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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적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교환가능성'이다. 근대적인 가치체계는 교환불가능한 것들을 교환가능하도록 끊임없이 강요하고, 종용해왔다. 여러가지 특수한 상품 - 특히 화폐 - 를 매개로 구축된 사회는 사용가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교환가치로 메웟다. 그리고 급기야는 시장이 인정하는 형태의 거래가 생활의 전부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교환적 사회를 지탱하는 사상적 뼈대는 '시각화', 그리고 환원이다. 이 두 가지 경향의 결합이 바로 수량화다. 수는 시각의 추상이다. 타자와 타자 사이를 구별하는 습관은 시각적 분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수량의 개념이란, 이런 분절적 세계를 그보다 더 추상적인 계열로 들어올림에 따라 생겨난다. 

  따라서 수량화는 인간의 감각 가운데 시각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세계의 수량화는 곧 자본주의이다. 양화시키고, 그 양의 비교를 통해 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 성립되며, 이것의 실천은 곧 자본주의적 실천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세계는 시각을 통해 인간의 다른 감각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방향으로 필연적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수량화를 골자로 하는 자본주의적 사회는, 인간의 다른 감각마저 시각으로 환원하려고 시도한다. 모든 것이 이미지화되는 현상은 이런 배경 아래서 벌어진다. 이미 수량화는 환원불가능한 것들을 대상으로 교환을 시작했으며, 인간의 감각 또한 그에 포함된다. TV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고는 '모든 감각의 시각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냄새, 맛, 질감, 소리 등이 이미지화되어 처리되고, 시청자는 다시 이를 시각을 통해 수용한 뒤 다른 연관된 감각을 떠올린다.

  이 연관된 감각을 떠올릴 수 있는 근거는, 분명히 이전에 그와 같은 감각적 경험의 내용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각화 이전의 원초적 체험으로서 내재하며, 교육과 자본주의적 사회화 진행 이전의 원형으로서 조작할 수 없는 관념이 된다. 그러나 시각화 이후의 감각은, 세계와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시각적인 변환을 겪는다. 이 단계의 인간은 관념과 이미지를 연결하는 작업만 지속적으로 수행하며, 이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세계는 '세계의 이미지'로서 세계를 대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은 다른 감각기관을 통해서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시각화된다는 것은 이 능력이 발현되는 경로에 변화가 오는 것일 뿐, 그 능력 자체를 없애버리진 못한다. 그 능력은 사회 이전에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주어진다. 즉, 대면의 경험으로서 확인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대면이라는 상황을 가능하게 해주는 초월적 전제인 것이다.

  시각화는 사회적 조건이다. 이는 인간의 능력과 전면적으로 배치되며, 따라서 충돌한다. 이 충돌은 교환가능성이라는 거래와 소통의 토대이며, 따라서 이는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회화과정은 세계와 인간의 근본적 접촉을 차단하고, 둘 사이를 강력하게 매개한다. 매개의 세계는 자신을 인간에게 강요하고,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강요되기 때문에 공통되다는 점을 무기로 소통의 장을 마련한다.

  사회가 부여한 세계는, 사실상 이미지의 집합이다. 이미지는 매개 이전의 세계와 인간을 연결하면서, 동시에 이미지 이외의 다른 접촉의 통로를 억압한다. 억압의 방법이 다른 감각의 이미지화이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감각의 억압을 알지 못하며, 다른 모든 감각이 생생한 것 만큼이나 자연스럽다.

  그러나, 위와 같이 배재당한 감각은 단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이 간으성은 자본주의의 외부에서, 시각에 포착당하지 않은 채 인간에게 접근하며, 불현듯 찾아온다. 모든 감각을 이미지로 대체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은, 이 가능성을 결코 이미지의 총체로서 환원할 수 없음에 당혹해한다. 그 '환원될 수 없는 감각성'이 이 가능성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은,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을 통해서 그가 사랑의 대상임을 알아챌 수 잇다. 이것은 시각에도 해당된다. 시각 또한 사랑의 대상, 즉 인간에게 내재하지만 억압당한느 다른 감각의 능력을 일깨워 줄 수 있는 계기로서의 대상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애초에 시각의 대상으로서 주체의 세계에 포섭된 그 대상이 어떻게 전감각적 대상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또 그 과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다.

  위와 같은 과정은 논리적 절차를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감각의 일깨움은 즉각적이다. 다른 대상은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할지라도, 그 대상은 매우 우연한 기회 속에 필연적으로 다른 감각을 통하 대상의 수용을 주체에게 제안한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며, 또한 순간 사라진다. 이 제안의 인식은, 사랑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분기점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지각의 주안점이 이동하는 것이다. 시각의 주안점은 대상의 가시성/비가시성일 뿐이고, 이것은 심리적 거리와 상관이 없다. 심리적 거리란, 감각경험을 주체의 내부에 생성된 관념 사이의 거리다. 따라서 감각의 거리는 심리적 거리와 동일하다. 시각화된 세계에서 모든 이미지는 있거나(가시적), 없다(비가시적). 그러므로 모든 관념의 위상이 동일하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주체의 가장 큰 특징이며, 또한 자본주의적 교환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다른 감각은 그 물리적 거리가 가장 주요한 감각의 조건이다. 따라서 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요청받은 주체에게는 다음과 같은 반응이 촉발된다. - 좀 더 가까이 하고 싶다. 이는 이전에 고려되지 않던 감각의 조건이 새로 편입되는 특기할만한 현상이다.

  이와 같은 '거리의 편입'은 그 자체만으로도 시각화 이전의 인간의 능력이 촉발되었으며, 그 능력을 사용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이다. 유배당한 다른 감각들이 갑작스레 되살아나며, 이 모든 움직임이 시각으로 인지한 최초의 대상, 즉 자신에게 전감각적 세계 대면의 가능성을 일깨워준 계기로 나아간다. 오래도록 시각적 환원을 겪어온 다른 감각에게, 그 감각의 대상이란 전감각적 계기 이외의 다른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감각적인 세계 대면은, 이전까지 이미지로 대체되엇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온 모든 감각들의 위상을 격상시킨다. 모든 위상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반대로 시각의 위상은 낮아진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상황은 시각 이외의 다른 감각을 살려냄으로써, 오히려 시각 역시도 주체 내부에 형성되는 세계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다른 감각을 통해 주체의 세계에 드러나는 것에 대해 시각이 재발견함으로써, 이전희 시각화된 세계와는 동떨어진, 시각의 참된 역할이 복원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여전히 자본주의적 시각화의 폭력이 주체에게 작용한다. 시각화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독립되어 지속적으로 운동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시각화가 이요하는 시각은 끝내 인간의 능력 가운데 하나이며, 게다가 그 과정의 자연스러움 때문에 내재된 문제가 있다. 이런 현상은 사랑의 과정 속에서 왜곡된 형태로 세계에 출현하게 되는 데, 페티쉬즘과 플라토닉 러브가 이러한 왜곡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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