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사회에서 남성성은 어쩔 수 없이 권력과 정통성과 특권의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남성성은 흔히 국가의 권력과 불균등한 부의 분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남성성은 바깥으로는 가부장제로, 안으로는 가족으로 확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남성성은 상속의 권리, 여성 매매의 결과, 사회적 특권의 약속 등을 표상한다, 그렇지만 분명히 다른 많은 동일시의 경계선이 남성성의 영역을 가로지르면서 그 권력을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젠더, 등의 복잡한 차이로 분할한다. 안약 우리가 말하는 '지배적인 남성성'이 남자라는 사실과 권력의 자연화된 관계처럼 보인다면, 이런 남성성의 사회적 구성의 윤곽을 그리려고 남자들을 검토하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 책에서 내가 주장하는 것처럼, 남성성은 백인 남성 중간 계습늬 육체를 남기는 경우에만 명료한 남성성이 된다. 지나친 남성성에 관한 주장은 흑인의 육체(남성과 여성), 라틴계의 육체(남성과 여성),노동 계급의 육체에 처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으면, 불충분한 남성성은 대게 아시아계의 육체나 상층 계급의 육체로 형상화 된다. 가변적인 남성성을 이렇게 정형화된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야 말로 남성성이 백인 중간 계급 남성의 영역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특징짓는다. p26

 

 

 

 

 

 

 

 

 

 

 

 

 

 

 

 

 

 

『페니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를 읽을 때와 거의 비슷하다(결국 읽기를 포기했던.....)

어렵다 아 진짜 어렵다. 50페이지 정도 읽는데 일주일 걸렸는데,

다시 들춰보니 아하하하하하하하 그 50페이지가 전부다 새롭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 ㅠ..ㅠ

그나마 알아 먹은 문장 발췌하고 ....다시...도전!

 

 

일전에 D님과 "우리가 학교때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하버드를 갔을껍니다."라고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먹지도 못하는 책을 끼고 앉아 이렇게 끙끙거리게 될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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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7-2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끄덕끄덕) 그러니까 공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되는 것 같아요. 그쵸?
화이팅!!

(저는 불량학생답게 요즘 공부에 손놓고 있는중 -_-)

아무개 2015-07-24 15:27   좋아요 0 | URL
무한 끄덕끄덕~

불량학생이 아니라
낭만학생이겠쥬~~~♥♥♥
 

결국, 잡혀온 적들을 신사적으로 대하라는 케케묵은 규범 외에 내가 편드는 게 뭐란 말인가? 결국, 혼란스럽고 치욕스러운 눈길을 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새로운 형태의 타락상을 제외하면, 내가 반대하는 게 뭐란 말인가?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이 우스꽝스러운 야만인들을 정당하게 대우하라며 내가 군중들과 감히 맞설 수 있을까? 정의라는 말을 한 번 입 밖에 내면, 그 끝이 어디일 것인가? 아니야, 라고 소리치는 게 더 쉽다. 맞아 죽어 순교자가 되는게 더 쉽다. 야만인들을 위해 정의를 달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단두대에 머리를 대는 것이 더 쉽다. 그런 주장은 결국, 우리가 무기를 내려놓고 우리에게 땅을 강탈당한 사람들에게 성곽 문을 개방하라는 말밖에 더 되는가? 치안판사직을 역임했던 사람에게도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회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법을 수호하던 덕목 높은 옛 치안판사에게도, 국가의 적이 되어 폭행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 있는 옛 치안판사인 나에게도 나름대로 회의의 실타래가 없는 건아니다. p184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치안판사도 자기고백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그 내러티브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야만인들'을 억압하고 식민화하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연루외어 있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내비친다. 야만인들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제국주의자인 죨 대령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치안판사는 명명백백하게 정의를 표방하는 자로서, 야만인들에게 행해지는 제국주의적 폭력과는 담을 쌓고 있는 정의로운 진보주의자이다. 즉, 그는 제국주의자들의 '기다림'을 허구적인 것으로 인식할 줄 아는 지식인이자 진보주의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을 잘 들어보면, 그 자신도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암암리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죨대령이 촉력적인 수단으로 제국을 유지하려는 보수적·우파적 제국주의자라면, 온정적인 수단으로 제국을 영속화하려는 진보적 제국주의자이다. 이는 제국의 유지를 위해 봉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들이 서로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쿳시가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바로 이부분이다. 아니, 그의 소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쪽에 각별한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섣불리 피식민주의자를 대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끼어들 수 있는 허위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자기고백적인 치안판사의 문제는 따라서 남아프리카 백인작가인 쿳시의 것이다. 치안판사의 내러티브에 드러나는 공모성은 식민주의자의 후손이자 반체제 작가인 쿳시의 것이다. p272-3

 

쿳시의 소설에서도 기다리던 만인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어부들과 유목민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들은 죨 대령과 같은 제국주의자들이 생각하고 기다리는, 밤에 출현하여 부녀자들은 강간하고 아이들을 죽이며 집에 불을 지르는 야만인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상'은 '미친'것일지 몰라도 '전염성이 강하다'따라서 카바피의 시에서처럼, 그러한 야만인들은 쿳시의 소설에서도 존재하지는 않지만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존재해야만 하는 일종의 해결책이다. p271

                                                                                                                       <옮긴이의 말중 발췌>

 

 

 

존재하지도 않는 '야만인'을 기다리며 공포정치를 펴는 군대.

존재하지도 않는 '여성상'을 만들어 억압하는 남성권력자들.

타자화란 이런것이구나...

 

언제부터인가 소설등의 리뷰를 쓰는것이 점점더 여려워진다.

핵심 내용과 그에 맞는 옮긴이의 해설을 옮기는 것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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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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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이 허용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유리병에 갇힌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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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1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5-07-21 11:41   좋아요 0 | URL
ㅋ ㅋ 고마워요~

전 역시 소설을 `못 읽는 `인간인가봐요.
소설읽기 힘드러요 ㅠ..ㅠ
 

<서문>-정희진-

 

"동의되지 않은 성이 성폭력"이라는 지난 20년간 우리의 주장은, 동시에, 여성은 분명하게 싫다고 말했을 때만 성폭력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있다는 의미이다. 성폭력을 여성의동의의 권리를 침해하는 문제로 보는 것은, 젠더 계급이 존재하는 현실의 정치적 억압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 환원한다.(...)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에서 경제적, 정치적, 심리적 억압 조건을 초월하여 순수한 개인의 의지로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권력과 자원을 가질 수 있는가, 가진 적이 있는가, 동의와 거절의 의사 소통 자체가 젠더화된 의미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실현 가능한가. 이미 수천 년 동안 우리는 젠더화된 권력 관계의 배열 아래서 사회적 포지션을 형성하며 살아왔다.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의사 소통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존재했다면, 성폭력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람들은 여성의 말은 수용하거나 신뢰하지 않는다. p8

 

 

 

「인권과 평화의 관점에서 본 여성에 대한 폭력」-정희진-

 

여성폭력은 언제나 피해여성 개인의 고통보다 그 여성이 속한 집단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되어왔다. 특히 유교 전통과 성의 이중 규볌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범죄나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에 관한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명예나 도덕과 관련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여성은 피해 사실에 분노하기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피해 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힌'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한 폭력을 거론하는 여성은 공동체 내부의 치부를 폭로한 '배신자'로 간주된다. 성폭력 피해를 문제화하려는 여성이 가장 흔히 듣는 말은 '남자 앞길 망친 여자'라는 비난이다. 폭력 피해여성들도 자신의 고통이나 피해를 중심으로 생각하기보다 가족이나 직장, 조직, 학교 등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명예를 더 먼저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피해여성의 고통보다 가해남성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p34

 

 

"모든 인간은 폭력 당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하여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 개념은, 성차별 사회에서는 모순적인 면제가 되어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여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적 담론은 인간으로서 맞지 않을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를 더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의 (不正義)는 성역할로 정당화, 정상화된다. 여성의 성역할과 인권은 양립할 수 없다. p35

 

 

 

「가해자 중심 사회에서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가능한가-KBS노조 간부 성폭력 사건의 여성 인권 쟁점들」-전희경-

 

 

그러나 KBS사건에서 보듯이, 현행법보다 나은 원칙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도 현행법을 무시하는 운동사회의 문화는 피해자들의 손발만 묶을 뿐, 가해자의 명예훼손 고소에 대해서는 어떠한 제재도 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진보'의 의미를 독점한 '운동권'이 스스로를 '치외법권'지대로 설정하고 대의, 조직 보위, 동지애의 이름으로 성폭력을 은폐·재생산해온것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남성 중심적 운동 문화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잠재적 피해자로 인식하여, 기존 '진보'의 의미를 비판하고 '진보 진영'이라는 단일화된 상상적 공동체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p58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이란 남성의 경험에 입각해서 피해여성의 진술을 심문함으로써 구성된다. 즉 가해자의 진술이 아닌 피해자 진술의 '진실성','일관성','신빙성'을 심문하는 방식으로 '사실'이 구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끝까지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경험하는 성폭력을 '특수'한 경험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의심하는 가부장제 권력을 문제화하지 않은 채, "특수하기 때문에 피해자 진술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적 판단'이 남성 권력으로 작동하는 방식인 '보편-특수'의 구분을 해체하기 어렵다. 여성 피해 진술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검찰·법원의'객관성'을 문제화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으 질문에 '특수성'으로 답하는 것은 왜 남성의 경험은 '보편'으로 간주되는지에 대한 비판적 해제 및 상대화와 함께 이루어 질 때 그 전략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p74-75

 

 

 

「아내폭력 피해여성의 정당방위」-정춘숙-

 

아내구타를 제외하고 아내강간을 포함시킨 성폭력특별법안은 이후 국회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아내강간 조항마저 삭제된다. 당시 한 국외희원은 "아내강간을 처벌한다면 우리나라 남자들의 대부분은 아침에 직장에 가지 못하고 경찰서로 오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아내강간'이 남편의 권리이자 아내의 의무로서 얼마나 일상화 ·정상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일상'이고'정상'인 여성폭력을 문제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증한다. 김혜선(1995)은 아내구타 후 발생하는 강제적 성관계를 몇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첫째, 이렇게 이루어지는 성관계를 문제 해결의 한 방식으로 본다는 점이다. 둘째, 이러한 성관계는 여성을 비하하는 폭력의 마지막 단계라는 점이다. 셋째, 강제적인 성관계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통제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아내강간은 가족 내 성역할을 둘러싼 성별 권력 관계속에서 '정상적 부부관계"의 일부로 존재해왔던 것이다.p95

 

이처럼 그녀는 '자신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남편의 마음이었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남편을 왜 죽였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지만, 어떤 질문에도 김정미는 시종일관 '그가 나를 죽일 것'이라고 답변하였다(...)그녀의 행위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자신을 지킬수 있는 아무런 현실적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p108

 

그 이유는 "…피해자가 평상시에도 피고인에게 '죽여버린다'는 말을 자주 해왔으나 그다지 중한 상해를 자한 적은 없었던 사실 등을 인정할 수 있는바, 비록 피고인이 피해자로부터 먼저 가위 등으로 폭행·협박당하여 이에 맞서 위 피해자를 칼로 찔렀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위 행위는 상대방의 불법한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저항수단으로서의 소극적인 방어의 한도를 넘어 상대방에 대한 적극적인 반격 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어서…"라고 밝히고 있다. 즉 평상시에도 "죽여버린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지금까지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이 바귄 현재에도 '죽이지 않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고인의 피해자의 폭력에 대한 대항 행위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소극적 방어의 한도를 넘은 것으로 정당방뒤의 요건인 '방어의 상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p105

 

 

 

「미디어, 섹슈얼리티, 여성인권-강김아리-

 

그렇다면 여성 연예인들에 대한 인권 침해를 일상화.정상화하고 있는 황색 저널리즘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은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할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황색 저널리즘'이란 '인간의 불건전한 감정을 자극하는 범죄,괴기 사건, 성적 추문 등을 과대하게 취재, 보도하는 신문의 경향'을 말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선정주의적 보도 행태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성 중립적 외양을 띤'황색'저널리즘'이라는 정의로 인해, 여성주의자들이 이들 '황색지'와 싸울 때, 그것의 선정성, 자극성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해되기 쉽다. (...)문제는 이들 보도 행태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이 비판하는것이다. p137-8

 

 

「성폭력,성별 정치가 남성간의 정치로」-김효선-

 

성폭력 사건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성폭력으로 인해 침해된 피해자의 인권 회복이다. 사건 해결과정에서 보장되어야 할 가해자의 '인권'이란 , 형사 사법절차에서 가혹수사나 고문을 금지하는 등 '피의자'에게 보장되어야 할 권리에 한한다.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권이 지속적으로 침해되고 있는데도 가해자의 '인권'을 보호하라는 주장이 그토록 당연하게 주장되고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남성 중심 사회이며 여성 인권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는 반증이다. p165

 

우리나라 진보 세력의 여성 인권과 섹슈얼리티 권력에 대한 태도는, 유시민 씨가 개혁정당 후보로 보궐선거를 준비할 당시, 당 내 성폭력 사건 논락에 대해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고 피해여성 진영을 비판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여성 억압은 여전히 '진보'세력이 싸워야 할 영역이 아니며, 한국사회에서 진보는 남성만의 진보라는 것이다. p174

 

특별한 사람만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혼란을 갖게 되는 이면에는 '순수한 피해자','보호받아야 할 피해자'라는 통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통념은 여성 폭력에 대한 비판을 '피해 사실'이 아니라'피해자'에게 돌리게 한다. '전형적인 피해자'란 남성 사회의 신화이자 남성들이 투사하는 희망적 판타지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그런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 폭력을 문제화하는데서 중요한 것은 피해사실, 그 자체여야 한다. p176-7

 

 

「자발과 강제의 이분법을 넘어서」-정미례

 

성매매 피해여성이 대중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개인의 용기나 결단을 넘어서는 행위이다. 그녀들의'커밍 아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말할 수 있는 분위기-성의 이중 규범 비판, 자존감 향상 및 신변보장 등-가 만들어지고, 사회적 여건이 우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무엇이 성매매 피해인가가 정의조차 되지 않은 사회에서, 그녀들의 피해를 들을 수 있는 사회적 의미 체계가 없는 상황에서, 그녀들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성매매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피해의 '심각성'을 대중 앞에 '전시'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의미에서 "피해자가 대중 앞에 나서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언어와 권력을 독점한 자들의 무지와 오만이며, 또 다른 형태의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p216

 

가부장적인 사회·문화적 구조, 지구화되는 자본주의, 빈곤의 여성화, 국민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성 산업의 확산과 번창 등 사실 성매매를 문제화하는 것은 사회 전체를 문제화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러나 이 지난하고 아득한 투쟁의 시작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정 관념과의 싸움으로부터 출발한다. 성매매 불가피곤"역사 이래로 항상 있어왔다","성폭력을 예방한다"), 공창제 주장(이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을 위한 공창권이다)등 가부장제 사회의 수많은 신화와 신념에 도전하면서 여성주의 언어를 개발·설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성매매를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착취로 인식하는 의식의 전환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서는 성매매 피해자-생존자의 시각에서 인권 개념이 여성주의적으로 재구성되고, 서매매에 관한 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재사회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고통받는 여성들을 방치하고 개인으 책임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이제 더 이상 '필요약'이니 '자발성'이니 하는 남성의 경험과 해석만을 반영한 폭력적인 언어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 p232

 

 

「인권, 보현성과 특수성의 딜레마?」-정희진-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개념과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은, 법의 영역에서나 일상 생활에서나 모두 여성이 입장이 아니라 남성의 경험과 이해에의해 구성된다. 때문에 남녀 모두에게, 여성의 주장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과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남성의 주장은 자연스럽고 객관적인 것으로 수용된다. 5,000년이 넘는 성별 권력 관계의 이러한 역사성을 무시한채, 피해여성의 인권과 가해남성의 권력이 경합하는 상황에서 남성의 특권을 인권의 이름으로 옹호하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인권이 어떠한 방식으로 삭제되는지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성폭력 사건의'진실'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해남성과 가부장제 사회가 실질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이라기보다는 남성 생물학의 자연스런 결과로서 성폭력의 불가피성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p238

 

보편성을 구성하는 가치는 이미 특정 주체의 시각과 이해에 기반한 정치적 산물이다. 인간과 사회 현상을 보편과 특수의 구도로 인식하는 것은 근대 이후 주체가 타자를 구분하고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와 비서구, 남성과 여성, 이성애와 동성애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전자의 시각에서 후자가 규정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이다. 주체의 입장에서 구정되는 타자'디 아서더(the others)는 글자 그대로 주체 외의 '나머지 것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 구도에서 아시아는 서구에 대립되는 이항적 개념이 아니라 서구-비서구의 구조에서 서구 외 기타(the others)중 하나에 해당하게 된다. 보편성 담론은 이미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을 지닌다. 정말 사회 현상을 보편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특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즉 특수성이 존재한다면 보편은 이미 보편적일 수 없는 것이다. 보편과 특수는, 권력 주체가 규정한 '차이'를 권력주체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지배 담론일 뿐이다. p243-4

 

한 사회에서 인권 개념이 확장되는 원인, 과정, 영역은 동일하지 않다. 인권 문제가 발생하는 것 자체가 사회 구성원의 이해가 동질적이지 않기때문이다. 인권은 당위적 가치가 아니라 희망하는 지향이기 때문에, 인권개념은 인권의 적용을 원하는 사회 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세력간의 힘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남성, 서구 중심적인 접근 방식인 보편성-특수성의 구도는, 유동적이고 맥락적인'인권의 운동'을 포착하기 어렵게 하면 사회적 약자의 언어를 침묵시킨다.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를 역사적으로 맥락화하지 않는 인권 논의가 여성의 지위 변화에 따른 과정에서, 남성의 역차별 심리를 인권의 개념으로 정당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p249

 

 

같이 일하는 여성활동가들은 기혼 여성 활동가 처지의 고통과 힘겨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의 고충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표나지 않게 도와주었다. 남성 중심의 성별 분업 체계로 인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특히 아이가 있는 기혼)여성들은 이중 부담을 지게 된다.'헌신'이 규범화되어 있는 한국의 사회운동 문화 속에서 결국 이러한 나의 어려움은 남편이 아니라 다른 여성의 희생과 도움으로 '해결'되곤 했다. 남편은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아니는 내가 데리고 있었고, 부모가 각자 활동하는 동안 방치된 아이는 게임 중독에 빠져 혼자만의 생활을 견뎌내고 있었다. p212

또한 나의 여성운동은 가족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 한 것이었다. 나는 슈퍼우먼도 아니고 슈퍼우먼 콤플렉스로 고통받는 사람도 아니어서, 내게 부여된 삼중 사중 노동(가사노동, 육아노동,'운동', 생계)을 모두 감당할 능력이 없어 아이에게 늘 미안했다. p233

<활동가 정미례씨의 글중 발췌>

 

 

현장 활동가들의 고충과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도 결국 자신의 남편은 어쩔수 없구나 싶어 씁쓸하기도 하고....

단지 자신의 일(공적인 영역)을 열심히 하는것 때문에

노동운동을 한다는 남편도 아이게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까?

 

정희진의 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제 벌어졌던 사건들을 기반으로 쓰여진 글들이라 읽어내기 어렵지 않다. 따분한 이론서에 지쳤다면 정신 번쩍들게 하는 현실속 당신(여성)이야기도 지금쯤 한번 읽어 보는것도 좋을듯 싶다.

여성폭력은 우리의 지위고하, 미추,노소 그 어떤것에도 크게 상관없다.

'여성'이기만 하면 언제든 어디서든 벌어질수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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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07-20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핸폰으로 주르륵 한 번 읽었고요. 집에 가서 컴으로 복습해야겠어요. 아직도 어렵지만요@@

아, 공부.... 참 멋진 단어예요.^^

아무개 2015-07-21 08:08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되면 꼭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이론만 주절주절 거리는 책이 아니라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쓴 글들이라 현장감이 생생해요.
그만큼 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다락방 2015-07-2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아무개님 속도를 못따라잡겠어요.
이것도 찜할게요.
늘 먼저 앞서서 좋은 도서 소개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무개 2015-07-21 08:10   좋아요 0 | URL
저야 뭐 일도 없는 한량인지라 ㅎㅎ

다락님은 요새 몸과 마음이 아~~주 바쁘시니까
좀 한가해지면 한번 읽어 보셔욧 ^^

감은빛 2015-07-22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지 않아서 약간 뉘앙스가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사회운동을 하는 아빠들도 저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노동운동을 하셨던 저희 아버지도 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것이 운동을 하는 엄마들과는 분명 그 깊이와 폭이 다를 수 있겠지요.

제 경우는 자주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주로 제가 아이를 보는 날,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일이 늦게 끝나서,
아이들이 방과후교실이나 어린이집에서 저를 기다려야 할 때가 제일 미안하구요.
그렇게 늦게 돌아와서 배고프다고 하는 아이들을 기다리게 만들구선,
뒤늦게 반찬을 만들고 있을 때, 미안하고 한편으로 억울하기도 합니다.
아빠따라 외부 회의를 갔다가 늦게 돌아와서 늦게 씻고 잠들어서,
다음날 아침에 피로 때문에 늦게 일어나면 그 순간순간마다 미안하구요.
주말이라고 놀고 싶을 텐데, 토론회나 시위 현장에 데려갈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미안하구요.
아, 이거 끝이 없겠네요.

아참! 아무개님, 저에게 남겨주신 댓글에 답을 달았는데요.
말씀하신 책을 찾아보겠습니다.
다만 조금 여유있게 기다려주시길 부탁드려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서요.
찾던 못찾던 연락 드리겠습니다.

아무개 2015-07-23 09:01   좋아요 0 | URL
네 아마도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는 있는듯 해요.
아무래도 남성분들이 노동운동울 하면서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일반적인 직장 생활을 하는 평범한 아버지가 아니기에 드는 미안함이 더 크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여성들이 내가 `무슨일`을 하는것 때문에 아이에게 미안한것이 아니라
`일하는것 자체`로 아이에게 미안해 해야 하는것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바쁘신 분께 괜한 부탁을 드린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출판사에는 이메일로 답이 왔는데 재고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당장 급한것이 아니니
정말로 너무너무너무너무 할일이 없을때 찾아봐 주시면
정말로 너무너무너무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세상을 읽는 4가지 방법 Great 인문학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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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된 장자크 루소의 사진을 보다
우리가 불변의 남성성 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변하는것이고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것이 맞구나 싶다.
이 사진 어디에서 근대적 남성성을 찾을수 있나?

책내용과는 상관도 없는데 생각이 쏠려 있으니
보고 싶은것만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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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5-07-1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쩌다 보니 루소의 `에밀` 편역본을 읽고 있는데요, 시대의 한계는 있지만 나름대로는 되게 진보적이고... 섬세하더라고요! 루소가 섬세한 남자였다니! 이 그림 보니까 역시 싶어요. 루소도 아무개님도 반갑습니다. (^^)

아무개 2015-07-17 13:02   좋아요 0 | URL
이 사진속 루소의 모습은 아마도 그시대의 보편적 지식인의 남성상이 아니였을까 싶어요.
지금은 섬세하게 보이는 이런 모습이 그시대에는 남성적이었다는 뭐...

`에밀`은 도전할 엄두도 안나던데요. ㅡ..ㅡ

저는 루소라고 하면 다섯명의 자식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사람이라는 이미지만 떠올라요. 앞뒤 내용도 모르면서 말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