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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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만의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딘가에서 그 양심을 따개비처럼 네 아버지에게 붙여 놓았던 거야. 자라나면서, 또 어른이 되고도, 너 자신도 전혀 모르게 너는 네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혼동하고 있었던 거야. (p374)


많이 존경하던 사람에게 어느날 실망한 적이 있던가. 나를 단단하게 보호하던 성벽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세상을 비추던 밝은 빛 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따라, 보고 들은 모든 말,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나를 규정하는 단단한 가치관으로 쌓여 옳은 길로 인도하는 기준이었던 어느날, 우리는 우상의 실체를 깨달을 때가 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올 때도 있고, 천천히 다가올 때도 있다. 하나씩 하나씩 핀트가 어긋나기 시작하다가 점점 틀어져서 완전히 생각과 행동이 완전히 나와는 다른 방향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될 때도 있다. 급격하든 점진적이든 어쨌든 그걸 깨닫는 날은 알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성장의 아픔을 겪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돌이킬 수 없을만큼 생각이 달라서, 삶의 기준이 달라서 아프고,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이 모두 허상이어서 결국 인생은 혼자서 가야하는 길 이어서 서럽다. 


진 루이스에게 아버지는 우상이었다. 아이가 말을 배울때부터 침대에서 법률 책을 읽어주고, 세상의 정의를 가르쳐준 사람. 엄마의 빈 자리를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자상한 아버지이자 친구였고, 아이들의 어리석은 질문에 끝까지 인내하고 대답하며 모든 지식을 알려주는 파수꾼이었다. 하퍼 리의 두번째 책 그러니까 이 책 <파수꾼>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앵무새 죽이기>에서 독자들에게조차 역시 진 루이스의 아버지 애티커스는 기대고 싶은, 자상하고 민주적이며 정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파수꾼이 출판 소식이 전해졌을 때, 책에서 진 루이스가 애티커스에게 크게 실망한다는 내용을 흘려들은 독자들은 고민해야 했다. 깊이 감정이입한 독자들 역시 깊이 감동했던 애티커스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과 앵무새죽이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이 되는 미국 남부 앨리배마 주와 당시 시대적 배경인 1930년대와 40~50년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남북 전쟁이 끝난지 거의 백년이 가까와지고 있는 시점이지만, 참패한 남부는 타격을 받았고 가난했다. 여전히 미국은 흑과 백으로 인한 사상의 미국을 차이가 남과 북으로 확연히 가르고 있었으며, 그것은 흑과 백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연방정부와 주정부 사이의 첨예한 갈등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독자성을 보존하려고 싸운거야. 자기들의 정치적 독자성, 자기들의 개인적 독자성(p276)


남북전쟁은 승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노예해방 운동이었지만 남부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주의 독자적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치른 전쟁이었다. 그들은 연방정부에 대항하여 주의 독자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앵무새죽이기와 달리,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진 루이스의 보수성이었다. 그녀는 앵무새죽이기의 배경이 되는 어린 시절에도 당시 여자 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톰보이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무언의 진보적 성향을 내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파수꾼에서도 마찬가지로, 숙녀처럼 옷을 입고 숙녀처럼 조심성있게 행동하라는 고모의 말을 코로도 듣지 않으며 무시한다. 그러나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가 찬송가를 변형해서 부르자 그녀 역시 뼛속까지 앨리바마 출신의 백인임이 드러나는 행동에 주목했다. 이것은 마치 진루이스가 애티커스의 인종차별적인 행동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는 것 만큼이나 내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행간을 통해 시대적 의의와 인물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따져보아야 하는 건 하퍼 리의 책의 특징인데, 그런 이유로 앵무새 죽이기도 그렇지만 이 책 역시 꼼꼼히 읽겨 몇 번 반복해서 않으면 너무나도 많은 걸 놓치게 되는 소설이다. 성가대 지휘자에게 원래대로 불러야 한다고 얘기하는 장면은 이제까지 앨리바마주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흑인들을 대해왔던 방식으로 계속해서 흑인들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인종 문제는 인권에 대한 문제이므로 크게 다르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고향을 , 그곳 사람들의 붙박이처럼 변함없는 생각을 증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사랑한다. 그녀 역시 주정부를 연방정부가 시시콜콜 간섭하는 일에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 속 가장 반인륜적이었던 장소와 시대를 빠져나와 지난 날의 영광을 회상하며 흑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기를 거부하던 시대. 흑백 문제가 가장 첨예했던 배경은 역설적이게도 주인공 진 루이스가 평생 추억하는 애틋한 기억들로 가득찬 정겨운 곳이다.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청춘을 보내며, 진보적으로 사고(한다고 생각)했던 진 루이스는 아버지에 대한 실망으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린다. 이 소설의 1/3 가량은 아버지에 대한 충격적 실망을 다룬다. 결국 뺨한대 맞고 정신차리고 성장하는 것처럼 흘러가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든, 일생에 한 번은 겪어내야 할 과정이다. 이세상 그 누구도 어떤 성인이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자신의 생각과 일치할 수는 없으며 만일 일치한다면 그것은 허상에 대한 허망한 믿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은 이제 진 루이스가 아버지로부터의 그늘에서 빠져나와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결정해야 할 성인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과는 다르다. 믿고 따르던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이제 자신과 다르더라도 그 생각과 행동의 뒤편에 놓여진 삶의 조건들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생각도 함께 성찰할 기회를 갖는 것이다. 


캘포니아가 자신을 남남처럼 대했을때 진 루이스가 받은 슬픔은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것과 다름없다. 그 반응을 통해 그녀는 겉으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하퍼 리는 언젠가는 진 루이스가 자신을 키워준 캘포니아가, 비록 월급을 받고 어린 형제들을 키워주긴 했지만, 자신에게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음을 그 가족을 떼어 놓고 백인 가정의 가정부로서 희생하고 헌신한 것에 대한 대가는 그저 따뜻함으로 보상받을 수 없는 것임을, 역사의 잔인함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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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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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픽션은 대개의 인간의 거주가 가능한 대기와 압력, 등이 갖춘 가상의 행성을 상상한다. 다른 환경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미래의 어느 시점이거나 선진 문명을 가진 외계인에 의해 이미 극복했다는 가정하에서 이야기가 흘러가기 마련이다. 과학이 아직 풀지 못한 허구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무한한 상상이 가미되고 현실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엮어내는 무한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1969년 인류가 달에 발을 딛고 서서 깃발을 꽂은 우주는 더이상 공상과학 장르의 배경이 아니다. 화성탐사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 화성을 배경으로 스타워즈류의 이야기를 만들 수는 없다. 이미 아이들도 알고 있는 그곳에 사람들이 맨 몸(우주복없이)으로 걸어다니거나 말하거나 서사를 진행시킬만한 무엇을 어떻게 기대한단 말일까. 이런 리얼리티는 우리가 상상하는 SF와는 다르다


당연하게도, 앤디위어의 마션에서 화성은 더이상 미지의 수수께끼의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그동안 인류가 화성 탐사선을 통해 알아낸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공간이다. 그 영하 수백도의 극저의 온도와 지구의 1퍼센트에도 못미치는 대기가 그나마도 95%가 이산화탄소로 이루어진 극도의 환경 속에서 인간을 한 달 정도 살아남게 만들 수 있는 기술과 과학과 엔지니어의 집적체들이 정복한 그 척박함과 극한의 끝판인 공간이다.  그 낯선 공간속에 와트니가 남겨졌다. 동료들을 태운 헤르메스는 이미 그가 죽은 걸로 여기고 화성을 떠나 지구로 가고 있다.  


강한 모래태풍 때문에 한달 미션을 채우지못하고 6일만에 떠난 막사에는 남겨진 식량이 50일치 있다. 5인분이므로 양을 줄이면 400일 500일 정도 살아남을 수 있는 분량이다. 탐사대는 4년 후에 지구반대편 아니 화성 반대편쯤 되는 3200킬로미터 멀리에 있는 스키아파렐리 평원에 다시 도착한다. 살아남기 위한 조건은 간단해졌다. 


미션 1. 1년치 식량으로 4년간 살아남아야 한다.  

미션 2. 320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이동해야 한다. 

미션 3. 지구와 통신이 가능해져야 한다. 


다행히 그에게는 탐사에 쓰던 공간인 막사가 모래 사막에서 훼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 곳에서 생명유지장치들에 의해 공기들이 원자 단위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물과 공기로 재활용된다. 당연히 기계가 필요하고, 그것을 관리해야 한다. 다행히 와트니는 엔지니어겸 식물학자이다. 그리고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낙관과 혼자서도 혼자를 웃기는 특출한 유머감각이 있다. 이제 그를 살게 해주는 기계들을 보자. 


산소발생기 : CO2에서 산소를 분리하는 기계다. 지구 대기와 같은 성분의 막사에서 숨을 쉬면 CO2가 나온다. 그것을 분리해서 산소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공급한다. 


대기조절기 : 공기표본을 채취하여 문제를 제거한다. CO2와 O2의 농도를 맞춰준다. 산소발생기와 연결되어있다. 


물환원기 : 막사는 작은 지구와 같다. 증발된 물이 구름이 되어 머물다 다시 비로 내리는 것처럼, 막사 내의 물환원기는 막사 내의 모든 수증기를 모으고 인간의 배설물을 비롯한 모든 물 성분을 정화해서 물을 만든다. 산소발생기와 마찬가지로, 이것들의 수명은 50명이 한달 미션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졌다. 


에어로크 : 대기와 우주공간 사이의 중간 공간으로, 여기서는 막사와 화성 사이에 아마도 공중전화박스 생겼을 것 같은 공간인데, 와트니가 바깥으로 들락거릴때 거치는 곳이다. 가압과 승압으로 기압을 맞춰줌으로써 막사 내에 공기가 화성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유지시킨다. 가압해서 막사 대기를 만들어놓고 우주복을 입은 후 다시 감압해서 공기를 막사에 저장한 후 바깥에 나가고 들어올 때는 반대로 한다. 


로버 : 화성탐사를 위한 자동차 같은 것으로, 로버 내에 대기가 있으므로 우주복을 벗을 수 있고, 막사와 마찬가지로 작은 에어로크를 통해 들락거린다. 시속 20~30킬로미터의 속도로 갈 수 있고, 생명유지장치가 별도로 있는 게 아니라 탱크에 저장된 대기를 이용한다. 


패스파인더 : 이건 중간에 나오는 반전같은 기계로, 1990년대에 보낸 탐사선이다. 와트니가 있는 막사에서 약 300킬로 떨어진 곳에 버려져 있다. 



이 소설을 실감나게 하는 것들은 매우 디테일하고 자세한 현장 묘사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문학을 통해 화성을 정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어떤 과학책이 이보다 더 자세하게 화성을, 화성의 변덕을, 화성의 우직함을 설명할 수 있을까. 와트니는 차근차근 생각하고 천재적인 감각으로 극도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꾸준하게  모색한다. 대충 얼버무리는 건 없다. 혼자서 먹을 것 없이 화성에 떨어진 사람을 주제로 어떻게 600페이지 가량의 분량이 나오지? 궁금하다. 600페이지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난리부르스다. 그 먼 곳에서 혼자가 된 와트니는 혼자서 엄청 바쁘다. 계속해서 시련이 닥치고, 잠시 희망이 보이면 엎친데 덮치는 일들이 발생하지만 기술적 해법을 찾는다. 그 기술적 해법들이 억지가 아니라서, 상상이 아니라서, 얼버무리는 게 아니라서 꼼꼼히 읽게 된다. 일단 첫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잠자기는 글렀다고 보면 된다. 아 빨리 영상으로 보고 싶다. 9월에 개봉하나 10월에 개봉하나. 리들리 스콧 감독이고 멧데이먼 주연이다. 참고로 내가 외국 배우들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멧데이몬은 꺄악~~ 소리 나게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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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미원주 2015-09-0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을 능가하는 영화는 드물더라구요. 소설에서 느낀 감동이 영화로 인해 반감되지 않길 바래요. 미래형 로빈슨 크루소의 화성에서 살아남기 이책을 제 친구도 읽고 감명을 받았데요. ^ ^ 독후감 잘 봤어요.

CREBBP 2015-09-09 23:26   좋아요 1 | URL
내용이 어찌보면 조금 정적인 부분이 많아서 내레이션으로 스토리를 끌고가야 하는데 웃긴 본능이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연기면에서는 그게 조금 걱정되고.. 감독이야 뭐 보증수표고 전 시각적 영상적인 처리를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요. 예고편을 외우도록 봤어요
 
지방 소멸 - 인구감소로 연쇄붕괴하는 도시와 지방의 생존전략
마스다 히로야 지음, 김정환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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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말 미래 인구는 100억에 달하고 인류는 식량과 환경 같은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지만, 대다수 OECD 국가가 가진 당면한 문제는 인구 감소다. 현재 일본의 합계출산률은 2012년 1.41이다. 2.0이하의 낮은 출산률이 장기간 지속된 일본은 2008년을 기점으로 인구 감소세로 돌아섰으며 현재와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2010 1억3천만 가까운 현재 인구가 세기말인 2100년에 메이지시대의 인구인 5천만이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e-나라지표에 찾아보니, 최저 출산률의 정점을 찍은 2005년 1.076이었고, 그 후 10년동안 1.1과 1.3 사이에서 증감을 반복하며, 2014년 1.20을 보였다. 출산률 1.09라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두 사람이 대략 한 명의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면 이것은 한 세대에 인구가 0.5퍼센트 즉 반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0.5의 제곱은 0.25이므로 만일 100명의 젊은이의 다음 세대는 25명이 되고, 0.5의 세제곱은 0.125이므로 그다음 세대인 증손의 세대는 많아야 13명이 된다. 경제와 사회의 방향과 양상이 일본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도돌이표처럼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주목할만한 책이다. 


이 책은 일본의 인구 감소 현상의 본질을 전국의 시구청을 비롯한 지방 도시의 궤멸로 이어지는 대도시화와 관련하여 분석한다. 저자 서문에 의하면, 그동안 일본의 인구 감소 현상은 고령화 문제에 가려져 왔다. 고령화 대책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현실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인구 그 자체의 원인과 그 감소의 궁극적인 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얼만큼 와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이 책은 인구 감소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일본창성회 산하의 분과에서 정치와 행정분야 주민이 사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발표한 '소멸가능성 도시'라는 보고서 내용의 일부를 엮은 것이다.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도쿄보다 못할리 없는 서울을 생각하면 더욱 암울할 수 밖에 없는 현실 하나. 도쿄는 젊은이들을 저임금으로 고용해 쓰고 버리는 곳이다. 최소한의 주거 환경에서 높은 생활 물가 속에 내몰려진 젊은이들은 결혼할 여력도 아이를 양육할 능력도 되지 않는다. 시골의 출산률에 비해 도시의 출산률이 훨씬 낮은 이유이고, 지방의 도시들에 비해 도쿄라는 거대도시가 가장 낮은 1.0대에 머무르는 큰 이유가 그것이다. 도쿄는 인간을 소비한는 도시이다. 도시집약적 경제모델이 궁극적으로 불러올 마지막 종착역은 모든 젊은이들을 그곳 도시로 끌어들이지만, 그 곳 인구를 유지시켜줄 아이를 더이상 낳지 않아 인구의 블랙홀이 된다.  그러나 인구 감소가 현실화됨에따라 젊은층을 도시로 꾸준하게 공급해오던 지방은 이미 젊은 인구의 감소가 한계를 넘어 더이상 공급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많은 도시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다수의 지방에서는 젊은 인구 뿐만 아니라 고령인구 마저도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고령인구가 감소하면 고령자들의 연금으로 버티던 작은 도시의 편의점들이 줄어들고, 지방의 젊은이들을 고용하는 역할을 했던 의료.기호 관련 산업은 쇠퇴할 것이며 그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고, 시골의 마을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시골에서 작은 뜰에 두 명의 아이와 혹은 한두명의 조모와 함께 소박한 삶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은 이제 도쿄나 대도시로 이주하여 형편없는 주거공간에 거주하며 도시에 잠시의 열기를 지탱시켜줄 부품으로 자신을 태우다가 유전자 전달에 실패한채 소멸하게 될 가능성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젊은이들이 빠져나가는 지방이 붕괴하기 시작하고, 그것은 장기적으로 도쿄도 축소할 것이며 결국 궤멸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희망 출산률은 1.8이며, 출산률 향상은 나라 전체를 젊게 만들어줄 것이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방 육성 정책을 통해 경쟁력있는 지방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인데, 이를 위해  젊은 여성 인구 증가율 상위 20개 지역을 분석하고, 그 모델을 습득할 것을 권장한다. 그 모델들은 현재 한국에서도 각 지방자치제에서 인구 증가를 목적으로 여러가지 방법으로 시도하고 있는 비슷한 방법들을 포함한다. 선진국의 예를 따라 글로벌 기업의 본사를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것에서부터 쾌적한 환경으로 대도시의 베드타운으로서 기능하게 만드는 것들.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아직 이러한 함의가 구축되지 않았고, 청년들은 자기 앞가림에 바쁘고 장노년층은 그저 먼 미래의 일이고 나의 일이 나니니 알바 아니라 무관심적으로 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런 책들은 정책입안자들과 시구의회의원들의 필독서가 되어야 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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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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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고, 어려운 복선이 깔려 있지도, 곰곰히 그게 무슨 뜻일까 하며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은유적 행위도 많지 않다. 단순하고 평이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많은 생각들을 이끌어 내게 하는 줌파 라히리는 젊은 나이에 소설가로서의 처녀작으로 퓰리처상과 뉴욕타임즈 상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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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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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는 1967년생, 뱅골 출신의 이민 2세로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2세 이후 쭉 미국에서 산 미국 사람이다. 그녀는 단편집 <축복받은 집>으로 1999년 소설가로 데뷰하고 그 이듬해 2000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미국인의 정체성을 파고드는 장편 위주의 중견 작가에게 주어졌던 퓰리처상이 신인이며 이민자이며 단편작 모음에 퓰리처 상을 수상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축복받은 재능을 가진, 축복받은 작가다.

 

<축복받은 집>이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이 집의 구성원에게 어떤 결핍이 내재된 집. 그것들을 각자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구성원. 그 곳 부부들은 가슴을 적시는 뜨겁고 절절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하루 일상으로서 어쩐면 서로에게 가구처럼 늘 그자리에 한결같이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가정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 실린 대부분 단편들은 함께 인도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 상실과 이민자로서의 이방인의 낯선 시선 이질감과 특히 문화적 상실감이 짙게 배경으로 드리운다.

 

내가 읽은 책이 2001년도 동아일보 판이어서 그런지 저자에 대한 약력이 허술해, 서핑을 해보았으나 신통한 게 없어서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찾아보았다. 소설집에는 9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국내에서는 <축복받은 집>이라는 소설 이름으로 책 이름을 지었지만, 원서에는 <질병의 통역사>(원제  Interpreter of Maladies)를 제목으로 삼았다.

 

질병의 통역사

 

미국 관광객을 태운 인도 현지 가이드가 코나라크 라는 힌두교의 유적지 태양 신전을 보러 가는 길이다.   관광객은 인도계 미국인 가족. 현지 사정과 언어 문화에 어둡고, 서구화된 미국적인 의상과 언어, 행동을 한다. 한때 외교관의 통역을 꿈꾸었던 카파시는 질병 통역사라는, 병원에서 환자의 증상을 통역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하찮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가족을 부양한다. 외국어에 능숙한 덕분에 관광 가이드라는 사이드 잡을 가졌다. 카파시가 태운 관광객 다시씨 가족은 카파시가 보기엔 서로 전형적인 <가구>다. 남자는 가이드북에 물두하고, 여자의 눈빛은 선그라스 속에 감추어 있지만 가이드에게 인간적인 흥미를 보인다. 부부는 말이 없다.

 

이 단편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건 바로 이거다. 남편에게 가구인 한 여자가,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구도 하찮게 여기는 자신의 직업을 인정한 것이다. 질병 통역사 카파시는 여자가 자신에게 보인 관심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착각의 세계의 빠져 들어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그의 상상은 우습지만 슬프다. 그래서 이야기는 코믹하면서도 짠하다. 그 관광객 부부가 호의를 보이며 함께 사진을 찍고 주소를 메모하는 순간부터 그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아 그의 상상적 로맨스는 멀고 먼 달콤한 미래에 닿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하찮은' 질병 통역 일을 '로맨틱'하게 생각하는 여자를 만났다. 이제 그녀와 사랑하는 일은 시간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는  행복하다. 차에 두 사람만 남고 여자가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겨 그에게 어떤 한 비밀을 얘기해 주기 전까지 그는 그녀와 함께 벌어질 어떤 일을 기대하며 충만해졌다. 그의 영혼은 짜릿하게 창공을 향해 비상했다.

 

카파시가 운전석 앞의 백미러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여다 보는 그들 가족은 그의 시야 앞에 놓인 백미러에 의해 왜곡되어 보인다.  렌즈 없이 벌거벗은 눈으로 그녀와 그 가족을 보았을 때에야 비로서 자신과 그 가족 사이의 멀고 먼 거리를 깨닫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너무나 사소한 존재여서 제대로 모욕할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116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자연스럽게 끼게 되는 렌즈는 사물을 왜곡시켜 대상을 자신에게 편한 대로 해석하게 한다. 가까운 거리는 멀게 먼 거리는 가깝게 보여질 수도 있다. 인도의 생활고에 하루 하루를 고된 노동과 생활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살아가던 카파시에게 그 렌즈는 잠시동안 아주 잠시동안 설레임과 즐거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 착각의 깨달음에 대한 대가는 어떤 종류의 상처이고 어떤 종류의 아픔일까. 카파시와 다시 가족 사이에는 태평양 만큼 멀고 먼 문화적 차이와 경제적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백미러를 통해 공동된 언어와 같은 민족이라는 쉽게 건널 수 있는 마을 앞 시내처럼 얕고 가까와 보였지만 보였지만, 만날 수 없는 넓고 넓은 바다였다. 두 가족이 살고 있는 세계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계였다.

 

미나는 썬글라스로 자신의 일부를 폐쇄한다. 그녀가 보낸 카파시에 대한 호의는 그는 너무나 하찮은 존재여서 그녀가 가진 출생의 비밀을 덜어버려도 상관이 없을 듯한 사람에게 보내는 예의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너무나도 힘든 비밀을 카파시에게 쓰레기처럼 던져 버리고 홀가분하게 그곳을 뜨고 싶었을까. 그러면 조금은 가벼워질까. 그럴까. 카파시는 사람들에게 질병의 증상을 통역한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너무나도 무거운 비밀을 그에게 통역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누구에게?

 

섹시

 

<섹시>는 짧고 흔한 스토리임에도 오랜 여운과 생각 거리를 준다. 흔하디 흔한 불륜 관계가 주제다. 여자의 사랑은 인도인으로서의 상실된 정체성을 배경으로 한다. 이제껏 인도의 문화와 생활에 관심도 없던 미란다는 애인을 통해 자기 이름이 반은 인도식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남자의 인도적 정체성이 강할 수록 결핍으로 인해  생기는 문화적 이질감과 소외를 경험한다. 개인의 탄생과 성장 배경의 차이에서 생기는 차이. 그 속에서 생기는 이민족의 정서를 일탈적 사랑 속에 정교하게 녹여내었다. '그녀의 플롯은 너무나 질서 정연한여 정교한 수학적 증명을 연상시키는다' 라는 표지 뒷면의 찬사에 거짓 없이 공감하게 되는 단편이다.

 

 

대체로 바람둥이들의 특징은 자신과 상대방을 속이지 않는다. 다만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파트너만 속는다. 그들은 뻔뻔해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먼저 말함으로써 상대를 유혹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얻는 이점은 가정과 배우자를 상대의 욕망의 경계선 밖에 위치시킴으로써 겉으로는 가정을 보호하는데 성공하지만 사실상 자신을 보호하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임자가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가는 고스란히 그 사람을 사랑한 사람만의 몫이다. 알고도 사랑한 죄, 이 소설에서 남의 사람을 품은 것에 대한 댓가는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드라마틱하거나 신파적이거나, 충격적인 방법이지 않다. 그 댓가는 조용하지만 더 예리하고 날카롭고 그래서 더 훨씬 더 깊이 찌른다. 자신에 대한 자각. 자신에 대한 발견. 한 남자에게 한 여자로서 무엇이었는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아픈 자각이다.

 

주인공의 이름에서도 이민 2세로서의 문화적 혼돈이 반영된다. 미란다는 영어이름 이지만 인도계 이름 중 미라라는 이름과 섞여 있다. 미란다는 인도계 여성이지만 인도어를 할 줄도 모르고 인도에 대해 아무 상식도 없다. 그러나  강한 인도인의 정체성을 사진 데브를 사랑하면서 그녀는 인도 문화를 경외한다. 음식과 말과 글자와 그들의  신에 대한 의식, 이 모든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 하지만 이미 그녀에겐 모두 낯선 것들이다.

 

어떤 것은 글자라기 보다 숫자 같았고 어떤 것은 옆으로 누인 삼각형 같았다. 그녀는 여러번 시도한 끝에 책에 있는 것과 비슷한 절차로 자신의 이름을 써 낼 수 있었다. 중략. 그것은 그녀에게 한번 번 갈겨 쓴 글씨에 불과했지만 이 세상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미란다는 그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59 <섹시 중에서>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여자는 백화점에서 섹시한 이브닝 드레스를 산다. 그녀는 로맨틱한 저녁을 꿈꾼다. 2주간의 여행에서 돌아온 남자의 아내, 남자에게 일탈은 끝났지만 의무는 남아있다. 주말마다 아내에게 운동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녀를 만나러 오는 남자는 그녀가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것을 볼 시간이 없다. 남자에게 여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이 가장 섹시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는 언니의 형부가 바람이 나서 파경을 맞게 된 사실을 매일 매일 이야기하고 매일 언니에게 전화한다. 동료가 형부와 형부의 내연녀를 욕할 때, 그녀는 자기도 다른 여자의 남자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고백하지 못한다. 깨달음은 순간이다. 그 동료가 언니와 함께 외출하기 위해 베이비시팅을 맡기고, 그 아이, 그러니까 아빠가 바람나서 엄마가 매일 울고 있는 환경에 처한 아이와 함께 한 시간, 그녀는 아이를 통해 한 가족을 깨고 있는 자신을 본다. 우연히 옷장 안의 그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드레스를 본 아이는, 여자 주인공 미란다에게 입어보라고 조른다. 남자를 위해 옷을 샀지만 남자와 로맨틱한 이브닝을 가질 기회가 없어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드레스를 어쩌면 그 남자의 아이였을 수도 있었을 아이 앞에서 입어본다.

 

아이는 말한다. 섹시해요. 아이가 섹시하다는 말의 뜻을 알까? 아버지가 다른 여자에게 가버리기로 한 아이에게 섹시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아빠에게 다그치고 소리지르고 울고 하면서 그녀가 섹시하냐고, 얼마나 섹시하냐고, 따져물었을까. 한 아이의 아빠를, 한 가족의 부양자를, 한 여자의 남자를  빼앗아가 버린 섹시함. 그말의 의미를, 그 부부의, 그 가족의 아귀다툼 속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아이. 그 아이에게서 나온 섹시해요 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이제껐 무엇이었는지를 자각하는 여자. 한 번쯤은 만나서 헤어짐의 의식을 갖기를 계획하지만, 결국 그 헤어짐의 의식을 치를 기회마저도 오지 않는 걸 알아버릴 때의 초라함. 남의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잠시 동안의 일 

 

우리는 밤이 낮처럼 환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오래전 사람들이 밤에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무 제약 없이 할 수 있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실내에서는 밤과 낮이 구분이 없다. 이 때 갑작스레 발생하는 정전은 매우 특별한 이벤트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정전이 발생되면 동네는 축제 분위기다.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와 떠들고 시험을 앞둔 아이들은 잠시의 일탈이 즐겁다. 그러나 가구 같은 두 사람. 이제 어둠 속 그대 나  사이에는 흔들리는 촛불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남자는 어둠속에 내밀었던 서로의 속내가 생활에 변화를 주기를 바랐다. 여자는 흔들리는 촛불 앞에서 의식을 치르듯 작은 진실들을 꺼집어 냈고, 남자의 그것도 보여달라고 했다. 남자는 그 정전 속의 진실게임이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를 바랐고, 여자는 깊은 상처와 함께 관계를 떨쳐내기 위한 정리가 되기를 바랐다.

 

그 부부가 처음부터 서로에게 가구였던  건 아니었다. 만삭이 될 때까지 여자의 배 속에서  싹을 틔어왔던 새 생명의 급작스런 상실은 그 부부를 가구로 만들었다. 며칠동안 예고된 저녁 시간의 깜깜한 정전이 가구 같던 두 사람 서랍을 열었다. 깜깜한 어둠속에 촛불이 오래된 가구의 손잡이를 더듬어 문을 열고 가구 속 더 어두운 상실의 슬픔을 어루만졌다. 진실 게임이 익숙해 질 무렵, 이제 가구가 아닌 사랑이 되어 서로의 몸과 마음을 생명으로 다른 수 있음을 기대하게 되었을 때 정전은 끝이 난다. 일탈도 끝난다. 진실 게임도. 어둠속에 촛불처럼 흔들리던 작은 기대도. 끝이 난다.

 

예고되었던 정전의 밤은 예상보다 일찍 끝나고,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정전 기간동안 그녀에게 품었던 실낱같은 희망이 얼마나 헛되었는지를 알고 깊이 분노한다. 그래서, 그는 비밀을 털어 놓는다. 그녀의 깊고 아픈 상처 뒤에는 마치 반전처럼 그 남자가 그녀를 향한 애정과 배려로 무덤까지 혼자 가져가려 했던 비밀 아닌 비밀이 있었다. 배 속에 있을 때까지는 숨쉬었던 아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미 꺼져 버린 생명이었을 때 그는 그 죽은 아기의 시체를 혼자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직접 묻었다. 그는 이미 상실로 넋이 나간 아내에게 모든 일은 이미 끝나 있었다고 말하고 실재했던 싸늘한 아기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다. 아내를 사랑했기에, 그는 아기의 죽음이 추상적인 것이 아님을 혼자서만 확인하고, 그 죽음의 실존적 슬픔을 혼자만 감당했다. 

 

정전, 전기의 공급이 강제성이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차단 역시 자유롭다. 불을 끄면 다시 세상은 어두워진다. 아내는 조용히 불을 껐다. 아-- 작은 탄성이 나왔다.   내가 읽는 좀파 라히리의 첫번째 단편이다. 두고두고 길게 여운으로 남을 짧은 단편..

 

진짜 수위

 

동 파키스탄이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방글라데시가 된 해가 1971년이다. 난리통에 부리 마는 가족과 집과 보석과 그 모든 것을 잃고 캘커타로 이주해 왔다. 그러니까 배경은 70년대에서 80년대의 캘커타라고 하겠다. 그녀는 낡은 연립 주택의 계단 참에서 기거하며 그 건물의 청소며 잡다한 일을 한다. 그녀가 하는 말은 주민들로서는 믿을 수 없이 허세 새로운 것들뿐이다. 전쟁 전 그녀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는지 호화 스러 웠던 과거. 가난한 그곳 주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호사를 누린 기억을 끊임없이 이야기 했다. 아무도 있지 않았으나 그녀의 존재가 연립주택의 관리면에서 해가 될 께 없었으므로 그녀는 주민들과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쉽게 읽히고, 어려운 복선이 깔려 있지도, 곰곰히 그게 무슨 뜻일까 하며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은유적 행위도 많지 않다. 단순하고 평이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이렇게 많은 생각들을 이끌어 내게 하는 줌파 라히리는 젊은 나이에 소설가로서의 처녀작으로 퓰리처상과 뉴욕타임즈 상을 수상했다.  일상적인 모습에서 내전과 가난, 이민 등의 문화적 충격을 지닌 시대의 자화상과 미국에 정착한 이민족으로서 겪는 아픔과 상실을 따뜻한 언어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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