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독일관념론 발표>

  Hegel은 이미 자신의 책 『철학적 학문들의 백과사전(엔치클로패디)』에서 학문의 전체적 체계에 대해 대략적으로 밝혀놓은 바 있다. 법철학은 그 가운데 정신철학, 그 가운데서도 객관정신의 한 형태인 법의 체계와 그 속성, 그리고 그 지향점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다른 학문의 분과들과 마찬가지로 법철학 역시 엄밀한 사유의 과정을 밟아나가야 하고, 그 결과가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타당하다고 납득할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는 학문적인 엄밀함은 분명히 지켜야함에도 불구하고, 법과 공동체를 연구하는 데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연철학의 근본적인 전제와 대비되어 나타난다. 인간은 자연철학을 하면서 인간의 의지가 전혀 반영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완결된 체계와 구조를 갖추고 있는 자연에 대해 그 자체의 모습을 탐구하고 규명해야 한다. 하지만 법과 공동체, 나아가 정신에 대한 학문은 이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 학문의 대상에는 인간의 의지가 반드시 반영되어 있고, 따라서 인간의 정신과도 같이 끊임없는 변화를 겪으며 생성의 과정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철학의 목표는 현재 확립되어있는 형식적인 법의 근원과 구조에 대해 연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법의 지향점을 담고 있는 인간의 정신의 본질에 대해서까지 연구해야 한다. 더욱 궁극적인 것은 이 두 축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지를 분석하여, 현실의 법의 모습과 그 변화가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지를 설명하고 그 변화가 나아갈 바를 제시해주어야 한다. 법철학에 있어서 현자의 돌에 비유될 수 있는 직접적이고 전체적인 직관은 결코 주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오로지 논리적 사유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법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엄밀한 사유가 동반되어야 함을 쉽게 잊어버린다. 논리를 포기한 채 직관이나 갑작스런 깨달음에 의존하여 법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내적 직관과 법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형식적인 법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허황된 주장을 일삼고 있다. 그들은 체제를 비판하고 전복하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이자 신으로부터 내려온 사명 정도로 여기고 있다. 또한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도하려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선지자라고 평가하지만, 사실 법, 국가, 그리고 공동체에 대해 사고하는 학문을 포기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들이 지니는 더욱 심각한 문제는, 법과 국가의 올바른 모습에 대한 사유를 이성에 맡기지 않고 형제애와 같은 감성적인 면, 그리고 이 감성이 상징하듯 개인적인 면으로만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렇게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조직체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이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온 여러 종류의 공동체와 그들이 보여주는 역사적 발전의 노선을 부정하려 하고, 그것에 법칙이 숨어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든다. 또한 이런 역사적 과정의 결과로서 등장한 현재의 형식적 법의 체계 또한 함부로 무시하며, 오로지 무시하는 태도로만 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며, 이 모든 법의 체계가 인간의 정신의 발전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나아가서는 진리를 향한 인간의 접근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칸트와 독일관념론 보고서>

1. 들어가는 말

  칸트의 실천철학, 특히 사회·정치철학은 근대의 계몽주의적 개인주의를 대표하는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역사철학과 관련된 논문, 그 가운데서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추측해 본 인류 역사의 기원」, 그리고 『영구평화론』에 제기된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현대 이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그 이론적 완결성과 현실성을 잃지 않고 있다. 물론 그가 직접 정치사상, 또는 정치철학에 대한 글을 기획하고 완결된 서술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만큼 더욱더 끊임없이 그 의미가 재해석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회철학자는 다름 아닌 루소이다. 그의 역사철학 관련 논문 곳곳에서는 루소의 사회철학, 실천철학의 전제와 결론들이 반영되어있다. 특히 인류의 기원과 최초의 사회의 구성에 대한 견해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비교해 볼 때 그 내용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으며, 칸트 고유의 사회계약론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수용과 비판을 통해 탄생했다. 그러므로 사회화되기 이전의 개인의 모습에 대한 묘사와 사회화 과정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는 무척이나 닮아있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보았을 때, 칸트의 사회철학과 루소의 사회철학과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칸트는 루소의 사회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의 체계를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루소의 사회철학의 형태와 특징을 명확하게 밝히고, 칸트의 역사철학, 실천철학과 사회철학을 비교하는 것은 칸트가 의도하고자 했던 바를 더욱 명확하게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서 현대의 이론적 논의를 근대적으로 대표하는 두 학자의 견해를 비교함으로써 바람직한 공동체란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풍성한 논의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2. 칸트와 루소의 이론적 기반 – 자유와 사회 이행

  칸트는 기본적으로 인식론적, 실천적으로 계몽된 개인들이 모여 각각의 개인이 결단에 의해 승인한 가치로 구성된 공동체(사회)를 지향한다. 그의 정치사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면은, 그의 비판철학의 체계 전체가 띄는 특징이 그러하듯 절차와 형식적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형식적 중요성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각 개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자유이다. 칸트에게서 이러한 정치적 자유는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도덕적 권리라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자유와 공동체는 언제나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이 둘 사이의 조정의 수단으로서 칸트는 최고의 권위체(지배자)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최고의 권위체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의 집결체이며, 그 집결은 모든 개인이 참여하는 협의를 통해서 이뤄진다. 또 그 경우에만 그 최고의 권위체는 정당하게 각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 그 최고의 권위체 자체가 그 근거를 개인의 자유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는 것은 곧 자유로운 것이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구분한 이후로, 근대의 정치사상가들에게 자연상태의 인간 – 자연인과 사회상태의 인간 – 정치적 인간의 구분은 이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인간이 정치적 존재로 변하는 근거, 그리고 그것이 정당성을 가지는 근거를 자연상태의 인간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른바 자연권의 문제이다. 홉스에게 자연권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리였다. 그러나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거의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바라는 것이 겹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계약은 개인이 자연상태에서 누렸던 자연권을 포기하고 억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반대로 로크는 자연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취득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다는 뜻으로 자연권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전제적인 정권은 자연을 독점하여 취득을 방해하고, 소유를 침해하여 자연권을 침해한다. 따라서 그런 전제정권을 거부하고 자연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사회계약을 하고 계약을 통해 창출되지 않은 현실의 전제정권에 대항한다.

  그러나 루소는 이런 자연권 개념에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홉스나 로크 같은 사회계약론자들이 제시하는 자연상태가 진정한 자연상태가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루소가 보기에, 그들은 이미 충분히 사회상태로 이행한 사람들을 자연상태라고 상정한 뒤 자연권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자연상태보다도 더 이전의 사람들, ‘진정한’ 자연인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전반부의 주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루소가 자연인,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인간에게 내재한다고 본 두 가지 특징은 자유에 대한 의식과 완전가능성이다. 인간은 자연이 설계한 그대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한다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물론 이것은 자연인에게는 단지 감각에 대한 반응, 또는 자연적 성향에 대한 부정적 태도 정도에서 출발하지만, 이것은 점점 발달하여 적극적인 계획 설계와 행동 방식의 창안으로 나아간다. 또한 단순히 주어진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끔 끊임없이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더욱더 고도로 이것을 추구한다. 완전가능성이란 이와 같은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완전가능성에는 도덕적인 의미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정념, 감각적 충족을 향해서만 발휘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악한 일을 할 수도, 선한 일을 할 수도 있는 능력이다. 자유 또한 마찬가지인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뿐 그것이 어떤 도덕적 함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자연인의 고려사항에 아예 없다. 그의 첫 작품인 『학문예술론』에서는 완전가능성이 가장 잘 발현된 학문과 예술이 인간을 선이라기보다는 악, 도덕적 고양이라기보다는 타락으로 이끌어간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칸트는 인간의 자연상태에 대한 루소의 분석을 받아들인다. 자연인에게는 도덕적인 면모가 전혀 없다. 물론 그러한 자질이 인간의 내부에 잠재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순하게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태초의 인간은 감각기관의 자극에 반응하는 수준으로만 행동하지만, 자극의 축적과 지속적인 분별작업에 의해 내재된 이성이 작동을 시작한다. 또한 이 이성에 의해 자연적 경향을 거부함으로써 최초로 자유를 의식하게 된다.

  집단적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계기가 우연적이라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공통점을 보인다. 모든 인간은 혼자서도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또한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타인과 떨어져 사는 삶은 거의 필수적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우연히 협동의 용이성을 알고 그것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모여서 살기 시작한다. 이 시기까지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충족적이며, 단지 몇몇 일들을 협동해서 처리할 뿐이다. 그러나 교환이 시작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면서 집단적 생활은 개체들의 병렬적 집합을 넘어 유기적 결합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곧 공동체를 결성하면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의 뿌리이기도 하며, 사회적으로 악이라 평가받는 사건들의 발생을 이끈다. 자신들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3. 칸트와 루소의 분기점 – 공동체의 성격, 인간, 최종적 지향점

  그러나 시민사회 공동체의 최종적인 지향점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 대립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첫째는 공동체의 성격과 정당성의 확립에 대한 부분이다. 루소는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절차적인 정당성과 도덕적 당위성을 통합시킨다. 일반의지는 개념적으로 모든 사적인 이해관계가 배제되어 있으며, 공동체 내 구성원이 모두 따라야하는 것으로 강제된다. 반면 칸트는 개인들이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도덕적인 면을 아예 배제한다. 공동체의 근거인 자유는 도덕적인 평등함에 근거하여 주어지지만, 그 자유를 사용하는 과정이 도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계몽된 개인들이 공동체를 구성한다면, 그 공동체는 도덕적으로도 다른 공동체에 비해서 우월할 것이고 그것이 법률을 통해 강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에게 법의 정당성과 내용은 루소와는 다르게 통합되지 못하고 긴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공동체 내에서 활동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에 대한 입장이다. 특히 이는 두 사람의 상업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루소는 기본적으로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봉사하는 상인들을 매우 경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충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안녕을 해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며, 이것은 공동체 내에 항상 위험요소로 남는다. 이러한 의지의 동기는 대개 금전적 이익을 통해 이루어진다. 더군다나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지면 심해지고 있지, 덜하지 않다. 루소는 이런 점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즉, 물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 즉 상업적인 이득은 ‘노예들이 쓰는 말’이며, 만약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은 피하는 것이 옳다. 물질적인 이득을 매개로 하지 않는 시민으로서의 의식, 자질, 소양 같은 것들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인간으로 불릴 수 있으며, 이런 사람 가운데서 행정부의 구성원이 될 인물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꼭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오히려 그들이 개인적인 이기심을 활발하게 추구해야만 공동체는 도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자연이 인간의 역사를 기획하는 순간에, 그 모든 이기적인 질서들이 인간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설계해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은 상업활동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에, 상업의 활성화는 공동체 사이의 전쟁을 예방하는데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문명사회 이후에 시민들은 더 이상 정복이나 다른 폭력적 수단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충동과 미몽에 의해 지배받는 수단들이다. 계몽된 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은 교환이며, 그 교환을 기초로 형성된 경제체제이다. 폭력은 이 경제체제의 근간을 흔들고 교환행위를 방해한다. 이것은 다름아닌 각 시민의 이익추구를 방해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런 국가는 더 이상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 힘들고, 자신의 힘을 소모시킨다. 따라서 계몽된 시민들은 이러한 사태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세계적 수준의 구속력 있는 공동체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또한 여기에서 개인들의 이기적인 동기와 도덕적 요구는 하나가 된다.

  셋째는 궁극적인 공동체의 모습에 관한 구상이다. 루소는 공동체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좋지 않으며, 나쁜 정치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구성원의 숫자에 따른 것이든 그 공동체가 영위하는 토지에 따른 것이든, 공동체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정치적인 의사결정과정에서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지분이 그만큼 적어지며, 그에 따라 정치에 대한 관심 자체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 체계에서 개인들이 정치적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은, 그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이것은 곧바로 공동체의 위기와 연결된다. 따라서 그는 소규모 공동체를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각 공동체가 일반의지를 중심으로 통합된 동질적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상정하는 이상적 공동체는 현실에서 어느 정도 실현가능한 형태로 주어지며, 루소는 실제로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사회를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이상적인 공동체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 뿐이다. 따라서 그의 이상적인 공동체는 그 지향점이 명확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 복고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칸트는 각각의 공동체들이 통일된 세계시민사회로 발전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각 개별 공동체가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할 경우, 그것은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하지만 개인이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러했듯, 국가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자유에 근거에 세계적 수준의 기구를 창설하게 된다. 개인과 시민사회의 관계와 개별 국가와 세계적 수준의 기구 사이의 관계에는 분명한 유비가 존재한다. 이는 국가 간에도 각 개별국가의 자유와 그에 따른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정당한 형식적 절차가 있음을 말해준다. 그것이 비록 느슨한 연맹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그 구조는 그 연맹은 각 개별 공동체에 대해 구속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공동체의 탄생 자체가 인류의 역사, 특히 도덕적 역사에 일대 혁명을 불러오는 사건이며, 영원한 평화라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과연 달성할 수 있는 것인가? 칸트는 그것이 현실에 완전한 형태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상적 공동체(또는 이상적인 도덕적 상태)의 실현은 한 개인의 내면에서는 불가능하며, 유적 존재로서 인간 전체에 걸쳐서 일어나는 변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이것을 달성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실제로 구현되는 것은 역사의 가장 나중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어감은 현실가능성이라기보다는, 부단한 과정으로서, 그리고 그 과정을 무한히 실천하는 구체적인 개인들의 모습에 더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따라서 그는 루소와는 달리 그 공동체가 미래지향적이지만 또 그만큼이나 미결정적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공동체가 달성된 적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4. 맺는 말

  칸트와 루소는 모두 똑같이 근대라는 기반을 밟고 서있었다. 루소는 자연인과 사회상태를 새로 정의했다. 이런 이론적 작업으로 말미암아 그 이전의 이론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특히 복고적 이상을 설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의 이론, 학문과 이성의 진보에 대한 그의 불신은 근대 속에서도 그것을 비판하는 선구자적인 시선이었다. 또한 그의 이러한 관점은 근대정치이론의 역사에서도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현실 정치에 대한 함의 또한 혁명적이었다. 칸트 또한 이러한 점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칸트가 루소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데, 그 이름을 자신의 저서에서 직접 거론하며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사회상태를 향한 인류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루소의 분석은 칸트에 의해 전폭적으로 수용되었고, 칸트의 체계 속에서 새롭게 변용되었다.

  따라서 칸트의 사회·정치철학은 루소와 공유하는 부분도 있으며, 그와 명확히 반대되는 부분도 있다. 그는 인간의 발전에 있어서 도덕적인 부분이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것, 인간의 이성은 정념에 이끌려서 그 결합이 실제로 발전의 노정에 놓여있다는 것, 따라서 사회는 어떤 필연성이나 자연적 경향에 따라 결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우연적인 사건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루소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것은 둘의 이론이 우연히 일치한 것이라기보다는, 칸트가 루소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칸트는 그러한 루소의 정치이론을 극복하기 위해 그와 반대의 입장을 개진하기도 한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행동의 지침, 무엇을 해야하는지 당위까지 제공해주지만 칸트가 생각하는 이상적 공동체는 도덕을 강제하지 않는다. 칸트적 공동체는 자신의 자유에 의해 승인된 한에 있어서만 그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며, 그것이 도덕과 결부되지는 않는다. 물론 그러한 공동체가 도덕적 성취 또한 달성할 수 있으나, 그것은 인간들의 계획이 아니라 자연의 계획 전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부각되던 상업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태도도 눈에 띄게 다르다. 루소의 경우 자신의 이익을 공동체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인간으로 이들을 바라보았고, 따라서 공동체에 해가 되는 존재들이라고 판단하여 배척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평화적 수단으로 시민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상업행위가 사회의 발달에 기여할 것이며, 나아가 상업행위 내에서 이기적으로 발현되는 시민들의 행위 자체가 인류 역사의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루소는 스스로가 생각한 이상적 공동체의 형태가 과거에 특정한 형태로 존재했다고 어느 정도 인정하는 데 비해서, 칸트의 공동체는 무한하게 열린 미래에 놓인 미결정적 상태이다.

  칸트가 루소와 벌인 이론적인 대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람직한 공동체와 인간이란 어떤 모습인가 하는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인 논쟁이다. 그 둘의 견해의 차이는 끊임없이 다른 형태로 부활하여 사회·정치철학의 주요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다. 우선 루소의 사회이론은 근본적으로 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혁명적 입장에 의해, 왕정과 전제정에 대항하는 논리적 근거로서 활용되어왔다. 그러나 동시에 로베스피에르 등에 의해, 그리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대중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구조로 오해(또는 이해)받아온 것 또한 사실이다. 반면 인간의 도덕적 평등으로부터 모두에게 평등한 정치적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이끌어낸 칸트는 이후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전통의 이론적인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칸트적인 자유주의는 계몽주의의 가장 정교하고 완성된 형태의 이론으로 간주되며, 근본적으로 어떤 일관된 가치체계를 옹호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칸트가 옹호했던 상업공화국의 이상은 현재 자본주의의 폐해의 뿌리이며, 그가 예상한대로 상업이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 사태에까지 도달하였다. 단순히, 칸트가 예견한 공동체는 우리에게 오지 않는 상태로, 영원한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특정한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제시하는 이론적 경향은, 미래를 식민화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칸트가 강조했듯이 공동체의 철저한 기반인 개인의 자유이다. 자유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개인의 결단이다. 공동체가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결국 공동체의 모든 성격과 지향점의 근원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개인의 실천에서부터 출발한다. 비록 칸트 스스로는 자연적 경향에 의해 인도되는 것일 뿐 개인 자체가 도덕적인 결단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칸트 그 스스로가 그러하듯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바람직한 시민사회를 미래에 투사하고 그것을 위해 힘겨운 한걸음을 내딛는 데 가장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루소 비판과 극복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현재적이며, 나아가 칸트 스스로가 미결정이며 무한한 시간 뒤에 오리라고 설명한 그 상태가 (언젠가는) 현현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정치적 근거이다.


* 참고문헌

강정인, 김용민, 황태연 엮음, 『서양근대정치사상사』, 책세상, 2007
레오 스트라우스·조셉 크랍시, 『서양정치철학사2』(이동수 등 옮김), 인간사랑, 2007
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 옮김), 서광사, 2009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철학과 해석학 보고서. 『철학적 해석학 입문』 7장 요약.>

1. 들어가는 말

  Heidegger를 전유한 Gadamer의 해석학은 인간의 주관성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주관의 조건의 보편성으로부터 출발해 열려있는 해석적 지평으로 나아가려 했다. 이런 입장은 이전의 해석학과는 다른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철학적 원리를 다양한 학문분야에 적용시키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철학의 역사 그 자체에서부터 문예비평, 미학, 나아가서는 사회과학의 기초를 이루는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논의되고 수용되었다.

  그의 철학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치 않았다. Gadamer는 『진리와 방법』발표 이후 그 저서에 담긴 입장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와 마주한다. 이 가운데 그가 각각 Betti, Habermas, 그리고 Derrida와 벌인 논쟁은 그의 해석학의 여러 면모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적 여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쟁으로 평가받는다. 세 비판가들은 Gadamer의 철학에서 이해의 결여(Betti), 보수주의적 함의와 이데올로기 비판의식의 부족(Habermas), 무한한 지평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유의미성(Derrida)을 각각 문제삼았다.

  또한 Heidegger·Gadamer의 해석학과 별개로, 프랑스의 해석학자 Ricoeur는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적 해석학을 구축하였다. 그는 인간이 죄에 구속을 받고 있지만 끝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를 토대로, 그 인간에 대한 이해를 내적으로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밝힌다. 하지만 이런 내적인 면모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상징의 체계를 거친다는 것을 통찰한 이후, 철학의 목표를 그 체계를 해석하는 것으로 바꾸면서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나아간다. 그의 상징해석은 인간의 조건을 설명하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해주었다.


2. Betti VS Gadamer

  Betti의 해석학은 Heidegger․Gadamer가 세운 새로운 해석학적 전통에 대항하여 방법론적 해석학을 복권시키려 시도한다. 이런 맥락에서 Betti를 Dilthey 전통에 편입시킬 수도 있다. 이에 대립되는 Heidegger와 Gadamer의 해석학은 존재론적 해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해석학의 위치와 영역의 문제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해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에게 해석학은 존재의 조건이자 양태이다. 이들에 따르면 현존재,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해석하는 존재이면서 또한 그들의 존재는 해석을 통해 규정된다. 다시 말해, 이 세계를 해석해야만 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능동적으로 해석하며 세계의 내용을 창출해가는 역설적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해석학은 이 양식을 기술하는 현상학적 작업이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론적 해석학의 경향은 그 이전의 해석학, 즉 방법론적 해석학의 이념에는 어긋난다. 이 이전의 해석은 정신을 올바르게 이끌어 대상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해석학은 해석에 대한 연구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기존의 해석학은 해석대상의 정확한 의미보다는 해석하는 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하고 결국 존재에 대한 연구로 전환되는 존재론적 해석학과는 거리가 멀다. Heidegger와 Gadamer의 입장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기술적descriptive 해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들에 반대되는 방법론적 해석학은 대상의 의미를 올바르게 밝혀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의미의 규범적 해석학이다. Betti는 이 규범적 해석학의 입장에서 Gadamer를 비판하는데, 이 둘의 입장 차이는 1960년대 초반 두 학자가 직접 벌인 논쟁으로 인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 논쟁은 두 학자 사이의 논쟁임과 동시에, 전통적인 의미의 규범적-방법론적 해석학과 Heidegger와 Gadamer를 거치며 탄생한 기술적-존재론적 해석학의 이론적 대결이기도 하다.

  두 학자 모두 자신의 해석학적 입장을 보편적인 해석학이라고 생각하며 왜 보편적인지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각자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Gadamer가 해석학적 보편성을 이야기할 때, 그 뜻은 모든 현존재들이 같은 해석학적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반편 Betti가 해석학의 보편성을 이야기할 때에는, 해석학이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모든 학문에 방법적인 토대가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해석은 정신과학의 보편적 방법이며, 해석학은 이 방법의 속성, 절차, 체계 등을 밝히는 방법에 대한 연구, 즉 방법론이 된다.

  Betti가 이렇게 주장하는 해석학적 근거는, 모든 정신과학의 대상은 ‘의미를 담지한 형식들forma rappresentativa’이라는 점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모든 수단을 일컫는다. 이 점에서 Betti의 해석학은 해석interpretation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로 바뀐다. 즉, 주관의 개입보다는 외부의 형식과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를 어떻게 해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가, 혹은 파악해야 하는가가 Betti 해석학의 관건이다. 형식은 단순히 아무렇게나 모인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형식을 기획한 사람의 일관된 의도에 의해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해석학들이 형식이 담고 있는 의미를 투명하게 파악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고 충분히 논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규명해내려는 작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인식해야 할 대상은 해석을 통해 드러나는 해석자의 내면이 아니라, 말하는 이(글쓴이)가 형식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의미여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존재론적 해석학자들이 강조하는 선이해와 지평의 융합은 자기반복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르면, 모든 해석은 자신의 의미의 체계를 자신의 내면에 투영하고 재확인하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Betti는 인식은 해석이 아니라 이해이며, 이해를 통해서만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해를 통해 그 모습을 어느 정도 드러낸 형식의 내용, 즉 의미는 해석을 자의적이지 않게 이끌어주는 표준이 된다. 이로써 형식의 의미Bedeutung와 유의미성Bedeutsamkeit은 구별된다. Gadamer의 해석학이 유의미성의 현상학이라고 한다면, Betti의 해석학은 유의미성의 현상학이 필연적으로 의미에 대해 소홀해지고 따라서 해석자에 의존하는 상대주의에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올바른’ 이해의 규준으로서 네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해석학적 자율성의 규준der Kanon der hermeneutischen Autonomie이다. 여기서의 자율성은 해석자의 자율성이 아닌, 형식을 구성한 사람(말하는 이, 글쓴이)의 자율성을 뜻한다. 그는 자기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해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의도 그리고 그 의도가 낳은 의미를 최대한 존중하는 상태에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해석자의 내적인 의미의 체계 또는 경험은 가능한한 배제되어야 한다.

  둘째는 전체성의 규준der Kanon der Ganzheit이다. 어떤 형식의 체계에 의지해 표현된 여러 문장들은, 그 문장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의미를 담지한 형식’의 전체적인 의도와 항상 연관지어 해석해야 한다. 그 형식은 전체적이고 일관된 의도를 가진 존재들에 의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형식은 정합적이다. 그러므로 해석에서 전체 형식은 언제나 고려되어야 한다.

  셋째는 이해의 현재성의 주관주의적 규준der Kanon der Aktualität des Verstehens이다. Betti가 의도한 것은 언제나 해석이 아닌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현재에 생생하게 살아있기 위해서 해석자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이런 입장을 밝힌 규준이 바로 이 세 번째 규준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선이해를 전부 투영하는 Gadamer적인 참여가 아니라, 그 형식을 만들어낸 말하는 이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정신적으로 추적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은 어쩔 수 없이 해석자의 경험을 반영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살아있는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은 해석이라기보다는 번역에 가깝다.

  넷째는 해석학적 의미상응성hermeneutische Sinnentsprechung 또는 해석학적 동등성의 규준der Kanon der Sinnadäquanz des Verstehens이다. 해석은 언제나 이해에 따라 말하는 이와 해석자 사이에 그 의미가 일치된다는 전제 아래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의미는 말하는 이의 의미와 해석자의 이해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해석자에게 내면화되며, 죽은 형식에서 살아있는 의미로 다시 귀환한다.

  그러나 Betti의 이러한 시도는, 그가 강조한 만큼 의미가 그렇게 확정적일 수 있는가에서부터 큰 문제에 부딪힌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이 말은 그의 주장의 강도만큼이나 해석학 내에서 논쟁적인 주제이다. 존재론적 해석학자들이 선이해 개념을 끌어들여 해석학을 해석자 중심으로 정초한 것은 결국 이 의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Betti는 방법론으로 복귀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지만, 규준을 통해 밝혀진 의미가 정말 정확한 것인지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질 수 없다. 방법은 그 방법이 내어놓을 발견의 결과를 전제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방법 자체에 대한 검증의 방법이 없는 한 해석학적으로 의미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질 수 없다.

  Betti는 이후 자신의 규준이 적극적으로 작용하기보다는, 해석의 과정에서 피해야할 것을 알려주는 소극적인 표준으로만 기능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런 부정적 기능은, 정신과학의 토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방법론적 해석학의 이념을 상당부분 훼손시킬 수 밖에 없다. 과학이 아닌 것을 배제한다고 해서, 과학이 아닌 것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Betti가 의미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완전히 주관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존재론적 해석학에 대해 그 위험을 비판했다는 점이다.


3. Habermas VS Gadamer

  Habermas는 본인의 사회과학이론에 규범적이고 언어이론적인 정초를 시도했다. 그는 이러한 시도를 위해 Wittgenstein의 언어이론과 언어놀이에 대한 학설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여기서 Habermas는 모든 행위자가 자신의 언어세계에 감금되어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에 대한 논제에서 실증주의의 잔재를 진단한다. Habermas는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해석학을 활용했다.

  Habermas는 1970년대에 Gadamer의 해석학적 통찰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뒤 영미의 언어철학적 전통과 조우시킴으로써 사회이론을 위한 종합적인 언어이론을 설계할 수 있었다. Habermas는 1981년에 출간된 『의사소통 행위이론』에서 체계적인 표현을 갖추게 된 자신의 언어 철학에 이러한 해석학적 통찰을 통합시킨다. 여기서 그는 보편적 화용론에 바탕을 둔 의사소통 행위이론을 구축하고, 그 이론에 입각하여 비판적 사회이론의 규범적 기초를 새롭게 설정한다. 이 새로운 언어 이론의 곳곳에는 체계적이고 명시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여전히 Gadamer의 해석학의 통찰들이 수용되어 있고 아울러 극복되어 있다. 이런 연관에서 볼 때 Habermas의 의사소통이론은 Gadamer와의 논쟁으로부터 가장 잘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식 과정에 내재된 전통과 이성의 변증법적 관계가 이 두 철학자 사이의 논쟁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Gadamer와 Habermas의 공통적인 출발점은 의미 이해를 해석의 모델에 입각해서 해명하려는 데 있다. Gadamer는 해석자가 해석 대상에 귀속되어 있음을 해석적 반성의 결정적인 요소로 확정한다. 이로부터 이해의 역사성이 해석학의 원리로 고양되며 모든 비역사적, 방법론적 인식에 대항하는 해석적 진리의 보편성이 요구된다. 더 나아가 Gadamer는 해석적 경험의 본질을 영향사적 의식으로 규정하고 모든 이해 과정이 전통에 귀속될 것을 촉구한다.

  Habermas는 의미 이해에 있어 해석자가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 즉 이해와 전통의 영향사적 결합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입장으로부터 Gadamer가 전통의 존재론적 우위를 끄집어내는 데에는 반대한다. Habermas는 전통의 정당성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하며 일상적인 상호주관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이해에 앞선 구조인 사회적 합의는 체계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 언어적 전통을 포함한 사회화과정 속에는 권위의 요소가 상존하기 때문에, 참된 합의가 가능한 만큼 지배이익에 의해 왜곡된 합의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주어진 현실을 가치척도로 상정하는 Gadamer의 해석학은 이상적인 상황을 전제로 할 때만 성립할 수 있는 논리라 생각했다. 현실을 규정하는 모든 가치가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현재의 시점에서 작용하고 있는 전통과 권위, 선입견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모든 해석행위는 인간사회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기존질서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시도해야 한다. 따라서 Habermas에게 해석은 곧 비판을 의미한다. 지배와 노동이 담화과정을 왜곡시킬 수 있는 것처럼 역으로 진실한 의사소통을 통해서 지배와 억압의 구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비폭력적인 언어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합의이다. 그는 다수에 의해서 견지되는 왜곡된 합의와 허위의식의 가능성을 문제 삼았고, Gadamer의 해석학이 이러한 문제를 소홀히 함으로써 사실상 현실을 정당화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해석자가 이해 과정의 참여자로서 해석적 출발 상황의 선이해에 결부되어 있긴 하지만, Gadamer의 존재론적 입장은 이러한 귀속성으로부터 텍스트의 존재론적인 우위를 주장하게 하며 해석자의 위치를 은연중 격하시킨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Habermas는 여기서 Gadamer가 계몽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Gadamer는 전통이 이해되어야할 대상인 텍스트나 텍스트의 해석자를 함께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전통 속으로 참여하는 행위를 전제한다고 말한다. Habermas는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해석자는 이성을 통해 비판적·반성적으로 그 텍스트를 이해해야한다며 자신의 비판철학을 내세웠다. 이런 텍스트에 묻어있는 외부적인 요인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의 견해차이가 다음 논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수사학 또한 Gadamer와 Habermas의 논쟁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Gadamer는 반성적으로 통찰된 소통을 수사학적으로 목표된 소통에 대항하여 제시하는 것은 인위적이라고 하면서 수사학의 전통에 동조했다. 그 이유는 수사학을 통해야만 보다 확실한 의미 전달이 오가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수사학을 비판과 대립시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에서 협의된 소통의 기회조차도 과소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Habermas는 해석학적 관점에 대한 논의에서 “외견상 ‘일상적으로’ 작동된 합의가 사이비 의사소통의 성과일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대화를 거친 동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은폐된 지배구조에서도 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적으로, 즉 반성적으로 통찰된 동의는 순수한 수사학적 혹은 전략적(즉 목표가 조작적으로 설정된) 합의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메타해석학 혹은 심층해석학의 통찰은 “의미이해에서 제한되는 모든 합의는 근본적으로 사이비 의사소통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 해석학은 “이해를 이성적인 말의 원칙에 결합하는데, 그에 따라 진리는, 제한되지 않으며 지배로부터 해방된 의사소통의 이상적인 조건 아래서 달성될 수 있다는 그 합의를 통해 보증된다.”

  다시 말해, Habermas는 (Gadamer에 따르면 생각될 수 없는) 수사학으로부터 독립된 소통이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수사학은 전통이나 권위에 의해 이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 반성적으로 통찰된 소통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Habermas는 Gadamer와의 논쟁을 통해 더욱 단호하게 비판적 사회이론의 언어이론적 기초로 파고들었다. 이것이 그를 보편화용론의 전개,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인도했다. 그의 중심적인 직관은 사회 이론과 그 담화 윤리의 규범적 기초가, 의사소통과 합의를 목표로 하는 언어 사용의 화용론적 함의나 타당성 요구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Habermas의 비판 철학의 과제는 언어 사용과 관련해서 직관적으로 만들어진 전제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Habermas는 보편적인 합의가 원리적으로 대화 속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Gadamer의 해석학에서 발견하였고, 언어와 합의가 그 근원이 같으며 서로를 설명해주는 개념들이라고 생각한다. 합의라는 해석학의 근본 범주는 Habermas에게서 새로운 보편화의 단계를 열어주었다. 합의는 이제 모든 언어 사용의 암묵적 목적이자 공통의 토대로 간주된다. 그러한 행위는 전략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언어가 소통을 오용하는 곳에서도, 그것의 타당성이 합의와는 무관한 목표설정으로 악용될 뿐인 합의의 이념 위에서도 기생적으로 살아간다. 합의에 대한 이렇게 포괄적으로 시도된 예견으로부터 Habermas의 담화 윤리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해야만 하는 윤리적 전제들이 추론될 수 있다.

  Habermas가 주장하는 해석학의 보편성 요구의 혁신에서 중요한 것은, 수사학적 이해의 이념을 언어의 목적과 동일시하는 것이 윤리적 귀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Gadamer는 Aristoteles의 상황윤리에 기대어 실천적 지혜의 실현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끊임없이 형성되는, 좋은 삶과 소통에 대한 자신들의 표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공동체에 의지하여 이뤄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반면에 Habermas는 해석학과 보편적으로 착상된 합의의 이념 배후에 있는 Kant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항상 보편적 합의의 원리를 반사실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그는 Kant 철학의 전통에 입각해서 현대 철학자들의 도덕 이론을 자기 방식으로 수용하고 계몽주의 사조를 옹호한다. Habermas의 담화윤리학은 의사소통의 이론을 실천과 관련하여 이론적으로 전개해 나아가고자 한다. 담화윤리학은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의 일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리에 관한 물음은 담화에서 제기되고 해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담화윤리학의 형식주의와 합의는 관련이 깊다. 담화는 이론적 혹은 실천적 타당성 요구를 이성적 근거로써 인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렇게 담화윤리학의 이점은 독백적인 주관에서 벗어나 상호주관적 이해를 통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있다. 또 진리는 상호주관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타당성을 갖는 범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리의 이념은 오직 타당성 요구를 이해함과 관련해서만 발전된다.”

  Habermas에 의하면 진리는 주장 안에서 표현되는 진술의 사용의미이다. 같은 의미에서 진리는 진술의 성질이다. 예컨대 우리는 근거 지을 수 있는 진술을 참이라고 부른다. 주장 안에 내포된 진리의 의미는 경험에 기초한 타당성 요구를 담화적으로 이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할 수 있을 때 충분히 해명될 수 있다. 이러한 해명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진리에 관한 합의의 목표이다. Habermas에 의하면 합의는 담화의 형식적인 성질로써 “더 나은 논증의 본래적으로 강제 없는 강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담화의 출발점은 논리적 강제나 경험적 강제만을 통하여 결정될 수 없고” 더 나은 논증의 힘을 통하여 결정될 수 있어야 한다.

  하버마스의 담화윤리는 그 형식적인 성격 때문에 내용이 충실한 정의로운 사회적 관계의 모델이 될 수는 없고, 사회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절차만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그의 담화이론이 개인 사이의 관계 영역과 사회 원리의 정립에 타당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충분히 던져볼 수 있다.


4. Derrida VS Gadamer

  Derrida는 플라톤 이래의 서구 철학이 ‘신’과 같은 통일성의 원리로 작용하는 중심적 체계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고는 절대적 기초나 제일 원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사고라고 부른다. 또한 Derrida에 의하면 이러한 사고는 이항 대립이나 이분법 위에 성립한다. (예컨대 파롤/랑그, 기표/기의, 통시성/공시성, 말/글, 객체/주체, 현상/본질, 내용/형식, 육체/영혼, 공간/시간) 이항 대립의 사고는 진리와 허위 사이에 엄격한 경계를 긋고자 하며, 상호 배타적인 두 구성 요소 중 어느 하나에만 특권을 부여하고 나머지는 부정하는 배중률에 기반을 둔다. Derrida의 해체란, 이러한 이항 대립에 기초한 서구 전통적 사고,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비평적 작업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해석학에 대한 Derrida의 비판은 형이상학적 전제를 부정하는 해체주의의 특성이 기반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해석학에서의 ‘소통’ ‘이해’라는 것이 이성-로고스주의에 입각한 형이상학적 전제에 다름 아니라고 Derrida는 말한다.

  Derrida의 해체주의가 Gadamer의 철학적 해석학과 맞서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과연 Gadamer에서 말하는 ‘이해’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Gadamer 해석학은 인간적 삶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며, 여기에서 이해는 두 지평간의 융합 과정 즉 이해되는 존재와 이해하는 존재 간의 상호 대화에서 이루어진다. Gadamer에 따르면, 표현이란 ‘누군가를 위한 표현’이며 이해되어지기를 원한다. 이로부터 모든 해석학적 현상의 배후에는 개별성간에 서로 이해하려는 의지, 즉 선한 의지가 전제되어 있다.

  Derrida는 우선 대화를 통한 이해에서 Gadamer가 선행조건으로 내건 ‘선한 의지’라는 것이, 타자성을 형이상학적 전제로써 극복시키는 논리라고 비판한다. 즉, Gadamer는 대화에서 성취되어야 하는 이해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을 가정한다. 다시 말해, 대화에서 각각의 참여자는 다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경청하여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Derrida는 이러한 주장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으며, 대화의 의지가 모든 구체적인 상호작용보다 앞서감으로써 Kant적 의미에서 자명하고 무조건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Derrida가 주목하는 것은 이 선한 의지의 ‘절대성’이다. 즉 이러한 ‘선한 의지’는 통일 원리로서 권위적인 형이상학의 일환이다.

  Kant는 ‘그것이 작용하는 바 그리고 달성하는 바, 또는 미리 설정된 어떤 목적의 성취에 유용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의욕함에 있어서, 즉 그 자체로 좋은 것’ 또는 ‘아무런 제한 없이 좋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라고 말한 바 있다. Derrida는 이른바 이해를 전제하는 선의지를 Kant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의지로 해석하고, 바로 이 절대성에서 철학적 해석학의 근원적 형이상학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Gadamer는 Derrida가 자신의 입장을 완전히 오해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선의지는 Kant의 형이상학적 선의지와 무관하며, 오히려 Platon의 대화 모델에 근거한다. 즉 ‘타자의 진술이 분명하게 이해됨(Einleuchtendes; eumeneis elenchoi)’의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서, 타자의 진술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토대로서 선의지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 이를 통해서 잘못된 일치, 오해, 잘못된 해석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이해에 앞선 선한 의지를 부정한 Derrida는 대화 과정에서의 ‘단절’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대화의 성공적인 이해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히려 이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려 한다. 물론 해체주의가 이를 통해 이해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의 차이를 그 중심에 두었던 것이다. 이해의 보편성은 이해의 차이가 극복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타자를 이해하는 문제는 극복이 아닌, 언제나 과정으로서만 진행될 수밖에 없다. Derrida에 따르면, 모든 텍스트는 의미의 불확정성 그 자체를 통해 해체된다. 따라서 모든 통일적인 의미부여는 불가능하다. 나아가 텍스트를 일종의 대화로 파악한다 하더라도, 그 대화는 이해와 합의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Gadamer가 말하는 완벽히 이해되는 대화에서의 인식 경험, 혹은 성공적인 확증의 경험을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Derrida의 말은, 대화는 오히려 견해의 차이를 보존하며, 타인의 진술을 낯선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

  언어적 기호와 의미의 관계를 차연에 두어 통일된 이해를 부정한 것도 이같은 태도에서다. 의미는 언어의 덧없는 놀이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정립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의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데 현재의 언어적 의미는 부재적 기표의 기능이기 때문에 의미 자체는 결단코 완전히 현재적일 수 없다. 즉 고정되지 않는다. 언어는 자신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지시하지 않으며 차연 속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을 지시한다. 차연이란 그것이 어떤 것을 지시할 때 항상 의미 없이 머무는 언어 현상을 말한다. 차연에는 의미의 차이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지연도 같이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이해되어지는 결정된 의미는 없고 기표의 끝없는 미끄러짐만이 있다.

  “해체는 모두 ‘탈-전유’(ex-apprioriation)의 운동들이다.”라는 Derrida의 말은 단순히 해체론에 대한 정의라기보다는 해석을 거친 텍스트로서의 존재자 일반에 대한 정의일 수 있다. 해체는 개념적이거나 상징적인 고유한 정체성의 획득과 박탈을 동시에 가져오는 이중적 리듬이다. 이런 해체의 리듬은 모든 존재자 안에서 반복되고 있다. Derrida의 중요한 용어인 차연과 흔적은 그런 해체의 리듬에 붙이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 안에는 그것을 있게 한 차연이 있다. 하지만 존재자를 있게 하거나 없게 하는 차연은 존재자처럼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다. 차연은 존재자처럼 현전하거나 부재하지 않는다. 현전도 부재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차연은 흔적이다. 모든 현상은 흔적으로서의 차연, 차연으로서의 흔적에 의해 비로소 나타나거나 사라진다. “흔적은 나타남과 의미작용을 개방하는 차연이다.”

  여기서 언어적 기호는 그러한 흔적에 해당한다. 일정한 형태의 흔적일 수 있는 가능조건은 여전히 또 다른 흔적들에 있다. 이런 소급적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현재 기록이 일어나고 있는 텍스트는 결코 현재화하거나 현전화할 수 없는 흔적들과 함께 엮여 있다. 흔적이란 “현재의 단순성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흔적들에 힘입어 비로소 일정한 형태를 얻는 기호화된 텍스트들은 결코 현전의 형식 안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 텍스트 안에서 현전적 사태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결과에 불과하다. 가령 과거는 미래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고,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미래보다 늦게 온다. 원인은 결과에 의해 소급적으로 성립되고, 그런 의미에서 원인은 결과 뒤에 발생한다. 이 사후성의 논리 안에서 원초적인 것과 파생적인 것, 현전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과거에 있는 것과 미래에 있는 것은 서로의 가능성과 속성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사후적 시간성의 세계인 텍스트에서 순수한 현전은 불가능하며, 나아가 형이상학적 이항대립 역시 불가능하다.

  기호란 결코 확고히 파악될 수 없고 끊임없는 차연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그의 주장에 대하여 해석학은 이해의 원리적인 가능성으로 응수한다. 참여 진리와 대화의 끊임없는 작용은 현전의 형이상학이 제시하는 고정된 의미의 비종료성을 말한다. 즉 해석학에서는 어떤 단어나 기호도 의미의 최종적인 현전으로 간주 될 수 없다고 굳게 믿는다. 또한 해석학 역시 단절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통 혹은 대화의 단절은 해석학에서 전면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물론 보다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대화의 공통성과 합의가 보다 근원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Gadamer는 해체주의자들이 언어를 ‘정신의 바빌론 유수’로 간주하고 있으며, 언어가 대화의 매개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와 같이 Gadamer는 차이와 소통의 단절을 중시하는 Derrida의 목소리를 이해에 이르는 기나긴 과정 속에 거쳐야 하는 한 국면으로 소화시킨다. Gadamer는 Derrida의 차연마저도 넓은 의미에서 동일성의 논리로 본다. 불변의 타자 존재는 동일성과 관련되며, 동일성 속에서 타자존재가 타자로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일성 속의 차이성’이며 이는 곧 ‘의미의 다의성(Mehrdeutigkeit)’이다. 뒤에 소개할 Ricoeur는 이런 현상에 대해 ‘해석의 갈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갈등은 Derrida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혀 화해되지 않는 모순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는 의미의 동일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해석의 과정일 뿐이며, 더 나아가 중단 없는 대화와 이해의 과정 속에서 지속적인 자기변화를 요구한다. Derrida가 주장하는 차이에 근거한 해체는 Gadamer가 제시하는 대화의 목표가 아니라 대화의 발단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대화 모델’에 근거한 자신의 해석학적 사유를 Derrida와의 논쟁에도 적용시키고자 한다. 차이와 불연속, 이해와 연속이라는 양자 간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추구하고자 했던 공통적 차원은 분명 존재한다. 해석학과 해체는 의미의 정확한 결정가능성과 반복가능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이념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Gadamer는 논쟁 가운데 Derrida의 비판을 ‘하나의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자신이 구현하려 했던 대화해석학을 좀더 예리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이해, 대화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차이, 타자성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유용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5. Ricoeur의 해석학적 철학

  Ricoeur의 철학 또는 해석학은 인간의 조건에 대해 근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 내용은 그가 가장 처음 쓴 책인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에서 등장한다. 의지적인 것은 주체가 자신의 뜻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유로운 상태를 뜻하며, 반대로 비의지적인 것은 결정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들을 뜻한다. 이 책은, 인간이란 장소에 이 두 측면이 절묘하게 결합되어있다고 말한다. 인간 주체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아무런 전제 없이 오로지 의지적으로만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의지적인 것을 분석해보았을 때는 필연적으로 비의지적인 것과 연관이 되어있다. 무엇을 결정하는 행위는 그 행위에 대해 사고하는 것,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그 행위를 할 것을 스스로에게 승낙하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분석된 세 술어는 모두 대상을 갖는 술어로서, 이는 의지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대상 - 비의지적인 것과 동시에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의 자유는 필연 혹은 외부적인 조건과 언제나 동시에 출현하며, 또한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서로가 상대방이 없이는 결코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Ricoeur의 학문적 방향은 이러한 대전제 위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러한 인간이라는 장소의 특성을 인간의 유한성의 근본적 원인으로서 파악하고, 인간이 악의 가능성을 떠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측면에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양식을 고찰할 수 있는 현상학적 방법이 유용하다.

  그는 현상학의 방법과 태도를 차용하기는 하지만, 현상학을 정초한 Husserl의 전제에 대해서는 매우 강하게 비판한다. Ricoeur의 입장에서 Husserl의 현상학은 절차에 따라 합리적으로  반성하고 자신의 의식을 발견할 수 있는 자아, 즉 Descartes의 전통에서 가정하는 자아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현상학의 측면을 더욱 깊이 파고들면 들어갈수록 이런 자의식은 더 이상 합리적으로 투명하게 드러날 수 없다. 이는 위에서 Ricoeur가 주장한 바와 같이, 순수하게 사유하는 자아는 언제나 순수하지 않고 외부와 교류하거나 또는 그에 의존하여 자신의 자유를 전개해 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학에서 논외가 되어왔던 신체, 그리고 사유하는 자아 밖의 타자들에 대한 논의를 복권시켜야만 인간의 조건에 대해 올바르게 연구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라는 Heidegger의 입장을 수용한다. 인간이라는 장소가 갖추고 있는 조건은, Ricoeur의 철학적 탐구에서 가장 토대가 되는 전제임과 동시에 주체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외부의 조건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인간은 언제나 비의지적인 것에 자신의 의지 전체를 맡기며 오류에 빠질 가능성에 언제나 처해있다. 인간의 악의 가능성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인간의 조건을 밝혀내는 현상학적 탐구의 결과는 여기까지이다. 현상학적 방밥은 그 방법의 고유한 한계 때문에 자아 밖으로는 결코 나갈 수 없다. 따라서 실제 악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악의 가능성으로부터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악한 행동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현실의 문제가 어떻게 악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내야만 한다. 따라서 현상학적 방법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역사적으로 남겨진 기호들에 담긴 악을 분석하기 위해 해석학적 방법이 동원된다.

  따라서 그는 악과 선의 대립, 혹은 악 그 자체를 드러내는 비유가 담겨있는 여러 신화를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해석학적 관점을 펼쳐나간다. 특히 그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인간의 조건을 비중있고 고찰한다. 그 이유는 다른 신화들은 악 그 자체의 모습을 서술하거나 또는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비하여, 성경의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아담은 선과 악이 서로 뒤섞여있는 존재로서 인간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생각하고 논증하려하는 인간상에 가장 잘 부합한다. 또한 종말의 신화는 인간의 본래적인 악의 가능성과 그것이 발현되고 또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인 악이 모두 걷혀진 세계로 인간이 나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정신분석학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그것이 해석학적인 논증 구조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가 정신분석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어떻게 인간이 비의지적인 것에 구속당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다시 드러낼 수 있는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대상은 꿈인데, 꿈은 언제나 실제의 어떤 내용 - 무언가를 감추려는 여러 상징과 기호로 가득하다. 하지만 꿈은 동시에 꿈을 꾼 사람의 무의식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구조화되어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꿈은 감추는 동시에 보여주는 모순적 기능을 한다. 정신분석은 바로 이 꿈에서 보여진 내용을 해석하고, 감추어진 내용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여러 상징이 어떤 식으로 구조화되어있는지 알기 위해 정신분석가는 꿈을 꾸는 사람이 겪었던 사건과 사고를 해부하고 동시에 그것이 지금 꿈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나아가서 그 사건과 사고들이 지금 꿈꾸는 사람의 행동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고 있는지까지 말해줄 수 있다.

  따라서 정신분석에는 무의식을 드러내주는 꿈의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고, 해석된 내용들은 지금의 행동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정신분석의 해석학적 작업을 주관의 고고학archeology of subject이라고 부른다. 주관의 고고학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적 작업은 주체가 결코 우리가 이성에 의해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으며, 결코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로 투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Ricoeur는 자신의 인간관을 토대로 정신분석학의 연구 성과를 수용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체의 불투명성과 비자립성을 논증한 사람은 또 있다. 바로 니체와 마르크스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Descartes의 전통에 서있는 이성의 철학자들을 비판했으며, 이성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오히려 그 의지를 감추고 은밀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하면서 사회의 이념적 구조가 인간에게 얼마만큼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계급적 구조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면에서 Ricoeur는 이들의 연구성과 또한 높이 평가하며, 니체와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 세 사람을 의심의 대가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그에게 주체의 문제는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고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특히 종교적인 의미에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난점에 대한 그의 대답은 해석학에서의 변증법적 종합이다. 즉, 해석의 작용은 인간이 여러 상징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을 세계에 투사하여 의미를 적극적으로 탐색해내는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투사는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는 것이 아니며, 분명한 목적성 즉 투사의 대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목적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이 Hegel의 절대적 관념론이며, 그의 표현에 따르면 주체의 고고학에 대비되는 주체의 목적론이다. 주체의 고고학과 주체의 목적론 어느 한 쪽의 견해만으로는 주체에 대해서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으며, 주체는 이 두 과정의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상징과 언어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맥락에서 그는 Kant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보이는 초월적transzendental 종합의 이론적 구조를 논의에 끌어들인다. 즉, 상징(특히 언어)은 이미 주체의 외부에 전개되어있다. 하지만 이 상징을 해석하여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주체의 내부에 해석학적으로 형성된 이해의 구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Kant가 규명한 주체가 현상의 생성에서 그 논의를 그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해석학적 주체는 미완에서 그치거나 혹은 고고학과 목적론의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긴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파악해나간다. 따라서 해석학적 순환은 해석자가 자신을 끊임없이 축조해가는 과정으로서,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 즉 종교적 의미에서의 구원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형성해가는 주체의 무한한 운동이다.

  Ricoeur의 주체 이론은, 그의 해석학적 철학의 뿌리인 성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나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 참고문헌

박종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에 관한 연구』, 사회와 철학 연구회, 2001
홍기수, 『하버마스와 현대철학』, 울산대학교 출판부, 1999

김광명,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과 데리다의 해체주의」, 『예술문화연구』 4권, 서울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김영한, 「베티의 정신과학 해석학 - 가다머의 현상학적 해석학과의 논쟁을 중심으로」, 『해석학연구』 8권, 한국해석학회, 2001
김영한, 「푸코, 데리다, 료타르의 해체사상」, 『해석학연구』 4권, 한국해석학회, 1997
김영한, 「해체주의와 해석학」, 『철학과 현상학 연구』 10권, 한국현상학회, 1989
김영한, 「리쾨르의 해석학적 철학」, 『해석학연구』 1권, 한국해석학회, 1995
김상환, 「데리다의 텍스트」,『철학사상』27권,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8
김종걸, 「리쾨르의 인간학적 철학」, 『해석학연구』 2권, 한국해석학회, 1996
김창래, 「통일과 해체의 이율배반」, 『철학연구』 24권,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01
박순영, 「가다머의 해석학과 해체주의」, 『해석학연구』 6권, 한국해석학회, 1999
박순영, 「리쾨르의 정신분석적 해석학」, 『해석학연구』 9권, 한국해석학회, 2002
장원석, 「해석학 논쟁과 사회과학 방법론의 제문제」, 『한국정치학회보』 25권 1호, 한국정치학회, 1991
정기철, 「해석학과 해체주의 :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 『해석학연구』 1권, 한국해석학회, 1995
정연재, 「대화와 해체 그 간극을 넘어서」, 『해석학연구』 16권, 한국해석학회, 2005
최성환, 「방법과 진리 - 해석학의 방법 논쟁을 중심으로」, 『해석학연구』 15권, 한국해석학회, 2005

Hans Ineichen, 『철학적 해석학』(문성화 옮김), 문예출판사, 1998
Jean Grondin, 『철학적 해석학 입문』(최성환 옮김), 한울, 2009
Richard Kearney,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곽영아, 임찬순, 임헌규 옮김), 한울, 1997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미숙 2011-10-14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귀중한 자료 개방하심에 감사드리고 삶의 양식이 되겠습니다.
 
정의로운 전쟁은 가능한가? -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적 접근

<응용윤리학과 도덕적 딜레마 보고서, 트랙백해놓은 글을 수정, 보충한 것입니다.> 

① 평화주의에 대한 내용을 빼고 정의로운 전쟁 이론만 집중적으로 논의
② 기독교 전통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내용을 삭제
③ 비상사태윤리에 대한 내용을 추가

 

1. 들어가는 말 - 전쟁 비판으로서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얼마전 일어난 리비아 내전은 국제 사회에 어려운 숙제를 하나 더 내주었다. 독재자 카다피에 대항한 민중들이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선언하고 내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대개 시민군 측에 손을 들어주었고, 민주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내전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내전이 장기화될수록 개입의 강도는 약해지고 있으며, 국제질서를 선도하는 국가들은 개입 과정에서 입어야 할 손해를 다른 국가들에 떠넘기기에 바빠졌다. 카다피는 이 개입을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이라고 비난하며, 자신의 체제가 혁명을 통한 아주 정상적인 정부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설령 자신의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내부적으로 해결할 문제이며, 개입은 국가의 주권에 대한 침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 벌어지는 관제 시위나 친-카다피 세력의 소요를 볼 때 리비아 내부에도 이런 주장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상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리비아 내전에 대한 개입의 사례는, 사실 아주 최근의 단편적인 사례일 뿐이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전쟁은 국제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때로는 개화와 문명의 이름으로, 다른 때에는 자본과 경제적 이득의 이름으로, 또는 도덕의 이름으로 자행될 때도 있었다. 전쟁이라는 과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으며, 따라서 전쟁은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의 주변에 있다. 전쟁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그것이 역사에 기록될만한 규모의 사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일은, 만약 일어난다면, 여기에 얽힌 인간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한다. 전쟁은 결코 <람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일 수 없다. 전쟁에 직면한 개인은 불안하고 일관되지 못한 일상을 경험한다. 홉스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상태에서는 ‘예술이나 학문도 없으며, 사회도 없다.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 위 문단에서 묘사한 것과 같이 전쟁이 인간의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사태임이 틀림없다.

  전쟁이 철학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전시에는 법률이 침묵해야 한다’는 홉스주의나 마키아벨리주의 식의 무비판적이고 현실주의적인 해법은 사실상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만드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자기보존을 위해 힘을 길러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그 공동체를 일상적인 전쟁상태로 돌입시킨다. 이런 자각에서부터, 전쟁을 규범적으로 정의하고 제한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모두 나쁜 것인가? 만약 좋은 전쟁과 나쁜 전쟁이 있다면, 이 둘을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일어난 전쟁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전쟁에 대해 규범적으로 고려하는 사회이론가와 사회철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러한 고민에서부터 탄생한 결과물이다.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을 가릴 조건을 내세우고, 그것에 따라 현실에서 일어나는(또한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전쟁은 정당했거나 또는 정당하기 때문에 감행해도 되고(또는 감행해야 하고), 반대로 어떤 전쟁은 부당했거나 또는 부당하다. 정의로운 전쟁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환상적 평화주의와 무규범적 현실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제시한다고 평가된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제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우리의 이목을 끈다.

  하지만,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점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상 일어났던 전쟁과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서 올바르게 판가름할 수 없다. 물론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이, 전쟁을 무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입장이나 전쟁은 무조건 안된다는 무조건적 비폭력주의(반전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전자는 반드시 사람들의 삶의 파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후자는 정당한 인도주의적 개입에 아무런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해결할 수 없는 점은 바로 해석이다. 무엇이 정당한 전쟁인지, 혹은 부당한 전쟁인지는 관점에 따라 상당히 열려있다. 물론 이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기 위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는 하지만, 그 판단의 기준을 전인류적 도덕의식이라는 보편주의적 관점에 의지하고 있다. 도덕적 보편주의 자체가 많은 논의가 필요한 논쟁적 입장이라는 점에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논증 구조는 상당히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제시되었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일반적인 구조와, 가장 최근에 이 이론을 정교하게 전개했다고 평가받는 Michael Walzer의 이론을 살펴보고 이와 같은 점들을 짚어볼 것이다.


2.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일반적 구조

  전쟁을 전쟁 선포, 전투, 그리고 전후 처리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 전쟁에 대한 도덕적 평가 역시 단계마다 각각 적용될 것이다. 즉, 전쟁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에 대한 평가, 전투 과정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한 평가, 그리고 종전 이후 수습조치에 대한 평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이 세 측면에서 모두 정당한 경우에만 어떤 전쟁은 정당하다. 이들 가운데 한 부분에서도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 전쟁은 부당한 것이 된다. 전쟁 전체의 정당성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거나 해서는 안될 전쟁으로 평가받으며, 전투 과정에서 정당성을 얻지 못하는 경우 그 과정에서 사용하는 수단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되는 수단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시작된 이러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일반적 구조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한 좋은 사례는 1983년 미국 천주교 사제회의에서 제시한 항목들이다. 현재까지 역사적으로 존재한 여러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고려하여 설정한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나열해보면 ① 정당한 원인, ② 실재적 권위, ③ 상대적인 정의관, ④ 올바른 의도, ⑤ 최후의 수단, ⑥ 성공의 개연성, ⑦ 전쟁의 상응성, ⑧ 전투의 상응성, ⑨ 분별성이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할 경우 그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다.


  2.1. 왜 전쟁을 하는가? - 전쟁 개시의 정의(jus ad bellum)

  이 가운데 ①부터 ⑦까지는 ‘어떤 전쟁이 정당한 전쟁이다.’ 라고 선포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서,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① 전쟁은 분명하고 진정한 위험에 대처하는 행위일 경우에만 가능한데, 이 행위는 민간인 보호나 적절한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② 전쟁은 공동체 단위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위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③ 전쟁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이 무제한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여야 한다. ④ ①에서 언급한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만 ②에서 언급한 권위에 의해 기획, 전개될 수 있다. ⑤ 전쟁을 제외한 다른 수단을 생각할 수 없을만큼 충분히 다른 수단을 강구한 뒤여야 한다. ⑥ 전쟁을 먼저 선포하는 쪽에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한다. 다시 말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게 예상되는 경우, 비이성적으로 무력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⑦ 전쟁을 일으켰을 때 생기는 비용이 전쟁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혜택(이익)보다 적거나 적어도 같아야한다.

  전통적으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만 확보할 수 있는 이 부분에 대단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전쟁은 전문적인 전투원들이 수행하는 작업이며 이들은 전쟁 속에서 전투수단(무기)의 지위로 전락하기에, 전체적인 정당성만 얻을 수 있다면 개별적인 전투에서 벌어지는 비도덕적 행위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전투원들의 희생을 자발적으로 이끌어내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같은 명분이 강조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실제로, Walzer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전쟁에 대해 처음 고민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신학자였던 그는 완전한 비폭력을 주장하는 당시의 다른 신학적 경향에 맞서서 전쟁의 불가피성을 피력하려 했다. 그 방법으로서, 전쟁이 때로는 정당할 수도 있음을 옹호하기 위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개진했던 것이다. 또한 독실한 신자들이 교세 확장에 이바지하는 여러 전쟁에 참여할 것을 유도하기 위한 이론이기도 하였다.


  2.2. 어떻게 전쟁을 하는가? - 전쟁 수행의 정의(jus in bello)

  그러나 무기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가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았다. 각종 화학물질과 강력한 폭발력 등으로 더 이상 전투원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 대량살상무기(WMD)가 등장하였다. 또한 근대국가는 국민개병제를 핵심으로 삼으며, 국민 모두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데 동원되는 군산복합체적 면모를 점점 더 강하게 띄어갔다. 이른바 총력전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공동체 내에서 더 이상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쟁을 빨리 끝낸다거나 혹은 상대의 전투력을 약화시킨다는 목적, 또는 여러 이데올로기적인 명분 아래 비전투원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무차별 폭격, 그리고 이후 일어난 수많은 전쟁을 통해 드러난 양민학살, 인종청소 등의 사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위와 같은 변화에 발맞추어 전투과정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요청되었다.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표, 혹은 전쟁의 유일한 목적인 승리를 위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정당화된다는 믿음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병폐는 전쟁 전체가 아니라 개별적인 전투 상황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야만 부당한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⑧ 전투와 구체적인 작전을 실행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이 그에 따르는 손해보다 많거나 적어도 같아야 하고, ⑨ 무고한 사람 즉 비전투원이거나 명백하게 상대방의 전투 행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부가되며, 심각하게 고려되는 사항이 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고려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여지는 충분하다. 첫째, 만약 이 항목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전쟁에서 전투 내의 정당성은 거의 확보되지 못한다. 국민개병제가 기본인 근대적 공동체에서 누가 전투원이고 누가 비전투원인지 명확하게 나누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어제까지 민간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살아있고 국적을 가진 이상 언제든지 전투원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투원에게만 해를 끼치는 것이 정당하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사실은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하게 만드는 근거이다. 모든 전투원들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존중받는 개인이다. 전쟁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전쟁은 이러한 억지스러운 구분을 스스로 생산해내며 인간의 존엄성을 침범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사실상 비전투원(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생명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한다.

  둘째, 설령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명확하게 나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투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작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은 전쟁에 참여하는 각 집단의 구성원의 문제에기도 하지만, 그들이 모두 사용하는 여러 시설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며, 동시에 지역적인 타격을 가한다든가 혹은 특정인물이나 특정집단의 구성원을 대상으로 작전을 펼칠 경우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한다. 피해를 최소화해야한다는 원칙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데, 미리 계산한 피해는 언제나 실제 일어나는 피해의 정도와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작전이 수행되고 난 뒤 발생한 피해는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는지 더 이상 논의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셋째, 전투 수행 중에 발생하는 부정의는 전쟁을 일으키거나 혹은 그에 대항하는 집단의 전투원들이 속해있는 상황과 그들이 의도적으로 자행하는 비도덕적 행위에 의해 발생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도덕적 행위의 책임을 누가 질 수 있는가(또는 짊어져야 하는가)의 문제는 그 의도성과는 다르게 매우 불투명하다.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도덕적인 고려는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하며, 도덕적 규범들을 위반하는 일도 그만큼 빈번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전쟁 중에만 특수하게 적용되는 새로운 규범을 만든다면, 보편적인 도덕원칙에 입각하여 전쟁을 재단하려는 시도가 전쟁 중의 도덕과 비전쟁 상태의 도덕을 다르게 설정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2.3. 전후 처리 - 전쟁 이후의 정의(jus post bellum)

  위의 두 가지 밖에도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서 반드시 고려되는 고전적인 요소는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상황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가 침탈당한 자기 영토에 대해 회복을 주장하며 침략국에 대해 반격을 가했을 때, 침략국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은 침탈당한 자기 영토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비용에 대한 보상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 국가가 침략국을 상대로 그 이상의 영토와 보상을 요구하며 역으로 침략할 경우, 그 전쟁은 부당한 전쟁이 된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 위와 같은 고전적인 개념은 위기를 맞는데,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이전의 상황에 대해 명백한 변화를 의도하고 개입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을 경우, 전쟁을 선포한 국가는 패전국에 계속 주둔하며 다시는 이전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승전국에게 그래야 할 의무가 있는가? 만약 그러한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승전국은 이에 따라 특수한 형태의 정부, 대개는 민주주의적 정부를 패전국에 강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절차를 의도적으로 마련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을 군사적으로 억압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일종의 신탁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패전국의 민주주의와 국가주권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상황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 승전국의 도덕적 의무와 패전국의 국가주권이 상충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정당한지 명쾌한 답을 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무가 없다면, 애초에 그런 인도주의적 개입은 어떠한 명분도 지닐 수 없다. 개입은 좋은 상황을 만들겠다는 뜻의 개입이지, 단순히 나쁜 상황을 만들어내는 요소들만 제거하겠다는 의미의 개입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정도의 나쁜 상황들은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어온 역사와 문화, 또는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입이 중단될 경우 상황이 개입 이전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는, 개입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모두 교정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훨씬 의무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문제는, 그런 의무가 없을 경우 과연 아무런 소득 없는 개입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의무가 없다면, 승전국은 개입에 드는 비용을 상쇄할 만큼 이익을 회수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 패전국의 혼란과 무질서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인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혼란과 무질서를 교정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패전국의 민주적 절차와 권위, 주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국제사회의 충분한 동의 또한 얻어야 한다. 패전국의 민주주의와 국제사회의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정당성을 획득한다면, 전후처리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인도주의적 개입을 통해서 이전에 발생한 비인간적, 비민주적 사례를 제거하는 것은 쉽게 성공할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체제에 대한 책임의 문제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 내에서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3. Michael Walzer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문제적인 이론이었다. 물론 그 이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조장, 방조하거나 또는 전쟁을 환상적인 것으로 포장하고 찬양하며 여기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프로파간다로 사용할 의도가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들어가는 말에서 기술했듯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오히려 무분별한 전쟁을 제한하기 위해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론이 그들이 의도한 전쟁에 대한 제한과는 반대되는 결과로 나아갔거나 혹은 적어도 전쟁을 부당하다고 평가하고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그 이론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의도한 바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기독교의 신학적인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현대적으로 부활시켰다고 평가받는 Walzer의 이론을 살펴보는 것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그는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재조명하였다. 또한 지난 한 세기 동안 있었던 전쟁을 스스로 세운 기준을 통해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뜨거운 현안에 직접 접근하는 대담함이 돋보인다. 그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와 평화주의 사이에서 중도를 지켜나가는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지켜본 전쟁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에 대한 경험을 기술하는 일과 그에 대한 비판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비판적 작업의 토대는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는, 지금까지 현실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전쟁 사례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전쟁에 대한 현실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구체적인 전쟁들을 그 자체가 아닌 도덕적 시선에서 재해석하여 제시한다. 전쟁의 시작에서 종결까지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은 계속해서 도덕적인 결단을 내려야하는 상황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우선 전쟁의 선포부터가 도덕적인 결단이며, 이 결단을 내린 사람들은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다. 또한 전투는 행위의 문제와 결부되어있기 때문에 결코 도덕적인 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현실주의와 평화주의 모두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 일반적 잣대를 들이밀어 그 참모습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전쟁에서 도덕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결국 전쟁에 연관된 민간인,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에 대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다분하다. 반면 평화주의는 모든 폭력을 거부함으로써 명백한 악에 대해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무기력은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셋째, 그가 제시하는 ‘전쟁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도덕의 최소한’은 인간의 기본권, 즉 생명과 자유에 대한 수호이다. 전쟁을 타산의 문제나 비용과 이익을 계산하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전쟁을 하는 순간에도 언제나 이것만은 지켜야하고, 또 이것을 지키는 방향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하며, 또 종결시켜야한다.


3.1.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과 해석의 문제

  Walzer는 전통적으로 논의된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했던 천주교 사제회의의 항목들 가운데 정당한 원인에 집중해서 자신의 논증을 전개한다. 정당한 원인(cause), 즉 대의(Cause)는 다른 항목들에 비해 비교적 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명분과 원인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전쟁은 침략에 대한 저항인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침략이란 다름 아닌 자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사태를 말한다. 이런 사태는 인간 모두가 지켜야하는 도덕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임과 동시에 생명과 자유를 수호할 의무를 지니는 한 국가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국가 내 개인 간의 관계와 국제사회 내 국가 간의 관계를 유비하여 바람직한 국제사회의 모델을 제시한다. 즉, ① 각 개인들은 ② 시민으로서 생명과 자유(특히 사적 소유)에 대한 권리를 ③ 법적으로 보호받으며 ④ 자기 생명과 자유를 수호하고 그걸 다른 개인이 돕는 것이 정당화되며 ⑤ 이외에는 공권력이 폭력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⑥ 기본권을 침해한 개인에게 국가가 심리적, 물리적 제약을 가하듯이, 국제관계에서도 ① 각 주권국가들이 ② 영토와 통치권리를 ③ 국제법을 통해 보장받으며 ④ 주권과 영토를 수호하고 그것을 다른 국가가 돕는 것이 정당화되며 ⑤ 이외에는 다른 전쟁이 정당화되지 않고 ⑥ 침략을 저지른 국가는 전범으로 처벌하는 것이 정의로운 국제사회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델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일어나는 전쟁은 정당한데,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여기에 부합한다. ④ 의 원리에 따르면 인도주의적 개입도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전투 중의 도덕에 있어서 그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전쟁의 특성상 의도하지 않은 비전투원의 피해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부수적인 것이며, 그것을 직접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될 소지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직접 의도하지 않았을 때에만, 그리고 그 의도가 매우 좋을 때에만 비전투원에 대한 살상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 또한 전후의 책임 있는 현지 복구를 통해 전쟁을 끝마쳐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Walzer의 위와 같은 입장은 꽤 엄밀해보이고 정식화된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해석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해석의 문제는 그의 이론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전쟁 이론 일반이 갖는 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론들이 만들어주는 장치들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 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가? 과연 어떤 것을 침략이라고 하고 어떤 수준이어야 그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일본은 다케시마를 일본의 영토로 해석하고 한국의 실질적 점유를 침탈로 간주한다. 반면에 한국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해석하고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무엇이 침략이고 무엇이 적정한 수준의 보상이 될 수 있을까? 그나마 이 부분은, 엄밀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직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당방위의 결과에 대해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타국에 무력을 통해 간섭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정당하며 또 어떤 경우에 부당할까? 어떤 국가가 부정의를 시정하지 못한다는 판정은 누가 해줄 수 있는가? 이 경계는 어느 전쟁에서나 상당히 모호하고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이 ‘해석의 문제’는 Walzer 스스로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자신의 이론에 비추어 정당화함으로써 자초한 면이 크다. Walzer는 9-11 테러에 비추어보았을 때 미국은 테러 주체인 알-카에다에 대해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있다는 점, 첨단무기기술을 통해 비전투원에 대한 살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입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전쟁의 대상이 알-카에다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이 되었던 것일까? 아프가니스탄이 알-카에다에 호의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알-카에다가 미국에 테러를 가할 수 있을 만큼의 금전적,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또한 그는 알-카에다와의 연계와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명분으로 내세웠던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부당한 전쟁이라고 말함으로써, 해석의 주관성이 얼마나 자신의 이론에 깊게 개입할 수 있는지 스스로 보여주었다.

3.2. 최고 비상사태의 도덕

  게다가 그는 이런 기준을 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비상사태(supreme emergency)라는 예외를 가정하여 큰 논란을 빚는다. 그는 최고 비상상태를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굳건한 가치들과 우리의 집단적 생존이 절박한 위험에 처했을 때’, 즉 공동체 자체의 존폐의 위기에 빠진 상황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위의 문장이 설명하고 있듯이, 그에게는 곧 공동체를 지탱하고 있는 도덕률의 붕괴가 눈 앞에 와있는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이런 사태의 사례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연합국의 상황을 예로 든다. 역사적으로도 이미 평가가 끝났듯이, 나치즘은 누가 보아도 직관적으로 명백한 악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만한 집단이었다. 과연 그런 집단에 대해서까지 평화주의적인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가? 이 질문은 실천적으로 쉽게 긍정할 수 없는 질문이며, 따라서 그의 이러한 예외 주장은 강한 현실적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입장에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이론적인 결점이다. 물론 그 스스로도 이런 사태는 결코 있어서는 안되며, 빠른 시간 안에 반드시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이다. 즉, 역사에서 더 이상 길어져서는 안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도덕적 고려가 매우 적거나 있지 않아도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고 그에 따라 전쟁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입장과 어긋난다. 최고 비상사태에서의 정당화는 결과주의적 도덕 원칙을 함축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 원칙과는 관련이 없는 상황에 대한 계산에 의해서 그 판단이 이끌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 비상사태에 대한 그의 논증은 그의 이론 체계 내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요소이다.

  둘째, 최고 비상사태와 공동체의 이익이 상충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최고 비상사태는 일상화되며, 그것은 전쟁의 공포가 언제나 시민들이 곁을 배회하는 상태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가정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실제로 존재하였던 사례이기도 하다. 바로 냉전이 그러하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외부의 적대적인 세력으로 가정한 뒤, 내부의 구성원들에게 이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민주주의 자체를 억누르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 Walzer 또한 최고 비상사태에 대한 논의에서 이러한 상황이 ‘공포의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발생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셋째, 누가 공동체의 최고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는지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대의민주주의적인 정치 구조에서 이것은 주권의 대리인에 의해서 선포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둘째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권의 대리인의 이익과 최고 비상상황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주권의 대리인은 공동체 전체를 역시 최고 비상사태의 일상화로 몰고갈 수 있다. 이것은 테러리즘을 포함한 모든 전체주의, 공포주의적 정치체제의 일반적 특징이다. 물론 Walzer는 최고 비상사태를 매우 좁게 정의함으로써 이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의 논의 자체가 이론적으로는 매우 애매한 것 또한 사실이다.


4. 맺는 말 - 정의로운 전쟁의 부정의함

  역사 속에서 전쟁을 찬양하고 참여를 독려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전쟁은 그 어떤 다른 사건도 그만큼 참혹하고 잔인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특별한 고찰이 요구되고, 이것을 억제할만한 이론적, 실천적 수단이 요청된다. 이런 성찰의 여러 결과들 가운데,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전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끔 도와주면서 동시에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론으로서 주목받았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가들은 이 이론이 대다수의 전쟁을 부당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쟁을 제한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이상에만 갇힌 평화주의와 인간을 동물 이하의 존재로 전락시키는 현실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 따르면 전쟁은 선포, 수행, 종전 이후라는 세 가지로 구분되며, 각 부분에서 정당성을 획득했을 때 정의로운 전쟁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의 전통은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Michael Walzer는 현대에 이 논의를 복각시키고 여러 전쟁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힘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앞으로 수행할 전쟁은 정당하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해줌으로써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해석 앞에 열려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침략에 대한 반응인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내부적으로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론적 완결성을 갖추지 못한 채 어떤 전쟁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라는 것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거의 유일하지만 가장 큰 문제인데, 특정한 전쟁을 허용하는 것은 해석의 다양성과 맞물려 다양한 전쟁에 대한 허용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특히 Walzer 스스로가 자신의 이론적인 일관성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내놓은 최고 비상사태에 대한 논증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통치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공동체의 이익으로 포장하여 그것을 최고 비상사태로 ‘해석’할 준비가 언제든 되어있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하워드 진은 자신의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나는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폭격수가 됐고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중략) 아무 생각 없이 서류철에다가 [다시는 안 돼.] 라고 끄적거리고는 나 스스로도 놀랐다. (중략)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이 있다는 다소 정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인류의 어떤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전쟁은 전혀 해결책이 아니라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특히, 평화를 옹호하는 시각은 인도주의적 개입에 이르러서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리하여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실제로 그 이론이 사용하는 언어들이 전쟁을 평가하는 데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정당화하기에는 그 결과와 유산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또한 Walzer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언어들은 현실적 이익을 목표로 하는 전쟁들을 치장하는 데 동원되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큰 진보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의도하는 것처럼 전쟁 자체를 미연에 방지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셈이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모두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요원해보인다.

* 참고문헌

철학연구회 엮음, 『정의로운 전쟁은 정당한가』, 서울 ; 철학과현실사, 2006.
Emmett Barcalow, 『현대사회와 윤리 - 이론과 쟁점』(김진경, 이남원, 정미경, 최성희 옮김), 서울 ; 박학사, 2009.
Howard Zinn, 『전쟁에 반대한다』(유강은 옮김), 서울 ; 이후, 2001.
Michael Walzer, 『전쟁과 정의』(유홍림 외 옮김), 고양 ; 인간사랑, 2008.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규빈 2015-05-25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전쟁과 정의가 완전히 반대의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으나 어찌 보면 하나의 논제로 갈 수 밖에 없는 사회현상 중 하나입니다. 복잡다난한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결심할 때부터 정의를 고려해야 하며 현대전에 이르면 이제 이 정의가 곧 전쟁의 종결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성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와 관련된 독서내용이 있다면 계속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효진 2015-05-25 07:37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호호 2016-02-0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전쟁의 정당성은 참 어려운 문제인거 같네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박효진 2016-02-02 00:52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인지자본주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론적 측면

  이 글의 제목은 이 책의 내용을 환기시키기 위한 의문문이 아니다. 정말 인지자본주의가 무엇인가 물어보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인지자본주의를 초기 자본주의,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산업자본주의에 이은 제3의 자본주의의 물결로서 정의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에서 등장하는 여러 사회현상들을 마르크스의 『자본』을 해석하여 분석하고 있으며, 그것이 각 사회현상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적용해보고 있다. 

  그가 현재의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로서 규정하는 이론적 근거는 스피노자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존의 자본주의 분석의 틀과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 잘 알려진 틀에 따라서 토대와 상부구조를 이원적으로 분리하고 그 각각에 대한 고찰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 토대를 열심히 분석하고 상부구조의 여러 요소들을 토대로 환원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반대로 서구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는 독특한 흐름은 보통 상부구조가 어떻게 하부구조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기술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여러 측면들은 동일한 실재의 다양한 양태들이다. 그 가운데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실재의 속성이 사유라는 것과 그 양태가 물질이라는 것이다. 이 구조를 차용하면, 토대와 상부구조 역시 동일하게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두 측면일 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스피노자의 이런 이론적 측면은 마르크스주의에 두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자본주의는 이 세계(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개인)를 지배하면서 물질적인 생산의 측면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통제하고 지배하는 영역은 실재 그 자체인데,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정신의 영역, 즉 인지의 영역까지 지배한다. 저자는 인지의 영역을 매우 넓게 잡고 있는데, 요약하자면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길을 따라서, 그 정신적 활동은 역시 언제나 물질적 활동과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흔히 심리철학에서 인지라고 부르는 그 개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헤겔이 말하는 정신의 활동에 더 가까워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통합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충분히 정신의 문제에 대해서 고찰할 수 있는 연합전선이다.

  둘째 가능성은, 서비스 노동에 대한 분석이다. 굳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자본주의가 진전함에 따라 상품생산노동에서 용역생산노동으로 노동의 구조가 변화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여전히 세계의 중심은 자연에 노동을 투여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이론, 즉 노동가치설에 대한 부정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전체에 대한 부정과도 같을 만큼 그것은 그 이론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듯 이것은 19세기적 한계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포스트포드주의를 분석하는 이론적인 틀로서는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론은 여기에 대한 교정이다. 용역생산노동이 어디에서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지, 노동을 실재와 결합되어있는 일원론적 차원에서 고찰함으로써 노동가치설을 버리지 않고도 서비스노동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노동이 더 이상 사용가치와 잉여가치를 더한 고전적 판매가격에 따라 결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노동 역시 노동시장이라는 영역이 새로 산출됨으로써 순전히 교환가치로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자연과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용역생산노동에게 임금을 지급해야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그것의 수요와 공급이 분명히 창출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생산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수요가 있느냐가 그것이 노동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전술한대로 서비스노동이 임노동으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는 의미와, 동시에 노동시장 자체를 수요를 창출하는 자본(또는 자본가)이 결정하는 단계에 옴으로써 사회 전체가 자본(가)에게 더욱 충실하게 귀속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의미 또한 담고 있다.

  분명 이 책의 저자의 이러한 입장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분명 정신적 측면 - 이 책의 용어에 따르면 인지적 측면 - 에서 약점이 있었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그것은 수정주의일 수도 있고,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일수도 있으며, 저자의 입장과 비슷할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국면을 ‘인지자본주의’라는 말로 새로 정의할 만큼 정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는가? 그것은 조금 의문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그 탄생에서부터, 아니 자본주의가 아니더라도 모든 경제체제는 언제나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정신적 측면들을 동반해서 사람들을 지배해왔다. 자본주의 경제는 그 시작에서부터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적 기제들이 그 체제를 잘 작동시킬 수 있도록 사람들을 여러 형태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막스 베버의 말처럼 종교적 윤리일 수도 있으며, 아담 스미스가 말한 자유 속에 자리잡히는 질서의 원리에 대한 신뢰일 수도 있고, 또 그 밖의 다른 것일 가능성도 상존한다. 이러한 국면은 자본주의가 전개되는 곳곳에 배여있는 것이지, 현재 국면에서 그것이 유독 독특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인지자본주의’라고 정의하는 개념은, 사실 어떤 특정한 국면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자본주의 특유의 인지구조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다보면 드는 느낌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종의 이론적 짜깁기. 내가 각각의 이론에 대해서 잘 모르는 탓도 있거니와, 사실 스피노자와 바렐라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는 것인지 대체 이 책만 보아서는 잘 모르겠다. 위에서 썼듯이, 그가 해석하는 바렐라의 인지 개념은 어떤 과학적 측면에 기반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철학적인 수준의 논의인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내게는 헤겔의 내음이 더욱 많이 느껴졌다. 또한 다양한 사회학적, 철학적 분석이 인지자본주의라는 개념 아래 재배치가 되어있는데, 그 일관성을 잡아내기가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은 작업이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대체 인지자본주의란 무엇입니까?’  

 

실천적 측면

  만약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내에서 우리가 인지적 측면에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면, 그것은 용역생산노동이라는 독특한 노동의 형식일 것이다. 인지자본주의의 측면에서, 서비스 노동은 양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람들의 삶의 위치가 불안정해지고, 언제나 비정규직 이상의 삶을 살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기술했듯이, 철저하게 자본포섭적인 노동의 형식이기 때문에, 사회적 일자리 조절이 최대의 이윤을 목표로 삼는 자본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더 이상 고전적인 노동개념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가치창출이 가능한 영역으로서도 주목할 수 있다. 이 가치창출은 자본의 포섭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이러한 노동의 조건 하에 놓인 사람들을 다중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이 다중들은 이런 조건 아래서 각각이 혁명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표면화되지 않으며, 가끔은 매우 산발적인 형태로 일어난다. 그 산발적인 형태가 곳곳에서 출현할 때, 그것이 바로 그 조건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는 형태까지 진행되었다는 징후이며 동시에 혁명의 전조이기도 하다. 그는 이 틀거리를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혁명적 시위나 운동들에 적용하여 고찰하고 있다. 그 핵심은, 사람들의 인지구조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모순 그 자체가 폭발하는 것, 그리고 그 폭발을 이끌어내는 주체 개개인의 혁명적 능력에 대한 신뢰인 것 같다.

  이런 논의가 정말 옳은 해석인가 하는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정말 이런 이론구조를 따라간다면 혁명은 발생하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견한 토대에서부터 폭발하는 모순이 상부구조에 영향을 주어 만들어지는 혁명적 정국이라는 것은, 사실 그 모순의 폭발이 상부구조라고 부르는 인지의 영역에서도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경제 자체의 파괴적 징후는 곧 인지구조에서의 혁명의 징후이기도 하다는 어떤 희망적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적으로, 자본주의가 그만큼이나 만만한 체제이던가, 가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오히려, 저자의 입장은 그의 이론적 분석의 연역적 결론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희망을 투영한 어떤 미래상같다는 느낌을 더욱 많이 받았다. 그와 반대로 해석하자면, 물질구조를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인지구조 또한 아주 강력하고 근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시 이를 수 있다. 또한 그 인지구조는 경제위기 자체를 자본의 순환에 따르는 단순한 국면으로 만들어버리거나, 혹은 월가와 미국의 부동산 업자들이 결탁하고 세계적으로 자본을 수집해 돈잔치를 벌인 정도에 불과한 사건으로 축소시킬 수도 있다. 또한 현재 실제로도 그렇게 진행이 되고 있기도 하다. 자본 자체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로 환원되거나 치환되거나 대체되고, 자본의 문제는 감추어진다. 사실 그것이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인지구조이기도 하다.

  게다가 실제 그것이 어떤 모순을 사람들의 내부에서부터 폭발시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폭발은 양태의 측면 혹은 토대의 측면에서 다시 가로막혀 좌절하는 경우 또한 숱하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희망사항을 최근의 등록금 시위나 서남아시아 이슬람 국가들의 민주주의 혁명 등에서 보려고 하는 듯 하지만……. 리비아는 여전히 내전중이고, 시위에 나가야할 많은 다른 학생들은 역시나 시위보다는 아르바이트를 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중의 힘을 믿기보다는, 혁명적 지도자나 전위세력의 힘을 더욱 신뢰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욱 큰 효과를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짧은 내 생각이다. 

 

덧댐 : 자본론 분석에 대하여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론가들에 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을 술술 읽어내려가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서 이해하기도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특히나 아직 자본론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고 입문서 정도만 뒤적거려본 정도로서는, 자본론을 상세하게 인용하면서 지대와 이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 장에서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느낌만 들었고요. 

서평으로 적은 이 글은, 그래서 이 책의 내용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것, 아는 이론가들에 대해서만 서술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론적 학습의 수준을 더욱 높인 뒤에, 다시 도전해봐야 하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smeral 2011-08-3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내용을 메일로도 보내드렸습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박효진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