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강대진의 고전 산책 3
강대진 지음 / 그린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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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를.

지금껏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을 읽으며 부끄럽게도 저 문장 너머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킬레우스는 전체 24권 중 1권에서 아가멤논에게 화를 내고 자기 진영에 틀어박힌 후 제16권 파트클로스가 죽은 후에서야 싸울 준비를 하고 제20권에 이르러서야 겨우 자신의 분노를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가 아니다. 그보다 절대적인 용맹을 지닌 아킬레우스의 빈 자리를 메꾸는 인물들 - 불멸의 신들마저 격퇴한 디오메데스, 자신의 한계를 알면서도 트로이아를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헥토르이며,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건 메넬라오스와 겁에 질려 헬레네 곁으로 도망치는 파리스, 아가멤논과 아이아스 등 -의 공동주연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게 느껴진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바라보면 작품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이들은 필멸의 인간이기에 각자 한계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한계가 저마다 죽음의 원인이 된다. 죽음은 제약 조건으로 작용한다.

‘어둠이 눈 앞을 가리면‘ 인간들은 더이상 전장에 나설 수 없다. 때문에 항상 죽음을 걱정해야 하는 인간의 영웅들은 신들은 물론 반신반인의 아킬레우스에 비해서도 한없이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고 끊임없이 감정에 휩쓸린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자신이 가진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 불멸의 삶을 부여받는데, 그것은 각자의 삶을 배경으로 한 작품(그리스 비극)안에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는 영웅 아킬레우스가 아닌 필멸의 인간들이 불멸의 인간으로 우리 곁에 남을 수 있는 이유를 작품 해설을 통해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그 설명을 통해 우리는 영화 <트로이>의 왜곡된 이미지가 아닌 호메로스 작품 안에서 살아 있는 인물의 모습을 온전히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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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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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의 손에 의해 태어난 괴물. 유명한 공포소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기술에 대한 지나친 맹신에 대한 경고로 흔히 해석된다. 그렇지만, 작가인 메리 셀리와 어머니 이자 초기 여권운동가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조금 다르게 읽혀야 되지 않을까. 로고스(Logos)가 만들어 낸 뮈토스(Mytos), 역사 속에서 타자로서, 역사 속에서 어둠에 쌓인 괴물(Monster)로, ‘~이 아닌‘ 존재로 설정된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무리가 있을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여다 본다면, 이제까지 알던 것과는 다른 낯선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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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1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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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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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김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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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달린 드라큘라 The New Annotated Dracula>는 제목 그대로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 ~ 1912) 의 <드라큘라 Dracula>에 주석을 단 책으로, 필자의 세세한 주석들은 시대적으로 낯선 약 120년 전의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생생하게 당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여름날 무더위나 식힐 요량으로 <주석달린 드라큘라>를 꺼내들고 읽었지만, 주석달린 책 덕분에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예를 들면, 작품 내에 '코레아 Korea'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문장을 살펴보자.


 한 사람 더 올 걸세. '코레아 Korea'(50)에서 만난 우리의 오랜 친구 잭 수어드 말이야. 우리 둘은 술 한잔 하면서 같이 눈물도 흘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고귀한 마음을 가진 어떤 여인, 가장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여인을 얻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친구의 건강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술도 한잔 할 걸세.(p175) <주석 달린 드라큘라> 中


 주석없이 읽을 경우 우리는 19세기 후반에 이미 우리나라가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으리라고 넘겨짚기 쉽지만, 엮은이의 주석은 이러한 오해로부터 우리를 구해준다. 덕분에 우리는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지만, 이와 비례하여 책진도에도 과부하가 걸림을 실감하게 된다. 


 (50) 여기서 모리스가 말한 코레아(Korea)가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지는 모호하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에 '코레아 Corea'로 더 잘 알려져 있던 한국(Korea)를 지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리버풀에서 풀항해 아시아로 항해했던 코레아(Corea)라는 배도 있었다. 레더데일은 이 명칭이 어떤 선술집이나 남자들이 모이는 클럽을 지칭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p176) <주석 달린 드라큘라> 中 


 또한, 주석은 문학작품에 몰입 대신 분석적으로 접근하게 만든다. 이 때문일까. 공포문학의 선조(先祖)라 할 수 있는 <드라큘라>지만, 생각만큼 무섭지 않다. 책의 내용을 영화화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1939 ~ )의 <드라큘라 Bram Stocker's Dracula>을 최근에 봤을 때에도, 생각만큼 무섭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각적으로 더 자극적인 공포물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해서 그런것이겠지만, 이들 작품에는 후대 작품이 따라갈 수 없는 아우라(Aura)가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화의 경우 게리 올드만(Gary Leonard Oldman, 1958 ~ ), 앤소니 홉킨스( Sir Philip Anthony Hopkins, 1937 ~ )가 펼치는 연기는 지금봐도 관객을 압도하고, 다른 색깔의 공포를 선사한다. 


 [그림] Bram Stoker's Dracula(출처 : https://www.pinterest.es/pin/398498267010086356/)


  공포문학으로서 <드라큘라>는 어떨까. 개인적으로 <드라큘라>가 주는 공포는 치밀한 묘사나 빠른 전개보다는 작품 내용 전달에서 느껴진다. 책에서는 내용이 등장인물들의 일기, 편지, 축음기에 남긴 메세지 등으로 전달된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마치, 소극장에서 드라이 아이스가 놓여진 캄캄한 무대 위에서 등장인물들이 한 줄로 앉아 한 명씩 일어나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은 서로 대화를 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한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서로 충돌되는 내용도 많지만, 정리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들의 몫이다. 


 때문에, 우리는 안정적으로 작품 내용을 들여다 보는 대신 혼란에 빠진 이들의 어지러운 증언만으로 내용을 짐작해야 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어두운 방안에서 흐릿한 랜턴을 이리저리 비추는 불빛 속에서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박쥐로 변한 드라큘라 백작을 찾기에 억지로 동참한다. 어느 누구도 드라큘라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보여주는 힘을 통해 어렴풋하게 그에 대해 정리해 나갈 뿐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작품 안에서 전해지는 공포가 드라큘라의 날카로운 이빨이나 기괴한 모습이 공포의 근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진정한 공포임을 느끼게 된다. 영화에서는 이를 3인칭으로 객관화하여 보여준다면, 문학에서는 그렇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다른 의미에서의 공포를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계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주는 공포. 이러한 부분이 문학작품이 주는 독특한 매력이 아닐까 한다.  비슷한 종류의 공포로는 내기 볼링을 칠때 상대가 터키(Turkey)나 파이브배가(5 Begger)를 쳐서 점수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의 심정이 있지 않을까.  


 또한, <주석달린 드라큘라>는 작품 해설을 통해 <드라큘라>에 대한 여러 해석들도 함께 제시한다. 작품에 담겨진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도 문학만이 갖는 멋진 매력일 것이다.


 스토커의 이야기는 여러 이론으로 분석할 만한 광범위한 자료를 제공한다. 켄 젤더(Ken Gelder)가 <뱀파이어 읽기 Reading the Vampire>에서 밝혔듯이, 시점이 자주 전환되는 이 작품에는, "민족학, 제국주의, 의학, 생물학적 퇴화(그리고 반대로 진화)에 대한 담론, 관상학, ...  여성주의, ... 남성주의, 신비주의 등의 다양한 분야의 담론과 함께 여러 비평 주제와 비평적 접근의 예가 나오기 때문이다.(p714) <주석 달린 드라큘라> 中


 당초 리뷰에서 해당 내용을 정리해보려 했으나, 막상 해보니 일이 걷잡을 수 없을만큼 커져 별도로 정리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한다. 다만, <드라큘라>가 단순한 고전 문학 작품이 아니라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 절정기에 당대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당시 싹트고 있던 새로운 사상의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는 것을 정리하고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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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1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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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1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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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김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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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하커가 처음 언데드(Undead)를 보고 느낀 낯설음, 두려움과 관능욕의 복합적 감정은 독자들에게 ‘뜨거운 얼음‘으로 다가온다. 두려움과 흥분의 뒤섞인 감정이 무더운 여름날 우리를 시원하게 이끄는 것이리라.

세 여인은 모두 관능적인 붉은 입술과 진주처럼 눈부신 흰 이빨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는 날 불안하게 하는 뭔가가, 욕망과 동시에 어떤 섬뜩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뭔가가 있었다. 난 마음속으로 그들이 저 붉은 입술로 내게 키스해 주기를 바라는 사악하고도 불타는 욕망을 느꼈다.(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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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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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양을 째야 했고,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열십자 모양으로 매스를 두 번 그으면 피가 섞인 멀건 죽 같은 고름이 흘러나왔다. 환자들은 능지처참을 당하듯이 사지를 벌린 채 피를 흘렸다. 하지만 곧이어 배와 다리에 반점들이 나타났고, 멍울들은 더 이상 곪지 않는가 싶더니 곧이어 다시 커졌다. 대부분의 경우 환자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죽었다.(p51) <페스트> 中


[그림] La Peste(출처 : https://www.wikiart.org/fr/arnold-bocklin/la-peste-1898)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 ~ 1960) 의 <페스트 La peste>는 흑사병이 덮친 알제리의 소도시 오랑(Oran)를 배경으로 한다. 처음에 쥐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죽음은 서서히 소도시의 사람들을 덮쳐오면서 퍼지는 불안감과 공포. 그리고, 페스트의 창궐(猖獗)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이 소설은 매우 실감나게 묘사한다.


 불과 사흘 만에 열병 발병율은 네 배나 뛰어올랐다. 사망자가 열여섯에서 스물넷으로, 스물여덟로, 서른둘로 증가했다. 나흘때 되던 날, 당국은 어떤 유아원에 임시 병동을 마련한다고 발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시한 농담으로 자신들의 불안을 감춰 오던 우리 시민들은 예전보다 더 풀이 죽어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p83)... 8월 한복판에 이르자 사실상 페스트가 모든 것을 뒤덮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자 개인의 운명이란 더 이상 없었고, 페스트라는 집단의 역사와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감정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극심한 것은 이별과 유배의 감정이었으며, 거기에는 공포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p215) <페스트> 中


 갑작스레 자신의 삶을 침범당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한다. 페스트를 위협요소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안전한 존재라고 느꼈을 때, 사람들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개체(個體)로 행동한다.

 재앙이란 사실 공동의 문제이지만, 일단 닥치면 사람들은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렇지만 전쟁이든 페스트든 사람들은 늘 속수무책이다.(p53)... 우리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별이라든가 두려움이라든가 하는 공통의 감정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 관심사를 우선순위에 놓고 있었다.(p102) <페스트> 中


 그렇지만, 물러설 곳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변하게 된다. 성문들이 닫히며, 도시가 개방계(開放系)에서 폐쇄계(閉鎖系)로 바뀌면서 이기적 유전자들이 생존을 위해 이타적인 행동을 선택하는 순간이 된다. 사랑하는 이/존재와 이별을 해야하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외부에서 온 침입자를 적(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추상적인 존재인 '페스트'는 구체적인 불행으로 내부에서 실재화(實在化)된다. 사람들은 페스트와의 싸움을 통해 점차 고통을 겪으면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도시로 통하는 성문들이 폐쇄되는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전까지 시민들은 자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상태는 의심의 여지 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일단 성문이 닫히고 나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서술자는 물론이거니와 그들 모두는 마치 한 배에 탄 꼴이 되었고 어떻게든 맞춰 나가야 했다... 성문들이 폐쇄되자 벌어진 일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p89) <페스트> 中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추상적인 것이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추상과 제대로 붙어야 한다.(p115)... 리유는, 또한 무엇보다도 새로운 각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적 관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를 테면 우울한 투쟁과도 같은 것, 오랜 기간 동안 우리 도시의 삶 전체를 지배한 그 투쟁을 계속 추적할 수 있었다.(p119) <페스트> 中


 외부로부터 다가와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이 불행이 우리에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부당한 고통만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괴롭히도록 했고,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고통과 한편이 되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질병이 갖는 수법의 하나이다.(p99) <페스트> 中


 이제 군중들은 페스트를 적으로 인식하고 힘든 사투(死鬪)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아폴로에 의지하여 싸움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절망적인 싸움의 끝을 알 수 없는 시점에 이르러 사람들은 아폴로 대신 디오니소스에게 자신을 의탁한다. 중세 페스트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을 때 유럽을 감싸던 광기(狂氣)가 작은 시 오랑에 넘쳐나게 된다. 낮에는 불안, 밤에는 위안이 이어지면서 공포에 담금질 되던 사람들은 서서히 바뀌어간다.


 수많은 군중이 기도 주간에 참여했다. 평소 오랑 시민들의 신앙심이 두터워서가 아니었다. 이렇듯 갑작스러운 종교로의 귀의가 그들을 빛으로 인도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 시민들을 매우 특별한 심리 상태에 처해 있었는데, 그들에게 충격을 주는 믿기 어려운 사건들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무언가 변화가 있음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페스트란, 오긴 왔지만 결국엔 떠나가 버릴 불쾌한 손님일 뿐이었다.(p121) <페스트> 中


 무더위에 침묵까지 가세하자 겁에 질린 우리 시민들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것이 훨씬 더 심각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하늘의 빛깔과 대지의 내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영향을 주었다... 기력을 소진해 버린 봄이 지천으로 활짝 핀 수천의 꽃들 속에서 마지막 힘을 다하다가 페스트와 무더위라는 두 배의 무게에 눌려 서서히 뭉개지려 한다는 걸 누가 봐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p146) <페스트> 中


 오랑 시민들이 이 전염병을 다른 병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던 초기에는 종교가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안 이상, 그들은 쾌락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낮이 되면 사람들 얼굴에서 생생히 드러나는 불안이, 붉게 타오르는 먼지투성이 황혼 녘에는 일종의 격렬한 흥분과도 같은 것, 모든 사람들을 열의에 들뜨게 만드는 어설픈 자유로 용해된다.(p157) <페스트> 中


 그리고 거짓말처럼 힘든 싸움의 끝이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그토록 원하던 순간이 왔음에도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이는 페스트와의 싸움이 그들 자신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전염병의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후퇴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민들은 선뜻 기뻐하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의 시간이 자유에 대한 욕망을 키우면서도 그들에게 신중함을 가르쳐 주었고, 그럼으로써 전염병이 불원간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점점 버리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소식이 모두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커다란 희망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p343) <페스트> 中


 통계 수치가 가장 희망적이던 바로 그 시기, 우리 시민들은 모순되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은 흥분과 의기소침이 번갈아 연이어 나타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그 시기에 탈출했던 사람들은 본능적인 감정에 굴복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페스트는 깊은 회의주의를 심어 두었고, 그들은 그것을 제거하지 못했다. 희망이 그들에게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페스트의 시대가 다 끝나 가던 바로 그 시기에도 그들은 여전히 페스트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p347) <페스트> 中


 페스트는 외부에서 왔고 다시 외부로 돌아갔지만, 페스트와 싸운 사람들 마음에 페스트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그 씨앗은 언제라도 다른 형태의 '페스트'가 닥쳤을 때 다시 싹을 틔울 것이다. 그들은 페스트를 물리쳤지만, 동시에 페스트를 받아들인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저버렸음을 리유를 제외한 군중은 결코 알 수 없었다.


 리유는 기뻐하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책에서 알 수 있듯이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가구들이며 이불이며 오래된 행주 같은 것들 속에서 수십 년동안 잠든 채 지내거나 침실, 지하 창고, 트렁크, 손수건 심지어 쓸데없는 서류들 나부랭이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께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p396) <페스트> 中


 그는 단지 페스트를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우정을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인간의 정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는 추억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와 인생이라는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과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뿐이다.(p372) <페스트> 中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깊은 불안을 던져 주고 있는 지금 시점에, 카뮈의 <페스트>는 질병이 어떻게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것인지 잘 보여준다. 페스트를 비롯한 전염성 질환이 무서운 이유는 그 자체의 위험보다 서로가 자신을 주위로부터 격리시키고 스스로 고립되는 유배의 감정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카뮈의 통찰은 지금 우리에게도 분명 의미있게 다가옴을 느끼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그는 오랑 시민들이 보여 주는 모순을 가감 없이 평가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가깝게 하는 따뜻한 인간애를 절실히 원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경계심 때문에 선뜻 나아가지 못한다. 누구든 자기 이웃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이 페스트균을 옮겨서 자신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p253) <페스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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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0-02-04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저도 이 책이 읽고 싶어 도서관에서 대여해 놓았어요~~
곧 읽어 보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2-04 23:02   좋아요 1 | URL
때가 때인지라 몰입이 잘 되네요. 페넬로페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