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작가수업 1
김형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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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지루하고 여전히 추운 겨울의 끝자락, 기다려도 기다려도 봄은 오지 않고 앙칼지고 매서운 추위가 물러서지 않을 무렵, 우리에게 명명된, '꽃샘추위'라는 예쁜 언어는 기다림의 소망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저자는 '문학은 존재의 저 끝 어디에 있는 것들을 명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생각, 어떤 느낌, 어떤 현상들에 어떤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공기의 습기와 아침 이슬을 머금고 애쓰 스스로 생명을 키워나가는 들꽃이 되고, 아끼고 가꾸어 피울 수 있는 장미가 되고, 풍성한 식탁을 차릴 수 있는 열매가 된다.  그것을 문학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것을 글쓰기라는 영역으로 확장해서 이해한다. 


저자는 문학의 본질을 소통으로 보았다. 누군가가 읽어주는 것을 기대하고, 또 많이 읽어주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작가들은 간혹 베스트셀러를 숭배하고 많이 팔리는 길을 섬기게 되므로 이를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문학을 하는 작가라면 문학적 도전을 중단하면 안된다는 취지의 말이었으나, 나는 소통이라는 단어가 눈이 띄었다. 문학의 본질이 소통에 있는 것처럼, 리뷰와 같은 글쓰기의 본질도 소통에 있는 것일까. 작가가 아니니, 문학사적 지평을 넓힐 필요가 없으니 소통에만 치중하면 될까. 소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만일 누군가가 와서 읽어주지 않는다면 오탈자와 비문이 가득하고 뒤엉킨 생각들이 채 정리되지 않은 채로 인터넷 어느 한 공간에 남겨진 나의 글을 그야 말로 산 속의 잡초처럼 여름 한 철 지고 갈 어지러이 마음 타래에 불과하다. 그래도 안쓰는 것보다는 낫다. 글은 남고, 글 속의 생각도 남겨진다. 비록 정리되지 않을지라도... 


최근 들어 글쓰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뭘 대단하게 쓰는 것도 이걸로 밥벌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생각을 옮기는 일이 두려워졌다. 생각이 없어진 거 같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을 생각했다. 글쓰기를 생각의 기록으로 여겼을 때에는 두서없는 생각의 타래들을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을 때, 그 엉킨 실타래들은 이제 기억 속에서 휘발해 버리는 대신 자기들끼리 얽힌 채로 생명을 잃는다. 식물에 물을 주면 꽃을 피우듯 생각이 정리되는 순간은 외부와 어떤 방식으로든 내 생각 밖으로 나온 타래들이 소통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반대로 소통을 생각하니 생각이 정지되는 듯하다. 시인과 소설가를 치열한 고독과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돌고 돈다. 생각이 있어야 글이 되고, 글이 있어야, 소통이 되는데, 소통이 생기면 새 생각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으니 쓸 글이 당연히 없지 않은가. 새삼 작가들이 대단하다.  


제가 이곳에서 제 마음을 정성껏 글자에 담아서 전달을 하면 그것이 나의 상상력이 미칠 수 없는 머나먼 어떤 곳에 가서 내가 원하는 무슨 일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처음 확인했을 때 그 위대한 문학적 기적이 얼마나 전율스러웠는지요. 그 후 저는 속수무책일 때마다 글이라는 무기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서정'이란 '객관 세계에 의하여 환기된 주관적인 감정'이라 한다. 늘 보는 풍경 속에 익숙해져 있다 보면 꽃이 피고 계절이 변하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객관 세계가 마음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작가는 이것을 권태라고 했다. 똑같은 인간들끼리 매일 밥을 먹으며 가족과 부부와 동료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 관계에서 권태는 위험하다. 그렇다고 화려한 연예게를 살아가는 사람도 아닌데 감정이 요동치는 환경에 무작정 몸을 맡길 수도 없다. 문학은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는 객관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중요한 답변이다. 책은 왜 읽을까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다. 문학은 나에게 삶과 관계의 권태로부터 자유로와지는 수단일까? 생각을 풍성하게 하는 문학적 텍스트가, 현실적 삶과 관계맺기에서 권태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흠 더 생각해보자.


작가 김형수는 실천 문학을 하게 되었던 자기 고백을 풍부한 감성적 언어로 시작하여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를 했고, 책은 강의 내용 그대로 인쇄되었다. 예비 작가들을 위한 책이지만, 그 예비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작가적 가치관과 언어와 문학의 본질에 대해, 진솔하게 안내한다. <고종석의 문장>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보았지만, 자의식과 언어의 아름다움과 같은 서정적인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이 상식과 일치하지 않는 암울한 시대를 만났을 때의 지식인의 양심적 선택은 불가피하다. 그가 '1980년대 민족문학을 이끌어온 대표 시인이자 논객'이라는 점을 믿을 수 없을만큼 작가의 언어는 잔잔하고 맑다. 


문학을 공부할 목적이 아니라, 문학을 이해할 목적으로 읽었다.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라는 제목이 끌렸다. 문학이 예술을 전하고자 했다면 문학적 코드를 최대한 수용하기 위해 문학에서 사용하는 전문 코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알려주었다. 문학적 코드라는 것은 읽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각자가 각자의 방식대로 이해한 그 마음은 다시 또 '명명'되었을 때 또다시 예술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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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5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 사랑과 전쟁과 천재성에 관한 DNA 이야기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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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나는 생뚱맞게도 애니미즘 사상에 기우는 것 같다. 생명이란 것을 단지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으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이 발견한 가장 작은 원소에서부터 코스모스라는 거대한 유기체조차 하나의 영혼이 있는 생명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것들이 인간과 같은 방식의 사고 체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우주의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처럼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체계를 이루고 있을 지도 모른다. 발견된 사실들이, 무지의 틈을 메우면서 생명과 우주를 이루는 진실에 다가가는 거대한 스토리의 일부일 때, 우리의 감동은 벅차다. 그  알 수 없는 것들을 상상에 맡기고 거기서 허구를 만들어내는 일 못지 않게 말이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타고난 이야기꾼 샘 킨,

로사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를 소개하는 자신의 짧막한 블로그에, 전작으로 <사라진 스푼> 한 권밖에 번역된 책이 없는 저자를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소개하는 것은 우리에게 거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전작이 한 권밖에 번역되지 않은 것은 전작이 한 권밖에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고(최근 6월에 The Tale of the Dueling Neurosurgeons가 출판되긴 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 꾼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그의 많은 책을 읽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짧은 질적 경험이 준 임팩트 만으로도 샘 킨에게 붙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찬사는 정당해 보인다. 한 권이 아니라 한 챕터만 읽어도 된다. '타고난 이야기꾼'은 성석제처럼 상상에서 출발한 허구적 이야기를 전문으로 만들어내는 소설가에게 부여했을 때보다, 과학을 전하는 책을 지은 작가에게 더 의미있는 찬사다.


샘 킨은 냉정한 과학적 사실을 전하면서 그 속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를 한쪽 구석으로 제껴놓지 않았다. 과학적 성취를 이루어낸 개인 개인의 시대적 환경, 집념, 그리고 샘 킨이 발견하고 각색한 독특하고 재미있는 캐릭터는 인류 역사 속 획을 그어온 커다란 과학적 성취 속에 점점이 스며있다.  한명 한명의 획기적 발견이 인류를 한걸음씩 앞으로 내딪게 하는 동력이 되었을 때 그 동력을 인간의 욕망과 탐구심이라는 구심점 속에서 융해시키는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우리는 스토리에 끌린다. 스토리는 자석처럼 우리를 끌어당긴다. DNA 분자 구조와 단백질 생성 암호화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도식들과 씨름하는 것은 DNA를 처음 발견한  미셔나 유전의 법칙을 알아낸 멘델의 생애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들이 과학을 발견해 나가는 드라마를 접하는 것과 비교하면 흥미와 감동면에서 게임이 안된다. 책장을 넘기는 많은 순간, 우리가 수업시간에 따분해 했던 과학 이론의 매 탄생 과정과 그 속에 담긴 드라마들에게서 감동받는다.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과학적 발견에 감동하고 감정을 움직이면 뇌 속의 기억 회로가 그것과 연결된 팩트들을 오래도록 붙잡아 놓는다. 지루하던 유전학의 상세 동작 구조를 이토록 글자를 패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이야기의 힘이다.


샘 킨은, 초파리를 연구했던 모건이 당시 학자들이 유전자에 괴상하고 생소한 이름을 붙이던 관습을 깨고 의미있는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책을 통과하는 모든 과학적 사실들의 이면에 있는 작은 화학물질들과 그 작용들을 인간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처럼 기술하고 스토리텔링을 불어 넣어 그것들의 의미릉 생생하게 포착하였다. 그의 글 속에서 유전자가 동작하는 방식은 마치 유전자들이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나름의 사고 체계를 갖춘 개체 같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단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할 뿐이다.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그렇게 유전자가 지시하는 명령들의 조합이 아닌가. 그것들은 인간의 형상으로 조합을 이루기 전 태고적 바이러스 시대 때부터 독립된 인격처럼 자신을 복제하는 화학적 메카니즘과 암호 체계를 갖추고 나름의 역사를 쓰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책이나 그림책에서는 사물이나 동물을 곧잘 의인화한다.  그게 아기들의 교육적인 면에서는 좋지 않다는 헛소리도 들은 적이 있지만,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기에, 개가 멍멍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을때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그 뜻을 해석하고 스토리텔링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개와 교감하는 인간의 감정을 묘사할 길이 없다. 개에게는 인간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데서 자연선택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기에 긴 시간을 지나면서 나름대로의 의사 소통 방법을 발전시키는 유전자가 발전했을테니,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유전자 역시 개를 이용함에서 오는 잇점을 발전시켜나간 것 아닐까. 다른 언어가 없는 그들은 짖고 꼬리 흔들고 와서 부비고 하는 단순한 행동이지만 스토리 속에서 그 행위는 왜 이제 왔니 얼마나 기다렸는데 등과 같은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게 맞든 틀리든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DNA 속의 화학 구조가 이루는 유전자들의 조합이 우리의 인생과 교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이면서 또한 우리가 아니다.

 

진보를 이루게 하는 힘, 학문과 학문의 접점

DNA와 유전자는 다르다. 학문적 발견 과정도 다른 루트를 통해 발전되어 왔다. DNA는 물질이고, 유전자는 긴 DNA 가닥으로 이루어져있고, 세포액 속에 있는 염색체는 DNA로 가득한 책이다. 처음 DNA를 발견하게 된 건, 요한네스 프리드리히 미셔의 청력상실 덕이었다. 청력 손실로 청진기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자, 호페 자일러의 실험실에서 혈액 세포에 있는 화학 물질의 종류를 연구하던 끝에 단백질에는 없는 인이 3% 나오는 물질을 분리해 냈고 이를 뉴클레온으로 이름붙였다. DNA가 발견되어 미셔는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DNA는 뭘 하는 지 모르는 그냥 혈액속의 물질일 뿐이었을 것이다. 겨우 150년이 채 못된 1869년의 일이다.


1900년대 멘델의 유전학과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불꽃튀는 내전을 겪었다. 모건이 이끄는 팀은 이 둘을 합쳐 현대 유전학이라는 거대한 테피스트리의 토대를 마련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유전의 매개물질이 DNA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유전학자들은 DNA 대신 단백질 우물만 끝도 없이 파대고 있었는데, 왓슨과 크릭이 결정적으로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게 된 계기는 허쉬와 체이스라는 바이러스학자의 아이디어가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바이러스가 세포속에 유전물질을 집어넣어 세포를 탈취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바이러스의 구성 정보가 DNA와 단백질로만 되어 있는데 그 중 DNA만이 세포에 침투했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를 발표하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 우리는 전혀 근거 없는 낭설만을 가지고 유전적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DNA와 RNA 암호가 풀리자 드디어 미셔의 DNA와 멘델의 이론이 합쳐져 조화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조차 틀린 것이라 무시했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획득형질 이론은 최근에서야 동안 발전한 후성유전학이라는 이론과 만났다. 학문과 학문의 접점. 그것이 진보를 이루게 하는 힘이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과학 

과학의 위대함은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믿음에 근거한 종교가 전체적 이해(라고 믿는 믿음) 속에 부분을 꿰어맞춘다면, 과학은 탐구 속에서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과학계의 이단아 벤터를 주측으로 하는 민간기업 셀러라와 미국국립보건원 컨소시엄이 1980년대부터 2003년까지 삼십년간 수천명의 과학자들이 연관되어 수십억달러의 연구비를 들여 완성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희망과 실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유전체를 판독하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주요 질병을 일으키는 특정 주요 유전자들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인간의 모든 DNA의 모든 염기 서열이 종교가 아니듯,  DNA는 우리를 이루는 화학 물질의 본질일 수 없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건 전체 중 일부,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걸 알아낼 수 있다는 희망일 뿐이다.  중요한 통찰을 쏟아내었지만 해석은 여전히 남은 과학의 몫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겸허함을 배운 그들은 그저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를 처다보는 것만으로 통찰력이 펑 하고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440


사유가 어떤 과학적 팩트에서 출발하고 그 팩트가 이해가능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면 순수하게 무에서 출팔한 사유보다 공감이 크다. 연역적 사고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스토리 기반의 경험적 사유는 흥미에서 이해를 그리고 이해에서 철학을 끌어낸다. 고대로부터 과학과 철학과 음악과 미술과 언어와 문학은 원래 하나였다. 오랜 세기에 걸쳐 종교가 탐욕스럽게 차지했던 자리에 어렵게 부활한 개별 학문과 예술이 전문화라는 갈래길에서 찢어졌지만 가만히 잘 들이다 보면 책을 통해 만나는 개별 영역들 상호간에는 무수히 많은 교차 지점이 있고 그들은 자주 만난다. 그 큰 테피스트리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닥가닥의 실들을 통래 만나는 교차점. 그 짧은 진실과의 조우는 실로 감동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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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7-0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를 알게되면, 두개의 모르는것이 따라오는 법이어서, 알면 알 수록 더 모른는게 많아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과학이 발전할 수록 더 많이 모르게되고,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르는 사람이지요. 아는게 없으면 모르는 것도 없지요. 그래서 하룻 강아지는 범무서운줄 모른다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이 DNA에 대하여 알았다고해도..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늘어났을 뿐이지요.. 좀 더 현명해지기는 했겠지요..

CREBBP 2014-07-03 16:50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조금 알면 알수록 더욱 알고 싶어지는 게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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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단순히 저주받은 기억력을 보완하는 차원의 기록에서부터였지만,  글을 쓰는 일은 가끔 공적인 영역과 만난다. 꼼꼼히 읽어주는 이웃도 있고, 우연히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다니다가 읽게 되는 익명의 네티즌도 있다. 이런 책을 집어 들었다고 하면, 오탈자와 비문이나 한 번 더 손보지라고 비웃을 사람도 있다. 어쨌든 막연히 이제는 좀 제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생기자, 글쓰기가 어렵게 느껴졌다. 잘쓰려니 잘 안된다. 대충쓴다고 잘되는 건 아니다. 뭘하든 시간을 투자하면 투자한 것 만큼은 성과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공들인 시간만큼 늘지 않는게 글쓰기다. 인터넷 글쓰기는 글이라기 보다는 말에 가깝다는 저자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책에 대한 기록이니만큼 책의 상징성을 훼손하지는 않는 차원의 글쓰기를 위해 답보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발상에서 글쓰기 관련 책들을 침대 옆에 쌓아두었다. <고종석의 문장>도 그 중 하나다. 강연 예약을 개시하자마자 순식간에 마감된 숭실대 강연을 그대로 녹취해서 인쇄한 책이다. 붓끝이 아닌 혀끝에서 나온 문장인데도 탈고를 거듭해서 잘 편집된 책처럼 문장이 유려하다. 문어체가 친근하게 느꺼진다. 글쓰기 강연인데 재미있는 읽을 거리와 인문학적 성찰이 넘쳐난다.

 

 

1. 글을 왜 쓸까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은 글쓰는 동기를 네 가지로 정의했다. 작가는 첫 장에서 오웰의 글쓰기 동기 네 가지를 이렇게  소개한다. 첫번째 동기는 이기심. 돋보이고 싶은 욕망이다. 두번째는 미학적 열정이다. 어떤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그것에 대해 글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다. 여기에는 언어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도 포함된다. 황현상의 산문이나 에밀 시오랑의 에세이는 형태적으로나 혹은 견고함에 있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글들을 쓰는  사람들은 언어를 조탁하면서 미적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역사저 충동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욕망을 뜻한다.  마지막은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이다. 이것은 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오웰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걸 감수하면서도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미학적 열정을 버린 사례를 당시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함께 감명깊게 강의한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 되어 있었던 때였다. 조지오웰 <나는 왜 쓰는가> 더블 인용 25

오웰 자신은 천성적으로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오웰이 살았던 시대가 양심적 예술가에게 정치적 목적을 지닌 글을 강제했기 때문이라고 고정속은 결론내린다.  비슷한 예로 지금은 이상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시인 김지하의 예를 들었다. 김지하 역시 등단 당시 전형적인 서정 시인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을 겪으면서 시대에 흡수되어 정치시인이 될 수밗에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 자신의 저서이자 강의의 교정 교제로 사용한  <자유의  무늬> 역시 세상사람들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꾸려는 욕망 때문에 쓴 글임을 고백한다.

 

나의 글쓰기는 오웰의 정의에 해당되는 게 없는 것 같지만, 굳이 따진다면 세번째 목적, 기록에 가까운 것 같다. 사실을 기록하기 보다는 책에 대한 감상과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처음 시작할 때의 목적에 가까왔다. 최소한 읽었는지 안읽었는지 정도는 기록할 목적이었는데, 좋은 책을 많이 접하다 보니, 읽은 내용과 책을 통해 얻게 된 성찰과 사유가 휘발되어 버리기 전에 내 글 속에 내 언어로 가두어 놓을 작정이었다. 왜 쓰는지, 어떻게 쓸 것인지, 계속 쓸 것인지는 더 생각해보아야 할 듯하다. 어떤 이유가 되든, 또 어떤 국면으로 글쓰기 작업이 전환되든 이쯤 해서, 글쓰는 것에 대한 제대로된 기반 지식을 확보해 두어야 하겠다.  

 

2.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계속 써야 한다. 필사는 도움이 안된다. 좋은 글을 많이 읽는다.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인상적으로 쓴다(세계를 매혹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서문 첫 문장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처럼 인상적인 첫 문장이 중요하다). 한국어답게 쓴다. 외국어 번역체를 흉내내지 않는다. 문장을 간결하고 기품있게 유지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자신의 글 <자유의 무늬>를 교재로 나쁜 문장을 좋은 문장으로 고쳐가면서 이론과 실제를 병행한 수업이 이어진다. 글(강의)의 내용은 글쓰기 자체의 실용적 목적에서 조금 벗어난 얘기도 있다. 그런 부분은 글쓰는 것의 근본 재료인 말, 한국어, 그리고 언어와 문자에 대한 이해와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한국어답게 써라

한국어는 다른 자연언어에 비해 음성상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의성어 의태어가 특히 발달한 언어다 외국어에 의성어는 제법 있어도 의태어는 찾아보기 어렵다. 허우적허우적, 너울너울, 둥실둥실 같이 모양이 연상되는 의태어를 외국어로 어떻게 옮길까. 한국어는 자연언어 가운데 색채 언어가 가장 발달한 언어다. 저자가 사전에서 찾아본 바에 의하면 붉은색에 해당하는 단어만 해도 60개나 가까이 된다. 영어나 불어에서는 고작 두 개다. 따라서 음성 상징과 더불어 색채 어휘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것은 문장을 한국어답게 만든다. 한국어에 의태어 의성어 색채 언어에 관심이 있고 글의 적절한 자리에 사용하면 생동감 넘치는 한국어 문장을 짤 수 있으리라는 것이 고수의 충고다.

 

번역체 느낌이 되는 말을 쓰지 않는다..  '~적''~적인', '~의'는 일본어에서 왔다. 빼도 말이 되면 뺀다. ~에의~로의 같은 겹조하는 절대 쓰지 않는다. '~하고 있는'과 같은 현재 진행형은 번역체 느낌이 나므로 쓰지 않는다. 대과거, 과거완료 ~있었다라는 표현도 쓰지 않는다. 있다로도 충분하다. 수동형태 표현은 되도록 피한다. ~화시키다~하다로 무조건 고친다.

 

단위를 나타내는 불완전 명사는 한국어답지 않은 표현을 쓰지 않는다. '두 개의 구슬''구슬 두 개'가 자연스럽다. 또한 한국어에서 수는 하찮은 문법적 범주다. 복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라면 ~들을 뺀다. 특히 한국어서 들은 주어가 복수이면 문장의 아무데나 갖다 붙여도 된다.  

 

한국어는 격조사가 있기 때문에 성분의 위치를 비교적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이 가'와 '을,를' 붙이면 아무데나 끼워도 주어 목적어가 된다. 주어와 서술어의 사이, 또는 목적어와 서술어의 사이가 가까운 것이 좋다. 문장 성분들이 어디에 걸리는지 명료하지 않으면 뜻을 이해하기 힘들므로 목적어와 동사를 너무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 사이 부사어가 너무 길게 끼면 그 부사어를 앞으로 뺀다.

 

■간결하게 써라

저자는 어떤 조사든, 주격 조사든 목적격 조사든 보조사든 빼도 의미를 흩뜨리지 않는다면 빼라주의이다. 간략함, 간결함이 좋은 문장의 미덕이다 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러니까', '그러나'와 같은 접속 부사를 많이 쓰는 이유는 이걸 넣어야 논리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데 쓰지 않는게 간결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어떤 긴장감이 생긴다. 관형사 '그' 역시 없으면 말이 통할 때에는 뺀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글에서 '개인적으로'는 쓸 데 없는 말이다. '거기에', '여기에'는 부사이므로 거기, 여기로 고친다. '역시도', '아마도'도 '역시', '아마'로 고친다.  '~한 것이다', '~한 일이다', 라는 말은 되도록 안쓴다.  명사 뒤에 붙는 '동안'은 어색하다. '~에 대한'도 구질구질하다고 말한다.

 

'~로서'는 자격을 뜻하고 '~로써'는 수단이나 방법을 뜻한다. 그런데 '~로써'는 무거운 느낌을 준다. '~함으로써'와 같은 말은  제1부사형 '~하여' 로 고친다.

 

■기품을 유지해라

글을 잘 쓰려면 글의 재료가 되는 단어를 많이 알아야 한다.가용 어휘가 모자라면 표현이 풍부해질 수가 없다. 어휘를 늘리는 방법 하나는 사전을 자주 들춰보는 일이다. 유의어 사전, 반의어 사전, 연관어 사전을 이용한다.

 

죽은 사람에게는 '씨'를 붙이지 않는다.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들 뒤에도 '씨'를 안붙인다. 이것은 기자들의 관습이다. 예술비평이나 문학비평일 경우에도 씨를 붙이지 않는다.

 

대립되는 두 소재에 대해 글을 쓸 때는 비슷한 분량으로 균형을 맞춰 글의 짜임새를 준다.

 

문장의 기본 법칙이다.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쓰지 않는다. 비슷한 조언들이 더 있다. '진부함과 상투성에도'처럼 비슷한 말을 거푸 쓰지 않는다. '그렇게 철없게'처럼 끝이 비슷비슷하게 끝나는 말을 반복하지 않는다. 글이 추례해 보인다.

 

긴장감을 유지하여, 문법적으로 틀린 말을 쓰지 않는다. '~하는 이유는 ~ 때문이다.'는 오문이다. '때문이다'와 호응할 수 있는 것은 '왜냐하면'이다. '이유는'을 쓰려면 '이유는 ~에 있다.',' 이유는 ~한다는 사실이다'로 써야 한다.

 

그 밖에도 기품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격앙된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지 않는다. 그 예로 <자유의 무늬> 중 "그래도 지금 이 글을 쓰는 기분도 더럽기 짝이 없다"를 들었다. 이런 글을 쓰셨다니 고종석님 웃기기도 하고 귀여우시다. 영화나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쓸 때에는 주인공과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를 잘 구별해야 한다. 사람 이름을 언급할 때, 익숙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소개를 해줘야 한다. 글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유지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이주노동자로 하는 것처럼 부정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던 말을 버리고 중립적 또는 공정적 뉘앙스를 담은 말을 쓰는 것이 글쓰기의 정치적 올바름이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기 위해 글의 결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자의 융통성이다.

 

3. 많은 사람이 걸으면 길이 되고,

많은 사람이 말하면 표준어가 된다. 저자는 말의 자기 변화에 대해 시종일관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SNS 언어는 사용자들끼리 유대감을 드러내기 위해 그 바깥 세상의 규율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위해 생겨났고 일종의 파롤 역할을 하면서 한국의 진화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한자어와 외래어의 사용에도 저자는 융통성있는 사용을 권하는 주의다. 말은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문법학자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여러 분야의 다양한 말들의 유입이 언어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는 저자의 입장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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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 - 유년의 상처를 끌어안는 치유의 심리학
우르술라 누버 지음, 김하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른들은 스스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때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다. 그러면서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잘 하지 못한다. 오히려 아이는 어른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순응한다. 어리고 무기력하게 때문에 어른들에게 의지하고 어른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무능이 인격이 없다는 것은 아니란 걸 어른들은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부모라고 해서 아이를 소유할 수는 없다. 아이의 영혼은 아이의 것이고, 그것은 앞으로 앞으로 부모의 품을 떠난 후에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 가는데 필요한 자양분을 담고 있어야 한다. 부모가 대신 살아 주지 않을 인생이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가 죽을때까지 살아서, 모든 것을 참견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른은 아이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만 한다.

 

또 하나 아이들이 한꺼번에 많이 뭉쳐 있다고 해서, 그들을 개별적으로 독립된 개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군집명사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여객선에서 하하호호 떠들고 웃고 장난치는 바람에 승무원들에게 조금 시끄럽고 조금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해도 그들이 그런 취급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도 신뢰할 수 없다는 신념 체계는  어린 시절의 폭력, 학대, 정신적 가해, 끊임없는 조롱, 심한 벌 등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신념 체계는 타인을 불신하여 스스로를 외롭게 만든다. 성인의 우유부단함은 어릴적 부모의 과보호에서 기인한다. 부모가 아이의 능력을 개발하고  독립된 존재로서 살 수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자신의 무능력을 방패 삼아 의존적이 되거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된다.

 

관심을 갖지 못한 채 자란 아이는 사랑이나 협력 같은 우호적인 힘이 없다. 어린시절의 정서적 결핍은 공허감을 발생시키고 이로 인해 성인이 되었을 때에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요구와 집착으로 나타낼 수 있다. 어릴때 마땅히 받아야 할 배려, 친절, 존중을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사람은 치명적인 방법으로 그 감정에  익숙해져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한테 중요한 존재가 아니어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함정에 거듭 빠지게 한다.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하고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이 욕구를 누르고 책임을 떠맡고 상대를 위해 헌신한다. 그 결과 분노를 자신에게 돌리고 자기의심, 자기 비난, 우울증, 심신질환에 시달리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뇌과학적으로도 어린 시절의 상처는 각인된다. 어린 시절의 좌절은 감정 조절과 학습 능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변연계의 발달의 부정적 영향을 미쳐 문제해결 능력이나 스트레스 극복을 어렵게 한다.  그 상처는 치유되었다 하더라도 훗날 인생의 어느 시점에 다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캐나다의 과학자 야콥스와 나델에 의하면 어린시절에 느낀 불안함은 저장되고,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의식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겪은 불안감이 의식의 표면 밑에 숨어 있다가 강한 부담감이 통제력을 약화시킬 때 다시 나타난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그 후의 전 학습과정을  조정할 만큼 큰 영향을 미친다고 단언한다. 어린 시절의 스트레스는 생물학적으로도 흉터를 남긴다.  혈중 특정 바이러스 항체가 정상인보다 많아져서 장기적으로 면역 체계를 약화시킨다는 라이프치히의 연구 사례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반대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발달심리학자 로렌스 콜베르크는 한 살 때 겪은 경험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대체로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어린시절의 경험이 향후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이론들. 이젠 상식이 된 사실들.  하지만 안타깝다. 내 지나가버린 어린 시절. 내 아이의 지나가 버린 어린 시절. 내 아이가 어릴 땐 몰랐던 상식들. 설사 알았다고 해도 하루 하루 반복되는 삶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무시되었을지 모를 심리학적 이론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더 잘 해 낼 수 있을까. 하루 하루 너무 빨리 자라, 매일 달라지는 내 아기의 모습을 자다 깨서 들이다 보고 한 순간만 존재했던 그 찰라적 모습들을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와 했던 나의 예쁜 아기에게 나는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까. 앞으로 혼자 살아가게 될 많은 날들. 아이의 삶을 지탱할 반석을 어떤 색깔과 단단함의 구조에 세워 올려  놓았을까. 만일 지금 시간을 되돌린다면 조금 달라질까. 그렇다고 해서 그 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행하는 사람이었나. 더 알았던들 더 잘 했을 보장도 없지만 궁금하다. 아이야 너의 어린 시절은 어땠니. 혹시 너의 미래, 너의 현재, 그리고 너의 행복을 방해할 상처나, 불충족을 가지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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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이란 무엇인가
매슈 드 어베이투어 지음, 김훈 옮김 / 민음인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영국의 경우에도 현재 캠핑은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다는 글을 보니 캠핑이 국내에서만 유독 붐을 타는 것은 아닌가보다. 저자 매슈 드 어베이 투어는 영국인이다. 어른 5명 중에서 한 명은 지난 3년 동안 휴가 때 한 차례의 이상의 캠핑이나 캐러밴차를 이용한 적이 있고 앞으로 그 비율은 7 % 이상 증가할 전망이라고 한다. 물론 캐러밴족이 훨씬 더 많을 것 같긴 하지만 대단한 숫자다.


캠핑이란 무엇인가, 제목은 그렇지만  책의 내용은 제목을 가지고 기대할 수 있는 철학적 혹은 인문학적으로 고찰이나 캠핑에 대한 실용적 지식 전달이 주가 아니다. 이 책은 캠핑 특히, 19C 부터 시작된 캠핑 클럽과 단체의 역사와 기원, 그리고 유래에 치중해서 기술하고 그 내용은 방대하고 세밀하다.  


저자는 캠핑의 역사 오른쪽 길과 왼쪽 길로 나누고 두 길 중에서 왼쪽 길을 선택했다.  왼쪽길이란  보이스카웃 등과 같은 세계 대규모 주류 문화와 맞서는 것들로 19세기말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인류가 잃어버린 대지와의 친화력을 찾아가는 길이다.

 

왼쪽과 오른쪽

 

우리에게는 <동물기>로 더 알려져 있는 작가이자 화가이자 늑대 사냥꾼 어니스트 톰프튼 시턴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퍼져있는 보이스카우트 운동의 실제적인 창안자이면서 그것과는 다른 방향인 왼쪽 길을 걸어간 사람이었다. 스카우트 운동의 공식 창시다  베이든 파월 자신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시턴의 숲살이 프로그램은 캠프파이어가 주는 순화의 힘을 믿은 시턴이 자신의 울타리를 훼손하고 동물들을 죽인 일대의 청소년들을 혼내는 대신 그 아이들을 자신들의 캠프에 초대해 체험시키는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시턴은  당시 사회적 축이었던 종교와 계율을 거부하고 무리짓는 본능이 소년들을 통제하는 힘이 되게 했다. 인디언 정신을 계승하고 자연적인 협동과 협력을  강조하며 인디안 생활방식의 다양한 측면들을 결합한 소년들의 숲살이 운동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자작 나무 껍질 목록>은 그 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쓴 안내서로 해마다 판을 거듭 했다. 책에서 소개하는 캠핑 기법에는 스타크래프트(별과 별자리에 관련된 온갖 지식과 기법), 수화, 동물 발자국 식별 하기,지도 읽기, 삼각측량 법에 의한 지상에서의 자기 위치 밝혀 내기 등의 실용적 지식을 포함한다. 영국의 전쟁 영웅 베이든 파월은 이 프로그램을 그대로 카피하고 그의 책 <자작 나무 껍질 목록>을 표절하고 시턴의 자연친화적인 철학 대신 자신의 종교적, 애국적 가치관을캠프에 반영했다. 시턴의 진보적 이상향과 아메리카 인디안에 대한 숭배라는 요소를 기울어 가는 대영제국 군국주의로 바꾸고 시턴의 자연숭배 범신론을 기독교로 대치해 스카우트 운동을 창시한 것이 대대적으로 성공했고, 이렇게 해서 저자가 얘기하는 캠핑 역사는 주류의 오른쪽길과 부주류의 왼쪽길 두 갈래로 갈라진다. 저자가 들어서는 길이 시턴을 따라 숲 살이 왼쪽 길이고, 거기서 나체주의에서 채식주의에 이르는 페미니즘에서 환경보호 운동에 이르는 20 세기의 진보적  운동들과 만난다. 저자가 이 책에서 탐구하는 길은 시턴을 따라 숲살이 왼쪽 길이고, 거기서 나체주의, 채식주의, 페미니즘, 환경보호 운동에 이르는 20 세기의 진보적  운동들과 만난다.

 

오른쪽 길로 들어서서 베이든 파월을 따라 가면 거기서 캠핑은 자연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국가를 내 세우는데 전력 하면서 군대 스타일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길의 끝에서 우리는 이글스카우트나 미국의 아이콘과 만난다. 이것은 닐 암스트롱, 스티븐 스필버그, 도날드 럼스펠드 같은 이들이 획득한 지 위로 21세기 들어 이 명예 훈장은 미국 문화 전쟁의 당파성의 휘말려 들어가기도 했다 142

 


 

100년이 넘어도 유효한 것들

토머스 히럼 홀딩은 현대 캠핑의 아버지로, 내셔널캠핑클럽을 창설하고 ,1908년에 <캠퍼들을 위한 안내서>를 발간했다. 이 책에서 홀딩은 캠핑이 가지는 이점에 관한 홀딩의 여러 주장과, 매트와 텐트와 옷가지와 요리법 등을 소개한다. 홀딩의 캠핑의 가치는 대략 이렇다.  '캠핑은 우리에게 자주 자립의 정신을 일깨운다. 홀로서기의 새로운 동기를 제공한다. 자기의 잠재력을 드러내 준다. 역경에 처했을 때 인내심을 가르쳐 준다. 더큰 자유를 안겨준다. 마음을 쉬게 해 준다. 기분 전환을 시켜준다. 같은 일도 다른 형태로 반복하면 재창조가 된다. 얻기 힘든 체험을 제공한다. 생각의 고단함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새로운 인간 관계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한동안 가족에게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가족이 그에게서 벗어 날 수 있게 하기도 하고. 야성적이고 순수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한다. 더 좋은 의미의 새로운 개인주의에 눈뜨게 한다. 지리에 관한 지식을 확장시켜 주는 면이 있다. 체력 단련에 도움이 된다.' 백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홀딩이 목록은 여전히 유효하다. 

 

반면 저자가 이 목록에 현대적 가치로  추가한 것들 중 몇개를 가져오면 이런 거다.'많은 돈을 가져가는 것 보다 준비를 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땅이 지닌 분위기를 잘 감지하게 해준다. 비, 진창, 추위, 차가운 땅바닥 같은 것들과 직면하게 만든다. 자신이 무력한 처지에 놓여있지 않고 그렇다고 모든 걸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욕심을 부리면 댓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가정의 안락함을 떨치고 일어나게 해 준다. 더 적은 것들을 갖고서 살아가는 법을 알려 준다.'


더불어 캠핑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덧붙였다. '새벽 3시에 화장실에 가야 한다 밖은 완전히  깜깜한 데다 방광이 터질 것 같은 상태 임에 고집스레 잠을 청하려 들면서 무한정 누워 있는 시간과 직면해야 한다. 더없이 간단한 일들이 고통스러울만큼 복잡하고 많은 시간을 잡아 먹는다. 짐을 풀고 텐트를 치는 일 등이 하루 시간 대부분을 잡아 먹는다. 불에 덴다.  스치는 나무들에 피부가 벗겨진다. 벌레에 물린다.'

 

그렇다. 캠핑을 생생하고 강렬한  체험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긍정적인 면들과 부정적인 면들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캠핑애호가들에게 캠핑은 자유를 뜻한다. 19세기 격한 산업 발전이 오염시킨 대기에 찌든 도시에서 빠져나와 별이 총총한 하늘 밑에서 잠자는 것은 정화와 치유를 의미했다. 그러나 캠핑 여행 기간은 정신적인 고양 상태를 맛볼 수 있는 정도로 족하다. 그보다 더 오래 머무를 경우 생존하기 위한 투쟁이 고상한 묵상의  기회를  날려 버린다.

 

켐핑에 대한 실질적 조언들은 별도의 챕터에 나와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캠핑 클럽의 역사속을 오가는 와중에 언급된다. 새롭게 알게된 사실 하나. 나무밑에 텐트를 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다. 죽은 나뭇가지들이 텐트로 떨어져 속칭 과부메이커라고 한다. 비온 뒤 남아있는 물기가 가지를 타고 텐트 위로 계속 떨어지기도 한다. 나무가지가 꺽ㄱ여 떨어진다는 사실은 그늘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에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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