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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급론 (무삭제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24
소스타인 베블런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0월
평점 :
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90년대초 열풍을 몰고 왔던 농구 인기에 그야말로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서장훈 등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던 연세대 농구팀은 연예계 스타를 능가하는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연대 농구팀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당시 최희암 감독은 선수들에게 ‘너희들은 팬에게 고마워 해야 한다. 너희가 볼펜 한자루 만들어 봤냐?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하는 너희를 좋아해주는 팬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라며 선수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농구, 야구, 축구 등 프로스포츠나 연예인들의 놀랄만한 금전적 수입은 생산현장에서 노동을 통해 댓가를 받는 이들에게 위화감이 들 정도다. 유희에 불과한 분야의 종사자인 그들에 개런티는 너무 과도한 것은 아닐까?
해외 출장에 앞서 과부하가 걸릴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출근한 지난 토요일, 일을 마치고 강남역을 지나다가 우연히 오픈한 샤넬 ‘레드 뮤지엄’ 팝업스토어 앞에 끝을 알수 없이 줄지어 선 사람들을 보았다. ‘명품은 경기를 타지 않는구나’라는 걸 새삼 절감했다. 같은 의미에서 최근 중국을 주름잡던 국내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들이 연거푸 고배를 마신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를 반영한 듯 화장품株는 연일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를 이용하기 보다 샤넬, 루이비통 등 고가 외국 명품의 소비에 주력하다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라는 가정하에서 한정된 재화로 보다 많은 만족(효용)을 얻기를 원한다. 경제학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값싼 재화는 수요가 몰리게 마련이고 가치가 오르면 수요는 자연스럽게 조정 내지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수요공급곡선을 고안하고 수요와 공급곡선이 만나는 점이 적정 가격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나타난다. 많은 재화를 가진 부유층은 합리적 존재임에도 불구(경제학자들은 그렇다고 분석하지만)하고 정작 가격이 더 비싼 재화에 경쟁적으로 소비를 확대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중국의 화장품 시장도 값싸면서 제품의 질이 좋은 화장품에 수요가 몰려야 하는데 고가의 외국 명품 화장품에 소비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요즘 중국 경제는 미국과의 무역전쟁의 여파로 중국의 3분기 GDP 성장률은 6.5%로 전분기대비 0.2%포인트 하락했다. 소비심리가 급격히 위축됐는데도 명품 소비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는다. 이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왜일까? 부유층의 소비심리에 대한 혜안은 약 120여년전 소스타인 베블런이라는 경제학자의 저서 <유한계급론>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글은 베블런의 명저 <유한계급론>을 읽고 난 서평이다.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할 수 없다. 경제사는 물론 인류 문화사를 아우르는 불후의 인문학 서적이기도 한 결과물에 대해 어찌 범인(凡人)이 왈가왈부하겠는가? 경제학을 전공하다 보니 대학생 시절 읽었던 책을 거의 20여년 넘은 지금 다시 읽는 시간을 가지게 된 데 대해 무척 의미있고 고마운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사족에 가까운 설명에도 있듯이 <유한계급론>은 부유층의 소비심리에 대한 베블런의 분석과 혜안이 담김 책이다. 아울러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생산을 주로 담당하는 중하위 계층 시민들이 마르크스, 엥겔스 등 공산주의 창시자들이 주창한 공황론과 이를 통해 야기되는 자본주의체제 붕괴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빗나가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분석기제로 작용한다. 기본적인 생활의 영위 자체가 버거운 이들에게 현재 상황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선택은 노동자 혁명 보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부유층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절실하기 때문이란다. 진보와 보수의 충돌에 있어서 이해가 안가는 노동계층의 보수화에 대한 이해가 백여년전 한 석학의 저서로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부와 명예를 거머쥔 지배계층 내지 부유층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소비에 더 주력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의 형성과 행태를 설명하기 위해 태초 야만문화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상류계급은 통치(정치), 전쟁, 종교적 예배, 스포츠 등 4대 활동에 주력하였고 반대로 하층 계급은 육체노동, 생산직, 생계를 위한 천박한(?) 일상생활을 담당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연세대 농구선수들은 최희암 감독지 지적했듯이 생산직에 종사하는 계층이 아닌 유한계급에 속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정욕구(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가 있다.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서 더 큰 명예를 얻고 이를 통해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쟁에 나서야 하며 경쟁을 통해 얻은 성과, 특히 금전적 부가 가장 큰 과시욕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 경쟁을 통해 얻은 부를 과시하고 싶어하고 실제로 과시하는 과정이 바로 ‘베블런효과’라는 경제학 용어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쌀수록 자신의 부와 명예를 여기에 투영시켜 타인(하위계층)에 자랑하려는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결국 인간이 일개미처럼 생산성 향상을 통한 활동보다 부라는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하면 하위 계층 역시 상류계층과 비슷한 소비활동에 나선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능력의 과시는 바로 여기 있고 이는 합리적 의사결정과 다른 개념이 되는 것이다. 물론 베블런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데는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합리적 의사결정의 주체로서 이성적인 인간을 전제로한 경제학의 개념에 처음으로 반대 의견이 아닐까? 문화현상으로서 이해와 분석의 도구로서 이 책은 경제사 서적으로서 존재 못지않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계속 이 책이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할 필요성이기도 하다.
베블런의 유한계급 이론은 후에 환자(자본주의)를 고치기 위한 증상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야 한다면서, 120년전 미국 유한계급과 기업들의 여러 결점들을 지적하고, 또 그것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언급한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요제프 슘페터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유한계급론>은 앞으로도 인간의 소비심리와 행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독서 진도가 잘 안 나가 고생(?)하더라도 꼭 완독하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