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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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규의 소설을 다시 읽으며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생각해 본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갖고 있는 책이 2011년에 인쇄된 것이니까 아마 7~8년 전에 읽었을 것이다. 그 당시 형광펜으로 그었던 문장이 아닌 다른 문장에도 새로운 하이라이트가 그려진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여전히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도 못 하고 뱅뱅 돌고만 있는 느낌이다. 푸시맨 승일을 비롯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박민규의 <<카스테라>>속 단편들은 모두 마른 눈물 같은 이야기다. 흐르다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눈물 혹은 눈물조차 흘릴 시간이 없는 눈물.

 

 

  모두 웃기고 재미있으면서도 슬프고 안쓰럽다. 또 처절하면서도 엉뚱하고 환상적이라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글들이 내일 아침이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저절로 의심이 가기도 한다. 슬퍼도 슬프지 않고 쓸데없이 나아질 것이란 희망에 기대지 않는데 따뜻하고 잔잔하다. 소설이 점점 작아져 사라져버릴 것 같은 존재들에게 말을 걸어준다. 그래서 더욱 눈길이 가고 마음이 아프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가버린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승일은 아버지의 작고 초라한 민모습을 보게 된 날, 더 이상 집안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만의 산수를 해 나가지만 마이너스 된 인생은 좀처럼 플러스 되는 삶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이문열의 <<하늘길>>에 보면 지지리 가난한 청년이 그의 아버지에게 묻는다. “착하고 부지런하게 살면 복을 받을까요?”, “글쎄다. 내가 살아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은 것 같고.”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고 죽자 청년은 답을 찾기 위해 옥황상제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대한민국에는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매우 많다. 승일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푸시맨과 공포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동물 같은 전철을 타고 매일 일터로 가야하는 사람들. 그들은 너무나 열심히 부지런히 산다.

 

 

저 사람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화물이나, 뭐 그런 걸로 생각하라 말이야. 알겠니? 알겠니? 알겠지.에서 다시 열차가 들어왔으므로, 나는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파아, 하아, 의정부 행이었던 두 번째 열차는, 아마도 두 배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이건 마치, 전 인류가 아닌가. (25.p)

 

 

  그 화물 속에 미처 오르지 못한 또 다른 짐짝 같은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다음 차를 기다린다. 다시 튕겨져 나오면 안 되니까. 담담하지면서 물기 없는 마른 문장들이 독자의 마음을 더 사로잡는다. 날마다 목을 죄는 현실의 괴물에게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 우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매일 묻지만 매일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 같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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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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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몇 줄의 문장을 SNS에 올릴 때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예전에 몇 번 좋은 의도를 갖고 올린 글이 나의 생각과 다르게 왜곡되고, 다양한 의견을 나눈다는 것이 기분 나쁘게 마무리된 경험 때문이다. 누군가 함부로 평가를 하면서 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해석들이 등장하고, 거기에 또 다른 지적과 비난이 꼬리를 물면서 글을 남기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가 세게 맞설 수 있거나 끝까지 당당하게 붙들고 갈 힘이 없다면 차라리 표현하지 않는 것이 속편하다고 생각하면서 좋은 이미지나 모티브들을 흘려버리곤 했다. 그때 몇 문장으로 던져진 공격과 무시는 내 마음에 상처와 분노, 자신감 상실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을 심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큼 나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공격받을 수도 있지, 그냥 말도 안 되는 공격성 글이라면 무시하면 되지, 지적을 하면 화를 내기 전에 고칠 것은 고칠 수도 있었는데 능력이 부족했던 나는 피하고 외면하는 제일 쉬운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SNS 안에서 단 한 개의 문장이 불씨를 키우고 그것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도를 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면 더 이상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된다. 그 안에서 극단을 향해 가는 갈등이 벌어지지만 문제를 해결하거나 책임질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힘이 공격을 가하는데 상대는 허상 같고 존재마저 분명치 않다. 결국 상처입고 죽어가는 사람은 먼저 공격당하는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사회에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한 그 대상이 돌고 돌아 불특정다수인 누군가에게 돌아가게 되며, 나는 그런 일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이 산속이나 무인도에 들어가서 사는 자연인이 아닌 이상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끊임없이 2, 3차 피해자가 되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소설가 P씨는 일 년에 평균 한 권꼴로 6년 째 소설만 발표했다. 뛰어난 문체나 섬세한 문장, 개성 있는 구조를 갖춘 작품은 아니지만 첫 작품이 케이블TV의 드라마, 두 번째 작품은 영화, 또 다른 작품이 웹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소위 수익이 유지되는 작가로 굳어졌고, 작가의 책이 꾸준히 제작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소설가 P씨의 작품들은 악평과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사람들의 평가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작가를 대중은 더욱 혹독하게 몰아붙이고 자신들의 지식과 편협한 사고를 비평으로 둔갑시켜 소설가의 작품들을 죽여 나간다.

 

 

……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날카로운 면도날들을 저마다 혀 밑에 숨기거나 손 끝에 꽂고 있어서, 종합 순위 근처에도 가지 못한 이 농구 이야기 역시 서사의 포가 떠지는 걸 피해갈 수 없었다. (36.P)

 

 

  말은(혹은 글) 무섭고 날카롭다. 심장을 찌르는 강도가 매우 높다. 그 말과 문장에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 수 있고, 사회의 힘의 추가 달라질 수 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논술주간 이강희는 끝에 단어 3개만 바꿉시다. ‘볼 수 있다가 아니라 매우 보여진다.”라고 말했다. 같은 의미라도 서술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말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대중의 외면과 지지는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에 눌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나를 포함하여 우리 주변에서는 매일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개개인이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요구되지만,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와 싸우면서 평정심을 갖는 다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소설가 P씨도 자신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을 것을 예감한다.

 

 

서점 매대에서 책이 내려가고 얼마 뒤 그의 계정은 삭제되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보여준 이야기의 임팩트가 그리 크지 않았으므로 그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거나 그걸 두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출판사 계정에 문의를 넣지 않았고, 출판사가 P씨의 근황을 꿸 만큼 그에게 공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나, 어쩐지 P씨는 소설가로서 소설가의 삶을 종료하고 자신의 일상이나 취미에 조용히 스며들었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봐도 부족한 말들의 숲을 어설피 배회하는 자가 될 것이며, 어디서도 그의 발자국을 다시 발견하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이. (38.p)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부터 부주의하게 누군가의 가슴에 말과 문장으로 비수를 꽂았을지 모른다. 어설픈 지식과 생각을 멋지게 뽐내면서 다른 이들의 말의 세계를 황폐하게 했을 수도 있다. 쉽게 놀린 손가락과 입술이 돌아 돌아서 내게 온다고 생각하니 등에 땀이 난다. 그러나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 앞으로도 내 자신의 마음을 경계하며 계속 읽고 쓸 뿐이다. 다만 다른 이의 작품을 읽고 평해야 하는 글이라면 그 글을 쓴 사람이 고민했을 시간과 노력을 생각할 것이다. 창작에 임하게 될 때는 온전한 와 글쓴이로서의 에 대한 평가에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사랑할 것이다. 수고했다고. 또 쓰면 된다고 말이다. 글은 글이고, 나는 나일뿐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에 모든 이들은 작가이고, 독자이자 비평가라는 것을 잊지 말자고.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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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그리고 엄마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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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해주고 상처를 치유하며, 과거에서 현재, 미래를 지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수많은 장벽들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먹고 큰다. 사랑은 힘이 세다. 산부인과 의사나 전문적 지식이 출중한 학자보다 출산과 육아에 무지하고 경험이 없던 엄마가 아이를 더 잘 키우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이 빠진 인생은 삭막하고 건조하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작품을 통해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답했나 보다.

 

 

사랑은 사람을 치유한다. 치유하고 해방시킨다. 내가 여기에서 말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감정적인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들을 그 자리에 있게 하고 혈액이 우리 몸속 혈관을 타고 질서정연하게 흐르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을 의미한다.

- <프롤로그>중에서-

 

 

  자신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마음을 다해 사랑해 준 사람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랑을 몸과 마음에 축적한 사람은 망가지지 않는다. 아니 망가졌다가도 다시 일어나거나 힘들어도 삶을 쉽게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나또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딸만 넷이었지만 부모님은 아들타령을 하거나 여자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한 존재로서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과 부모님께 받은 사랑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엄마는 우리 네 자매에게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보낸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 자매는 중·고등학교 시절 엄마가 싸다준 도시락을 평생 잊지 못 한다.

 

 

  큰언니를 제외한 우리는 세 살, 두 살 터울이기 때문에 2~3년 간격으로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녔다. 엄마는 세 딸이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3~5개의 도시락을 싸서 4교시가 끝날 때 쯤 되는 시간에 맞춰 경비실에 갖다 놓았다. 당시 고등학교 등교 시간이 710분이었고, 야간 자율학습은 밤 10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나는 짜증을 내거나 잠에 취해 아침밥을 먹고 그대로 학교에 갔다. 그리고 4교시가 끝나자마자 경비실에 가서 경비아저씨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엄마가 놓고 간 도시락을 찾아와 맛있게 먹었다. 도시락 가방을 열면 편지가 아닌 천 원짜리 지폐 2장도 함께 들어 있었다. 급식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6년 동안 김이 올라오고 있는 점심 도시락을 먹고 공부를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정신적인 허기에 시달린다는 말을 깊이 이해하지 못 한다. 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고 힘들어도 견뎌나간다. 물리적 어려움을 겪거나 경제적으로 힘들어져도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금방 좋아질 거라고 낙관하는 편이다.

 

 

이사하던 날, 어머니는 자신이 내 편이라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나를 해방시켰다. 나는 자라면서 어머니와 점점 가까워졌다는 것을,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해방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내가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으로 간주됐을 사회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나를 삶으로 해방시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인생의 옷자락을 붙들고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살고 있다. “이봐, 내가 옆에 있어.” (103.p)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지난 삶을 솔직하면서도 당당하게 고백한다. 백인이 마을에 하나뿐인 포장도로를 걸어갈 때면 어느 흑인이라도 옆으로 비켜 도랑으로 가야 할 만큼 인종차별이 심한 시대에 부모에게 버림받고 친할머니 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또 일곱 살 때는 성폭력을 당했으며, 다시 엄마에게 돌아갔을 때 그녀를 엄마가 아닌 레이디라고 부르는 것이 더 편했던 것까지. 그뿐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호기심으로 성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여 미혼모가 되었던 것과 심각한 데이트 폭력에 시달려 죽을 뻔 했던 일도 서술한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그림자 취급을 받았던 것과 자신의 정체성을 영영 잃어버릴까봐 백인 남편과 이혼한 이야기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그때마다 이봐, 내가 옆에 있어.”, “역시 내 딸이네. 하라는 대로 하면 쓰나. 너 스스로 결정해야지.”라고 말해 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엄마 비비언 백스터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와 시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단단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의 삶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거나 흔들려도 뽑히지 않는다. 그러나 마야 안젤루와 그녀의 엄마, 그리고 나의 엄마를 통해 깨달은 것은 사랑받은 것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이다. 바로 받은 사랑에 대한 책임이다. 받은 사랑을 나만 갖고 나눠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을 베푼 사람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면 거짓 사랑을 받은 것이나. 진짜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향해 흐르게 되어 있다. 마야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그렇게 했고, 미약하지만 나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힘까지 세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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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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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셀로나의 골목을 거닐고 있을 때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일요일 아침과 수요일 오후, 온 동네로 울려 퍼졌던 교회 종소리. 그 소리가 나면 교인들은 동네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던 교회로 모여왔다. 특히 수요일 오후, 부동산을 운영하던 친구 엄마도 겉옷을 챙겨 입고 교회로 갔고, 한의원과 내과를 운영하던 원장도 가운을 벗고 교회로 갔다. 서울 한복판에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파란색 성경책을 들고 친구들과 교회로 몰려가기도 했었다. 청각이 어린 시절을 소환한 사실에 놀랐다. 소설도 그럴 것이다. 더 이상 종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 언제부터인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종은 울리지 못하게 되었고, 차츰 내 머릿속에서도 잊혀갔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외국의 낯선 도시를 여행하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저절로 떠오른 것은 종소리가 울리던 그때의 동네 모습과 사람들, 재미있게 읽었던 어린이 잡지와 만화책 등등 이었다. 사람 안에 축적되어 있는 수많은 감각과 추억은 어느 정도일까. 그것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앨리스 먼로의 <거지 소녀>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때, 선생님 몰래 친구들과 돌려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 지금 생각해 보면 표지를 벗긴 영어 사전만한 작고 얇은 로맨스 소설을 교과서 사이에 두고 반 친구들과 돌려 읽었던 그 짜릿했던 순간에 어린 소녀들이었던 우리 마음속에 로즈와 같은 상상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거지 소녀가 품은 당당함과 무지에 가까운 자신감은 규율과 형식 속에서 살아온 왕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젊음과 힘으로 얼마든지 거대한 존재를 상대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저마다 모습만 달리 한 채 각자의 가슴에 자리했다. 처음에는 그 마음으로 로즈를 따라갔다. 가난하지만 성적이 우수하여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강한 자존심때문에 습관적으로 순종이 몸에 밴 다른 가난한 장학생 그룹에 끼지 않으려는 로즈.

 

 

 그런 자신을 좋아해 주는 패트릭이 백화점을 운영하는 부잣집 아들인데다 주변 여자들과 고향 사람들까지 자신을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있다는 마음에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하게 된다.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속 왕은 소녀의 어떤 모습에 이끌려 왕관을 버리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패트릭은 로즈의 무엇에 이끌리어 그녀를 사랑하고 삶을 바꾸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고 결정한 일에 절대적 자신감을 드러낸다. 나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선택한 그와 무언가가 그것을 보상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앨리스 먼로의 간결하면서도 세밀한 문장과 섬세한 묘사, 독자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 있는 심리와 서사는 쉽게 다가가 갔다가 그 자리에서 가슴을 건드리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인생은 내가 결정한 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때로는 이유도 조짐도 없이 행복이, 행복의 가능성이 나타나 그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는 의미다. 그런 때 그들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외피를 두른 것 같았고, 눈부시게 상냥하고 순결한 로즈와 패트릭이 각자의 평상시 자아의 그림자 속에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 그에게서 자유로워진 상태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열람석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녀가 본 사람은 바로 그 패트릭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 그를 내비뒀어야 했다.

178.p <거지 소녀> 중에서.

 

 

 눈앞에 정확한 그림이 그려져 있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바라볼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은 길이라고 해도, 혹은 내 힘으로 얼마든지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한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도 달려가 부딪쳐봐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로즈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눈앞에 파도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파도 속으로 달려가 온몸이 흠뻑 젖도록 파도를 타는 사람이 있는데 로즈는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만들어 낸 인생 속에서 얼마 정도는 그런 로즈 같은 삶을 지나온 사람이기도하다.

 

 

  앨리스 먼로의 거지 소녀속에 나오는 <장엄한 매질>부터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까지 작품들 한 편 한 편이 완성도 높은 단편이면서도 로즈와 그 주변의 사람들과의 삶을 한 올 한 올 촘촘하게 짜내어 삶이란 연작으로 만들어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내고 견뎌가는 가운데 인생이란 긴 시간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그 속에서 로즈와 우리는 돌아가면 다시는 하지 않을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들을 벌이기도 했고, 무모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통해 삶을 뒤죽박죽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모두 우리가 했고 그래서 힘들었지만 그로 인해 조금씩 인생에 연연해하지 않게 되었던 순간들. 때로는 서글프고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금.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앨리스의 소설이 참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인간과 삶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문학이 주는 위로고 힘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미스 해티가 로즈에게 했던 질문을 계속해서 곱씹는다.

 

 

네가 시를 잘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 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이 로즈에게 평생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전에도 단조로운 징소리처럼 자주 귓전을 울리던 말이었기에 그녀는 그 말에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제야 미스 해티가 가학적인 선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353.p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중에서

 

 

  좋은 질문이다. 다만 좋은 대답을 찾기에 오래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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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 - 제9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2
황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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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치고 한 번에 읽어버린 4시간 동안, 나는 잊고 있었던 청소년 시절의 내 모습과 마주했다. 그냥 과거의 학창 시절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앞에서 나와 내 친구들이 생생하게 움직이고 말을 했다. 나도 다현이처럼 무리 속에 있기도 하고, 혼자이기도 했으며, 내 마음을 감추고 친구들과의 공통 화제에 맞춰 이야기 나누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느라 피곤해 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빠지지 않고 참여했던 생일모임이나 감정의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는 친구와 이유 없이 멀어지기도 했고, 서로 모함을 주고받으며, 한 순간 이상한 아이가 되기도 했던 우리들. 시간이 지나 지금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빛났던 시절이라고 이야기 하며 되돌아보지만, 그 안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시와 친구관계 때문에 속을 앓으며 나름 처절하게 버티고 서 있는 우리들이 있었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또래 집단에 끼지 못한 사람은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린다. 무리에 끼지 못했다는 것은 낙오자와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도 자신의 아픔을 숨기기 위해 다른 친구를 아프게 해야 했던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어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노은유는 왜 미운털이 박혔을까? 하긴 그게 뭐 중요한가. 그냥 싫은 사람도 있는 거지. 어쨌든 내 친구들이 너무너무 싫어하는 아이랑 내가 짝이 되었다. 환장하시겠다          14.p

 

원래 그렇다. 누구 한 명이 그 애 좀 이상하지 않아?’ 이렇게 씨앗을 뿌리면, 다른 친구들은 이상하지. 완전 이상해.’라며 싹을 틔운다. 그다음부터 나무는 알아서 자란다. ‘좀 이상한 그 애로 찍혔던 아이는 나중에 어마어마한 이미지의 괴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52.p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싫어하니 분명히 무슨 문제가 있거나 나쁜 사람일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타인에게 감정의 폭력을 휘둘렀던 때가 있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나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각자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감싸 안고 성장하는 친구들을 보며 공감할 수 있어서 기뻤다.

 

 

  한때 왕따의 경험을 겪었던 다현이는 예전의 외로웠던 시절로 절대 돌아가기 싫어한다. 그래서 아람이가 싫어하고, 뒤를 이어 다섯 손가락 친구들이 싫어하게 된 은유를 무작정 미워하며 가까워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카톡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너무 좋기 때문이다. 이제는 외톨이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 친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청소년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 친구들의 무리가 그들의 세계이고, 그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소속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무서울 것이 없는 때이기도 하다.

 

 

매일이 축제 같았다. 우리 다섯이 뭉쳐 다니니 함부로 나를 대하는 아이가 없었다. …… 등교할 때 영혼을 집에 두고 나온 거라고. 이렇게 소중한 친구들을 다시 잃을 순 없다고.

그런데 순둥이로 살기로 작정하니 다른 문제가 생겼다. 아무래도 어떤 사람들한텐 내가 만만해 보이는 것 같다.

…… 어른들은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는 성적이 바닥이거나 지독하게 가난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른들의 그 단단한 오해를 깨뜨릴 자신이 없고, 무시당하기도 싫다. …… 33.p

 

  다현이는 친구들 안에서 안정을 찾고 행복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서서 버틸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그것은 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란 존재를 내 자신이 다독이고 홀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시간 앞에 홀로 서서 견뎌본 사람은 그만큼 성장하고 강해진다. 그 힘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고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게 만든다. 다현이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체리새우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것이나 은유가 영화를 좋아하여 다른 사람들이 침범할 수 없는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처럼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많이 아프고 힘들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다섯 손가락 안에서 포지션을 잃고 설아와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다현이가 대견스러웠다. 이제 서서히 혼자 서는 연습을 하며 조금씩 강해지는 다현이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나무들처럼 혼자야. 좋은 친구라면 서로에게 햇살이 되어 주고 바람이 되어 주면 돼. 독립된 나무로 잘 자라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 그러다 보면 과제할 때 너희처럼 좋은 친구도 만나고, 봉사활동이나 마을 밥집 가면 거기서도 멋진 친구들을 만나. 그럼 됐지 뭐.” 156.p

 

 

  은유의 말처럼 아픔을 딛고 조금씩 강해진 다현이가 다른 친구들에게 햇살과 바람이 되어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나도 우리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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