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세부적인 것에는 여러 면이 있어서 서로 붙어 있는 진실의 조각들 사이에서밖에는 끼어 있지 못하는데도 그녀는 그중 하나를 제멋대로 뽑아내 자기가 꾸며 낸 세부적인 거짓말 사이에 끼워 넣으려 했고, 그 꾸며 낸 세부적인 거짓말이 어떠하든, 거기에는 지나친 면과 채워지지 않는 면이 있기 마련이어서, 바로 이점이 진짜 세부적인 진실이 있을 곳이 그녀가 꾸며 낸 거짓말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폭로했다.

스완은 오데트가 겁도 없이 그에게 맡긴, 그만큼 그의 양심에 대한 그녀 신뢰가 절대적인 봉투 앞에서 잠시 비통하고도 당혹스러우며 그렇지만 행복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봉투의 투명한 유리 너머로, 그가 알게 되리라고 결코 생각해 본 적 없던 사건의 비밀과 더불어 오데트 삶의 일부가, 마치 미지의 세계로부터 오려 낸 좁고 빛나는 단면인 듯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러자 그의 질투심에는 독립적이고 이기적인 생명력이 있어 질투를 부양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먹어 치우기라도 하듯, 비록 스완 자신을 희생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실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질투심은 필요한 양분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마음의 병이라는 화학 작용에 따라 자신의 사랑으로 질투를 만들어 낸 다음, 다시 오데트에 대한 다정함과 연민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다시 귀엽고 착한 오데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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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라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편적인 것은 오로지 여러 개체에 공통되는 일반적인 개념과 개체 들을 가리키는 이름들뿐이라고 보았다.

엘로이즈의 시대를 지배하던 도덕적 관념의 실제적인 위상은 일반적으로 중세를 생각하며 떠올리는 종교적 윤리관, 즉 전적으로 교회의 권위와 강압적인 규례에 의존하는 윤리관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세기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문화혁명을 사실상 주도했던 나라는 프랑스다. 랑과 오를레앙, 랭스, 오세르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학교들이 세워졌고 파리는 ‘새로운 아테네’라는 신화를 탄생시키면서 수도원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한 세속적 지혜mundana sapientia의 수도로 등극했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가장 순수한 앎의 형태로 그를 이해하는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신을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는 과정은 성찰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낳지 않을 수 없었다. 신에 대한 사랑은 생 빅토르 신학의 특징 중 하나인 이성과 의지와 욕망의 조합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찰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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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마리아 안젤릴로 지음, 이영민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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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텍-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다비데 도메니치 지음, 김원옥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1월
34,000원 → 30,600원(10%할인) / 마일리지 1,700원(5% 적립)
2023년 10월 31일에 저장
절판
이슬람-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프란체스카 로마나 로마니 지음, 이유경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2월
34,000원 → 30,600원(10%할인) / 마일리지 1,700원(5% 적립)
2023년 10월 31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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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안나 반잔 지음, 송대범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2월
34,000원 → 30,600원(10%할인) / 마일리지 1,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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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세계 10대 문명 7
안나 반잔 지음, 송대범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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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는 ˝어떤 나라들도 페르시아만큼 외국관습을 기꺼이 채택하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페르세폴리스에서는 다양한 인종요소들이 통합되어 아케메네스 양식을 구성하는 독창적인 종합양식을 형성했다. _ 안나 반잔, <페르시아>, p80

안나 반잔의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문명의 유적, 유물들을 통해 이란-페르시아 문명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책에 담긴 사진들은 시간에 따라 정렬되어 독자들을 마치 박물관으로 인도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책의 핵심은 이 부분이지만, 리뷰로 옮기기에는 한계가 이어 아쉽게 느껴진다.

아케메네스 제국을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어느 정도 제국의과업을 지속하려고 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실로 빠르게 ‘이란화‘되었다. 그는 사트라프피 체제를 토대로 아케메네스의 통치체제를 유지햇다. 그리고 그는 이란 고원의 지배자들을 부유하게 했던 교통망과 교역의 확장 노력을 모방했다. _ 안나 반잔, <페르시아>, p130

이란 고원에 형성된 중앙아시아의 제국(帝國)의 역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글로벌-로컬 global-local‘의 순환이 아닐까 생각된다.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은 중앙집권화된 다리우스의 제국이 없었다면, 그토록 짧은 시기에 확장될 수 없었을 것이고, 이전 시기의 융합정책이 없었다면, 헬레니즘 시대의 코스모폴리탄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글로벌 global‘이라고 한다면, 이어지는 ‘파르티아-사산조‘의 역사는 ‘로컬 local‘이라는 반동(反動)의 움직임이다.

파르티아인들의 도래는 이란 고원의 헬레니즘을 종식시키고 ‘이란다움‘의 부활로 이어졌다(p132)... 사산 왕조는 이란의 심장부인 파르스 출신인 자신들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적통을 잇는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가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와는 달랐다. 서쪽으로는 강력한 로마 제국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박트리아에 정착해서 기원전 100년에 최종적으로 그리스인들을 몰아낸 쿠샨 왕국이 있었다. 또한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서쪽으로 밀고 나오는 헤프탈족, 즉 백인 훈족들의 위협도 있었다. _ 안나 반잔, <페르시아>, p144

이란-페르시아 문명의 ‘글로벌-로컬‘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은 이슬람화된 이후 역사 속에서도 이어진다. 세계종교인 이슬람교 내에서 소수파인 시아파가 다수인 아랍과는 다른 이란만이 갖는 독특함을 발견하게 된다.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가 결혼했다는 <쿠시나메>의 이야기에서 보여지듯 세계와 연결되었으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함을 간직한 이란-페르시아 문명의 성격을 생각하게 되는 도록이었다...

그 이후 사산 왕조의 문화는 일본에까지 건너갔다. 나라[奈良]에 있는 왕실 보물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서 우리는 중국을 통해 전해진 각종 악기, 식기, 상자들과 특히 사산 왕조의 영향을 받은 직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_ 안나 반잔, <페르시아>,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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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체제’의 기본은 안전보장과 경제협력, 간단히 말하자면 ‘안보 경제’였다. 원래, 한일교섭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던 식민지배 기간에 한일 간에 이전된 경제적 가치의 원상 복귀를 꾀하는 방법으로 청산을 시도한 것이었다. 또 그것에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을 입혀, 그것을 수단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하여 한일의 안보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렇듯, 안보와 경제를 우선함으로써 역사 청산은 미흡하게 매듭지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경제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일본에서 원재료나 기계, 부품 등의 수입이 늘어났으나, 일본에 대한 공업제품의 수출이 수입과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일 무역 적자는 날로 증대되었다.

일본 정부나 기업은 자국의 산업구조 고도화에 따른 국제 분업 체제의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에 대한 이해도가 비교적 높았다.

더욱이 한일의 경제협력이 한일 각자의 정부 여당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강화한다는 역학도 성립되었다. 한일 협력으로 한국의 경제성장에 박차가 가해진 것은 결과적으로 정권의 실적을 올려 정통성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1970년대의 한일관계를 형용할 때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말은 ‘한일 유착’이다. 이것은 부패를 동반한다는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1970년대의 한일관계가 1960년대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긴밀하였는가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다.

한일관계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협력이 쉬운 측면도 있었다. 1980년대까지와 같이 한국이 비민주적인 체제였기 때문에 한일 협력에 대한 저항을 상당 정도 억제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원만한 한일 협력이 가능했다. 또 한일 협력의 성과로 한일 간 국력 격차가 좁혀졌다고 일본이 그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다. 서로 비대칭적이었던, 바꿔 말하면, 서로 너무도 달랐던 점이, 상호 협력에 따른 손익계산에 관해, 누릴 이익에는 민감했지만 부담할 비용에는 그다지 민감해야 할 필요성을 없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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