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연습 발제>

 

지식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개인적인 의식의 사적인 자료들보다는 공적인 세계에서 시작된다는 것으로부터 무엇이 결과로서 일어나게 되는가?

 

 

  데카르트가 ‘명석하고 판명한’ 것을 지식이 갖춰야 할 조건으로 제시한 이후, 인식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표상이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 세계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생겼는지는 알기 힘들다.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감각이 여러 조건에 의해서 올바르지 않은 정보를 전달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 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진술은 정당화하기 힘들다. 그러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에게 ‘명석하고 판명하게’ 보인다. 마음은 외부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나와 언제나 함께하는 것의 특정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게 보인다’ 라는 진술은 정당화하기가 쉽고, 마음에 떠오르는 표상은 지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인식론의 역사 전체를 걸쳐서 드러났듯이, 표상을 지식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우리가 지식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의 대상에 관한 명제가 아니다. 표상은 외부 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그렇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근대 인식론에 의해 생겨난 이러한 틈은 위와 같은 질문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마음의 존재론적 지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마음이 몸으로 환원된다고 생각하거나 마음의 존재가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티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마음과 몸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여러 입장을 검토하면서, 표상이 지식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특정한 시기에 등장한 특정한 설명의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른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마음과 관련한 표현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실천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논증한다. 이런 표현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론적, 실천적으로 일관된 설명의 체계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마음과 관련된 표현들과 관련한 또 다른 이론적인 문제(예를 들어 인식론적 틈 같은 것)에 부딪히지 않을 뿐이다.

 

  또한 그는 오히려 마음을 동원해서 우리의 지식과 실천을 설명하려 할 때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도대체 ‘표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더욱 복잡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인지하는 과정에 놓여있다. 로티는 이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은 다양하고, 그 방식들은 각각이 사용하는 단어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이론들 자체를 상호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방식을 다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단 마음 개념을 동원해 이 과정을 설명하는 데 친숙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철학적인 문제가 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방식이 발견되면, 마음을 이용하는 방식 대신에 그 방식을 차용한다. 로티는 사실 마음 개념을 동원한 설명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의 주변을 둘러싼 다른 설명 방식에 비해 철학적인 문제가 덜 발생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렇다면 마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여러 직관적인 현상들, 즉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거나, 직접적으로 드러난다거나 확실하다거나 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로티는 이에 대해 제한된 몇 가지 방식을 자주 사용해서 생겨난 친숙함의 다른 표현이라고 답한다. 즉, 데카르트가 제시한 ‘명석-판명’한 표상을 통해 생겨난 지식이란 단지 자주 접했기 때문에 ‘명석-판명’하지 않은 다른 표상에 비해서 좀 더 자신과 가깝다고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로티의 입장에서 지식을 정의하는 것은, 인식주체를 둘러싼 인식적 환경이 어떠한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그 환경이 인식주체에게 어떤 것을 얼마만큼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무엇이 지식이 되는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인식적 환경이 지식으로 제공해주는 것이 어떤 것일지는, 그 환경 속에서 특정한 인식주체보다 이전에 살아왔던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지식으로 인정했느냐에 의존적이다.

 

  그러므로 그의 논증은 ‘지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철학 특히 인식론이 답해야 할 질문이 아니라 (로티의 표현에 따르면) 지식사회학이나 과학사 연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들 학문의 연구 대상이 바로 특정한 시공간에서 어떤 사람들이 지식으로 간주해던 것의 내용이나 특징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공간을 넘어서 모든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지식의 조건을 탐색하는 분야인 인식론의 의미도 퇴색된다. 지식사회학이나 과학사 연구의 성과들을 조망해보면, 그런 초월적 조건이 과연 있을지 의문을 일으키는 너무나도 다른 지식의 목록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은 일반적으로 지식으로 간주되는 믿음들의 객관성을 떨어뜨리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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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연습 발제>

 

 

방법론적 회의주의와 문제적 회의주의를 구별하는 것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방법론적 회의주의와 문제적 회의주의는 각각 의도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방법론적 회의주의는 지식을 찾기 위해 어떤 종류의 믿음을 지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과정이다. 모든 믿음은 지식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으며 다른 것에 의존적이지 않은 믿음 즉 절대적인 지식이 될 수 있는 믿음을 찾기 위해서, 모든 믿음들 가운데서 불확실하거나 의심해 볼 만 하거나 다른 것에 의존적인 믿음, 즉 단지 믿음에 불과하거나 상대적인 지식을 절대적인 지식의 후보들로부터 하나씩 배제해 나간다. 이 과정을 아주 철저하게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배제되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절대적인 지식의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방법론적 회의주의는 일반적으로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자의 주장으로 알려져있는 ‘어떤 믿음도 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어떤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방법론적 회의주의의 특징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데카르트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명백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성찰』의 요약에서 “전반적인 의심의 유용성은 단번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모든 선입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고, (중략) 우리가 마침내 참된 것으로 발견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해 준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이 책에서 착각, 꿈, 전능한 악마의 가설을 제시하여, 왜 어떤 믿음은 지식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에 관해 설명한다. 물론 그는 실제로 회의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에, 착각, 꿈, 전능한 악마의 가설이 왜 가설에 불과한지, 그리고 우리가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대개 그렇게 명백하게 드러난 대로 외부에 실재하며 그러므로 그 믿음은 지식이라는 것 또한 논증한다. 이 논증이 믿을만한 것인지와는 별개로, 그의 방식은 기존의 회의주의적 논증들을 차용해 반회의주의적 결론에 이르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의 전형인 것은 확실하다.

 

  회의주의를 방법론적으로 이용한 것은, 사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동 시대의 탐구 대상이자 지적인 풍토였던 문제적 회의주의의 영향이 크다. 여기서 문제적 회의주의란 어떤 종류의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과정을 뜻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없는 이유를 탐색하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와는 방향이 완전히 반대다.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지식이 되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고 어떻게 하면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알아본다. 그래서 지식에 관한 어떤 이론이 어떤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 조건을 제시할 때,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 지식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입장은 지식의 조건에 관해서는 언제나 유보적이고 확답을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독단적 회의주의와는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문제적인)’ 회의주의인 것이다.

 

  이런 태도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피론주의 개요』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책을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고대의 회의주의가 문제적 회의주의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데카르트를 전후한 시대에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 책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가 이해한 회의주의란 바로 피론주의를 뜻한다. 이 책에 따르면 지식(진리, to alethe)을 탐구하는 사람의 태도는 세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는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독단주의자(dogmatichoi), 둘째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독단주의자, 셋째는 주장하지 않고 탐구를 계속하는 피론주의자다. 셋째 부류의 인식론적 목표는 독단주의자들이 어떤 오류를 저지르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신중하지 못하게 진리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피론주의자들은 모든 믿음이 감각기관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믿음과 지식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게 보인다’는 현상(phainomenon, phantasia)에 관한 믿음은 확실성을 가지지만(지식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대상이 실제로 어떤가에 관한 믿음은 지식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어떤 대상이 실제로 어떤가에 관한 믿음이 생길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는 여러 믿음에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현상적 믿음은 감각주체의 조건, 감각하는 상황의 조건, 감각주체와 감각대상 사이의 관계의 조건에 의해서 아주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믿음들은 모두 같은 정도의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믿음을 지식으로 해야할지 알 수 없게 되고, 현상에 관한 믿음들만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데카르트가 대답하고자 했던 회의주의도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그리고 자기 스스로는 해결했다고 생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만약 감각이 불확실하고 의심스럽고 상대적이라면,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어떤 믿음도 지식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찰』의 「제 6성찰」에서 “신체에 이로운 것에 대해 모든 감각은 거짓된 것보다는 참된 것을 지시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중략) 오류의 모든 원인을 폭로한 오성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중략) 오히려 지난 며칠 동안의 온갖 과장된 의심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일축해 버려야 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성찰』과 『피론주의 개요』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와 문제적 회의주의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될 가능성에 관해 두 입장이 서로 완전히 다른 대답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 대답에 따라, 그 대답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회의주의적 논증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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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연습 발제>

 

우리의 지식 주장들은 때때로 우리가 실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오류에 빠진다. 이것은 모든 지식 주장을 위한 정당화를 약화시키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경험적 믿음들은 대부분 지식이지만, 가끔은 그 경험적 지식들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 이는 우리가 추론 과정에서 저지른 실수 때문일 수도 있고, 특정한 인식적인 조건이 만들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알고서 그 믿음을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추론된 믿음을 지식으로 수용할 수도 있고, 다른 인식적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 생겨난 믿음과 기존의 지식을 비교해 검토해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교정의 과정은, 실수를 저질렀다거나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있지 않다는 등의 ‘오류’에 우리가 빠졌다는 것을 저 알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대개 오류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시간을 들여서 그것을 교정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회의주의적 논증은 우리가 결코 ‘오류’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경험적 믿음이 가능한 인식적 조건을 제시한다. 이들은 ‘꿈 논증’과 ‘악마 가설’로 불린다. 이 두 논증이 일관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우리의 지식은 모두 실재와 비교했을 때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 둘째, 우리 스스로의 인식적 능력은 지식에 속하는 그 믿음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어떤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이 우리의 인식적 능력에만 포함되는 과제라면, 우리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인식적 조건 속에 있을 경우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를 하더라도 거짓인 믿음을 정당화할 뿐, 그 믿음을 지식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논증은 ‘만약 악마가 있다면, 모든 경험적 지식은 거짓이다.’고 형식화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논증은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논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제인 ‘악마가 있다’는 것(또는 통 속의 뇌, 영화 《매트릭스》, 《트루먼 쇼》 등 회의주의적 의심을 유발할만한 모든 전제)이 우리의 평범한 인식적 능력을 훨씬 뛰어넘어야만 알 수 있는, 그러므로 지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믿음들에 관한 신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논증이 그 의도에 따라서 지식에 관한 우리의 주장을 약화시키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그 논증에서 제시된 인식적 조건이 참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이 조건에 관한 믿음들을 인식적 능력을 통해 지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두 조건이 충족된다면, 기존의 지식을 조건에 관한 믿음들과 함께 검토해보고 경험적 믿음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악마 가설의 문제점은 둘째 조건을 무시한 채 첫째 조건만 충족시키면 경험적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조건이 거짓인 믿음을 산출한다는 것을 확인할만한 어떤 능력이 없는 한, 그 조건은 단지 우리의 인식적 능력을 구성하는 요소 또는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는 사항으로서 작용할 뿐이며, 우리는 그렇게 산출된 거짓인 믿음을 가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산출된 믿음은 다른 믿음과 비교되어 각각 다른 지위를 부여받지 않는 한, 어떤 대상에 관한 유일한 믿음이 되므로 회의주의적 입장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 악마 가설만으로도 우리가 지식에 관해 회의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고실험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없는 것에 관해 믿고 그것을 다른 이에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이른바 ‘회의주의적 독단’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적 태도를 정당화하기 둘째 조건, 즉 우리의 인식적 능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비교대상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 주장들은 때때로 우리가 실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오류에 빠진다는 것은 지식에 관한 우리의 정당화를 약화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흔히 《매트릭스》의 네오나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악마 가설과 유사한 세계에서 빠져나와 실재를 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비교대상을 얻은 것 뿐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아는 두 세계 가운데 어떤 것이 실재인가 판단하고 지위를 부여한다. 그것을 부여하는 과정은 주변 사람들의 태도나 환경 그리고 여러 믿음을 통한 인식적 정당화이다. 그러나 그 정당화의 과정이 이전에 ‘한 세계’만 알고 살던 시기의 정당화 과정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이 사례를 통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오류가 지식에 관한 정당화를 약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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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연습 보고서>


1. 인식적 정당화와 '적절히 야기됨'

  ‘적절히 야기된 참된 믿음’은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지식의 정의 가운데 하나이다. 앨빈 골드먼은 ‘안다는 것에 관한 인과이론A Causal Theory of Knowing’이라는 논문에서 게티어의 논문의 사례가 지식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사실과 인과적causal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람이 동전을 10개 가지고 있다든가, 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누군가가 어디에 있다고 추측하는 것 등은 그 사람이 취직을 한다든가 또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믿음을 낳는 인과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지식은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이다. 우리는 p라는 사실을 직접 인지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p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지표나 증거 e,f,g,h 등을 통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p라는 사실은 e,f,g,h 등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있기causally connected 때문에, 우리가 e,f,g,h 등을 통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런 주장은 특히 감각자료를 통해 지식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할 때 또는 이 과정을 정당화할 때 많이 이용된다. 이를테면 p라는 사실에 관한 우리의 감각적 정보들 e,f,g,h 등을 통해 우리가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식이다.


2. '적절한appropriate'의 의미 - 그럴듯하고 극단적이지 않은

  새로운 조건인 ‘적절한appropriate’과 ‘야기된caused’의 의미를 살펴보자. ‘적절한’은 적어도 사실 p와 증거 e,f,g,h 그리고 사실 p에 관한 믿음 사이의 인과적 연결이 아무렇게나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이 관계는 자연법칙에 의해서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번개가 칠 때, 우리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면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특별히 소리를 듣지 못하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주 크고 둔탁한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번개는 순간적으로 많은 전기가 흐르는 현상이고 이것은 빛과 소리를 언제나 발생시키기 때문에, 번쩍거림과 크고 둔탁한 소리를 통해 번개가 쳤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또한 이 연결은 신의 섭리, 혹은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전능한 악마의 속임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연결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관한 탐구는 우리의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들이 언제나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는 일반화된 규칙 정도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 사건을 적절하게 연결시킬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믿음이 필연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크고 둔탁한 소리와 강한 빛이 번개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는 않듯, 개별적인 어떤 사건이 다른 어떤 사건을 논리적으로 함축하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적절한’은 ‘필연적인necessarily’ 관계와 반대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필연적이라는 말은 논리적 필연성을 가리킨다. 위와 같이 지표나 증거와 사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들과 믿음 사이의 관계가 마치 동어반복처럼 논리적으로 필연적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 사실과 증거와 믿음이 우리가 믿는 것처럼 연결되지 않는 모순이 없는 세계를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번개가 쳤을 때 빛만 번쩍이고 소리는 나지 않는 세계 U2를 생각할 수 없지는 않다. 만약 내가 U2에서 살고 있을 때, 빛과 소리를 감지해서 번개가 쳤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일 것이다. 하지만 적절하다는 말은 이런 식의 반례들을 거부한다. 어떤 두 사건 사이에 적절한 인과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 세계의 논리적인 구조를 상당히 바꾸지 않는 한 두 사건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3. '야기된caused'의 의미 - 지식이 산출되는 과정과 방법

  믿음이 야기되었다는 것은 p라는 사실에 관한 증거들에 의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이 생겨났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p라는 사실로부터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바로 추론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증거들을 취합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이런 ‘야기되는’ 과정에 반드시 개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을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인간의 지식이 지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나 방법에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황토색 풀로 뒤덮인 초원에서 ‘저기에 사자가 엎드려있다’는 지식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특정한 주파수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여 시각적인 정보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 방법으로는 황토색 풀과 사자의 황토색 털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인식적 정당화는 우리의 지식을 생산해내는 방법이나 과정에 의존한다. 만약 p라는 사실이 q,r,s 등으로 변화하고 그에 관한 증거인 q(e,f,g,h),r(e,f,g,h),s(e,f,g,h) 등이 만들어질 때 어떤 방법이나 과정이 그 다른 증거들을 취합해서 다른 지식을 생산해낸다면, 이 방법은 사실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사실에 대응하는 적절한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에 믿을만하다reliable. 이 때문에 지식을 ‘적절하게 야기된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신빙론자reliabilist라고 부른다. 신빙론자들의 주장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방법이라면 그 방법이 ‘적절하다’고 표현하는 데 있다. 즉, 이 적절하다는 말은 사실 사이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사실 또는 증거와 우리의 신념 사이의 관계를 표현할 때도 쓰이는 것이다. 앨빈 골드먼은 이 ‘적절한’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각perception, 기억memory, 어떤 사실에 관한 지표나 행위 등에 의해 야기된 추론으로 올바르게 재구성할 수 있는 인과적 연쇄a causal chain, 그리고 이들의 조합이라는 네 가지 목록을 제시한다. 따라서 우리가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과 완전히 배치되는 사고실험들, 즉 데카르트의 악령이나 영화 매트릭스의 거대 기계 등의 반례는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어,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없다.


4. 결론 : 정보와 지식의 구분은 가능한가

  대부분의 컴퓨터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컴퓨터에게는 인간이 컴퓨터에게 입력해준 문장이 그 문장이 지시하는 내용과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그 기준을 가질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적 정당화가 이런 기준과 능력에 의해 성립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절히 야기된 것은 자연적 사실일 뿐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 지식의 정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에게 인식론의 임무란 그렇게 야기된 믿음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지식이 될 수 있는지 즉 옳게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지식이 되기 전에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은 아마 정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만 정보와 지식은 구분할 수 있는 대상인가? 나는 여기에 아니라고 대답함으로써 지식 그 자체가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라고 답하고 싶다. 위에서 언급된 기준이나 능력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정보들 가운데 지식이 되는 것이 있다면, 정보들 가운데서 지식을 선별하기 위한 추가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정보들 사이의 차이는 사실의 차이 또는 방법의 차이로 인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어떤 정보들이 지식이라면, 정보들 가운데 지식을 선별하는 기준은 사실의 차이에 따른 기준 또는 방법의 차이에 따른 기준이 될 것이다. 이 두 기준 가운데 사실의 차이에 따른 기준은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라는 정의에 이미 반영되어 있으므로(즉 이미 사실에 대해 참이므로) 남는 것은 방법의 차이에 따른 기준이다. 하지만 방법의 차이는 사실에 반응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 어떤 방법이 더 정당화를 잘하고 못하는지에 관한 문제일 수는 없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방법의 차이 이외에 다른 평가기준을 도입해야만 성공할 수 있고, 이것이 왜 그런지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인간이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짓거나, 또는 우리의 지식이란 정보 수준에서 더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한다.

  육안으로 보는 달과 망원경으로 보는 달 사이에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흔히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멀리서 보는 것 보다는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전제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황토색 풀숲 속에 엎드린 사자는 보지 못하지만, 흰색 탁자 위에 앉은 청개구리는 잘 본다. 적외선 카메라는 사자는 잘 포착하겠지만, 변온동물인 청개구리는 잘 보지 못할 것이다. 눈이 나쁘다는 것은 안구의 구조가 특정한 상태에 놓여있고, 그것이 다른 특정한 상태를 '기준으로 맞추어진' 주변환경과 이런저런 마찰을 일으킨다는 말이지, 그 눈이 대상에 대한 지식을 덜 정당화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론적 입장은 두 가지 난점에 직면할 것이다. 하나는 인식론에서 규범적 측면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belief-forming process에 초점을 맞추어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으로 만드는 골드먼의 입장이 주목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믿을만한 방법’에 의해 생산된 믿음은 ‘믿을만한 믿음’으로 간주하고, 규범적 평가의 영역을 믿음 자체나 이유와 결론 사이의 정당화 관계에서 믿음을 생산하는 방법으로 옮긴다. ‘믿을만함’의 의미는 그 과정이 외부의 사실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그 과정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이 민감하다는 것은 어떤 믿음이 그 과정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지 입력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사실과 출력으로서의 생산된 믿음 사이에 더 많은 대응관계가 있다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생산된 믿음이 변화한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세계가 변화했다는 믿음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관한 믿음은 얻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신빙론적 입장에서는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에 의해 세계와 믿음은 근본적으로 단절되어있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므로 인식론의 규범적 성격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임의적이나마 여러 방법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표준적으로 설정하여 그에 입각해 규범적 판단을 내리거나, 또는 신빙론적 입장 자체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둘째는 이런 인식론적 입장으로는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관해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비판이다. 적절히 야기된 것은 사건 각각에 대한 정보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한 사건에 관한 정보들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까지 발생했고 앞으로도 발생할 모든 사건들에 관한 기술, 즉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들을 더욱 중요한 믿음으로 간주한다. 이런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들은 흔히 개별적인 사건들에 관한 정보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입력으로서 주어지는 세계는 이런 일반적 사실을 직접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을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으로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을 야기할 수 있는 입력으로서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인정한다면, 자연과학에서 지식으로 간주되는 거의 모든 믿음들은 아마도 지식으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다. 자연과학적 지식은 대부분 일반적 사실에 관한 명제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김기현, 『현대인식론』, 민음사, 1998
K.레러, 『현대 지식론』(한상기 옮김), 서광사, 1996

Alvin I. Goldman, "A Causal Theory of Knowing" from Journal of Philosophy, Vol.64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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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연습 발제>


1. 인식적 정당화와 '적절히 야기됨'

  ‘적절히 야기된 참된 믿음’은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지식의 정의 가운데 하나이다. 앨빈 골드먼은 ‘안다는 것에 관한 인과이론A Causal Theory of Knowing’이라는 논문에서 게티어의 논문의 사례가 지식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사실과 인과적causal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람이 동전을 10개 가지고 있다든가, 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누군가가 어디에 있다고 추측하는 것 등은 그 사람이 취직을 한다든가 또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믿음을 낳는 인과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절히 야기된 참된 믿음’이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지식은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이다. 우리는 p라는 사실을 직접 인지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p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지표나 증거 e,f,g,h 등을 통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p라는 사실은 e,f,g,h 등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있기causally connected 때문에, 우리가 e,f,g,h 등을 통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런 주장은 특히 감각자료를 통해 지식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할 때 또는 이 과정을 정당화할 때 많이 이용된다. 이를테면 p라는 사실에 관한 우리의 감각적 정보들 e,f,g,h 등을 통해 우리가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식이다.

 
2. '적절한appropriate'의 의미 - 그럴듯하고 극단적이지 않은

  새롭게 추가된 조건인 ‘적절한appropriate’과 ‘야기된caused’의 의미를 살펴보자. ‘적절한’은 적어도 사실 p와 증거 e,f,g,h 그리고 사실 p에 관한 믿음 사이의 인과적 연결이 아무렇게나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이 관계는 자연법칙에 의해서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번개가 칠 때, 우리가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면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특별히 소리를 듣지 못하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주 크고 둔탁한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번개는 순간적으로 많은 전기가 흐르는 현상이고 이것은 빛과 소리를 언제나 발생시키기 때문에, 번쩍거림과 크고 둔탁한 소리를 통해 번개가 쳤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또한 이 연결은 신의 섭리, 혹은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전능한 악마의 속임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연결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관한 탐구는 우리의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다.

  또한 이 적절한은 ‘필연적인necessarily’ 관계와 반대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필연적이라는 말은 논리적 필연성을 가리킨다. 지표나 증거와 사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들과 믿음 사이의 관계가 마치 동어반복처럼 논리적으로 필연적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실과 증거와 믿음이 우리가 믿는 것처럼 연결되지 않는 세계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번개가 쳤을 때 빛만 번쩍이고 소리는 나지 않는 세계 U2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U2에서 살고 있으면서 빛과 소리를 감지해서 번개가 쳤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일 것이다. 하지만 적절하다는 말은 이런 식의 반례들을 거부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거대한 기계 등이 이런 반례에 해당한다. 인과적인 관계는 우리가 접하는 상식의 한도 내에서 ‘적절하기만’ 하면 된다.


3. '야기된caused'의 의미 - 지식이 산출되는 과정과 방법

  믿음이 야기되었다는 것은 p라는 사실에 관한 증거들에 의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이 생겨났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p라는 사실로부터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바로 추론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증거들을 취합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이런 ‘야기되는’ 과정에 반드시 개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을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인간의 지식이 지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나 방법에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황토색 풀로 뒤덮인 초원에서 ‘저기에 사자가 엎드려있다’는 지식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특정한 주파수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여 시각적인 정보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 방법으로는 황토색 풀과 사자의 황토색 털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인식적 정당화는 우리의 지식을 생산해내는 방법이나 과정에 의존한다. 만약 p라는 사실이 q,r,s 등으로 변화하고 그에 관한 증거인 q(e,f,g,h),r(e,f,g,h),s(e,f,g,h) 등이 만들어질 때 어떤 방법이나 과정이 그 다른 증거들을 취합해서 다른 지식을 생산해낸다면, 이 방법은 사실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사실에 대응하는 적절한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에 믿을만하다reliable. 이 때문에 지식을 ‘적절하게 야기된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신빙론자reliabilist라고 부른다.


4. 결론 : 정보와 지식의 구분은 가능한가

  대부분의 컴퓨터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컴퓨터에게는 인간이 컴퓨터에게 입력해준 문장이 그 문장이 지시하는 내용과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그 기준을 가질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적 정당화가 이런 기준과 능력에 의해 성립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절히 야기된 것은 자연적 사실일 뿐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 지식의 정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에게 인식론의 임무란 그렇게 야기된 믿음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지식이 될 수 있는지 즉 옳게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지식이 되기 전에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은 아마 정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만 정보와 지식은 구분할 수 있는 대상인가? 나는 여기에 아니라고 대답함으로써 지식 그 자체가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라고 답하고 싶다. 위에서 언급된 기준이나 능력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정보들 가운데 지식이 되는 것이 있다면, 정보들 가운데서 지식을 선별하기 위한 추가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정보들 사이의 차이는 사실의 차이 또는 방법의 차이로 인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어떤 정보들이 지식이라면, 정보들 가운데 지식을 선별하는 기준은 사실의 차이에 따른 기준 또는 방법의 차이에 따른 기준이 될 것이다. 이 두 기준 가운데 사실의 차이에 따른 기준은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라는 정의에 이미 반영되어 있으므로(즉 이미 사실에 대해 참이므로) 남는 것은 방법의 차이에 따른 기준이다. 하지만 방법의 차이는 사실에 반응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 어떤 방법이 더 정당화를 잘하고 못하는지에 관한 문제일 수는 없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방법의 차이 이외에 다른 평가기준을 도입해야만 성공할 수 있고, 이것이 왜 그런지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인간이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짓거나, 또는 우리의 지식이란 정보 수준에서 더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한다.

  육안으로 보는 달과 망원경으로 보는 달 사이에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흔히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멀리서 보는 것 보다는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전제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황토색 풀숲 속에 엎드린 사자는 보지 못하지만, 흰색 탁자 위에 앉은 청개구리는 잘 본다. 적외선 카메라는 사자는 잘 포착하겠지만, 변온동물인 청개구리는 잘 보지 못할 것이다. 눈이 나쁘다는 것은 안구의 구조가 특정한 상태에 놓여있고, 그것이 다른 특정한 상태를 '기준으로 맞추어진' 주변환경과 이런저런 마찰을 일으킨다는 말이지, 그 눈이 대상에 대한 지식을 덜 정당화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런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지식을 어떻게,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관한 적절히 야기된 참된 믿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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