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실린 글 "Television as Ideology". 

글이 쓰인 당시는 tv가 아직 보편화되기 전 (이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시절에 일찌감치, tv의 전면 보급이 무얼 뜻하나, 어떻게 tv는 "악마적 객관 정신"의 편에 설 것인가. (.....) 이런 걸 분석하는 글. 이 글 한 대목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현대의 기술이 동화 속 환상의 실현이라는 상투적 주장들에 담긴 진실을 보려면, 환상의 실현에 대해 동화가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기억해야 한다. 소원의 충족이 소원하던 사람에게 좋은 결과가 되는 예는 거의 없다. 옳은 것을 소망하기, 이것은 가장 어려운 기예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그 기예와 단절된다. 동화에서 요정은 나무꾼 남편에게 세 개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고, 남편은 소세지가 아내의 코에 붙었다 떨어지게 하는 데에 그 소원을 다 쓴다. (.....)" 



저 밑줄 문장. 이 문장을 제사로 쓰는 에세이, 혹은 회고록, 혹은 무엇이든, 아무튼 이걸 지속적으로 생각하면서 이어지는 글을 모두가 쓴다면 좋을 것이다. 모두가 이걸 생에에 한 번은 에피그래프로 씁시다! 쓰기에 바쳐진 1년을 우리가 산다면, 이 문장을 기억하는 적어도 한 문단을 우리는 써야 하겠. 


영어로는 이렇습니다: "Wishing for the right things is the most difficult art of all, and since childhood we are weaned from it." 폴 발레리가 했다는 말, "인간의 정신은 그가 무얼 원할 수 있나로 알 수 있다": 이 말의 인용같은 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발레리를 생각하면서 쓴 문장. 위대한 작가, 사상가라면 반드시 "옳은 것을 소망하기"라는 어려운 기예, ㅎㅎㅎㅎ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는 생각도. "비이성과 마주치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라" 바슐라르의 이 요구도, 옳은 것을 소망하기 위해 필요한 단련을 말한 것이 아닌가. 


인간을 지속적으로 마모시키는 환경은 바로 이 기예를 마모, 타락시키는 환경이기도. 


아도르노 얘기 그만해! 

한 번만. 헤이 한 번만..... 나의 눈을 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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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전집. (이것들 말고 유고집도 있어서 "전집"이 옳은 말이 아니긴 하지만 그의 생전 출판 글들을 거의 모은 거라면 "선집"보다는 "전집"이 옳아 보...). 몇 년 전에 북디파지터리였나, 저렴하게 나온 적 있었다. 20만원 정도? 살까 말까 꽤 망설였는데 돈 걱정도 해야했지만 둘 곳 걱정이 더 우세. 이게 오면 어따 둠. 진짜 둘 곳이 없어. 돈 아주 적고 집은 극히 좁았던 삶. 독일어잖아.. 같은 걱정은 하지 않는다. 니체 독일어 전집은 이보다 작아서 사두었고 몇 년 내내 그림의 책이지만 언제 봐도 잘 샀다고 생각하는 그림의 책. 


영어로 나온 그의 책들은, 빠져 있던 음악학 책들을 얼마 전 하나 사고 또 사고 줄줄이 사들이면서, 전작주의에 근접했다. 이것들도 보고 있으면 너무 잘 산 책들. 오호호... 보면 웃음. 


사실 21년 연말 페이퍼 쓰면서 생각하게 되던 것들이 아주 많았다. 인문학 전공자에게 연구라는 것에 대해. 읽기와 쓰기에 대해. 서재에 쓰기엔 부적합한 내용. 회고록이 기대되는 게 (결과가 기대되는 게 아니라 쓰는 과정이) 부적합, 부적절하게 들리기 쉬울 그것들이 어떻게 담길 것인지. 과연. 생각이 어떻게 정리되고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 논문은 왜 쓰는가. 어떤 논문이 좋은 논문인가. 이런 주제로 말하고 쓰려면 나 자신이 ㅎㅎㅎㅎㅎㅎ 적지 않게 썼고 적지 않게 좋은 논문을 쓴 사람이어야 하잖아, 아니면서 저런 얘기를 하는 그런, 망가진, 그럴 수는 없. 해서 어쨌든 그 많았던 생각들을 회고록에서나 쓰게 될 것이든 아니든, 일단은 ㅈㄴ 논문 쓰기를 해야한다. 


그런데 이 주제에 대해서,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내 지금 삶과 바로 연결되는) 많은 주제들에 대해서, 참으로 예리하고 꼭 필요한 지적, 격려, 이런 것들이 아도르노 책들에 있다. 아 그리하여, 이렇게 연달아 그에 대한 포스팅을 하게 되었..... 로티 책들 읽던 동안엔 그가 논의하던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 전에 누군가가 몰입해서 열광하던 철학자였던 걸 기억하면서 바로 그 이유로 시큰둥해지던데 말입니다. 아도르노 얘기 그만 하고 다른 주제가 있을 때까지 ㅈㄴ 논문 쓰러 가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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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2-01-28 06: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ㅈㄴ 화이팅!

몰리 2022-01-28 09:48   좋아요 1 | URL
우리 달립시다, 달려요!
 



"--으로 중요한 성장의 경험을 하다" 대략 이런 의미로 쓰이는 영어 표현이 있는데  

cut one's teeth on --.  


<계몽의 변증법>이 내게 철학을 알게 했다. 

저런 말을 하고 싶다면 I cut my philosophical teeth on Dialectic of Enlightenment. 이렇게 해볼 수 있. 



그런데 실제로 좀 그렇다. 07년 1월에 (거의 정확히 15년전) 이 책 구입했다고 아마존 구입 기록이 알려주는데, 이 책 정말 최고였다. 세상엔 이런 책이 있구나. 책이 이런 걸 할 수 있구나.... 의 경이감. 영어판엔 69년 신판 서문, 이탈리아어판 서문, 44년/47년판 서문, 이렇게 서문 여럿이 앞에 있고 그 서문들 통과한 다음 본문으로 가게 되는데 서문들도 아주 그냥 ;;;; 오. 오오. 인데 이들 다음 나오는 그 유명한 첫문장. "사유의 진보로서 계몽은 인간을 공포에서 해방시키고 주인이 되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계몽된 세계에서 재난이 승리를 구가한다." 



아도르노 책들도 하나씩 워드 파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계몽의 변증법> 저 첫 두 문장, 느닷없이 충격적이던 이 문장 놓고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이 책이 재난을 말하는 걸 보고 내가 생각했던 재난으로 책 세 권은 쓰겠네, 심정 되었었다. 



요즘 그의 책들 보면, "쓸데없이 고퀄" 이 말 생각난다. 

악마적 객관 정신이 지적 에너지를 비틀고 고사시키는 이 시대 이곳에서 ㅎㅎㅎㅎㅎ 아도르노 식으로 쓸데없이 고퀄, 진짜 너무 좋음. 막 살아나는 느낌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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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진보. 그것은 

우리가 몰랐다는 걸 알게 되는 일." 


평범하고 하나마나한 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바슐라르 과학철학 안에 놓고 보면 좀 심오해지는 말이 아닌가 하게 된다. 어디선가 그는 

"과학사를 읽으며 비이성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데, 그에게 인간이 무얼 "몰랐다" 이건 거의 도덕적 퇴보, 타락. 해서 개혁의 대상. 조상이 몰랐던 것에 후대가 느껴야 할 책임. 바슐라르 과학철학의 이런 면모를 미셸 세르가 '극혐'했다. 나는 너무 좋음. 비이성과 마주칠 때 양심의 가책.......... 이 말 너무 심오하다고 거의 눈물을 흘리며 감동, 감탄. 


과학적 합리성의 면모로 그가 강조하는 하나가 "discursivity"다. 

저렇게 명사형으로는 거의 쓰지 않고 (두세 번 정도?) 형용사 형으로 (discursif. discursive) 아주 많이 쓰신다. 이 단어를 그의 책에서 처음 접하면, 난데없게 느껴진다. "담론(언설)에 관한" -->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충실하게 이런 의미를 적용해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여기서 discursive라니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 나만 그랬던 게 아니구나 했던 게, <새로운 과학 정신> 영어 번역 보면 저 단어를 debatable로 번역하기도 하고,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 저 책의 역자 또한 깊이 어리둥절. 




저 단어로 그가 말하고자 한 건 

합리성의 미완의 성격, 그리고 진행의 성격. 

즉각적인 것, 최종적인 것의 정반대의 성격. 

우리는 단번에, 최종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은 미완이고 진행 중이다. 


저 면모들을 특히 강조하는 어휘이지만 그와 함께 합리성의 대화적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합리성, 그리고 인간의 인식 행위를 바슐라르가 말하는 "discursive"의 의미에서 이해할 때, 거의 구원을 성취할 수 있지 않나, 여기 구원이 있는 거 아닙니까, 나는 생각했다. 


특히 당신이 선빵에 지쳤다면. 

혹은 당신이 거의 늘 혼자라면, 당신의 생각을 언제나 이어가기 위하여. ;;;;;;; 하튼 바슐라르의 "discursivity" 이것엔, 잘 용서하기와 잘 이끌기의 미덕이 담겨 있지 않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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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많이 사고 있다. 

살 때는 오 이거, 이거 사야해. 이것도 사야지. 이것도! 이러다가 

책 박스가 도착하면 그냥 밀어두고 (안에 뭐가 있는지 아니까...) 이틀 뒤에 열어보면서, 그러면서 부지런히 사고 있다. 


연초에 이런 결심 했었다. 

올해 연말에, 아도르노와 바슐라르가 나눈 가상의 대화... 를 써야겠다고 작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런 작정이 가능해지면 올해는 너에게 최고의 해일 것이다. 

매일 저녁이 되면, 저 목표를 위해 오늘은 무엇을 했나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대화를 위해 오늘 네가 한 일은 무엇인가. 


아직까지는 그들의 대화를 위해 매일 무얼 하고 있기는 하다. 

아주 그냥 두 사람 책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 생각해 보니, 사실 이건 아주 너무 매우 좋은 일이 아닌가. 모니터에서 좌우, 심지어 등 뒤, 어딜 봐도 두 사람의 책들이 보인다는 건. 



그랜드 심연 호텔. 

아도르노가 어떤 강의록에서 '방향이 근원적으로 틀렸으나 장엄하게 틀린 책, 틀림과 무관하게도 장엄한 책, 역사 철학의 위대한 시도' 정도로, 비꼬는 게 아니고 사실 굉장한 상찬으로 루카치 <소설의 이론> 얘기를 꺼내더니 "이제 이 책의 재판이 나왔으니 여러분 모두 이 책을 읽기를 권합니다. 그가 이 책 서두에서 나를 강하게 공격한 걸 알고 있지만 권합니다. 이 책에서 그의 성취와 나에 대한 그의 혹평 사이에 관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저런 말을 하는데, 웃기기도 했고 뭔가 감동적이기도 했다. 

리처드 로티 책들 감탄하면서 읽다가 아도르노를 읽으면, 가장 감탄스러울 때의 로티라 해도 아도르노와 비교하면 애들 장난이지 ("child's play", 헤겔이 좋아했던 거 같은 구절...), 같은 생각 든다. 



연말, 12월 27일 즈음 서재에 나타나 "허허허 제가 말입니다 <최악을 아는 것이 좋다>를 끝냈...!" 

.... 럴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 오늘 서재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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