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김영랑을 이야기했지.
1930년대 어두운 시대에 '언어를 갈고 닦은 조탁자, 세공사'란 이야기를 들었던 김영랑.
오늘은 1940년대 중요한 작가 윤동주 이야길 하자.
그럼 내일은 이육사가 되겠구나.
윤동주의 시중에 가장 유명한 시가 뭘까?
알겠지? 서시(序詩).
우선 서시부터 한번 읽어 보자꾸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참 단정한 시다.
일제 강점기 후반, 윤동주는 감옥에 갇혀서 죽어가는데,
이런 시를 쓰면서 자신을 단정하게 가다듬었겠지.
'나한테 주어진 길'
이런 것을 '소명'이라고 한단다.
민우 앞의 길에는 어떤 길이 주어져 있을까?
일제 강점기가 아닌 것이 참 다행이잖니? ^^
다음엔 문학 교과서에서 배운 '쉽게 씌어진 시'를 보자꾸나.
1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2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한 줄 시를 적어 볼까,
3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4 대학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5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6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7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8 육첩방은 남의 나라/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9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0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
전체적으로 10개의 연으로 이뤄져 있는데, 수미 상관이 있단다. 바로 1연과 8연이지.
그럼, 화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1연과 8연 사이에서 다 나오겠지?
나머지 2연은 조금 분위기가 다른 연이란다.
1연에서 6첩방은 다다미가 6장 깔린 방이란 뜻이야.
다다미는 일본식 바닥재인데, 일본이 공간적 배경이지.
시를 쓰는데, 3,4연에선 조금 부끄럼을 느끼고 있단다.
부모님이 힘겹게 보내주신 학비로 '늙은 교수의 강의'나 듣는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지.
윤동주는 일제 때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을 갔던 거야.
5,6연에서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런 걸 '자아 성찰'이라고 해.
무얼 하겠다고 유학을 온 건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유학생...
7,8연에서는 자아 성찰의 결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지. 반성.
그래서 9,10연에서는 변화된 자아가 도출돼.
아마 이 시는 밤중에 썼을 거야.(밤비가 속살거려...라고 했구나.)
밤중엔 감정이 잘 변하고 스스로 생각이 이리저리 바뀌곤 하지.
윤동주는 아주 강인한 사람은 아니었단다.
일제 강점기만 아니었다면 부드러운 학자로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르지. 생긴 걸 봐. ㅎㅎ
'어둠'이나 '밤'은 전통적으로 <악의 무리>를 <상징>하지.
그런데, 부드러운 윤동주란 남자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겠다고 해. 조금.
그리고 역사는 당연히 새로운 아침을 맞게 되겠지. 그걸 기다리는 '최후의 나'가 있어.
'최후의 나'란 어떤 의미일까?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싸울 때, 최후에 죽는 전사도 있을 거잖아.
그런 의연한 결의가 담긴 말로 볼 수 있겠구나. 내가 최후에 죽더라도... 나는 아침을 기다린다.
마지막 연에서 '나'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화해를 시도한다.
<자아 성찰>을 통해서 <자기 반성>을 했고, 그래서 <최후의 나>가 되었잖아.
자아 성찰 이전의 '나'는 <좀 부끄러운 나>였고,
자아 성찰 이후의 '나'는 <최후의 나>를 각오하는 사람이야. 의지적 인물로 변했지.
그래서 앞의 '나'가 뒤의 '나'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는
<성찰 이후의 나>가 <부끄러워하는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되는 거지. 어렵나? ^^
바뀐 나를 '본질적 자아'라고 하고, 바뀌기 전의 나를 '현상적 자아'라고도 해.
자기 반성을 통해서 각오를 다지는 그런 시라고 볼 수 있지만,
그는 '조금' 부드러운 사람이었어.
여기서 잠시,
그와 상반된 강인한 의지를 가진 '이육사'의 시어를 한 번 보자꾸나.
전에 '강철로 된 무지개'란 절정을 썼던 시인이지. '광야'는 수업 시간에 배웠잖아.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이육사, 교목 喬木>
교목은 <높을 교, 나무목>을 써서 곧고 높게 자라는 나무를 뜻해. 키다리 나무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옆으로만 퍼지는 나무를 관목 灌木 이라고 하지. 떨기나무라고 그래.
이 시에서는 교목처럼 우뚝한 이육사의 높은 기상, 기개 이런 것이 느껴지잖아.
특히 '차라리~말아라', '아예~아니라', '차마~못해라' 이런
'강한 부사어'와 '부정어'가 정말 강철같은 의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
이런 시와 비교해 보면 윤동주의 시어가 얼마나 보드레한지 느껴지지.
이번엔 동시 풍의 시를 한번 보자꾸나.
윤동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동시가 많단다.
시작은 동시야. 중간에 돌변하긴 했지만 말이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붉은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十字架))
쫄래쫄래 걷다보면 해가 따라오잖아. 그러다 교회당 꼭대기에 해가 걸렸어.
동시같은 화자의 상상.
저렇게 높은 뾰족탑에 어떻게 올라갔을까?
종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 맘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서성일 때까진 평범한 사람이지.
그러다가 갑자기 4연에서 분위기가 바뀌지.
'괴로웠던'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는 역설 다룰 때 했던 기억 나니?
죽음을 예정한 '괴로움'과 인류 구원으로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지.
<처럼>을 행을 바꾼 이유는 뭘까?
그 앞에선 그저 옛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린 건데,
<처럼> 뒤에선 누구 이야기가 나오겠니?
그렇지. 화자의 이야기가 나와야 돼.
나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그래서 나의 죽음으로 우리 민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잖아.
그런데, 잠깐.
여기서 또 윤동주의 '조금' 부드러운 표현이 나온단다.
피를 흘리는 '희생'을 하는데 어떻게 흘린다고 했지?
응, <조,용,히>...
이렇게 부드러운 남자를 죽게 만든 시대라니... 참 잔인하다.
윤동주 시 중에 제일 어려운 시가 <또 다른 고향>이야.
2년 전에 교육청 시험이 이 시가나왔는데 애들이 바짝 쫄았지.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안 났지만, 대부분은 어려운 시를 보고 쫄게 돼.
1 故鄕(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내 白骨(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2 어둔 방은 宇宙(우주)로 통하고/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3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풍화작용)하는 /白骨(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白骨(백골)이 우는 것이냐/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4 志操(지조) 높은 개는/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5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6 가자 가자/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白骨(백골) 몰래/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좀 어렵고 낯선 시를 보면, <제목>부터 보는 습관을 들이자.
제목이 '또 다른 고향'이지.
'고향'은 자기가 나고 자란 동네. 농경 사회에서 가족이 사는 동네를 뜻해. '공동체 문화'의 기억이 있던 곳.
그런데, '또 다른 고향'이라면... 고향이 두 개로 분리된 것 같지?
아까 '쉽게 씌어진 시'에서 <자아>가 두 개로 분리된 것처럼 말이야.
고향에 돌아왔더니, 내 백골이 한 방에 누웠대. 내 백골은 <가치있는 존재>로 보이냐? 반대일까?
그래. 무가치한 존재로 보이지. 아주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마음.
판타지 소설로 생각하면 될 거야.
어두운 방(침울한 분위기)은 안정적이지 않아서, 우주 어디론가 가버릴 거 같아.
방 안에 하늘에서 소리나듯 바람이 썰렁하게 분대.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되어 가는 백골을 보는 <나>
그 백골은 남의 뼈가 아니라 <나의 뼈>야. 가치없는 나의 모습. 부끄러운 나의 모습.
눈물이 나는구나.
그 눈물은 내가 흘리는 것이고,
가치 잃은 나의 백골이 흘리는 것이고,
높은 가치를 지닌 아름다운 혼이 흘리는 것이지.
자, 여기까지에서 <지금의 고향>, <돌아온 고향>은 어떤 분위기지?
춥고 썰렁하고 으시시한 고향.
개가 짖는다. 그런데 그 개의 짖는 소리가 <지조 높은 개>로 들리는구나.
지조 높은 개의 소리는 나를 일깨우는 소리야.
5연에서 <나를 쫓는 소리>라고 하잖아.
시험에 <지조 높은 개>는 화자에게 어떤 존재인지 물었어?
답은 <일깨우는 존재>였지. 쉽지?
마지막 연에서는 어디론가 가자고 해.
그 지향처는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이야.
지금 백골이 풍화되어 누워있는 이 무기력한 곳, 우울한 공간 말고,
평화롭고 따사로운 행복함이 있을 곳,
김소월이 <엄마랑 누나랑 가고 싶던 강변> 같은 곳.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 있는 곳.
그런 <또 다른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희망.
역시 윤동주의 소심한 표현이 등장하지.
후딱 가지도 않고, 뚜벅뚜벅 가지도 않고, 눈보라를 헤치고 가지도 않아.
백골 <몰래> 가재. ^^ 아빠는 윤동주의 이런 시어를 보면 혼자 싱긋이 웃음이 난단다.
<서시>처럼 맑고 고결하게 살고 싶던 윤동주가,
<쉽게 씌어진 시>나 <십자가>, <또 다른 고향>처럼 스스로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의지를 가지게 되지.
그렇지만 그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해방이 되던 1945년 2월 16일 27세의 나이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해.
그의 죽음은 일제 말 생체실험의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어.
남긴 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전해지지.
아, 오늘은 시험에 많이 나오는 윤동주를 읽었다.
좀 분열적인 자아를 가진 시들이지만, 시대가 시대였으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해.
민우가 사는 지금은 일제 강점기의 청소년에 비한다면
얼마나 살기 좋은 시대인지, 이 행복을 다 누리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주말이 되는구나.
아빠의 강의를 듣는 소감이 어떤지 답장 한 번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