번 고르고 시작하게 되는데, 그 치밀한 묘사 때문에 책장 진도가 팍팍 안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가끔은 너무나 지루한 묘사 때문에  전개가 끝나기도 전에 미리 질려버리는 경우가 많아서다. 시작해 놓고 끝내지 못한 고전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이유다. 이 책은  반대다.  프랑수아즈 사감은 최근 인기 작가 아멜리 노통브를 떠올리게 한다. 전체 페이지 수가 160쪽으로 짧기도 하거니와 배경과 인물 묘사 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과 공간적 배경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주로 삼각 관계에 놓인 세 사람의 짧은 동선을 왔다 갔다 하며 연극 무대 위의 제한된 공간 내에서 극을 보여주듯 그들의 생각을 들려준다. 


오래 사귄다고 해서 권태의 순간이 갑자기 천둥 번개치듯 들이 닥치는 건 아니다.  숨막히는 떨림이 시간에 희석되더라도 남녀는 서로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인 존경과 친밀감, 정 같은 걸로 살아간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문화권에서 정식 결혼은 드문 현상이 되어 버렸지만, 1950년대라면 다르다. 5년쯤 사귀었으면서 싸우고 헤어지는 일 없었다면 이제 그만 살림을 합치거나 그만 관계를 끝내거나 해야지, 계속 찜해서 침발라 놓고 오도가도 못하게 하는 건 둘 중 한 사람을 몹시도 지치게 할 것 같다. 5년을 만났음에도 권태 때문이 아닌 혼자 있는 텅 빈 시간과 공간 때문에 몸부림쳐야 한다면 둘은 서로에게 무엇일까. 연애할 때 주말을 혼자 지내야 하는 일만큼 맥빠지는 일이 또 있을까. 폴은 외롭다. 풀의 남자친구 로제는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함께 있기를 원하는지 알면서, 그리고 그 또한 그녀를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만족스러운 교제를 하면서도, 풀의 집에 들어갈 땐 `혼자 있어?`라고 묻는  교활한 방법으로 거리를 유지한다.  서른 아홉 살의 폴은 `두 사람 사이에 하나의 규율처럼 자리 잡은 이 자유’를 ‘로제만 이용하고 있고, 그녀에게는 자유가 고독을 의미할 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한다.  


사랑은 자유의 반납이라는 대가가 필요하다. 헌신은 보상을 요구한다. 남녀간의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기에, 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랑, 자유 둘 다를 가질 수는 없다.  스토리는 참으로 단순하다.  로제가 끝내 자유를 포기하지 않은 채, 새로 사귄 `창녀`들과 놀아나는 동안 폴은 15살 연하의 엄친아와 엮인다. 그는 너무 잘생겼고,직업도 변호사지만, 어쩐 일인지, 15살 연상의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고 죽기 살기로 그녀를 사랑한다. 로제의 비행을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이 매력적인 어린 시몽에게 조금씩 빠져 들어간다.  꿈처럼 달콤한 폴과 시몽의 사랑을 깨는 건 언제나 그녀를 외롭게 했던 로제다.용서를 구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로제를 폴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임으로써, 그 반대편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헌신한 15세 연하의 시몽을 버리는 폴을 지켜보는 독자는 착잡하다. 로제의 사과 한마디에 폴이 넘어가자, 로제는 다시 습관적 약속 깨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만을 끝없이 바라보고, 만지고, 키스하고, 기다리고, 온 시간을 다해 온 영혼으로 사랑했던 젊은 애인을 돌려보내고 난 자리에 황망하게 남아있는 로제의 약속 어김. 그것이 폴의 선택이다. 함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그녀는 그 쓰라린 그의 부재를 경험했고, 상처받았지만, 그리고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결국 그녀는 로제에게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폴은 시몽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사랑했다. 무척 사랑했다. 소설은 폴이 거울 속 주름진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시작된다. 젊은 시절부터 함께 했던 남자들을 추억하기도 한다. 시몽의 나이었을 때 함께였던 남자도 있다. 시몽의 헌신적인 사랑과 넘치는 매력은 오히려 그와의 나이차에 대한 콤플렉스를 키웠을 것 같다. 그 콤플렉스는 알게 모르게 폴의 마음에 상처와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너무나 싱그러운 어린 남자와의 완벽한 사랑에 대한 훼손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으리라. 단순한 연애소설 같으면서도 사랑이란 것의 어쩔 수 없는 본질을 한 껍질씩 벗기어내는 사강 특유의 문장은 섬세한 내면을 잘 묘사한다. 


길고 긴 결혼 생활 중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고 할퀴어온 부부라도, 만일 다른 배우자와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고 한다면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과 살면서 사랑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결국은 사랑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는 것들 사이에는 함께 지내온 시간이라는 축이 있다. 사랑을 위해, 공동의 행복을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런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바로 그 자존심이 시련을 양식 삼아(p139)` 둘을 함께 계속 살도록 하는 체념적 선택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과 사람, 하나가 변하면 다른 하나도 함께 변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긴 세월동안 그것이 함께 버무러져 둘 사이에 따로 떼어버릴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아졌다면, 변해버린 사랑을 변하지 않는 사람의 합체로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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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7-08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에서 쓰면 리뷰 대신 페이퍼로 올라가는구나

에이바 2015-07-09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 글쓰기 아래에 카테고리 고르는 거 있어요. 아니 이 좋은 글이 왜 페이퍼인가 했더니 ㅠㅠ
 

지난 달에 읽은 책들

두뇌와의 대화 
일론 머스크 ★★★★☆
마음이 설레는 집도감
백미러 속의 우주 ★★★★☆
그레인 브레인 ★★★★★
행복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글래스자 샐러드
그림의 힘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
용감한 형제들 줄리안 반스 ★★★★
자기앞의 생 ★★★★☆
1984 ★★★★☆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로마의 일인자 ★★★★★
리스트 그 삶과 음악 ★★★★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따라하지 말고 선점하라
야생초밥상 ★★★★☆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

읽고 난 후 시간이 지난 후의 여운을 바탕으로 별점을 다시 매겨봤다.. 별점을 안매긴 책들은 엄청난 재미와 감동이나 기절할만큼의 새로움이나 꼭필요한 정보나 그런 걸 주었디기 보다는 그냥 무난했다고 느꼈다. 전체 합쳐 MVP는 그레인브레인.소설 붕에서 만점이 주 개 나왔는데 역사가 허구와 섞인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라 시대적 환상을 충족시켜 주었고(로마의 일인자) 혁명 그 리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망명자들의 친구 관점에서 서술한 구제불능은 그 숱한 망명자들의 사연들을 대립된 이념 속에 불화했던 프랑스 사회속에서 재밌게 다루었다. 둘 다 읽을 때의 재미와 감동이 순문학적 가치 이상으로 컸다. 이번달은 이 세권 만으로도 대만족스런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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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04 0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인 브레인이 그 정도인가요 저도 꼭 읽어보겠어요 기네스님 역시 독서량이 많으시군요!!! 리뷰 쓰시는 것도 대단해요

CREBBP 2015-07-04 08:48   좋아요 1 | URL
뇌건강에 필요한 지식을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서 얘기하는 게 인상깊었어요. 대중 건강 책들이 대개 근거 없이 그냥 이게 좋다 저게 좋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만 말하고 서로 상충하는 충고들이 많은데.. 뭐 비타민을 먹어라 말아라 운동을 살살해라 세게 하라 고기를 먹어라 마라.. 그런데 이 책에는 그 이론적 근거들 연구 근간들이 나와 있고 우리가 잘못알고 있던 지식들을 수정해주고 있습니다.

2015-07-1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레인브레인이 계속 북플에서 얘기되길래 엄청 궁금했거든요! 목록에서 그레인브레인이 제일 눈에 띄네요ㅋㅋ 지금 읽는 책 다보면 어서 읽어야겠어요!!

CREBBP 2015-07-10 14:31   좋아요 1 | URL
실용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건강지식을 바로 잡거나 혹은 최소한 편견이라도 제거해준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문학적 학문적 가치라든가 그런 전문적인 걸 따진다면 별표 추가한 다른 책들이 더 `우수`하겠지만 제 입장에서 먹거리와 건강에 대해 근거있는 설명이 감동이었다고나 할까요. 오래전의 지식이 바로잡아지지 않는 사회에서 이런 책들은 필독서라고 보여져요. 특히 건강관련 서적들이 편향된 게 많은데 그래서 잘못되었을지도 모를 방향으로 국민건강을 몰아가는 경우도 많다는 걸 알게 해주기도 하고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