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렌즈로 세상을 찍다 - 여행하는 사진가 케이채의 사진과 이야기
케이채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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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LR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대한민국은 온국민이 사진작가가 됐다.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최근에야 스마트폰 카메라의 성능이 워낙 좋아지고 사진의 목적이 SNS를 통한 공유와 교감에 있다보니 몇년 전보다는 그 열기가 식은 것도 같지만 아직도 매년 새기종의 바디와 렌즈들이 새로 나오고, 미러리스라는 새로운 종이 등장한 걸 보면 사진찍기 취미에 대한 열기는 여전한 것 같다.


작가 케이채(한국 사람임, 성이 채이고 이름이 K로 시작되는 듯)는 사진을 찍으려면 몸이 고달파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걷는다. 걷고 또 걷고 세상의 끝까지 걷는다. 그리고 그는 기다린다. 하루 종일, 어느 한 순간 포착해야 할 찰라를 위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영원히 사라질 한 순간의 빛과, 색감과, 실루엣이 주는 분위기와, 그 곳의 모습, 느낌을 담기 위해, 그 찰라적 순간을 영원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몸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프레임에 담아 펼쳐놓은 사진의 장소는 아프리카와 남미, 유럽 등 지구 곳곳이지만, 우리가 꿈꾸던 이국적이고 낭만적이거나 거대한 자연이 숨막히게 하는 그런 멋있는 곳이 아니다. 남미의 어느 구석, 아프리카의 어느 섬, 북구의 어느 도시,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일상들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사진에 담긴 작가의 설명을 읽는 만큼 감동도 느낌도 풍부해질 수 있다. 별 의미없이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해 보이는 사진 한 장에 녹아 있는 것들, 작가가 그곳에 도착해서 묵고, 먹으며 카메라를 들어 찰라를 포착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사진에 담겨있는 자신의 생각, 사진 속 사물과 사람 및 동물들과의 교감 과정, 그리고 사진가로서의 철학, 뭐 이런 것들을 함께 읽으니 같은 사진이라도 다르게 보인다. 플리커 같은 사이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대단한 자연 현상을 포착한 것도,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모델들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사진들을 통해, 진정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한 순간을 프레임에 담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노력들, 태도, 그리고 그 과정들을 공유할 뿐이다. 그의 사진에는 진정성이라는 것들이 들어있다. 그는 클리쉐를 피하기 위해, 카메라 셧터의 누름을 극도로 자제한다. 하루 종일 기다려서 한 번의 셧터를 누르고 하나의 사진을 얻는다.

 

 

이것은 내가 얼마 전에 본, 제주도의 사진작가 김영갑의 자서전(및 작품집)에서 본 느낌과 많이 같으면서도 또 많이 다르다.  어떤 찰라를 담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날들을 기다렸다는 점은 같고, 다른 점이라면 김영갑의 사진은 일반인이라면 시도조차, 접근조차 불가능한 신비하고 경이로운 세계를 연출해, 무한한 감동을 준 반면,  케이채는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의 요소들이 빚어내는 어떤 순간 마법적인 조합으로 작은 감동을 줄 때, 1초라도 늦으면 해체될 조합을 순간적으로 잡아냈다는 점이다. 빛이 빚어내는 마법, 순간은 연기처럼 증발되지만,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이국적인 곳으로 여행할 때에나 카메라를 이고 지고 다니면서 아들에게 남편에게 좀 들어달라고 사정사정 해가며 사진을 찍고, 하드 디스크 한 구석에서 고히 잠재우는 나는 이런 고상해 보이는 취미를 가질 자격이 없다. 더 추워지기 전에, 양동시장 뒷골목, 재개발 계획으로 모두가 떠난 낮은 담의 아주 작은 서민 주택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던 그 곳의 마지막 모습을 담으러 카메라를 들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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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데이터가 만드는 세상 - 데이터는 알고 있다
빅토르 마이어 쇤버거 & 케네스 쿠키어 지음, 이지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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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란

빅 데이터의 개념을 소개하기 위해 이 책의 서장은 구글이 성취한 놀라운 독감확산예측 사례를 대뜸 들이댄다. 구글은 독감의 확산을, 특정 지역 어느 주에서 유행할 것이라는 수준까지 예측해냈다. 방법은 계절독감의 확산과 관련해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입력한 5천만 개의 검색어와 질병관리본부의 데이터를 비교, 특정 검색어의 빈도수와 여러 지역의 장기간에 걸친 독감 확산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독감과 97%의 상관성을 갖는 검색어 45개를 찾아냈다. 기존의 모델이 환자 발생 1~2주 후에나 동작했던 것에 비해 이 모델은 실시간 예측이 가능하다. 전체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정보의 방대함에 가려져 있던 세부 사항과 연결점을 찾아내는 일도 가능해졌다.

 

 과학자들이 2003년 처음 인간 게놈을 해독했을 때, 30억개의 염기쌍을 배열하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정도의 DNA는 단일 연구소가 하루 만에 분석할 수 있다. 미국 주식시장에서는 매일 70억주가 거래되는데 그 중 3분의 2는 리스크를 피하고 수익을 예측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게끔 설계된 수학적 모델에 기초한 컴퓨터 알고리즘에 의해 거래된다.

 

빅데이터의 사용 예는 이 책에서 사례로 제시하는 것들만 해도 막연한 상상력 넘어의 세계이다.   국제 금융 이체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 Xoom은 Discover Card의 거래 횟수가 평균치보다 약간 상승하는 것을 감지하여 범죄 조직이 만든 거래를 실시간으로 발견했다. 샘플링으로 조사했다면 감지하지 못했을 패턴을 전체 데이터의 감시 체계 내에서 발견했다. 페어캐스트는 항공권 예약 판매 데이터의 사용권을 얻어, 1년 내내 미국 민간 항공의 거의 모든 노선의 전 항공편 전 좌석 정보에 기초해 미래의 항공 운임을 예측했다. 할인 소매점 타깃은 신용카드나 포인트 카드를 사용한 고객의 구매 패턴을 분석해 임신 예측 점수와 출산 일까지 근사치에 가깝게 맞추어 표적 마케팅에 이용했다.

 

 1920년대에 양자역학이 발견되었고 포괄적이고 완벽한 측정이라는 인류의 꿈은 영원히 산산조각 났다. 지금 속출하는 새로운 많은 상황에서는 부정밀성을 용인하는 것이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 특정일 지 모른다. 허용가능한 오류의 기준을 느슨하게 하면 훨씬 더 많은 데이터를 손에 쥘 수 있다.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컴퓨터가 인간처럼 생각하도록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엄청난 양의 데이터에 수학을 적용해 확률을 추론하려는 노력이다.

 

인과성은 필요없다.  중요한 건 상관성

이제까지 우리는 작은 규모의 샘플 데이터의 틀 안에서 모든 현상의 인과성을 설명하는 과학적 사고 방식에 의존하여 살아왔는데, 이제 막 펼쳐지기 시작한 빅 데이터 시대는 우리가 사는 방식,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에 도전한다는 것이 저자 빅토르 마이어 쉼버거와 케네스 쿠키어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핵심적인 철학이다. 인과성에 대한 집착을 일부 포기하고 단순한 상관성에 만족하는 일은 수백 년간 이어져온 관행을 뒤집는 일이며 의사 결정 방식이나 현실에 대한 이해 방식을 흔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샘플링은 정보 부족 시대의 발명품이며 아날로그 시대가 정보를 다룰 때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한계의 산물이지만, 무어의 법칙이 유효한 고성능 대용량 디지털 보급 기술은 낱개 하나하나로서의 데이터를 전체로서의 거대한 데이터로 치환하고, 그 속에서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

 

 구글 번역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 이유는 고품질이 아닌 더 많은 데이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구글이 공개한 1조 단어짜리 말뭉치는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던 콘텐츠를 가져온 야생의 데이터였다. 이것을 trainning set으로 해서 영어 한 단어가 다른 단어 다음에 올 확률을 계산했다.

 

빅데이터의 핵심은 기존의 스몰데이터에서 요구되었던 데이터의 정확성, 행과 열의 반듯함 속데 갇힌 인간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 데이터의 들쑥날쑥함과  불완전함을 허용함으로써,  더 많은 데이터를 예측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오류를 항상 문제 요소로 보고 없애려고 들었으나, 스몰데이터에서 빅데이터로의 이행은 이런 오류가 불가피한 것이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겠다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정밀성에 대한 집착은 정보가 궁핍했던 아날로그 시대의 발명품이다. 데이터가 희박할 때는 모든 데이터가 중요하므로 그 중 하나라도 분석을 망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인간이 수백년동안 개발해 온 각종 분류 체계와 인데스는 언제나 불완전했다. 불편한 도서관 장서 목록 카드가 그것이다. 빅데이터 시대에 분류 체계 대신 등장한 새로운 메커니즘은 태그이다. 태그는 음악, 영상, 이미지 등의 비텍스트 기반의 방대한 콘텐츠를 탐색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태양 아래 모든 게 줄과 열에 딱딱 맞아 들어가는 척하면서 야단 법석인 무균상태라는 거짓말에 대한 해독제이다.   이 세상에는 정확성의 철확으로는 꿈꿀 수 없는 것이 많다.

 

 전체 디지털 데이터 중에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은 단 5퍼센트이다. 데이터의 들쭉날쭉함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95퍼센트의 데이터는 암흑 지대로 남게 된다. 부정확함을 허용한다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통찰들로 가득한 새로운 우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데이터 잔해

그렇다면 무엇이 빅데이터의 소스가 될까. 아직까지 딱히 그 용도를  찾지 못한 버려진 쓸모없는 데이터들까지 미래에 확장 가능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믿고, 수집한다는 것이 빅데이터 회사들의 철학이다.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데이터를 수집하는데 가장 뛰어난 회사는 구글로, 예를 들어 구글의 스트릿뷰 자동차들은 사진뿐 아니라 GPS 데이타를 수집하고 지도 정보를 확인하며 심지어 wifi 네트워크 이름까지 불법적으로 모두 빨아들인다고 한다.  구글 스트릿 뷰 촬영용 차량 한 대가 지나갈 때마다 매순간 갖가지 수 많은 데이터가 축적됐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디지털 흔적인 데이터 잔해, 어디를 클릭하고 한 페이지를 얼마나 오래 보며, 마우스 커서는 어디를 배회하고, 무엇을 타이핑하는 지까지 수거해 재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설계한다는 것이다. 

 

구글의 뛰어난 음성 인식, 스팸필터링, 번역을 비롯한 많은 서비스의 배후에 있는 메카니즘이 데이터 잔해이다. 소비자와 검색엔진 사이에 찰라적 소통이 있고 나면 화면에는 웹사이트를의 목록과 광고가 쫙 나타난다. 전자책 단말기는 이용자의 독서 성향이나 습관에 관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한다.

 

데이터 잔해의 사용 예도 상상을 초월한다. 인터넷 이용자가 쓰고 버린 검색어 데이타를 수집해 실시간 경제지표를 판매하는 구글의 비즈니스 예측 서비스, 데이터가 드나드는 통로의 웹트래픽을 분석해 고객이 소비자 선호도를 서비스하는 히트와이즈, 물건을 배송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수집된 전세계 제품소개에 관한 많은 정보를 이용하여 축적된 데이터를 비즈니스 및 경제 예측이라는 형태로 판매하는 로지스텍스 회사,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거쳐간 자금이체 데이터에 기초해 GDP를 예측하는 세계 은행 간 자금이체 협의체인 SWIFT 등이 그것이다.  지금 위치 사업자들이 판매한 위치정보는 금요일 밤에 사람들이 어디에 모이는지 도로에 차들이 얼마나 천천히 움직이는지 등의 집결된 절보를 이용해 부동산 가치 평가와 게시판 광고의 가격을 정할 수 있다.

 

빅 데이터 시대의 새로운 위험 요소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감시한다. 아마존은 월요일 쇼핑 취향을 고른 월요일 브라우징 습관을 모니터 학교 트위터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고, 페이스북은 사회적 인간 관계 정보까지 수집하고, 이동통신 사업자들은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지 근처에 누가 있는지까지 안다는 저자의 글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 개인당 나라가 정해준 식별 id인 주민등록 번호로 개인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개인 정보의 노출은 미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 시대의 사생활 위협은 빅데이터의 시대에 어떤 변화의 양상을 갖게 될까.

 

저자는 빅데이터가 사생활 보호의 위험 요소 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위험 요소인 '성향에 기초한 불이익'을 탄생시킬 수 있음을 우려한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영화에서처럼 행동하기도 전에 예측을 이용하여 벌을 주는,  공정 정의와 자유 의지라는 개념을 초토화시키는 일이 빅데이터 예측 시스템에 의해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빅데이터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거나 데이터 의미를 착각했을 때 위험은 online 표적 광고 따위와가 비교도 안될만큼 위험한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과거의 통치자들이 어떻게 개인정보를 탄압에 사용해 왔는지 많은 예들을 제시한다.

 

AOL과 넷플릭스의 익명화된 빅데이터 정보 방출이 어떻게 개인 식별에 쉽게 이용될 수 있었는 지의 사례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전기 및 수도 계량기는 개인이 쓴 전기의 양만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매 6초마다 전기 부하의 서명을 측정해 감으로써, 가정의 에너지 사용 습관, 건강 상태, 불법활동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의 정보가 들어 있는 데이터 집합에서는 탈퇴 가 새로운 정보의 가치로 평가될 수 있다. 빅데이터 시대에는 현재까지 우리가 사용해온 사생활 보호 방법들이 전혀 통하지 않는, 문자 그대로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고 보아야 겠다. 우리 생활의 모든 측면에 관한 수많은 개인정보를 우리가 이용하는 모든 회사들이 촉적하고 공유하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정보를 사용한다는 사실. 나보다 더 많이 나에 대한 데이터가 여기저기 구석구석 어딘가에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은 오싹하다.

 

생각보다 빠른 미래에 지금은 순전히 인간의 판단 영역에 속하는 많은 것들이 컴퓨터 시스템에 의해 보강되거나 대체될 것이다.  구글이 나의 선호도와 취향을 분석해 가장 적절한 웹사이트부터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페이스북이 나와 연줄이 닿아 있는 사람을 찾아 나열해주듯, 어쩌면 실제 범죄가 일어나기도 전에 범죄자를 찾아내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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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생활의 비밀 - 그들은 왜 나를 수집하는가?
김주완.이승우.임원기 지음 / 거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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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인의 방은 슈타지(Stasi)라고 알려진 동독의 국가보안부 비밀경찰의 감시를 소재로한 2006년도  독일 영화였다. 슈타지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수십만명의 직원을 고용해, 거의 40년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염탐했다. 내친 김에 영화 얘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비밀경찰 비즐러는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중대 임무를 맡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영화 트루만쇼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획된 쇼 안에 자기의 모든 것을 노출해야 했다면, 두 정보 기관에 의해 두 사람만의 은밀한 대화까지 모두 노출된다. 국가만을 위해 존재하는 냉혈 인간 비즐리는 차츰 그들의 삶에 동화되어 가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그 해 내가 보았던 영화 중 최고의 영화였다. 

 

대한민국 사생활의 비밀, 책의 제목과는 달리 이 책에는 비밀이 없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킬 뿐이다. 예를 들어 추석 날, 으례이 관행처럼 뉴스 헤드라인에, 교통 정체와 고향 소식을 전해주는 것처럼, 우리가 생활 속에서 대하는 수없이 많은 개인정보 침해(?) 사례들을 보고서처럼 정리하여 나열한 것 뿐이다. 

 

옥션이 털렸을 때에도, 네이트가 털렸을 때에도, 현대카드에서부터 여러 은행권의 매우 민감한 개인정보들이 해킹에 마구 털려나가고 있을 때조차도, 우리는 태연했다. 주민등록번호는 동네 만화 대여점 회원 카드를 만들 때조차 으례이 제공하는 개인식별번호이다. 누구나 다 안다. 그리고 주민번호와 이름의 조합이 있으면 신분 조작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지는 거라는 걸. 피해와 침해를 동시에 경험한다. 아이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부모의 주민번호를 이용해 각종 게임 아이템들을 사들이고, 어렵게 모은 게임 머니를 어처구니 없이 털리는 아픈 기억들을 경험하면서 커간다. 엄마들은 신규회원 쿠폰을 적용하기 위해 가족의 주민번호를 이용해 인터넷에 새 아이디를 만들고 쇼핑을 한다. 그것이 일상이다.

 

우리는 안다.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개인식별번호인 주민등록번호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그것에 의해 어느 곳에서나 개인이 식별되고 있는 전세계적으로 전래가 없는 제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단지 무디어지고 무감각해져 있는 것 뿐. 미국의 사회보장제도 번호는 은행, 세무소 등의 몇몇 기관을 제외하고 그 번호를 개인 식별을 위해 요구하는  것 자체가 범죄이다. 지금은 오랜 캠페인 덕에 인터넷 가입시, 주민번호를 묻는 일이 줄어가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이미 무수히 많은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하기 위하여 주민번호와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와 패스워드의 조합을 선택의 여지 없이 제공해주어야 했고, 그것들을 저장해왔던 서버들을 해킹으로 모조리 털렸다. 알려진 것은 일부일 뿐.  둔감한 보안관리 담당자들은 해커가 남기고간 시그내처를 확인도 안한다. 그분이 다녀가셨어도, 보안 담당자의 인사에 득이될 게 없으니 팀 내, 회사 내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일상일 것이라는 것도 훤히 짐작된다. 이미 내 개인정보는 한국의 각종  "선진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전동남아인이 사이좋게 나누어 쓰고 있다. 어느덧 한국의 네티즌들은 이런 나의 개인정보 남용에 대한 안전 불감증을 초월된 자세로 받앋들일 줄 알게 되었다. 

 

그런 마당에, 공공 장소에서의 CCTV,  본인 스스로 더 많은 남들에게 노출하기 위해 공개하는 SNS 콘텐츠들, 구글이나 애플이 수집하는 자신의 행적들, 이런 저런 데이터 잔해들을 모아 온라인 표적광고에 이용되는 빅데이터에 개인정보에 대한 인식을 가질 여유가 없다. 공공 장소에서는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말면 될 것이고, 내 행적을 표적 마케팅에 이용하는 것이 두렵다면 휴대폰의 GPS는 항상 꺼두면 될 것이고, SNS에서는 개인을 드러내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된다. 어렵지만 나름 개인이 주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주민번호를 만능의 개인식별에 이용하는 제도적 헛점은 이미 만연되어 불감증을 불감증으로 느끼지도 못할 만큼 생활의 부분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개인식별번호는 전아시아인과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다. 그게 대한민국 사생활의 현주소이고, 책을 읽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더 이상 비밀이 아니고,  그 언제도 비밀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사생활의 비밀 비밀이어야 할 것들을 합법적으로 노출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에 대한 불감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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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 풀린 뇌 - 우리의 자유의지를 배반하는 쾌감회로의 진실
데이비드 J. 린든 지음, 김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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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연구 분야는 사람의 마음과 심리의 동력이라, 주제가 무궁무진하다. 특히 눈부신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각종 의료장비의 진보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는 무궁무진한 뇌 속에 대한 연구에 보다 가속을 붙여준다. 이 책은 우리가 통제하고자 하지만 마음 대로 통제되지 못하는 부분, 마약, 음식, 도박, 섹스, 운동 등 중독을 불러오는 쾌감을 통재하는 뇌의 작용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다룬다. 


충실하고 친절한(그러나 여전히 어려운) 원리적 설명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전문 서적이 아닌 이상 뇌 기능의 특정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신경생리학적 기초를 일반인이 갖추고 있다는 전제 하에  쓰여진 책도, 그렇다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타협한 책도 아닌, 독자들에게 기어이 이해시키고자 하는 집념으로, 글의 이해에 필수적인 내용을 설명한다.  기술 삽화도 만족스럽다.

 

그래서 휘리릭 빨리 읽어지지 않는 책이다. 그림과 설명 이런 걸 대충 읽고 넘어갔다가는 그 다음장에 펼쳐지는 흥미로운 내용들에 대해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뇌의 각 영역을 지칭하는 명사들은 발음조차도 힘든 한자어의 조합과 복잡한 영어의 약어로 되어 있고, 뇌의 각 부분들에서 분비되는 화학적 상호작용들은 집중을 요구한다. 차에서 읽다가 뒤에서 소근대며 수다떠는 여대생들에게 싱경질 낼 뻔했다. 결국 읽으면서 나는 수도 없는 고뇌와 맞부딪친다. 어려운 말로 명칭화된 뇌의 각 부분 부분들을 정확하게 머리속에 발음하며 기억하며 읽을 것인가, 그냥 대충대충 설렁설렁 볼 것인가. 대충대충 봐도 재미있지만,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는 사실. 그러나 더 재미있기 위해 이해해야 하는 신경과학적인 동작 원리는 결국 쓰지 않던 뇌의 어느 부분을 마구 흔들어 깨워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각 챕터들은 각각, 약물, 섹스, 음식 등 서로 독립된 주제를 다루며, 쾌감회로의 작동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연구 내용 등을 독립적으로 서술하면서도 결국은 모든 중독의 대상, 쾌감의 대상이 되는 주제들이 하나의 일관된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러한 지식의 탐구 과정이 구조적으로 매우 잘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서장에서는 우리가 어떤 경험에 대해 즐겁다고 느낄 때, 이는 시간적 진행이 서로 다른 몇 개의 과정들을 가동시킨다. 1. 즉각적 쾌감을 통해 그 경험을 좋아한다는 2. 광경, 소리, 냄새와 같은 외부의 감각적 단서들과 당시의 생각과 감정과 같은 내적 단서들을 그 경험과 연합한다. 3. 그 즐거운 경험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쾌감은 쾌감회로와 다른 뇌 영역들과의 상호 연결을 통해 기억 연상 감정, 사회적 의미, 장면과 소리와 냄새 등으로 쾌감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때문이며, 쾌감 회로와 맞물려 있는 연합 지각과 감정의 망을 탐구할 것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서장의 주장은 개별 행동의 중독을 소개하는 각각의 챕터에서 다시 자연스럽게 만난다. 


우선 이해해야 할 뇌의 부분은 VTA(복측피개영역)로, VTA 뉴런은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분비를 자극하고 다른 뇌 영역들에도 보내고, 다른 뇌 부위들에서 전기 화학적 정보를 받는다. 우리는 VTA의 도파민 뉴런들을 활성화시켜 그 표적에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경험을 즐겁다고 느낀다. 


그 첫번째로 중독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향정신적 약물이 다양한 문화에서 사용된 역사적 유래를 재미있게 소개하고, 향정신성 약물의 성분들이 인간에게 주는 쾌감과 그 원리를 흥미롭게 파헤친다.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편 중독자임을 암시하는 글들을 남겼고, 아편은 기원전 3천년 메소포타미아에서 나타나, 고대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의료 및 종교적 목적으로 쓰여왔다. 고대 이집트의 의학서에서는 아이들의 수면보조제로 권하며 어머니의 젖꼭지에 바르라고 쓰여있다. 알코올의 확산을 막기 위해 금주 운동이 급물결을 탄 1880년대의 아일랜드는 당시 합법적인 판매가 가능했던 에테르의 흡입이 크게 유행했던 적이 있으며, 페루 아마존의 현지 샤먼들은 아야후스카라는 환각성 약초 음료를 제조하는 비법이 전해진다. 약물의 도취는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성향이 아니고, 새, 코끼리 원숭이 모두 땅에 떨어진 뒤 자연 발효를 거쳐 알코올을 만들어낸 과일과 딸기류를 열심히 찾아다닌다.


이러한 향정신성 물질들은 모두 내측전뇌 쾌감회로 특히, 도최감의 핵심인 VTA의 도파민 뉴런들을 활성화시킨다. 이 도취감의 감각적 경험이 뇌 회로에 기억을 적어 넣고, 기억의 흔적은 뇌 속의 엔돌핀-오피오이드 체계가 통증, 지각, 기분, 기억, 식욕, 소화기관의 진경성 조절 같은 다양한 기능에 밀접하게 관여함을 설명한다. 


데이비드 J 린든은 중독 위험도는 사회문화적 요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는 의견을 모든 장을 통해 한결같이 주장한다.  중독은 학습의 한 형태로, 행동과 쾌감 사이에 강한 연합을 만들어 내며, 중독의 과정은 좋은 느낌에서 시작하여 내성으로 발전하고, 의존성이 높아지면 중독이 심해지고 갈망이 나타나면서 약물이 제공하는 도취감은 점차 미약해진다. 쾌감은 욕구로 바뀌고 좋다는 느낌은 부족하다는 느낌이 된다. 


중독성 약물은 자연의 어떤 보상물보다 더 강하게 쾌감회로를 접수하고 활성화시켜 약물 사용에 관한 기억을 연합망 속에 깊이 새겨 넣는다. 이 기억들은 약물을 연상시키는 외부의 단서들과 내부의 정신 상태들에 의해 강하게 활성화되고 감정 중추들과 연결된다. 


음식 또한 약물과 같이 쾌감회로를 활성화시킬 수 있으며, 비만은 음식 중독에 기인하며, 약물 중독과 생물학적 기초를 공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체중이 빠지면 식욕을 올리고 에너지 소비를 낮추고, 체중이 증가하면 식욕을 낮추고 에너지 소비를 높임으로써 체중 항상성을 유지한다. 체중 항상성을 유지시켜주는 생물학적 현상의 일부는 지방에 의해 생산되는 렙틴 단백질로 설명하는데, 신체 내 지방조직이 늘어나면 렙틴 수치가 상승되고, 반대의 경우 렙틴 수치가 하락한다. 늘어난 렙틴 수치는 섭식을 억제하고 대사와 활동을 증가시키고 반대의 경우 섭식의 증가와 에너지 사용의 감소를 유발시켜 보상성 체중 증가를 가져온다.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선택 압력에 맞서 싸워온 우리의 섭식 항상성 조절 회로들은 살을 뺀 상태를 유지하는 일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스트레스 역시 체중과 관련이 있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설치류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포유동물의 식욕을 자극, 과식을 촉발할 수 있는 반면, 심한 스트레스는 식욕을 억제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섹스의 쾌감을 설명하는 장에서 린든은 뜬금없이 자신이 오래전부터 좋아해온 사랑의 시를 소개한다.


육체적인 관계를 원하지 않음.

단지 내 마음과 섹스할 사람을 원함

-구인광고 <L.A 위클리> (1979년경)


낭만적 사랑의 정신적 생리적 양상은 강렬하고 아찔한 쾌감, 식욕 저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왜곡된 판단과 세계에 대한 왜곡된 판단, 집착, 성적 욕구이며,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방 뿐 아니라 나 자신을 더욱 좋아하게 된다는 그의 의견은  사랑에 빠졌을 때 찾아오는 강렬하고 황홀한 쾌감은 도파민계 쾌감회로, VTA와 그 표적 영역들이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비판 기능이 왜곡되는 이유는 판단 중추의 하나인 전전두피질의 비활성화와 사회인지에 관여하는 두 피질 영역인 측두극과 두정측두 결합부의 비활성화에서 기인한다는 그뇌과학적 설명을 읽으면 더욱 흥미롭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사랑의 매개체인 전전두피질의 비활성화는 망상-충동 장애에서도 확인된다는 것이다. 음하하 사랑은 망상 사랑은 충동 뭐 그것도 말이 된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의 강렬한 초기 단계는 9개월에서 2년까지 지속되고, 그 후에는 대부분 강렬함이 줄어든 사랑의 동반자 형태로 바뀐다는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린든은 오래된 연인들이 낭만적 사랑에 의해 활성화되는 뇌 체계가 성적 흥분에 의해 활성화되는 체계와 분리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쟁한다. 새로운 사랑과 오르가즘 모두 도파민을 사용하는 내측전뇌 쾌감회로를 강하게 활성화시킨 연구결과를 토대로 섹스 중독을 설명한다.  


섹스 중독 역시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의 단계적 과정을 밟으며, 필요한 섹스를 하지 못하면 신체적, 심리적 금단 증상을 느낀다고 한다. 가장 두드러진 양상으로 좋아하는 느낌이 점차 원하는 느낌에 자리를 내준다는 것인데, TV 막장 드라마의 단골 조연으로 등장하는 이상한 여자들도 이런 원리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오르가즘의 여운은 뇌하수체가 시상하부의 명령에 따라 분비하는 옥시토신 호르몬에 의해 강화되는데, 옥시토신이 신뢰에 미치는 영향은 대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위험을 수용하려는 태도의 상승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니, 몸속에서 분비되는 화학적 성분과 뇌의 작용이 인간이 가진 복잡한 가치와 태도를 결정하는 요인임을 하나씩 확인하는 재미는 특별하다. 


감정적 고통은 비유가 아니라는 사실도 뇌과학이 밝혀냈다. 오르가즘을 비롯한 다른 감각과 마찬가지로 통증을 인지하는 뇌의 부위는 통증의 찌름, 차가움 뜨거움과 같은 구체적인 성질에 반응하는  변별적 경로와 감정적 요소로 자각하는 요소의 두 가지 경로로 되어 있는데, 뇌 활성화의 관점에서 감정적 고통은 신체적 고통과 부분적으로 겹친다. 


그의 쾌감 탐구는 운동, 명상이나 요가와 같은 영적 행위, 기부 등의 선행적인 행위에까지 이어진다.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쾌감과 연합 학습의 상호작용은 쾌감 회로에 장기적 변화를 불러오는 경험을 바탕으로 임의적 보상물과 추상적 관념을 즐거운 것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행동과 문화를 탄생시킨 중요한 기초가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그 과정에서 쾌감은 중독으로 변질되기도 한다는 그의 마지막 통찰에 이르면 아 하는 탄성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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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보는 눈 - 손철주의 그림 자랑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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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손철주에 대한 언급을 얼마 전에 읽은 김훈의 수필집 <바다의 기별> 보았던 기억이 난다.  김훈과 같은 신문사에 근무할때 화가 오치균을 취재하러 갔는데, 거기에서 김훈은 미술비평가 손철주와 화가 오치균 두사람의 대화를 잘 포장해 글로 옮겨 적는 일을 했던 모양이다. 김훈은 역시 오치균과 오치균의 그림을 보며 본인이 느낀 것들을 그림 못지 않게 더 감각적이고 사변적인 언어로 묘사한다. 내가 느끼기에, 현재 시점엔 그의 그림은 미술 시장에서 대재벌 투기꾼들에게 점령당한 듯 상상도 할 수 없는 고가이다. 다행히 바다의 기별 뒷면에 몇 점의 그림이 첨부되어 있어 스크린이 아닌 인쇄된 형태의 그림을 만나볼 수 있었다. 김훈이 글에서 표현했던 그만의 느낌을 하나의 그림으로 공유하니 비록 작게 인쇄된 그림이지만 감상의 폭이 풍부해짐을 느꼈다.

 

작년 미국 여행때 많은 미술관을 여행하면서 느낀건데, 미술 책에서만 보았던 유명한 세계적인 화가들의 유명한 컬렉션 앞에서  무엇을 어찌 감상 해야 할 지 모르는 무지랭이가 그저 멀뚱멀뚱 서서 영어로 된 설명과 씨름하는 것은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가이드를 따라 다녀 보기도 했지만 작품 자체 보다는 작품 자체의 상품성과 소장과 구입 배경, 잘해야 작가의 생애나 그림에 따른 일화 정도이고,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려니 제대로된 감상이 힘들었다.


집에도 그림 감상책들은 많이 있지만, 손철주의 신간 소식은 반가왔다. 얼마 전, 해남 윤씨 박물관에서 고산 윤산도와 윤씨 가문의 그림 작품들을 감상할 때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윤두서의 자화상이 실려있고, 저자 손철주 이름을 바다의 기별에서  접한 터였다. 

 


 

 

그림을 설명하는 손철주에 입담은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재치있는 문체와 풍부한 어휘의 사용은 색다른 재미를 준다.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은 깎이는데 / 바람에 만 점 흩날리니 진정 시름겹구나' 시구로이 뭐 더할 나위없이 절창인데 되내어요 보면 어떤가 낫살 든 자의 엄살기가 슬며시 묻어난다. 송나라 무진 왕인섭의 토로는 더 안쓰럽다. 땅을 쓸고 '꽃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건 /그 꽃잎 먼지 묻을까 애처로워서라네 아끼는 마음도 유만부동 이 정도면 속이 간지러워진다.

 

멀쩡한 사내들이 왜 봄날의 꽃 앞에서 앓는 소리를 해댈까. 아무려나 다 봄이 짧은 탓인데 어쩌겠는가 봄은 짧아서 황홀하고 황홀해서 혹 간다. 꽃인들 다르랴 열흘 붉기가 어려울 때 꽃은 서글프게 아름답다. 꽃구경에는 남녀 안 따진다. 그린이는 조선 후기를 살다가 쓰나 남은 인적이 드문 이유 신이다 그는 촉촉한부터래 맑은 색감을 잘 우려낸 화가다 몸은 곧 가고 꽃은 시진다 우짜라고 꽃 향기 나는 친구가 그립다명 서둘러 불러야 한다.

포동춘지 라는 그림과 함께 어울어진 글. 그림과 글이 이렇게 멋들어지게 어울린다면 책도 하나의 예술인 거다.

 

군데군데 약간의 교양(?) 코너도 있다.  동양은 산수화의 세력이 강하고 서양은 인물화의 역사가 길다고 한다. 손철주는 서양의 그림에서 인물은 크고 자연은 작은 반면 동양화는 반대로 자연이 크고 인물이 작은 경향을 '동양은 자연을 받들어 모셨고, 서양은 자연을 데리다 썼다'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수묵에 존재하는 먹색 또는 먹빛이라는 용어를 수묵의 색깔을 예를 들며, 수묵에 있는 여섯 가지의 기본 색 즉,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흑백, 진한 것과 옅은 것을 구분하는 농담,  촉촉한 것과 마른 것의 차이인 윤갈로 구분했다. 빨주노초파남보만이 색깔이 아니며, 흑백과 농담과 윤갈의 마티에르를 정서적 색채로 치환하고 우려낼 줄 아는 민족만이 수묵의 묘미를 알아챈다며 수묵화를 사랑해온 우리 선조들과 수묵화를 동시에 예찬한다. 수묵은 회화에서 채색의 상대적 개념이고, 사물의 거죽보다는 사물의 뜻을 그리는 방법이며, 그 지향성 중 몇 번의 붓질로 대상의 본질을 잡아내는 감필화와 같은 단순과 담백의 경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회화 예술을 민족성의 철학과 연결시킨다.

 

<귀어도>에서는 사이좋은 관계를 넘어 스스로 자연이 된 존재가 보인다. 여기서 정작 놀라운 것은 화푹에 감도는 저 습윤한 기운이다. 물기가 느껴져 축축하고도 미끄러운 감촉 말이다. 어쩌면 저토록 흥건한 먹색이 우러났을까.

 

빗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축축한 귀어도와 갓을 쓰고 낛시대를 어깨에 걸고 비를 맞으며 돌아가는 나그네. 노래 가사 같은 풍경,  손철주의 언어적 변주와 작은 그림이한 장이 주는 감성적 터치에 탄성 나온다.

 

책에 실린 그림은 약 80여개 안팎이고, 대개 18세기에서 19세기에 그려진 작품들이다. 1부와 2부는 인물화, 3부는 풍속화, 4부는 산수화로 대략적인 분류가 되어 있지만, 그림의 종류에 따른 분류라기 보다는 작가의 주제에 따른 분류라고 보여진다. 풍속화 속에 인물이 있고, 산수화 속에 인물이 있고, 인물화 속에 풍경이 있고 서로 서로 딱히 분류할 수 없게 조화를 이룬다. 

 

선조들의 그림에는 그린 이가 전하고자 하는 뜻이 있고, 그 뜻을 알알이 글자로 새겨넣었다.  한자 까막눈인 나에게 그림 속의 한자는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다. 문맹에서 벗어날 생각은 않고, 그저 피할 궁리만 했던 학생시절의 나태함을 평생토록 이고 지고 사는 그림 속의 한자 풀이는 구세주다(아이들에겐 빡치게 공부를 시켜야 한다. 평생 고생할 줄 지들은 아직 모르니까)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행복하다. 복잡한 현실을 잊고, 선조들의 정신 세계속을 유영하듯 그림에 한참동안 빠져있다 나오면, 다시 또 손철주의 입담이 재즈 음악같은 변주로 색다른 풍부한 감상적 세계를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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