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권김현영>

 

 질문에는 나쁜 질문과 좋은 질문, 쉬운 질문과 어려운 질문이 있다. 나쁜 질문은 사실 대부분 질문이라기보다는 주장에 가깝다. "왜 그때 가만히 있었니?" 같은 질문은 사실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네가 문제다"라는 주장이다. 이런 질문들은 적대적 대립 구조를 만들어 내고 개연성에 불과한 것을 인과관계로 묶는다. " 왜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같은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편향된 명제에 적합한 사례를 애써 떠올리게 된다. 질문 자체에 이미 편견이 숨어 있다. (...)이 질문은 어떤 여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서로 적개심을 가지게 되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자들 간의 차이 자체를 갈등으로 만든다. 반면 어떤 순간에 어떤 여자들이 서로 적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이들이 각기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 상황에서 서로를 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연대하기 위해 어떻게 서로의 차이를 견디고 각자의 위치에 개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다. p34-5

 

 여성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언제나 듣는 질문 중 하나는 군대문제이다. 남학생들은 여성학 수업시간에 "왜 남자만 군대를 가냐?"고 종종 묻는다. "왜 군대를 가냐"는 질문은 굉장히 중요하다. 현재 한국의 강제 징집제도는 병역 비리부터 양심적 병역 거부, 군대 내 다양한 인권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이는 모두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로서 논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왜 남자만 군대를 가냐"는 질문은 좀 이상하다. 정작 여성 징병제 관련 논의가 본격화되었던 2005년, 여자들은 "갈 수 있다면 가겠다"고 찬성한 반면 남자들은 반대했다. 징집의 주체인 국방부는 여성 징병은 고려해 본 적 없다며 논외로 일축했다. 하지만 왜 남자만 군대를 가야 하냐는 일부 남성 단체들의 항의가 국방부에 겨눠지지는 않았다. 누구에게 질문이 던져지는지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비슷한 다른 질문을 예로 들어 보자, "왜 여학생 휴게실만 있나요? 이 질문 뒤에는 보통 "왜 여학생들을 위해서 학교가 특별히 공간을 만들었죠? 이건 부당한 역차별이에요"라는 주장이 뒤따르면 여학생 휴게실을 없애자는 요구로 귀결된다. 만약 이 질문이 정말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왜 여학생 휴게실만 있나요? 언제부터 생긴 거죠? 여학생들은 다른 휴게 공간에서 어떤 불편함을 겪고 있나요?"라는 질문이 뒤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질뭉이 이어지는 건 듣지 못했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위해 질문이라는 형식을 차용하는 사람들은 결국 질문하는 능력을 읽어버린다.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함께 사는 법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p40-1

 

 그렇다고 내가 페미니즘을 엄청 사랑하느냐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정답 없는 질문들의 무게에 스스로 짓눌릴 때는 공부를 그만두고 싶기도 하고, 가장 오래된 문제에 도전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늘 새로워져야한다는 강박을 느끼기도 한다. 경전이 있지 없기 때문에 늘 읽고 있는 책과 저자의 권위를 의심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뭐 하나 외워서 얻을 수 있는 쉬운 지식이 없는 피곤한(?) 학문이기도 하다.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학문들 간의 벽을 세워서 서로 대화할수 없게 하는 기존 학문 체계에 대한 비판이론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모든 벽을 허물어 필요한 지식과 경험들을 조합해 낼 수 있도록  열려 있는 학문이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헤메고 있는 기분이 들 때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십 년전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공부할지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마 다시 페미니즘 연구를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공부할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라 공부할 게  너무 많기 때문에 괴로운 거라면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버릴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는 여성이라는 이름의 역설, 그리고 그것이 주는 긴장 속에서 현실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것 그것이 페미니즘이 내게 알려 준 길이다. p43-4

 

 

<할머니들/손희정>

 나는 그 시간들의 중첩을 나의 "각성의 순간' 혹은 '페미니스트 모먼트'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극적으로 변해 가는 시간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시간들. "정말?왜?" 라고 말하게 되는 바로 그 시간들. 페미니스트로서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조건들에 대해 인식한다는것, 그러니까 계급과 연령, 신체적 조건 , 민족, 성적 지향 등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인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로서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보편'이라는 것이 기실은 다양한 차이의 배제와 몰살로부터 비롯된 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p52-3

 

 

<세계와의 불화, 피부의 연대/나영정>

 '더러움'과 '오염'이라는 표현은 타자들을 혐오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내뱉는 말이기도 하지만 요즘 나는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이러한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같이 가져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누가, 어떤 행위가, 무슨 관계들이 더러움과 오염의 자리에 할당되는지 따져 묻지 않는다면,'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고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이 지배질서를 유지시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혹은 혐오하는 사람들이 권력이 많아서 그러하다는 근거로 단순히 권력의 문제로 치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p103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2007년 「차별금지법」제정이 추진되던 시점부터 조직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과 차별 선동, 그리고 여기에 굴복하는 정치인, 공무원들을 보면서 성소수자가 지금 어떤 대우를 받는 것인지 너무나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반성소수자 단체 및 보수 개신교는 성소수자를 2등시민이자 異등시민으로 천명했고, '모든'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차별금지법」으로 보호받아서는 안 될 특별히 문제적인 존재, 사회질서를 무너뜨는 위험한 존재, 공식적인 법과 제도에서 언급해서는 안 될 더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정치인과 공무원은 '빨갱이'혹은'간첩'과 같은 수준으로 성소수자를 비시민으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확신하지도 못했다. 확실한 것은 성소수자라는 존재가 공적으로 불려 나오지 않기를 , 자신의 업무와 관계되지 않기르 원했고, 호명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시민임을 부인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2013년 당시 민주통합단 내 유력한 정치인인 김한길, 최원식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가 '종북게이'라는 비난을 받고 법안을 철회했던 때였다. 「차별금지법」으로 상징되는 성소수자는 소위 민주세력에 부담을 주는 존재였다. 이 철회 결정은 성소수자는 '민주','87년 체제','486' 에 포함될 수 없다는 확인이었다. 따라서 이 상황은 단지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이르는 퇴행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만주주의의 근본적인 한계와 구멍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p107

 

 페미니스트 관점으로 전쟁·국가·군사주의를 비판할 수 있게 되면서 자주국방·민족자주를 내세웠던 학생 운동의 경험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었고, 전쟁과 평화라는 시공간적 이분법이 폭력을 정당화 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시에 정당화되는 폭력과 착취는 권력을 독점한 이들의 자신의 해악을 정당화하며 전시와 평화시를 구분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전시에 벌어지는 성적 폭력과 착취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소위 평화로운 시기에 벌어지는 비가시화된 폭력과 착취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전시와 평화시에 대한 이분법이 가리는 폭력과 착취의 문제들을 인식함으로써 폭력 수단을 독점하는 국가의 적법성과 그것을 넘어서는 인권의 가능성을 질문할수 있었다. 근대 국민국가 민주주의 체제와 근본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소수자의 위치에 대한 감각을 자지게 되었다. p110

 

 성소수자 단체와 여성 단체들이 여성가족부에 대한 항의 활동을 함께 하면서 , 여성 운동은 여성 정책, 성평등 정책이 현재 어디에 놓여있는가, 여성 정책이 제도화되면서 강조되어왔던 여성 정책 거버넌스는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 또한 성소수자 운동은 성의 개념이 어떻게 법에 기입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직면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법제도의 한계들은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의 한계와 닮아 있다. 성을 분석 범주로서 섹스-젠더-섹슈얼리티로 나누었지만 섹스는 여전히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고, 젠더는 남성과 여성의 불평들을 지적하기 위한 언어로, 섹슈얼리티는 그저 성적인 것, 심지어 동성애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리고 있다는 점이 이번 「양성평등기본법」논란의 과정에서 드러났다. "아직은 법이 섹슈얼리티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말은 "동성애는 시기상조"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성을 분석하기 위해서 나눈 개념이 어떤 집단에게 할당되고, 권리의 제한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것을 확인하게 된 이상,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구체적인 '법'을 통해서 다시 마주치게 된 마당에 , 퀴어 정치와 페미니즘이 계속 갱신하도록 서로 추동할 수밖에,p 123

 

 누군가가 사랑받을 권리, 성적 매력을 가질 권리는 중장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지만, 그러한 속성이 권리를 확보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이러한 권리 박탈은 특정한 이들의 성적 재현을 금지하도록 만들었따. 예컨대 장애인, 노인, 노숙인 등은 성적으로 재현되지 않는다. 또한 주류 미디어에서는 젠더 규범을 따르지 않는 신체나 관계, 종성 간의 성적 재현을 당사자의 목소리를 지우고 범죄화된 방식으로만 재현한다. 재현을 금지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타자성을 유지하는 데 매우 핵심적이 역할을 한다. 더러움과 역겨움과 같은 감정들은 신체적인 반응이긴 하지만 선험적으로 신체에 코드화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각적·촉각적·후각적 스킨십의 기회를 차단당한 이들, 특정한 방식으로만 재현되는 이들과 관계 맺기 위해서는 피부를 맞대는 것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다. 이것이 소수자의 시미권을 확보하는 방식과 연결되고, 개별적인 신체들이 반응하는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는 출말이라고 생각한다. p129

 

 마지막으로 '활동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이글에 서술된 내용들은 약 20여 년간 대학의 끄트머리에서 시작해서 대학원생으로 살았던 몇 년간을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전업할동가로 지냈기 때문에 만나고 만들고, 쓸 수 있었던 것들이었더. 많은 친구들이, 회원들이, 대중들이 나를 비롯한 전업활동가들에게 '고맙다','훌륭하다'고 진심으로 말해 준다. 이 민망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대답은 여러 가지다. '나도 나름의 직업윤리르 가진 생활인일 뿐'.'여러분 덕분에'.'부모를 잘 만나 빚이 없어서'…분명한 것은 전업활동가는 공공의 지지와 지원을 받아. 공익과 정의에 부합하는 내용과 방식으로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확보한 (넓은 의미의)노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활동가로서 목표와 지향이 있다면 자아 안찪의 경계가 최대한 유연한 몸을 만들고, 그 몸으로 목소리와 몫이 더 작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것을 통해 또 변형된 몸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는 것이다. 이 글에 내내 박힌 '나는'.'내가'라는 주어들이 매우 낯설지만, '나는'이라는 단어가 나의 자아로 환원되지 않고 내가 그 당시에 있었단 좌표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제로 내가 있었떤 위치가 달라질 때마다 어떤이들이 그리로 이끌었다. 나의 인식론을 변형시키고, 열정이 향하도록 손을 내밀었던 구체적인 타인이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골라낼 수가 없다. p133-4

 

<'페미니즘 고틱체' 권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법/김홍미리>

 

 알다시피 분노는 여성들에게 허락된 감정이 아니다. 성폭력 생존자들이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줄기차게 표출함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피해를 입증하는 주요한 감정으로 채택된 것은 두려움이나 '(성적)수치심'같은 것들이었다. (아마도 가부장의 목소리는 이렇지 않을까?'여자가 화를 낸다고? 그것도 남자에게 화를 낸다고?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라고 그럴리가?! 여자는 수치심을 느껴야 해 , 그리고 두려워해야 하지. 피해여성이 분노한다니 아니 아니 그럴 리 업어 절대 그럴 리 없지. 그래서는 안 되고 말고!) p143

 

 지금의 사회는 예외 없이 여성혐오의 정서로 들어차 있다. 페미니즘 역시 이러한 정서 구조의 예외가 아니어서 '이기적인 여자들의 조잘거림'이나 '배운 여자들의 특권의식','꼬인 여자들의 히스테리' 등 꾸준히 여성화되고 대상화되어 왔었다. 그리고 지금도 오래된 그 방식대로 '페미니즘! 너희가 걱정되어서 그런다'면서 '페미니즘에게 페미니즘을 기르치는'중이다. 페미니즘과 떨어져서 그것을 관찰하고 진단하고 평가하고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페미니즘 애착을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메갈리안의 정체를 '남혐'과 떨어뜨릴 생각도 없다. 터져 나오는 분노에 귀기울일 생각이 없고 페미니스트와 메갈리안을,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을, 진성 메갈리안과 아닌 메갈리안을 또 어떻게든 구분 지으려는 시도도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나의 우려는 애착 없는 이들이 퍼뜨리는 '진단 프레임'에 빠져서 애착과 고착을 오가는 페미니스트들이 정작 열어야 할 문을 찾지 못해 길을 읽고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데에서 온다. 구정짓고 구별짓는 방식으로 그렇게 또 여자들의 분노는 힘으로 직조될 수 없게 흗어지는 중이다. 2015년 메르스 갤러리 발화를 기점으로 '처음'페미니즘을 맞이한 사람들은 저 많은 '진짜','진정한','진성'등의 말들 속에서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 가늠하는 일에 (또) 집중하기 시작했따. 이렇게 또 조직화되지 않는 분노는 우리들 몸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개별화되어간다. 그 사이 우리는 또 서로에게 위로받은 후, 다시 서로에게 상처받는 중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속도로 페미니즘을 향해 있다는 걸 기억해 냈으면 한다. p167-9

 

<계속, 끝까지, 페미니스트로/전희경>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설명해 온 것처럼, 가부장제 사회에서 '감정적'이라 분류되어 온 여성들에게 '분노'는 거의 유일하게 금지된 감정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억압 체계인 가부장제하에서, 여성들이 분노를 조직화하는 것은 위협적인 일이며 그만큼 집요하게 공격 받아 왔다. 소위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남성들이 일관되게 요구해온 것이 바로 '부드럽게'페미니즘 하라는 성역할 규범 아니던가. 물어 뜯지 말고, 소리 지르지 말고, 과격하지 않게, 혹시라도 편이 되어 줄수 있는 사람(남자)들을 차분하게 설득해 가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 준 고마운 사람(남자)들이 기분 상하지 않도록, 페미니즘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다는 것을 칭찬해 주면서, 불편해진 기분을 달래 주고, 그래도 불편함을 감수하려 애쓰는 것만으롣 고마워하고 치켜세워주면서 말이다. 이런 가당찮은 요구에 대해 '닥쳐!'라고 하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비난받고, '엿 먹어!'하면 과격한 페미니즘이라고 불려 가고, '꺼져!'라고 하면 분리주의 페미니즘이라고 욕을 먹었다.

 화가 났는데 화를 낸다고 욕을 먹는 상황이라니 부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믿지않도록 키워져 온 평범한 여자였던 나에게 ,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새로운 준거집단은 질실하게 필요했다. p174-5

 

 100인위가 공식적으로 백서를 내고 조직을 해산한 것은 2003년이었지만, 시실 조직의 해체는 2001년부터 서서히,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소송이라는 상황에 대응하기 100인위의 조직 구조는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조직을 "자유로운 개인들의 수평적 네트워크 조직"이라 불렀다. 이 문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아지만, 무엇이 아니어야 하는지 분명했다. 반면교사로 삼을 사례들이 눈앞에 넘쳐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권위주의를 없애기로 했고(그래서 100인위에는 '대표'가 없었다), 일상 속 성별 분업을 해체하기로 했고(그래서 모든 일을 '자발성'에 기대어 분담했다), 폭력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지양하자고 약속했다(그래서 이견이 '폭력적으로 들릴까 봐 끊잉없이 검열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았다). 아무런 체계를 만들지 않은 것에 가까운 이런 조직 구상에 내부 민주주의를 향한 순정한 바람이 담겨 이었다는 점은 기억되어야 한다. (...) '수평적 네트워크'라는 건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구나 평등하게 뒤로 빠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사 결정은 온/오프라인의 열린 회의에서 이루어졌지만'누구나 말할 구 있다'는 형식만 가지고 누구나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동의가 만들어지는 과정, 이견이 말해지는 방식에 무언가 비공식적인 요인들이 힘을 발휘했다. 명시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조직은 명시적이지 않은 힘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그 결과. 책임은 책임감 강한 사람이 지고, 일은 하겠다고 손 든 사람이 '담당'하고, 반성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자발성'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기대할 수는 이어도 요구할 수는 없다. 몇 번 기대가 좌절이 되는 무릎이 꺽이고, 사람이 미워지고, 나중에는 억하심정이 생겼다. 가장 민주적이고자했던 조직론이 가장 부정의한 분업을 가져오는 아이러니에 나는 참담한 심덩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우리의 이상이 이꼴로 끝나다니.p187-9

 

 '피해자중심주의라는 표현이 이후에 가져온 문제적 효과들은 바로 이 지점관 관련이 있다. 사건의 피해자는 '사람'이고, 구조적(잠재적) 피해자는 '위치'다. 위치(position)은 아직 입장(standpoint)이 아니며, 분노 그 자체만으로 정치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특히 100인위가 16년 전 주장한 '원칙'이 이후 운동사외에서 '메뉴얼'화되면서 젠더 구조로 인한 모든 부정의와 고통을 성폭력'처럼'다루려는 경향이 생긴 것은 문제적이다. 구체적인 사건 속에 정당하게 다루어지고 경청되어야 할 고통이 있음을 의심치 않지만, 성폭력 사건을 문제 해결 전략의 유일한 참조점으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인간이 되는 자기 완성만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관심이 있는 페미니스트라면, 더 정확한 언어를 만들고 그것을 의미 있게 작동시킬 책임이 있다 성푝력 사건을 해결하는 것과 성폭력 사건'처럼'해결하는 것은 다르다. '피해자=취약함/운동가=강함'이라는 이분법을 허물고자 했던 100인위가 실패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페미니스들이 더 작업해 나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p192-3

 

 모든 사회 운동은 피억압자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피억압 당사자의 말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사회적으로 경청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사자성 자체가 곧바로 해석의 여지 없는 진실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직화를 통해 , 운동을 통해, 좀더 정확하게 대화하려는 언어의 교환을 통해, 책임을 나누는 내부 민주주의 속에서 서로를 길러 내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실이'된다'.p194

 

 가령, 의료의 남성 중심성을 비판하는 것과 좋은 의료를 지금/여기에서 만들어 내는 것은 다른 과제/문제다. 분노와 비판과 문제 제기는 언제나 중요하다민, 또한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구상하는 상상력, 구성원 개개인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신중함, '능력'의 차이(존재한다)를 조화시키는 시스템과 개인의 성장을 기다려 주는 인내심, 그리고 '삑사리'와 지지부진과 성에 안차는 불완전성의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관용의 에너지 같은 것들, 전부 소수 엑티비스트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래서 낯선 이들을 끊임없이 초대하고, 개인의 불완전성들이 부딪히고 어우러지는 장면들을 관찰하고, 나의 평범함을 발견하며 사람들과 대화하고 일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몸으로 나 자신을 변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무엇이 문제인가'보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기도 하다. p209-10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고, 한 걸음 나아갔다 생각한 것이 10년만에 무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도"계속 운동할 수 있는"힘은 무엇일까. 무엇에 기대어 계속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수 있는가. 대답은 나도 모르겠다. 다만, 막다른 길이라 생각한 곳에서 벽을 뛰어넘는 놀라운 사람들이 있고, 답이 없다 생각한 문제에 대해 포기하지 않 답을 발명하는 끈질긴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니 나도 그들 곁에서 계속 , 끝까지,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p211

 

 

 

페미니즘 이론가, 활동가들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각자의 페미니스트 모먼트에 대한 질문과 성찰 그리고 다짐들로 엮여진 책이다. 방향성을 잃고 지지부진하던 차에 많은 격려가 되었다.

 

 문단내 성폭력 사태를 고발하기 위한 출판사 봄알람의 『참고문헌없음』프로젝트는 운영진 중에 성폭력 가해자가 있다는 피해자의 고발로 거의 엎어질뻔 했다. 그 논쟁중에 등장했던 2차가해, 피해자 중심주의, 100인위, 영페미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몰라서 답답했었는데 실제 그당시 활동했고 그 용어들을 만들어 낸 활동가에게 이 책을 통해 이야기를 듣게 되서 답답함이 풀렸다.

 논쟁중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바뀌고 용어를 오용하고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고 몇몇 활동가들은 활동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나마 몇안되는 활동가들이 겪었을 상처와 절망이 너무나 안타깝다.

 

멀리서 지켜보는 나같은 사람이야 이 논란이 공부가 되었겠지만 당사자들과 페미니즘 운동에는 깊은 상처가 패였을 것이다. 

 

 

 경전도 없이 늘 그 권위를 의심해야 하는 학문이자 운동인 페미니즘을 '그건 페미니즘이 아니야'라고 단언할수 있는 사람들의 용기가 부럽다. 나는 그저 포기하지 않고 답을 찾아내는 이들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

 

나의 페미니즘 모먼트의 시작에는 정희진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와 생각이 다른 부분도 많다. 더 많은 그들을 만나서 더많은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새롭게 만들고 싶다. 내일은 친구들과 함께 북토크에 간다. 마치고 맛있는 저녁에 소주한잔을 함께 하며 우리는 함께 페미니스트로 살다 죽어갈 이야기를 하게 될것이다.

 

 

 

 

 

『남성성과 젠더』는 이미 읽기는 했는데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왜 절판이 되었나 했더니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라는 시의 적절한 제목을 달고 개정판이 나왔다.

 권김현영, 루인의 강연이 가장 기대된다. 권김현영의 영민함 루인의 새롭게 생각하는 힘은 언제나 매력적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오늘 회식이라 4시퇴근인데

흠...점심 먹은게 아직도 소화가 다 안된듯.

나의 힐링 푸드인 돼지갈비가 회식메뉴다.

소화제라도 털어 넣고 가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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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5-26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오늘 저녁에 돼지갈비 먹을까봐요...기운이가 하나도 없어요... ㅠㅠ

아무개 2017-05-26 15:40   좋아요 1 | URL
오늘은 돼지갈비 먹고
내일은 오삼불고기 먹으면 기운이가 좀 생기지 않을까요^^;;

단발머리 2017-05-27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 좋은 시간 보내셨나요? 강연에 토크까지 겁나게 좋았을 듯 해요^^

43-4쪽 이야기 특히 맘에 와 닿네요. 피곤한 길 가운데 서 있는 지친 학자의 마음이 일면 이해되기도 하구요 ㅠㅠ
좋은 주말 보내시길요~~
넘나 멋진 아무개님*^^*

아무개 2017-05-27 11:28   좋아요 0 | URL
북토크 오늘이라 지금 가는 전철안이에요.

잘 읽고 듣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서
좀 멋진 아무개가 되도록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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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05-17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가끔 페미니즘적 깨달음과 지식, 그리고 통찰들이 내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야하는가를 고민할때 아득해져요.
안다는 건,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예요 ㅠㅠ
나한테는 그래요.....

아무개 2017-05-23 16:44   좋아요 0 | URL
공부할수록 저도 그런 고민 많이해요.
이렇게 공부하는게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좀 답답하더라구요.
제가 학자가 될것도
활동가가 될것도 아닌데 공부를 어떤 방향과 깊이로 해야할지. .


 
페미니스트 모먼트
권김현영 외 지음 / 그린비 / 2017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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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반복해서 읽지 못하는 내가
다 읽자마자 다시 첫장을 열었다.

내가 몰랐다고 해서 없었던게 아니라는
너무나도 당연해서 놀라운 사실들.



그나저나 회사 컴으로는 이제 페이퍼는 못쓰게됐다. 애인님 그 뭐지 그 휴대용 자판이었나 그거 나 줘요!

앤과 술마시고 알라딘 중고서점가서
술취한 상태로 이책들을 책꽂이에서
찾아낸 나님 대단해. ㅡ‥ㅡ
앞으론 절대 음주쇼핑은 안하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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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든』을 읽다 보면 늘 당연하다고 여겼던 자연의 24시간이 낯설게 다가 옵니다. 소로는 아침에 눈을 뜰 때 그저 사무적인 절차에 따라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버리지 않는 새벽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눈을 떠 보라고 조언해 줍니다. 새벽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 어김없이 오늘도 새벽이 와 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는 삶이란 얼마나 겸허하고 경이로울까요. p87

 

 정여울의 책은 늘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런 점에서 많은 위로와 위안을 받았었는데 내가 예전보다 훨씬 더 어둡고 차가운 인간이 되어버린것인지 이제는 이러한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답답하다. 내 우울증때문이겠지만 아침에 눈뜨지 않아도 상관 없다 라는 생각을 할때도 있다. 눈을 뜨는게 죽을 만큼 싫은 것도 아니지만 뜨지 못해도 상관없고. 뭐 떠졌으니 사는거다.

 

 손택은 우리가 멈춰야 할 것은 타인에 대한 연민(sympathy)이며 되찾아야 할 것은 타인을 향한 공감(empathy)임을 일깨우지요. 연민은 아픈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의 고통을 안방의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며 ARS로 3000원을 기부하는 아늑한 자기만족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공감은 당신이 지금 고통받고 있는 그 자리로 달려갈 수 있는 용기의 시작이며, 타인의 고통을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적극적인 힘으로 단련시키는 삶의 기술입니다.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게 하는 삶의 태도 입니다. p133

 

 연민 없이 타인에 대한 공감이 가능할까. 연민이 무조건 멈춰야 하는 감정일까? 나는 연민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지옥같은 타인에게 공감을 하려면 연민이 시작이다.

 

 하지만 뫼르소가 사람을 죽이는 이 대목에 이르면 바로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해부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인간을 향한 폭력이 아닐까요.

 이때부터 뫼르소는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사회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재판은 이상하게도 그가 왜 살인했는가보다 그가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전혀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가로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의 냉혈한'이기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식으로 '믿고 싶어 하는'군중 권력의 한가운데서 무참하게 조리돌림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뫼르소는 전혀 자신의 사정을 해명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 머루른 채 조용히 자기만의 성벽에 갖히려 합니다. 그에게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할 만한 사람도 살고 잎다고 고백할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남들처럼 목놓아 울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과연 '살인을 저지를 만한 사람','굳이 제대로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이방인』을 여러 번 읽었지만 나는 그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을 읽을 때마다 뫼르소의 고독이, 뫼르소의 어찌할 수 업음이 더욱 절절한 슴픔으로 물들어 옵니다. 안간힘을 써서 이 사회에 일부분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 세상'에 속하기 위해 때로는 온갖 상처를 감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해가 갈수록 더 깊이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p127-8

 

지난 수요일은 동생의 1주기여서 납골당에 다녀왔다. 늘 그렇듯이 엄마는 울고 나는 엄마가 다 울고 진정될때까지 어슬렁어슬렁 납골당 주변을 배회한다.

동생이 죽었을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동생의 죽음 후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눈믈을 터뜨린적이 있기는 하지만, 망자에 대한 그리움은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죽음은 역시나 남겨진 자의 몫이다. 나는 이 두사람의 죽음에

그 어떤 몫도 가지고 싶지 않다.

 

 납골당으로 가는 길은 인도가 없다. 명절때는 차와 사람이 엉켜서 위험하고 명절이 아닐때는 차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서 위험하다.

 

 언제부터 이글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내용의 글들이 가로수에 여러개 매달려 있었다.

아들을 보러 가는 길이 너무나 위험해서, 인도가 만들어지길 바라는 바람으로

꽃씨를 뿌리셨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만 생각하며 오갔을 저길을

저분은 그 슬픔을 안고 타인을 위해 꽃씨를 뿌리셨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로 힘겹게 유지되는 것이겠지. 나는 그저 내가 그 꽃길을 망치지나 않기를 바랄뿐이다.

 

 

정여울의 신간은 도서관에 신청하는걸로.

하긴 유명 작가라 내가 신청안해도 조금 기다리면

비치가 되겠지.

 

주말에는 애인과 도서관에 갈까 한다.

김밥을 또 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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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고는 인류 역사 전반을 지배해 온 전제였을 뿐 아니라 그간의 언어와 사유 체계가 만들어지는 데 핵심 역할을 해 왔다. 이분법, 짝(pair)의 논리가 그것이다. 이분법은 반반으로 분리된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로는 주체와 타자가 하나로 묶인 주체 중심의 사고다. 우리가 흔히 "남성 중심적, 서구 중심적, 미국 중심적, 서울 중심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논리를, 말하는 주체(the definer, subject)와 그에 의해 규정된 (the defined, object)의 존재를  전제한다. 주체(one)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삼아 나머지 세계인 타자(the others)를 규정하는 것, 다시 말해 명명하는 자와 명명당하는 자의 분리, 이것이 이분법(dichotomy)이다. 즉 이분법은 대칭적, 대항적, 대립적 사고가 아니라 주체 일방의 논리다. p29

 

 이처럼 언어의 지위는 언어가 만들어진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언어가 정해지면, 자신과 외부의 차이는 자연스러운것이 된다. 다시 말해, 이분법은 무엇인가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안식하게 만드는 인식의 절차이자 과정이다.

 이분법은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기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수평이 아니라 기울어진 상태, 아니 아예 종적인 상하 관계다. 여성주의는 이분법이 'A'와 'A가 아닌 것(not A/-A)을 구분하기, 다시 말해 A를 기원(origin)으로 규범(norm)으로 진리로 만들기 위한 방식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무엇이 다르다는 규정 자체가 이미 사회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것에는 계급, 인종, 연령, 성별 등 다양한 권력이 개입하고 관련을 맺으며 작동한다.

 근대화, 제국주의화 과정에서 백인 남성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인류의 위계를 만들고, 문명화 작업의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정의하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노동을 가용해 왔다.("여성은 음식을 만들고, 흑인은 목화솜을 따며,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한다.") 백인 남성은 A가 되어 보편, 일반 , 진리, 기준으로 작동하고 그들과 다른 것은 인간 외로, 다른 범주가 되었다. 물론 A는 백인 남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중산층, 이성애자, 서울사람, 절고 건강한 사람, 외모 , 학벌, 장애 여부 등에 따라 기준은 언제든지 변한다. 이처럼 이분법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는 위한 사고다, A가 아닌 것을 사용하고 배치하고 규정할 수 있는 A의 권력을 말한다.

 젠더(gender)는 남성의 여성 지배를 의미한다. 양성은 두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성 하나만 존재한다. 남성성은 젠더가 아니다. 남성적인 것은 만성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p32-33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 가치이자 자유주의의 최고 이념으로 간주되는 평등은 사실 쉽게 부정될 수 있는 매우'취약한 사상'이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평등하다."는 정언은 특수성 담론을 앞세워 언제든 폐기될 수 있다. 특수성 개념은 예외를 만드는 배제의 정치의 핵심이다. 모든 현상은 일반화할수 없기 때문에, 즉 하나의 버전(uni/versal)일 수는 없기 때문에 차이는 언제든 발생한다. 권력은 이 차이를 특수라는 예외로 만든다. 그러므로, 보편성은 권력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고정된것이 아니다. 평등은 희망이자 지향이지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강자의 보편만이 보편이고, 약자의 보편은 특수로 간주된다. 보편의 폭력성과 권력 의지는 '특수'라는 개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보편과 특수는 짝을 이루면서 권력의 필요에 따라 평등, 자유, 민주주의 같은 가치를 특정 사회 구성원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예외의 정치에서 자신을 보편적 주체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예외의 이미가 임의적으로 정해진다. 이들은 시기상조, 일시적 차별, 생물학적 차이, 관용, 배려, 시해, 다양성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지배 전략을 구사한다.

 보편성의 반대는 특수성이 아니라 차이다. 이 차이를 '또 하나의 보편'으로 드러낼 때, 기존의 보편성이 실제로를 편파적이고 당차적임을 인식할 수 있다. 특수성은 보편의 하위 개념인 반면, 차이는 보편성의 전체주의를 문제 제기할 수 있는 보편과 동등한 개념이다.

 몇몇 사람만 평등했던 영역(sphere)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는 의미의 평등 개념에서는, 기존에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 이질감은 누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 이 점이 '양성평등'이 정의(justice)로서의 평등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여성이 남성의 기준에 맞추는, 남성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의미의 평등은 그것을 실현하는 데도 수많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이러한 의미의 평등은 특히 기득권 세력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제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같아지는 것('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평등해지고 싶은데, 남성들 중 누구와 평등해질 것인가 역시 미봉된 문제다. 누구와 평등해질 것인가. '노숙인','빈민','알코올 중독자'와 평등해지고 싶은 여성은 없을 것이다. 최소한 양성평등은 남성 중산층과의 평등을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평등이 현실화되면 남성의 반발은 필연적이다, 즉 남성 사회에서 양성평등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논리,"남성들끼리도 경쟁하기 힘든판에 여자들까지 끼어든다."는 이데올로기가 힘을 얻게 되고 여성에 대한 혐오로까지 발전한다. 이처럼 양성평등은 갈등, 대립 논리일 수밖에 없다. (...)

 평등 개념은 개인의 고유함(in/dividual,타인과 공통분모가 없는, 양도 불가능한, 분할할 수 없는 몸)에 근거를 둔 가치다. 다시말해, 평등은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것(sameness)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다른 이들과 공정한 대우(fairness)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상황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평등은 언제나 논쟁적이고 경합적이다. 또 평등은 '적용'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 적용의 주체와 대상의 구별 자체가 바로 정치의 시작이다.  p45-4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정희진-

 

 

 무엇을 음란 행위로 보고 '건전한 사회 통념'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음란 행위는 심각한 폭력이 될 수도 있고 범죄가 될 수도 있고 아무 일이 아닌것처럼 취급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장발을 단속하던 시기엔 남성으로 인지되는 사람의 장발이 경찰의 단속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혹은 전직 국회의장의 명백한 성추행/성폭력 사건은 실제 판결 내용과 무관하게 단순 해프닝처럼 취급되면서 ooo전지검장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폭력이자 검찰 집단 자체의 도덕적 문제로 다뤄지는 것처럼, 음란 행위가 심각한 폭력이자 범죄가 되고, 성/폭력이 단순 해프민이나 음란 행위로 해석되는 것은 폭력에는 관대하고 음란에는 엄격한 한국 사회의 태도를 반영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작동하는 지배 규범의 한 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존재를 인지 가능한 존재로 보고 어떤 존재를 인지 불가능한 존재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크게 죄우된다.p82

 

 마찬가지로 언론에 보도되는 많은 소아성애나 아동성애 혹은 아동성범죄 사건은 이성애 맥락/관계에서 발생한다. 즉 성인 남성 가해자와 어린 여성 피해자라는 구도에서, 나이 권력과 함께 이원 젠더 권력 관계가 함께 작동하며 발생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드은 결코 이성애-이원 젠더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가해자를 성도척증 혹은 소아성애증으로 규정하며 정신이상으로, 괴물로 추방할 뿐이다. 즉 이성애와 이원 젠더는 그 자체로 매우 협소한 범주일 뿐만 아니라 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하고 폭력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실천임에도 범죄와 가장 무관한 것으로 규정된다. 더 정확하게는 밤죄와 연관될 때는 이성애를 삭제하고 '이상'섹슈얼리티 범죄, 병리적 현상,(정신)장애와 관련 있는 행위로만 명명된다. 아동성폭력이 아무리 문제가 되어도, '바바리맨'사건을 아무리 심각한 성폭력 범죄로 인식한다고 해도 이성애-이원 젠더 체제는 안전하다. 범죄 행위를 성도착.정신병리로 추방하며 이성애-이원 젠더는 법을 통해 암전한 섹슈얼리티-젠더로 보호받는다. p88

 

 누가 괴물이고 무엇을 보호하는가? 지배 규범의 도덕 윤리를 밑절미 삼아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규정된/추방된 존재가 괴물인가, 많은 괴물을 재.생산하며 사회 구성원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을 방치하고 방조하는 지배 규범 혹은 한국 사회가 괴물인가? 쾌락을 생산하는 음란 행위와 성행위를 범죄로 찬결하는 현행법 혹은 사회규범이 정말로 보호하는 것은 성/폭력을 재생산하는 바로 그 자신 아닌가? 지배 규범의 윤리에 따라 괴물로 추방된 존재인 나는 나와 같은 괴물을 '보호'하기 위해'괴물'을 보호하는 사회에 질문하고 싶다. 괴물을 보호하라, 그런데 누가 되물이고 무엇을 보호하는가. p90

 

「음란과 폭력을 다시 생각한다 -루인-

 

 아무런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성에 대해서만 동의 여부를 만 13세 이상부터 결정할 수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있는 자격이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성관계를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부모 혹은 성인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야말로 성적 자기 결정에 유해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미성년자의 자유권을 제한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장할 수 있게 하려면 이 문제를 청소년의 신체적·정신적 '건전한'발달 과정의 문제라는 발상부터 버려야 한다. 오히려 더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성교육을 받을 권리, 미성년자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더 좋은 교육 환경과 정치 제도를 요구할 권리, 생활 임금이 가능한 최저 임금을 받을 권리 등이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 여부에 대한 토론이 종종 '요즘 애들'의 성적 발육에 대한 (굉장히 소아성애적인 굑망처럼 들리는)사례로 빠지거나, 과거의 뿌리리 깊은 악습인 조혼을 미성년자의 성을 존중한 사례로 잘못 이해하는 곤경에 빠지느 ㄴ이유는 성을 다른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변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에게 성적 자기 결정권, 투표권, 혼인 가능 연령,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이 주어진다면 게일 루빈의 말처럼 더는 섹스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의제강간 문제는 이제 섹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문제로 비로소 방향을 잡아 갈 수 있다. 선거 연령을 낮추고 최저 임금을 시해하고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라는 식의 조정을 상상해보자, 나는 이것을 세 번째 쟁점 전환이라고 부르고 싶다. 미성년자 의제강간법을 젠더와 나이 변수가 교차적으로 고려되고 권력의 재배치를 통해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적 개입의 계기로 사유하는 것 말이다. p123-4

「미성년자 의제강간, 무엇을 보호하는가」-권김현영-

 

 신자유주의 시대의 포스트 여성 주체가 스스로 자신을 말하는 방식은 어떻게 진전될까. 손희정이 이야기하듯, '메갈-이후'이들은 어디로 여행을 떠나서 어떤 모험을 하게 될까. 온라인에서는 미러링이라는 전복적 쾌락이 흘러넘쳤지만, 오프라인에서는 피해를 폭로하는 말들이 고통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나 찰나의 해방감을 넘어 진정한 해방은 자기 도취도 자기 소멸도 아닌, 구조적 변혁과 일상의 변화에 있다. 이미 이들은 산발적이지만 어느 순간 집단적이며, 잠재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재적인 행위성이 무엇인지 경험한 세대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즐겁고도  또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대항 체로서 여성이라는 존재를  일으켜 세우는 한편으로 고정된 특질을 엮는 범주로서 여성성은 해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금 메갈리아 사이트가 분열되던 때를 떠올린다. 2015년 12월, 누구를 적대할지, 혹은 어디까지 미러링이 가능한지 등을 두고 내부에서 논란이 있었고 "여성의 인권만 챙겨 가겠다'며 한 무리가 포털사이트 다음으 비공개 카페'레디즘'과 '원마드'등으로 이탈해 나갔다. 그러나 페러디로서 미러링은 반드시 위쪽을 향하여 더 큰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역전의 쾌락은 더 많은 존재들과 만나는 계기로 나아가야 한다. 왜내하면 남성에 비하여 여성이 부정적으로 말해지고, 여성에 빗대어 소수자들이 차별받기 때문이다. 그런 혐오의 연쇠에서 여성만 오롯이 빠져나올 수 없다 큰 범부조러 여성뿐 아니라, 작고 많ㅇ느 소수자 특질을 자기 안에서 발견해내어,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차별적 구조를 깨부숴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가서, 메갈리아 미러링은 남성 중심 한국 사회가 유일하게 귀 기울여줬던 말이었다. 이러한 폭력을 가장하는 여성들의 언어 전략은 페미니즘 투쟁에서 내내 있어 왔다.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주인공은 여성 운동 때문에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며 이혼당해야 했다. 이떄 그는 아들과 헤어지면서 엄마의 이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ㅡ그러나 메갈리안을 비롯해서 포스트 여성 주체들, 이들 익명의 여성들은 과연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미러링이 아니라도 이미 이들은 차별적 현실에 대항하는 집단적 직접 행동으로 역사에 새계지고 있다. 물론 메갈리안이 페미니즘의 모든 주제를 떠맡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메갈리안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거부는 해방의 언어로서 페미니즘을 왜소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페니니즘과 가짜 메갈리아'가 아니라, '빛의 페미니즘과 어둠의 메갈리아'가 낫겠다. 마치 인간의 성(sex)이 남녀 양성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다고 믿어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이둘은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사이에는 드넓은 스펙트럼이 있겠지만 빛은 반드시 어둠이 되고 어둠은 빛이 될 수 있다P150-1

 

「그들이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 메갈이아 미러링」-류진희-

 

 우리는 한국의 개신교가 근본주의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근본주의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사실상 젠더 이데올로기"였다는 강남순 교수의 지적도 기억해야 한다. 신학자 잭 로저스는 "남녀 평등을 반대하는 것과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 사이에는 강한 연결고리가 있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가부장제 가족 구조를 교회와 국가의 안정에 열쇠가 되는 것으로 본다. 이런 견해에서 가부장제와 애국심과 기독교는 하나의 깃발 아래 뭉치며, 그 깃발은 동성애에 대한 모든 논의 위에서 휘날린다. 동성애와 여성 평등은 둘다 남성 우위의 모델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확대하면 교회와 국가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세상이 불평등하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평등하다. 창조주께서 그렇게 다 계산해서 만들어놓으신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리하게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무리들은 기존 질서를 깨려는 반란자들이고 자신들은 평화와 정이를 수호하는 위치가 된다. 반동성애 단체들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건전한 '사회 또는 '올바른 성 문화',' 홀리라이프'.'차세대 바로 세우기'등이다. 더욱 철저하게 가족 중심적으로, 결혼 중심적으로 돌아간다. 1970년대 미국의 근본주의 개신교가 보수 우파 정권을 탄생기키기 위해 활용했던 이휴는 '낙태'였다. 하지만 남아 선호로 인해 여아 낙태가 횡행했고, 경제 개발이란 목표로 정권 차원에서 인구 억제 정책을 펼친 탓에 한국에서는 미국처럼 임신 중절에 대한 터부를 지나치게 강조하기는 어렵다, 이혼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목사들의 성폭력 사건이 끊임없이 폭로되는 현실에속에서 결혼의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안전할 수 있는 전략은 바로'동성애 혐오'다. 그들에게 동성애는 자신들의 폐부를 찌를 수 있는 '성 윤리'의 칼날을 피하면서 '성 윤리'의 수호자 위치를 획득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완전히 타자화하면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정의와 윤리의수호자 위치를 독점할 수 있다. 대표성을 지니는 것은 중요하다. p185-6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한채윤-

 

<조선일보 기자중 발췌>

 

 

 양성평등이라는 전제가 잘못된것이다. 세상은 양성으로만 이루어 지지도 않았고, 평등의 개념역시 잘못 전유되었기 때문이다. 성별, 인종, 성적정체성, 계급과 상관없이 내가 나로 살아갈수 있도록 하는 것이 페미니즘 학문이며 운동이다. 일부 남성들이 주장하는 '페미니즘 말고 이퀄리즘해요'는 진정한 개소리인것이다.

 

 루인과 권김현영의 글은 기존의 프레임을 깨고 사유하는것을 추동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새로운 언어와 지식에 대해 먼저 의심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지식이 절대불변의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먼저 해야만 한다. 특히나 남성이라면 본인이 맞다고 믿고 있는 본인의 지식에 끼워 맞춰서는 페미니즘을 이해하기는 힘들것이다. 낡은 틀에 새로운 것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니 될리가 없다. 새로운 시각을 가지려는 노력없이는 페미니즘 독서는 여남 모두에게 시간 낭비일 뿐이다.

 

 차별 금지법은 노무현 정부의 선거 공약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2003년부터 법안을 준비하고 약 4년간 각계의 의견 수렴과 검토 끝에 법무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든 법안을 입법예고 했었다.  물론..입법예고로 끝나버렸다. 차별 금지법 제정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페미니스트 대통령 후보자가 아마도 다음 대통령이 될것 이다. 얼마전에 군법 92조 6항에 의거해 현역 대위가 잡혀갔다. 무엇이 시기상조인가. 이미 이렇게 차별에 의한 처벌이 현실화 되고 있는데.

어차피 찡찡이 안철수는 처음부터 거품이었다. 지지율을 상승하지 못할것이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심상정 찍겠다.

여성이며 노동자인 나를 위한 당연한 선택이다. 없는 살림에 처음으로 정치인에게 후원도 해보았다. 돼지발정제 강간모의를

추억팔이 하는 놈따위는 이겨주었으면 정말로 좋겠다.

 

 

1.남성 페미니스트는 가능한가?

2.남성 페미니스트 없이 성평등은 가능한가?

3.남성 입장에서 남성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었인가?

4.이상적인 남성페미니스트상은 무엇인가?

5.인간은 진실로 스스로 평등한 존재이기를 바라는가?

답을 찾다보면 또다른 질문이 생기겠지만.....

 

지난 4월7일 민우특강 '정치, 페미니스트가 싸울자리' 3강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님의 강연은 그 당시 나의 질문들에 대한 답이었다.

매번 제자리로 아니면 더 뒤로만 가는듯이 보이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답답함이 지금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현미 교수님 덕분에 조금 나아지긴 했다. 김현미 교수님은 20년 동안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늘 겪었던 문제라고 하셨다. 아..진짜 페미니즘 책 한두권 읽고 내가 뭔 소리를 한 것인가 싶어서 나 혼자 얼마나 낯뜨거웠는지 모르겠다.

 

"IMAGE ECHO"  메아리를 상상하라. 지금과 다른 세상을 원한다면 다른 것을 상상할수 밖에 없다. 현실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메아리는 분명 다르게 돌아온다.

 

이어 읽고 있다.

 

 

 

 

 

 

 

 

 

 

 

 

 

 

 

 

 

 

 4월11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요양병원측에 시체포기각서를 쓰고 장례를 치루지 않았다. 발인에도 참석하지 않았기에 유해가 어떻게 처리 됐는지 알수 없다. 죽음은 죽은자에게는 완벽한 끝이다. 죽음후의 절차는 오로지 산자를 위한것일뿐. 아버지의 장예를 치루고 애도해야할 산자가 없기에 절차는 무의미 하다.

 4월 26일은 동생의 기일이다. 1년새 두번의 사망신고를 했다. 나의 사망신고는 누가 하게될까. 어느 누구에게라도 폐끼치는 죽음을 남기긴 싫다. 아들 앞세우고 어찌 부모가 살겠냐고 양쪽다 울고 불고 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없었고, 아버지는 병세가 악화될때 어떻게든 살겠다고 버둥거렸다.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나는 어떤 말도 할수 없지만, 죽음 만큼은 내 의지가 반영되기를 바래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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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6 1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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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7-04-26 13:02   좋아요 0 | URL
동생 1주기라 납골당 왔어요. 날씨 엄청 좋네요. 따뜻한 위로말씀 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