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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유시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유시민이라는 이름은 참 복잡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무렵, 그리고 그가 유명한 논객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 그와 동시에 거론되던 이름은 진중권, 강준만, 김규항 등이다. 그들은 여전히 지금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치논객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이가 없을 정도지만, 정치적인 견해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무리없이 좋아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 이름이 복잡해진 것에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끼어든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전에 그랬듯, 그리고 죽은 뒤에도 처절하리만큼 그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기가 전공한 경제학에 대한 지식은 이론적인 무기가 되었고, 날카로운 말과 편안한 글쓰기를 모두 겸비한 쉽지 않은 능력은 실천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는 많은 진보정치인들과 논객들에게, 좋은 상대이면서 넘기 힘든 벽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들이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이나 『경제학카페』를 읽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을 수만은 없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노무현을 옹호하거나(『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자신을 변명하는(『후불제 민주주의』) 책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론적인 성격을 갖춘 책인데도 그러하다. 정치인 유시민의 견해를 빼고 일반적인 국가이론 입문서로서 읽으려 해도, 그의 인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으며 그가 왜 이런 식으로 글을 쓰게 되었을까를 지속적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를 떨쳐내기가 매우 힘들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쓴이를 의심하면서 글을 읽는 것은 논리학적으로 오류다. 나쁜 사람이 말을 했다고 그 말이 나빠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은 어떤 누군가가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하고 책을 일단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1 : 포퍼의 그림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가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 이후, 출판가에는 여러 분야의 철학·이론에 대한 입문서가 유행을 타고 있는 듯하다. 이후 샌델 자신의 책도 여러 권 발간되었고, 그에 대한 여러 측면의 반박도 출판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시민 또는 출판사가 이 책을 언제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이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혐의를 받기에는 충분하다. 심지어 제목부터 『…란 무엇인가』 이겠는가. 

  서술상의 분류와 특징도 샌델의 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역사상 등장했던 여러 이념들을, 그 원형을 지니고 있는 학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입장을 살펴본다. 단순히 현대에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현실정치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가에 집중해서 분석하기보다는, 그 원형을 살핌으로써 발전이나 왜곡의 상을 살피고 진정한 의미를 밝히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서술방법이다. 

  또한 상식적으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의 가장 앞에 와야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뒤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샌델과 일치한다. 이론의 역사나 발전의 단계를 추적해보려고 한다면 응당 시대순으로 배열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국가주의 국가론’으로 가장 처음 제시한 홉스의 철학은 사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극복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천명하며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가 생겨난 이유는 아무래도 현대의 국가나 공동체 이론에 있어서 고대의 목적론적 이론이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샌델을 통해 이같은 이론적 논쟁의 맥락이 널리 알려진 탓이 더 클 것이다. 그의 책에 드리운 샌델의 그림자는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이 책이 빚지고 있는 학자는 샌델 뿐만이 아니다. 샌델이 보인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혼자 해보는 추측일 뿐이다. 오히려 그가 의지한 것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학자는 포퍼다. 목적론적 국가관을 분석하는 작업에서 그는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라는 책을 거의 인용하다시피 한다. 이런 국가이론들의 실제 정치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는, 포퍼의 반증주의적 사회철학이 자유주의의 정수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포퍼의 이야기가 책의 여러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보니, 이 책에서 펼쳐지는 분석이나 견해가 그의 고유한 것인지 아니면 포퍼의 견해를 요약한 것인지가 불분명해지는 수준에까지 다다른다. 

  목차를 중심으로 포퍼의 견해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고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반민주주의적인 목적론적 국가관에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포퍼이며(4장), 혁명과 개량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실의 정치에서 가장 그럴듯한 지향점을 제공해주는 것이 포퍼의 점진적 개량이라는 사회공학(6장), 이것이 바로 진짜 진보정치이며(7장), 시장경제의 원리가 돌보아주지 못하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부분을 국가가 도맡아 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가장 올바른 절차를 철학적으로 제시해주는 사람 또한 포퍼이다(8장). 그래서 포퍼는 ‘진보자유주의자’이다. 

  포퍼의 견해가 잘 요약이 되어있는지는 둘째로 하더라도, 과연 그가 간추린 포퍼의 정치적 견해가 정말 그가 말한 것처럼 정치적인 변화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이것은,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조금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유시민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론적 기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답변을 할 수 밖에 없다. 

  포퍼 식의 점진적 진보가 가능한 이유, 그리고 그가 그러한 정치이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기반에는 ‘반증이 가능해야 과학’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반증주의 과학철학이 깔려있다. 이 입장은 어떤 명제도 거짓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참이라고 가정된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다시 어떤 명제도 완전한 참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포퍼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받아들이자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참일 수 없지만,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고자 하는 세력이 하는 말 또한 참일 수 없다. 

  진리의 힘을 쟁취할 수 없는 정치투쟁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가 잘 파악하고 있듯이, 현실적으로 집권하고 있는 집단에 비해서, 진보주의자들은 상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적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는 현실이 아니라 이성에 기댄다. 유시민은 진보가 이성을 사용한 점진적 진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지만, 그 진보의 성취는 언제나 현실적 상황을 뛰어넘은 진리의 힘을 이용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그가 파악한 이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의 이성, 현실이 어떻다 하더라도 진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인간을 이끄는 그 이성이다. 그래야만 이성을 통한 진보의 성취가 가능하다. 그가 논의를 많이 기대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가 진보에 대해 열망하는 것은 오히려 칸트적 의미의 이성에 더 가까워 보인다. 보수주의의 원조인 버크나 그것이 철학적으로 가장 정치하게 표현된 흄의 실천철학에서만 보아도, 진리에 대한 회의는 언제나 보수주의의 무기이지 진보정치세력의 무기는 될 수 없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2 : 진보자유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포퍼를 제외하고 난 그의 정치적 견해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는 그것이 진보자유주의로 개념화되어있다. 이 책의 전체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국가관이 없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국가관이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가져야하는 국가관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렇다면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되묻고 싶은데, 나는 적어도 이 책에서 소개된 내용에 국한한 이 개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포퍼를 강조하는 등 그의 태도를 살펴보았을 때, 그는 행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법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절차를 대단히 중시한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에 부합하기도 하다. 자유주의 정치철학 또는 국가관의 핵심은 그가 포퍼에 대해 말할 때 은연중에 주장하듯이 ‘완전히 올바른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잘 설명하고 있듯이 자유주의 이론의 국가관, 즉 사회계약에 따르면, 세상엔 여러 가치들이 경쟁적으로 받아들여지길 기다리고 있으며,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은 이성에 의지한 합리적 토론을 거쳐 여러 가치들을 승인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구축한다. 어떤 가치가 실제로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회계약에 의해 승인된 것은 무엇이든 그 사회가 주목하는 가치가 된다. 또한 개인들의 자유는 여전히 가장 존중받아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에, 여전히 개인들은 그 주목하는 가치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사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그 결과의 측면에서 롤즈의 사회철학과 비슷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그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해서 논하면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자유주의 이론가인 롤즈를 전혀 언급하거나 인용하지 않은 것을 심히 의문스럽게 생각한다.) 출발선을 같게 하는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을 국가가 담당하고, 나머지를 시장경제가 담당하게 하며, 우연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측면을 최소화해야한다는 것은 이미 롤즈의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등에서 제시된 자유주의의 새로운 측면들이다. 

  그러나 유시민은 이 진보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국가관과 목적론적 국가관이 결합한 형태의 공동체이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그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윗 문단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체가 연대를 통해 최소한의 사회적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도덕적인 옮음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목적론적 국가관의 측면이다. 그런데 이걸 합리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보장하는 문제는 자유주의 국가관의 측면이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진보정치를 함축하려면 목적론적 국가관을 수용해야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굳이 목적론적 국가관을 수용하지 않아도 된다. 롤즈는 칸트의 비판철학의 개인중심적 측면을 받아들여 진보적인 정치적 실천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유시민의 입장에 선다면, 칸트의 실천철학이 목적론적 측면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롤즈의 철학도 목적론적 측면을 담고 있다고 옹호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라도 경제를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 진보적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제학자인 한 인도의 아마티아 센이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권 이론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진보적인 철학자인 피터 싱어 또한, 자신의 독특한 진보적 정치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는 데 목적론적 국가관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적론과 철학적으로 정반대에 서있는 공리주의를 자신의 기초로 삼는다. 유시민이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란, 자유주의이거나 혹은 노직이나 하이에크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과는 구분되는 ‘그냥 자유주의’이지, 무언가 특별한 자유주의는 아니다. 

  더군다나, 합리적 절차를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국가관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준 목적론적 국가관을 결합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한지 보여주는 어떠한 논증도 이 책에는 들어있지 않다. 이 두 국가관은, 본질적으로 옳은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을 어떻게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가, 그 가치를 이룰 수 있도록 공동체가 개인에게 간섭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등등 사사건건 시비가 붙는 사이이다. 첫 번째 질문에 목적론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자유주의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두 번째 질문에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에 자유주의자는 절차 없이는 정당화 없다고 응수한다. 세 번째 질문에는 간섭해도 된다는 입장과 그것은 자유의 침해라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런데 유시민의 논증이란, 축약하자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수준이다. 이 두 국가관이 이토록 쉽게 조합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면, 이 두 국가관(또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철학) 사이에서 벌어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논쟁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나보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3 : 홉스의 문제

  또한 이 책의 분류에 따르면, 홉스는 국가주의 국가론을 정당화하는 이론가에 들어가고 있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홉스는 국가의 힘을 대단히 강조하긴 하지만 정치철학의 전통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에 편입시키는 것이 더 올바르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요소를 확립하고 이론적으로 전개한 사람이 바로 홉스이기 때문이다. 핵심요소란 다름아닌 보편주권론과 사회계약설이다. 보편주권론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부터 주권이 나온다는 이론이며, 사회계약설은 이 주권자들의 합리적 선택에 따른 계약에 의해 국가(공동체)와 정부가 구성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홉스는 국가주의자라기보다는, 계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국가의 폭력독점을 극단적으로 정당화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선조쯤 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로크와 밀, 그리고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그 이론적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홉스가 군주제를 선호한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즉, 그에 따르면, 이미 국가가 실행하려는 것은 계약에 의해 동의받은 내용이므로 되도록 빨리 해야한다. 그런데 행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의견이 분산되어 실행이 더뎌지므로, 그 의지가 단일한 군주제가 실행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한 군주제란 현대의 위계적 관료제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군주제이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가 자유주의자로 분류하지만 귀족정을 옹호하는 루소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정부의 형태를 논하는 중에 귀족정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그가 주장하는 귀족정이란 선출 귀족정을 이야기하며, 이것을 현대언어로 번역하자면 대의민주주의쯤 된다. 정치사상사적 맥락을 놓치면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며, 그가 무엇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범하게 되는 실수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폭력독점과 그 힘의 범위를 가장 넓게 설정한 이론가라는 점에서 국가를 중시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싶었던 유시민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정치철학의 전통 자체를 부정하는 분류방법은 쉽게 용납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생각하는 국가주의는 신분제를 옹호하는 근대 절대주의 국가라든가,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서 발견되는 공동체 우선적인 철학에 더욱 부합하는 것 같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글을 마무리지으면서, 정치가로서의 유시민을 고려하고서 책을 다시 읽어나가기로 해보겠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도 아닌, 정치인이 정치이론에 대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백미는 책의 가장 끝에 있는 맺음말이다. 애초에 내가 시도했던 ‘정치인 색깔 빼고 보기’라는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유시민은 스스로 ‘정치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같은 사람들은 허탈해질 수 밖에 없다. 아, 이것은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란 말인가. 

  사실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을 고려하고 이 책을 읽어보자면, 국가이론과 상관없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합당하려고 열심히 기를 쓰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 그리고 거의 절대악과 같이 묘사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행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경멸로 가득하다. 포퍼의 점진적 이론에 대해 무게를 싣는 이유는, 그것을 다름아닌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동일시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한나라당-민주당과 민주노동당-진보신당 사이에서, 자신이 이론적으로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역사에서 승리했다’는 평가는 어떤가. 독일 사민당이 현재까지 존속하는 것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승리했다는 증거라고 하니 참 할 말이 없다. 

  이러한 변명의 정점은 베버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들먹이며 절대악 한나라당을 몰아내야한다는 가장 마지막 장이다. 베버의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이 없어서 이것이 정확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개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시민의 설명에 의하면 신념윤리는 자신이 설정한 이상을 향해 실천하는 동기를 가장 우선에 두는 시각이며 책임윤리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윤리관이라는 것이다. 운동과는 다르게 정치인은 책임윤리에 따라 정치를 해야한다. 이것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자체가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설계된 제도라는 그의 입장과 결합하여, 그 정치제도의 본질을 가장 잘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 연합정치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최악을 피하는 ‘예측 가능한 결과’에 입각한 책임윤리에도 부합한다. 

  유시민이 저술한 이론서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이 아주 쉽게 술술 읽힌다는 것은 매우 좋은 점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거나, 그런 입장을 반영하여 정치철학의 역사를 제멋대로 재구성하는데 쓰인다면 그것은 ‘목적론적’으로 온당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유시민은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현들이 답변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렇게 변명이 급했을까.

 

덧댐 1 : 이 글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인 ‘진보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 아이디어는 아는 친구이자 이글루스 유명 블로거인 Socio의 글(http://www.facebook.com/socio1818/posts/168970979827554)에서 빌어왔음을 밝힌다.

덧댐 2 : 노무현은 생전에 이순신에 감정이입을 하더니 유시민은 유수의 이론가들에 감정이입을 한다. 물론 그 감정이입은 왜곡과 아전인수를 곁들인 것들이다. 어쩜 둘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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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2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정치학도 모르고 유시민의 책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자 자신이 스스로 밝혔듯이, 이 책은 국가론 입문서가 아니라 한 정치인이 자신의 국가관과 정치 윤리관을 밝힌 책으로 보입니다. 저자가 형식적으로 기존의 정치이론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런 비평을 하신 것이라 여깁니다만, 저자가 현실 정치인인 이러한 저서의 경우는 학문적 차원의 잣대보다는 저자의 개인적인 정치적 입지의 천명이라는 잣대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저자가 제시했던 제목은 '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였는데, 출판사에서 수정을 요구했다고 어디선가 지나치며 읽은 것 같아서 몇 자 끄적여 봤습니다.

박효진 2011-06-28 00:30   좋아요 0 | URL
이 글의 끝에서 짧게 줄였습니다만, 이 책을 정치적 입장의 천명이라는 잣대로 바라볼 경우, 그와 입장이 같지 않은 저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끌어들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그 학자들의 입장에 대한 분석과 연구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 글에서 지적한대로 이론분석에서부터 삐끗하고 있으니, 정당화의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글에서는 격하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만, 대체 포퍼의 책을 읽은 것인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마르크스의 책을 읽은 것인지도 의심스럽고요. 물론 열심히 운동하던 대학교 시절에 다 뗐겠지만...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이번달에는 유난히 재미있게 읽어볼만한 철학자 평전이 많이 나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평전 종류의 책들은, 사상 입문과 더불어서 그들의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수도 있는 게 장점이죠.  

1. 스피노자 

  근대를 뛰어넘는 근대의 방법론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인 스피노자에 대한 책입니다. 사상에 대한 입문을 할 수 있는 책은 더러 있지만(사실 별로 없지만) 삶에 대한 이마만큼 두께의 생애에 대한 책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방식으로 스피노자를 자신의 철학에 차용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충분히 좋은 시도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생애를 음미하며 그 자체로 즐겨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또는, 비슷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2. 데리다 평전 

  다음은 수많은 오해에 둘러싸인 데리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를 어떻게 한 마디로 설명해야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집에 『데리다』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자막도 없는데다가 영어와 프랑스어가 난무하는(...) 영상이라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여튼 그의 삶은 그의 혁명적인 사상 만큼이나 뜨거웠다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죠. 알제리 이민자 출신 아웃사이더로서 68혁명에도 참여하는 등 사회참여에도 활발하였고요. 

 

 

 

3.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다음은 스토아 학파의 대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그는 사상사적으로 탁월한 저서를 남긴 것과 동시에, 로마 제국시대 최고의 전성기라는 5현제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기도 합니다. 인문학 안에서도, 역사학에서는 그의 정치, 경제적 치세에 대해 연구하는 데 치중하고, 철학에서는 그가 스토아 학파의 사상적 전개에 남긴 업적에 대해서만 연구하게 마련이죠. 아무래도 종합적인 연구를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좋은 모범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4. 미국 예외론의 대안을 찾아서 

  미국에 대한 연구서는 여럿 있지만, 목차나 내용, 분량에 있어서 참 충실한 책은 오랜만이기에 추천목록에 올립니다. 정치, 사회사적인 맥락에서 미국을 연구하는 것은, 여러모로 쉬운 일은 아니지요. 한국에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나라일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시각이 매우 대립적으로 형성되어있기 때문일텐데요. 그 시각에 깊이를 더하는 책이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네요. 

 

 

 

5. 불안의 시대 

  단적으로 말해,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는 불안을 먹고 자라는 경제, 사회적 경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불안'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키워드입니다. 『불안의 시대』는 그 불안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형성되었는지 분석하는 책입니다. 사람들의 불안은 경제체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인데, 그에 대한 어떤 분석을 제공해주는 책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단, 보수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고, 미국의 제국적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하버드 대학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추천사가 조금 마음에 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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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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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지난 달 알라딘 독자 신간평가단이 선정한 인문/사회/과학분야 주목할만한 도서이다. 이 책이 선정된 이유는 일단 이 책의 지은이인 버트런드 러셀이 글을 매우 시원하고 잘 쓰는 작가일 뿐 아니라, 각각의 주제들에 대해서 아주 논리적이고 핵심만 간결하게 기록하기로 워낙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여러 에세이집들이 번역된 데 이어서, 영어로 『Bertland Russell's Best』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책도 번역이 되어 나왔다. 많은 독자들, 그리고 나조차도 말 그대로 'best'일 것이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히 속았다. 이 글은 best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아무런 고려없이 러셀의 글을 마음대로 재단질해서, 마치 잠언집을 보는마냥 형편없이 편집해놓았기 때문이다. 러셀이 이 책의 원고를 직접 보고, 수정을 봐주고, 서문을 써주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이해가 안될 지경이다. 일말의 이해를 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면, 러셀 본인만은 각각의 단편이 어떤 의미로 쓰여진 조각글인지 다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이 정도만 인용해도 그 뜻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거라는 정도다. 이것도 아주 많이 이해한 것이다. 러셀을 접한 이래로 그에 대해 이렇게 분노한 것은 처음이다……. 

  이 책이 화가 나는 이유는, 위에서 내가 추측한 러셀이 이 책을 별 생각없이 출판할 수 있게 한 이유와 정확하게 반대이다. 러셀이 아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조각글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도로 쓰인 것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서유럽 사람의 입장에서 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비하가 가감없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고, 지금은 폐기된지 오래인 행동주의 심리학에 기반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글도 보인다. 같은 글에서 인용했다고 하는데,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두 단편이 나란히 이어서 쓰여있기도 하다. 대체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그의 글은 이런 식으로 뽑아내어 읽었을 때 그 정확한 의미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는 기본적으로 논리학자이며,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연관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글의 논지 전개를 따라가야만, 그가 실제로 하려는 주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근거가 어떻게 그 주장을 받쳐주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가 글에서 자주 쓰는 (그의 체험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비유들도, 글 전체와 아주 짙은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비유는 단순히 수사적 전략에 그치지 않고 아주 강한 논리적 연결고리를 전제하고 쓰인다. 

  그나마 그가 일관되게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종교에 대한 부분은 그 뜻이 살아있는 편이다. 그것은 논리적 완결성을 결여한 종교의 교리와 도그마에 대한 철학적 비판, 그리고 그의 대표적인 에세이집 가운데 하나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에서 보여주는 종교의 여러가지 사회적인 해악에 대한 지적들이 많이 알려져있기 때문에 그나마 쉽게 이해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주제에 대한 조각글들은, 특히나 결혼(성)과 윤리, 도덕에 대한 단편들의 경우 이런 난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미 번역되어 나오기도 한,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에세이들은 명쾌하고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는 이러한 러셀의 글의 참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으로 러셀을 읽으려 시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완전히 실패하는 것이다. 러셀의 노벨상 수상 소감문, 그리고 이 책이 주로 인용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많은 에세이들이 차라리 편집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실려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는다. 러셀의 글이 어떤지 알아보고 싶다면, 차라리 에세이집이 완전히 번역되어 나온 다른 책들, 예를 들면 『행복의 정복』,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같은 책이 훨씬 낫다. 나는 주로 사회적인 주제들에 대한 에세이가 실려있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특히 좋아한다. 이런 책들은 특정한 주제에 편중되어 있어 그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힘들지라도, 그의 글의 특징적인 면이나 성향을 파악하는데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단 하나, 이 책의 긍정적인 면을 하나 꼽아보자면, 편집자와 해설자가 달아놓은 코멘트들이 다행히도 어느 정도는 이 책의 혼란스러운 면을 다소나마 보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러셀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러셀을 연구한 사람들의 이같은 정리가 약간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의 글과 진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다른 사람들의 코멘트나 2차문헌에 의존하기보다는 원래 저자와 직접 대면하고 책을 통해 대화하는 것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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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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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교훈으로서의 역사

  전통적으로 인간의 역사의 가장 큰 기능은 교훈성이었다. 설화나 신화의 전승은 '이렇게 해야한다.'거나 혹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좀 더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취하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 벌어졌던 일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단순하게는 이들의 집적이 곧 역사가 된다. 현대의 역사가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엄밀한 사실로서의 역사'란, 구전설화 시절부터 태동한 위와 같은 경향에 비해 그 탄생이 한참 뒤쳐진다. 어찌 보면 오히려 이 교훈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한 - 그러니까, 이를테면 너희를 가르치려고 꾸며낸 말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을 들려줄테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 방법론적 엄밀함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역사적 사건이 교훈적이라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교훈은 언제나 누구에게/어떤 교훈을 주어야 하는지(또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가 문제로 떠오르고, 이 부분은 항상 문제적 영역이다. 완벽하게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위의 두 가지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사건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편집되며, 재생산된다. 때로는 서로 다른 편집본이 전혀 다른 대상과 가치를 지향하는 경우도 있으며, 흔히 이런 현상은 역사전쟁이라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이 역사전쟁의 전선은 세계의 무수한 곳곳에 형성되어있다. 특히 '식민주의'라 불리는 이념적 경향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는 곳에서는, 21세기인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 가운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문제는, 역시나 일본의 식민지배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20세기의 첫 절반동안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은 주변 각국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분명하게 끼쳤다. 이 제국주의는 일본 민족의 탄생과 함께 등장했고, 그러므로 20세기를 지배한 '민족=국가'라는 등식과 맞물려 행정적(물질적)으로 증식되었다. 이에 맞선 민족들은, 경제이념과 관계없이 저 등식을 (다소나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엿고, 이는 (한국을 포함한) 피억압 민족을 각 민족공동체별로 통합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재일조선인 - 위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언어의 감옥에서』의 글쓴이 서경식 교수는 자신의 위치를 이방인(디아스포라)이라고 규정하고, 이 위치에서의 경험을 증언하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를 이방인으로 만들어주는 현실적 조건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이다. 그가 생각하는 재일조선인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자신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적 경향을 지닌 집단의 중요한 통일성의 도구(기제), 즉 언어가 자신의 사고와 행위의 기반을 지배하고 있는데서 생기는 이질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그가 2~3세에 해당하고, 그의 집안에서 민족교육에 대해 그렇게 열성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인데,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공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1부인 '식민주의와 언어'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어찌보면 논의라기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여러 사례를 들어 학술적 언어로 표현한 에세이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둘째, 재일+조선인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자신에게 공존하는 가운데, 각 개별 정체성을 대표하는 집단(일본과 한국(또는 북조선)이라는 민족국가)에게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승인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공존하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할 단일함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글쓴이의 주장을 요약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지는, 아직도 뚜렷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거칠게 정리한 수준이다). 위의 언어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글쓴이가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책 내부에서 따로 장을 내어 심화시킨 측면이 없지 않기에 첫째 이유를 따로 떼어놓았지만, 글쓴이의 정신세계 전체를 지배하는(그래서 이 책의 실제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관된 흐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첫째는 어쩌면 이러한 상황의 부수적 효과일런지도. 

  글쓴이 스스로가 지적하는 '한국의 독자들이 자신을 찾는 이유'인,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맥락이 중요해지는 것(또한 그 스스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역사의 교훈은 대개 집단서사와 결부되어있으며, 집단서사의 현대적 버전은 다름아닌 민족서사이다. 특정한 공동체, 즉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역사는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준다. 다름아닌, 학문의 이름으로 집단서사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한국사(한국 민족의 역사), 일본사(일본 민족의 역사) 같은 것들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모든 집단(굳이 민족이 아닌, 다른 정체성으로 뭉친 곳도 마찬가지다.)에 있어 고유의 집단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보편적 현상으로 보면 그럭저럭 넘어갈만하다. 그러나 민족사의 경우, 어떤 교훈을 집단의 구성원에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국가 제도의 물리적 행정과 더불어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는다. 이는 민족공동체와 국가공동체가 대체로 동일한 경우, 반드시 발생한다. 전쟁의 책임은 이제 끝난 것이며, 새로운 세대는 '희망찬 역사관'을 바탕으로 일본민족을 중흥해야 한다는 식의 일본우익들의 주장은 이같은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고, 패전국으로서 자신을 위치시킴과 동시에 그런 패배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라고 교시하는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간다. 

  자유주의자 문제 

  재일조선인인 글쓴이는 이에 대해 당연히 비판적이다.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더욱 무게를 두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싸구려 정치공학으로 민족을 팔아먹는 이들이 아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들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주된 주제이며, 동시에 그가 더욱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일본과 한국 내에서 이런 싸구려들을 비판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자(리버럴, 리버럴리스트)들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번역한 박유하 교수나,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조한혜정 교수와의 교류로 유명한 (역시나 일본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우에노 치즈코 교수 등이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단순히 서경식 교수의 입장만이 실린 이 책만으로는, 사실 그와 그의 비판의 대상(그리고 그들이 글쓴이를 향해 내놓은 반비판)들 사이에 오고간 논의가 무엇인지 종잡기 힘들다. 게다가 한국인에게는 (적어도 내게는) 생소한 '전쟁책임론의 이론철학적 기초'에 대한 더 넓은 논의의 맥락도 알아야하기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주장의 진짜 의도와 의미가 무엇인지는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자유주의자들이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해보인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이 아닌 가부장적 국가제도의 문제, 즉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시도라든지, 양국 모두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드시 알아야한다는 식의 논설, 인류사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일본의 전쟁은 잘못된 일이므로 윤리적 책임은 져야하지만 '한국'에 '일본'이 사죄해야 한다는 것은 민족주의적 시각에 매몰된 입장이므로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민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서경식 교수의 비판 -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결합, 그 사이에서 

  이들에 대한 글쓴이의 비판은, 전혀 다른 두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의 관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을 '편협한' 보편주의라고 비판하는 방향이다. 자유주의자들의 탈민족주의는 일본민족이라는 개념을 없애보림으로써 명백하게 존재했던 '일본' 민족의 전쟁책임을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민족 대신 대체물을 통해 전쟁 중에 발생한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서경식 교수의 입장에 따르면) 어떤 대체물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론의 평가는 현실에 얼마나 정합적인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때, '민족=국가'인 20세기 초반의 현실에서 민족주의 이념 이상으로 설명의 힘을 가지는 이론(혹은 민족의 대체물)이 있을 수 있는가? 글쓴이의 답은, 민족주의가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다른 어떤 보편이론(예를 들면, 페미니즘)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 참여하고 설명해내려는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민족주의를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는 반드시 민족이라는 것을 자신의 품에 안아야만 한다. 

  또 다른 한 방향은, 특수주의적 비판이다. 여기서의 특수란 다름아닌 서경식 교수 스스로를 뜻한다. 그가 경험하고 있는 특수함은, 정확하게 민족(국가)라는 존재를 통해, 그 경계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책의 다른 여러 글에서 보이는 그의 개인적인 여러 경험은, 민족이 단순히 탈민족주의라는 사상적, 이론적 조류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물리적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민족 사이의 이방인이라는 그의 존재 자체가 민족의 실체와 힘을 증명하는 가장 강한 증거라는 것이다. 탈민족주의의 관점에서는 그도 역시 자기들과 동일한 자유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고, 따라서 탈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민족이라는 유령은 그의 곁을, 그리고 우리의 곁을 여전히 맴돌고 있다. 

  체험과 증언의 가치 

  이 책은, 그래서 어떤 이론적 전망이나 체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에세이의 모음이라는 책의 구성 자체의 특징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글쓴이의 특수한 정치적 위치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징은 그가 비판하는 사람들과의 대립, 특히 그들이 기대고 있는 다양한 탈민족주의적 경향들과의 대립으로 더욱 명확해진다. 그의 비판에 따르자면, 이러한 경향들은 그 자체로 논리적 정합성과 일정한 정치사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의 근본은 결국 민족(국가)의식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적 완결성에 비해 그에게는 (적어도 이 책에서는) 이론적 무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그의 명확한 정치적인 입장과 묘한 긴장을 일으킨다. 

  대신 서경식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체험이다. 자신의 체험, 그가 자주 인용하는 레비의 체험 등에 대한 강조는, 기억의 정치를 재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증언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현실의 문제에 잘못된 접근방식을 채택할 수도 있는 완결된 이론체계에 대한 반정립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의 입장에서 체험과 증언은 전쟁책임문제와 민족문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 문제를 통합해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자 자기정당화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체험을 통한 직관적 판단(특히 재일조선인이라는 위치)이 가져다주는 통찰이,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선사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맺는말 

  그러나 레비의 자살, 그리고 글쓴이 자신의 토로에서 읽어낼 수 있듯, 체험을 되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증언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증언에 극단적으로 드러난 비정상성을 수용할 수 있는 인식의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성공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이 체험과 증언은, 긍정적 미래의 가능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즉 그런 체험과 증언과 유사한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체험과 증언의 당사자들이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할 (당위적인) 사명과도 같다.  

  그리하여, 냉철하고 확고한 정치적 입장에 비해, 그가 그리고 있는 앞날은 4부의 대담에서 스스로 인정하듯 다소 공상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단순히 '대안이 없는 일본 우익과 자유주의자 양비론'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극복해내는 일은 결코 짧은 시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이를 위해 (글쓴이의 분석에 따르면) 가장 먼저 포기되어야 하는 일본의 민족주의가 지금처럼 지속되는 이상, 각각의 민족들은 그 폭력적 이념을 일본에 의지해 유지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는 각 민족들이 적대적 공생관계에 돌입하는 우울한 미래를 낳을 것이다. 

  『언어의 감옥에서』에서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제목의 뜻과는 달리 일본 내에서 벌어진 전쟁책임론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다시 그 내용의 대부분은 자유주의자 비판이다. 한편 그의 분석은 충분히 귀담아들을만 하고, 그의 체험은 충분히 고려되어야하는 것들이다. 이 둘이 결합했을 때, 너무나도 이상적이긴 하지만 새로운 정치가 열린다. 서경식의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위와 같은 이유들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적 통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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