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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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 (侮蔑) [모ː멸] 발음 듣기 

[명사] 업신여기고 얕잡아 봄.
[유의어] 모욕, 굴욕, 멸시

 

모욕과 멸시를 동시에 당하것.

네이버 사전을 검색해보니

모멸이란 업신여기고 얕잡아 봄을 말한다.

 

 

십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도 기억속에 아니 가슴속에 상처로 기억되는 일이 있다.

그때 당시 나는 투잡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청소 그 후에는 웨이트레스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이가 삼십대 초반이였고, 내가 웨이트레스 일을 하고 있는 가게의

부사장은 나와 한동갑이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서빙일을 해야하는것이 스스로도 그리 자랑스러운 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느날 바텐더와 부사장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바텐더가 매상을 중간에서 상습적으로 가로챈것을 부사장이 알게된것인데

당시 나는 홀매니저였고 어떻게든 싸움을 중재해야 하는 입장이여서

어쩔수 없이 사건에 관여하게 되었고

이 바텐더의 부인이(이십대 중반) 가게로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다.

심지어 나와 친분이 있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이 일과 아무 상관없는 내게

"너가 그러니까 그 나이 먹도록 그런데서 써빙이나 보고 있는거야!" 라며 인신공격을 하였다.

그 말을 들었던 순간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슴과 머리에서 각자 다른 무언가가 '펑'하고 터지면서

말 그대로 그 '모멸감'이란것을 느꼈다.

분한 마음에 손발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터질듯 방망이질 하고

눈물이...고였지만, 울지는 않았다.

 

당신의 동의없이는 누구도 당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할 수 없다.- 엘리너 루스벨트 -

 

만약 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여자의 그런 말따위가 내게 그토록 큰 모멸감을 불러 일으킬수 있었을까?

나는 상처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쉽게 모멸감을 느끼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만들수 있는 이유는

타인의 평가에 쉽게 좌지우지 되는 낮은 자존감.

문제는 그것이다.

 

 

 

 타인에게 하는 말은 곧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 자기를 혐오하기에 남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을 알면, 연민이 싹튼다. 부당하게 악감정을 퍼붓는 사람은 자존감이 파괴되었기 때문임을 이해하면서 측은지심에 이를 수 있다. 그 모습을 거울 삼아, 과연 나는 스스로를 정당하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 자존감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나를 귀하게 여겨야지 하고 결심한다고 곧바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땅에 작물을 재배하듯이, 오랫동안 꾸준하게 마음의 밭을 일구어야 한다. 거기에 어떤 씨았을 심고 가꾸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p290< 모멸감>

 

'소심하다' 는 평을 많이 듣는다. 다시말해 쉽게 상처 받는 인간인데,

그건 바로 낮은 자존감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받은 상처 그 이상으로

주변인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더 큰 모멸감을 주는 나를 알고 있다.

 

상대방의 약점, 어디를 찌르면 헉 소리 나게 아프겠구나 하는 것들이 쉽게 보인다.

그리고 나에게 조금만 상처를 주어도

나는 가차없이 그 약점을 후벼파고 난도질한다.

말을 잘한다, 말빨이 세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대부분 남들을 갈굴(?)때 나의 말빨이 세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이 찌질하고 못난 인간....

 

이미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존감을 도대체 어떻게 회복시킬수 있는것인지.

그런 방법이 있기는 있는 것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무언가 답이 나오길 바랬지만,

'오랫동안 꾸준하게 마음의 밭을 일구어야 한다.' 가 끝이다. 아쉽다.

 

*저자의 맺음말 요약*

 

어떻게 하면 모멸감을 덜 느끼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 당당함을 좀더 누리고 살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사회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있고,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 그것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구조적인 차원에서 접근이 요청된다. (...)경제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제도를 수립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날로 심화되는 불평등 지수가 개선되도록 분배의 틀을 리모델링 하고,(...)이는 궁극적으로 정치의 몫으로 수렴되고, 그것을 촉진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과제가 제기 된다.

 

둘째, 문화적인 차원의 접근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격을 위아래로 나누는 서열 관념은 학력 이외에도 여러 가지 기준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경제력, 거주지, 가정환경, 피부색 외모, 나이 등 외형적인 차이를 절대화하면서 차별하고 멸시한다. (...)모멸감을 줄이려면 이러한 문화와 사회 풍토를 바꿔가야 한다. 가치의 다원화가 핵심이다.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여러 차원으로 틔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평범함과 비범함을 나누는 기준 자체를 상대화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면서 도전과 성취를 붇돋아주는 관계와 공동체가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셋째, 개인의 내면적을 힘을 키워야 한다. 삶의 자리에 모멸이 만연하는 까닭은 스스로의 품위를 잃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품에서 격조 있는 삶이 가능하다. 높은 것에 사로잡혀 삶을 창조하기에 자기를 돌볼 줄 안다.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자신을 자각하며 스스로 채워진 마음이 타인에게 스며들기에 품위있는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한 위엄과 기품이 사회적 풍토로 자리 잡을 때, 모멸감의 악순환도 줄어든다. 그 길은 자존의 각성과 결단에서 열린다. 

 

백화점 모녀의 주차요원 폭행사건이나 땅콩회항 같은 갑들의 횡포에서

그 주차요원이나 사무장이 느꼈던것이 바로 이 '모멸감'이었을 것이다.

모멸감은 인간의 자존감을 박살내면서 그 삶을 파괴시킨다.

상처받은 그 사람은 그 상처로 인해 날이 바짝 선 폭력의 칼을

타인에게 휘두룰수도 있고

자신에게 휘둘러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돈 자체가 목적이며 사람이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은 아무렇게나 취급당하수 있고, 언제든 버려질수 있기때문이다.

툭하면 갑질하는 그리고 갑질 당하는 한국 사회에서(슈퍼 갑이 아닌 이상, 우리는 누구에게나 갑질 할수 있고 갑질 당할수 있다.) 개인의 마음 수양만으로는 이 모멸의 시대를 벗어날수 없다.

정치적, 문화적인 변화 없이 사람이 목적이 되고,

돈은 그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될수 있는 사회로의 변모는 불가능하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는

공자의 말씀도 구조의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힐링서나 자기계발서의 간사한 속삭임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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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1-28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위 갑질이라는 것은 일종의 자기열등감의 빗나간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엘르노아 루스벨트의 저 인용문은 저도 어디서 보고 잊지 않고 되새기는 말이랍니다. 마지막 문장의 공자님 말씀도요.

아무개 2015-01-28 21:17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조현아 같은 사람은
도대체 뭐가 모자라
그런 빗나간 열등감을....

다락방 2015-01-28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밭을 일구어야 하는 게 유일한 답이라니, 좀 씁쓸하네요.
그러니까 그 마음의 밭을 `어떻게` 일구어야 하는지, 그걸 알려주면 더 좋았을텐데요. 그쵸?

아무개 2015-01-28 21:18   좋아요 0 | URL
바로 그겁니다!
아쉽지만 어떻게해야하는지는
또 다른책에서 찿는걸로!

마노아 2015-01-28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다. 좋아요. 책 내용도 좋고, 아무개님 리뷰도 참 좋네요.
근데 이 책 `작곡`으로 표기되었네요. 혹시 음반이었나 싶어 상품 정보 들어갔다가 왔어요.^^

아무개 2015-01-28 21:20   좋아요 1 | URL
시디가 부록이더라구요
책작업과 함께 이루어졌다는데
대출받을때 모르고
책만 빌렸어요.
마노아님께 칭찬들으니
저도 너무 좋아요 데헷^^

단발머리 2015-01-29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어떻게 `마음 밭`을 가꾸면서 살 수 있을지,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나 스스로 당당하게 살 수 있을지, 많이 생각하게 되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가요, 아무개님~~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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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러한 위협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다.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우리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람 소비,약자에 대한 멸시,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그것은 저항이며
저항.그것은 창조다˝라고

p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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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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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누군가 나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 이는 나만의 이유가 아니다. 누구나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상할 때 혹은 고통으로 인한 죽음 직전에도 책을 읽으면위로받는다. 기분이 전환되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픈 상황에서 딴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덜 아프게 된다. 좋은 책은 세상이 내게 주는 선물, 생명, 세로토닌(행복감을 생산하는 뇌의 화학 물질)이다. 위로는 깨달음에서 온다. 이 위로가 몸에 습관이 되어 독서의 즐거움에 중독되면 다른 일에는 흥미가 떨어진다. p12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 , 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다. 간혹 내 글이 다소 어둡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읽는 책은 상처에만 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삶에서 기쁨이나 행복은 없냐고 묻는다. 왜 없겠는가.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냐는 것이겠지. 행과 불행은 사실이라기보다 자기 해석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고 독서는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p14



1장 고통

벌레 이야기-이청준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작품에서 아이의 죽음보다 더 잔인한 사건은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용서와 치유라는 당위다, 사람들, 심지어 남편조차 피해자가 조용히 하기를 원한다. 가해자와 사회는 자신이 져야 할 짐을 피해자의 어깨에 옮겨 놓고 , 불가능을 감상한다. 평화가 할 일은 그 짐을 제자리로 옮기는 고된 노력이지 , 평화 자체를 섬기는 것이아니다. p45


순이삼촌-현기영


 한반도에서 베네틱트 앤더슨의 "민족(국가)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주장은 늘 논쟁거리지만, 내 생각엔 엉뚱한 논란이다. (...)민족은 상상의 산물이기에 만족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사회가 어디까지를 국토로 상상하고 누구를 구성원으로 상정하는가. 이 유동성 때문에 누구든 언제든 국민에서 배제(포함)될 수 있다. 국민의 개념이나 국경이 확실해서 누구나 보호받으면 좋겠지만(인류 역사상 그런 적은 없다). 그 경계가 임의적이니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이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국익이라는 가능하지 않은 개념으로 대다수 국민의 이익이 박탈당한다. 국가 안보를 명분 삼아 전쟁터가 되었던 광주, 대추리, 매향리를 생각해보자, 거의 매일 우리 군경은 외적이 아니라 국민과 싸운다. p60


이십세기 기수-다지아 오사무


그러나 한수산의 분석이 딱 옳다. "그를 읽는다는 것은 젊은 날의 상처다. 그러므로 그 상처가 나을 때 독자는 그를 떠난다. 다자이는 홀로 거기 있다. 어린이가 자라면 또 다른 젊은이가 다자이를 만나고.... 다만, 나는 안다. 그는 자신의 초기 작품에서 더는 한발짝도 나아가지 않는, 나아가지 못한 작가라는 것을."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는 자학이 아니다, 인간은 "낳아지는'것이지, 누구도 '태어나지'않는다. 문법과 무관하게 탄생은 능돋태일수 없다, 자기 생명을 스스로 생산하는 사람이 있나? 우리는 동의 없이 태어났다. 살기 싫은 사람에게 이만큼 열 받는 일도 없다. 의지로 가능한 것은 자살뿐이다.(...)의제는 "태어나서 죄송하다."가 아니라 "사람같이 살지 않으면 어때요."다. 자살 욕구가 증상인 우울증 환자를 제외하면, 자살은 '사람답게'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그는 유서에 "소설 쓰기가 싫어져 죽는다."고 했다. 실연, 빚. 외로움, 망국, 사회주의 붕괴, 축구 팀 패배, 입시....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인생관과 처지에 따라 죽을 이유가 된다. 재능이 없다고 자살한 것은 '한가한'죽음이고 , 생활고로 죽는 것은 '절실'한가? 현실의 다급함 정도가 자살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살려면, 기대를 낮춰야 한다. '글을 쑬 수 없어 죽는다'는 건 '생명 경시'가 아니다, 오히려 삶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다. 삶의 매 순간이 의미, 호기심 , 열정의 연속이라고 믿는다면 '재능 없는 천재'의 좌절, 자기모순, 동반 자살 실패의 죄의식, 경멸하는 인간들과의 경쟁, 심지어 패배.... 이건 삶이 아니다. 그의 영원한 인기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죽도록 사랑했기 때문이다. p65


파이 이야기-얀 마텔


소년은 엉엉 운다. 살아남은 감격 때문이 아니라 7개월 넘게 함께했던 리처드 파커가 뒤도 안 돌아보고"아무 인사도 없이"떠났기 때문이다. (...) 인간이 급격히 외로워진 시기는 의미, 이성, 역사주의 따위를 앞세워 자연을 공격하면서 부터다,(..)파커가 아무 인사도 없이 떠났다. 사람은 인연 덕분에 산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스스로 부여한 의미일 뿐 자연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최대치의 관심라고 해봤자 '너희는 지구의 재앙이야.' p67

물론 인간은 무의미 속에서도 살지 못한다. 다만, 탐욕스러운데다 멍청하기까지 한 호모 사피엔스의 우월감이 만고의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지구의 유일한 인식자라는 생각은 스스로 만든 망상이다. 백번 양보해서 '생각하는 동물'이면 뭐하나, 문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찰나를 사는 먼지다. p68


은밀한 호황-김기태,하어영


누구의 인생도 피해 경험이 없는 경우는 없으며 동시에 평생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나 지칭이 될 수 없다. 타자화는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것, 그것 자체가 폭력이다. 내용의 호오가 본질이 아니다. 어머니 숭배와 '창녀' 혐오는 모두 남성 사회의 판타지다. 섹슈얼리티를 기준으로 여성을 이분하여 시민권 박탈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남성은 '아버지와 남창','곰과 여우'로 구분되지 않는다. p70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라몬 삼체드로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의 호소를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지일까, 의지일까. 현실이 먼저고 규범은 부차적 문제여야 한다. 문화와 윤리, 사회적 가치는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여 지속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가장 취약한 사람의 고통을 볼모로 기존 통념을 수호하려는 것은 인간이 지닌 최고의 악마성이다. 당위적인 윤리는 없다. 목적은 변화를 통해서만 성취되어야 한다.(...)죽음은 삶의 끝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뿐이다. 사후 세계에 다녀온 사람은 없다. 죽음이 어떤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에 비해 삶의 고통은 너무나 생생하다. 바로 우리 곁에서 경험하고 잘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구체적인 고통보다 관념적인 죽음의 공포에 압도된다.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엄청난 노동이다. 체제는 이러한 현실을 "신의 뜻", "생명의 소중함","남은 사람의 고통"등 엉뚱한 언어로 포장한다.

2014년 2월에 일어난 '송파 세 모녀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감은 그 고통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대립 대신, 고통에 대한 이해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져야 한다. 삶의 반대편에 죽음을 상정하여'없는 죽음'이 '있는 삶'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통해 일상을 협박하는 국가 안보 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이다.

신은 감당살 수 있는 고통만을 주신다? 그러시겠지. 그런데 왜 감당해야 할까?p82-83


2장 주변과 중심


이별의 기술-프랑코 라 세클라


"내게 설명해줘!"는 탈식민 정신분석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인'피해자의 정체성' 콤플렉스를 요약하는 문구이다. 피식민자는 이 질문에 시달리기 마련인데, 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지금의 나는 상대방으로 인한 결과(피해자)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떠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전혀 효과가 없다.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실리 측면에서도 그렇고. 사실 진짜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오하지 않다. '피해자'에게 관심도 없다.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 약자가 될 뿐이다. 그들은 단지 할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

이 질문은 고통뿐인 권력 관계의 지속을 보장할 뿐이다. 학대당하면서 스토커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원인을 찾고 싶은 심리에서는 누군가가'끝냈다'고 생각하다. 왜 나를 때릴까? 왜 나를 떠났을까? 왜 내가 아닌 그(그녀)지? 이건 우문도, 문장도, 질문도 아니다. 그냥 잘못된 진술, 나를 괴롭히는 지배 담론이다. 트라우마는 '가해자'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같은 것을 필요 없다. 전직 연인들은 그저, 이별이 한 인간의 정치학과 윤리학을 정확히 보여주는 지표일 뿐임을 인식하면 된다. p94-95


신약성서


성서는 투쟁을 먼저 가르치고 그다음에 용서를 가르쳤다. '하느님께 맡기자'는 , 방관이나 굴종이 아니다. 악과 싸우는 것은 일단 '반(反)악'일뿐 그것이 곧 선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인간이 혁명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악인에 맞서지 마라."는 악인과 상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악의 활동,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히 피해자가 된다. "왜?"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부터 '피해자 됨'의 진정한 의미, 불행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당하는 것을 넘어 사로잡히는 것이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 존중감을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그럼 누가 악과 싸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p100-101


3장 권력


리바이어던-토마스 홉스


"기혼녀의 정조 유린은 미혼녀의 그것보다 더 큰 범죄다". 현대 사회의 인식과는 반대다. 성폭력은 다른 범죄와 달리 피해자의 전력이 가해자의 그것보다 범죄 구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문제화되는 것이다. 피해자가 중산층 미혼 여성일 때와 성 산업 종사 여성일 경우 시선자체가 다르다. 미혼 여성과 미성년자의 피해를 기혼 여성보다 더 심각하게 인식하는 경향은, 여성의 가치가 섹스 경험 여부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족. 대영제국의 지식인 홉스에게 "식민지는 국가의 번식으로서 국가가 출산한 자녀"였다. 그럼. 우리는 일본의 자녀였다가 미국이 출산한 나라인가? 틀린 말도 아니다. 인조 인간 로봇은 서양 고전을 맨 정신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다. p153-154


군대를 버린 나라-아다치 리키야


약자 혐오는 작금의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이제까지 인류(서구)역사를 유지시켜 온 기반이다. 빈곤과 고립이 평화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이유다,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선함과 강함, 힘과 정의는 양립할 수 없다. 선과 정의는 객관적인 가치가 아니라 저마다 생각이 다른, 경쟁적인 담론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대표적 행위다{'정의의 전쟁','선정'...)그러니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니체)

무력과 군대 비판은 평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이는 특정한 사고방식 안에서만 설정 가능한 의제라를 것을 강조하고 싶다. 사회는 남성을 인간의 모델로 삼고 이들을 '보호자'로 상정하여 시민권의 위계를 만든다. 하지만 실제 폭력 행위자는 이들이다.

보호자보다 피보호자인 '비국민-노인, 아픈 사람, 장애인, 어린이, 타인을 보살피는 이들-이 훨씬 많다. 이들의 주요 관심사가 대결, 경쟁, 전쟁일까? 어떤 인간을 보편적 인간으로 삼고 어떤 삶을 인간의 조건으로 상정하고 사유의 기반으로 삼을 것인가에 따라 평화의 개념은 달라진다. p162-163


팍스 코리아나-한국인 시대가 온다-설용수


어떤 가치도 온 누리에 골고루 퍼지지 않는다. 미국 밖에서 전쟁이 없다면 미국 군수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뻔뻔한 이의 마음의 평화는 억울한 사람이 겪는 마음고통의 대가다. 관용은 개인의 인격이 아니라 사회가 쥐어준 권력에서 나온다. 때문에 '없는 자'의 관용은 비굴이나 아부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힐링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 성숙한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마음의 평화는 스스로에게 잠시 속아주는 것.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삶을 속여 봤자다. p188


4장 안다는 것


방법에의 도전-파울 파이어아벤트


이 책은 도그마를 지지한다. 도그마, 관점, 당파성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종합과 객관화를 위해 보충 노력을 하는 것은 무지의 결과다. 지성의 반대말은 절충, 균형, 원칙...이런 사고들이다.(...)문제는 콘텐츠의 질이다. 이것이 지식 산업의 유일한 경쟁력이다. 진리의 콘텐츠는 관점(독단)에서 나온다. 균형 패러다임에서는 관점의 의미와 효과를 알 수 없다. 인식은 자기 도그마가 무엇인지 아는 일이다. 자기 당파성도 모르고 상대방의 도그마도 모를 때, 균형 감각론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균형은 없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저울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약자의 대응은 두가지다. 하나는 객관을 향한 욕망을 접고 자기 입장을 더 깊이 있게 전개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 입장은 뭐냐?"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 뜻대로 균형 감각과 중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균형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p202-203


역사철학 테제-발터 벤야민


여성주의는 '전쟁과 평화'가 국가 주권 단위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사회적 약자의 일상과 무관한 구별이라고 비판해 왔다. 폭력피해 여성,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성 산업 종사 여성, 인신매매를 당한 여성, 난민 여성은 사는 게 전쟁이다. 벤야민의 테제가 바로 이것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겐 인생의 시시각각이 비상이고, 민중의 고통으로 품위를 유지하는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민중의 각성이 비상이다. '벤야민과 우리'는 진정한 비상사태, 즉 억눌린 자를 위한 봉기를 일으켜야 하는데, 지배자와 역사관을 공유하는 진보 진영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 p205


빅 이슈- 일본어판 214호


큰 정치와 작은 정치, 구조와 개인, 사회의 안과 밖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고, 그래서 건강한 몇몇 개인은 변혁의 주체이고, 소수자로 불리는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이 겪는 사소한 문제는 전체 운동이 성공한 이후 해결'해준다'는 발상. 이분법과 고통의 서열화가 반혁명이다. 이런 인식이 인류의 계속적인 혁명 시도가 정권 교체에 불과하게 된 이유이며, 결국 사회 변화에 대한 민중의 절망과 무관심('그 밥에 그 나물')을 초래 했다.

사는 것이 혁명이라면, 지구상 모든 이들의 일상은 혁명 중인 그 무엇이다. 내가 변혁하고자 하는 사회는 내 몸과 혼재된 나 자신이다. 쿠데타를 포함한 기존의 혁명 패러다임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민중을 분열시키는 '문제'로 보고 억압한다. 저출산, 동성애자의 결혼권 주장, 병역 거부, 높은 이혼율... "지금 일어나는 혁명을 인정하라." 그리고 해석하라. p221


포스트모던의 조건-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언제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 미래는 오지 않는 현재의 연속일 뿐이다. 스티브 잡스, 피터 드러커, 앨빈 토플러 등 혁신가들의 말대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방법은 직접 실현하는 일뿐이다.(하지만 '의지의 실현으로서 미래'가 근대성의 핵심이고 비인간성이다.)

(...)

포스트는 실제 이후가 아니라 인식 이후를 말한다. 포스트모던은 기존 역사를 혼란시키기 위한 것으로 모던과 갈등을 일으키는 모든 개념을 말한다. "포스트모던은 근대성의 일부임이 분명하다. 근대의 끝이 아니라 새롭게 생성되는 근대이다."


남성성/들-R.W 코넬


여성주의는 여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것이며 평등이 아니라 정의를 지향한다. 여성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당파적이지만 인간 해방을 위한 '계몽'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모든 사유는 경합하는 운동이지 그것을 독점할 자격이 있는 집단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남성 페미니스트는 가능하고 또 절실하게 필요하다.



5장 삶과 죽음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장승수


머리에서 기름이 빠져나가는 느낌, 빛이 투과되지 않는 심해에서 괴물과 마주한 기분, 완전히 무기력해져서 눈물만 흐르는 상태, 긴장을 견디다 못해 물건(연필)을 부수거나 더 큰 고통으로 상쇄하기 위한 자해(별로 안 아팠다.) 이 우주에 나도 타인도 없는 것 같은 무섭도록 외로운 상태, 단것을 먹어대도 두통만 올 뿐 배가 부르지 않았다. 무기력, 청소와 세수의 반복. 이것이 공부다.

내 무능력도 원인이겠지만 사유는 힘든 일이다.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 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p278


마지막 잎새-오 헨리


사람들이 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데 있지 않을까.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덜 외롭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는 것.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다. 버먼은 그렇게 죽었지만 비참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단히 위대하고 행복한 마침표도 아니다. 이것이 오 헨리의 작품의 매력이다. 슬픈데 따뜻하고, 찡한데 안식이 있다. 희망과 절망 그런 차원이 아니다. 애상이나 애잔함은 오히려 충만한 느낌이 있다. p290


에필로그


위약(僞藥) 효과일 뿐이며 억압을 가중시키는 책이 왜 '힐링'서로 분류되는가, 왜 모든 소설의 섹스 묘사에는 피임에 관한 부분은 없는가, 백설공주와'난쟁이'는 왜 커플이 되지 않는가, 잠자는 왕자는 없는데 왜 잠자는 공주는 그리 흔한가, 왜 여성학 책, 특히 한국 사회의 여성학 책들은 여성 문제(question)가 아니라 여성 문제(problems)를 주로 서술할까, 구약성서 <롯기>의 며느리 롯과 시어머니 나오미의 관계를 레즈비언임을 암시하는데 왜 사람들은 성서가 동성애를 금지했다고 못 박는가?


내가 생각하는 좋은 독후감, 내가 쓰고 싶은 독후감은 다른 시각으로 읽음으로써 '없는' 내용을 만들어내는 방법, 즉 지면을 투사하는 것이다. "행간을 읽는다"라고도 표현한다.

(...)


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면 독후감도 없다.(...)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당연히, 내용 요약으로 지면을 메울 필요가 없다. 독후에 자기 변화가 없다면? 왜 없었을까를 생각하고 그에 대해 쓰는 것도 좋은 독후감이 된다. 나는 왜 책을 읽고 아무 느낌이 없을까도 좋은 질문이다. 자기 탐구가 깊어진다는 점에서 더 좋은 독후감이 될 확률이 높다. 자신의 경험, 인식, 지식, 가치관, 감수성에 따라 여정의 깊이는 달라진다. 독후감의 수준은 여기서 결정된다.





나의 리뷰는 어째서 점점 더 밑줄긋기만으로 채워지고 있는것일까 고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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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9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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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야기중 <불행한 소년> 편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죽을때 까지 달콤한 거짓 위로속에서 살고 있는 나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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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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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너혼자 열내봤자 잘못한 그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네속만 상하니까
그만 잊어. 너 편하라고 그러는거니까
그만 용서해라˝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었던 적이있다.
나는 정말 나 편해보고자
무던히도 그 사람을 용서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노력이
그런 애쓺이 나를 더 힘들게만들었다.
남이 강요하는 용서는
위선을 강요하는것 이란걸 그땐 몰랐다.

하나님도 나의 용서의 기회를
가져가거나 줄수없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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