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계몽과 근대사상 숙제>

 

서론 : 라이프니츠의 과제와 연구의 토대

 

라이프니츠가 살았던 시기가 역사적으로 근대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성장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대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던 두 철학, 즉 데카르트가 정립한 본유관념을 토대로 한 이성중심주의 철학과, 로크로 대표되고 영국을 중심으로 독특한 전통을 형성하고 있던 경험중심주의 철학은 그가 극복해야 하는 가장 큰 벽이었다. 또한 데카르트 특유의 이원론으로부터 탄생하는 여러 가지 논리적 난점을 극복하려 시도한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그가 맞서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와 같은 학문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것, 그리고 이들을 극복하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과제라고 한다면, 그가 확립하고자 했던 것은 각 철학의 단점과 논리적 모순점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철학의 체계였다. 다시 말해, 그는 데카르트가 설정한 영혼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실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여야 했으며, 또한 경험의 잡다함으로부터 자연의 법칙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구출해야 했다. 또한 이를 뛰어넘는 것으로 제시된 스피노자의 철학이 보여주는 개별자의 침잠, 즉 그가 제시하는 신 개념에 모두 종속되는 개별자들의 지위 또한 철학적으로 정당화해야했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 라이프니츠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복권시켜 형이상학적인 체계의 정립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당시에 발달하고 있던 자연과학이 내세우고 있던 자연기계론적인 형이상학과는 배치된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보통이었고, 그 기계론은 스콜라 철학에 대항해서 복권된 플라톤주의의 기하학주의에 의해 체계를 정립하고 있었다. 라이프니츠는 이 자연기계론을 내세우는 당대의 많은 지성들과의 서간논쟁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목적론적 성격을 끌어들여 자연기계론적인 철학을 설명하려했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두 가지 뿌리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스콜라 철학과 그 토대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이다. 모든 실체는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목적성을 자기 안에 내재하고 있다. 그것을 발현함으로써 이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현존하고, 이들 모두가 쌓인 세계가 바로 지금 우리가 느끼는 세계이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체계를 대폭 수용하였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근대적인 모습에 알맞게 발전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런 면모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체계가 근본적으로 목적론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때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발상은 당시에 매우 독특한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근대 철학자들의 세계관은 기계론적 세계관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토대를 놓은 전통적인 논리학은 거부하였다. 그것은 당대의 다른 철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귀납을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논리학을 거부했던 것에 비해, 라이프니츠는 자신만의 새로운 논리학의 기초를 닦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부하였다. 이 새로운 논리학은 사고를 기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착상에서 출발한다. 마치 다른 철학자들이 자연을 기계적으로 분석하듯이, 사고의 과정을 기계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형이상학의 기초를 수립함에 있어서 논리학적으로 주어와 술어를 나누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에 따라 현존하는 존재의 실체는 주어 부분이며, 그 실체를 이루는 속성은 술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분석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개념과 공리이며, 이 둘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연역적인 체계(세계)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형이상학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모나드에 대한 입장으로 정리된다. 모나드는 단순하다는 뜻이며, 곧 라이프니츠에게 실체이다. 또한 단순하다는 정의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없다는 속성을 띈다. 모나드는 정신적인 실체라는 점, 인식의 주체라는 점, 합목적성을 띈다는 점, 세계 내의 구체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모나드는 정신적인 실체이다. 만약 실체가 물질적이라면, 그 실체는 연장이라는 속성을 띌 것이다. 연장은 무한히 분할이 가능하고, 그렇다면 이 실체는 무한히 작은 물질이 된다. 이 과정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무한히 작은 물질은 무한히 많다고 하더라도 세계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비연장적이고, 비물질적이어야 한다.

정신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단순하다고 정의함으로써 유한해진 개체에 무한한 가능성을 담을 수 있게 된다. 이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수많은 모나드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인식론적으로 그 관계들을 자기 안에 모두 담을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이미 담지하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의해 스스로 운동하는 존재로서 거듭난다.

모나드는 인식의 주체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인식이란, 한 모나드가 자기 안에 담지한 다른 모나드들과의 관계를 표상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모나드는 단순하기 때문에, 내부가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나드의 외부에 머무르는 존재나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모나드의 내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따라서 인식은 외부의 무엇이 들어오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표상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또한 질적으로 같은 모나드들만이 있을 경우 우리가 표상하는 다양한 인식대상의 차이를 말 할 수 없어진다. 따라서 모나드들은 각자가 질적으로 모두 다르다. 이것은 단순히 모나드들간의 존재론적 차이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차이에서 수반되는 관점의 차이 또한 발생시킨다. 모든 모나드는 각자 자신의 세계를 표상한다.

모나드는 합목적성을 띈다. 그 까닭은, 모나드는 최종근거인 신의 운동으로부터만 생성되기 때문이다. 모나드는 생성되는 과정에서 신의 완전성이라는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나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내적인 무한성, 즉 완전성을 부여받게 된다. 하지만 신으로부터 근거를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 자기충족적이긴 하지만 자신을 원인으로 삼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모나드는 세계 내의 구체적 존재이다. 모나드는 그 자체로서 영혼이나 정신, 의식을 구성한다. 정신적인 실체이고, 인식주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모나드들은 인식주체로서의 역할이 미미하기도 한데, 이런 모나드들은 영혼이나 정신으로 화한 모나드들의 통제를 받아 육체로서 그 기능을 한다. 이는 단순한 구성요소나 존재근거로서의 실체가 아닌, 그 자체가 역사무대 위에 있는 존재자라는 특징이 있다.

위와 같은 특징을 살펴볼 때, 모나드는 논리학적인 입장에서 개념, 즉 어떤 서술어의 주어에 해당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일반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개념은 인간의 사고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가능성으로서 무한한 술어를 자기 안에 내포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은 모두 세계 내의 어떤 구체적 존재에 대한 지칭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또한 위와 같은 실체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 정신과 물질을 하나의 실체에 통합시켜 하나의 세계로 설명하려고 한 것 역시 이전의 철학자, 특히 데카르트에 비해서 발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나드는 각각이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실체라는 점, 그리고 정신과 물질이 개념적으로는 하나의 실체에 통합되어 있지만 이 통합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난점에 부딪힌다. 라이프니츠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정조화설이라는 주장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은 실천철학 부분에 있어서 상당한 문제를 야기한다.

 

자연철학

 

하지만 실체를 정신적인 면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가 물질로서 바라보는 세계를 어떻게 정당화하느냐라는 과제가 남게 된다. 특히나 모나드는 각각 모나드 사이에 분절적인 구분이 없이 연속적이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존재가 한 계열에 통합되는데, 이것은 마치 스피노자의 세계처럼 세계 내의 각 존재 간에 구별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근거로서 작용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이를 뛰어넘기 위해 라이프니츠가 제시하는 기준은 지각의 명료성이다. 그리고 이 지각의 명료성은 존재론적인 측면과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모두 작용한다. 인식론적인 측면은 뒤에서 논의할 것이므로, 자연을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각각의 모나드는 지각의 명료성의 정도에 의해서 서로의 차이를 드러낸다. 지각의 명료성이 높을수록 정신적인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반대로 낮을수록 물질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각각의 모나드들은 다른 모나드들을 자기 내부에 표상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에는 다양한 모나드들의 지각의 명료성의 차이에 의해 물질과 정신이 공존할 수 있는 세계로서 나타난다.

인간과 각각의 동물들 사이의 존재론적 위상은 지각의 명료성이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 모나드가 표상하는 세계 속에서 지각의 명료성이 높을수록 고등동물로서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며, 낮을수록 하등동물 내지는 물질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존재도 완전히 물질적이지는 않고, 인간이 포착할 수는 없지만 미약하게나마 정신으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완전히 정신적인 존재는 반드시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를 통해 목적론적인 자연관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각 모나드는 내적인 원리에 따라 운동하고, 그 내적인 원리의 방향은 신으로부터 탄생과 함께 부여받은 완전성을 향해있다. 이것은 운동이 무작위적이고 기계적인 현상이 아닌, 일관된 규범을 따라 벌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목적은 기계적으로 결코 파악할 수가 없다. 기계적인 분석을 통해서는 단지 운동의 과정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라이프니츠는 그러한 분석이 가능할 수 있게끔 하는 운동의 근거로서 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물질적 실체의 속성으로서 연장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고대철학에서조차 그 가능성의 의문시되는 속성이었다. 제논이 제시한 여러 역설들은 바로 이런 연장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논의를 계승해, 무한히 분할이 가능한 연장이 실체의 속성일 경우에는 연장이 불가능한 것들의 집적이 연장이 되는 역설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연장보다 더 근원적인 속성을 내세워야만 했는데, 이것이 힘이다.

힘은 다시 근원적인 힘과 파생된 힘이라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근원적인 힘은 실체가 직접 행사하는 힘이다. 자신이 머무를 수 있는 고유의 물리적인 영역을 만들어낸다. 바로 이것이 세계 속에서 연장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파생된 힘은 이런 근원적인 힘이 행사됨에 따라서 나타나는 효과들이다. , 연장이라는 현상은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물리적인 힘으로서 각 모나드에게 다가간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하는 세계는 모나드 안에서 정신적으로 표상된 세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과 공간도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는 실재가 아니다. 라이프니츠에게 세계는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모나드의 표상 작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표상작용이 없으면 공간도 없어져버린다. 시간도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표상의 변화가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 현상이 된다. 이것은 당시에 시간과 공간을 물질세계에 선행하는 논리적인 조건으로서 내세웠던 뉴턴의 자연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만약 이 두 가지를 논리적인 선행조건으로 상정할 경우, 그것은 결국 공간이 놓일 수 있는 어떤 것을 향한 무한소급으로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논리적인 선행으로서의 공간은 논리적인 선행이기만 할 뿐 그 어떤 운동의 근거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공간 위의 물질들이 어떻게 운동하고 변화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 또한 뉴턴에 대한 중요한 비판의 지점이었다.

 

인식론

 

라이프니츠는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로서 선험적인 근거를 강조하였다. 소박한 경험과 귀납적인 추론은 개연성만을 확보할 수 있을 뿐, 필연성을 확보할 수는 없었다.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일 수 없으며, 따라서 지식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선험적인 근거를 통해 경험을 배열하고 조직해야만, 경험에서 필연성을 확보할 수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라이프니츠는 경험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선험적 원리를 통해 경험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필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그래서 필연적인 원리를 요청해야만 했다. 필연적 원리는 경험과 상관없이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본유관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본유관념을 내재한 인간의 속성이 바로 이성이다.

또한 인간은 다른 모나드들에 비해 지각의 명료성이 높다. 따라서 다른 동물들처럼 개연성만 확보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자연의 필연성과 법칙성을 알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을 다른 모나드들의 인식인 지각과 구별해 통각이라고 명명하였다. 라이프니츠가 정의한 인식의 특징상, 서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 모나드의 행위를 얼마나 잘 예측하는가에 따라 주체의 능동성과 대상의 수동성이 나눠진다. 이 구분 또한 분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라, 여러 모나드들간의 관계에 따라 능동성과 수동성이 결정된다.

인간은 이런 특징 때문에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차원의 인식을 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 모두 경험과 기억에 기대어 명석한 인식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적 인식이 될 수 없다.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을 통한 판명한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과학, 특히 자연과학을 하는 일이 가능하다. 판명한 인식이란, 논리적인 활동을 통해 사건이 일어나야만 했던 근거를 찾아내는 활동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성적 사고에 의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라이프니츠가 이성의 진리라고 명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모순율에 따라 그 진리값이 결정되는 명제가 해당된다. , 어떤 명제에 논리적으로 반대인 명제가 모순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동어반복을 벗어날 경우 이것은 이성의 진리에 해당되는 지식이다.

하지만 모순율에 의거해 만들어질 수 있는 세계는 무수히 많다. 마치 기하학에 여러 가지 체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각 명제 간에 모순이 없는 세계는 논리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가능할 뿐인 세계이며, 그 많은 가능세계 가운데 세계로 구현된 세계는 단 하나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실제 세계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이 실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사실의 진리라고 명명한다.

가능한 많은 세계들 가운데 단 하나가 실제 세계로 나타나는 충족이유율에 따라 설명이 된다. 바로 이것이 선험적 원리를 구성하는 나머지 하나의 원리이다. 충족이유율이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 사건이 일어나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원리이다. 따라서 지금의 세계는, 단순한 개연성을 넘어서 인과적인 필연성을 얻게 된다. 세계의 모든 사건이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학을 수행할 때 이 두 가지 원리에 따르기 때문에, 과학 역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모순율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순수과학이다. 여기에는 논리학과 수학이 포함된다. 순수과학 안에서는 모순이 없는 모든 세계에 대해 연구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세계에 대해서 그려낼 수 있다. 둘째는 경험과 결부되어있는 경험과학이다. 인간은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단 하나의 실제 세계만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학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능한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즉 순수과학에서 경험과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해야한다. 이것을 설명해주는 원리가 바로 충족이유율이며,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조화로운 것(조화), 가장 알맞은 것(최적), 그리고 가장 단순한 것(단순)을 기준으로 삼아 실제 세계로 이행한다.

하지만 이 충족이유율에 따라 가능한 세계 가운데 하나를 실제 세계로 만드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 없는 한, 이 세계에 대한 설명은 불가하다. 라이프니츠는 이 존재를 바로 신이라고 말한다. 신은 모나드들 가운데 가장 명료한 지각을 소유한 존재이며, 따라서 충족이유율에 의해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존재의 이유들을 통찰할 수 있는 존재이다. 신이 표상하는 세계가 바로 역사 전체이며, 그것은 신의 관념 속에서 이미 그 속성이 결정되어 있다. 이 속성은 바로 각 모나드들의 술어에 대한 정보들이다.

인간이 과학적인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신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또한 오로지 신적인 관점을 통해서만 과학이 가능하다. 여러 가능 세계에서 단 하나의 사실 세계를 향한 이행, 그리고 그 이행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신적인 관점을 신과 공유하고 있다. 그 능력이 바로 인간의 이성의 속성이자 통각의 기능이다.

따라서 인간의 과학적인 지식이란, 여러 모나드들 즉 실체에 담긴 술어들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아는 것과 같다. 이 실체는 사실 세계의 실체이다. 이들은 가능 세계와는 다르게 모순율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사실상 이런 사실의 진리들도 모순율에 어긋나는 진리들로서, 이성의 진리와 같은 격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신적인 관점에서 볼때는 모든 실체들의 속성에는 그와 같은 속성들이 이미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속성들 가운데 하나를 거부했을 때에는 동어반복에서 벗어나므로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자연과학이 가능하게 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신도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서 사실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 세계 가운데 가장 완전한 세계를 표상한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체계 안에서는 신 역시 이런 완전성에 종속된 존재이다.

 

실천철학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나드 각각은 내적인 원인에 따라 독립적으로 운동한다. 하지만 세계는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모나드들이 제각기 움직여 만들어진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질서정연하게,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인다. 라이프니츠는 이 모든 방향과 패턴, 질서가 신이 교묘하게 모나드들을 결합시켜놓은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모나드들의 술어가 결정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하면, 모나드들 서로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수행하는 여러 가지 조절활동이 영향을 주는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나드들은 마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처럼 움직이고, 이것은 경험적인 인과관계로 표현되는 세계, 그리고 정신과 물질이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정조화설이다.

그렇다면 신에 의해 예정된 세계에서 인간의 도덕은 어떻게 가능한가? 또한 도덕률은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책임을 동반한 도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기에,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하지만 예정된 세계, 결정된 세계에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자유는 자유로운 존재의 열린 선택의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결정된 세계는 이 선택이 한 가지로 닫혀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정된 세계와 도덕은 모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설명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예정과 결정은 같지 않다는 생각이다. 신은 모나드가 할 일을 규정하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모나드가 자발적으로 할 일을 알고 있을 뿐이다. 모나드를 창조하고, 거기에 내적으로 완전하다는 속성을 부여한 존재가 바로 신 자신이기 때문에, 완전하다는 속성에 의해서 모나드는 자발적이다. 또한 신에 의해 정의된 존재로서 유한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의 지성으로는 모나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둘째는 도덕법칙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예정과 결정은 같지 않으므로, 모나드에게서 자유를 확보할 수 있기에 자연스럽게 도덕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또한 내적인 완전성을 토대로 자율적으로 도덕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완전성은 신의 속성이고, 모나드 또한 내적으로 완전한 존재이다. 따라서 자기 안에 담고 있는 무한한 가능한 세계 가운데 신이 가장 원하는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그것은 곧 가장 도덕적인 세계이다.

셋째는 신의 도덕적 면모에 대한 변론이다. 악의 근원으로서 불완전한 존재가 생성된 이유, 즉 형이상학적 악에 대해서는, 라이프니츠의 세계관 속에서 구체적 존재인 모나드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정의상 내적으로는 완전한 존재라고 해명한다. 도덕적인 악 때문에 발생하는 죄는, 신은 가능한 도덕적인 세계를 만드는 존재라고 반박한다. 또한 완전히 결정적인 세계에서는 도덕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유를 확보해주는 세계가 더 나은 세계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세계에 만연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사실은 고통이 없는 중립적 상태나 행복에 다다르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신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안이라고 말한다.

 

결론 : 라이프니츠 철학의 파급과 한계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보이는 가장 큰 전환점은, 우리가 물리적이고 외부대상을 그대로 인식한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정신적 작용의 산물로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특히 정신의 현상으로서 물질세계를 바라보는 라이프니츠의 시각, 물리적 사태를 정신의 현상으로 환원시키는 그의 사상은 칸트의 현상계에 대한 논의를 예비하고 있다. 또한 논리적으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한 시도는 당대의 논리학적인 고정관념을 뛰어넘은 구상으로서, 이후 20세기의 분석철학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멀게는 독단적 존재자로서의 라이프니츠의 인간관은 이후의 관념 중심의 철학에서 지속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며, 비연장적인 속성을 실체의 성격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물리적인 세계를 설명하려 하는 것은 20세기 이후 과학의 논의들에서 등장하는 에너지에 대한 관점을 예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체계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은 그를 바라보는 데 큰 난점으로 작용한다. 말년에 적은 변신론이 유일한 철학적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그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내용은 거의 편지를 통한 논쟁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확실한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논쟁을 통해 입장이 바뀌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체계를 뚜렷하게 규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당시의 몇몇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을 자신의 체계에 끌어들임으로써 종교적 공격에 시달리지 않으려 했던 시도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철학 역시 스피노자와 같이 개별자들의 자유를 확보해주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참고문헌

 

서양근대철학회 엮음, 서양근대철학, 서울 ; 창작과비평사, 2001

서양근대철학회 지음,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 서울 ; 창비, 2004

이정우 지음, 주름, 갈래, 울림 : 라이프니츠와 철학, 서울 ; 거름, 2001

 

Fredrick Copleston, 김성호 옮김, 합리론 : 데카르트에서 라이프니츠까지, 서울 ; 서광사, 1994

 

김국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형이상학, 철학과 현실17, 1993년 여름, 철학문화연구소

박제철, 라이프니츠 철학의 결정론적 성격, 철학98, 2009년 봄, 한국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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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2013-10-3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철학을 공부하고 있어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잘 읽고 갑니다. ^ ^

박효진 2015-04-08 00:07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레니 2015-04-0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박효진 2015-04-08 00:0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좋은 글이라고 칭찬받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

숭사리 2016-12-29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모나드론 검색하다가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

박효진 2016-12-31 05:07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8년 서양고중세철학 숙제>

 

 

1. 초기 자연철학의 주제

 

   고대 그리스 철학 초기의 탐구주제는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 전체, 즉 자연에 대한 물음이었다. 크게는 자연에 대한 물음이라고 한 가지로 나타낼 수 있겠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 물음은 크게 두 가지 질문을 내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는 자연이 어떻게, 또 무엇으로 이루어져서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묻는 질문이다. 둘째는 왜 변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는 우리가 감각으로 겪게 되는 사물의 변화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보였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없어지고, 성장하고 쇠퇴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가 바로 이 질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철학이 처음 시작되던 때, 밀레토스의 학자들은 첫째 문제에 집중해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물, 공기, 무한자 등의 다양한 답변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밀레토스의 학자들은 둘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예 하지 않거나, 자신들이 내세운 근원적인 물질이 스스로 운동한다는 정도의 미약한 답변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이들의 변화의 문제를 설명하지 않았던 이유는
, 물질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물질에 영혼이나 신적인 힘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원시적 견해의 연장선상에 있는 생각이다.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지만, 아직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고대의 미신적인 방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 이보다 한 세대 뒤에 등장한 철학자들은 운동과 변화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변화에 대해 설명하는 것 또한 자연에 대해 연구하는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었다.

 


2. 변화 문제의 대두

 

   2.1. 헤라클레이토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자연의 변화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이론을 편 철학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많은 신화적 전기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신빙성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헤라클레이토스와 관련된 단편은 그의 로고스logos 개념과 기독교적인 로고스logos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책에서 주로 발견할 수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그는 자연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다고 한다.


   밀레토스의 학자들이 말하는 근원
arche으로서의 물질을 결정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불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근원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헤라클레이토스는 근원으로서의 어떤 물질을 거부한다. 이 세계는 우리가 보는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구성되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생성과 소멸, 감각할 수 있는 양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밀레토스 학자들의 물질과 변화의 관계는 역전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떤 근원적 물질이 아닌, ‘변화를 세계의 본질로서 이해하고 그것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개체가 변화한다면, 그 개체가 변화하기 전과 변화한 후는 같은 개체일까 다른 개체일까? 변화의 원리 자체만으로는 이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변화의 원리나 문제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동일한 개체라고 인정하며, 실제로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변화의 이전과 이후에도 그것을 동일한 개체로서 인정하게끔 만드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속성이 바로 로고스logos이다.


   로고스는 변화와 자기동일성
-개체동일성을 동시에 설명하기 위한 원리이다. 이전의 철학자들에게서 변화란 의지적인 성격이 강하므로, 규정할 수 없으며 무규칙적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가 설명하는 로고스는 이성적이고, 보편적이다. , 자연의 모든 개체 안에 내재하며 변화의 방향과 성격을 정해주는 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자기동일성-개체동일성을 설명할 수 있다. 로고스가 함축하고 있는 변화과정은, 변화의 원리인 것과 동시에 어떤 개체가 그것일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모든 개체는 로고스를 함축하고 있고 논리적으로 만물은 (로고스를 통하여) 하나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 현상적인 변화와 물질적인 인식에 얽매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은 로고스를 파악해야만 자연 내의 개체에 대한 이해와 자연 전체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로고스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혜이다.

 

2.2 엘레아 학파의 주장과 그에 대한 대응

 

   이렇듯 근원적인 물질에서 변화로 질문의 초점이 옮겨온 가운데,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학파가 나타났다.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계에는 존재와 변화가 동시에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말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존재의 변화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 존재가 변화한다는 것은, 첫째 존재가 비존재가 될 수도 있으며, 둘째 비존재에서부터 존재가 생겨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첫째 경우, 존재가 비존재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라고 부를 수 없을뿐더러, 변화를 겪는다는 것 자체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존재의 속성에서 어긋난 것이다. 둘째 경우는, 비존재에서 존재가 생겨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존재는 그야말로 무() - 아무 것도 없음이며, 따라서 존재를 위한 어떤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엘레아 학파의 이런 주장은
, 당시 고대 그리스의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게 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던 존재 개념에서 출발하여 아주 비상식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과정은, 이전의 철학자들처럼 주장이나 의견, 가설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치밀하고 정교한 논리적 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엘레아 학파 이후의 철학자들은, 엘레아 학파의 전제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변화를 설명해야하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엘레아 학파 등장 이후의 자연철학은 대개 이런 노력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엠페도클레스는 시칠리아 섬 남부 연안의 도시에서 태어났다. 이는 그가 직간접적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또한 태어나고 죽은 해가 확실하지 않다.


   엠페도클레스는
존재가 무한히 많다고 주장함으로써 엘레아 학파의 입장을 극복하려고 했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이 네 가지 물질적 요소 - 흙과 물, 불과 공기에 의해 물질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는데, 이 네 가지 물질적 요소들이 엘레아 학파의 존재의 속성을 띈다. 네 가지 물질적 요소들은 만들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또한 그 자체로서 충만하고 단일하여 요소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요소들이 무한히 많으며
, 여기에 신적인 성질이 내재해있다는 주장을 편다. 이런 신적인 요소를 사랑과 미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 둘은 어떤 종류의 힘이다. 사랑은 네 가지 요소가 서로를 끌어당겨 어떤 사물을 만들어내는 힘이며, 미움은 반대로 서로를 밀쳐내어 어떤 사물을 해체시키는 힘이다. 우리가 감각하는 물질은, 이 네 가지 물질이 두 가지 힘에 의해서 뭉치고 흩어진 결과물이다.

 

   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500년 경에 소아시아에서 태어나, 스무 살 때 아테네로 이주하였다고 알려져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밀레토스의 학자들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가 자신의 철학의 중심주제로 삼았던 것 역시 자연이었으며, 따라서 그도 자연철학의 계승자로 분류해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는 변화의 원인
-원리로서의 정신nous을 가정하여 엘레아 학파의 주장에 대응하려 했다. 아낙사고라스의 정신은 이성적, 합리적 원리로서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으며 원리가 되어 현상의 변화의 법칙으로서 작용한다. 이를 통해 물질-현상적인 존재와 그것의 원리로서의 정신을 설정하여 변화와 물질의 영속성 모두를 다 설명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정신의 발견은
, 무규칙한 의지가 내재했다고 생각하고 변화를 이해했던 기존의 이해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한 생각이다. 변화를 서로 분리해냈을 뿐만 아니라 변화의 과정에 법칙성을 부여하였다. 이는 확실히 과학적으로 진일보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를 통해서 이전에는 영혼과 물질 모두를 가리켰던 자연physis, 온전하게 물질적인 자연만 가리키는 개념으로 바뀌었으며, 이는 원자론자들의 생각에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고대 원자론의 자연철학

 

   레우키포스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주창하는 원자론은 항상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더불어 언급되고 있으며, 순수하게 레우키포스의 이름으로 전해는 단편은 오직 두 개 뿐이다. 출생지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데모크리토스는 그리스 북부에서 태어났는데
,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많은 지역을 여행했고, 스스로가 굉장히 폭넓은 분야에 저술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자연철학 이외에도 사회나 윤리학,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이에 대해 저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대 원자론의 기획 역시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와 같다. 엘레아 학파가 제시한 존재의 조건을 만족시키면서도, 우리가 현상으로 경험하는 변화에 대해 설명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는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비단 고대 원자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상계에 몸담고 있던 사람 모두가 풀어야만 하는 숙제이기도 했다. 이는 존재/비존재의 문제, 생성/소멸의 문제, 변화의 문제 그리고 지식의 확실성 같은 것들로 표현할 수 있다. 원자론은 이 모든 문제를 하나의 이론으로 해결하고자 고안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 현상과 실재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한 설명이다.


   고대 원자론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 실재의 모습을 철저하게 물질적으로 그려내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당시에 자연철학자들은, 생각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철학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신화적인 사고방식의 흔적 또한 보여주고 있었다. 이전 철학자들이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어떤 신적인 힘, 영혼 같은 개념이 그런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원자론은, 세계를 영혼이나 신이 거의 배제된, 물질적인 성질을 중심으로 설명해냄으로써, 인간의 관찰과 이성으로 자연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자연철학의 목표에 한발짝 다가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원자론이 현상과 실재, 변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불변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로서 원자를 설정한다. 그렇다면 원자의 세계 즉 실재의 세계는 원자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가정으로 영원하다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그 자체로 충족되어있고 불가분한 존재라는 가정으로 불변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킨다. 동시에 원자들의 형태와 배열을 통해 우리가 감각하는 현상세계가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고대 원자론의 아이디어는 어느 정도 엠페도클레스의 주장과 유사한 점이 있다
. 고대 원자론자들이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실하게 밝힐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엘레아 학파의 존재개념을 만족시키면서도 현상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존재의 다수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 ,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단일하고 충만하여 변화가 없지만, 그 존재가 무한히 많으며, 존재의 작용을 통해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가 구성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이 존재를
원자atom’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원자는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상태atoma’라는 뜻이다.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상태로 어떤 실체를 정의함으로써, 엘레아 학파의 존재 개념에 합치하는 어떤 실체를 상정하는 것이다.

 

   공간이란 아무 것도 없는 빈 곳을 의미하는데, 이것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들은 엘레아 학파이다. 특히 정수비례로 표현되는, 무한히 분할가능한 공간에 대한 역설은 제논의 역설에 잘 표현되어있다. 언뜻 보면 현상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것이지만, 실재의 세계에 대한 사유를 통해 공간을 부정하는 작업을 해나간 것이다. 엘레아 학파 이후에 등장한 엠페도클레스나 아낙사고라스 역시, 무한히 다수인 존재가 이 세계를 꽉 채우고 있을 뿐 공간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 고대 원자론에서는 공간 역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공간은 실재한다는 원자론자들의 주장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실체로서의 원자들은 그 수가 무한하긴 하지만, 그것이 세계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원자가 위치한 그 밖의 어떤 곳들이 있으며, 이것이 공간kenon인 것이다. 존재는 정의에 따라서 자기 안에 공간을 함축할 수 없지만, 자기 밖에 공간이 있는지 없는지는 말해줄 수 없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이 부분에 주목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 공간은 다른 존재-원자들과 존재론적으로 동격인 어떤 존재가 아닌, 원자가 존재하기 위해선 논리적으로 반드시 선행되어야하는 무엇이다. 비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의에서는, 비존재가 존재와 똑같은 차원에서 존재하는 속성을 띄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다. 하지만 공간으로서의 비존재는, 존재가 존재하기 위한 배경 혹은 선행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 허공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존재가 운동하는 것이다. 존재가 하나이건 여럿이건, 세계가 그 존재들로 꽉 차있다면, 양쪽 다 운동이 불가능한 세계라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자와 허공은, 원자론에서 변화를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선 원자의 졍의를 통해 엘레아 학파가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공간을 규정함으로써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이를 통해서 원자론자들은 변화의 문제를 원자와 허공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변화는 허공 속에서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원자들이 운동한 결과인 것이다. 이를 우리는 관습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변화는 세 가지 조건으로 바꾸어서 설명된다
. 형태, 배열과 위치가 바로 그 조건이다. 이는 원자의 모양, 서로 다른 원자들의 배열, 그리고 그 배열 가운데서 각각의 원자가 자리잡은 곳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허공 속에서 무수히 바뀌는데, 이 가운데서 우리는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다.


   변화를 위해 설명하는 원자의
운동이라는 개념은, 변화의 설명방식과 함께 주목해보아야 할만하다. 이전의 변화와 운동에 대한 설명과는 달리, 고대 원자론자들은 운동과 변화를 무목적적이라고 설명한다. 이전의 철학자들에게 운동과 변화란, 어떤 이상적이고 목적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활동이었거나, 어떤 신적인 힘 혹은 개체가 그런 상태로 향해 이끌어나가는 작용이었다. 하지만 고대 원자론자들에게 운동이란 그저’ ‘저절로일어나는 것일, 거기에 특별한 규칙이나 방향같은 것은 없다고 믿었다.


* 참고문헌

 

고대 그리스 철학프리도 릭켄 지음, 김성진 옮김, 서광사

그리스 철학의 이해강대식 지음, 민음사

서양철학사S.P.램프레히트 지음, 김태길·윤명로·최명관 옮김, 을유문화사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새뮤얼 이녹 스텀프·제임스 피저 지음, 이광래 옮김, 열린책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김내균 지음, 교보문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등 옮김, 아카넷

종교에서 철학으로F.M.콘퍼드 지음, 남경희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희랍사상의 이해박종현 지음, 종로서적

희랍 철학 입문W.K.C.거스리 지음, 박종현 옮김,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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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애리얼리, 상식 밖의 경제학요약

 

경제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가설은 단연 사람들은 계산적인 합리성에 따라 이익과 손해를 따져 행동한다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개념이다. 이것은 몇몇 상황에서는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는 그렇게 한다고 믿고 있다. 상식 밖의 경제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상식이란 바로 이 개념이다. 이 책이 이러한 상식에 맞서서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 라고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행위한다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계산적인 합리성과 얼마나 동떨어져있는지에 관한 내용이고, 나머지 하나는 계산적인 합리성에 따라 행동해야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모든 규범들이 주어진 조건에 따라서 얼마나 무력해지는가에 관한 내용이다.

또한, 책의 제목에는 경제학이라는 말이 붙어있지만, 이 책의 내용은 사실상 경제학에 관련되었다기보다는 심리학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린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보여주는 경제학의 한 조류(행동경제학)은 경제학적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단지, 실험들이 증명하고자 하는 주제와 목표들이 경제학에서 전통적으로 다루던 주제들일 뿐이다. 특히 이 실험들은 경제주체의 작은 단위인 개인의 행동, 특히 구매와 소비 행위에 집중되어있다.

적어도 이 책의 모든 실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한다고 본다. 여기에서 최선의 선택이란, 자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소유하고 있는 것을 지키는 행위를 선택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선택은 합리성에 부합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의 실험들은 우리의 최선의 선택이 여러 조건에 따라서 합리성에 부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에게 많은 실험을 가함으로써, 이런 행동들이 우발적이지 않고 일정한 유형으로 반복된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선택과 합리성이 일치하지 않는 여러 사례들을 통해서, 인간이 조건에 따라 얼마나 다른 행동들을 하는지 또한 보여준다. 이런 내용은 주로 책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합리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규범을 포함한 여러 윤리적, 경제적 사고들은 실험대상에게 부여된 조건에 의해서 쉽게 포기되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인간은 실제로 이런 포기를 너무나도 쉽게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고 싶을 때, 다시 말해 그의 선택과 윤리성 또는 합리성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렇게 부합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게 가장 우선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마지막으로 이런 결론을 도출하거나 또는 세워놓았던 여러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심리학적 실험의 방법이 쓰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방법을 통해 최소한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서 경제학 이론의 체계를 세우는 데 필요한 것들만을 취사선택하지는 않게 만들 수 있다. 또한 특정한 조건에 따라 반응하는 인간의 유형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어떤 제도나 규범에 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경제학의 여러 측면들을 교정하는데 행동경제학은 반드시 필요한 분야다.


로버트 하일브로너, 세속의 철학자들요약

 

경제학자들은 각 경제주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제 현상들을 분석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경제학자다. 하지만 동시에, 그 경제행위들의 규범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사상가 또는 정치사상가적인 성격이 있기도 하다. 실제로 20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몇몇 경제학자들은 일종의 철학자를 겸직으로 삼는다. 하일브로너는 경제학자들의 이런 철학적인 측면에 중심을 두어 경제학사를 서술하였다. 이것이 세속의 철학자들이 단순히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아닌 이유다. 그는 자신의 저술의 이런 특징을 조셉 슘페터의 비전이라는 개념에 빗대어 설명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도 이 책은 어떤 미래가 바람직한지 그리고 그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갈지에 대한 각 경제학자의 구상들이 그의 학설과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강조된다.

그 모습이나 체계는 다르지만, 이 비전이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 또는 없느냐에 따라서 여기에 등장한 경제학자들을 나누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정적인 비전을 대표하는 사람은 단연 맬서스일 것이다. 그가 제시한 비극적인 모습 인구의 폭발적 증가, 이들을 다 먹일 수 없는 만큼의 식량생산에 따른 이른바 자연적인 인구 조절’ - 은 어떤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자본주의적인 사회는 자신의 노력을 들인 사람들(노동자와 자본가)이 소외되고, 반대로 가만히 있는 사람들(지주, 유한계급)이 이득을 본다는 점에서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리카도와 베블런도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제시한 홉슨, 적어도 자본주의 단계란 자신을 파괴하는 체계를 따라 움직이는 비극의 무대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마르크스 같은 이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힌다.

하지만 이 책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긍정적 비전이다. 경제학 자체가 아담 스미스라는 거대한 비전과 함께 시작하기 때문이다. 각 개인들이 자신에게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경제현상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논증의 핵심적인 결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별다른 경제학적 입장이 있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일브로너는 오웬, 생시몽, 푸리에 등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을 경제학사의 한 부분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경제사상을 포함해 사회, 정치, 철학의 여러 부분에서 낙관적인 의견을 표명했던 밀 또한 긍정적인 비전을 가진 인물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인즈는 자신의 경제이론과 경제정책을 통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미래를 상정했다는 점에서 이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비전이 흐릿하거나 없는 학자들 또한 있다. 마셜 같은 인물은 경제학에 수학, 한계효용, 수확체감을 도입함으로써, 이상적인 경제적 형태를 제시하기보다는 현재 일어나는 경제현상들을 설명하는 데 더욱 치중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설명의 정확함과 엄밀함을 향상시켰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위대한 경제학자로 대우받을 수 있다. 또한 슘페터는 창조적인 기업가 정신을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보았지만, 이런 기업가는 기존의 시장을 수정하거나 파괴한다.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원천에 바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꿰뚫어보는기업가적 비전이 자리한다. 이런 면에서 슘페터는 경제학적 입장의 엄밀함과는 별개로 경제학과 경제학자, 또는 자본주의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질을 통찰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토드 부크홀츠,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요약

 

반면 부크홀츠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는 각 경제학자들이 정식화한 입장들이 현재 우리의 경제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두고 책을 풀어나가고 있다. 따라서 하일브로너와는 달리, 그 경제학자의 학설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별다른 경제적 입장이 없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슘페터가 경제사상사에서 제외되는 대신 경제학 자체의 정식화에 성공한 마셜이 크게 부각된다. 또한 케인즈 이후에 그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대표적인 세 학파들에 대한 소개도 추가되어있다.

모든 경제학사 연구가 그렇듯이 이 책 또한 아담 스미스로부터 시작한다. 아담 스미스 이래로 경제학자들이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 개인의 경제행위와 그 경제행위로 이루어진 사회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 문제를 경제적으로 처음 정식화했으며, 시장과 노동분업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이후 경제학은 주로 시장의 작동원리와 경향을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삼아왔으며, 바로 이것이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 책의 중심적인 대립축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경제학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연구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시장 자체를 보는 시선이 다른 마르크스라든가, 시장보다는 시장 속의 개인들을 지배하는 다른 요소들을 연구하는 제도학파 경제학자들(베블런, 갤브레이스), 그리고 시장의 자기회복 능력을 크게 믿지 않은 케인즈, 시장을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고 경제원칙의 지배를 받는 요소로서의 정부를 분석하는 뷰캐넌,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심리학에 더욱 가까운 행동경제학에 이르는 흐름들이 그렇다.

또한 다른 대립축이 만들어져있기도 한데, 그것은 시장의 조절능력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 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다시 말해 경제주체로서의 개인들의 최선의 선택과 사회의 번영 사이의 연결이 과연 얼마나 자연스럽고 강한가에 관한 믿음이라는 축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 둘 사이에 관계가 깊다는 것을 밝히면서 경제학을 시작하였지만, 당시에도 그의 입장에 대해서 반대하는 여러 학자들이 있었다. 그 뒤에 등장한 마샬이나 밀, 그리고 이후의 통화주의자들이나 합리적 기대 가설을 믿는 이들은 아담 스미스의 입장에 서고, 반대로 제도학파나 케인즈와 케인즈주의자는 스미스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공공선택학파나 행동경제학은 이 두 가지가 거의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아담 스미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 대립축이 경제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이렇게 주요한 두 가지 문제, 그리고 그 밖에 각 경제학자들을 둘러싼 여러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한 문제들에 대한 각각의 입장을 대체로 평이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글쓴이의 시각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들을 미루어보았을 때 대체로 그는 아담 스미스의 입장과 경제학의 전통적인 연구주제와 방법에 대해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는 케인즈 이후의 경제학의 흐름에 관한 서술이다. 책의 서술전략으로서는 케인즈 이후에는 케인즈의 입장의 여러 부분을 대상으로 반대의견을 낸 학자들을 다루는 것이 맞고 또한 유리하겠지만, 케인즈주의자들이라고 하여 꼭 케인즈의 입장을 그대로 답습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요약과 감상

 

여러 경제학자들 사이의 차이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에 관한 차이인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매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하려 노력하는 존재일수도, 단순히 최선의 선택 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보에 대해 알고 완전히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행위하는 존재일수도, 또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임시변통 삼아서 이것저것 해보는 존재일수도 있다. 그래서 시장과 시장에서의 경제주체들의 행위에 대한 연구로 시작한 경제학은 이제 심리학과 만나서 행동경제학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는 데 이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어쩌면 경제학의 기틀을 마련한 아담 스미스 스스로가 내포하고 있던 성격, 즉 그가 국부론과 동시에 도덕감정론을 썼다는 사실로부터 이끌려나오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앞쪽은 경제행위에 관한 책인데 반해서, 뒤쪽은 행위의 적절함에 대한 판단의 과정에 관한 책, 바로 인간에 대한 어떤 이해나 입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만약 아담 스미스의 대표적인 두 저술이 정합적이라면, 국부론에서 나오는 경제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도덕감정론에서 그려진 바람직한 도덕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국부론의 이해는 도덕감정론의 인간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도덕감정론국부론의 일종의 논리적인 기초다.

따라서 그들의 개별적 행위가 총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맺는지는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규정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이것은 사회가 개인들의 행위의 무대가 되고, 전체 사회의 경향이란 이런 개인들의 행위의 경향의 총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몇몇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이 연결은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한다. , 개인의 최선의 선택과 사회의 번영은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언제든 그렇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경제학의 통찰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특정 계급에게 경제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을 때(맬서스), 불황일 때(케인즈), 여러 이익집단들로 인해 이해관계가 아주 복잡해질 때(뷰캐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체제 자체가 모순덩어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마르크스)도 있다. 그러므로, 이후 등장한 많은 반대적인 학설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행위가 사회의 번영과 연결되도록 하는 개입의 길을 상시적으로 열어놓은 케인즈의 입장은 많은 부분에서 납득할만하다.

또한 아무리 도덕적인 인간들이라고 하더라도,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그 도덕성이 결코 발휘될 수 없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행동경제학을 포함한 몇몇 심리학적인 실험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행위하는 이유는, 결국 윤리적 덕목들을 지키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어떤 경제행위가 사회에 전반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가 바로 연결되지 않는 또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것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개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국가 또는 법은 개인들에게 도덕성을 직접 강조해야 하는데,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가 도덕률을 부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비도덕적인 개입, 즉 경제적인 요소들에 관한 조정을 통해 개인의 선택과 사회의 번영이 일치될만한 조건을 지속적으로 조성하는 일이 요청된다. 이는 개인의 최선의 선택에 따른 행동은 분명히 어느 정도는 규칙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정책이 이런 바람직한 조건을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를 (역시나 어느 정도는) 가늠해볼 수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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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나마 올리는 현대윤리학연습(2012년 1학기) 발제.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15장 요약>

매킨타이어의 이 글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첫째, 덕에 관한 여러 다른 생각들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덕들이 모두 공유하는 덕의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덕의 본성이라고 부르려고 시도한다. 셋째는 그 덕의 본성을 사회적이고 내면적인 의미의 실천과 관련하여 규정한다. 넷째는 그와 같은 덕에 관한 규정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은 덕의 규정과 관련하여 추가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덧붙인다.

 

차이점

 

덕목에 대한 생각이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그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 제인 오스틴, 그리고 벤자민 프랭클린을 사례로서 들고 있다. 그는 이 다섯 경향들은 각각 아주 다른 덕목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지 시간이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의 차이일 뿐만이 아니라,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존재했던 차이이기도 하다. 호메로스는 어떤 것이 뛰어난 것을 덕으로서 정의한다. 따라서 신체적인 강함(physical strength) 또한 호메로스에게는 덕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과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는 신체적인 강함보다는 정신에 더 많은 비중을 부여했다. 반면 통이 큼(magnanimity, megalopsuchia)과 아낌없음(munificence)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지만, 반대로 기독교의 교리는 통이 큼과 반대되는 겸손(humility)을 칭찬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 관해서 알지도 않았을 믿음, 바람, 사랑같은 덕목들을 강조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 둘은 부자와 노예가 어떤 덕목들을 가지고 있고 덕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관점도 완전히 다르다.

이들을 가까운 시대의 두 사람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은 변하지 않음(constancy)을 모든 덕목의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또한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덕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명예와 이해타산을 생각하여 행해진다고 생각했지만, 오스틴은 그것이 온화함(amiability)의 모상이라고 생각했다. 매킨타이어는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군인의 용기를 진정한 용기의 그림자라고 생각한 것과 유비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얻으려는 욕구(the drive to acquire)를 그 자체로 덕목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기존의 덕목들에 격률을 정해, 그것에 복종하는 것을 덕으로 설명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덕 목록이 단지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첫째, 덕에 관한 각각의 개념은 여러 덕목들을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으로 나누고 질서짓는데, 그 질서가 그가 생각하는 덕 개념이 다른 덕 개념과 어떤 차이를 나타내는지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이 된다. 둘째, 덕과 사회적 질서 사이의 관계가 다른 것이 각각의 덕의 개념이 다른 것에 반영된다. 셋째, 진정한 덕과 그 덕을 따라하거나 그림자에 불과한 덕을 구별하는 것이 덕에 관한 개념마다 매우 다르다. 따라서 역사 전체를 관통하여 덕 개념에 부여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없다는 결론을 쉽게 맺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구체적인 덕목에 대한 사례뿐만이 아니라, 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호메로스에게 덕은 그것을 표현하여 그의 사회적인 역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성질이다. 또한 그 사회적인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나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고, 따라서 가장 중요한 덕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호메로스가 생각하는 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호메로스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각 사회적인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는 제인 오스틴도 호메로스와 비슷하다. 그녀는 여러 덕목들이 사회적 역할에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매킨타이어는 모든 덕목들이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변하지 않음constancy에 대한 주장을 가리키는 듯 하다.) 그녀의 견해가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적 역할보다는 한 종류로서의 인간으로서 해야할 것을 덕이라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좋은 삶을 살아야한다는 목적(telos)이 있는데, 이 목적은 어떤 인간의 성질이 덕목들이 되는지를 결정한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이러한 좋은 삶과 덕목들 사이의 관계는 내면적(internal)인데, 그는 내면적이라는 말을 수단의 성격을 정하지 않고서는 목적이 충분히 규정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덕목들을 실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덕목들 또한, 그 구체적인 목록이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최종적인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점에서 논리적인 구조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다. 무엇이 덕인지 탐구하기 위해서는, 좋은 삶 즉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파악해야하고, 그것에 대한 수단을 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 덕에 관한 벤자민 프랭클린의 정의는 공리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덕에 관한 정의들과 차이가 난다. 덕은 성공, 즉 현세(필라델피아)와 천국에서의 번영(prosperity)을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는 효용성(utility), 즉 유용함(useful)을 덕의 기준으로 삼는다. 매킨타이어의 정의에 따르면 이 관계는 내면적이기보다는 외면적인데, 다시 말해 수단의 성격을 정하지 않고서도 목적이 충분히 규정될 수 있다.

 

공통점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해서, 덕에 관한 이론에은 적어도 사회적 역할,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 성공과 관련되었다고 주장하는 세 가지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단순히 덕이라는 언어를 시대를 초월해 다르게 쓰고, 따라서 그 사회적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다 다르기 때문에 모두 다 다르게 볼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보았던 다섯가지 사례는 제도적인 주도권(institutional hegemony)을 요구하는 것이 공통적이다. 덕에 대한 모든 정의들은, 특정한 제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덕목들이 주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덕에 관한 위와 같은 이론들에서 추론해볼 수 있는 덕에 관한 이론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것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미 정의되고 설명되어 온 방식 안에서 사회적이고 또한 도덕적인 삶의 일정한 특징들에 관한 몇몇 우선적인 생각에 관한 수용을 요구한다는 점이다.(it always requires for its application the acceptance of some prior account of certain features of social and moral life in terms of which it has to be defined and explained.(p.123)) 덕은 이차적인(secondary) 개념이다. 덕에 관한 이론들의 이러한 공통점을 규명하고 덕 개념의 핵심적인 개념규정을 위해서, 그는 적어도 실천(practice), 한 인간의 삶의 서사적 질서(narrative order), 그리고 한 도덕적 전통을 구성하는 것(what constitutes a moral tradition)이라는 세 가지에 대해 설명해야한다고 적고 있다.

그가 지적하는 실천 개념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이미 행해져왔던 특정한 유형이나 전통들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잘 싸우고, 가정을 잘 꾸리며, 조언을 잘하고, 이야기를 잘 하고, 연주를 잘하고, 기하학을 잘하는 것들이 고대의 덕목들이다. 인간이 행하는 여러 실천들은, 이런 덕들이 보여지기 위한 배경(arena)을 제공한다. 그는 실천을 탁월함을 달성하려는 인간의 힘들과, 목적들 그리고 관련된 선들의 인간의 개념규정들이 체계적으로 확장된 결과와 함께, 활동의 저 형식에 적절하고 또한 부분적으로 확정적인 탁월함의 저 표준들을 달성하려 노력하는 것의 과정 안에서 활동의 저 형식에 내적인 선들이 현실화되는 것을 통한 사회적으로 나타난 협동적인 인간의 활동의 모든 통일되고 복합적인 형식(any coherent and complex form of socially established cooperative human activity through which goods internal to that form of activity are realized in the course of trying to achieve those standards fo excellence which are appropriate to, and partially definitive of, that form of activity, with the result that human powers to achieve excellence, and human conceptions of the end and goods involved, are systematically extended. p.124)’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설명이 매우 복잡하여, 그는 사례를 들어서 이것을 설명한다. 7살 아이에게 체스를 가르치려 할 경우, 우리는 사탕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아이에게 체스를 가르칠 수 있다. 이 아이는 사탕을 먹기 위해 체스를 두겠지만, 우리는 아이가 먼훗날 체스 자체에서 오는 재미를 느끼길 바란다. 이 경우 두 가지 선함이 있는데, 하나는 외면적인 선함 즉 사탕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인 선함, 즉 체스의 재미다. 외면적인 선함은 다른 활동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내면적인 선함은 체스를 두는 행위에서만 구할 수 있다. 또한 이 내면적인 선함은 체스라는 복합적인 배경 아래에서만 그 의미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내면적인 선함을 규정하는 실천에 참여하고 그 실천이 이미 규정한 내면적인 선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또한 내면적인 선함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는 초상화의 역사의 사례를 들어서 이것을 설명한다. 하나는 그 실천 속에서 만들어낸 생산품의 탁월성(the excellence of the products), 즉 뛰어난 초상화이다. 둘째는 생산품의 탁월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특정한 종류의 선(the good of a certain kind of life)이다. 각각의 실천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실천의 역사를 통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물론 이것이 비판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수용하지 않는 활동은 실천이라는 의미를 획득할 수가 없다.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기준에 들어맞는 활동을 해야만한다. 그러므로 이런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했을 경우, 이것은 단순히 나의 선함일 뿐만이 아니라 그 실천에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 즉 공동체에 대해 선하다.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한다는 것은 생산품의 탁월성을 끌어올렸다거나, 또는 탁월함의 기준을 수정하거나 혁신하는 창조적인 실천을 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따라서 모든 실천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높아진 탁월함을 성취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의 개념에 비추어 덕은 다시 정의된다. 덕은 실천에 내적인 저런 선들을 성취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는 경향이 있는 것의 소유와 훈련 또는 어떤 이러한 선들을 성취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효과적으로 막는 결핍이라는 한 습득된 인간의 특성(A virtue is an acquired human quality the possession and exercise of which tends to enable us to achieve those goods which are internal to practices and the lack of which effectively prevents us from achieving any such goods. p.128)’이다.

 

덕과 실천

 

이와 같은 정의로부터 그가 논증하려는 것은 핵심적인 덕목들(key virtues)은 모든 실천에 내재한 선들을 성취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핵심적인 덕목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없다면 어떤 실천에서도 내면적인 선을 성취할 수 없어야 한다. 그는 이것을 정의, 용기, 정직함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덕목들의 특징 비슷한 유형의 실천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점이다.

정직함은 그 덕목을 행하는 대상과 행하지 않는 대상 사이의 차이를 낳는다. 그 차이는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서로를 향한 신의를 깨뜨린다. 여기에서 정의는 동일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해, 정의는 통일적이고 비인격적인 기준들에 따라 잘한 일이나 결과에 관한 존중 안에서 다른 이들을 다루는 것(p.129)’이다. 이것을 어길 경우에는, 마찬가지로 그 덕목을 행하는 대상과 행하지 않는 대상 사이에 차이가 생긴다. 용기는 그 자신을 손해나 위험에 내맡기는 능력(p.129)’인데, 이것은 실천과 관계맺는 개인들의 공동체 자체와 관련된 일을 위해서, 즉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공동체의 일을 행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능력이다.

만약 이런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사회에는 정의, 용기, 정직함에 관한 규칙들이 있어야한다. 이런 덕목들은 모든 실천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각각의 사회는 각각의 덕목들에 대해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덕들이 가치평가되지 않는 사회는 번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천은 많은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일종의 공동작업인데, 탁월성에 대한 평가는 공정해야(fairness)하고, 그 평가가 공정하기 위해선 정직함이 필요하며, 평가기준이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공정함과 정직함이 요구되고, 또한 탁월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험에 내맡길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실천과 덕의 관계를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 실천에 대비되는 두 가지 개념으로 기술적인 숙련과 제도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탁월함을 성취하는 데에는 기술적인 숙련이 필수적이며, 기술적인 숙련은 그 기술을 더욱 잘 발휘하는 것이라는 통일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이 실천과 그 실천에 내면적인 선함인 것은 아니다. 내면적인 선함은 통일적이지 않고 시대마다 바뀌어왔으며, 기술적인 실천은 이 선함을 변형시키거나 풍부하게 하는 데 더 큰 의의가 있고, 오히려 이것이 실천에 본질적이. 그러므로 실천에 들어서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져온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실천을 위해서는 이런 역사를 배워야만 한다.

다른 하나인 제도는 외면적인 선함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실천과는 다르다. 제도가 관계를 맺는 대상은 물질적인 선, 권력, 지위와 같은 것들이다. 물론 특정한 실천을 보존하려면 그것을 제도화해야한다. 하지만 제도는 내면적인 선을 성취하려는 실천을 좌절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실천이 성취하는 공공선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제도가 실천으로서의 성격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대비되는 의미로서의 실천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의미의 실천은 정치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실천과 많이 다르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제도는 개인에게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매킨타이어의 관점에서 제도는 실천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다시 말해, 실천(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은 제도적으로 권장되거나 요구된다. 그 이유는 다름아니라 제도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양식의 실천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실천, 즉 내면적인 선에 대한 가치평가가 없는 사회는 결국 홉스가 가정하는 형태로 이행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덕은 외면적인 선함과 내면적인 선함에 대해서 각각 다른 관계를 맺는다. 덕은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하는 데 필수적이다. 반면 외면적인 선함을 성취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하기

 

여기까지 논의를 마치고 나서,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제시한 정의들을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하면서 차이점과 공통점을 말한다. 차이점은 두 가지다. 첫째, 덕들에 관해서는 목적론적이지만 그 기반이 목적론적 자연관 또는 형이상학은 아니라는 것. 둘째, 실천이 다양하고 그에 따라 내재적인 선함들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 있으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파악한 것과는 달리, 개인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공통점은 세 가지다. 첫째, 자발성, 지적인 덕목들과 성격의 덕목들 사이의 구별, 자연적인 능력들과 정념들 모두에 관한 관계와 실천적인 이성 사용의 구조 등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요구하는 구별과 개념에 관한 적절한 마무리(cogent elaboration)가 똑같이 요청된다는 점이다.

둘째, 즐거움(pleasure)과 즐김(enjoyment)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편의를 제공해줄 수 있다. 반면에 공리주의적이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활동의 즐김과 성취의 즐김은 행위자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들은 성공적인 활동, 즉 탁월함을 성취하는 실천 속에서, 성취된 활동과 즐긴 활동이 하나되고 같아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활동과 무관한 선도 있을 수 있는데, 만약 그런 선들을 성취하는 활동이 있다면 그것은 덕목이라든가 실천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덕은 결과를 고려하는 것과 상관없이, 실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적으로 선한 외면적인 선함은, 내재적인 선함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덕에 의해 방해받거나 거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불가공약적(not commensurable)이다.

셋째, 가치평가와 서술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말하자면, ‘덕을 행했다는 것은 서술일뿐만 아니라 가치평가이기도 하다. 다른 행위가 아닌 바로 그 덕을 행한 이유는 인과적으로 설명되는 대상, 즉 서술의 대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재적인 선을 성취하려 노력한 행위라는 점에서 가치평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그 실천이 악의(evil) 실천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악의 실천의 내재적인 선함은 무엇인가? 그는 이런 질문에는 두 가지 방식으로 답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적이고 내재적인 선이 있는 몇몇 활동들 가운데에는 단순히 악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나, 이런 것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과연 그의 실천 개념이 이러한 악의 실천들을 악이라고 평가할만한 기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덕들이 실천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 어떤 실천도 비판받을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의, 용기와 같은 덕은 악의 실천들을 비판하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덕은 단순히 실천 개념과 관계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덕은 더 넓은 범위의 인간의 삶과도 관계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실천 개념은 인간의 삶의 부분이거나 또는 특정한 유형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좁은 맥락을 안고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방식, 즉 인간의 좋은 삶에 대한 설명은 이보다 더 큰 맥락에서 설명된다. 그의 설명은 전체로서 파악된(viewed as a whole) 삶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삼는다. 덕이 없는 사람이란, 특정한 실천들에서 실패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실천이 요구하는 덕과 다른 실천이 요구하는 덕은 얼마든지 모순적일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실천에는 뛰어난 사람이 다른 실천은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시대를 앞선 그림을 그려 생계가 어려워진 화가라든가, 뛰어난 클래식 음악을 부르주아지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공산주의 혁명가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또는 여러 실천들의 기준들 사이를 아무런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오고 갈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실천에 연관하여 분석한 덕 개념이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설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답변이다. 다양한 실천들은 모두가 똑같은 지위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실천들 사이에도 질서와 위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양한 실천들은, 좋은 삶이라는 더 큰 개념 아래서 조직되고 구조화된다. 예를 들어, 상이한 실천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평가하여 정의롭게 자원을 분배할 때에는 이 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한다. 그렇게 해서 받을 자격이 있는 만큼만 받아갔을 때에야 공정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덕인 참을성(patience)에도 이것이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기다릴 수 있거나 기다려야하는 것들은 많지만, 그 모든 기다림에 동일한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전체적인 삶에 대한 목적 없이는 각 실천들 사이의 분열을 막을 수 없고, 이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하는가에 관한 맥락이 구성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실천들과 그에 속한 덕들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행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한 가지 덕이 있을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생각과 함께 강화된다. 그러나 이것은 증명된 것이 아니기에, 질문되어야 한다. , ‘각 인간의 삶에 관해 한 단일체로서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는 아마도 각각의 삶을 그것의 좋음을 가지는 것으로서 구체화하려고 시도하는지 그리고 다시 말해 다른 어떤 것보다는 오히려 단일체의 한 종류로 그 또는 그녀의 삶에 관해 만드는 것을 개인이 가능하게 하는 것 안에서 그들의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서 우리가 덕들을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정당한가?(is it reationally justifiable to conceive of each human life as a unity, so that we may rty to sepcify each such life as having its good and so that we may understand the virtues as having their function in enabling an individual to make of his or her life one kind of unity rather than another?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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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 - 마이클 슬롯

<뒤늦게나마 올리는 현대윤리학연습(2012년 1학기) 발제. Michael Slote, Agent-based Virtue Ethics(in Roger Crisp & Michael Slote, Virtue Ethics) 요약.>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

 

마이클 슬롯은 이 논문에서 행위자에 관한 평가에서 덕윤리학이 새로 제시할 수 있는 방향에 관해 서술하고자 한다. 그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라는 방식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그의 생각을 따르고 있는 것만은 아니고, 또한 그 동안에 덕윤리학에 관한 논의가 놓쳐왔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포함해 덕윤리학을 다른 방향에서 정초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려 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윤리학적 접근방법이 실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이 가능한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논문은 마무리된다.

먼저 행위자에 기반을 두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덕있는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덕있다고 평가받는 것은 그 사람이 덕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행위가 사람들이 덕있다고 평가하는 행위와 우연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단순히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행위가 덕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덕있는 행위들이다. 또한 그 사람을 덕있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해온 행위들을 종합해보고 그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고려이다. 이 경우는 행위자 초점접근방식이다. 반면에 행위자 기반접근방식은 행위자의 내면의 상태에 더욱 주목해서, 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동기들 그리고 그 사람의 내면적인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행위를 평가한다. 그 사람이 덕있는 사람인 이유, 또는 덕있는 행위를 한 이유는 그의 내면이 덕있는 상태이고 또 그 상태에서 나온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영혼을 먼저 평가한다면 그것은 행위자 기반 방식인데, 반면에 영혼의 단계를 먼저 평가한다면 그것은 행위자 초점 방식이다.

행위자에 기반한다는 것의 의미가 행위자의 동기에 그 도덕성과 윤리적인 평가를 집중시킨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동기에 기반해 윤리적 평가를 하는 이론에 관한 반대들은 행위자 기반 방식에 반대하는 것도 될 것이다. 슬롯은 사람들을 해칠 마음으로 재판관이 된 사람이라는 시즈윅의 사례를 든다. 동기에 의해서 행위의 도덕성을 평가한다면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경우, 그 재판관이 재판행위를 하는 이유가가 옳지 않다는 이유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도덕적이고 법적인 의무를 등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들어 행위자에 기반함에 반박하는 것은, 이 사례에서 보자면, 재판을 하지 않을 더 강한 동기를 제공해주지 못하므로 행위에 아무런 변화를 줄 수가 없다.

이것보다 더 강한 반대들도 있을 수 있다. 만약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평가를 내면의 상태의 유형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면, 옳은 내면적인 상태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어떤 도덕적 요청들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 즉 일종의 주관주의적인 윤리이론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자 기반의 접근방식에서 이런 결론이 필연적으로 이끌려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 슬롯의 주장이다. 존경받을만한 내적인 상태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그 소유자가 자기가 할 행위를 쉽게 고를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 그 사람은 그 내적인 상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잘 알고 있지 않다면, 그런 내적인 상태를 외부에 표현하는데 번번히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자비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행위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표현하는데도 실패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도 덜 존경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런 내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아무 행위나 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행위를 우선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 슬롯의 결론이다.

그리고 윤리적인 평가에 관해서 그 방향이 일방적이라는 의미, 즉 윤리적인 행위가 언제나 행위자 내부에서 세계로 나아가기만 한다는 의미에서 행위자 기반 방식이 자기폐쇄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필연적인 결론은 아니다. 내적인 상태를 갖추고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 또는 실제로 그런 상태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해야하는지 또는 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를 경험적으로 아주 잘 알고 있다. 또한 반대로 이런 적절한 사실들에 관해 아는 것은 적절한 내적인 상태를 갖추게 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슬롯은 이런 행위자 기반 방식을 다시 차가운 방식과 따뜻한 방식으로 나눈다. 차가운 행위자 기반 방식은 내적인 강함으로서 개인의 행위의 도덕성과 윤리적 성격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내적인 강함은 덕있는 모든 행위를 위한 튼튼한 기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초로부터 덕있는 행위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더 자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반면 동정심이나 자비로움과 같은 것들을 덕있는 행위의 기초로서 간주하는 것은 따뜻한 방식이다. 이것은 행위자 기반 방식이 고려하는 내면적인 상태로서의 도덕성이라는 목표와 더 잘 부합한다.

 

도덕성의 종류들 내적인 강함

 

도덕성을 내적인 강함으로 정의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는 플라톤이다. 이것은 다른 어떤 근거도 요구하지 않고 그 스스로 도덕성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근거라는 사실이 직관적이다. 하지만 플라톤이 아닌 다른 사람과 다른 시대에도 이것이 모든 도덕적 행위의 기초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 슬롯에 따르면 플라톤은 이것에 관해 적절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내적인 강함을 그는 현대적인 의미의 자기신뢰라는 말로 바꾸어 쓰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 도덕적 행위들을 이끌어내는지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자기 신뢰는 어른들의 상태와 비슷한 무엇이다. 어른들은 자기충족적인 세계관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고, 여러 상황들에 관해서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표현한다. 반면에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의 내적인 상태를 질투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어떻게 행위하고 또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배운다. 슬롯은 이것을 기생이라고 표현한다. 자기신뢰가 없는 사람은, 가족을 벗어나 독립할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상태에 비유된다. 자기신뢰라는 내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존경받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행위 때문에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적인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비난받는다. 내적인 강함은 어떻게 도덕적인 행위와 연결되는가? 슬롯은 그들은 스스로를 돕고, 그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 또한 도우려는 경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적인 강함과 덕있는 행위의 연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용기있는 사람은 불쾌한 사실들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결과들이 참담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외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사실을 직면하는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덕이 되는 이유는 그것을 덕으로 만들어주는 다른 것이 있지 않고, 우리가 그런 상태를 가지기를 갈망한다는 가장 직관적인 상황들에 기초해있다. 자기기만과 반대되는 자기 신뢰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덕있는 행위의 기초가 된다. 같은 방식으로 자립하려는 노력과 그렇게 하려는 내적인 상태는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존경받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성공적이지는 않더라도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장애인들을 우리는 존경한다. 우리 또한 이런 자기신뢰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다면, 아마도 그 장애인과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기신뢰는 우리의 도덕적 의무들과도 연결되어있다. 약속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 생각해보자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슬롯이 보기에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행위를 통해 기생하는 것이다. 또한 절제와 근면 같은 덕목들은, 자신의 환경과 처지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텐데 이것 또한 자기신뢰와 기생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자기신뢰와 이타적인 행위 사이의 연관은 니체에 의해서 잘 드러난다. 이타적 행위는 자기충족성을 달성하는 한 이상적인 방식이 될 수도 있다. , 과다하게 충족되었을 때는 자신의 고귀함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는 자기신뢰 자체는 그다지 이기주의적이지 않다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슬롯은 이 부분까지 지면이 부족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고 있다.) 어쨌든 내적인 강함이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 덕목들은 용기, 자기신뢰, 절제, 관대함 등이다. 슬롯은 여기에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할 덕목은 자신의 고유한 좋은 목적들과 의도들을 오랜 시간동안 지켜내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도덕성의 종류들 보편적인 자비로움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 도덕성을 정의한 역사적인 사례는 제임스 마티뉴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동기에는 질서가 있고, 도덕적 결정들은 서로 다른 두 동기 사이의 갈등 속에서 생겨난다. 만약 그 결정이 더 상위의 동기에 의해서 행해졌다면 그것은 옳고, 그 반대의 경우엔 나쁘다. 그의 동기들 가운데 동정심은 신을 위한 숭배 다음으로 고차원적인 동기이다. 시즈윅의 경우 마티뉴의 이러한 입장이 특정한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낮은 동기에 의해서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 좋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비판하였으며, 그의 이론을 보정하기 위해 가장 고차원적인 동기들로서 정의, 신중함, 보편적인 자비로움 같은 것들을 설정한다. 그렇다면 이제 행위들은 고차원적인 동기들에 따르는 행위들을 참고했을 때 그 옳고 그름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시즈윅은, 이 고차원적인 동기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한 뒤, 단순한 공리주의에서 끝나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행위자에 기반한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자료가 되는데, 아마도 행위의 동기의 배열들에 관해 심각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 같다.)

슬롯은 자신이 도울 수 있고 또 그 도움이 필요한 친구가 있지만, 또한 그 대신 수영을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면 제3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사람의 사례를 들고 있다. 만약 수영을 하러 간다면, 나와 제3자가 얻을 수 있는 행복의 크기가 더 크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수영하러 가는 것을 덕있는 행위라고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부합하지 않는데, 그것은 단순히 결과에 대한 고려뿐만이 아니라 그 동기 또한 고려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가 즐겁기 위해서 수영을 하러 가는 것은 친구를 돕는 것보다는 덜 도덕적인 행위이다.

공리주의와 자비로움을 비교하는 또 하나의 사례는, 자신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병원을 지을 돈을 기부하는 사람이다. 공리주의자들과 결과주의자들은 이 행위를 선하다고 할텐데, 그것은 보편적인 자비로움이 산출할만한 결과와 동일한 일을 하려는 동기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러한 동기들과 도덕적으로 진지하게 존경받을만한 동기들을 구별하고, 또한 그렇게 할 줄 안다. 그러나 결과주의는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에 관해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공리주의와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기반한 도덕성은 계속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노출하는데, 보편적인 자비로움이라는 동기에서 출발한 행위들이 같거나 비슷한 결과들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그 행위에서 동기들을 어떤 지위로 고려하는지에 따라서는 그 둘이 다르다.

슬롯은 행위자 기반 방식을 공리주의적인 관점을 통해 조금 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공리주의는 전체로서의 인류 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관한 개념을 제공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그들의 행위가 보편적인 자비로움에서 나올만한 행위에 충분히 가깝다면(그리고 실제로 그것에 가까운 동기로부터 나온 행위라면) 옳다. 이 둘은 서로 교차적으로 적용되는데, 어떤 사람이 실제로 그런 동기들과 그런 결과들을 의도하지 않고 행위한다고 하더라도(북아일랜드의 해방을 위해 운동하는 사람, 소비자 운동을 하는 사람), 그런 것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충분히 그런 동기에 의해 행위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인간의 웰빙에 관해 너무 좁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의무주의자들이 고려하는 몇몇 측면들에 관해 무지하다는 것도 단점이다. 이런 면에서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공리주의적 요소와 결합하여, 동기를 중요시하며 동시에 결과들을 고려함으로써 많은 비판과 기존의 이론들의 한계에 대답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슬롯은 주장한다. 또한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는 (차가운 행위자 기반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언급했듯이) 직관적이라는 이점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들과 더욱 부합한다.

 

도덕성의 종류들 돌봄

 

돌봄은 보편적인 자비로움과 반대되어서 부분적이고 편파적인 또는 자기중심적인 자비로움으로 정의된다. 어떤 특정한 존재를 위한 자비로움이 덕있는 행위 전체의 근거가 된다는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도 보이긴 하지만, 그는 신에게 의존했으므로 우리는 이제 순수하게 세속적인 방향에서 이것을 구조화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 관한 저작인 다른 목소리로에서 캐롤 길리건은 남성들이 도덕성을 권리, 정의, 자율성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반면 여성들은 돌봄, 책임, 상호관계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넬 노딩스는 여성적으로 고유한 도덕성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돌봄 개념을 언급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이론들을 행위자에 기반한 방식과 일관되게 만들기 위해서는 보충적인 논증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노딩스의 윤리학을 행위자에 기반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녀는 돌봄을 표현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장려되어야 하고, 또한 그것이 이 세계의 도덕적 행위들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명령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동기가 아니라 명령에 기반했으므로 행위자에 기반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슬롯이 보기에 노딩스의 이러한 관점들은 은연중에 행위자 기반 방식을 함축한다. 만약 구호활동을 위해 어떤 사람이 사람들을 모은다고 하자(돌봄행위를 장려하는 좋은 사례인 듯 하다). 그는 그렇게 장려하는 것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일반적으로 더 좋은 것을 제시하기 위한 행위를 하고 있다.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직접 돌봄을 하라고 권하는 것보다도 더 배가 되는 효과를 가지고, 이것은 그 활동을 하려고 모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서 돌봄과 그것을 장려하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이것들이 도덕적인 탁월함의 한 예가 되기 때문에, 이런 행위들은 행위자 기반 방식에 의해서 조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덕이론의 생산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무관한 제3자들에 관해 좀 더 말해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돌봄으로서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인 것을 고려하는 그 어떤 도덕이론보다도 자신들이 낫다고 이야기하며, 또한 실제로 그런 행위들이 존경받을만하고 선호할만하게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왜 보편적인 이론이 더 나은지 명확하게 말할 수도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을 적용하기

 

그러나, 행위자에 기반한 덕 윤리학에 관한 우리의 두 좋은 형식들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과 돌봄으로서의 도덕성 은 이제 반드시 언급해야만하는 한 더한 어려움과 마주한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어찌해야할지 모를 도덕적 문제와 함께 마주되었을 때, 그것은 어쨌든 부적절해보이고 또한 심지어는 사람들과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보다는 오히려 그의 고유한 동기들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 허용하고 또한 심지어 지시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보편적인 또는 특수주의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우리에게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옳고, 또한 받아들일만한지 아닌지, 말하자면, 늙어서 죽어가는 부모를 살린 상태로 두려는 과감한 수단들의 사용에 반대하는 것은 이 당사자의 동기들에 달려있는지, 또한 이것이 죽어가거나 또는 고통받는 부모를 위한 과감한 수단을 옹호할지 또는 반대할지를 알지 못하는 어떤 한 사람을 위해서 전체적으로 도움이 될만한가? 동기들 안을 살펴보는 것은 아마도 저 사람의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러므로, 우리가 대부분 도덕적인 지도가 필요한 곳에서, 그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도덕적 어려움들을 향한 한 답을 찾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처럼 보인다.

덕 윤리학의 몇몇 방어자들은 덕 윤리학이 행위자에 기반하든 또는 다른 것이든 실천적인 도덕적 주제들에 응용될 수 없다는 것을 승낙하길 바라고 있지만, 그러나 덜하지 않게 덕 윤리학이 도덕성에 관한 올바른 이론이나 관점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이 응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덕 윤리학을 위해서 더 좋으며, 또한 나는 자비로움과 같은 한 내적인 상태가 이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또한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모으는 것과 함께 그 자체를 고려하는 방식에 관해 앞에서 이야기된 것의 사용을 더 나아가게 만드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이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만약 한 사람이, 말하자면 그것의 행위자의 동기들의 자비로움을 향한 참고에 의해서 행위나 결정의 한 특정한 과정을 도덕적으로 판단한다면, 한 사람은 그 스스로 이 세계 안의 사람들에 관한 사실을 참고하고 고려하는 한 내적인 요소들을 향한 관계 안에서 곧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내면적인 응시는 효과적으로 세계를 향해 되돌아가고’, 또한 마치 우리가 한 순간 안에서 더욱 자세한 것 안을 보게 되는 것처럼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무엇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일만하거나 또는 하는 데 가장 좋은가를 결정하려는 한 사람의 시도 안인 생각 속으로 집어넣는 것을 한 사람에게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되돌아감은 도덕적 노력에 관해 불필요하게 이중적이거나 또는 필요없는 것인데, 만약 우리가 저런 동기가 기본적으로 적어도 모든 행위의 도덕적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렇다. 만약 이 세계에서 그들의 효과에 의해서 단순하게 행위들이나 우리 스스로나 다른 이들을 우리가 판단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도덕적으로 존경하고 또한 도덕적으로 좋고 칭찬받을만한 행위들로부터 우연히 또는 아이러니컬하게 유용한 행위들을(또는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끝내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그의 늙은 어머니가 병원에 갑자기 실려갔다는 것을 듣고는 어머니와 같이 있으려고 먼 도시로부터 날아온 어떤 한 사람을 고려해보자. 몇몇 또는 다른 형식 안에서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주어지고 또한 그가 어머니가 살아가면서 관계맺은 유일한 사람이라면, 그는 그가 병원에 갈 때 그의 부모와 함께 또는 부모를 위해서 도덕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주제를 어떻게 풀어야만 하는가? 예를 들면, 그는 그의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과감한 수단을 옹호해야 하는가? 물론 자비로움의 (한 또는 다른 형식) 으로서의 도덕성은 이 질문을 향한 답변을 그에게 주지는 않지만, 그러나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무지와 그의 어머니의 특수한 조건과 전망들에 관해서는, 이 지점에서 저 질문을 향한 답을 내는 대부분의 도덕 이론들에는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그가 병원에 갈 때 그가 도덕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을 향한 답을 그에게 내준다. 그것은, 미래의 고통과 무능력함을 고려하는 한 확실하게 삶의 질과 지속성을 고려하는 것, 즉 그의 어머니의 조건과 전망들에 관해 더 많이 도덕적으로 알아내야만(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쁜) 한다고 그녀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실제 동기들을 향한 참고에 의해서 이것을 그에게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만약 그가 더 알아보지 않고 할 것을 결정한다거나 또는 현재의 상대적인 무지에 기초해서만 그의 어머니에 관해 옹호할 것을 결정한다면, 그는 자비로움과는 동떨어진 (그의 어머니에게) 한 냉담함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전원을 끊을 것을 결정하거나 또는 그의 어머니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아는 것 없이 과감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무심함과 냉담함을 보여주고, 또한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라는 이러한 기초 위에서는 그가 어떤 결정이라도 내리기 전에 더 많은 것을 찾아야만 한다는 도덕적 판단을 만들어줄 수 있다.(내적인 강함으로서의 도덕성이 비슷한 결론을 낳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면, 그 사실들이 일어나있으며 또한 그들이 실제로 명확하며 또한 그녀의 어머니에게 끔찍한 아픔과 쇠약해질 전망들을 가리킨다고 해보면, 그 사람의 결정은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으로부터 다시 한 번 그럴듯하게 이끌어질만하다. 이 지점에서, 그것은 과감한 수단을 주장하는 것은 그의 냉담함이 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자비로움이 되며 또한 적절한 도덕적 결론은 그러므로 행위자에 기반한 고려들에 의해서 도달될 수 있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스스로 이런 방식 안에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어떤 한 사람은 말할지 모른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아픔 또는 즐거운 미래의 존재를 가지는지 아닌지에 관해 고민하고, 예를 들면, 만약 그가 어머니의 존재를 연장할 것을 알았다면 그가 스스로 냉담하게 할지 안할지에 관해서는 아니다. 이것은 납득할만한가? 그는 만약 어머니가 살아간다면 거의 겪을 미래의 고통들에 관한 단순한 참고에 의해서 또는 말하자면 더욱 복잡하고 풍부한 것에 의해서 둘 가운데 하나에 의해 과감한 수단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결정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가: 그것은 주어진 그녀의 전망들 속에서 어머니를 산 채로 두려고 시도하는 나의 냉담함이 되는가? 물론, 도덕적인 문제풀이의 한 표현으로서의 후자에 관해서 유별난 것도, 운이 나쁜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역사적인 사실의 한 요소로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옹호하면서 만들어진 논증들에 관해 생각해보자. 부통령 앨 고어와 하원의 야당 원내대표인 로버트 미첼은 그것이 이 세계와 아메리카의 미래에 비굴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태도를 채용하게 될 것을 거부하는 토대들 위에서 이 협정을 방어했다. 그들은 결과들에 관해 더욱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어왔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 주제를 제출하는 방식에 관해 비합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또한 그래서 나는 내적인 동기들의 외적으로 보이는 성격이 주어지면,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은 더 일반적인 공리주의와 결과주의와 같은 이런 실천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도덕적 이론들을 향해 저런 유효함에서 어깨를 나란히하는 도덕적 주제들에 관한 해법을 위한 재료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맺고 싶다.

어려운 또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실천적인 도덕적 주제들을 향한 대답 안에서 우리의 평범한 생각은 동기들 또는 결과들 또는 둘 다에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주의는 궁극적으로는 결과들에 그리고 단지 간접적이고 유용한 접근의 한 방법으로서만 공평한 자비로움같은 동기들에 관한 고려에 도움을 청하는 것에 의해서 이런 주제들에 답을 낸다. 자비로움으로서의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은 궁극적으로는 동기들에,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결과들을 취하는 것에 도움을 청하는 것에 의해 반대의 유형 안에서 문제에 답을 내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이런 동기들(과 함께인 사람들)에 의해 고려되고 또한 이런 동기들을 향한 답변 안에서 탐사된다. 각각의 접근은 많은 도덕적 어려움들 또는 문제들에 관한 경우에 따른 답을 허락하고, 또한 그래서, 응용 윤리학의 전체 문제를 향한 고려와 함께, 어떤 접근법도 이로움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또한 실천적인 도덕적 문제들에 부적절하게 된다거나 또는 그들의 해법을 달성하기에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때문에 행위자에 기반함을 비판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확실히,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우리의 도덕적 어려움들에 답을 낼 수 없게 되는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만약 그의 어머니에 관한 사실들이 배워지지 않았거나 또는 완전히 복잡해지게 된다면,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오히려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에 가치가 있는 어떤 결과주의도 이런 한 경우들 안에서는 텅 빈 것으로 다가오며, 또한 그것은 저런 관점들의 강함이지만, 특수주의적인 또는 보편주의적인 형식이든 자비로움으로서의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도 그에 못지 않고, 이런 관점들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 또는 합리적인 힘들을 벗어나는 경우들 안의 어려운 도덕적 질문들을 향한 답변을 알 것이라고 추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할지와 무엇을 느낄지를 아는 것을 언제나 너무 쉽게 만드는 어떤 윤리이론도 그걸 확장해봤을 때 결함이 있거나 심지어는 쓸모없게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도덕적 현상의 배배 꼬인 복잡성에 관한 우리의 멀쩡한 감각의 부정확성 때문이다.

덕윤리학의 부활 이래로, 이 주제에 흥미로운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또는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생각들에 관해 주로 초점을 맞춰왔다. 나는 도덕성에서 덕으로(덕의 부활)안에서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생각들을 스스로 방어해왔지만, 그러나 우리는 행위자에 기반한 덕 윤리학의 특정한 형식들 또한 진정한 약속과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보았다. 덕윤리학이 그것의 세력을 확장하는 기간 안에서,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혼자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요법들을 필요로 한다.

 

 

덧댐.마이클 슬롯의 책 하나가 이미 번역이 되어있다. 제목은 『덕의 부활』이다. 행위자기반의 덕윤리학이라는 개념과, 다른 윤리학적 입장과 비교해 이 입장이 어떤 부분에서 더 나은지에 관한 설명이 주를 이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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