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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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마음에 도망가고 싶은 마음까지, 심사가 무겁다. 밤새 누군가 사라지고 시체가 되어 돌아오던 때를 담은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것이 그저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드는 마음이다. 그때를 지나 지금이 되었는데 그때란 시간이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여기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사라졌고 죽어 돌아왔고 무너진 가슴으로 숨어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삼악산 밑 삼벌레 고개 우물집에 한 가족이 이사를 온다. 이사온 날 일필휘지로 계약서를 한자로 작성한 새댁은 큰 딸 영, 작은 딸 원, 남편 덕규와 행복한 살림을 꾸린다. 집주인 순분은 먹물깨나 든 새댁을 잘난 척 한다며 못마땅해하며 계원들에게 흉문을 퍼트린다. 큰 아들 금철의 실수로 작은 아들 은철이 사고를 당하고 새댁네에 암운이 닥치면서 순분은 영과 원 자매를 돌보기 시작한다.


소설은 말 특히 악담의 힘을 그려낸다. 마을이 계주인 순분은 동네 여자들 입소문을 좌우하고 할 얘기 안 할 얘기를 여기저기로 흘렸다. 은철의 사고는 순분네가 동네의 먹이감이 되는 계기가 된다. 안좋은 소문을 달고 있던 사람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악덕을 덮고자 순분네 이야기에 더 열을 올렸다. 때마침 순분네 세를 살던 새댁네 남편이 체포되자 악의적인 소문은 날개를 단다. 말은 사람들 죽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칼이 된다.


(…) 입 달린 여인들은 새파란 악의와 공포로 가득 찬 말들을 쏟아놓으면서 때로는 서로의 결백을 증명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기도 하면서 연일 옥신각신한다는 것이었다.

p.266


우연히 닥친 불운을 겪는 가운데 순분은 그 동안 했던 말이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새댁네를 흉보고 그 집의 내밀한 사정을 퍼뜨렸던 일을 말이다.


"그 죄를 다…… 어떻게 받으려고……."

(…)

자기가 내뱉은 말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순분은 잊고 있었던 시렁 위의 유리그릇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

"내가 그 죄를 …… 어떻게 다……!"

pp.212-213


말의 무서움을 깨닫는 건 어른 만이 아니다. 엄마의 험담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던 은철 또한 그 말이 가져온 결과에 입을 다문다. 은철은 아이답지 않게 자신의 말이 누구를 슬프게 할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몰라도 그걸 엄마 앞에서 누설해선 안 되기 때문에, 그러면 또 새댁이 못 놀러 오게 할지 모르기 때문에 말은 안 하고 손가락으로만 가리켰다.

p.205


영민한 아이 원 또한 "내 저주때문에 어머니가 변했다"며 말을 버리고 인형과 닮아간다. 엄마가 해주는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고 질문이 끊이지 않았던 아이,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알아내고 언니 책을 보고 어른들의 노래를 금방 따라 부르던 아이. 아이의 마음은 자신의 가족에게 닥친 일을 어떻게든 견뎌보려하지만 정신을 놓은 엄마가 떠나버리자 혼자만의 방에 자신을 가두고 인형이 된다.


원에게서 사라져버린 것은 말뿐이 아니었다. 표정과 몸짓도 증발되었다. 원은 생기 없는 얼굴로 느리고 뻣뻣한 동작을 했는데, 그것은 동생 희의 모습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p.324


새댁과의 동맹으로 동네 소문의 테두리 밖에 섰던 순분은 새댁에 떠나고나자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평생 불편한 다리로 살게 된 작은 아이를 생각해 악착같이 돈도 벌고 다시 계원을 모을 생각도 한다. "빨갱이로 사형당한 식구들이 사는 집"을 떠나 다른 동네로 이사간 후에 말이다. 새댁이 정신을 놓음으로써 "뭐든 다 빼앗아 가는 세상"을 등졌다면 순분은 어디 떨어질지 모르는 "철퇴"를 피해 살고 싶었다. 이렇게 생겼든 저렇게 생겼든 그놈이 그놈인 세상이니 자기 살길을 악착같이 챙기려는 마음이다. 얼마간의 미안함도 있었지만 그만하면 할 도리를 다 했다 싶은 것이다. 우리 시대 다수의 마음이 순분과 같지 않을까. 단, 우리는 누군가를 도왔던 한 때가 없었을 뿐.


새댁이 병원 들것에 실려 나갈 때 순분은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새댁의 고통을 지켜보며 그것이 어디에 도착할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순분은 덕수를 만난 김에 집 문제를 아퀴 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p.318


먹을 것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작가의 솜씨가 이 소설에도 들어있다. 원이 어머니와 함께 만들어 먹는 달걀 볶음밥이다. 특별하지 않은 음식이지만 만드는 과정에 대한 서술, 그리고 거기에 담은 의미가 소설 전체를 묶는 큰 상징 역할을 하고 있다. 부러 눌린 달걀 누룽지와 보들하니 익은 부분이 골고루 섞여야 제대로 된 달걀 볶음밥이 된다는 문장에 작가는 전하고 싶었던 의미가 꼭꼭 눌려 담겨있는 것 같았다.


순분은 이것으로 다 되었다 싶었다.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젠 그만 되었다 싶고 한시름이 놓였다.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고, 그렇게 다 있는 거라는 원의 말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박가나 통장이나 남편이나 자기나,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였다.

(…)

슬렁슬렁 재미를 보면서 살든 따박따박 도리를 지키며 살든 철퇴가 떨어지면 맞아 죽는 건 똑같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철퇴를 맞지 않는 게 장땡이었다.

p.320


곧게 살려했던 남편이 잡혀간 후 새댁은 토우처럼 삭아들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이 진흙 덩어리처럼 뭉개"져 간다고 느꼈다. "성한 데 없"는 몸으로 죽은 남편도 토우처럼 뭉개지긴 마찬가지였을테다. 영이, 원이 자매가 삼벌레 고개를 떠나던 날 마을 사람 누구도 배웅하지 않는 가운데 가게방 앞에서 모든 일을 지켜 본 '괴상한 씨'가 노래를 부른다. 사람은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는 사람집에 들어가 산다, 토우는 사람처럼 사람집에서 살고 싶지만 그 집은 '캄캄한 무덤'이 될 수밖에 없다고. 괴상한 씨는 토우가 된 사람은 끝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걸까.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아득해 모르네

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그래봤자 토우의 집은 캄캄한 무덤

p.329


권여선 작가의 장편은 처음이다.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정말 좋은 작가를 알게 돼 기뻤었다. 작가의 장편을 읽으려던 참에 『토우의 집』을 읽게 됐다. 진득하게 의미를 실어내는 작가의 문장들이 역시 좋았다. 단편, 장편을 읽어봤으니 이제 에세이를 읽을 차례. 『오늘 뭐 먹지?』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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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집 사계절 중학년문고 36
우미옥 지음, 차상미 그림 / 사계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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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에는 "동화를 쓰면서 종종 시간 여행을"한다는 문장이 씌여있다. 그 말을 한 작가의 의도는 글을 쓸 때 어린 시절을 회고하곤 한다는 의미였겠다. 작가가 만난 어린 시절의 아이는 자기만의 여행을 할 줄 알았던 것 같다. 책 속 단편 이야기들은 모두 어딘가 현실과 동떨어진 어린이들만의 정서로 보호되는 신기한 세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미래에 작가가 될 우미옥 어린이는 자신만의 "절실한 감정과 생각과 고민들"로 이야기의 세계를 그려냈던 것이다. 그 세계는 성인이 된 작가에게 다시 발견되고 문장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내 친구의 집」에서 예림이는 온통 눈 내린 거리를 지나 친구네 집에 공책을 빌리러 간다. 눈 덮힌 거리를 보며 『나니아 연대기』를 떠올리는 아이 앞에는 나름의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뜨거운 찜통 같은 <온기 다득 온실>에 사는 다온이의 공책은 젖어서 못빌리고 재미네 집 <재미있는 재활용 가게>에서는 공책이 쌓여있는 가구틈을 사라진다. 이어 찾아간 강이네 집에선 산더미같은 열 다섯 마리 개들에게 혼비백산 놀라기도. 개들이 찢어놓은 강이 공책이 소용 없어져 들른 소이네 아파트에선 건물 벽에 매달린 친구를 발견한다. 예림이네 반 친구들은 필시 모두 재미를 타고난 아이들인 모야이다. 학교, 학원, 집을 왕복하느라 지친 아이들이라면 이렇게 발랄한 친구들을 만나고 싶지 않을지. 예림이와 친구들은 함께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할거다. 학교를 가도 친구와 이야기도 못하고 지내는 요즘의 아이들에겐 판타지가 따로 없다.


「휴대폰 때문에」의 해주는 우연히 주운 친구의 휴대폰을 제때 돌려주지 못해 곤란해진다.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던 사이 휴대폰 주인인 연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고 전에 화려한 겉모습의 연아에게 남모르는 속내가 있는 걸 알게 된다.

「멸치 인어」에선 멸치와 함께 배달된 멸치 인어(멸치와 인어의 결합이라니!)와 여행을 떠나는 아이가 등장한다. 아빠와 떨어져 사는 아이는 멸치 인어를 바다에 데려다 주기 위해 아빠가 사는 강릉으로 떠난다.

「인형 장례식」은 애착 인형과 작별하는 지아의 이야기다. 알러지가 있는 지아에게 낡고 먼지 날리는 곰인형 꼬미는 떨어질 수 없는 친구다. 지아는 세탁기 속에서 수선할 수 없이 망가진 꼬미를 쓰레기 취급할 수 없다. 친구 유민이와 함께 꼬미의 멋진 장례식을 계획하는 지아. 아이는 애착인형의 장례식과 함께 자신의 어린 한 시절이 지나감을 느꼈을까.

「우리 선생님이 마녀라면」은 선생님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재미있게 그렸다. 얼굴과 코가 길쭉하면, 화를 많이 내고 소리를 지르면 거기다 검은 옷을 좋아하면 아이들 앞에선 마녀가 될 수 있다. 수업시간에 졸린 것도 선생님의 마법이요, 햄스터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도 마녀의 요건이 된다. 선생님이 하는 행동에는 뭔가 의미가 있고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동심의 세계가 귀엽기만 하다. 마녀 선생님이라도 좋으니 학교에 꼬박꼬박 등교해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아이들에게는 학교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상상의 세계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우미옥 작가의 동화는 "엉뚱하고 섬세하고 다정한 아이들의 세계"다. "엉뚱하고 섬세하고 다정한 아이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뛰어 노는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책 속 눈싸움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판타지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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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 전집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2
이솝 지음, 아서 래컴 그림,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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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솝'과 '우화'는 마치 한단어 같다. '우화'가 없는 '이솝'이 떠오르지 않고 '이솝'에는 '우화'가 고유명사처럼 붙어있다. 알게 모르게 자주 접하다 보니 가까운 시대의 인물인 듯 느껴지는 이솝은 사실 아주 오래 전 인물이다. 기원전 그리스의 이오니아 출신 인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와 동시대 또는 그 이전에 살았던 사람인 것이다. 책 표지에 실린 "소크라테스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도 탐독했던 지혜의 책"이라는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을 다룬 『파이돈』을 읽고도 눈여겨 두지 못한 일화였기 때문이다.


내가 근래에 시를 짓게 된 것은 내가 꾼 꿈들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내려는 것이었네. (…) 꿈을 꾼 시기나 꿈에 나타난 형태는 달랐어도, 그 꿈들이 내게 말한 것은 언제나 똑같아서, '소크라테스여, 시가詩歌를 짓고 부르는 일에 힘쓰라'고 내게 말했거든. (…) 그런데 나는 전문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우선은 내가 잘 알고 있고 지금 내 수중에 있는 아이소포스의 우화에 운율을 붙여 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지

『파이돈』 60e-61b, 플라톤, 박문재 역, 현대지성


『파이돈』을 펼쳥보니 과연 감옥 안의 소크라테스는 '아이소포스(이솝)의 우화'에 운율을 붙여 시가를 짓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솝을 "잘 알고 있"으며 죽음을 앞둔 때에 그의 "수중에" 이솝의 우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이솝은 잘 알려진 작가였던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실제 스승의 말들을 받아 적은 것이라면 그 역시 이솝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솝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서정 시인 사포와 같은 시대를 산 인물로 묘사된다.


"이솝과 그의 우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로 그의 책 『수사학』에 이솝이 인용된 것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수단 중 예증의 방법으로 '우화'를 제시하면서 이솝의 예를 들고 있다.


예증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일을 스스로 지어내는 것이다. 후자로는 비유와 우화가 있는데, 우화는 아이소포스의 우화나 아프리카 우화 같은 종류를 말한다.

『수사학』 1393a26-30,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현대지성


이솝 우화를 아이들을 위한 동화 비슷한 것쯤으로 알고 있는 요즘과 달리 애초에 이 이야기들은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목적이 이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랜 시간 살아남을 수 있는 동력이 됐다. 아이들 눈높이로 각색된 동화 전집에서 읽은 이솝 우화들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이솝의 이야기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나 그 이후의 시대에 대중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졌을까.


이솝 우화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데는 대중연설가나 수사학자들의 실용적인 목적이 크게 기여했다. (…) 이솝 우화는 성인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고, 대중연설가나 수사학자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면서 자신이 말하려는 것들을 재미있고 재치 있게 제시하고자 사용했다.

pp.432-433 해제 中


우화의 정의와 특별한 목적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동식물을 사람과 동일시한다는 것 그리고 도덕적 교훈을 주고자 한다는 것. 바로 이 교훈이라는 부분이 빅토리아 시대와 잘 맞아 떨어졌다. 이 엄격했던 때에 도덕규범을 쉽게 배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솝우화가 이용됐고 대중성을 얻게 됐다.


우화는 인간 이외의 동식물이 마치 인간과 동일한 동기와 감정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처럼 묘사하면서, 풍자를 통해 교훈이나 처세술을 가르치는 설화를 의미한다. 우화가 일반적인 설화나 비유와 다른 독특한 점은 그 일차적인 목적이 도덕적인 교훈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p.426 해제 中


현대지성의 『이솝 우화 전집』은 '우화'의 특성을 잘 반영한 번역본이다. 고대 이솝의 언어인 그리스어 원전을 번역하고 후대에 첨부된 '교훈'을 나란히 배열했다. 각 우화에 딸린 '교훈'은 이솝의 것은 아니다. 우화의 교훈은 "이솝 우화를 수집한 사람들이 덧붙인 것들"로 "실제 연설이나 웅변에서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그 주제를 짤막하게 적어놓은 것"이다. 이솝의 의도와는 다른 교훈일 수 있다는 말이다. 교훈은 이솝 우화를 읽는 그 시대만의 시선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텍스트로 보였다. 지금의 우리에게 느껴지는 우화의 속내가 고대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바와는 다른 느낌이라는 것이 종종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61. 신상을 박살낸 사람' 우화의 경우다. 나무 신상에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빌던 사람이 가난이 더 심해지자 화가 치밀어 신상을 박살냈다. 뜻밖에 신상 속에서 황금이 쏟아진다. 이 우화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이 우화는 악인을 존중하면 아무 도움도 얻을 수 없지만, 악인을 때리면 많은 도움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p.88


신에게 맹목적으로 행운을 빌기보다 무슨 일이라도 행동을 하라는 뜻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뜻밖의 교훈이었다. 아마도 현재의 내가 읽지 못하는 고대 신상과 관련한 뉘앙스가 있는 모양이다. 이런 이질감이 느껴지는 대목들이 오히려 신선했다. 고대인들의 생각을 엿보는 기분이랄까.


책에는 총 358개의 우화가 소개된다. 토끼와 거북이, 여우와 포도송이, 양치기 소년, 개미와 베짱이(원제: 매미와 개미들, 베짱이가 아니고 매미였다!), 시골 쥐 도시 쥐 같은 친숙한 이야기들을 단순 명료한 문장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 나라 전래동화라고 생각했던 금도끼 은도끼(원제: 나무꾼과 헤르메스) 이야기의 원전이 이솝 우화라는 사실도 새롭게 발견했다.(강물 속에서 도끼를 들고 나온 게 산신령이 아니고 헤르메스였다!)


수 많은 신이 함께 하던 시대인만큼 신과 관계된 우화들이 많았다. 신이 등장하는 우화들도 이야기의 무게는 인간에게 있었다. 신도 정의롭지 않은 사람은 돕지 않으며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신도 눈을 돌린다. 진정한 친구,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 자만에 대한 경고, 변하기 어려운 천성을 주제로 하는 우화들이 여러 번 반복됐다. 등장 인물(과 동물)은 다르지만 겸손하게 가진 것에 만족하고 허영을 경계하며 대비하는 삶을 살라는 교훈들이었다. 아마도 이런 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는 삶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솝 우화는 평범한 고대 그리스 사람의 일상적인 삶과 함께 그들이 경험 속에서 얻은 지혜들을 담고 있다"며 여기엔 "귀족이나 지식이니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서 살다간 평범한 사람들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역자의 말처럼 말이다.


그리스어 원전 번역 『이솝 우화 전집』은 우화 자체보다 우화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 시대를 들여다 보는 일이 흥미로운 책이었다. 원전 번역이 아니었다면 기대할 수 없는 생각의 넘나듦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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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괴물 백과 - 신화와 전설 속 110가지 괴물 이야기
류싱 지음, 이지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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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는 이야기는 단단한 캐릭터에서 시작한다

스핑크스, 사이렌, 유니콘, 켄타우로스……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줄 전 세계 괴물들을 만나다

책 표지 中


이 책의 편집자는 수많은 괴물들이 각각의 캐릭터를 살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길 바랬던 모양이다. 기기묘묘한 형상의 괴물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도 호기심이 가고 그 괴물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시대와는 어떤 관계를 주고 받았는지도 궁금하게 만드는 책이다.


『세계 괴물 백과』는 신문학을 전공한 후 민족, 종교, 박물 분야의 그림 연구에 몰두한 저자의 책이다. 전공과 다른 관심 분야를 꽤나 열심히 판 결과물을 이 책에 모았다. 책에는 괴물의 종류가 장별로 구분되어 있다. 고대 근동 신화, 이집트 신화, 그리스 신화, 종교 전설, 동방 여러 민족 전설, 유럽의 전설과 괴이한 일에 등장하는 괴물을 차례로 정리해 놓았다.


신기한 모양새의 괴물을 구경하는 차원에서 보기에도 좋은 책이지만 괴물들이 왜 그런 모습을 갖게 됐는지 또 시대를 거치면서 어떤 변천과정을 거쳤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괴물의 존재는 인간의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이해해보고자 만든 것일 게다. 그렇다면 괴물이 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인간이 가졌던 두려움을 파악하고 그 괴물의 시대가 가진 이해의 폭을 들여다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프랑스 의사 앙브루아즈 파레가 쓴 책 『괴물과 불가사의』(1573)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 책을 썼다. 동 시대의 비슷한 책들을 찾아 모아 괴물들의 뒷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러므로 이 책은 16세기의 생각에 기초한다.


이 책에 담긴 생물들이 그려내는 경이로운 풍경은 당시 유럽의 사상과 관념과 관련하여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상상 속 동물을 만들어낸 원천은 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되었을까? 당시 유럽인들은 이 상상 속 생물에 무엇을 투사하려 했던 걸까? 여러 괴물 형상은 어떤 사상이나 관념을 반영하는 걸까?

p.11


저자는 괴물의 뿌리를 파고 드는 과정에서 동서양이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히브리 문명과 중동 문명이 공통의 원천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중동 전설과 중국, 일본 전설의 유사성도 발견한다. 저자는 서로 거리가 먼 지역들이 서로 공통된 특징을 가진 신화를 주고 받으며 발전했다고 말한다.


책은 고대 근동 신화의 괴물 훔바바 이야기로 시작한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해 익숙해진 괴물이다. 영웅 길가메시와 엔키두에게 죽임을 당하는 악당은 저자의 해석 안에서 한 나라의 지위에 올라선다.


비슷한 맥락에서 훔바바를 우르크와 동 시대에 존재했던 나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훔바바는 레바논과 시리아 접경지대에 있던 나라로 삼나무가 많이 자라다 보니 매우 부유했다. 엔키두도 하나의 나라였는데 싸움에 상당히 능한 부족이었지만 길가메시에게 정복당했다. (…) 길가메시는 늘 훔바바의 풍부한 자원을 탐냈고 마침 삼나무는 우르크에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결국 엔키두 부족의 힘까지 등에 업은 길가메시는 전쟁을 일으켜 훔바바르 멸망시킨다.

p.21


고대의 학자들도 괴물 전설을 신비를 배제하고 설명하고자 시도했었다. 그들 나름의 시도가 꽤 설득력이 있다. 반인반마 괴물 켄타우로스의 형태가 왜 그렇게 묘사되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과 메두사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해설한 대목들이 그렇다. 켄타우로스는 단지 말을 잘 타는 사람들이었고 메두사는 페르세우스에게 패한 여성 부족장이라는 말이다. 현대의 우리에게 더 잘 납득되는 설명들이다.


고대 로마의 학자이자 작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는 저서 『박물지』에서 켄타우로스 전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테살리아인이 말의 등에 타서 적과 싸우는 방법을 처음 개발했는데 그들을 켄타우리(Centauri)라 불렀고 펠리온 산에 주로 거주했다.

p.84


박물지 저자들의 견해는 이들과 조금 다른데, 파우사니아스는 고르곤 메두사의 신화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아버지 포르키스가 죽은 뒤 메두사는 리비아의 트리토니스 호수 일대의 사람들을 다스렸다. 부족민을 이끌고 사냥을 하거나 전쟁에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페르세우스가 이끄는 부대와 맞서게 되었는데 그만 야밤에 암살을 당하고 만다. 죽은 메두사의 미모에 놀란 페르세우스는 그 머리를 베어 그리스로 가지고 돌아간다.

p.104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한 세계를 깨뜨린 존재가 가 닿는 신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아브락사스도 만날 수 있다. 한때는 헤세가 창조한 신이라고 나름 상상했던 신인데 닭머리를 갖춘 형상이었다. 데미안의 신이 왜 알에서 나와야 하고 신에게 날아갔어야 하는지가 이해됐달까. 아무튼 아브락사스는 영지주의의 신이었고 '아브라카다브라'의 어원이었다.


유럽의 전설과 괴이한 일을 다룬 장에서는 전통 가톨릭과 루터파 교회의 대립이 낳은 괴물들이 다수 소개된다. 라벤나의 괴물, 크라쿠프의 괴물, 수도사 송아지, 교황 당나귀, 오튕의 이상한 달걀 등이 그것이다. 루터파 신교는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해온 로마 가톨릭에 대항 하기위한 명분을 세우기 위해 각종 인쇄물을 이용해 여론을 몰아갔다. 기이한 괴물들이 출몰하는 것이 가톨릭의 부패를 상징한다고 믿게 만들려던 것이다.


16세기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그의 종교개혁 지지자들과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에 치열한 여론전이 벌어진다. 루터파는 화가들의 지원을 받아 로마 가토릭교회와 교황, 수도사들의 잘못을 풍자하는 소책자를 상당수 발간하고 특히 교황을 연관시켜 적그리스도의 형상을 여럿 제작했는데, 마르틴 루터는 이처럼 여론전의 선구자였다.

p.351


익숙한 괴물도 있고 참신한 상상력이 놀라운 괴물도 있다. 괴물들의 이런 저런 모양들과 그 기원부터 변천사와 의미를 따라가는 흥미로운 독서였다. 아쉬움이라면 신과 괴물 구분의 모호함과 이집트 신화 부분이 지나치게 소략하다는 것이다. 아누비스와 같은 이집트의 신을 괴물로 소개한 이유는 뭘까. 온갖 동물과 신이 결합된 세계를 갖춘 이집트에 대한 설명이 어째서 이렇게 단순한 걸까. 이집트의 괴물들은 괴물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자가 기본으로 삼은 르네상스 박물학자의 시대에는 이집트에 큰 관심이 없었던 걸까.


괴물을 묘사한 각 시대의 유물 또는 그림을 삽화로 넣어 시각적 이해를 도운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괴물의 신기한 형태를 그 시대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괴물들 모습은 조각이나 조형물을 통해 제시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것들은 다양한 당시의 책자의 그림을 활용했다. 『세계 괴물 백과』 읽기는 풍부한 사진자료와 함께 떠나는 즐거운 상상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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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견 오드리 추리는 코끝에서부터 사계절 중학년문고 35
정은숙 지음, 이주희 그림 / 사계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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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견 오드리』가 돌아왔다. 새하얀 몸에 똘망똘망한 눈, 반짝거리는 코의 강아지. '똥개', '핑구', '광복이', '휘리릭' 등 여러 개의 이름이 있지만 '오드리'로 불리고픈 자존감 강한 강아지다. 암행어사 박문수의 수행견을 조상으로 둔 탓인지 불의를 보면 못참고 주변에 생기는 사건, 사고 해결에 앞장선다.

2012년 출판된 정은숙 작가의 책 『명탐견 오드리』가 새로운 그림과 표지를 입고 돌아왔다. 절판된 창작동화가 출판사를 바꿔 다시 나온 걸 보면 작품의 가치를 그만큼 인정받았다는 뜻일 게다. 아니나 다를까 책은 쉽고도 흥미진진해 잡자 마자 끝까지 읽혔다.

 

오드리가 마주치는 사건은 세 가지다. '고서화 사건의 범인을 찾아라!', '다이아몬드 반지를 찾아라!', '길고양이 학대범을 잡아라!' 소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오드리는 고서화를 훔친 도둑을 검거하고, 실종된 다이아몬드를 찾고, 길고양이를 괴롭히는 악당을 잡아낸다. 개 특유의 후각에 힘입은 바 크지만 예리한 눈썰미와 흩어진 단서를 연결하는 논리력도 탁월하다. 명탐견이라 불릴 만하다.

책은 오드리가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문체로 씌여 있다. 때문에 오드리가 느끼는 오감과 생각이 그대로 전해진다. 애써 발견한 결정적 단서를 사람에게 말로 전하지 못할 때는 읽는 독자에게까지 오드리의 답답함이 전해진다. 그런 상황에서도 오드리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드디어 사건을 해결할 때는 통쾌한 기분까지 든다.

AI급 후각은 오드리가 세상과 사람을 파악하는 도구다. 오드리에게 어떤 장소나 사람은 냄새로 기억된다. '청국장 냄새', '구린내', '향수 냄새', '톡 쏘는 냄새' 등. 사람보다 수 백배 예민한 후각을 가진 개에게 펼쳐지는 냄새의 세계가 어떤 지 오드리를 통해 알 수 있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게 된 오드리는 한글을 더듬더듬 읽고 고사성어도 제법 알고 있다. 단 강아지가 사용하는 고사성어이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이를테면 '가화망사성', '이심점심' 같은 것들이다. 오드리가 말한 고사성어의 원래 단어와 뜻인지 알고 싶다면 책을 끝까지 읽고 뒷쪽 내지를 살펴볼 것.

책의 각 장 뒤 쪽에는 '오드리의 추리 퀴즈'가 붙어 있다. 만화체의 한 페이지짜리 추리 문제다. 그림을 자세히 봐야 하고 상황을 설명하는 말들도 세심히 읽어야 한다. 문제 해결의 답은 단순하지만 논리적이다. 퀴즈의 답을 알고 싶다면 역시 책 뒷쪽 내지를 참고하면 된다.

세 개의 사건은 아쉽다. 추리와 탐정물을 좋아하는 어린이 독자라면 오드리의 후속편을 기대할 만하다. 『명탐견 오드리』도 새로운 출판사에서 새로운 옷을 입고 다시 출판됐으니 다음 편도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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