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김광규란 시인을 소개해 볼까 한다.
김광규의 시는 우리가 늘상 보는 것들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눈'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우선 <도다리를 먹으며>를 보자.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도다리를 먹으며)
도다리는 가자미과에 속한 생선 이름이다.
생선 머리를 잡고 봤을 때,
눈이 <왼쪽>으로 붙은 놈은 <광어>, 2글자 ㅋ
눈이 <오른쪽>으로 붙은 놈은 <도다리>, 3글자 라고 '국립수산과학관' 박사님이 가르쳐 주시더구나.
도다리를 보면서 화자는 의문을 가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과연 그런 것인가를...
그것은 그저 <통념>에 불과할 뿐이지, 진실이 그러하지는 않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 부호를...
첫 연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비슷하다고 <믿어> 왔다는 주장을 한다.
알고 있다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을 그렇다고 <믿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2연에서는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하려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들이댄다.
세상에는 '입'이나 '성기'처럼 가운데 하나만 있어 구분할 수 없는 것도 많은데 말이다.
20세기는 <좌우>의 시대였단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 세력과 자본주의 세력이 서로 발돋움을 하며 키재기를 해왔다.
그 와중에 세계대전도 일어나고 온갖 내전과 지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에서 벌어진 한국 전쟁도 <좌우>의 전쟁이었단다.
도대체 인간은 왜 그렇게 <좌우>로 나뉘어 싸우는 것인지...
3연에서 화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라고...
그래서 산과 들을 좌우로 나누고,
그것을 나누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며 잘난 체 하지만,
인간은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붙었다고 웃>는 징그러운 존재다.
그런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낯설지 않은가?
세상은 결코 <좌우>로 나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도다리>도 나눌 수 없는데, 진실이 무엇인지...
화자의 생각은 이렇다.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얼마나 자기가 옳다며 서로 싸우고 죽도록 헐뜯는 존재인지...
인간의 <허위 의식>을 밝혀서 고발하는 시로 보면 되겠다.
인간 본위의 사고방식에 얽매인 무지한 존재인 주제에
<허위 의식>으로 가득차서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존재임을...
그런 세상을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시다.
그의 유명한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좀 길지만 한번 읽어 보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마로니에 공원>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1960년 4.19가 나던 해의 <순수한 젊은 시절> 이야기와,
그로부터 18년 지난 1978년 <생활에 찌든 소시민>의 이야기.
제목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도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옛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옛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볼이 발그레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그 옛사랑의 시절은 '희미한' 것이고, '그림자'로만 남았다.
1961년 5.16에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한국에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울 절호의 찬스였다.
젊은 혈기들은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적었다.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토론을 <끝낸 밤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그 젊은이들의 순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18년 후.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인 그들은
회비를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묻고
물가를 걱정하며
세상을 개탄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소심한 소시민들의 평범한 삶이지만,
젊었던 시절의 뜨거운 열정에 비하면, 반성할 점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73년 지금의 서울대학교 자리로 옮기기 전까지는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자리가
옛날 서울대학교 자리였다. 지금은 대학로라고 부르는 그 거리다.
툭하면 서울대에서 길거리로 시위를 나가곤 하던 그 혜화동, 동숭동, 이화동 거리...
나이든 화자는 그 젊었던 시절을 <옛사랑>에 비유하곤 하는 것이다.
이제는 <희미해진 옛사랑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화자는 좀 부끄러워진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그렇지만 생활 속으로 그 늪 같은 깊이로 발을 옮길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을 안고...
젊은 시절의 대가 바라지 않던 뜨거운 마음이 사라진 '생활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반성.
순종적으로 변해버린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하는 이 시는,
'3등 3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하고 부푼 꿈을 소리지르던 젊은 시절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시대에 대한 고백이다.
비슷한 시기의 비슷한 세대들에게 가슴 뜨끔한 기억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세밑은 연말이라고 했다.
연말이면 송년 모임이 많은데, 그 모임 속에서 속물적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반성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는 시.
다음은 그의 <상행>이란 시를 읽어 보자.
상행은 서울행이란 이야기다.
시골에서 서울로 서울로 살아 보겠다고 올라가는 그 기차를 <상행선>이라고 불렀다.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상행(上行))
이 시가 씌어진 1970년대는 '서울 중심의 불균형 개발'로 '농촌 황폐화'가 급속하게 이뤄지던 시기였다.
어려운 한자어로 이촌향도라고 하지. 촌을 떠나 도시를 향하는...
가슴 속에 가득 '발전해가는 세상과 뒤처지는 자신'의 괴리감이 점점 커져감을 느끼게 되는 화자의 마음은
이 시의 서술어들을 모아 보면 잘 드러난다.
말이 기니깐, 서술어들만 모아 볼게.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고개를 끄덕여 다오.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고속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스스로 부끄럽고 소외된 인생이라고... 낯선 얼굴을 발견하게 될 지라도...
너의 모습을 잊어 달라는 부탁.
국가에서 세뇌세키는 대로 제발, 문제의식을 갖지 말고 고개를 끄덕여 달라는 부탁.
자동차 소리도 경쾌하니, 즐겁게 여행을 해 달라는 부탁.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라는 부탁.
놀라운 일이 날마다 일어나겠지만, 그저 '아!'하고 나서 입 다물어 달라는 부탁.
그래서, 그저 시시한 축구 이야기나 증권 시세에 대한 이야기나 하라는 부탁.
그것은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래야 한다는 것인데...
화자는 <독재 시대> 날마다 벌어지는 사건 사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여기서 <현실의 문제를 외면해 다오> <생각지 말아 다오> 하는 이야기는 반어법으로 보는게 좋겠다.
<현실에 관심을 가지자> <생각을 바로 하자> 이렇게...
텔레비전에서는 회형적 성장 위주의 획일적인 근대화를 과장하여 자랑하고 있지만,
실제는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처럼 <근대화로 황폐해진 농촌>이 죽어가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박정희에 대한 <용비어천가>만 틀어지고 있었지만,
낮은 소리로 <듣기 힘든 소리>는 부정한 현실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던 시대다.
확성기에선 '새마을 노래' 소리 높아갔지만,
성장 위주의 근대화는 <재벌들>에게만 <당신들의 천국>을 안겨주었다.
독재 시대에 찍소리도 말고 있어야 한다.
그게 <너>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다.
이건 정말 화자가 하고 싶은 목소릴까?
찍소리도 못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소시민적 근성에 대한 반성이다.
이런 것을 시인 '김수영'은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부분)
중요한 일에 대하여는 비판하지 못하고, 그저 사소한 일에만 욕을 해대는 사람으로...
'왕궁'과 '왕궁의 음탕함'은 '권력자의 부패'가 되겠다.
박정희는 말년에 엄청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고 그러더구나.
그런 데는 비판의 혓바닥을 놀리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반성.
갈빗집 주인에게 옹졸하게 욕을 할 뿐인 자신.
소설가가 정권을 비판했다고 붙잡아가고,
신문이 맘에 안 들면 광고주를 협박하고,
국민의 아들들을 제멋대로 월남에 파병하던 무서운 시절.
그런 정권에 비판의 날을 세우지 못하고,
잡부금을 걷으러 오는 야경꾼에게나 욕설을 날리는 자신에 대한 반성.
무서운 시대였다. 지금 그 딸이 다시 대통령 자리에 앉겠다고 어리대고 있다만,
그 무서운 시대를 잊지 않았다면, 독재자의 딸이 다시 권력을 잡는 일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 무섭던 시대...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저 침묵하거나
별볼일 없는 이야기나 주절거리고 있어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부끄러워,
김광규는 서울 가는 기찻간(상행)에서 들었던 좌절스런 생각을 그렇게 시로 쓴 것이다.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하여 제대로 비판의 날을 간 시가 <어린 게의 죽음>이다.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어린 게의 죽음)
어미게와 어린 게가 잡혀서 게장수의 구럭에서 허우적댄다.
<바다의 자유>를 찾아 <구럭을 빠져나와 아스팔트를 기어가>는 어린 게는
저항의 상징이다.
그러나 <군용 트럭>으로 상징된 <군사 독재>의 억압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죽는> 어린 게.
먼지 속에서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그러나, 그 저항 정신에서는 <찬란한 빛>을 만나게 된다.
저항 정신의 숭고함. 이런 이야기다.
김광규의 시 몇 편을 보다 보니,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나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도 이야기하고 싶다만,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 수업 끝! (누가 수업 끝이래~ 하던 왕비호도 이제 박수칠 때 떠난다더구나. ^^)
세상은 갈수록 뻔뻔스런 나쁜 놈들로 뒤덮이고 있다.
<슈퍼 배드 Super-Bad>로 부족해서,
<메가 마인드 Mega-Mind>까지 생겨났다.
비록 만화영화지만, <아주 나쁜 놈>부터 <왕비호>까지
그 이름이 세상을 대변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세상을 바로보는 눈들을 읽는 일은 그래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내일 계속하자꾸나.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