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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평점 :
시가 시인의 삶을 투영하고 사랑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독자들과 공유한다면 시인의 작품세계에 녹아있는 사상을 철학과 연결 지어 본다면 어떨까? 디지털 컨버전스를 연상시키는 인문학적 컨버전스라고 불리울 수 있을까?
전작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을 통해 철학과 시의 만남으로 인간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인문학적 측면에서 시인의 사상을 담은 시와 사상가의 철학적 사유의 소유물인 철학을 훌륭하게 접목시킨 저자가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을 펴내면서 또 한번 시와 철학의 만남을 통해 독자들의 감성과 이성의 접점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조우시킨다.
시인의 시를 읽고 공감하는 것은 시집을 찾는 독자들에게는 당연한 목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한번 더 깊게 들어가 시라는 창작물을 토해 낸 시인의 고통(?) 속에 깃들여진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현의 계기가 된 사유의 거리를 좁혀가야 할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 필요한 것이 저자는 철학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그리고 자칫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시와 철학의 매칭과 시인의 창작배경을 철학가의 사상과 연결 짓는데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과 평단의 호의적 지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시인의 시를 소개하면서 이 시가 탄생하게 된 시인의 사상과 철학을 연결시켜 세상을 바라본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의 논리에 밀려 개인의 존재와 인격은 돈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어져 간다고 저자는 개탄한다. 오직 세상 속에서 단 하나뿐인 자신의 아이덴티티 마저 돈의 가치에 충족되기 위해 맞춰지도록 스펙을 쌓아가기 위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힘들어 하듯, 스스로 학대하고 강요받는 고통 속에 인간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하고 어떻게 치유해 나갈지를 저자는 시와 철학, 나아가 인문학에 그 희망을 걸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전파하기 위한 일련의 저술 활동 선상에 놓여 있는 책이 바로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괴로움> 연작이 아닐까 싶다.
일례를 들어보면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 자동판매기를 / 매춘부라 불러도 되겠다 / 황금교회라 불러도 되겠다"(본문 46페이지중 최승호의 자동판매기)
자판기와 관련된 작은 실수를 통해 자본과 도시의 물질만능주의를 드러낸 최승호의 시에서 사소한 실수에 불과한 것 아닌가하는 독자들의 시선에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너무 무감각해진 모습을 알게되고 짐멜을 통해 우리가 자본의 논리에 매몰되어 노예화 되어버렸음을 깨닫게 해준다.
물건을 살 때 느끼는 행복감에 빠져든 나머지 더이상 상품을 사기 위해 보유한 돈이 없을 때 우리는 돈을 벌기위해 돈을 가진 사람에게 상품이라는 용역을 제공함으로서 하나의 인격으로 자신을 유지하기 보다는 개별적인 상품으로 전락해 버림을 짐멜은 지적한다
결국 짐멜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 종교를 통해 편안함을 느끼듯 돈에 대한 신앙심을 가진 현대인들이 자본이라는 종교를 통해 편안함을 느끼는 것 또한 동일한 작동기제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즉, 시인 최승호는 일상의 사소한 사건을 통해 돈을 경배하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종교의 실상을 새삼 깨닫게 되었고 저자는 자본주의의 괴물적 속성을 짐멜을 통해 읽어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 외에도 마초적 남성위주의 세계관 속에서 마이너리티의 범주에 속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관점에서 슬픔을 느끼면서도(시인 문정희의 '유방') 여성이 성정체성을 버리고 남성적 정체성을 내면화하면서까지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성공하기(엄밀하게 말해 살아남기)보다는 남성들이 여성성을 확보함으로서 과거의 참혹했던 갈등의 역사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타자와 공존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이리가레이의 사상을 소개하면서 차이의 포용에 대한 수용을 토로한다.
대중철학자인 저자의 의도는 이러한 소재에서 드러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기를 원하기에 그래왔던 시인과 철학가들의 만남을 통해 그들을 소개시켜왔던 것이라고....
인문정신의 소망인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영위하고 그것을 표현하라!"임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알리고 이를 지킬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그것이 저자의 목표이고 이 책의 집필 의도임을 말이다.
하지만 저자와 우리의 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자본의 노예로서 충실하게 복무하려고 늘 다짐하는 우리들은 이미 인문학을 코너속에 몰아버렸고 학문의 상아탑은 돈을 벌기위한 전위로서 대기업의 업무 메뉴얼 속에 포위되어 버렸다.(인기 야구구단을 소유한 D기업이 소유한 서을 소재 모대학의 인문학 분야 전공의 말살)
그뿐인가? 우리는 우리를 찾기 위한 노력에 또하나의 큰 적을 앞에 두고 있다. 기 드보르가 '스펙타클은 대화와 대립한다'고 얘기했던 부분, 시인 함민복의 '우울씨의 일일 10'에서 나타난 자본주의 체제에 포획된 현대인의 우울한 삶 중에서 특히 시각적인 부분에 특화시켜 산업화 되어버린 시각적 노예화의 시대를 빼놓을 수 없다.
지인이던 아니던 누군가를 앞에 대면하고 있지만 '손안에 세상'을 구현했다고 자랑하는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세상, 백마 탄 왕자가 나오는 드라마가 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어느덧 끊임없는 자가 복제에 변종 강화된 소재로 무장한 드라마의 출현에 텔레비전 앞에 예의 언제나 그래 왔듯이 자리 잡으며 우리는 인간으로부터 대화와 소통, 연대의 계기를 박탈 당하고 있다.(대중문화의 유혹을 거부하며, 함민복과 기 드보르)
우리의 일상에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괴로움들... 저자의 말처럼 '인간에게 즐거움은 괴로움이라는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야만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시간들이 어둡고 긴 터널일지 아니면 끝없는 암흑의 심연일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저자는 조언해 준다.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우리는 인생극장을 앞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