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목적은 여성주의를 설득하고 설명하고 주장하는 것, 즉 '여성주의 의식화'가 아니다. 여성주의를 이해한다는 것이 곧 여성주의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인간의 사회화 그리고 인식 과정에서, 젠더와 여성주의의 '중대한 역할'을 강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젠더와 여성주의 의 개념과 가치는 사회적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 페미니즘은 성별(남성성/여성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성별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성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회 문제도 젠더나 계급, 나이 등 한 가지 모순으로 작동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젠더를 해결하려면 젠더를 가시화하는 동시에 젠더를 넘어서야 한다. 젠더를 조금이라도 해체하고 무력화해야 한다. 환경 문제가 지구의 '책임'이 아니듯, 여성 문제(젠더, 인간을 성별로 구분하는 제도)도 역시 여성의 '책임'이 아니다. 이성애에 기반을 둔 가부장제 사회가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했고, 그 구별의 권력이 성차별을 가능케 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근원적으로 그 구별(젠더)에 반대하지만, 그 구별이 만들어낸 효과(차별)로서 젠더가 작동하는 현실을 문제 삼는다. 한편으로는 젠더가 본질적인 구별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젠더로 인한 구분이 얼마나 문제인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주장은 언제나 '차이가 차별이 된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들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차이와 차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p14-15
수십개의 포스트 잇을 붙였지만, 정리는 두단락만,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너무 큰 중격을 받았었는지 그때만큼 심장이 쿵쾅거리는 글은 없다. 물론 30개 이상 포스트 잇을 덕지덕지 붙일정도로 너무나 좋은 글과 사유들이 많다. 다만 첫경험이 너무 쎈던것 같다.
몇 년 전 지하철 노약자석에 '인권은 배려입니다' 글귀가 적힌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익 광고가 붙은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나름 문제의식을 느끼고 위원회와 인권 단체에 이 문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배려가 뭐가 나쁘냐."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평등하지만, 우리가 매일 경험하듯 현실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평등은 지향이고,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인권은 배려가 아니라 갈등하고 경합하는 가치다. 그런데'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주장은 이 희미한 평등 개념조차 우아하게 배반한다. 누가 누구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일까? 돈 없는 사람이 돈 있는 사람을 배려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구조적 가해자(강자)가 피해자(약자)를 배려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노약자석의 경우 장애인, 임산부, 노인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그들의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상대방이 선심을 베푼다고 주장하며 고마워할 것을 요구한다면 불쾌감을 넘어 억울한 일이다. 배려나 관용은 '잘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베푸는 선의가 아니다 배려는 동등한 적대자(適對者 혹은 敵對者)와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윤리다. p284-285
며칠전 SNS에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임산부에게 자리 양보하라고 일으켜 세운 남자노인의 이야기가 여성들의 공분을 샀다. 누군가는 조작이 아니냐고 했지만, 나는 이런 경우를 실제로 격어 봤기 때문에 충분히 일어날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다. 지금과는 달리 아마도 4~5년 전 쯤에는 노인들이 지하철을 타면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자리양보를 했었다. 언제라고 확실히 말할순 없지만(가스통할배와 엄마부대등장 후가 아닐까 짐작만 한다) 젊은이들이 더이상 스스로 자리양보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 역시도 심각하게 불편해 보이는 분들이 아니고서야 대체로 자리양보를 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수년전 그날은 내가 무척이나 피곤해서 헤드벵잉까지 하면서 기절상태로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내 가슴과 쇄골뼈 사이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서 나를 깨웠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보니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손가락직을 했다. 1호선에는 이런 노인들이 꽤 많다. 정강이를 채인적도 있고, 내 무릎위의 가방을 끌어 내린적도 있다. 아마도 장거리 이동자가 많아서 일테지만 일반석에 앉은 젊은 여성들에게만 이러한 강제적 자리양보가 요구된다. 정말로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한다면 어째서 젊고 건장한 남성에게는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노인, 장애인, 어린아이와 임산부는 노약자석에 앉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얼마전부터 지하철 노약자석의 임산부 표식에 누군가가 크게 X표시를 하고 다닌다는 뉴스를 보았다. 당연한 권리마저 이렇게 박탈당한다.
애 많이 낳게 하려고 여성학력을 고의로 낯추야 한다는 연구원의 보고서, 전국 가임기 여성지도 이딴짓 하지말고
애 낳고 살고 싶은 국가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를 좀 써라 머리를.
대통령도 페미니즘 하겠다고 하지 않나! 하긴 여기저기 싸놓은 똥 치우려면 이건 또 '나중에'가 되려나.
그러나 그대들이 그렇게 지키고 싶은 국가를 유지하려면 국가의 구성요소인 국민이 필요하다.
국민 재생산에 대한 책임과 의무만을 여성에게 지우고 '권리'는 박탈해 버리는 나라에서
여성에게 애를 낳고 기르는건 큰 결심이거나 큰 사고일 것이다.
그나저나 정희진 님 지난주 북토크때 연단에서 발을 헛디셔 떨어지시는 바람에 엄청 걱정했는데, 큰 이상이 없으신지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까지 함께 해주시기는 했는데 진짜 괜찮으신건지 모르겠다. 이분에게는 가혹한 일일지 모르겠으나, 100세 정도까지는 꾸준히 글을 써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할머니 페미니스트 학자의 글을 할머니가 되어서 읽고 싶다. 지금처럼 대중서도 좋지만, 지금보다 조금더 전문적인 책들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