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일본연구 과제>

 

 

1. 서론 : 메이지 유신 전후 시기의 사상사적 중요성

 

동아시아 세계, 즉 한국과 일본, 중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근대란 언제나 뜨거운 화두이다. 이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느냐에 따라서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기도 하고, 이것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논쟁한다. 이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 논쟁이다.

더구나, 다른 식민지화된 세계가 그렇듯이, 동아시아 3국도 마찬가지로 그냥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국가적인 규모의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고, 때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개항을 요구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근대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구시대적인 가치관에 매달린 사람도 있었고,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해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민중적인 지지에 기반해 전국가적인 저항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처럼 근대가 동아시아 세계에 가져다준 충격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규정하는 중요한 축이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메이지 유신은 주목할만하다. 이 사건은 일본이 중세적인 봉건 국가에서 근대적인 국가로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정치적인 변화, 새로운 기술의 도입, 생산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것들보다도 메이지 유신이 중요한 더 큰 이유는,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의 근대적인 사상을 성공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유일하게, 더 나아가서는 유럽 이외의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열강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세계대전의 주역으로서 세계사에 등장할 만큼 성장하였고,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처음부터 새롭게 대면한 사상에 빠르게 적응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지식인들도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쇄국정책을 펼친 시기도 있었고, 결국엔 그 결과로서 무력하게 개항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개항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그들은 주체적으로 유신에 성공하게 되며,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의 사상적인 여정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서양의 근대 사상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반응은 그만큼 다양하고, 또 그것을 교류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사상적으로 때로는 정치적으로 많은 충돌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충돌을 겪었다는 것만으로는 메이지 유신만의 독특한 특징, 즉 근대를 받아들인과정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실제로 서양의 문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이런 시각들이 당시에 어떤 사상적인 지형도를 그려냈는지, 그리고 이들이 각각 당대의 정치세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본 지식인들의 이러한 반응을 쇄국/개국, 경막/토막, 국권/민권이라는 대립주제들로 나누어 볼 것이다. 이런 주제들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 세 가지 대립항들이 사상적·정치적 충돌을 일으켰던 주요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들에 대한 의견을 여러 가지로 조합해 볼 때, 당시의 담론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쇄국형 존황양이론’, ‘친막부형 존황양이론’, ‘반막부형 존황양이론’, ‘전면적 수용이 바로 그것이다.

 

2. 문화적 보수주의의 등장 : 쇄국형 존황양이론

 

우선 문화적 보수주의의 등장에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쇄국형 존황양이론이란, 결국 당시의 쇄국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 문물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막거나 극히 일부만 받아들이자는 정치적 견해로 흐르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기본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대신에 큐슈 지방에서 중국과 네덜란드, 조선을 상대로 교역하는 것만을 허가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포함하여 일본 전체가 외국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는 이 곳 한 곳 뿐이었다. 그나마도 네덜란드를 통해서 유입되는 여러 서양사상 서적들의 경우에는 출판을 금지당하거나 실용서적에 한해서만 번역이 허용되었다. 따라서 도쿠가와 시기에는 서양의 문물이 일본 전체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이 매우 적었다.

하지만 1700년대 후반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서유럽-미국의 국가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일 처음 일본에 다가온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북해도 지역에 관심을 가지면서 1778년에 처음으로 통상을 요구하였는데, 일본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1792년과 1804년 재차 교역을 요구하였고, 다시 거절당하자 돌아가는 길에 일본의 에조지蝦夷地 지역을 공격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1810년대에 들어서는 영국의 함선이 교역을 요구하고 사쓰마 번 등에 상륙하였다.

이에 따라 외국 세력의 출현에 대한 위기의식이 확산되었다. 서유럽-미국 세력의 이런 위협적인 모습에 대해, 여기에 대항하고 방비를 갖추며 문호를 열어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장 즉각적이고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2.1. 미토학파水戶學派

 

미토학파는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인 미토번水戶藩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 무리의 학자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개항기에만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미토학파가 중국의 史記를 본딴 일본의 역사인 大日本史를 편찬하기 위해 학자들을 모아 조직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를 시도한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손자이면서 미토번의 2대 번주였던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國. 그는 자신의 영지에 정통 주자학을 보급하려고 애썼다. 일본의 역사를 편찬하려고 시도한 것도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또한 명나라의 학자에게 편찬의 감수를 맡기기도 하였다.

이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만의 독특한 역사관, 즉 일본식 화이론이 발생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주자학의 체계에서 내세우는 세계의 중심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대체함으로써, 자신들의 천황을 천자로서 간주하고,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국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일본의 문물에 대해 연구하는 움직임, 즉 국학國學운동을 주도한 것도 미토학파의 업적이다.

이것은 미토학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미토학파는 태생에서부터 주자학을 연구하는 집단이었고, 당시 일본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의 정초를 놓은 학파인 것이다. 미토학파의 이러한 성격은 개항을 전후한 시기로 내려올 때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일본화된) 주자학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세계관을 주장할 수 밖에 없었다.

 

2.2. 아이자와 세시사이會澤正志齋의 국체론國體論

 

막부 말기의 미토학파를 특히 후기後期 미토학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아이자와 세시사이會澤正志齋(=아이자와 야스지會澤安)는 후기 미토학파를 이끌던 인물이다. 그는 미토학파에서 大日本史를 편찬하던 유학자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일본화된 주자학에 매우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新論에서 국체론國體論이라는 독특한 견해를 전개한다. 그의 국체론은 이후 등장하는 서양에 대한 다양한 견해의 원천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이후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미토학파를 포함하여 현재 일본을 지탱하는 세계관을 고수하는 이들에게 철학적인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아이자와 세시사이가 이야기하는 국체란, 지금의 일본을 만든 천황과 그를 충성과 효도로서 섬기는 관계의 총체를 뜻한다. 또한, 라는 말은 그 이전부터 불교와 주자학에서 본질, 근본, 원리, 원인 등을 뜻하는 말로써 널리 쓰여온 말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현재 일본의 정치체제와 자신들이 물려받은 문화적유산을 일본을 규정할 수 있게끔 해주는 본질로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이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는 것은, 주자학에서 이야기하는 정명正名, 즉 자신의 직분에 알맞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국체론에서는 각 직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그 임무가 주어지고, 그것을 실천할 것을 역설한다. 그가 말하는 직분은 당시의 신분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뜻을 묻는 천자, 천자의 뜻을 대리해서 정치를 담당하는 막부, 막부가 시행하는 정책의 행정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지방의 다이묘, 그리고 물자의 생산과 노동을 담당하는 농민 계급이 그것이다.

그런데 아이자와의 이런 견해는 묘한 이중성을 띄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시 막번체제의 신분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그의 사상을 접한다면, 이것은 당연히 당시의 정치 및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해주는 사상적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면에 막번체제에 비판적인 시선으로 이 글을 읽는다면, 현재 막부에 대해 정치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사상적인 기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국체론은 실제로 당대 지식인 사이에서 이런 두 가지 방향으로 모두 읽히는데, 이것은 이 이후의 지식인들에게 다양한 형식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첫 번째 분기점, 아편전쟁

 

3.1. 아편전쟁과 일본

 

아편전쟁은 1840년 청나라와 영국이 벌인 전쟁이다. 동아시아 세계의 맹주를 자처해오던 중국은 이 전쟁에서 영국에게 무참하게 패배하였고,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강제개항이라는 굴욕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2차 아편전쟁에서는 수도가 공격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이 사건은 전쟁당사자인 청나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현실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그렇게 간주되던 나라가 서양세력의 일개 군대에게 패배한 것은, 일본과 한국 각각에게 엄청난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다. , 우리도 저들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전쟁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임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쇄국과 제한적 개방을 고수하던 일본 정부와 지식인들은 네덜란드의 상인을 통해 아편전쟁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무조건 쇄국을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서유럽-미국 세력에 대해 조금 더 현실적인 안목을 가지려고 시도했다. 이런 변화의 일환으로서 신수급여령薪水給與令이 시행되었다. 이것은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외국의 함대를 공격하는 대신 물과 연료를 내어주는 것을 허가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개항은 아니었고, 막부는 오히려 에도 주변 해역은 방비를 강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다른 한편으로 막부 주변의 방비만 강화하는 것에 대한 불만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현재의 위기상황을 막부의 위기에서 일본 전체의 위기로 인식하는 관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두 가지를 암시한다. 하나는, 아이자와 세시사이의 국체론의 연장선상에서, 일본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사고관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쇄국을 유지하던 청나라의 패배를 보면서, 더 이상 쇄국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일본을 지킬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을 뜻한다.

 

3.2. 양이를 위한 개방 : 친막부형 존황양이론과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이런 전환을 잘 보여주는 인물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다. 그는 주자학자였고, 그 때문에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쇄국과 체제유지를 주장했다. 하지만 주자학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분야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학문분야에 관심을 보였으며, 그 가운데는 서양의 학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개항 직전에 자신의 눈으로 서양의 군함을 직접 목격한 뒤, ‘서양의 것을 배워 서양을 공격하자.’는 견해를 갖게 된다.

그가 내세우는 목표는 간단하게 말해 동양도덕, 서양예술의 공존이다. 여전히 천하의 보편적인 원리로서는 주자학의 견해를 취했지만, 그것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는 철저하게 힘과 세력에 의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주장하는 힘이란 곧 군사력이었다. 이러한 군사력이 앞선다는 것은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는 서유럽-미국 열강들의 국지적인 도발과 분쟁, 그리고 더 크게는 아편전쟁에서 너무도 여실히 증명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입장을 토대로, 그는 군사기술의 도입과 학습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수입하는 이유는 우리의 정신적인 가치관과 체계를 지켜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실제로 막부로부터 해양 방어의 임무를 부여받은 마츠다이松代번의 번주 밑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해양방어를 위한 여덟 가지 대책(海防八策)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서양으로의 자원유출을 막고, 서양의 해양군사기술을 배워 우리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전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일본은 결코 청나라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되었다.

또한 이런 기술 학습에 필요한 여러 제반 조건들도 같이 체득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특히 서양 국가의 언어를 학습하는 것과, 기술과 관련된 책을 번역해 출판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실제로 여러 나라의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실제로 출판 사업에 뛰어들어 이런 기술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양이, 즉 오랑캐를 쫓아내고 일본의 전통을 수호한다는 인식 아래에서 이루어진 발언일 뿐, 서양사상에 대한 전면적인 수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특히나 사쿠마 쇼잔의 경우, 군사 기술에 대한 이런 열렬한 관심에 비해서, 정치나 사회사상 등에는 문외한이거나 관심이 없었음을 고려할 때는 더욱 그 목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4. 두 번째 분기점, 개항과 반응의 분화

 

하지만 이런 구상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개항을 요구하고, 1854년 막부가 굴복함에 따라 그 방향을 달리 전개하게 된다. 앞에서 사쿠마 쇼잔이 제시했던 바와는 달리, 막부는 개항이라는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강제로 개항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받아들여야 할 것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을 고르는 선택권이 일본에게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음을 뜻한다. 자의든 타의든 일본은 세계를 향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개방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개항은 이전까지 제한적으로 수용되거나 몇몇 지식인층에서만 받아들여지던 근대적인 문물이 본격적으로 일본 안으로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불평등조약을 통해서 세계적인 규모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편입되었고, 강대국들의 시장으로 변해갔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인들의 지적인 생활 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의 경제 전반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다 주었고, 일본인들의 삶 전체를 커다랗게 바꿔놓았다. 따라서 개항은 매우 신선한 사건이며, 동시에 충격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이후의 추이를 면밀히 지켜보았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문제가 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막부의 지위와 권한, 역할에 대한 문제였다.

 

4.1. 개항과 막부의 위치

 

개항 직전에 막부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막부의 실세였던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개항을 전후한 대외정책을 어떻게 전개해야할지 각 지역 다이묘大名들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리고 조정에도 이것을 보고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막부가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막부가 해야할 책임을 전가하고 소임을 다 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 또한 여러 다이묘들이 막부측에서 정책자문을 구해온 것을 계기로 막부와 동등한 정치적 위상을 차지하려고 시도하였으며, 또한 천황이라는 새로운 정치주체가 사회에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막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회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개항 전후에 보여진 막부의 무능력에 대해 비판하며, 조정을 보필한다는 막부의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되물었다. 또한 막부가 자신들의 보위에만 급급할 뿐 지방의 번들에게는 아무런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런 지방의 번들은 열강들의 도발에 수시로 노출되어 있었고, 크고 작은 분쟁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 바닷가에 있어 열강 군대와 자주 접촉하는 사쓰마薩摩, 조슈長州, 도사土佐, 히젠肥前번의 불만이 높았다. 또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막부의 중앙관직에 참여할 수 없는 지역인 도자마번外樣藩들이었다. 도자마번들의 불만은 막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축적이 되어 왔으며, 따라서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운동은 곧바로 반막부 운동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이 바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이 곳에서 등장한다.

 

4.2. 메이지 유신의 사상 : 반막부형 존황양이론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완연한 모습은 아니지만,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해주는 사상적인 기반을 제공해준 이는 요시다 쇼인이다. 그는 사쿠마 쇼잔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또한 그와 정치적인 행보를 거의 같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그도 막번체제 자체는 옹호하면서, 군사기술 등의 실용적인 서양의 학문분야를 받아들이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현재 존재하는 정치주체 가운데 일본의 인민들을 가장 잘 결합시킬 수 있는 상징으로서 천황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천황제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국민통합을 위한 사상적인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입장은 막부가 천황의 칙허 없이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1854년을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 사건을 조정의 허락이 있어야 될 사항을 막부가 마음대로 결정한 월권행위라고 간주하였다. , 다시 말해 천황을 제쳐놓고 막부가 일본의 군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세계관에서 통용되는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였으며, 따라서 천황으로부터 부여받은 정이대장군이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 막부가 막부일 수 있는 이유는 그 뒤에 배경으로서 조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부는 더 이상 이런 역할을 자임하지 않으려 하고,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정치에 관여할 자격조차 사라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막부는 조정을 받들어 가장 열렬히 서양세력에 대해 저항하고 일본을 지켜야 될 위치에 서있는 정치주체임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화친조약을 맺었다는 것은 그들과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바로 요시다 쇼인, 그리고 그를 포함한 많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막부가 실망감을 안겨줄 수 밖에 없었던 지점이다.

또한, 막부의 존폐를 거론한다는 것이 서양세력을 쫓아낸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전에는 성리학 체계를 수호하는 한에서 서양세력에 대해 생각하고 바라보았다. 따라서 천황과 막부와 다이묘, 그리고 사농공상의 계급이 확실하게 나누어져 있는 봉건적인 신분질서 또한 수호해야 할 요소였다. 하지만 요시다 쇼인에 와서는 진정한 존황尊皇, 즉 천황 중심의 정치체제를 꿈꾸는 것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쇼인이 직접 그 체계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쇼인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서 충분히 도출될 수 있는 사고관이다.

 

5. 세 번째 분기점, 메이지 유신과 사상의 전환

 

위에서 언급한 도자마번을 중심으로 전개된 토막운동은 막부의 잇따른 실책과 서양세력의 침략 앞에서 보여주는 무력함 때문에 큰 지지를 얻었다. 결국 이들 번은 사카모토 료마를 매개로 동맹을 맺고 막부를 압박, 막부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한다. 유신세력은 천황에게 접근하여 측근 자리를 장악하고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막부의 영지와 정이대장군 관직을 몰수하고 천황이 직접 정치에 관여할 것을 선언하는데, 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이렇게 막부를 해체시키고 난 뒤, 천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행된 개혁들은 근대적인 성격을 띈다. 판적봉환版籍奉還을 통해 각 번주들의 토지를 모두 천황에게 귀속시켰고, 폐번치현廢藩置縣을 통해 일본 전체의 행정을 장악하였다. 이 두 개혁은 각 지역의 봉건적인 토지소유를 없애고,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로 나아갔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징병제 실시, 사족士族의 특권 폐지, 신분에 따른 혼인관계 제안 폐지 등을 추진하였고, 모든 평민에게 성을 사용하도록 허용하였다. 이런 것들은 봉건적인 신분질서를 깨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의 형태가 고대 율령제에서 모티브를 얻은 중앙집권적 체계였을 뿐만 아니라, 천황의 절대성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신성화시키려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근대로 이행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메이지 정부를 장악한 사람들 대부분이 하급 무사계급으로, 여전히 의식적으로는 봉건적 태도를 벗어버리지 못하였다. 또한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고 집회와 강연을 금지하는 등의 통제정책은 메이지 정부의 전제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5.1. 새로운 견해의 등장 :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새롭게 등장한 메이지 정부가 근대적인 모습과 전근대적인 모습이 혼재된 채 개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정 정도는 그들이 뿌리를 두고 있던 사상, 즉 변형된 국체론을 모태로 삼은 존황양이적인 사고관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논의를 넘어서서 서양을 대하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당시 지식인 사회의 과제로 떠올랐다. 바로 서양사상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자는 논의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조류를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이다. 그는 서양이 지금같이 강력해진 이유는 그들의 사상과 철학 때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정치적인 자유주의, 민족국가의 성립, 신분제 철폐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런 변혁을 위해서는 현재 국체國體로서 떠받들고 있는 주자학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서양의 사상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생존하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메이지 정부의 실세들과 회동하여 구체적인 미래 일본의 모습에 대해서 논하기도 하였다.

 

5.1.1. 후쿠자와 유키치와 계몽주의자들 : 메이로쿠샤明六社

 

이런 사상과 철학을 소개하기 위해, 그는 그의 경험을 직접 저술한 저서들을 지속적으로 출판하였다. 특히 그가 쓴 책인 西洋事情의 경우, 당대 지식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초기 저서에서는 서유럽-미국의 정치이론에서 보이는 이상적인 모델을 신뢰하였고, 그것이 구현되어야 온전히 근대적인 국가로 탈바꿈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의 저서 學問のすすめ은 시작 부분에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라고 천명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신분제를 비판하면서 거부하고 있다.

또한 이런 서양사상을 전문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인 메이로쿠샤明六社를 조직하고, 여기에서 월간 明六雜誌를 간행하여 메이로쿠샤의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꾸준히 발표하였다. 이 잡지는 매호 3000권이 넘게 발행되어, 당시 지식인층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메이로쿠샤의 회원들이 번역하고 출판하는 책은 일본의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책으로서 자리매김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신학문을 교육할 수 있는 상설 학교도 설립하였는데, 바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이다. 이 곳은 일본의 청년들 뿐만 아니라, 김옥균이나 유길준 등의 조선인 유학생들도 있었다. 이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국의 개화파를 사상적·물질적으로 지원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도 일정 정도 이상 관여하였다.

그가 주로 의지하고 있는 사상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영국의 민주주의 사상이었다. 민주주의 혁명으로서 가장 극적이고 또한 가능성 있는 혁명의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J.S.Mill자유론,대의정부론,공리주의등이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이것은 민주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인식의 기초가 되었다.

 

5.1.2. 군국주의자 후쿠자와 유키치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 본인은 강력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 강한 나머지, 근대적인 국가의 필수 조건인 대중에 의한 정부구성에는 유보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대중들에게 정치적인 권리를 쥐어주었을 경우, 국가가 정치적으로 분열하여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인민 전체에게 그런 권리를 쥐어줄 단계는 아니라는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일본에서 실시될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서유럽-미국 열강들이 아시아에서 부리는 횡포를 직접 목격하고, 그들이 세웠던 정치체제의 이상적 모델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된다. 대신 결국 국제정치는 힘이 지배의 원천이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이상을 좌절시키고 현실을 앞세우는 정치관을 보여준다. 평등하게 적용되는 줄 알았던 국제법이 결국에는 힘의 크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목격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원했던 조선의 혁명이 실패한 뒤에는, 동아시아 세계는 현재 국제정세에 주체적으로 적응할 수 없으므로 일본은 동아시아 세계를 탈피해 유럽의 반열에 들어야 한다는 주장, 즉 탈아론脫亞論를 전개하였다. 이것은 후에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한다.

 

5.2. 진정한 근대란 무엇인가? : 자유민권운동과 나카에 초민中江兆民

 

결국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서히 군국주의적인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은 당시의 국제정세가 미친 영향, 그리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많은 지식인들의 반응 등 여러 가지가 얽혀있다. 하지만 진정한 근대사상의 정점은, 바로 민주주의적인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메이지 유신은 근대에 미처 다다르지 못한 근대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미 하층민중계층을 중심으로 서서히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이것은 계몽사상의 확산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한, 유신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개혁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보통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진정한 근대국가라는 신념을 가진 지식인들은 당시 극심한 경제혼란 속에서 다른 세계를 열망하는 광범위한 하층민과 결합하였고, 변혁을 향한 또 다른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은 공식적인 요구사항으로서 등장하였고, 이 운동을 자유민권운동이라고 한다.

 

5.2.1. 자유민권운동의 시작

 

서양 사상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은, 메이지 유신 이후 자유민권운동에서도 이어졌다. 자유민권운동이란, 다름아닌 서양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정착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 사상의 정착이기도 하다. 또한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전제적인 성격을 점점 강하게 띄어가고 있던 메이지 정부에 대한 민중적인 대항이기도 했다.

자유민권운동은 메이지 7년 민선의원설립건백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 보통선거를 실시해 뽑은 인민의 대표로 의원을 구성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 자유민권운동은 당대에 실각한 정치인들과 결합했다는 점, 봉건적인 사고관을 다 버리지 못한 사족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민권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은, 그만큼 근대적인 사고관이 민중계층 및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진정한 혁명적 민주주의의 발상이 등장하고, 이것은 메이지 유신 전후 시기의 중대한 사상적 의의를 띈다고 할 수 있다.

 

5.2.2. 나카에 초민의 사상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은 이 운동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그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번역한 민약론民約論을 출판해 자유민권사상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이후 민권운동과 관련된 활발한 언론활동을 통해 자유민권사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으며, 자유·인민주권·사회계약설 등을 일본 내에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루소의 사회구성이론을 따라서, 모든 인간은 천부인권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서양의 사회계약론적 주장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사회계약론에서 주장하는 저항권 역시 일본의 인민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천황제를 위협하는 공화정을 지향한 것도 큰 특징이다. 따라서 그는 전제적인 메이지 정부에 크게 반대하였다.

이와 더불어서 민주주의적인 방법을 통해 이룰 세계의 평화에 대해서도 골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三醉人經綸問答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확고한 견해 못지 않게 세계평화에 대한 고민 또한 등장한다. 그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세 인물의 성격 배치(평화주의자, 중간, 호전적인 정복주의자)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칸트와 루소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과 세계평화에 대한 구상을 타인의 입을 빌려 설명하고, 그것에 대해 저서 내의 다른 두 청자에게 동의와 협조를 구한다. 그가 보여주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민주제를 실시하여 전쟁으로부터 벗어나고, 두 번째 군비를 축소하는 것이다. 또한 이 뒤에 국경 자체를 소멸시키고 평화상태로 발전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최고의 목적이다.

 

6. 결론을 대신하며 : 서양의 근대를 수용하는 일본의 독특함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살펴볼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본은 서양사상 수용에 매우 유연했다는 사실이다. 주자학적인 세계관에 대한 자신감에 넘쳐나서 쇄국을 단행했던 조선이나 한족이 아니면서도 중화주의에 물들어있어서 개혁에 실패한 청나라와는 달리, 근대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발빠르게 대처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이룩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거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주체적으로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가 되었고, 당당히 세계적인 열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일본과 비교해보았을 때, 중국은 어땠던가? 자문화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해 쇄국을 한 출발은 일본과 동일했다. 하지만 그들은 2번에 걸친 아편전쟁에서 수도를 공격당하는 수모를 겪고 나서야 그 태도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뀐 태도에 의해 진행한 개혁도 그저 군사기술을 받아들이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그나마도 자본의 부족과 낙후된 산업 등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지지부진했고, 관료들의 비개혁성과 부정부패는 여전히 심했다. 결국 개혁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급기야 변방 중에도 변방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에게 1894년 패하는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중국의 정부는 이때서야 단순히 군사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철학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강유위, 양계초 등을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대대적인 개혁법안을 입법하려 했지만, 이것은 결국 왕실의 사사로운 이득에 의해 좌절된다. 이들은 일본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한국은 어땠던가? 서양 세력이 처음 밀려들어올 당시, 지식인들에게서 가장 많은 호응을 얻었던 것은 가장 극렬한 문화적 보수주의, 위정척사세력이었다. 그들은 대원군의 집권에 환호하였고 쇄국정책에 지지를 보냈다. 동시대의 동아시아 3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자생적인 민중운동을 진압하였고,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살았다. 대원군의 실각 이후에는, 한국보다 한발 앞서 준비한 일본에게 땅을 전쟁터로 두 번이나 내어주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 3국에게 근대로 이행하는 이 시기는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타자를 어떻게 수용하고 그것에 대응할 것인가가 당대의 화두로 떠오른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그 시기에,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가 되었건 우연한 이유가 되었건 근대를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다소 유연하게 수용하였고 그것을 짧은 시간 안에 소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한국과 중국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일본의 근대화만이 가지고 있는 특질이다.

지금은 세계질서가 미국 중심의 일원적인 체제에서 다각적인 체제로 변화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 우리는 이 시기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전후의 일본의 변화양상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모범이 될 만한 것이다.

 

 

* 참고서적

 

박석순 외 3명 지음, 일본사, 서울 ;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장인성 지음, 메이지 유신 : 현대 일본의 출발점, 경기 ; 살림출판사, 2007

정형 지음,일본, 일본인, 일본문화, 서울 ; 다락원, 2004.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엮음, 근대일본사상사(연구공간 수유+너머일본근대사상팀 옮김), 서울 ; 소명출판, 2006

이마이 쥰(今井淳오자와 도미오(小澤富夫) 엮음, 논쟁을 통해 본 일본사상(한국일본사상사학회 옮김), 서울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1.

 

W.G.Beasley 지음, 일본근현대사(장인성 옮김), 서울 ; 을유문화사, 2004


 

























 

* 참고논문

 

김정호, 19세기 전반기 일본 양학파(洋學派)의 개혁·개방론 : 와타나베 카잔과 타카노 쵸에이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38집 제5, 200412, 한국정치학회

김채수, 근세 일본에서의 국체사상의 성립과 유교의 역할, 일본문화연구25, 20081, 동아시아일본학회

朴三憲, 幕末維新期의 대외위기론, 문화사학23, 20056, 한국문화사학회

朴薰, 德川末期 後期水戶學民衆觀 : 會澤安新論을 중심으로, 역사교육85, 20033, 역사교육연구회

박홍규, 나카에 쵸민(중강조민)의 평화이념 : 민주제·연방제·군비철폐론, 한국정치학회보, 39집 제5, 200512, 한국정치학회

송석원,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해방론(海防論)과 대 서양관 : 막말에 있어서의 양이를 윟나 개국의 정치사상, 한국정치학회보, 37집 제5, 200312, 한국정치학회

 

야가사키 히데노리, 근대일본정치사상에 나타난 이상과 현실 : 일본의 과오와 교훈, 국제정치논총, 44집 제2, 20046, 한국국제정치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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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마르크스주의와 현대사회 숙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손꼽힐만한 논쟁의 중심에 있다. 사상사적으로 여러 조류를 방법론적으로 복잡하게 원용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겠지만, 이것을 넘어선 부분들 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그의 사상의 대담성과 독특함보다는, 생존 당시 모호한 정치적 개입1과 개인의 비극 등 사상외적인 여러가지 요소들이 뒤엉킨 모습이다.

   하지만 현재는 여간해서는 알튀세르를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알튀세르가 차용한 여러가지 철학적 방법론과 담론 역시, 알튀세를 통해서 연구된다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이미 충분한 연구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알튀세르와 비슷한 모습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과학이다.’라는 알튀세르의 주장 아래, 주류 경제학과 다른 독창적인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다른 면에서보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독해방식은 데리다의 철학책 읽기 방식에 비판적으로 계승되어 현재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참신한 접근은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또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변형하거나 창조적인 유지를 꾀하려는 사람들 역시, 알튀세르의 전략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여 알튀세르에 기대고 있다.

   그렇다면, 알튀세르에 대해 한번쯤 들여다봄으로써 그의 자취를 밟아나가는 것이, 알튀세르가 죽은 지금의 시점에서도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해 요약해보고, 그에 대한 여러 입장과 비판적인 시선을 적어볼 것이다. 특히 알튀세르의 초기 저서에 속하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론을 읽는다』를 알튀세르의 사상으로 간주하고 접근할 것이다.

   우선 알튀세르가 생존했던 당시의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알튀세르의 이론적인 작업은, 그 자신이 홀로 체계를 세우는 방법보다는, 당시 정세에 대한 글을 때에 맞게 써내는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바로 이런 글을 한데 모아 엮어놓은 책이기도 하다. 알튀세르 스스로도 서문에서 이런 점을 밝히고 있다.

   알튀세르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면, 당시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었다: 프랑스는 다른 나라와 다르게, 부르주아 계급이 혁명적이라는 특징을 띈다. 그래서인지, 사회개혁적인 성향을 띈 지식인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의존해 이론을 만들기보다는, 혁명적인 부르주아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왔다. 그 결과, 과학적인 마르크스가 자리잡지 못하고 계몽주의적 인본주의, 프루동식 무정부주의, 노동조합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이 가운데서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공산주의는 설 자리를 잃었고, 과학을 잃은 프랑스의 혁명 사상은 무질서하고 무체계한 행동중심주의에 빠져있다.

   알튀세르는 이런 행동중심주의에 이론적으로 개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즉, 행동중심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과학적이고 엄밀한 마르크스주의를 프랑스에 뿌리내리게 하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나아가서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를 휩쓸고 있는 행동중심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면과 동시에 고려해야하는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각국의공산당을 지배하고 있던 스탈린의 노선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어쨌든) 공산주의 국가의 현실화에 환영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살아가던 시기에는, 감추어졌던 극심한 관료주의적 폐해와 비인간적 폭력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결함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입장에도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에 이는 ‘교조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받고 있었고, 알튀세르 역시 여기에 충분한 공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는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다. 알튀세르가 비판하는 행동중심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사실 이런 교조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교조주의자들이 설명하는 공산주의를 향한 기계적 진행, 생산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인간관, 맹목적으로 발전을 추종하는 태도 등에 대해, 행동중심주의자들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 주체적인 속성, 윤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 등의 개념을 들어 반박하였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실제로 당시 사회변혁을 주도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서 알튀세르는, 그 모두가 마르크스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과학’으로 격상시키고, 나머지 다른 조류를 ‘이데올로기’로 격하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는 당시에 성행하던 마르크스주의의 조류들이 왜 ‘이데올로기’인지, 나머지 하나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어떤 면에서 다르며 왜 과학일 수 있는지. 이 두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알튀세르에게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반대개념으로서,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이데올로기 또한 정의되기 때문이다. 과학의 요소를 마르크스 안에서 찾아낸다면, ‘이데올로기적인’ 마르크스 독해는 분명한 오독이 된다. 알튀세르는 이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마르크스가 직접 쓴 책인 『자본론』으로 돌아간다. 이 책이 바로 『자본론 강독』이다.

   알튀세르는 ‘진짜 마르크스’를 읽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세 가지 도구를 제시한다 : 첫째는 문답구조problematique, 둘째는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reak, 셋째는 증후적인 해석symptomic
reading.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문에서 첫째 도구는 자크 마르탱에게, 둘째 도구는 가스통 바슐라르에게 빌려왔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셋째 도구는 라캉의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았거나, 적어도 매우 유사하다고 알려져있다. 이 세 도구가 어떻게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확보하는지 살펴보자.

   문답구조는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문답구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려내주는 조건, 즉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이 이런 문답구조를 텍스트 안에 지니고 있고, 그 안에서 이론적인 개념의 조작을 통해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갖추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서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문제틀 없이 주체가 대상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암암리에 가정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런 관점을 주체의 경험주의 내지는 본질의 관념론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이런 근거없는 가정은 비과학적인 것이고, 따라서 이데올로기로 격하될 수 밖에 없다.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즉, 인간의 인식을 결정하는 구조가 경험적 세계와는 상관없이 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오히려 경험적 세계를 가정하는 것이 비과학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따라서 주체의 의지에서 발현된 행동을 사회(경험적 세계)변혁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는 사람들은 ‘주체’를 비과학적으로 가정하고 있고, 기계적으로 이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험적 세계가 주체에 온전히 반영된다고 비과학적으로 가정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중요한 점은, 알튀세르는 이것을 자신의 해석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인식론적 단절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비과학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하였다.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세계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단순히 경험적인 자료와 연구의 축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틀(알튀세르의 ‘문답구조’)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버리는 불연속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이 개념의 핵심이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을 빌려, 마르크스 역시 이런 불연속적인 과정을 거쳐 마르크스가 과학을 확립하였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에는 이런 단절이 나타나는 부분을 네 시기로 나누어서 서술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단절은, 다름아닌 이데올로기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단절이다. 마르크스 역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개념으로 학습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규정된다. 알튀세르에게 이 때 마르크스의 사상은 칸트와 피히테의 합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인간주의, 유적 본질을 가정하는 포이에르바하의 공동체적 인간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근거없는 가정을 자신의 학문에서 배제시켜나감으로써 마르크스는 자신의 과학을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바로 마르크스가 사용하는 언어와 표현의 한계에 대한 문제이다. 새로운 과학을 정립하고, 그것에 대해 기술하긴 하지만 여전히 마르크스는 당시에 자신이 학습한 철학적인 단어들을 사용해 새로운 과학을 정립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헤겔에 기반한 이데올로기와 마르크스의 새로운 과학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동시에 띌 수 밖에 없다. 바로 이 단계에서 알튀세르는 헤겔에 기반한 요소를 제거하고, 과학만을 읽어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증후적 해석을시도한다.

   알튀세르가 쓴 『자본론 강독』에서 이 증후적 해석은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무결한 해석innocent reading이다. 마치 경험적 세계를 인간이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이, 텍스트가 의미하는 본질적인 내용이 있고 인간은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독해라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무결한 해석에 반대되는 해석으로서의 불결한 해석guilty reading이다. 이는 텍스트를 기호로 파악하고, 이런 기호에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심층적 구조를 파악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구조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려내고, 직접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불투명한 이 구조를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증후적 해석은 이 가운데 불결한 해석에 초점을 두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불결하게 읽어냄으로써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청년 마르크스로부터 떨어뜨리고, 동시에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을 증후적으로 해석하는 독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제시한다.

   알튀세르의 위와 같은 마르크스읽기 시도는, 여는 글에서도 거론했듯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을 일으킨 만큼, 알튀세르에 대한 평가 또한 다양하다. 그 가운데는 모순되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이런 여러가지 평가 가운데, 알튀세르에게 가장 강력한 비판으로 자리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알튀세르 스스로가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라고 치부한 주체 개념에 대한 문제이다. 둘째는 이런 주체에 대한 관점과 관련한 사회변혁에 대한 문제이다.

   알튀세르는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수행하는 주체라는 개념을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결함이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이런 내용을 마르크스가 직접 쓴 책을 읽어내려가는 작업을 통해 ‘마르크스가 말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그는 이론적인 반인간주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기계적인 체제 이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체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론적인 체계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18 단지 예전에는 ‘경제’가 들어가있던 자리에 ‘(복잡한) 구조’가 들어갈 뿐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간에 인간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음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현실정치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혁에 관련된 사건들은 바로 알튀세르가 비판한 이론적 인간주의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그는 실천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적 인간주의에는 어느 정도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 인간주의는 결국에 이론적 인간주의를 토대로 실천을 실행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처해있다. 이론적으로 인간을 부각시키고,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해야지만 논리적으로 현실에서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인간을 꺼내는 움직임을 시행해야한다는 당위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같은 과정이 없다면 그저 사실에만 매달려 현실을 정당화하는 길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이론적인 인간주의가 표방하는 당위나 본질은, 이론 그 자체로서 실천적인 의미를 배태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무게가 있다.

   이것과 연관되게, 주체는 인식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행동의 주체이기도 하다. 또한 정치적인 인식과 정치적인 행동은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을만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인식의 주체를 이론적으로 없애버리는 작업은, 정치적 행동의 주체를 이론적으로 없애버리는 것과 대개 일치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최종적인 목표가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형식으로의 이행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이행할 인격이 논리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이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독해는, 다른 철학자들의 도구를 끌어들여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이끌어낸,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었다. 알튀세르의 이런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마르크스의 면모, 다른 철학자와 마르크스의 결합, 혹은 헤겔로부터 떨어진 마르크스 등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과학이라는 이름을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기계적 유물론과 동치시켜 수많은 폐해를 불러온 공산주의의 모습을, 이론적으로나마 다시 과학의 이름으로 세우고 정당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택한 댓가는 역시 이론적으로 혹독했다. 인간은 정치적 변혁으로부터 거세당하였다. 그리고 세계를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또한 그것이 과연 마르크스의 진짜 의도와 같았을까 역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치는 그 정의상 주체성을 지닌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배려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강력한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차 자료

Louis Althusser, 『맑스를 위하여』(이종영 옮김), 서울 ; 백의, 1997
Louis Althusser and Etienne Balibar, Reading Capital, London ; NLB, 1970

 


 

 

 

 

 

 

 

 

 

 

 


 

논문

류승무, 「구조주의 맑시즘에 대한 비판적 검토」, 《중앙승가대학 교수논문집》, 1993
양종근, 「알튀세르의 맑스주의와 주체」, 《문예미학》, 2002.10



단행본

Miriam Glucksmann, 『구조주의와 현대마르크시즘』(정수복 옮김), 서울 ; 한울, 1984
Edith Kurzweil, 『구조주의의 시대』(이광래 옮김), 서울 ; 종로서적, 1983



기타

200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 주최 윤소영 교수 『자본』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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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대중문화시대의 문학읽기 숙제. 편혜영,맨홀」감상.>

 

   편혜영의 소설을 보며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하나는, 과학관과 정치조직이 이성을 앞세운 폭력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맨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살아가는 지하실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하나는, 묘사의 폭력성과 불편함, 께름칙함 같은 것에서 박찬욱 감독의 잔혹극을 연상시켰다.(오히려 맨홀은 이런 면에서 그 표현수위가 덜한 것 같고, 이 단편이 실린 아오이가든에는 더욱 잔혹한 것들도 있었다.)


   「
맨홀이 구축한 세계에서 구원의 가능성은 없다. 맨홀 위에서 세계를 통제하는 여러 가지 도구와 제도는 결코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윤리적인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부와 그 세계의 사람들. 아무런 의식 없이 과학의 이름으로 생물-나아가서 인간-을 가차없이 난도질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과연 무엇을 찾아갈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는 어떤 지위를 지니고, 얼마만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지 가늠하기 힘들다. 아마 없을 것이다.


   맨홀 밑 세계는
, 분명 맨홀 위 세계의 이면으로서 존재한다. 이런 면에서 맨홀은 이원적이다. 하지만 이 분리는 공간적이기만 할 뿐, 가치의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이 곳은 그야말로 야만, 문명 이전의 세계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그것마저도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요소는 쏙 빠진 채, 날것으로서 드러나는 비과학적 양태로서만 그려질 뿐이다


   이로써 레밍의 알레고리가 의미하는 바가 드러난다
. 레밍은, 지하에 사는 모든 맨홀생활자들의 대표이다. 맨홀 아래 생활하며,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세계인식은 서식지이동을 위해 맨홀 위 세계에 올라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이 모든 폭압적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죽음에 이르는 것 말고는 없다. 그래서 그 죽음은 고통스럽지 않으며, 모든 것을 벗어버리는 형태를 띄는 것이다.


   하지만
, 적어도, 세계 안에서 살아있는 동안은 철저하게 구조적인 폭압에 묶여있을 수 밖에 없다. 맨홀 내에서는 불안과 고통, 본능적 공포에 지배당하고, 맨홀 밖에서는 강압적 관료체계, 인간의 대상화(사물화?)에 방어 없이 노출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출구란 없다. 끝내 과학관을 빛처럼 바라보던 주인공 둘의 희망은 한낱 착각이나 환상이었음이 폭로된다. 이런 이원적인 세계관은 지하실과 지하실 밖의 세계를 나누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꼭 닮아있다.


   이를 표현하는 작가의 표현방식 또한 독특하다
. 맨홀에서는 양쪽 세계의 잔인함에 대해 그다지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마저도, 최대한 직접적이고 단정적이며 가장 강도가 높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그 수위가 간혹 위악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이다. ‘굳이 이런 표현을 써야만했을까?’ 라며 눈살을 찌푸리고 역겨움이 생겨날만한 면모가 가득한 것이다.


   게다가
, 이를 서술하는 태도가 지극히 무미건조하다. 맨홀을 포함한 다른 단편 모두가, 아주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있따. 참으로 인상적이다. 할 말만 하겠다, 굳이 자질구레하게 설명할 것 없다, 는 식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함을 능청스럽게 화면에 담아내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특히 복수 3부작인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리게 한다.


   탈출구 없는 이 소설은 그래서 답답하기만하다
. 심지어는 스스로를 해부대상화, 박제화 시키는 아포리아는, 이런 답답함에 대한 가치판단마저도 유보해버린다. 이렇게 철저하게 답을 없애버리는 세계관은, 답을 없애는 그 과정의 고찰에 의해서 단순히 소설 맨홀, 나아가 작가 개개인의 세계관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독특한 형상화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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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대중문화시대의 문학읽기 숙제.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감상.>


   박민규가 쓴 글은 언제나
근대적인 체계를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그 목표를 노리는 목적은,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기존 산문과 다른 과감한 줄띄우기, 화자가 모호한 대화, 판타지적 요소를 표현에 직접 도입하는 시도 등을 꼽을 수 있다. 반면 내용을 봤을 때는, 근대가 완성되었을 때 나타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을 끈질기게 놓치지 않는다. 미국을 대표하는 가치관에 대한 반항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지구영웅전설을 비롯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그리고 카스테라에 실린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비롯한 단편 모두가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비정규직 상업고등학교 학생의 입을 빌려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그려낸다. 주인공을 선정하는 일부터, 지은이가 보여주려는 것을 대강 드러내준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을 고려해보았을 때,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인문계/비인문계로 그려지는 경계선에서 주변부일 뿐만 아니라,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분에서도 약자에 속한다. 이런 설정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아무리 잘 꾸미더라도 결국 이 사회의 수많은 불합리 가운데 하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의 배경인 자본주의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상징은
, 그 상징 자체로서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세계와 대비되기 때문에, 오히려 직접 보여줄 때보다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바로 지구라고 뭉뚱그릴 수 있는 세계가 그렇다. 이 상징은 글 전체를 통하여 지구/화성, 지구/금성, 지구/하와이 등으로 나타난다. 주인공은 항상 화성/금성/하와이의 모습을 상상하고 부러워하면서, 정작 자신은 비관하는 사람 그 자체일 뿐이다. 구체적인 불만을 뱉어내지 않는 것이다. 대신 이를 직접적인 불만이 아니라 계절에 대한 짜증, 불만족에서 나올 수 있는 동경 등으로 바꾸어 늘어놓는다.


   이 지구의 삶이 바로
산수. 인간의 산수란, 모든 가치와 사물이 화폐로 편입되는 자본주의의 정점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아니, 그 자체다. 아버지의 산수, 주인공의 산수, 어떤 이의 산수 모두 끝내 가치가 탈바꿈한 화폐의 더하기-빼기일 뿐이다. 그래서 수학까지 가는 삶도 별로 없으며, 산수에서 벗어나는 삶도 없다. 여기에 포섭된 주인공은 노동도, 가치도, 인간도, 게다가 가족마저도 시급으로 환산하는 웃을 수 없는 독백을 날것으로 드러낸다. 푸시맨이라는 직업마저도, 산수의 세계로 나아가는 수단인 지하철 안으로 사람을 밀어넣는 존재로서 기능하며, 지붕 위에 붕 떠오른 모습은 일탈에 의한 사회적인 죽음에 다름아닌 상태다.


   이 관점을 견지했을 때
, 세계는 비관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대로 산수의 세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가? 어쩌면 인간은 본래 그런 산수적인 존재일까?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이것을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대립구도가 등장한다. 잘 살펴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어김없이 동요가 등장한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과자에 집착하는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의 강요를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순간, 산수로부터 해방된 삶의 단초가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산수에 편입되기 전 아동의 모습, 즉 성인/유아 대립이다. 또한, 주인공이 아닌 존재에게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리고 산수하는 삶에 대한 거부가 아동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고려한다면, 인간은 분명 산수가 아닌 다른 삶을 바란다고 볼 수 있다.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한국 사회 속에서 자본주의를 체화하며 살고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그 삶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을 대립구도를 통해 압축해서 드러내고 있다. 물론 글 속에서 다른 사회가 가능한지, 어떻게 구현해야하는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기린을 아버지로 믿는, 또는 아버지가 기린으로 바뀌는 모습을 써보이며, 그것이 아직은 판타지에 가까운 상상의 영역임을 암시할 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산수하는 삶에 대해 한번쯤 돌아보는 것 자체가, 어쩌면 더 큰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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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대중문화시대의 문학읽기 숙제. 김애란,「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감상평>

 

   김애란이 쓰는 글은, 서사나 설정 자체보다는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번뜩이는 재치에 무게가 실려있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것들 사이의 수사법으로 독자에게 독특한 느낌을 주는 데 매우 능하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 직관적인 연관이 숨어있다. 다시 말해, 지은이는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해보고, 그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처음 심상과 끝 심상만 덩그러니 제시하는 것이다(김애란의 다른 단편인 종이 물고기는 이런 기법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 자신에 대한 자전적인 단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연관을 찾는 과정에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김애란 글 읽기의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김애란 특유의 소설 기법과, 아이들이 한번쯤 궁금해하는 탄생의 과정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소재가 결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질문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대답하기에 난감한 상황과 이에 대한 (김애란식) 비유와 포장을 덧씌워 새로운 느낌, 전에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발상으로 소재의 일상적 식상함을 보기좋게 극복해낸다.


   성인이면 누구나 알 듯
, 아이는 성관계를 통해 의미있는 개체로서 세계에 등장한다. 성관계-그리고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성애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 장면은 이 소설 안에서도 충분히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직접 서술되지는 않으며, 폭죽과 비누방울이라는 비유를 한번 쓴 채로 그려진다. 그래서 성애행위를 그리면서도 선정적이지 않고, 더러 유아적인 느낌까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기에서 발사돼 하늘에서 방사되는(그것도 그 많은 폭죽 가운데서도 방사되는 형태의) 폭죽, 키스와 함께 등장하는 비누방울, 그리고 그 두 가지 비유가 등장하는 황당한 과정들. 사실 이런 설명은 우리가 흔히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손 잡고 잤더니 생겼다.’, ‘배꼽에서 나왔다.’ 같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그 모양이든 질감에 있어서든, 가만히 생각해볼 때 성인이 알고 있는 모습과 직관적으로 유사한 점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해명은 거짓말인 동시에 진실이다
. 아버지에게 그마만한 문학적 감수성이 있다는 것이 약간 놀랍긴 하지만, 어쨌든 적나라한 면들은 피하면서, 훌륭하게 탄생과정에 대해 설명한 셈이 되었다. 아들 역시 그런 아버지의 설명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 거대한 문학적 비유를 부드럽게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순간 잠들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가 건네는 이야기를 들으며
, 아들은 점점 자신의 근원과 의미에 대한 이해를 넓혀간다. 어쩌면, 아버지를 거부하려던 시기에 겪은 필연적인 성장통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복어 알에 대한 비유에서 방사된 폭죽(그러니까 이를테면 정자들)으로, 그리고 다시 폭죽에서 비롯된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인식과 아버지에 대한 이해로 연결되는 이 소설 전체의 뼈대는, 유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인간의 정신적 발전과 많이 닮아있다. 역시나 이 전환의 중요한 계기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성애행위(관계)에 대한 간접적 체험일 것이다.


   이 소설에는
, 이 모든 과정이 김애란 특유의 수사를 통해 재미있고 유아적으로 묻어난다. 또한 조금은 과장되고 뜬금없지만 유쾌한 백과사전식 위트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글을 더욱 읽기 좋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얼핏 선정적인 제목만큼이나, 성관계에 대해 이렇게 유치하게 재미있게 쓰기도,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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