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숙제> 

문 : 신은 영원한 법칙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의욕할 수 없다는 아퀴나스의 생각에 대해서, 둔스 스코투스는 신이 영원의 법칙에 따라서 의욕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평가해보라.  

답 :

  기독교에서 신은 가장 이성적인 존재이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은 그 이성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였으며, 따라서 신의 법칙인 이성은 세계의 곳곳에 반영되어있다. 그 가운데 자연의 최고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신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성을 사용하여 신의 법칙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법칙은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선해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도덕법칙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으며, 그 길은 신이 부여한 능력인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성은 신이 부여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이미 부여된 뒤에는 신과는 독립적으로 도덕법칙을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신의 속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밝혀지는 과정은 분명히 신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기존에 십계명을 대표되는 신의 계시와 성서에 밝혀진 덕목들을 실천하는 일을 통해서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계시종교의 이념과는 반대된다. 

  아퀴나스는 이런 문제를 신과 도덕법칙을 동일시함으로써 해결한다. 신은 이성 그 자체이며, 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독립적으로 이성을 사용해 깨달을 수 있는 어떤 도덕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곧 신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다. 신은 세계를 창조한 어떤 존재로서가 아니라, 이성적인 원리로서 그 의미가 확정되어야만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신이 다른 행동의 지침들을 윤리적인 원리로 삼을 수 있다면, 즉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도덕률 이외에 다른 덕목들을 주장할 수 있다면 신의 도덕과 인간의 도덕 사이에는 근본적인 괴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계시에 의해서만 도덕의 의미를 확정지을 수밖에 없고, 이것은 객관적일 수 없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런 맥락에서 아퀴나스는 자연법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키는데, 이는 신과 인간이 공유하는 이성적인 법칙을 뜻한다.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도덕법칙을 제시해주지만, 또한 동시에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의 본성으로서 부여한 법칙이기도 하다. 인간이 본성에 부합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자연법에 일치하는 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 이 자연법의 제 1원리로서 인간은 선을 추구하고 그에 반대되는 것들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혹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행동지침을 도출할 수 있으며, 실제 생활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도덕적 지침들은 이 원리를 상황에 적합하게 잘 적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인간의 도덕적 양심은 이 원리로부터 구체적 상황에 맞는 덕목들을 논리적으로 연역해낸다. 자연법을 매개로 인간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가장 선한 존재인 신과 일치될 수 있으며, 신앙을 매개하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성서가 표방하는 계시적 성격, 선한 것들은 신의 계시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고 인간은 이에 순종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특징과 일치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둔스 스코투스의 아퀴나스 비판은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질문한다. 만약 신을 이성과 일치시킬 수 있다면, 신은 이성보다 논리적으로 앞서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신의 속성에 비추어본다면, 논리적으로는 선을 자의적으로 정의하는 것도 신의 능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고, 이성에 의한 단 하나의 도덕만을 인정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도덕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신이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고 말하기 위해서 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속성을 포기하고 있다. 

  물론 스코투스에게도 피조물인 인간이 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없는 필연적인 덕목이다. 하지만 그는 아퀴나스가 이 지점에서 여기에서 자의적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그 우연한 선과 악의 개념에 의지한 도덕률을 신의 이름으로 일반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을 매개로 인간들이 발견할 수 있는 도덕법칙들이, 이성을 통해 발견할 수 있고 발견되어야 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도덕적이다.’ 라는 속성을 얻을 수는 없다. 어떤 행동지침이 선한 것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결정적으로 신이 그것을 ‘선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과정, 즉 신의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여 수많은 도덕법칙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을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진정한 도덕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신의 의지가 개입해 그것을 명령과 의무로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좋은 처세술 이상이 될 수 없다. 

  스코투스의 이러한 아퀴나스 비판은 두 가지 측면에서 타당하다. 첫째, 아퀴나스는 신과 이성을 일치시킴으로써 분명히 신의 영역에 제한을 두고 있다. 정의상 신은 이성을 뛰어넘는 존재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완전히 선한 존재라는 신의 개념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무한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신을 이성에 구속시키고, 무한히 많은 도덕법칙들 가운데 단 하나의 체계만을 신의 능력 안에서 가능한 세계로서 인정한다. 나아가 이러한 입장은 무한한 존재로서의 신을 포기하고, 인간의 도덕과 이성에 신을 구속시키는 역전된 결과를 낳는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수호해야 할 대상은 타락한 인간들이 아니라 그런 존재들을 선하게 이끌 능력을 가지고 실제로 그런 과정으로 인간을 인도하는 신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것은 도덕의 영역에서 신의 입지를 점점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둘째, 신의 정의 이전에 선과 악은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신이 정의하기 전에는, 신 또한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 미결정된 상태이다. 신이 완전히 도덕적으로 선한 존재이며, 그 속성이 선하기 때문에 그가 명령하는 것이 도덕성을 띄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선과 악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며, 이 세계에서 초월해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선하다. 설령 신이 다른 명령들을 인간에게 지시하여 지금과는 전혀 다른 도덕적 체계를 가진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 뿐 아니라, 이미 그렇게 정해진 이상 인간은 도덕을 넘어서는 의무, 즉 신앙으로부터 비롯된 ‘신을 사랑하라.’ 라는 의무에 따라 신이 명령한 그 행위들을 실천해야, 도덕적인 면모를 포함해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아퀴나스와 스코투스 사이의 이런 논쟁은, 본질적으로는 기독교에서 인정하는 신의 개념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면서 벌어진 논쟁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논쟁은 신에 대한 질문 뿐만이 아니라, 도덕법칙은 어떤 성격을 띄고 있으며, 나아가서 그 항목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절대적인가 아니면 어떤 존재나 상황에 상대적인가를 묻는 논쟁이기도 하다. 따져보면 아퀴나스는 도덕적 절대주의자, 보편주의자이며 스코투스는 도덕적 상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기독교적인 근본적 가정에도 불구하고 이 논의가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숙제> 

문 : 신이 창조한 세계에 어떻게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즉 악의 문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해결책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 : 

  신이 창조한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신의 속성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신은 하나인 완전한 존재인데, 이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완전히 선하다는 속성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신이 창조했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악한 모습을 경험적으로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악한 모습의 기원은 어디인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원리를 포기할 수 없다면, 신은 세계의 선한 모습이 아니라 악한 모습의 기원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세계를 창조한 존재를 하나로 보지 않거나, 하나인 신의 속성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포기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신은 선하지 않은 존재라든가, 신은 더욱 선한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즉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존재라든가, 혹은 자기가 만든 세계에 악한 모습이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존재라고 설명해야만 악한 모습에 대한 기원을 신에게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소극적인 존재, 즉 ‘~이 아니다.’ 라는 형식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악의 문제를 완결된 체계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신의 피조물로서 만들어진 모든 존재들은 ‘~이다.’ 라는 형식으로 모두 존재한다. 모든 존재들은 자신에 대한 정의를 신으로부터 온전하게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본질이 신이 그 피조물을 창조해낸 목적에 해당되고 그 모습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그 존재가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악이란 악 자체에 대한 정의와 이를 충족시키는 현실이 존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에 대한 정의가 충족되지 못하는 상태, 즉 선이 결핍된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도덕적 악을 저지르는 존재인 인간에게는 이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악한 행동을 저지르는 인간들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인간에게 부여한 속성, 즉 자신을 닮은 형상을 만들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 그 상태에 가장 충실한 인간들만이 도덕적으로 선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존재도 신보다 더 선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나아지려면 사랑을 매개하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행동들은 특정한 대상을 사랑하는 상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사랑이 가장 선한 존재인 신을 향해있을 때 인간은 가장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에게 악이란 인간이 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사랑하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상황이 인간의 결핍이다. 

  여기에서 세계에 존재하는 도덕적 악의 책임이 신이 아닌 인간에게 돌아가고 있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사랑할지 결정하는 일은 인간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신이 예정하고 계획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정한다면, 인간은 언제든지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릴 위험, 즉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 빠질 가능성을 언제든 안고 살아가게 된다. 또한 그 대상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곧 선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자유의지에 의해 인간은 신을 사랑하며 도덕적으로 선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신이 예비한 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신앙에 일치시켜 신을 대면함으로써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방식은 대단히 형식적이다. 그가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증은 세계에 일어나는 악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악이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혹은 어떻게 악이 구성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악을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또는 환원되는 현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 다시 말해, 악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악은 선의 결핍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선이 존재하면 언제나 그에 따라 악도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 어떤 존재들도 신과 동일한 완전성을 지닐 수 없기에 신은 언제나 창조의 과정에서 불완전한 존재들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그는 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속성을 포기한다고 시인하는 셈이다. 

  그나마 신과 동등한 완전성을 영혼에 의해 지닐 수 있는 인간들조차,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그것을 거부하고 다른 열등한 존재들을 사랑한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도덕성을 기초짓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신이 설계한 대로 인간이 움직인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자유의지가 없는 세계에서 인간에게 도덕성은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신의 속성에서 선이 포함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복권시키려 하는 순간 신의 도덕성은 인간의 세계로 끌려내려오고, 신의 도덕성은 인간의 도덕성으로 환원된다. 오히려 신이 설계한 도덕성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수정된다. 신이 설계해놓은 도덕적인 세계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개입하여 바뀌기 때문이다. 설사 인간이 자유의지로 펼칠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을 신이 다층적으로 모두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이 알고 있는 그 세계는 인간에 의해 빈번하게 악이 출현하는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이 완전히 선하다는 속성을 근본적으로 지킬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과연 신이 만든 세계 내에서 피조물 간의 위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점도 의문이다. 성경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본따 만든 인간이 피조물 가운데 가장 최고의 존재라고 쓰여있지만, 이는 인간에 의해 쓰여진 가장 인간중심주의적인 편견일 뿐이다. 신이 각 존재들을 어떻게 만들더라도, 각 피조물들은 피조물로서의 지위만 지닐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되지 못한다. 인간만이 특별히 신의 완전성에 다다르는 존재로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 증거가 이성이라는 것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오히려 성경에 의거했을 때는 그 이전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탐내기 이전의 상태가 하나님과 더 가깝고 완전한 상태라는 것은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때의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는 다른 인간으로서의 자각과 그 특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이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성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선한 인간을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의 문제에 대해서 내세운 논증은 결과적으로 실패라고 보아야 한다. 악의 존재를 선의 존재에 환원시키려고 하였지만 이는 선이 존재하는 세계엔 언제나 악도 존재한다는 이상한 결론을 낳고 말았다. 자유의지로서의 인간의 사랑을 신에게 향하게 하려고 했지만 이 또한 신의 속성을 부정하지 않으면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또한 성경이 아닌 다른 철학적 논변에 의거함으로써, 성경이 이야기하는 선한 인간, 이상향인 태초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인간을 선한 인간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만이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이 되며 동시에 그것이 신과 일치하는 길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기독교 본연의 모습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기독교를 믿지 않고 그 체계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기독교도들에게도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책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상학 숙제> 

문 : "객관적 세계는 상호주관성 또는 그것에 고유한 상호주관적 본질을 이미 본래적 의미에서는 초월하지 못하며, 내재적 초월성으로서 상호주관성에 갖추어져 있다는 점을 나는 인식해야 한다. [...] 이념으로서의 객관적 세계, [...] 상호주관적 경험의 이념적 상관자로서의 객관적 세계는 그 자체로 무한히 개방된 이념성 속에서 구성된 상호주관성에 본질적으로 관련되어있다."(p.172) 이 단락에 나타난 내재적 초월성의 개념을 설명하고, 객관적 세계는 왜 단지 이념으로서 상호주관성에 관련되어 있는지 설명하시오. 

답: 

  후설의 현상학은 어떤 특수한 학문과 그 특수한 학문들이 사용하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들로 이루어진 연역적 체계를 사용하여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해 심각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반대는 각각의 개별학문들이 그러한 탐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그 개별학문들이 자신을 객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대라고 보아야 옳다. 이런 주장에 대한 반대는 각 개별학문들이 공리로 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 즉 각 개별학문들의 토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이 지점을 짚어내어, 모든 개별학문들이 토대가 될 수 있는 진정한 토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후설은 각각의 개별학문들이 자신들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잇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가정을 밝혀내었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가정을 거부하고, 이 가정이 정당화되는 과정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보이는 이러한 데카르트적 동기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단어인 판단중지(epoche), 또는 선험적-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후설의 철학을 대표한다. 

  선험적-현상학적 환원 이후에는 사실상 모든 분절적 인식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자아와 인식대상인 세계 사이의 구분도 사라진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식대상은 모두 인식하는 자아의 인식활동에 따라 구성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인식대상의 입장에서는, 현상학적 환원 이후의 인식의 주체인 선험적 자아와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선험적 자아는 자신의 내부에 인식대상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되는데, 사실 설험적 자아는 그 안에 아무런 경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식대상은 선험적 자아 내부에서 그와 구분짓지 못하는 내적 구성물이다.  

  위와 같은 비분절적 상태로 이끌 수 있는 능력 혹은 이미 그렇게 된 상태를 내재적 초월성이라고 한다. 내재적 초월성은 신이나 어떤 외부의 전능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외재적'인 초월성과는 구별된다. 또한 칸트와 후설이 사용하는 '현상'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인식대상의 총체라는 의미에서는 같으나, 칸트가 인식의 대상과 그 특성이 범주로서 이미 구성되어있는 대상을 현상이라고 말하는 데 비하여, 후설은 현상 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 즉 인식의 과정에 대해 연구하는 의미에서 현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연구는 현상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관찰자의 시점을 요청한다. 이것이 바로 후설이 이야기하는 선험적 자아의 시점이다. 

  그런데 이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에서 인격으로서의 자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말이 되어벌니다. 모든 분절이 사라져버린 세계이며, 어떤 구분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선험적 자아가 태도를 바꾸는 것 뿐이다. 따라서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어떤 대상은 필연적으로 인격으로서의 조건을 갖출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반성적 능력에서 출발하는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과 선험적 자아의 작동구조는 너와 나의 구분, 즉 자신과 타인의 구분까지 없애버린다.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의 타인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와 과정은 아주 많은 단계를 거치는 복잡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철폐는 역설적으로 아주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상호주관성이다. 후설은 이 말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즉 주관과 객관이 결합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자아와 타인의 구별이 없어진 새계이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설명한 것과 같은 인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자신의 이론적 구조 안에서도 객관적 인식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전반성적 구조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식의 토대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만을 확신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면 그 인식의 토대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인식의 구조이며 선험적 자아의 세계의 수준을 토대로 삼아 소통이 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많은 철학자들도 주관과 객관을 통일하려 시도해왔다. 하지만 후설은 자신의 방법론을 토대로 당시까지 시도되었던 두 가지 큰 경향을 비판한다. 하나는 관념론적(역사주의적) 통일로서, 인식주관의 본유관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할 수 있으며, 그것은 본유관념을 토대로 삼은 연역체계이다. 후설은, 이런 통일은 본유관념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으며, 그것이 의존할 다른 존재 혹은 논증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또한 다른 방향은 유물론적(과학주의적) 통일로서, 이들은 인간을 물질로 구성된 대상으로 바라보고 물질을 연구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연구분야가 심리학이다. 이에 대해서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 즉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각자의 정신 속에서 그 지위가 상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인간을 연구하는 데 적합하비 않은 방법이라고 후설은 비판한다. 

  위와 같은 후설의 입장과 비판의 논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설은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는, 혹은 적어도 어떤 인간 집단이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객관적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적 논증을 펼쳤던 인물로 보아야 옳다. 하지만 여기에서 후설이 말하는 객관적 세계란, 인식주체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주체와 대상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후설의 선험적 자아는 이미 인식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사라져버린 상태에 놓여있으므로, 이러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그가 말하는 객관적 세계란, 어떤 특정한 학문이나 또는 태도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존재의 양태들을 뜻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객관적 세계는 자신의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객관적 세계는 선험적 자아를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으며,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고, 게다가 인식주체가 지니는 특별한 관점이나 학문적 입장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다. 사실상 객관적 세계는 객관적 존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며, 매우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위상만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호주관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자아는 인격으로서의 한 개인이 통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는 수많은 인격으로서의 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위에서 썼듯이 모든 인간은 동일한 토대에서 인식작업을 수행하고 있는데, 만약 인식의 대상이 이러한 상호주관성의 영역에 자리잡게 된다면 그 대상은 객관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 존재가 그 자체로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거나 또는 어떤 특성을 지니거나 하는 여부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식주체의 세계에 같은 양태로서 자리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설이 말하는 객관성이란 존재 또는 존재자의 객관성이 아니라 인식의 객관성이기 때문에, 현상에 드러나는 과정이 동일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성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경험은 경험 이전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경험과 상관하는 외부의 존재로서의 객관적 세계는 마찬가지로 상호주관성에 의존하며, 그 영역에 국한되어 전개될 수 밖에 없다. 그 실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이라는 의미와 상화주관적이라는 의미 또한 이와 같은 관계에 놓여있다. 

  상호주관성과 객관적 세계 가운데 인간의 의식과 경험에 있어서 더 근본적인 것은 역시 상호주관성이다. 이는 선험적 자아의 영역이라는 그 속성상 어떤 분절도 없다. 위에서 기술했듯이, 오히려 이런 속성 때문에 주관이나 자아, 혹은 객관이나 타자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상호주관적인 객관성을 마련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 세계는 분절 이후의 세계이다. 다시 말하면 선험적 자아가 상호주관성의 영역을 겇서 세계로서 드러난 것, 비분절적 세계를 여러 태도에 따라 분절적 세계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은, 분절적 세계의 근거로서 존재하는 비분절적 세계, 선험적 자아, 상호주관성이다. 

  이와 같은 후설의 논의에서 이념으로서의 객관적 세계의 의미가 명확하게 밝혀진다. 기존의 학문들은 각자가 바라보는 세계를 모든 학문의 토대 내지는 자신들의 토대로서 객관적 세계를 상정하거나 혹은 간주한다. 또는 그 믿음을 '객관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후설에게 객관적이라는 말의 의미, 그리고 그 속성은 선험적 자아의 상호주관성에 토대를 두어야지만 성립할 수 있는, 이차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후설의 논의에 따르면, 학문의 토대로서 간주되는 객관적 세계의 현존이라는 생각은 포기되어야 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명확한 사실이 아니라 인식의 현상 속에서 생성되는 특수한 형태의 믿음을 간주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중앙대학교 교지 『중앙문화』기고> 

 

베스트셀러?

  올해 5월, 서점에 책 한 권이 등장했다. 표지에는 ‘JUSTICE’라는 모양이 크게 박혀있다. 한글 제목은 ‘정의란 무엇인가’. 글쓴이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라는데, 하버드 대학의 교수다. 이 책은 그가 ‘정의Justice’를 주제로 삼아 해마다 여는 강의의 강의록 혹은 강의초안이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학생들이 모여, 경제정책도 신기술도 아닌 정의에 대해 배우는 강의라고 한다. 목차에는 칸트니 아리스토텔레스니 하는,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과목에나 나올 것 같은 이름이 들어가있다. 

  이런 면모들을 조합해보았을 때, 이 책은 다른 인문학 책들이 그렇듯이 1000권이나 겨우 넘길까 말까 한 판매부수를 기록하는 게 정상이었다. 표지도 예쁘지 않다. 철학을 공부하는 학부생들 대부분이 이름만 얼핏 아는 정도인 샌델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욱 낯선 이름일 것이다. 다루는 내용은 머리에서 잊어버렸던 수능 공부 내용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하다. 못난 표지와 유명하지 않은 글쓴이와 지루한 내용의 3박자가 골고루 갖추어진, 다시 말해 망할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한 마디로 말해 대박을 터뜨렸다. 출간 이후 급하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더니,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다. 11월 초에는 50만부를 넘겼다. 지금 추세로는 스테디셀러 반열에도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대학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에서는 예약이 밀려있는 경우가 보통이며, 학교 중앙도서관에도 무려 13권이나(!) 있다. 조금 더 과장을 섞자면, 2010년에 지하철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다음으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책이 되었다. 문제는 이 책이 대여점에서 빌려보는 퓨전무협이나 트렌디한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이라는 것이다. 

  무척 당혹스럽다. 비슷한 주제에 비슷한 명성을 가진 사람이 쓴 책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만큼 팔린 사례는 없다. 예를 들면, 존 롤즈John Rawls가 쓴 『정의론Theory of Justice』은 한국에서 얼마나 팔렸을까? 『실천이성비판』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또 어떤가? 몇몇 사람들은 이런 현상에 자신의 희망사항을 덧씌우기도 한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정의를 갈망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라나. 그리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이 사회의 병리를 점검할 수 있는 척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그 평가를 내린 자신이 사회를 공정하지 않다고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공정하지 못하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비슷한 주제에 비슷한 입장을 펼치는 다른 책들이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대통령이 휴가를 가면서 들고 갔다는 소문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식의, 믿거나 말거나 하는 말 정도다. 

  그러면 읽어보어야 한다. 이 책은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샌델은 왜 이렇게 글을 썼는가? 그리고 이 책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왜 베스트셀러일까?

  어떤 책이 유명해진 이유는 사회적인 맥락을 짚어내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 책 자체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도 틀린 방법은 아니다. 베스트셀러를 결정하는 데 사회 분위기와 책의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어야, 그 내용이 사회와 부합하여 판매부수라는 실제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특히나 『정의란 무엇인가』는, 책 자체로도 매우 괜찮은 책이기 때문에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끊임없는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 누구나 부담없이 읽기가 편하다. 도덕과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으레 등장하는 괴상한 개념과 명제들이 이 책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샌델이 직접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인용 정도에서 그칠 뿐이다. 대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례 속에 모두 담겨있다. 이 이야기들은 여러 쟁점들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그가 신중하게 선별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 사례들이 매우 자극적이다. 그리고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면, ‘부자의 부에 대해 국가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라는 말 대신 ‘미국 부자 1등 빌 게이츠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도 되는가?’를 사용한다.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인간을 죽여도 되는가?’, ‘모르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아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슬픈가?’ 는 질문도 들어있다. 대개 샌델의 질문은, 일상에서 일어날 법한 밋밋한 사건들이 아닌, 생명이나 권리가 걸린 상황에 대해 선택을 강요한다. 마치 잘 짜여진 TV 쇼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셋째, 이 이야기들 때문에 샌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함의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어, 이것은 문제인데.’ 라고 읽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 고작이지만 이런 방식의 효과는 크다. 따라서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론들도, 샌델의 사례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곧바로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 자습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사례가 말해주는 사항을 글쓴이가 어느 정도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언어로 직접 정리해주기도 한다. 

  넷째, 사실상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도덕에 대한 매우 다양한 입장을 효과적으로 단순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샌델은 윤리학사에 등장한 여러 입장을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칸트와 롤즈), 덕 이론(아리스토텔레스) 등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몇몇 특수한 예외들을 제외하면, 이 샌델의 모델에서 포착할 수 없는 입장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읽는 사람은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바를 이 책에서 쉽게, 그리고 이론적으로도 완성된 형태로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장점들이 지금처럼 화제에 오르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내용을 읽는 사람이 마주치는 사건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적용해보기 쉽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책과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도덕적인 문제에 직면해있으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 고민해야하는지 알아간다. 또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론적 수단을 제시해준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 모든 욕구를 채워주기에 아주 알맞은 형식으로 써진 책이다. 그리고 바로 샌델이 자기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위하기를 바랐을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샌델의 위치?

  샌델이 이런 방식으로 책을 쓰게 된(혹은 강의를 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학문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그가 책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샌델은 존 롤즈에 매우 반대한다. 이런 반대는 비단 롤즈와 샌델에게만 관련이 있는 문제는 아니다. 흔히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이라고 불리는 학문적 논쟁에서 롤즈는 자유주의 진영을, 샌델은 공동체주의 진영을 각각 대표하는 학자이다. 이 논쟁은 샌델이 1982년에 롤즈를 비판하는 책을 펴내면서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도 흥미롭지만, 그 큰 맥락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미 서술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샌델의 전략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샌델, 그리고 샌델과 함께 대표적인 공동체주의 철학자로 평가받는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Alesdaire MacIntyre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보여지는 입장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매우 가까워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샌델과 매킨타이어가 함께 강조하는 것은 바로 덕virtue이다(『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미덕으로 번역되어있는 것 같다). 이 덕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충실하게 지속적으로 사는 삶을 뜻한다. 인간은 영혼, 그리고 영혼에서도 이성이라는 특별한 부분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따라 지속적으로 삶을 꾸려나간다면 그 사람은 덕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덕 있는 사람은 삶의 목적인 행복한 삶eudaimonia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어떤 특별한 원리나, 모든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규범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지침은 없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더 가깝다. 오히려, 그는 구체적인 상황마다 그에 맞는 행위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양식을 찾게 해주는 인간의 능력이 바로 이성인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실제 사건들과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어떤 행위가 가장 적합한지 알아내는 훈련이 요구된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습관hexis를 형성할 수 있으며, 이렇게 얻을 수 있는 지식을 실천적 지식phronesis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실제 벌어지는 일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사건이 없는 한 도덕은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제목,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설정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다른 전통에서는 정의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질문한다. 공리주의에서는 도덕과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좋은 것’와 ‘싫은 것’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도덕적 문제들을 이 두 개념으로 환원시킨다. 자유주의에서는 ‘선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도덕적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하며, 이와 별개로 ‘자유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여기에 기초하여 권리를 설정하고 그것을 보장해줄 수 있는 법의 수립을 추진한다. 정의에 대한 질문은, 선과 정치가 오묘하게 닿아있는 영역이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탐구하고 적절한 기준을 제시하려고 했던 그 곳이다. 

  샌델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전략은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재현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도 밝히고 있지만, 도덕에 대한 논의는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과 결코 떨어질 수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도덕적·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정치적 판단과 연결되어있다.’ 따라서 샌델이 여러 윤리적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전략은 자신의 입장에 충실히 따르는 일, 즉 구체적인 사례들을 계속 보여주며 여기에서 가장 적합한 선택 또는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윤리적인 입장에 부합하는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는 어쩔 수 없이 ‘도덕적 직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매우 위태롭다. 물론 다른 체계를 자기 내면에 담고 사는 사람들도 직관처럼 보이는 판단을 내리지만, 그것은 어떤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며, 추론하는 과정을 빠르게 하거나 생략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짜 직관에는 이런 판단의 체계나 기준이 없다. 당장 아리스토텔레스만 보아도, 샌델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동기를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행위하는 것이 이성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여기서 ‘적절’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잠깐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듯, ‘적절하다’는 말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떤 ‘적절함’을 생각해보게 된다. 어떻게?
 

이데올로기?

  우리가 ‘직관’하여 어떤 행위를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어떤 학자들은 신념의 체계라고 부르며, 그것을 한 단어로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는 체계에 근거하지 않는다. 물론 우연히, 어떤 체계에서 연역할 수 있는 결론을 담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인 추론이나 엄밀하게 검토된 양식이 아니다. 거의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정하게 행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행위들을 ‘옳은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아까 위에서 잠깐 특수한 몇몇 예외들을 제외하면 샌델의 모델이 거의 모든 윤리학적 입장을 소개해주고 있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 ‘이데올로기’를 언급하는 주장들이 이 특수한 몇몇 예외들에 해당한다. 가장 멀게는 트라시마쿠스가 내뱉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라는 짧은 말에서부터, 최근에는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권력의 미시적 작동에 의해 사회 전체가 통제되고 있다고 폭로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같은 사람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만들어진 조건에 따라 아주 우연한 여러 가지 형태로 ‘해야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하는 당위명제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결코 보편적일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사회에 편입되는 순간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사항들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편입되지 못한다면, 한 이데올로기의 깃발 아래 놓여있는 많은 사람들이 행사하는 권력에 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설사 편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우연적’이기 때문에 실천을 강요할 권능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해도 사회로부터 배척당한다. 나와 너의 분리, 우리와 너네의 분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요소가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샌델의 한계점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어, 샌델은 시장만능주의자들과 낙태찬성자들을 자유지상주의라는 한 범주에 묶었다. 하지만 실제 정치환경에서 이 둘을 동시에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의 시장만능주의자들, 즉 보수주의자들은 대개 기독교도적 정체성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낙태에 반대한다. 다시 말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명령하는 명제들의 묶음, 즉 어떤 특수한 이데올로기이다. 또한 낙태찬성자들은 자신들의 몸을 자유롭게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낙태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여성의 몸을 취급하는 방식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맥락이 다른 이야기이다. 

  더욱이 샌델은 지속적으로 어떤 일관된 체계 안에서 도덕적 판단을 내릴 것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제시하는 도덕적 딜레마 앞에서, 항상 같은 체계에서 연역될 수 있는 선택지를 뽑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가정을 바탕에 두고 논지를 전개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그런 일관성을 요구하지 않고, 자기 안에 담아놓은 당위적 명제들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 죽더라도 국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아래에서는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죽을 때 덜 슬픈 것이다. 사실 샌델의 판단과는 다르게, 도덕적 직관에 따른 판단은 일관된 도덕적 신념에 위배될 때가 훨씬 많다. 우리는 서로 모순된 행위를, 그것이 모순된 것인지 아닌지 판단을 유보한 채 일단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해야한다. 사회와 이를 둘러싼 이데올로기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샌델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덕목은 모두 이데올로기에 속하거나,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것들이다. 우애, 애국심, 시민적 의무감, 가족애, 형제애 모두가 그렇다. 이런 개념들은, 언뜻 보기에 자연스러우나 매우 위험하다. 이들은 인종탄압, 전쟁과 같은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또한 가족이든, 형제든, 국민이든 서로가 서로를 반목하는 경우를 너무나도 자주 볼 수 있다. 그 이유도 정말 다양하다. 

  흔히 이런 경우에는 덕목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들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며 우리가 어떤 기제들에 묶여있는 것은 아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존재하던 덕목들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윤리학을 정립시켰고, 샌델도 그 뜻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윤리학의 진정한 의미가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라면, 우리가 굳이 그들을 따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욱 넓은 시각에서, 자신이 영위해온 삶의 양식에 대해 총체적으로 반성해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샌델의 설명과는 달리 칸트의 견해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칸트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매몰된 행위지침들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편적인 윤리적 체계에서 자유에 대해 설명하려 한 그의 견해에 비춰볼 때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는 시민윤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언제나 세계시민적인 관점, 인류 전체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관점을 유지하려고 했다. 또한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시민사회들이 통합을 거듭하여 결국에는 세계시민적인 윤리가 확립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런 예측은「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이라는, 그가 쓴 아주 유명한 논문에 등장한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시민적인 관점을 취할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는 ‘인간을 목적으로서 대하라.’ 라는 칸트의 공식과, 그 공식을 실제로 세계에 펼칠 수 있는 사회가 출현함으로써 성취된다. 물론 그도 이 과정이 대단히 길고 힘들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말을 한다. 게다가 이것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현상계(감성계)에서 포착할 수 없으며,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세계(예지계,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지적 세계’로 번역되어있다.)를 향해 인간이 스스로 요청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의 윤리학은 진정한 도덕적 인간의 밑그림을 그려준다는 점에서, 단순히 현재의 덕목들을 윤리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들,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않는 공리주의적 생각,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의란 무엇인가』 다시 들여다보기

  샌델은 영국과 미국에서 논의된 윤리학의 전통만 다루고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될만한 이유도 충분하다. 이야기 중심의 책 구조는 책 내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만든다. 그 사례들이 충분히 사람들의 상상력을 들뜨게 할만한 일들이기에 그 효과는 몇 배가 된다. 그리고 이런 사례들은, 윤리학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샌델이 설정한 모델을 핵심만 뽑아내어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은 이런 것들이다. 아주 재미있고 실용적인 윤리학 책이다. 

  이런 서술구조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샌델의 학문적 성향 때문이다. 구체적 사례 속에서 직접 실천함으로써 윤리적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샌델은 자신의 윤리학 체계를 만들어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책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고, 앞에서 나왔던 여러 이론들을 반박할 수 있는 최고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적합성’이 도덕적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하며, 지속적으로 적합한 행위를 함으로써 도덕적인 인간 즉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샌델도 여기에 동의하며 시민적 덕을 자기 윤리학의 중요한 자원으로 삼았다. 

  하지만 샌델이 제시하는 덕목들은 특정한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좌우될 수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잘못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미국이 지금까지 쌓아온 역사적, 사상적 전통에서 나온 (미국)시민적 덕목들은, 요즘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볼 때 그리 바람직하지만은 않아보인다. 물론 샌델은 그 덕목들이 발휘되고 있지 않거나 잘못 발휘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미국사회를 비판한다. 하지만 특정 집단의 가치들을 일반화하고 있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정의란 무엇인가』 한 권으로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학자들에게도, 샌델에게도 한계점은 분명 존재하게 마련이다. 샌델이 부정적으로 설명한 칸트가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답이 꼭 옳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이 뒤를 고민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이 책은 50만 부가 넘게 팔렸다. 바로 ‘이 뒤’를 고민할 사람이 적어도 50만 명이 생겼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아주 기쁜 일이다. 그만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업, 윤리적 삶의 첫걸음을 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50만 명 각자의 삶, 나아가서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더욱 진지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생겼다는 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은 매우 긍정적이다.


댓글(3) 먼댓글(1)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단상
    from 효진이네 : 꼼꼼히 읽기 2018-02-17 07:01 
    『정의란 무엇인가』를 두 번째 읽는다. 학교를 다니며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에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불만에 가득 찬 리뷰를 교지에 투고했다.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막 나왔을 때 쯤이었으니,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새로 번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판형과 종이가 바뀐 정도 이외에 큰 차이는 못느끼겠다.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초판을 읽은지 오래 되기도 했고. 다시 번역이 되고도 30쇄나 더 찍을 만큼 많이 읽힌 책이고, 그에 대한
 
 
에브리온 2010-12-06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로운 지적에 글을 보며 감탄사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것을 비롯해서 이제까지의 서평 중에 가장 풍성하면서, 동시에 정확한 글인 듯 합니다. 즐겨찾기 등록하고 갑니다 !

박효진 2010-12-07 00:46   좋아요 0 | URL
엇... 감사합니다... ㅠ.ㅠ
이 글은 중앙대학교 교지인 중앙문화에 기고한 글입니다. 저는 중앙대학교 철학과 학생이고요. 교지에 다른 좋은 글도 많으니 시간 되시면 찾아서 읽어주세요 ㅎㅎㅎ

남규 2010-12-16 23:4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은혜로운 바쿄진님..ㅜㅜㅜㅜ
 

<『서양윤리학사』(로버트 L. 애링턴 씀,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03)에서 칸트 부분 요약. 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발표문.>

문 : 우리는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가? 이에 대한 칸트의 답변과 논증을 재구성해보고, 그 타당성을 평가해보라.

답 : 

  칸트는 행위가 도덕적인 영역에 속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위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는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다른 목적이나 대상에 대한 고려가 그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해야겠다는 의지 자체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가언 명법과 정언 명법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이다. 둘째, 그 행위의 동기를 보편화시키는 사고실험을 해보았을 때 아무런 모순도 이끌려 나와서는 안된다. 이는 그 내용이 실현되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 검토해볼 수 있는 기준이다. 셋째는 인간을 수단과 목적으로 동시에 대우하라는 요청이 수반되는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인간 또한 물리적인 세계 안에 위치하는 존재로서, 다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데, 이러한 요청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위와 같은 세 가지 기준에서 인간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첫째, 거짓말은 정언 명법의 형식을 띄지 않고 가언 명법의 형식을 띈다. 즉, 거짓말은 구체적인 상황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둘째,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세계는 불가능하다. 만약 어떤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면, 진실과 거짓말을 구별하는 기준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는 거짓말이 없는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세계는 모순에 빠져버리며, 그러므로 불가능하다. 셋째, 거짓말은 인간을 거짓말을 하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른 대우를 하는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거짓말이 가언 명법의 형식을 띈다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와 인간을 비교하여 인간의 위치를 상대화시킨다. 

  거짓말 논증에서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도덕성을 이루는 기초라는 점에서 이 문제에서 역시 인간 스스로의 요청과 자각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 요청은 실천적인 요소로서 매 순간, 모든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덕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 도덕과 비도덕을 나누는 모든 기준이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이 ‘요청’ 이라는 말의 의미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원 즉 윤리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도덕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매우 벗어나 있다. 즉, ‘~이다.’와 ‘~해야 한다.’ 는 형식을 오가는 다른 기준(정식)들과는 달리, 요청은 언제나 ‘~해야 한다.’는 형식을 띈다. 다시 말해 ‘요청’에는 이성의 기능인 ‘판단’이 결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 스스로의 이성에 대한 반성만을 통해 도출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 진정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지 혹은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현대사회는 인간을 수단으로서만 대하라고 이념적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인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간들은 스스로를 동물화하는 데, 즉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그런 요청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잊어가는 듯이 보인다. 몸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에게 위장을 한다는 이유로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동물로서의 인간에게는 거짓말이란 무의미한 단어이다. 이는 칸트 스스로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사태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 때문에 이 ‘요청’을 도덕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지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