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Rorty, <Honest Mistake>, in Philosophy as Cultural Politics 번역.>

 

  사람들은 반어법 없이 스스로를 냉전적 자유주의자(cold war liberal)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말은 경멸적인 것으로 의도되었다. '입좌파(parlor pink)' 또는 '구찌 마르크스주의자'처럼, 이 말은 특정한 종류의 위선자들 - 어떤 사람이 냉전을 지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계속 '자유주의자'로 취급하는 경우 - 을 묘사하려고 의도되었다. '자유주의자'라는 문구는 그가 더 이상 그렇게 이름붙여질 수 없다는 것을 완전하게 알아야만 하는 문구다. 어떤 사람을 냉전적 자유주의자로 묘사하는 것은 그가 배반했다는(sold out) 것을 암시한다. 어쨌든, 그들이 그들의 성공을 진전시키거나 또는 보호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왜 보수반동적인 운동(enterprise)을 지지해왔던 것일까?

 

    가장 눈에 띄고 영향력 있는 냉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전-스탈린주의자, 또는 전-트로츠키주의자, 또는 1930년대 좌파적인 정치에 가득했던 가혹한 당파주의(bitter factionalism)를 경험했던 전-공산주의자(ex-fellow-traveler)들이다. 이런 당파주의는 소비에트 연합이 피로 물든(blood-soaked) 폭군에 의해 강탈당했던 것인지 또는 여전히 사회정의를 위한 희망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인지에 관한 불확실성에 의해서 일어났다. 이 질문을 둘러싼 논쟁들의 가혹함은 1940년대와 1950년대로, 즉 왈라스 대 트루먼 그리고 히스 대 챔버스가 스탈린 대 트로츠키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옮겨갔다. 그래서 '괴뢰(선동당한 자, dupe)', '배반자(sellout)', '변절자(turncoat)', '탈당파(renegade)' 같은 단어들의 무분별한 사용이 행해졌다.

 

    1939년과 1989년에 이르는 50년의 대부분 동안, 이 두 좌파 진영들은 불성실함(dishonesty)의 책임을 서로 교환했다. 양쪽 다, 이 문제들(issues)을 파악하고 증거를 평가할 충분한 지성을 갖춘 사람이 상대편에게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에 동의했다. 말하자면, 모스크바에서 반대파들(trials)을 숙청한 이후 어떤 성실하고 식견 있는 사람도 공산주의자 정당에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이런 성실하고 식견 있는 어떤 사람도, 전후 그리스 정부에 의한 그리스 반란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와 처형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투표할 수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소련(USSR)에 관해 1948년 공산주의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지배한 이후 평화와 자유의 측면에서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지 보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칭(self-proclaimed) 좌파들이 어떻게 FBI에 정보를 넘겨줄 수 있는지 보지 않았다. 각각의 그룹이 다른 이들을 묘사하는 용어들은 성실한 실수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수사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한다. 조지 오웰에 관한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책을 떠올려보자. 히친스는 여기에서 오웰의 반-공산주의가, 그가 살아있을 적(had he lived), 베트남에서의 전쟁-을 지지하는 것으로 그를 이끌었을 것이라고 메리 매카시가 몰래 두려워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히친스는 그녀의 두려움이 근거없는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는 그녀에게 오웰은 "무조건적 탈식민화를 바라며, 또한 ... 미국이 야망을 가지고 하려는 제국의 계승자 역할을 분명하게 보았다"고 설명했다. 히친스는 오웰의 반-제국주의가 그의 반-공산주의에 우세하리라는 것, 즉 그가 냉전적 자유주의자가 절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그렇게 확신할 수 없다. 매카시처럼, 나는 그 자신의 반-제국주의에 우세하는 오웰의 반-공산주의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만약 그가 다른 20년을 살아왔다면, 그는 아마도 시드니 훅, 제임스 패럴, 그리고 베트콩과의 투쟁을 고집할 것을 미국에 촉구한 다른 많은 전-트로츠키주의자와 함께 했을 것이다.

 

    오웰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가정해보자. 또는 10년 전에 그가 스페인에서 다른 길을 가고, 다른 전선에서 싸웠으며, POUM을 결코 지원하지 않았으며, 바르셀로나 거리에서 일어난 것의 스탈린주의적 버전을 채용했고, 또한 그래서 카탈로니아 찬가를 쓰는 일이 없었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는 아마도, 2차 대전 이후, 처칠의 반-공산주의를 그가 예비-식민주의를 반대했던 만큼이나 맹렬하게 반대했을 것이다. 어떤 실수가 그의 지성 또는 성실함 둘 중 하나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히친스는 마치 그것이 오웰이 언제나 옳은 편에 서게끔 해준 도덕적인 덕목인 것처럼, 그것을 하는 데 행운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 것처럼 썼다.

 

    히친스는 오웰의 자전적 주장에 대해서,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가 불편한 사실들을 직면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인용했다. 히친스는 오웰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사실, 즉 그의 직면하는 힘에 관한 존경은 그가 스탈린주의적인 국면을 결코 겪지 않았다는 것, 즉 갑작스런 환멸(disillusionment)에 의해서 치료되거나 씻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이것을 장식하고(glosses) 있다. 이는 스탈린주의적 국면을 겪은, 또는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존경하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정치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엇나간 이런 모든 사람들은 오웰이 언제나 옳은 편에 설 수 있게 해준 그 덕목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히친스는 모든 성실하고 지적인 사람은 미래의 역사가들이 동의할만한 정치적 위지들을 채용할 것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사람은 자신을 아무런 당혹감에 노출시키지 않고서 오웰에 의해 구성된 서간들, 서평들, 그리고 에세이들을 다시 인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쇼와 예이츠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무솔리니에 관해 말한 것들을 다시 인쇄해야 한다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르트르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레이몽 아롱인간 찌꺼기(scum)”로 쓴 것과 같은 식의 반-공산주의에 관한 그의 서술들을 다시 인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이런 종류의 당혹감은 도덕적으로 관련된 사실들은 그것을 알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 곁에 있다는(morally relevant facts were there for all to see), 그리고 사람이 그들을 직면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적인 만큼 도덕적인 결함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관점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런 관점은 탈당파(renegade)”배반자(sellout)”와 같은 단어들에 관한 좌파들의 맹신(fondness), 더 일반적으로는 좌파 지식인들의 악명높은 깐깐함(priggishness)의 배경(lies behind)이다. 이런 깐깐함은 우파 지식인들의 무자비함(heartlessness)과 비교할 때에는 부차적인 악덕이지만, 그것을 북돋아서는 안된다. 히친스의 책과 같은 책들은 그것을 북돋우고 있다.

 

    도덕적 실패의 징후로서 정치적 불일치를 바라보는 것은 악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죄의 개념, 즉 신성한 빛으로부터 계획적으로 돌아서는 것으로 되돌아가는 도덕적 심리학을 전제한다. 칸트는 이런 신학적 전통으로부터 근본적 악(radical evil)의 개념을 물려받았다. 그는 그것을 도덕적으로 된다는 것은 모든 합리적 존재들에게 그 진리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원리를 향한 복종의 문제라는 생각과 결합시켰다. 최근의 많은 도덕철학자들은 여전히,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결정들은 그 대전제가 명확하게 드러나있는(luminously clear) 원리들이고 그 소전제는 순수한 경험적 사실들인 실천적 삼단논법들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철학자들은 그들이 동의하지 않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예를 들어 인종주의자나 동성애혐오자들)비합리적이라고 묘사하곤 한다. 타고난 능력(innate faculty)을 훈련하는 것에 관한 비난받을만한 실패로서 간주되는 비합리성은 그러므로 죄의 세속적인 등가물이 된다.

 

    듀이는 도덕성에 대한 칸트적인 사고방식을 플라톤주의와 기독교(Christianity)의 가장 나쁜 모든 것을 통합한 것으로서 간주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능력 심리학(faculty psychology), 근본적 악의 개념, 도덕성-신중함의 구분, 그리고 실천적 삼단논법의 모델을 폐기할 것을 재촉했다. 마치 헤겔처럼, 듀이는 도덕적 원리들을 자기증명적인 진리들로 보지 않고 과거의 실천들의 그럴듯한 요약(rough summaries)으로 보았다. 그는 어떤 특수한 경험적 사실도 어떤 특수한 도덕적 선택을 결정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믿는 것과 우리가 하는 것에 관한 결정들을 우리의 믿음과 욕망의 연결망(networks)을 끊임없이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episodes)로 이해했다.

 

    듀이적인 관점에서는, 오웰이 언제나 옳은 편에 있었던 이유에 관한 가장 좋은 설명은 단순히 말할 수 없는 행운(sheer dumb luck)이라는 것이다. 오웰은 옳은 정치적인 경로, 즉 만약 모두가 그런 경로에 있다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역사가 결정해온 그런 것들로 바꾸어야 했을알맞은 시점(right times)에 알맞은 곳(right places)에 있었던 것 뿐이다. 성실함은 오웰의 정치적 선택에 관한 좋은 설명이 아니며, 불성실함 또한 엘리엇동물농장의 초고를 거절한 것에 관한 좋은 설명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듀이가 하는 것처럼 도덕적 선택에 관해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성실한 여자도 1939년에 스탈린이 미친 폭군이라는 것을 아는 데 실패할 수 없었다.”라든가 또는 어떤 성실한 남자도 하원비미활동위원회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have named names to the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멈추어야만 한다.

 

    우리는 또한 1930년대가 저열하고 불성실한 10(a low dishonest decade)”이라는 오든의 묘사를 반복하는 것 또한 멈추어야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레옹 블룸과 스탠리 볼드윈이 그들의 결정의 결과를 비참할 정도로 잘못 계산했다는(tragically miscalculated) 것을 말해주지만, 그들이 비열하게 행위했다는 것은 말해주지 않는다. 블룸은, 적어도 그가 정부의 수반으로 있었을 때 만큼이나 명예로운 사람이다. 그의 완전히 비참한 실수들은 그들이 해온 것(they come) 만큼 성실했다. 만약 그 당시에 파시즘이 승리하지 않았다면(if fascism were not to triumph) 그 때 내렸던 정치적 선택들에 관해 처칠은 옳고, 블룸은 그르다. 역사는 처칠의 편이지만, 이것은 처칠이 원리에 대해 믿음이 충만한 상태로 남아있었고 블룸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며, 또한 처칠이 블룸보다 더 합리적이기 때문인 것도 아니다. 처칠은, 오웰처럼, 옳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운이 좋았다.

 

    루이스 메난드(이와 관련해서) “스탈린이 실제로 나쁜 놈이라고 또는 심지어 트로츠키주의적 버전으로도 공산주의는 그른 길이라고 이웃보다 1~2년 정도 먼저 결정한 것이 한 사람을 덜 믿음직하게 즉 [] 성실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어떻게 소비에트 연합에 반대해서 돌아서는지에 관해서 큰 강조점이 놓이게 된다.”고 언급한다. 메난드의 강조는 나를 머뭇거리게 한다. 이것은 시카고 대학에서 10대 학생일 무렵, 그 부모들이 모스크바에서 미국 공산당을 해체할 때까지 기다렸던 동료 학생들에 비해서 상속받은 우수함이라는 거만한 느낌을 즐겼던 것을 내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부모보다 5년 뒤였다.(That was a whole five years later than my own parents, who had broken in 1932.) 만약 내가 히친스의 관점을 공유할 수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예외적으로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성실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들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당의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일한 경우였고, 거의 모든 동지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중에야 배운 것들을 먼저 배웠다.

 

    정치적 사건들의 변화 속에서, 관련있는 경험적 사실들이 모두에게 명백해지게 되는 특정한 시점이 있고, 그래서 단지 불성실함만이 그 사건들의 함축들을 보는 것으로부터 한 사람을 멀어지게 만든다는 그러한 생각은 과학에서 결정적 실험이 과학혁명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나쁜 생각이다. 후자는 피사의 교수들이 갈릴레오가 떨어뜨린 무게가 같지 않은 두 물체가 동시에 탑의 바닥에 내려앉자마자 재빨리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부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들이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해서 목성의 위성을 관찰하자마자 프톨레마이오스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1850년에 랭카셔의 공장 또는 피카디의 광산에서 감지된 것(a glimpse)이 모든 합리적 인간이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을 고려하는 데 충분하다는, 또는 1950년에 굴락과 관련된 폭로가 사회주의는 노예를 향한 길이라고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는 생각과 비슷하다. 듀이는 이전에 존재하는(pre-existing) 기준의 적용을 그것으로부터 제거해나가는, 의사결정에 관한 플라톤주의적 모델은 무시되어야만 한다고(should be set aside) 생각했다. 그는 우리가 "이성"이라는 그리스의 개념을 "지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할 것을 촉구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차이는 숙련된 목수의 사고과정과 유클리드 기하학자의 사고과정의 차이이다. 미국의 냉전적 자유주의자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 라이오넬 트릴링은 듀이의 제안에 찬사를 보냈다(applaud). 트릴링은 그가 "우리가 그의 지성이 찬양받는 한 사람에 관해 들어왔기 때문에 긴 시간이 걸렸다 - 그 지성이란 다시 말해서, 그의 마음의 활동에, 그 중심성, 그 유연성, 어려움과 복잡함에 관한 그 깨달음, 그리고 어려움과 복잡함을 마주하고 다루는 그 준비다." 라고 말할 때, 듀이가 얻은 것에 관한 그의 고유한 이해를 표현했다.

 

    비평가이기보다는 소설가가 되길 원했던 트릴링은, 소설이란 인간사(human affairs)에 지성을 적용한 지배적 사례(paradigm example)라고 생각했다. 목수가 기하학자가 되는 것처럼 소설가는 이론가가 될 수 있다(For the novelist is to the theorist as the carpenter is to the geometer). 트릴링은, 소설은 "좋은 모양과 예의범절(shapeliness and decorum)을 선포하는 데 무관심한 모든 장르이고, 또한 그것이 현실성 자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실체들(substance, which it presumes to say is actuality itself)에 가장 많이 공헌하는 장르다; 그것은 자기충족적이고 무조건적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가장 적은 장르다."라고 적었다. 합리적인 결정 이론가들처럼, 기하학자는 좋은 모양과 예의범절을 바란다. 그래서 무엇이 행해질 것인가에 관해 칸트가 "순전히 합리적인 결론(the only rational conclusion)"이라고 부른 것에 닿길 원하는 칸트주의 도덕철학자들은 그렇게 한다 모든 성실한 경험적 연구자들도 수용할 수 있는 소전제와 결합되어있는 자기-증명적 대전제로부터 이끌린 타당한 추론에 의해 뒷받침되는 결론.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희망을 포기한다면, 그는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말해질 법한 다른 가능한 그의 이야기들 가운데서 왜 그가 그렇게 한 것처럼 행위하고 있는지 즉 그의 삶의 소설 에 관해 자기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는 서사(story)를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성실한 남녀는 이런 이야기들이 진실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에 관해 다른 견해를 가질 것이고, 또한 이런 모든 이야기들은 많은 느슨한 줄거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트릴링이 출간한 여행의 중간The Middle of the Journey이라는 한 소설 안의 중심적인 캐릭터 하나는 휘태커 챔버스, 그의 초기의 명민함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학교에서의 경험(a college acquaintance)을 모델로 삼앗다. 트릴링은 그의 세대에 가장 존경받던 미국인 문학가엿으며, 또한 챔버스는 당대의 가장 정치적으로 영향력있는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챔버스에 관한 트릴링의 소설은 놀라우리만치 적은 관심만 받았다. 이렇게 된 한 가지 이유는 단지 챔버스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히스에 대해 간첩행위로 비난하기 이전에도, 챔버스는 히틀러가 폭로되었던 바로 그 때, 우리가 스탈린과 싸워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미국의 여론에 납득시키는 데 힘써왔다. 1944년 중반부터 1945년 중반이라는 아주 중요한 시기에 타임Time지의 외신보도 편집자로서 그는 그가 타임지를 통해 널리 알리고픈 반-공산주의적 메시지들을 부인하거나 약화시키는, 외국의 특파원(correspondents)으로부터 온 소식들을 에누리없이(ruthlessly) 교정하고, 또는 망설임없이 버렸다.

 

    그러나, 그의 편집보다 중요한 것은 헨리 루스가 출판하는 모든 잡지들이 결국에는 채용한 완고한 반-공산주의적 논조를 강화하도록 루스를 설득하는 데 챔버스가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챔버스가 얄타 회담에 관하 아주 곤란한 칼럼을 쓰고 있을 때, 루스는 그것을 출판해야 한다고 완전히 확신했던 것은 아니었다(was not at all sure). 1945, 그는, 오웰의 동물농장을 거부한 다양한 출판인들처럼, 우리가 스탈린을 잔인하다고 여겨야만 하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서 성실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출판인들처럼 루스는 여전히 USSR과 민주진영(the democracies) 사이의 전시협정(wartime cooperation)이 전후 시기로 확장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희망을 배제하는 것을 도울법한 어떤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챔버스의 쪽글은 출판되었지만, 루스의 회사에서 일하던 다른 저널리스트의 대다수의 극심한 반대만 불러왔다. 1945, 미국 언론의 많은 구성원들은 1948년 대선에서 헨리 왈라스에 의해 표현되었을 법한 그런 의견들을 고수하고 이었다. 그 해에 왈라스가 이길거라 투표한 백만의 유권자들은 스탈린에 관한 미국 여론의 이러한 부분과 전후 세계의 본성에 관한 증언자들이다. 이 부분은 레닌 치하의 소비에트 연방에 관한 미국의 조치를 부끄럽게 여기고 반-공산주의가 가능한 한 뉴딜 정책의 대부분을 무효화시키는 구실로서 공화당에 의해 사용될 것이라고 올바르게 걱정한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특히 잘 나타났다(especially marked).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트루먼 독트린으로 돌아가거나 또는 USSR을 견제할 필요에 관한 조지 케넌의 관점을 수용하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았다(reluctant). 챔버스는 이렇게 왈라스주의를 예견하는 정신상태를 완전히 이해했으며, 그걸 바꾸려고 최선을 다햇고, 또한 그렇게 하는 것 속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루스가 그와 같이 일하는 스탭들로부터 들려온 챔버스에 관한 불만의 압력에 굴복하고 그를 외신보도국으로 보낸 뒤 3년 동안, 잡지의 관점은 챔버스가 바라던 바로 그것으로 바뀌어갔다. 당대의 방송권력(the media powerhouse)이던 루스의 조직 속에서, 챔버스는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

 

    그러나 챔버스의 이름은 트릴링의 소설이 출판된 이후인 1948년이 되어서야 널리 유명하지게 되었다. 이 해는, 하원비미활동위원회 이전에, 그가 1939년에 안보부 비서(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Security)였던 아돌프 벌에게 챔버스가 이미 했던 이야기를 그가 반복했던 바로 그 해다: 그 구성원중의 하나가 앨저 히스인, 1930년대 워싱턴의 핵심부(operating in Washington)를 둘러싼 소비에트의 간첩에 관한 이야기. 히스의 경우가 완전히 탄로난 뒤에 트릴링의 책을 읽고 또한 기포드 맥심 캐릭터가 챔버스를 모델로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아서와 낸시 크룸 잘난 척하는 동지들 의 캐릭터는 앨저 히스와 그의 아내 프리실라를 모델로 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 가설은 틀렸다; 트릴링은 그가 그 책을 쓸 때 히스의 존재에 관해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커플 사이의 완전히 우연한 평행은 인상적이다.

 

    오늘날 챔버스는 비웃음을 사며 이따금씩 참고된다. 최근의 트릴링 소설 광고에서는 그를 변절자(turncoat)”로 부른다. 그는 자주 간사한 배신자(professional apostate)” 또는 간사한 전-공산주의자(professional ex-Communis)”로 묘사된다 그가 돈 또는 명예를 위해 그것에 가담했으며 또한 그는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는 가정을 전달려고 선택된 표현(epithets). 그러나 트릴링은, 히스의 대변인(변호사, attorney) 해럴드 로젠왈드가 변호를 위한 증언을 요청했을 때, 챔버스는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로젠왈드는 트릴링의 보고에 경멸적인 분노의 폭발이라고 반응했다. 대변인은 트릴링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그는 필연적으로 불성실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맺었기에 모욕적이라는 것을 그럴듯하게 끌어낼 수 있었다(Contemptuous, presumably, because the attorney had concluded that since trilling was obviously not stupid, he must necessarily be dishonest). 챔버스와 히스에 관한 성실한 실수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로젠왈드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트릴링은 1975년에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읽히지 않은 자신의 작품(his little-read novel)의 신판에 서문을 쓸 때, 로젠왈드와 나눈 대화를 보고하면서, 그리고 챔버스의 도덕적 성격에 관한 그의 확신을 재확인하면서, 논점을 하나 만들었다. 이것은 첫 출간에서 28년 뒤, 챔버스가 죽은 지 14년 뒤 그리고 트릴링의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기였다. 트릴링은 여기에 챔버스는 그의 조국(his own country)에 반대하는 간첩활동에 참여했었, 그 뒤 한동안 그가 친구로서 소중히 여긴 사람을 포함하는 그의 고유한 [반역]을 공유한 동지들로서 이름지어졌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나는 그에 관해서 이런 것들이 말해질 때, 그는 여전히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hold)”고 말한다. 나는 이 문단을 모든 정치적 실수는 멍청함 또는 불성실함으로부터 올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저항으로서 읽었다. 나는 이런 용어들을 분열된 충성심과 다른 도덕적 선택의 현상에다 정의를 행하기엔 매우 조잡한 것으로서 논증했다고 본다 소설 속에서 가장 잘 배우는 종류의 현상들.

 

    챔버스가 명예로운 인간이라는 트릴링의 묘사는 대중적이진 않다. 심지어 다이애나 트릴링도 남편이 나쁜 단어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스파이도 명예로운 인간이 될 수 없다. 트릴링의 친구인 모리스 딕스타인, 만약 어떤 사람이 명예를 얻을만하다면 그것은 챔버스 같은 밀고자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이름을 받기를 거절한 릴리안 헬만같은 이에게는 적당하다고 그에 관해 말했다. 내가 접근할 수 있도록 딕스타인이 허락해준 한 답변에는, 트릴링은 챔버스에 관한 그의 캐릭터화를 옹호했다. 그는 헬만은 국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간첩활동에 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지만, 챔버스는 그랬다고 지적했다. 그는 E.M.포스터의 유명한 경구에 관해 비평하는 방식에 의해서 나누어진 분열된 충성심에 관한 편지를 썼다: “만약 내가 내 조국을 배신하는 것과 내 친구들을 배신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나는 조국을 배신할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고 바랄 것이다.” 트릴링은 이런 일반적인 원칙 언제나 조국보다는 친구들을 선호한다 은 그 역명제 만큼이나 가망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원리들에 호소(invocation)하는 것이 책임회피, 즉 구체적이고 복잡한 수준에 머물러야 할 필요성을 회피하는 한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듀이가 지성이 활동한다고 생각한 그 수준.

 

    여행의 중간, 다른 것들 중에서, 이런 종류의 구체적인 것과 복잡성에 대한, 즉 챔버스가 기포드 맥심을 아주 인간적인 비평적 지성이라고 비꼬아 부르면서 그려낸 것에 관한 일에 대한 청원이다. 트릴링이 이 소설에서 그려낸 존 라스켈은 막심의 묵시록적인 확실성과 크룸의 깐깐한 이상주의 양쪽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애쓴다. 크룸 부부는 그 당시에 네이션The Nation지와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지의 지면을 가득 채운 스탈린주의자들의 거짓말에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막심은 지하 공산당에 관해 환멸을 느끼는 한 사람이었다. 라스켈은 그것의 명령 속에서 그가 살인에 참여했다는(had commited) 것을 의심했다. 당이 해체당한 뒤, 막심은 그의 삶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라스켈 스스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단지 공공주택에 관여하는 위원회(committees concerned with public housing)에 유용한 진지한 자유주의자라고 하더라도(37),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을 떠난 누군가에 관해 들을 때마다 불쾌한 감정(revulsion)을 체크해야 했다“(73). 그는 언제나 미국 공산당은 모스크바를 내쫓았다는 주장은 단지 반동적인 언론에 의해 선전된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심의 배신은 이런 당연한 것들을 의문에 부치도록 그를 몰아넣었다(14). 막심의 해당 행위(Maxim’s break)에 관해 크룸 부부에게 이야기하게끔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있던 그 시간에, 그는 혼란해진 것은 막심인지 아니면 너무 안일한 것이 자신이었는지 의심(wonder)하기 시작한다(167-8). 독자는 소설이 끝난 뒤에 라스켈이 트릴링이 했던 것과 같은 궤적을 따라갈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즉 왈라스보다는 트루먼에게 투표하고, 히스의 완전한 그럴듯함에 대항해 챔버스의 증거(Chambers’ charge)를 찾는 냉전적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

 

    그러나 낸시 크룸은 어떤 것에 관해서 그녀의 마음을 채울 의도가 없었다. 그녀는 단순한 자유주의자들을 경멸했다. 그녀는 막심이 당을 위해 수행하는 비밀업무를 돕기를 바랐지만, 지금은 같이 식사하는 것(break bread with him)을 거절한다. 막심이 그는 공산주의자와 나치들 사이의 거대한 차이점을 볼 수 없다고 말할 때, 크룸 부부는 그들이 정치적인 의견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무질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었다(255). 그러나, 크룸 부부가 공포와 회의감(incredulity) 속에서 막심으로부터 손을 떼면 뗄수록, 라스켈은 낸시와 아서 크룸이 그가 깨달은 것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완고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끝내, 라스켈은 자기 스스로에게 나는 크룸 부부에 관해 내가 배워온 것 때문에 막심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었다고 말한다(272). 그는 그의 생각에 큰 공백이 있다 그것은 당과 운동이 자리잡고 있었던 자리다. 그것은 또한 낸시와 아서가 있었던 자리다.”는 것을 발견한다(273).

 

    이 소설의 정점에서, 막심은 보란 듯이 으스대며, 미래는 자신과 크룸 부부와 같은 비타협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속하기 때문에 듀이적인 지성은 진부하다고 라스켈에게 설명한다. 그와 크룸 부부는 화해할 수 없는 극단에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라스켈이 온전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여전히 두 극단 사이를 지적으로 중재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라스켈에게, “너는 정신의 그러한 유연함이 장점이다 ... 그러나 그것은 너무 늦었다 르네상스는 끝났다 ... 아마도 그것은 다시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먼 미래는 아니고, 크룸 부부와 내가 승리하고 세계의 무질서에 대항해 우리 스스로를 세울 때 까지는 아니다고 말한다(355). 그는 인간적인 비평적 지성의 고귀한 행위 그것은 논증의 설득력을 지각하고 그것의 소멸이라는 사실을 묵인한다고 그가 부른 것을 라스켈이 수행하기를 재촉한다. 막심은 그가 그것을 묵인하지 않았다고 답변한다. 막심은 그가 그렇게 했는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답변한다. 라스켈은, 오웰이 그랬을 법한 것처럼, 그것은 문제가 되는 단 한가지라고 답한다(rejoins).

 

    크룸 부부는 예견된대로 그와 그들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는 막심의 주장에 격분한다. 그러나 트릴링은 이런 유사점을 명확하게 하며 그의 소설을 썼다. 낸시 크룸이 라스켈에게 한 마지막 말은: “어제 밤에 막심이 한 말 당신은 그렇게 믿지 않죠, 그렇죠? 그와 우리는 당신에 대해서 함께 하고 있어요. 마치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라스켈은 그것이 실제로 그렇다는 걸 완전히 잘 알고 있으면서 나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길 바랍니다.”라고 답변한다(360). 심지어 편을 바꾼 뒤에도 여전히 완전히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막심의 오만한 거드름, 그리고 그들이 듣기를 원치 않는 모든 것을 듣는 것에 관한 크룸 부부의 아이같은 거부는 인간적인 비판적 지성의 결핍이 스스로를 선포하게 만드는 두 가지 방식이다.

 

    막심에게는, 챔버스처럼, 삶은 외롭고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라면 살아갈만한 가치가 없고, 전능하고, 무자비하고, 예측할 수 없고, 그리고 보상받는 어떤 것의 손길 , 역사, - 속에서가 아니라면 시간의 공포에 맞서서 홀로 설만한 가치가 없다. 타임지의 동료들이 챔버스에게 압력을 어떻게 견뎌내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어떤 힘이 내 옆에 있기 때문에 나는 실제로 지칠 수가 없다(I cannot really be beaten)”고 답변했다. 크룸 부부는 히스 부부가 그랬듯이, 영웅주의를 가장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반대에 상처입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챔버스는 자신을 따라 히스가 당을 나오게끔 설득하려고 스탈린의 범죄행각을 늘어놓고 있을 때 프리실라 히스가 그런 늘어놓기(such a recital)는 단지 정신적 자위에 불과하다고 응수했던 것을 기억했다.

 

    막심과 챔버스는 확실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키에르케고르 챔버스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한 명 처럼 신념의 기사는 확실성을 필요로 한다거나 확실성을 욕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키에르케고르적인, 니체적인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영웅은 확실성을 향한 도전은 변명(cop-out)이며, 절대적인 합의는 논쟁에서 이기거나 반대자를 설득하는 능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크룸 부부와 히스 부부는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계(Christendom)”라고 불렀던 것을 물려받은 자기만족적이고 깐깐한 사람들처럼, 구원받는 데 필수적인 것을 알았으며, 또한 그들은 모든 태도가 바르고(decent) 성실하며 지적인 사람들은 또한 이런 점을 알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당과 관계를 끊음으로써 빛으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러나 이런 사람들과 더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막심이 인간적인 비판적 지성이라고 부른 것을 성취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적 정체성에 관해 시간과 운에 의한 창조물이라기보다는 자기충족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유혹에 저항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막심과 크룸 부부 둘 다 그들이 이러한 창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설의 독자는 라스켈이 한 사람을 도덕적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가게 허락하는 종류의 부정적인 능력(capability)을 얻을 그의 삶의 잔류자들에게 헌신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데 이끌린다. 여행의 중간, 다른 것들 가운데서, 우디 알렌이 그려내듯, 자신이 누구이고 또 어떤 것이 행해져야 하는지 결코 완전히 확신하지 않는 우유부단한 쁘띠-부르주아 무기력증 환자가 된다는 생각에 대항해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트릴링의 시도였다. 그는 이것이 라스켈이 막심과 크룸 부부 양쪽을 보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라스켈과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왜 부끄러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지를 설명하려고 그의 소설을 썼다.

 

    만약 그의 소설을 이렇게 읽는 것이 옳다면, 트릴링은 단지 막심이나 챔버스 뿐만 아니라, 크룸 부부와 히스 부부 또한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또한 이런 명예는 정치적 위치에 관한 한 사람의 선택과는 큰 관련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한 사람이 살인자, 배신자, 거짓말쟁이로 끝맺는지 또는 한 사람이 역사의 심판에 의해 비난받는지 아닌지와도 크게 상관이 없다. 나는 트릴링이 앨저 히스가 비열한 동기가 없었다는 것을, 챔버스가 그랬다고 하는 것보다 더 의심한다. 그의 오래된 친구들을 향한 챔버스의 정보제공은 세계를 구하는 데 필요한 것에 관한 그의 믿음에 의해 지시받은 것이다. 그래서 히스의 바람도 죽기 직전부터 45년간을 거짓말을 반복하는 데 쓰는 것이었다: 나는 공산주의자였던 적이 없으며, 간첩활동을 하지 않았고, 거대한 음모의 무력한 희생자였다. 알프레드 케이진1978왜 앨저 히스는 고백할 수 없었나라는 글에서 히스와 나눈 몇몇 대화는 그가 열정적인 애국자라는 것을 확신시켰다고 말했다. 이 대화들은 히스가 뉴딜 정책에 대한 자신의 공헌과 소비에트 정보국(Soviet intelligence)에 대한 자신의 공헌을 모두(as all of a piece) 안다는 것을 그가 깨달은 채로 남겨두게 했다. 둘 다 그의 조국의 미래를 위한 그의 희망의 산물이었다. 카진은 히스가 그는 당신 또는 나보다 더 좋은 미국인이었다고 믿으면서 그의 무덤으로 갈 것이다고 예견했다.

 

    나는 트릴링이 챔버스와 히스 모두 비열한 동기가 없었다고 믿은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오웰만큼, 또는 트릴링 자신만큼 성실했다. 둘 다, 다양한 시간에서, 간첩이고 위증자(perjurers)였지만, 그들은 옳은 종류의 이유에서 간첩행위를 했고 거짓말을 했다. 그들은 스스로 이해한만큼 인간성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봉사했다. 성실하게 되는 것, 한 사람의 이상에 진실하게 되는 것은 역사가 당신에 관해 말할 이야기(the story history will tell about you)와는 구체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바로 도덕적인 것이다. 역사가들에게는 당신의 동기보다는 당신의 행위의 결과가 더욱 흥미롭다. 소설가는 이 둘에 모두 흥미가 있기 때문에, 이 둘이 서로 다른 상대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는 사실과 관련된 용어들에 우리가 다가가도록 도와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가 기독교와 칸트로부터 물려받아온 생각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 나쁜 길을 택한 사람들은 빛에 대항해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가정하는 생각.

 

 

    내가 그에게 적용한 듀이적인 믿음들을 트릴링이 언제나 확고하게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의 영웅찬양조의 에세이인 조지 오웰과 진리의 정치학에서 오웰에 관한 그의 태도(treatment)는 히친스와 유사하다. 그는 카탈로니아 찬가의 도덕적 색채는 아주 독특하게 단순하고 진실하다고 내뱉는다. 이어서 트릴링은 만약 우리가 오웰이 무엇을 지켰는지 묻는다면, 그 대답은 이렇다: 머리가 좋아지지 않는 것, 즉 한 사람의 간단하고, 직접적이고, 기만하지 않는 지성 이외의 다른 어떤 것 없이 세계와 대면하는 것의 덕목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오웰은 덧붙여 선한 존재가 되는 것은, 단순함과 건실함, 그리고 그들이 덕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들에 관해 말하도록 우리가 허락하는 활동들을 가지는 것이다.”고도 덧붙인다. 이런 구절들은우디 알렌이 얼마나 험프리 보가트처럼 되고 싶어했는지를, 그리고 헤밍웨이는 그의 시대에 그가 질투하는 유일한 작가라던 트릴링의 강조를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들은 트릴링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웰은 독특하게 단순하고 진실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공을 들였다. 헤밍웨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단순함과 건실함을 마치 그들이 시들기 쉬운 꽃잎인 것처럼(like the fragile blossoms they are) 모았다. 그는 트릴링과 히친스가 실제로 그런 것과 같은 그런 반응을 그의 독자들이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이런 답변들을 얻으려는 오웰과 헤밍웨이의 시도 속에는 어떤 반박할만한 것도, 어떤 위선적인 것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에서 그런 것 만큼이나 듀이적인 관점에서는, 이런 시도들은 당신이 부족한 덕목들을 있는 척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것을 얻은 사람들에게서 확연히 볼 수 있는(characteristic) 행위들을 수행하는 것에 의해 덕목을 점차 얻게 되는 것의 문제다. 하나는, 만약 한 사람이 이런 덕목들은 힘든 노력의 결과물일 수 없으며, 선함와 맺는 독특하게 단순하고 직접적인 관계에서 나왔을 때에만 진정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단지 이런 노력들이 위선적이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칸트가 인간이라면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런 종류의 관계,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나 듀이에게서는 아니다.

 

    이런 직접성은 가능하다는 환상은 트릴링의 불운한 문구인 진리의 정치학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문구는 정치적인 실수를 피하려면 해야 하는 모든 것은 성실함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학은 진리의 과학이 없는 것처럼 있을 수 없다(But there is no such politics, any more than there is a science of truth). 갈릴레오는 한 과학을 실천하지 않았다. 그는 지적인 옳음이라는 칼로 미신과 편견을 잘라내지 않았다. 그는 단지 실제로 일어난 것과 같은 성과를 올리는 현명하고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갈릴레오는 그에 걸맞게(deservedly) 근대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또한 오웰도, 결코 그보다 덜하지 않게, 20세기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시대에 통용되는 의견에 저항하는 용기를 가졌던 이런 사람들에 대한 존경은, 완전히 적절하며, 실제로 필수적이다. 이런 영웅들(heroes and heroines)에 관한 존경이 없는 곳에서는, 도덕적 이상주의는 거의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도덕적 진보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후기 버나드 윌리엄스가 또 다른 영웅에 관해 도덕적 운이라는 주목할만한 논문에서 말한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고갱. 고갱은 그의 책임과 그의 가족을 거부하고, 대담하게 남해로 항해를 나갔다. 우리는 그가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훌륭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러나 윌리엄스가 말하듯이, 그들이 대책없이 진부하기만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고갱은 아마 화가로서 앨저 히스와 동급이 되었을 것이다 수십년 동안 불쌍한 캔버스만 생산하고, 회화의 역사가 그를 이미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는 그의 시야에만 충실한 그런 사람. 그는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옳고 갈릴레오는 그르다는 것을 논증하고 또한 성공적이지 못하게도 과학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노력한 라이프니츠의 용감하고 공상적인(imaginative) 현대적 버전 가운데 하나와 유사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역사의 판단에 대해 명예롭고, 서실하고, 용기있는 것의 부적절한 사례들이다. 정치학의 역사는, 과학의 역사처럼, 사물들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게 되는지에 관한 관점에서 쓰여진다.

 

    단지 영웅숭배가 도덕적 진보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하면, 그것은 혐오스럽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이라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for what little that is worth) 그의 실수가 성실한 것이었다고 어떤 사람이 인정하는 동안에도(while), 어떤 사람은 한 사람에 의해 혐오받을 수 있다. 노예제 폐지론자(The abolitionists)들은 리 장군이 노예제를 보존하려고 싸우겠다는 결정에 의해 혐오받았지만, 리 장군이 명예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아이히만이나 수슬로프와 식사를 하고 싶어하진 않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해 그들이 스스로에게 했던 이야기(the stories)는 오웰과 트릴링이 그들의 삶에 관해 스스로에게 했던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관해 하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성실함과 명예로움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말하고 스스로를 믿게 되는 이야기의 일관성의 정도에 의해 좌우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웅이 아니라면, 적어도 선한 것으로서 나타나는 그들의 삶에 관한 소설(a novel)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사람도 의식적으로 악하지 않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 속에 진짜로 담긴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기독교와 칸트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오직 그들이 심사숙고한 뒤에 빛으로부터 등을 돌렸기 때문에 나빠진다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이런 이야기들의 대부분을 불성실하고 자기기만적인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일관성은 선함을 위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일관성과 다른 어떤 대체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모든 성실한 정신에는 보이는, 조정하는 어떤 밝은 별.

 

    플라톤은 그르다.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을 할 때 또는 과학적 이론들 또는 종교적 신념들 사이에서 결정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일관된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역사의 심판이 언제나 우리 편이라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찰지게하는 것이 우리를 존경의 대상으로 만들지 또는 미래 세대의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맹세에 경의를 표하며, 히틀러를 죽이려던 슈타우펜베르크의 계획에 참여하길 거절한 관료들은 아주 나빠보인다. 맹세를 배반하고, 계획이 실패한 뒤 고문을 받다가 죽은 이들은 실제로 매우 좋아보인다. 그러나 각 그룹의 시야를 고정해준 어떤 별도, 그리고 각각 상대를 배반하게 한 별은 없었다.

 

    이런 별의 부재는 명예로운 사람들은 확실히 혐오스러운 것도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먼 후손들 또한 이런 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역사의 심판이란 완전히 그를 수도 있다는 것도 함축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하기를 멈춰야 한다거나, 또는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심지어 나치가 승리하고 모든 역사책을 그들이 쓸 수 있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슈타우펜베르크는 옳은 것을 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인간적인 비판적 지성은 곧 역사적 호기심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의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아이들이 존 라스켈보다는 기포드 막심이나 낸시 크룸과 더 비슷하게 된다는 신호를 보여준다면, 아이들을 꾸짖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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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직한 실수
    from 효진이네 2013-01-10 13:16 
    <리처드 로티, <Honest Mistake> in Philosophy as Cultural Politics 요약. 원문은 http://blog.aladin.co.kr/russell85/6072772> 로티는 '냉전적 자유주의자'라는 개념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이들은 냉전을 지지한 자유주의자들인데, 언듯 보아서는 형용모순이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경멸하는 데 이러한 표현이 쓰였다. 이런 칭호를 얻을법한 사람들은 주로 예
 
 
 

<윤리학특강 보고서. 제출은 영어로. 각주는 제거.>

 

 

요약

 

 

  아담 스미스의 도덕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공정한 관찰자이다. 우리가 어떤 도덕적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이 행위와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관찰자를 상상한다. 만약 그 관찰자가 우리의 행동이 적절하다고 시인할 경우, 그것은 도덕적인 가치가 있는 행동이 된다. 이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리는 주관적인 도덕적 판단에서 객관적인 판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과 손해 또는 좋고 싫은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행동에 관해 어떻게 생각할지를 도덕적 판단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정한 관찰자는 행동을 하는 당사자의 상상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가 상상하는 공정한 관찰자는 그가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사람들 이외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이 그 관찰자를 상상하는 사람의 문화적 맥락에 의존하는지, 혹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획득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만약 상상된 공정한 관찰자가 행위자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또는 그 사람들을 일반화한 어떤 존재의 시선이라면, 공정한 관찰자는 행위자가 살고 있는 사회의 규범과 관습과 일치하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그의 도덕철학 전체에 걸쳐서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이 보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듯하다. 그가 공정한 관찰자를 상정함으로써 노리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어떤 행위가 단지 지금 이 곳에서 칭찬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칭찬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우리의 최초의 도덕적 판단은 다른 관찰자들이 칭찬하는 행동을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유행과 관습이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일정정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하기도 있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내리는 도덕적 판단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는 두 가지 해석을 낳았다. 하나는 아담 스미스가 기술하듯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행동과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일치시키지만, 이런 칭찬에 관해 비판적으로 반성할 능력이 생긴 뒤에는 칭찬받을만한 행동이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해보는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관습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획득하고, 나아가서 도덕적 행동에 관한 보편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 가지 해석은, 공정한 관찰자는 보편적인 도덕적 판단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핵심은 공정한 관찰자는 그 행동의 적절함을 통해서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어떤 행동 자체에 내재된 옳고 그름에 의해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행동의 적절함은 공감을 통해서 설정된다. 하지만 그 공감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므로 행동의 적절함에 대한 나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내 주변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감정과는 공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행동의 옳고 그름은 여전히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칭찬하고 비난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도덕감정론의 5부와 6부에서는 이런 두 해석의 갈등이 드러난다. 그는 관습과 유행이 도덕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이들이 취미 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비해서는 그 정도가 미미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제시하는 사례는 오히려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거의 관습에 의존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반대로 6부에 등장하는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에서, 우리는 관습에 따라 판단하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도덕적 판단에 관한 아담 스미스의 이론 안에 어떤 긴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 관해서 기술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행동을 하는 것이 판단의 토대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그가 목표했던 바는 인간 본성의 구조를 통해서 특정한 행위에 관한 보편적인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구조 때문에,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관습의 강한 영향 아래 놓여있게 된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를 상정한 것은 도덕적 판단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 효과적인 전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회학적 속성 때문에 그 도덕적 판단이 인류 전체에 유효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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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아담 스미스의 도덕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공정한 관찰자이다. 우리가 어떤 도덕적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이 행위와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관찰자를 상상한다. 만약 그 관찰자가 우리의 행동이 적절하다고 시인할 경우, 그것은 도덕적인 가치가 있는 행동이 된다. 이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리는 주관적인 도덕적 판단에서 객관적인 판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과 손해 또는 좋고 싫은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행동에 관해 어떻게 생각할지를 도덕적 판단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정한 관찰자는 행동을 하는 당사자의 상상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가 상상하는 공정한 관찰자는 그가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사람들 이외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이 그 관찰자를 상상하는 사람의 문화적 맥락에 의존하는지, 혹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획득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만약 상상된 공정한 관찰자가 행위자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또는 그 사람들을 일반화한 어떤 존재의 시선이라면, 공정한 관찰자는 행위자가 살고 있는 사회의 규범과 관습과 일치하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는 『도덕감정론』의 5부에서 도덕적 판단의 기초인 도덕적 감정과 관습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의 시작에서 아담 스미스가 강조하는 것은 관습이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렇게 크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 사례는 네로와 클라우디우스의 폭정이다. 하지만 영아살해 등의 다른 사례는, 관습이 도덕적 판단에 충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보편적인 자비로움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다는 언급을 미루어 보면, 한 행위자가 그를 둘러싼 문화적 맥락을 벗어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담 스미스의 이론으로부터 도출되기 힘든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만약 관습이 도덕적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한 행위자가 상상할 공정한 관찰자 역시 관습에 의존적인 관찰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6부에서 드러나는 자만과 허영에 대한 분석은, 상상된 공정한 관찰자의 관점과 관습에 의존적인 관점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두 가지 현상은 자신에 대한 자신의 평가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 그리고 관습에 의존적인 내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는 내 주변 사람들 그 누구의 시선, 또는 그 시선을 일반화한 어떤 관점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분석은 공정한 관찰자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가?

 

  이 글은 공정한 관찰자와 관습 사이의 관계에 관해, 『도덕감정론』의 5,6부에 등장하는 논의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아담 스미스가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와, 그가 전개하는 이론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스미스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모든 도덕적인 판단의 기초가 행동의 적절함에 대한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이라고 주장하며 특정한 행동의 보편적인 도덕적 평가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 평가는 상상이라는 우연에 의존하며, 그러므로 문화적인 맥락을 벗어나기 힘들고 따라서 자신이 의도했던 결론을 도출하기 힘들다.
 

 

2. 공정한 관찰자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에게 본성으로 내재된 여러 능력 중에는 공감 능력이 있다. 공감은 상상을 통해서 내가 보고 있는 어떤 상황 속에 있는 대상이 느끼는 정념과 똑같은 정념을 가지는 능력을 뜻한다. 물론 같은 종류의 정념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훨씬 덜하다. 당사자가 느끼는 정념과 관찰자가 느끼는 정념 사이의 이 차이가 행위의 적절함을 결정하는 요소다. 어떤 정념을 표현하는 행동의 당사자는 관찰자가 상상을 통해 얻은 정념의 정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어떤 행동이 적절한 행동인지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는 무관하면서 우리의 행동을 관찰하는 어떤 사람을 상상한다. 만약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시인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다. 이 사람이 바로 공정한 관찰자다.

 

  그렇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누구인가? 아담 스미스는 이 공정한 관찰자가 지켜보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식으로 그에 대해 가정적으로 서술하기도 하지만, ‘내 가슴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가 실제로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것처럼 서술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가 적절한지에 관해 판단하는 과정에서 우선 고려되는 대상은,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 즉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이다. 한 사람은 이들의 시인과 부인을 통해서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 또는 적절하지 않은지에 관해 알아나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의 적절함을 판단할 때, 이렇게 배운 것에 의존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의존하는 내 주변 사람들의 판단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과 일치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내 주변 사람들의 판단 가운데 하나 또는 그것을 일반화한 것일 뿐인가?

 

  하지만 반대로 질문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만약 공감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우리는 이 본성에 반하는 행동 또한 적절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각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그러므로 자신을 돌보는 데 가장 알맞게 만들어져 있으며, 자연에 의해서 자신을 가장 먼저 돌보는 것이 권장된다. 하지만 공감 또한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자주 그리고 잘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돌보는 것은 자기를 돌보는 행동의 목록에 포함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관습이 부과하는 행동 가운데 인간의 이런 자연적 측면에 반하는 행동이 있다는 것을 반성을 통해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과연 그런 능력은 어떻게 생겨나며, 그 보편성은 보장되는가?
 

 

 (1) 공정한 관찰자와 자율적인 도덕적 판단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내리는 도덕적 판단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는 두 가지 해석을 낳았다. 하나는 아담 스미스가 기술하듯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행동과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일치시키지만, 이런 칭찬에 관해 비판적으로 반성할 능력이 생긴 뒤에는 칭찬받을만한 행동이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해보는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Evensky는 “A significant part of Smith’s career was devoted to teaching about ethics and his views how education shapes individual ethics are well developed” 라고 말한다. 즉 스미스의 설명은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은 이유에 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사람이 어떻게 어떤 행동을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게 되는 과정에 관한 기술에 가깝다. 같은 맥락에서 스미스는 가정교육, 가정도덕이 공립학교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훨씬 더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 사회가 칭찬하는 여러 행동의 유형들을 부모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교육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는가에 관한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관찰자들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된다. 그들의 인식적 능력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어떤 도덕적 판단 즉 적절함을 계산하는 데 고려해야 할 모든 상황에서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 한계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또 어떤 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한다. 그러므로 “We appeal to the sympathies of the impartial spectator, who is freed from the limitations of their knowledge and personal situation” 만약 이렇게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편파적이지 않은 관찰자로부터 시인될 수 있는 행동이라면, 스미스가 보기에 그것은 단순히 칭찬받는 행동이 아니라 칭찬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이다. “We can escape from the dictates of the general clamor because, according to Smith, although we seek praise, we also value the thought of being praiseworthy.” 공정한 관찰자가 모든 상황에 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행위자의 상상의 산물이고, 그러므로 행위자와 모든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반면 행위자나 다른 관찰자가 가지는 인식적 능력은 뛰어넘기 때문에,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은 객관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관습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획득하고, 나아가서 도덕적 행동에 관한 보편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Griswold는 “This is just what Smith says in referring to these standards as “the slow, gradual, and progressive work of the great demigod within the breast”” 라고 말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이런 능력을 획득한 사람들을 스미스가 demigod으로 은유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Evensky는, 미묘한 표현이긴 하지만, “We can move beyond the current norms of society. But we can never reach the limit.” 라고 스미스의 도덕심리학적 기술을 요약하고 있다.

 

 

 (2) 사회적 존재로서의 공정한 관찰자

 

 

  그러나 Evensky가 아담 스미스가 묘사한 도덕발달의 심리학을 요약하면서 마무리한 앞의 문장은 매우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사회를 넘어설 수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덕에 다다를 수는 없다. Evensky 스스로도, “There is no culmination, there is no final determination in Smith.” 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서문에서도 언급했듯 아담 스미스 역시 인간의 능력이 허용하는 일과 신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을 구분하고 있다. 만약 완전한 덕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적 행위의 형태나 속성을 가리킨다면, 여기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성취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이로부터 공정한 관찰자에 관한 또 다른 해석이 도출된다. 이런 주장의 핵심은 공정한 관찰자는 그 행동의 적절함을 통해서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뿐이라는 것이다. 행동의 적절함은 공감을 통해서 설정된다. 하지만 그 공감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므로 행동의 적절함에 대한 나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내 주변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감정과는 공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행동의 옳고 그름은 여전히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칭찬하고 비난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Forman-Barzilai는 세 가지 이유를 근거로 스미스가 보편주의자(세계시민주의자)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가운데 도덕적 판단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은 두 가지 점인 것 같다. 첫째는 국제관계에 관해 현실주의적인 스미스의 관점이다. 그는 모든 인간은 자연에 의해 자기가 태어나면서 소속되는 단체들 – 가족, 고향, 지역, 국가 등을 사랑하게 된다고 보았으며, 그러므로 애국주의자들의 희생은 아주 적절한 행위이며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의 완전한 시인을 받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에도 적용되어서, 이른바 자연스럽게 발생한 (도덕적) 편견이나 편파성은 국가에 대한 고귀한 사랑으로 규정된다.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단체들의 번영을 방해하는 다른 집단의 번영과 세력확장은 자연스럽게 혐오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또한 국가들 사이를 조정할만한 상위의 단체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 이는 공동체 단위 이상의 영역에서 적용되는 도덕적 규범이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스미스에게서 어떤 행동의 적절함을 판단할 수 있는 최초의 증거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도덕 발달의 순서에 따라, 특정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시인과 부인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A key implication of my interpretation here is that the Impartial Spectator is very much a cultural artefact, and not an independent, transcendent faculty likely to generate unbiased cosmopolitan judgments.”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도덕감정론』은 어떤 행동에 관한 판단 못지 않게 그 판단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발달하는지에 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Forman-Barzilai는 이것을 도덕적 삶의 인류학이라고 평가하는데, “Smith’s moral psychology is not merely an account of how selves are socialized. It is also a highly original anthropological description of moral culture.” 때문이다. 만약 스미스의 연구를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한 도덕적 문화의 오래된 특징을 일반화한 산물이며,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스미스가 사회를 넘어선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리란 전망에 비해서, 그 문화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문화 속의 관점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에 관해서 더욱 명백하게 서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와 다른 도덕적 삶의 방식을 맞딱드린다면, 우리는 공감의 본성에 의해서 그것을 수용하기 보단 주로 거부하게 될 것이다.


 

 

3. 사례? - 관습, 유행, 도덕적 감정

 

 

  『도덕감정론』의 5부와 6부에서는 이런 두 해석의 갈등이 드러난다. 5부는 관습과 유행이 도덕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언급하고, 6부는 자연에 의해 우리가 돌봐야 하는 것으로 권장되는 것의 순서에 관한 설명이다. 그러나 갈등이 드러나는 양상은 각 부분마다 다르다. 5부의 경우 그가 주장하고 싶어하는 바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관습에 크게 좌우되지는 않는다는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것이 자신의 관찰의 결과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나머지 문단에서는 거의 관습과 유행이 행위의 적절함에 관한 우리의 판단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사례가 제시된다. 즉 공정한 관찰자는 내가 어떤 문화에서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상황에서도 판단을 달리 한다.

 

  우선 어떤 동료들과 함께 지내느냐에 따라 행위의 적절함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다. 좋은 동료들과 지내면 적절함에 관한 감각에 예민해지고, 적절한 행동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어떤 시대의 유행에 따라서도 어떤 행위가 적절한가에 관해 다르게 생각한다. 연령이나 직업에 따라서도 다르고, 국가에 따라서도 다르며, 문명이 발달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도 다르다.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더 강한 절제를 적절하다고 하는 반면, 문명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않아도 사람들로부터 쉽게 적절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의 본성에 완전히 어긋나보이는 영아살해의 경우에도, 그 조건에 따라서는 관습으로서 인정된 경우도 있다는 것 또한 역사적 탐구의 결과로서 드러난다.

 

  물론 스미스 자신은 이렇게 관습의 영향을 받는 것들이 일반적인 양식이 아닌 특정한 행위 각각의 적절함에 대한 감각을 잃게 만드는 것일 뿐이며, 따라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영아살해를 경우에 따라 권장해야 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관습이 서로 다른 전통 아래서 때로는 정당화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스미스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스미스가 이 장을 비롯한 다른 부분에서 완전한 적절함에 들어맞는 행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런 행동을 관습에 의해서 금지하는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다면 그 사람은 그 행동에 대해서는 언제나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모든 점들을 고려하는 동시에 스미스가 암시하는 것처럼 관습과 무관하게 완전한 적절함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모든 관습에서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추상적인 언명이거나 또는 그 관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합의해 만드는 규약, 즉 또 다른 관습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4. 반대사례? -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

 

 

  하지만 반대로 6부에서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는 돌봄의 순서가 자연에 의해서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에 접하게 되는 단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 가장 마지막에는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 마무리된다. 또한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에서, 우리는 관습에 따라 판단하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내용이 시사하는 바는, 5장의 분석에서 제시된 바와는 정반대다.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신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가 관찰했을 때 옳은 것 즉 객관적인 것이 실제로 존재하며, 공정한 관찰자는 그것을 통찰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먼저, 스미스에 따르면 보편적인 자비로움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 실천이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추구하는 것 가운데 가장 숭고한 대상이라는 것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보편적인 자비로움을 실천한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그 행동을 완전히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것을 아주 쉽게 생각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리를 분별할 줄 알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resentment의 대상이 될 것이다. 또 사리를 분별할 줄 알고 죄가 없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힘들다. 이것은 실제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공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지만, 공정한 관찰자 또한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면 그에게 완전하게 공감하여 보통 사람들과 같은 유형의 생각에 도달할 것이다.

 

  다음은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자만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The proud man is sincere, and in the bottom of his heart, is convinced of his own superiority; though it may sometimes be difficult to guess upon what the conviction is founded.” 또한 허영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The vain man is not sincere, and, in the bottom of his heart, is very seldom convinced of that superiority which he wishes you to ascribe to him.” 여기에는 세 가지 평가가 존재한다. 실제 능력의 크기, 자기평가, 그리고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평가. 실제 능력의 크기는 현명한 사람이 그에 관해 내리는 평가로 간주되는데, 이것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로 대체해도 무방할 것이다.

 

  문제는 세 평가의 정도가 불일치할 때 자만과 허영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는 어떤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우리는 어떤 행동에 대해 평가하는 기준을 이런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제공받는다. 또한 그것이 어떤 추상적인 형태로 일반화된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것은 힘들다.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를 문화적 산물로 이해할 경우,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과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의 정도는 거의 동일할 것이고, 자만과 허영같은 현상은 일어나기 힘들다.

 

 

 

5. 결론 - 이론적 긴장

 

 

  이런 사례는 도덕적 판단에 관한 아담 스미스의 이론 안에 어떤 긴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긴장은 보편성을 비편파성으로 해석하려 한 스미스의 시도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 관해서 기술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행동을 하는 것이 판단의 토대라고 주장했다. 공정한 관찰자라는 상상은 분명히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내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려하면서 생겨나는 인간의 능력이다.

 

  반면에 그가 목표했던 바는 인간 본성의 구조를 통해서 특정한 행위에 관한 보편적인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구조 때문에,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관습의 강한 영향 아래 놓여있게 된다. 상상과 공정한 관찰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도약이 존재한다. 이것은 비편파성에서 보편성을 향한 도약이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를 상정한 것은 도덕적 판단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 효과적인 전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회학적 속성 때문에 그 도덕적 판단이 인류 전체에 유효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스미스의 의도는 아직 달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Smith, Adam. (1982)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D.D.Raphael and A.L.Macfie, eds. Indianapolis: Liberty Fund
Evensky, Jerry (2007) Adam Smith’s Moral Philosoph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Brown, V. and Fleischacker, S. (eds.) (2010) The Philosophy of Adam Smith. New York: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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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특강 발제.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Part 6의 Section 1,2 요약. 군데군데 틀린 해석으로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나 수정하지 못했습니다>

 

 

  이 장에서는 개인들의 성격에 관해 다룬다. 처음에는 개인 자신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측면에서 다룬다.

 

 

 

Section 1 자기 자신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덕, 신중에 관해

 

 

  (1-5) 모든 사람들에게 첫째로 고려되는 신경씀(care)의 대상은 몸의 보존과 그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우리에게 이런 대상들을 해치는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방법을 우선적으로 가르친다. 또한 사람들은 자라나면서 몸의 보존과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심스러움(foresight)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배운다. 이런 신경씀과 조심스러움을 몸에 익히면서 사람들은 조건(fortune)을 유지하고 증가시키는 기술들을 익힌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좋은 조건(advantage of fortune)을 가지고 있기도 한데, 명예(credit)나 지위(rank) 에 대한 존중은 이런 좋은 조건의 정도의 차이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존중의 대상이 되려는 욕망은 우리의 모든 욕망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 몸에 필요한 것이나 몸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을 향한 욕망은 이런 존중의 대상이 되려는 욕망에 비하면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지위나 명예 등은 특정한 행동이나 그 행동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감정들(신뢰, 경의, 선한 의지)에 달려있다. 신중의 덕은 이러한 건강함, 조건, 지위와 명예 등에 신경쓰는 태도에 관한 표현이다.

 

  (6-10) 일반적으로 안좋다가 좋아질 때 느끼는 기쁨보다 좋다가 안좋아질 때 느끼는 슬픔이 훨씬 크다. 그러므로 신중의 덕이 추구하는 가장 주요한 상태는 현상유지(security)다. 신중한 사람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복함을 보존하고, 적어도 손해가 나지 않게끔 행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진짜 지식과 기술, 근면성실함(assiduity and industry), 구두쇠(parsimony)에 가까운 절약(frugality)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신중한 사람의 행동거지는 진지하고 진심을 다해(earnestly) 공부하고, 진정성있고(genuine), 속이거나 현란하게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화법이 간결하고 겸손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업적을 자랑하고 다른 집단을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고, 간혹 그들과 교류를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로부터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의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다. 신중한 사람의 말은 신의성실하고(sincere), 거짓말 한 것이 들켜 불명예를 입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침묵을 지킨다. 신중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잔잔하지만 오래 가는 우정을 맺고, 젊은 날에 맺을만한 열정적이고 즉흥적인 관계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성이 좋지는 않다. 재미있는 수다를 떨거나 놀기 좋아하는 모임(convivial societies)에는 가지 않는다. 이들이 그의 삶의 방식인 절제나 근면함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중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귀에 거슬리지 않는 말을 하고, 불쾌하고 무례한 것을 싫어한다. 자신을 낮추길 좋아하고, 사회에서 통용되는 예법과 의식들을 존중한다. 이런 사람들은 탁월한 능력으로 큰 업적을 성취한 위인들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좋은 모범이 된다(보통 위인들을 닮으려는 사람들은 능력은 닮지 않고 나쁜 것만 배우는 경향이 있다).

 

  (11-13) 신중한 사람은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미래에 얻을 더 길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위해 현재의 여유와 즐거움을 희생한다. 이런 성향은 공정한 관찰자(가슴이 따뜻한 사람, the man within the breast)의 완전한 시인의 대상이다. 공정한 관찰자는(신중한 사람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감내한다는 둥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같은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 아마도 사람들이 현재의 여유와 즐거움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근면성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실제로도 그렇다. 신중한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면서 수입이 꾸준히 늘어나고, 조금씩 근면성실의 강제 그리고 여유와 즐거움의 부족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는 힘들었다가 즐거워진 것이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가 즐거워진 (근면성실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두 배의 만족을 느낀다. 또한 이렇게 얻은 온전한 평온(secure tranquillity)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새로운 일이나 모험을(enterprises and adventures) 벌이지 않고,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주 주도면밀하게 진행해서 자신의 상태가 안좋아지지 않도록 한다. 또한 신중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르는 분야에 관해 떠들고 다니는 사람(buster)도, 오지랖 넓은 사람(meddler)도, 상담가나 충고자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영향력을 가진다고 잘난 척하지도 않고, 당파와 파벌을 싫어하고, 야망이 없다. 공적인 일에 종사하더라도 자신이나 자기 일파(country)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성취할 수 있는 위대한 업적보다도 평온함을 선호한다.

 

  (14-16) 그러나 신중함은 이렇게 자신의 상황에 관해서만 신경쓰는 경우에는 가질만하고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신중함은 덕과도 함께일 수 있다. 개인을 넘어서서 더 고귀한 목적이나 덕(용맹함, 관용, 정의의 규칙에 대한 고려와 존중, 자기절제 등)과 신중함이 함께할 때, 그 상황을 신중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 이렇게 되려면 완전한 적절함에 맞춘 행동을 하는 습관과, 도덕적인 측면에 대해 세심하게 고려하는 지성이 필요하다. 반면 신중함은 악덕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완전범죄를 저지른 악당은 이 세계에서는 죄를 면한다. 이런 일이 빈번한 모임(society)에서는 아주 끔찍한 행위들이 친숙해진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체자레 보르지아는 이웃한 나라의 왕자들을 거짓으로 초대해서 죽였고, 마키아벨리는 왕자들의 아둔함을 탓하는 글을 남겼다. 게다가 그와 비슷하게 행동하는 것이 사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신중함과 결합된 악덕은 간혹 그런 일을 저지른 위인들에 의해서 이런저런 칭찬을 받는 반면, 정반대로 신중함이 동반되지 않은 이러한 행동들은 아주 비열하고 천박한 것으로 여겨지고, 보통 그 죄를 이 세계에서 치른다.

 

  그러므로, 신중함은 덕과 묶였을 때 가장 고귀하게 여겨지고, 신중하지 않음은 다른 악덕들과 묶일 때 가장 천하게 여겨진다.

 

 

 

Section 2 다른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인의 성격에 관해

 

 

  서론

 

 

  (1-3)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거나 이롭게 하거나 둘 중에 하나의 측면에서 영향을 미친다. 불의에 대한 적절한 resentment는 공정한 관찰자의 시각에서 우리의 이웃의 행복을 우리가 상처내고 방해하는 것을 모든 측면에서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동기다. 다른 동기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정의의 규칙을 위반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주(state)나 커먼웰스(commonwealth)의 지혜는 이런 피해로부터 자신의 권위 아래 놓여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규칙들을 만드는데, 이것이 민법과 형법(civil and criminal law)이다. 물론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 또한 종종 덕을 동반하는 행동에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우리가 선행을 하도록 방향을 설정해놓고, 그것을 인간들이 활용하는 상황을 기획했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질서(order)이다. 질서는 개인들 사이의 질서와 모임들(society) 사이의 질서로 설명할 수 있다.

 

 

 

Chap 1 자연에 의해서 개인들이 우리의 신경씀과 주의에 들어맞게 되는 질서에 관해

 

 

  (1-4) 모든 사람은 우선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신경쓴다. 우리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내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게끔 만들어져있다. 그래서 자신의 기쁨과 아픔에 대한 감각이 본래적이고, 다른 사람의 기쁨과 아픔에 대한 감각은 반영이거나 상상이다. 자기 자신을 제외하면 같은 집에 사는 가족들이 애정(affection)의 대상이 된다. 가족들의 행동은 나의 행복과 불행에 영향을 많이 미치기 때문에, 가족들이 행복하도록 신경쓰는 것은 나의 행복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족들 사이의 애정 가운데서도 아이가 부모에게 느끼는 애정보다 부모가 아이에게 느끼는 애정이 더 크다. 이것은 아이의 연약함 때문에 아이의 생사와 성장이 부모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늙은이보다 기대되는 바가 많다. 그래서 아이의 죽음은 매우 슬프지만 늙은이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덜 슬프다. 그 다음에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낸 형제자매 사이의 우정인데, 이들은 마음이 가장 연약한 시기에 서로 공감하는 관계로 맺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런 가족들 사이에는 서로를 도와줘야 할 의무감이 지워지고, 이 의무감은 상호공감을 더욱 빈번하고 습관적으로 만든다.

 

  (5-7) 형제자매의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인 형제자매들 사이에 머무르며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좋은 유대관계(agreement)를 맺는다. 그러나 이들의 유대관계는 그들의 부모인 형제자매들의 유대관계에 의존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 가족의 구성원은 아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중요성은 형제자매들보다 훨씬 덜하다. 그래서 보다 덜 교류하는 친척은 다른 가족들에 비해 덜 중요하다. 거리가 멀면 애정도 그만큼 낮아진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애정은 습관적인 공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상호공감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이것이 습관화되어 애정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특정한 상황 속에서는 애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기대한다. 그래서 아이를 보고도 무덤덤한 부모,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아이는 증오와 공포의 대상처럼 보인다.

 

  (8-11) 이런 사례들이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상호공감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일반원칙에 대한 존중은 그런 애정과 비슷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부모와 자식 또는 형제자매들이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는 어떤 경우, 같은 집에서 사는 만큼의 애정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가족들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지는 않으며, 같은 집에서 같은 가족구성원으로서 같이 살아가길 바란다. 때로는 보고 싶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그들이 만났을 때는 이런 애정을 강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같이 만나서 오랫동안 지내다보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같이 살아가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부족한 공감능력 때문에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곧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식을 것이고, 일반적으로 가족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애정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함은 거의 즐길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반적인 규칙 자체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안되는데, 그것은 가족들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아이들을 멀리 떨어져있는 학교나 대학, 수녀원이나 신부수업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제도는 가족적인 도덕(domestic morals)과 가족적인 행복(domestic happiness)을 해친다. 가족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아이의 공감능력을 키운다. 학교를 가야한다면 통학을 시키는 것이 좋다. 어떤 공공교육도, 그것을 통해 잃어버리는 가족적인 도덕과 행복을 같거나 비슷한 정도로 보충해줄 수는 없다. 가정적인 교육은 자연의 제도이고, 공공교육은 인간의 고안물이다. 어느 것이 더 현명한지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이른바 ‘핏줄의 힘’이라고 불리는 것이 비극이나 소설에서 중요한 장치로 쓰이지만, 이런 것은 비극이나 소설 밖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같은 집에서 함께 자라나지 않았는데도 신비한 힘에 이끌려 서로를 알아보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다.

 

  (12-16) 시골지방(pastoral countries)과 법의 지배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지방(country)에서는 같은 가문(family)의 모든 후손들이 서로 이웃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들은 스스로를 공동으로 방어한다. 의견일치와 분열에 따라 유대가 강해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한다. 또한 다른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과의 교류보다 자신들끼리의 교류가 훨씬 더 빈번하다. 반면 법의 지배가 제대로 자리잡은 것처럼 보이는 상업적인 지방(commercial countries)에서는 후손들이 모여 살아야 할 동기가 없으므로 뿔뿔이 흩어진다. 교류에 관한 기억도 곧 잊혀진다. 이런 상태는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심해진다. 이런 지역에서는, 잘 배치된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이 만들어진다. 이는 가족들 사이에 있는 애정과는 같지 않다. 우정의 상대는 직장동료들, 거래처들이고, 이들은 또 다른 형제들이라고 불린다. 이런 관계는 necessitudo라는 라틴어의 의미에 함축되어있다.

 

  (18) 이렇게 생겨난 어떤 우정들 가운데서는, 좋은 행동들에 관한 경의와 시인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들도 있다. 이런 우정은 자연적인 공감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덕있는 사람들은 그 행동들 속에서 완전한 신뢰감이 느껴진다. 이런 의미에서 악덕은 언제나 변덕스럽고, 오직 덕만이 규칙적이고 질서가 있다. 또한 이런 덕에 대한 사랑에 기반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덕있는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덕있는 사람들 사이의 우정은, 둘 이상의 관계를 맺는다는 이유에서 생기는 질투나 취미, 가벼운 성격적 특성에 의해 맺어진 우정과는 다르다.

 

  (19) 우정을 통해 친절함이 베풀어진 대상은, 자연에 의해서 자신에게 자선(친절함)을 베푼 사람을 친절함의 특별한 대상으로 삼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 사람은 자선을 베푼 사람에게 되갚거나 또는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들이 느끼는 고마움이 자선에 상응하지는 않지만,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고마움은 자선에 상응한다. 그런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자선을 베푼 사람은 오히려 그 덕있음이 배가되어 보인다. 자선이나 친절함이 베풀어지면 그것은 언제나 여러 다시 고마움 등의 형태로 돌아오고, 그래서 ‘친절함은 친절함을 낳는다.’고 말할 수 있다.

 

  (20) 이와 같이 친절함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실제로 우정을 맺고 있지는 않지만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구분이 생겨난다. 이 가운데, 지위의 구분과 모임(society)의 질서는 운이 좋은 사람, 부유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등에 대한 존중에 토대를 둔다. 인간의 비참함을 줄이는 것은 아주 불운한 사람, 가난한 사람, 가엾은 사람 등에 대한 동정심에 토대를 둔다. 흔히 도덕주의자들은 동정심과 자선을 강조한다. 그리고 지위나 질서에 대한 존중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옳지 않다. 자연은 지혜나 덕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보다는 태생과 조건 등 명백하게 보이는 것에 지위나 질서가 토대를 두어야 그것이 더욱 확고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혜나 덕 같은 것들은 아주 세심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잘 보이지 않고 틀리게 보일 가능성이 있지만, 태생이나 조건, 환경 등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더욱 확고한 토대 역할을 하기에 더욱 적합해보인다.

 

  (21) 그러므로 동등하게 덕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평범한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을 더 우러러보게 되고 그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요인이 평범한 사람에 비해서 위대한 사람이 더 많은데, 이 요인이 많으면 그 사람의 덕 또한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이나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주제가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겪는 고난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2) 서로 다른 애정들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때, 우리가 규칙에 의지해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힘든 일로 보인다. 이들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규칙에 따라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Chap 2 자연에 의해서 사회(모임)들이 우리의 자선에 들어맞게 되는(recommand) 그런 질서에 관하여

 

 

  (1-3) 개인들에게 해당하는 질서와 동일한 원리가 사회들에 해당하는 질서에도 적용이 된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그의 보호를 받고 있는 주(state)나 영지(sovereign)는, 우리의 행동이 그의 행복과 불행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또한 우리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은 주나 영지의 번영과 행복에 어느 정도 의지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연스럽게 애정의 대상이 된다. 다른 모임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면에서 앞서고 있으면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반대로 뒤처지고 있으면 부끄럽다고 여긴다. 우리는 우리와 소속이 같은 위인들을 더욱 편파적으로 좋아한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애국자들은 가장 확실하게 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평한 관찰자의 시각에서 허용될법한 것들에 헌신한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애국자들은 감탄, 찬사, 경이의 대상이 된다. 반면 적과 내통하는 반역자들은 자기 자신만을 고려하고 자신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우리 종족(our own nations)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종족의 번영과 세력확대를 질투하기도 한다. 이들 사이에는 정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고 해도 가장될(pretend) 뿐이다. 그래서 이들이 성장하기 전에 먼저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우리 종족에 대한 가장 고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하는데, 로마의 대 카토의 연설문 마지막 문장이 좋은 예다. 이것은 다른 종족에 대한 광기를 일으키는, 강력하지만 조잡한 애국주의의 표현이다. 반면 아버지 스키피오(스키피오 나시카)의 연설문 마지막 문장은 적의 번영에 반감이 적은, 확장되고 깨어있는 생각의 자유로운 표현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사람들도 서로 이런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의 군사력 증강에만 신경을 쓰고, 내적인 행복과 번영, 수확, 매뉴팩처들의 개선, 상업 규모과 치안력과 항구도시와 항만시설의 증가, 모든 인문학(liberal arts)과 분과학문의 연마 등에 경쟁심을 느낄 경우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것들이 진정한 경쟁의 대상이며,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이런 것들을 진작시켜야 한다.

 

  (4-6) 자신의 지역(country)을 사랑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과 독립적이며, 조화롭지 않을 때도 있다. 만약 이 두 가지고 조화롭다면, 프랑스는 영연방에 비해 인구가 3배 정도 많으므로, 인류 전체의 측면에서는 프랑스의 번영이 더욱 높게 평가를 받아야한다. 그러나 영연방의 시민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류 전체의 측면이 아니라, 그것과 별개로 자신의 지역을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들이 어떻게 하면 인류 전체의 행복을 더 잘 진작시킬 수 있을까에 관한 자연의 계획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족적인 편견과 적대감은 바로 이웃한 종족 너머로는 거의 확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자연적인(natural)으로 간주되지만,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가장 넓은 범위의 공적인 자비로움은 이런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나 평화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이런 것들을 기획하는 정치가들의 자질이다. 그러나 이들은 보통 자기 편의 이익에 대한 고려만 가지고 있다. 가끔은 그 고려가 확장되기도 하는데, 유럽 전체의 평화를 염원하는 프랑스의 전권대사 아보나 프랑스에 반대해 유럽의 자유를 확장시키려 한 윌리엄 왕 같은 사람이 그렇다. 현재 앤 여왕의 의회가 이런 정신의 일부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7-10) 모든 독립적인 주는 각각 고유한 권력들(powers), 특권들(privileges), 면책권들(immunes)을 가지는 다양한 다른 집단들(orders)과 모임들(societies)로 분할된다. 모든 개인은 이들 중 하나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린다. 개인들의 이익이나 자부심 등은 그 집단과 연결되어있으며, 따라서 개인들은 자기 집단의 권력들과 특권들을 확장하고 싶어하고 다른 집단에 의해 침해당했을 때 아주 열심히 방어한다. 헌법I(constitution)은 이러한 집단들이 나누어진 방식과 각각의 권리들(권력, 특권, 면책권)을 형성하는 방식에 의지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헌법의 유지 여부는 침해로부터 자신의 권리들을 보호하는 능력의 정도에 달려있다. 헌법은 하위 부분들의 지위와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다소간 교체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런 집단들과 모임들은 그들을 보호하는 주(state)에 의존적이다. 그러나 종종 주는 하위 부분들에게 권리를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정책을 위해서는 창조의 정신(spirit of innovation)을 발휘해야 한다. 이런 창조의 정신을 통해 주는 집단들과 모임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한다. 이것은 주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안정성과 영구성에 공헌한다.

 

  (11-12) 우리 지역을 사랑하는 것은 두 가지 원칙을 포함한다. 첫째는 헌법과 실제로 확립된 정부의 형태를 향한 존중과 존경이고, 둘째는 동료 시민들의 조건(condition)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만들려는 진지한 욕망이다. 첫째를 위반하면 시민이 될 수 없고, 둘째를 위반하면 좋은 시민이 될 수 없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대개 이 두 원리가 산출하는 행동들이 일치한다. 확립된 정부의 지원은 시민의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적인 불만과 파벌(faction)과 무질서의 시대에는, 이 두 원리는 양립불가능하게 보이는 서로 다른 행동을 산출한다. 즉 동료 시민들의 조건을 유지해주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 개각이나 개혁 등의 조치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애국자들에게는 낡은 것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또는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는 등 가장 뛰어난 수준의 정치적 지혜가 요구된다.

 

  (13) 외국과의 전쟁과 내전(civil faction)은 공공정신(public spirit)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무대이다. 전쟁에서 열심히 봉사한 사람은 종족 전체의 바람을 만족시키며, 그래서 보편적인 고마움과 찬사의 대상이 된다. 내전(civil discord)에서 서로 대립하는 각 파당의 지도자들은 자기 파당의 사람들에게는 좋게 보이지만 다른 파당의 사람들에게는 의심스럽고 나빠보인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얻은 영광은 일반적으로 내전에서 얻을 수 있는 영광보다 순수하다.

 

  (14-15) 그러나 자신과 대립하는 파당의 사람들까지 설득할 수 있는 온건함을 지닌 특정한 파당의 지도자의 경우에는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성과보다 더한 공헌을 하기도 한다. 그는 헌법을 다시 수립하고, 개혁자와 입법자로서의 덕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며, 그의 지혜로움에 의해 만들어진 법들은 후세의 평온과 행복을 보장할 것이다. 이러한 공공정신은 동료 시민들이 겪고 있는 불편함에 대한 진정한 공감에 토대를 둔다. 체계의 정신(spirit of system)은 이러한 공공정신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불평분자들의 파당은 지금 불편함과 걱정거리들이 있다는 것을 그럴듯하게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를 통해 미래에 얻게 될 보상으로부터도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개혁적 입법을 주장한다. 이들은 몇 세기에 걸쳐 시민들의 평화와 치안을 유지해온 제도들의 핵심적인 부분들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우리가 경험해본 적도 없고, 그 당파의 지도자들에 의해 현란하게 꾸며진 이상적인 세계 속의 공상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들은 처음에 자기 파벌의 세력 확장만을 꾀했겠지만, 이내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거대한 개혁을 기획한다. 그 지도자들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게끔 도와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들에 의해서 그러한 불편함과 걱정거리들을 없앨법한 온건한 해결책들은 자취를 감춘다.

 

  (16-18) 공공정신이 발휘된 사람은 이미 확립된 권리들을 존중한다. 그 권리들이 악용된다고 봐야 하는 때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없애기보단 적절히 조정하는(moderating) 것에서 만족할 것이다. 그는 이성과 설득을 사용한다. 그것으로 극복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폭력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조정하려고 노력한다. 올바른 것이 아예 확립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개선(ameliorate)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본다. 가장 좋은 법이 확립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치 솔론처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법들의 체계를 확립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반면 체계의 인간(the man of system)은 자신에 관련된 것만 가장 잘 아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신의 상상 속에서 완벽한 정부를 확립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현 상태의 유지에서 나오는 이득이나 그에게 반대할 편견들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체스판에서 말을 만지듯이 서로 다른 구성원들을 조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체스판의 말들 각각이 고유한 운동의 원칙(principle of motion)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다. 입법자가 고려하는 방향과 사람들의 고유한 운동의 원칙이 일치한다면 그 모임은 행복하고 성공적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매우 불행할 것이고 무질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이나 정책의 완전함에 대한 생각은, 정치가의 관점을 바로잡는데는 필요하지만,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그것을 확립시키려 한다면 심각한 오만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자신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가장 높은 기준으로 세우는 것이다. 또한 커먼웰스 안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지혜롭고 가치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료 시민들은 그에게 들어맞아야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영지를 가진 왕자들(sovereign princes)이 매우 위험한데, 이런 오만함에 그들이 매우 친숙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국이나 왕국의 개혁자가 헌법에 관해 생각하면 그들을 자신들의 의지를 거스르는 반대자라고 생각하고, 그 헌법의 그른 점들을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또한 주(state)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만, 자신이 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가장 큰 목표는 반대자를 제거하고, 귀족(nobility)의 권위를 감소시키고, 지방과 도시의 특권들을 없애버리고, 그들의 명령에 반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주(state)의 위대한 개인들과 위대한 집단들을 가장 쓸모없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Chap 3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관하여

 

 

  (1)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조국(country)보다 더 넓은 모임(society)으로는 거의 확장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선한 의지에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우주의 무한함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아야 하고 또한 그 불행에 반대하지 않아야 하는 죄없고 지각 있는(sensible)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며, 지각이 있으면서도 해를 끼치는(mischievous) 존재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화가 치민다. 오히려 그런 화를 낳는 의지(ill-will)은 보편적인 자비로움의 결과, 즉 그 악의 때문에 불행해진 죄없고 지각 있는 존재의 비참함과 resentment에 우리가 공감한 결과다.

 

  (2) 보편적인 자비로움은 우주의 모든 거주자들이 자연의 운동을 방향지어주고 언제나 행복의 가장 큰 양을 변치 않는 완전함에 의해서 결정짓는 위대하고 자비롭고 전지한 존재(신)의 직접적인 돌봄과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견고한 행복의 재료도 될 수 없다. 반대로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비춰봤을 때 이렇게 신이 없는 세계라는 혐의는 무한하고 불가해한 모든 영역이 비참과 불행으로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는,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우울한(the most meloncholy of all reflections)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상상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런 무서운 생각은 결코 번성할 수 다. 또한 괴로운 역경의 모든 슬픔도 현명하고 덕있는 사람들에게서 신이 존재하는 체계(the contrary system)의 진실에 관한 습관적이고 온전한 신뢰에서 나오는 온전한 기쁨을 결코 앗아갈 수 없다.

 

  (3) 덕있는 사람은 사적인 이익을 자기가 속한 사적인 집단이나 모임의 이익에 공헌(sacrificed)되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바라고 있다. 이런 집단이나 모임의 이익은 또한 국가(state)나 주권(sovereign)의 더 큰 이익에 공헌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바란다. 하지만 그것도 단지 부분적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같은 방식으로 앞의 모든 이익을 신이 직접 관리․감독하는 우주 전체, 모든 지각 있고 지적인 존재들의 모임의 더 큰 이익에 공헌해야 한다고 바라야 한다. 자비롭고 전지한 존재는 보편적인 좋음을 위해서 필요하지 않은 부분적인 악은 하나도 없는 체계를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는다면, 그리고 모든 사물들이 연결되어있고 서로 의존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자기 주변(본인, 친구, 모임, 조국)의 불행을 우주의 번영에 필요한 것으로서 생각해야 하고, 그래서 단지 불행을 감내함에 복종해야 할 것으로만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감내함을 진지하고 경건하게(devoutly) 소망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4) 이렇게 우주의 위대한 감독자의 의지를 감내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봐도 인간 본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좋은 병사들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아주 외로이 떨어진 진지(forlorn station)으로도 진군하며, 이것을 위험 없는 곳에 나아가는 것보다 더 기꺼이 받아들인다. 앞의 상황에서 그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뒤의 상황에서는 단지 일상적인 의무에서 오는 지루함만 느낀다. 앞의 상황에서 그들은 더 큰 체계를 위해 자신들을 공헌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순종적인 복종 뿐만 아니라, 종종 환희와 함께한다.

 

  군대의 어떤 행위자도 가장 위대한 우주의 행위자보다 더 끝없는 신뢰와, 열렬하고 열정저긴 애정을 받을만해보일 수는 없다. 개인적인 불행은 가장 큰 공익 속에서, 즉 현명한 사람은 자기 주변을 마치 우주의 외로이 떨어진 진지에 놓여지게 된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것이 단지 이런 분배에 복종하는 하찮은 감내함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기쁘게 껴안으려 노력해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해야 한다.

 

  (5-6) 언제나 가능한 행복의 가장 큰 양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주의 무한한 작동을 고안하고 행동해왔던 이러한 신의 계획(idea)은 가장 숭고한 인간적인 관조의 모든 대상이다. 다른 것은 비교적으로 수단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관조에 능한 사람은 존경의 대상이 된다. 또한 어떤 종교적인 관점에서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다른 것들보다 우선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합리적이고 지각 있는 존재들의 보편적인 행복을 돌보는 것은 신의 일이지 사람의 일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상대적으로 하찮은 부분, 자기 주변을 돌보는 일이 할당되는데 이것이 그의 능력에 더 알맞기 때문이다. 그가 더 숭고한 것을 관조하는 데 빠져있다는(occupied) 것이 주변을 돌보지 않는 것의 변명이 되진 않는다. 또한 그런 관조하는 철학자들의 가장 숭고한 생각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작은 활동적 의무에 대한 무시를 거의 보충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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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연구 발제. 로티, 『철학과 자연의 거울』 5장 요약>

 

 

1. 심리학에 대한 의심들

 

 

  로티가 옹호하는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정신적 존재자 또는 심리학적 과정과 같은 개념들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신적인 것을 대체할 다른 개념이나 존재자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정신적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논란만 가중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초점은 근대철학의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피해가면서 환원주의적인 성향 또한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다는 것에 맞춰져 있다.

 

  심리학은 이러한 정신적 존재자나 심리학적 과정 같은 개념들이 가리키는 대상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다. 만약 인식론적 행동주의가 맞다면, 심리학은 존재하지 않는 엉뚱한 대상을 연구하고 있는 셈이다. 심리학의 이런 특성은 “인지적 과정과 구조라는 신화”, 또는 “데카르트적 신화” 등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철학적 비판과 마주한다. 이런 측면에서 두 가지 점이 놀라운데, 하나는 정신적 존재자라는 개념에 관한 철학적 포기가 심리학의 활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만약 그 철학적 기원으로부터 수 세대가 지난 지금도 자립적일 수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철학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이 자체적인 절차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비판받을만한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절차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것을 가리키는 용어들의 의미는 행동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정신적인 것을 연구하는) 심리학은 행동과 환경 사이의 경험적 관계에 대해서만 관심을 둘 수 있다”는 것으로 비약하는 조작주의적 오류(조작주의(operationism) 과학철학은 과학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는 그것을 규명해내는 절차(operation)를 축약해서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저것의 길이는 6미터이다.’는 ‘표준적 미터법에 부합하는 길이 측정 도구를 저것 옆에 가져다 댔을 때 그 숫자가 6이다.’ 라고 말하는 식이다.), 즉 정신적 존재자를 설명하기 위해 환경을 끌어들이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잘못된 추론이라는 점은, 정신적 과정인 인지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적인 과정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통해 지적된다. 그러나 조작주의적 오류에 대한 이런 지적 또한, 단지 내적인 것을 옹호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에 지나지 않을 뿐, 의미있는 경험적 발견을 이끌어내는 이론적 배경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심리학자들이 이런 조작주의적 오류에 왜 쉽게 빠지는지, 그것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를 분석해보아야 한다. “철학자들은 왜 심리학자들이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적 존재자나 과정들을 상상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가?” 철학자들은 이렇게 과정에 기반해 인간을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철학자들의 눈에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기계적 설명을 더욱 강화하려는 열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공포감은 더욱 늘어난다.

 

  통합과학에 대한 열망은 이런 공포감을 부추기는 근거가 된다. 이것은 환원주의에 기반을 두는데, 양자역학에 의해서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사회적인 영향력은 강하다. 콰인 이전의 환원주의자들은 물리과학이 사용하는 용어로 모든 것을 환원해야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콰인 이후의 사람들은 기능을 표현하는 용어들을 구조를 표현하는 용어들로 바꿈으로써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신적인 존재자에 대해서 다루는 심리학은 정신적인 것이라는 자신의 탐구대상을 여전히 유지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신경생리학으로 대체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심리학은 정신적인 것에 관한 연구에서 위에 표현된 태도들과 유사한 경향을 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심리학이 유령을 불러들임으로써 과학적 활동을 방해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인상은 두 가지 원천에서 비롯된다. 첫째는 의식에 대한 데카르트식의 생각과 영혼이 육체에 대해 독립적이라는 고대의 생각을 뒤섞어놓은 전통이다. 둘째는 내적인 반성은 특권적인 접근을 전제하며, 이러한 접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지위가 다른 존재자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내적인 반성에 입각한 인식론적 접근은 내적인 반성의 특권적인 접근은 사회적인 친숙함의 다른 이름이라는 셀라스의 논의에 의해서 무력해진다. 만약 특권적 접근을 사회적인 친숙함으로 바꾼다면, 내적인 반성은 사회적으로 친숙한 것을 발견하는 방법으로서 다시 그 인식론적 지위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내적인 반성은 정신적 존재자와는 무관한, 물리적 과정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콰인과 셀라스의 논증은 심리학이 정신적 존재자를 붙들어매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가로막는다는 경험주의 철학자들과 물리주의 철학자들의 의심을 어느 정도는 완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생각에 기반해, 이 장에서는 지식의 문제와 관련된 인식론과 경험적 심리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둘은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따라서 경험적 심리학으로 인식론적 작업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인식론이 문제로 등장한 문화적 배경과 경험적 심리학이 인식론에 문제를 제기하는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인식론을 경험적 심리학으로 대체하거나 보충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제안들을 검토해봐야 한다. 첫째는 이론과 증거 사이의 관계를 심리학으로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유비하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을 제안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고방식을 통해 인간에게 있는 것으로 간주된 ‘정신적인 것’에 관해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2. 인식론의 부자연스러움

 

 

  콰인은 「자연화된 인식론」에서 인식론적인 문제가 있다는 환상에 빠진 철학자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하며, 그래서 인식론은 심리학-자연과학의 일부분으로 끌어내리고, 물리적 인간의 입력과 출력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식론은 빈약한 입력-증거와 풍부한 출력-이론 사이의 연결, 그리고 이론이 어떻게 증거들을 초월하는가를 알아내려는 학문이다. 그러나 철학사를 비추어 보았을 때 이런 질문이 제기되고 그것이 답을 내야만 하는 중요한 질문으로 부각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경향의 시초인 데카르트는, 스콜라주의가 아주 사소하다고 간주한 것을 진지하게 탐구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이후로 인식론이 제일철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간단히 답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제기가 되는 맥락으로부터 콰인을 떨어뜨렸을 때, 과연 그가 주장하는 이론과 증거 사이의 관련성이 인식론적 문제와 얼마만큼 연관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인가?

 

  인식론과 경험적 심리학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증거, 정보, 입증 등 두 영역에서 동시에 쓰이는 단어들이 각 영역에 맞게 엄밀하게 사용되지 않고 느슨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콰인은 신경을 통해 입력되는 것들을 원초적인 정보로서 간주하고, 이것을 인식의 토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경에 입력된 전기적 신호들은 어디에서 정보로 바뀌는가, 그곳이 어디인지 경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면, 경험적 심리학은 이런 작업에 실패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콰인은 이런 장소들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경험적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콰인은 이와 모순되는 듯한 진술을 하기도 한다. 즉 인식론이 경험적 심리학으로 대체된다면, 우리는 경험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외부세계에 대해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인식의 주체를 외부에 대응하여 그것에 관한 정보로서의 출력을 생산하는 (기계적) 존재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식론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며, 또 인식론자들이 단순히 인식주체의 작동방식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식론적 문제에 관한 콰인의 해법은 그렇게 적절해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 대해 콰인은 신경에 입력된 전기적 신호의 결과로서의 정보는 인과적으로, 그리고 그것을 기술하는 관찰문장은 인식론적으로 말하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도 적절해보이지는 않는다. 콰인이 처음에 의도했던 것은 인식론을 자연화해 경험적 심리학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찰문장들 간의 정당화 관계는 경험적 심리학의 대상이 아닌 사회학이나 과학사의 연구대상이다. 따라서 콰인의 제안은 그의 의도와 조화롭지 않다.

 

  인간이 관찰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콰인은 관찰의 과학적 객관성을 상호주관성으로 대체한다. 이렇게 되면 관찰문장은 “동일한 자극이 동시에 주어졌을 때, 언어를 사용하는 모두가 동일한 예측을 하게 되는 문장”이며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언어공동체 안에서 과거의 경험이 다르다는 점에 민감하게 변화하지 않는 문장”으로 정의된다. 또한 몇몇 아주 특수한 예들을 제외한 “현재의 감각자극에만 의존하며 문장을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저장된 정보에 의존하지 않는”것을 관찰문장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을 경우에는, 관찰문장에 대한 연구는 더욱 더 심리학이 아닌 사회학과 과학사의 연구대상이 된다. 상호주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심리학은 적당하지 않고, 그것을 문장과 그 문장을 지지하는 이론 내지는 담론 수준에서 풀어가는 사회학이나 과학사가 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콰인의 의도와는 어긋난다.

 

  상호주관성으로 관찰문장의 정의하는 그의 시도는 자신의 의도를 뒷받침하는 데 또 다른 난점을 안고 있다. 그가 말하는 신경입력이나 관찰문장은 기존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는 인식론적 문제를 경험심리학으로 해결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식론적 문제를 묻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우회한다. 그러나 상호주관성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그가 우회하고자 했던 문제, 즉 인식론적 정당화의 문제와 다시 마주하게 되고, 그것은 경험적 심리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인식론적인 문제의 전통을 잇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콰인의 논의는 과학과 철학이 연속적이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 연속성이 철학적 골칫거리들을 해결하는 방법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로티는 과학과 철학이 동시에 진행된 작업이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로티가 보기에 콰인과 같은 논의는 철학(인식론)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화 속에는 어떻게 철학이라는 영역이 자리잡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것은 왜 심리학적 탐구를 통해 해소될 수 없는가? 듀이는 이런 질문에 대해 비과학적인 측면의 여러 동기들을 언급하며, 이들에 대한 입장으로서 현재까지의 철학과 미래의 철학을 나눈다. 반면 콰인은 경험론의 입장을 선호하며, 이들이 잘못된 의미론에 의해 인도되지만 않았다면, 경험적 심리학을 인간을 연구하는 방법으로서 제대로 확립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콰인의 이런 입장에는 실재의 모습에 접근하는 우리의 능력이 과연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회의주의에 대한 로크의 관심과, 회의주의는 무능력하다고 하는 콰인의 주장이 은폐되어있다. 만약 회의주의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그 자체가 회의주의의 대상인 경험의 요소를 곧바로 지식의 요소로 간주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역시 설명의 요소는 정당화의 요소가 될 수 없다.

 

 

 

3. 진정한 설명으로서의 심리학적 상태

 

 

  “이론과 증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의미한 심리학적 이론을 얻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공공의” 정당화를 상황이나 다른 주장을 통해서 “내부적으로” 재생산할 이론이 필요하다.” 앞의 논의와 이어서 이 장의 도입부인 이 문장을 해석하자면, 관찰문장들을 조합하고 초월하여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에 관한 이론이 만들어져야만 우리는 이론과 증거의 관계에 대한 유의미한 심리학적 이론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흔히 이를 위해 사용되는 심리학의 가정(이자 연구대상)이 ‘정신적 존재자’이다. 이 정신적 존재자는 이론과 증거 사이를 매개하는, 정당화를 위한 개념적 수단이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들은 이런 매개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관해 정당화를 요구하는, 이른바 무한퇴행의 문제가 ‘정신적 존재자’에 관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경험과 외부가 일치한다고 알게 되는 것은, 일치가 무엇인지에 관한 이해를 반드시 먼저 품고 있어야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무한퇴행을 끊기 위해서는, ‘어떠어떠하게 보인다’는 것을 ‘어떠어떠한 것이 있다’로 추론하는 독단적 도약이 필요하다. 이 독단적 도약은 로티가 비판하는 혼합, 즉 설명과 정당화를 혼동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반면 이것이 독단적 도약이라기보다는, ‘항상성’을 띄는 최초의 과정으로서 보아야한다고 생각하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설명과 정당화를 분리하면,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의 동일성과 경험된 개념의 동일성은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독립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항상성은 다양한 감각들 속에서 어떤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이고, 그 유사성을 찾기 위해서는 그런 유사성을 찾아내 대상의 동일성과 개념의 동일성을 대응시키는 규칙이 필요하다. 이런 규칙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다시 그것을 설명할 어떤 정당화를 필요하게 되면서 무한퇴행에 빠지고, 만약 그 규칙이 없다고 가정할 경우에는 인식에 대한 어떤 유의미한 이론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런 인식의 문제는 그러므로 역시 인식론적인 ‘개념’의 문제이거나, 심리학의 문제이거나 둘 가운데 한 쪽을 택해야 한다. 심리학은 경험의 과정을 분석한다. 반면 ‘개념’의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동일성을 획득하는지에 관한 배경을 설명해야 그 개념이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는가에 관해 의미있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런 배경으로 정신적 존재자가 가정된다. 그렇지만 정신적 존재자가 어떤 것인가에 관해 다시 묻는다면 우리는 난점에 또 다시 봉착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이 와중에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관한(정당화와 설명에 관한) 관계를 컴퓨터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의 유비를 통해 풀어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물론 소프트웨어가 과연 ‘설명의 대상’인가에 대한 의문은 제기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더하기로 이루어진 모든 등식들이 더하기의 법칙을 설명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의 신경 체계가 하드웨어라고 생각하고, 그 하드웨어를 이용해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해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지식에 관해 설명하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하드웨어에 기반하기는 하지만, 하드웨어를 이용하는 또는 지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히 하드웨어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또한 이들은 하드웨어 속에서 전류가 지나가는 길을 파악한다고 해서 그 하드웨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유비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들은, 인간의 여러 개념적 동일성들이 이른바 알고리즘 안에서만 산출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은 하드웨어의 특성이 아니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념적 동일성의 알고리즘적 특성을 특화시키는 것은 이 유비를 반박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인간 속의 인간, 기계 속의 기계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어떤 또 다른 ‘존재’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델로 인간의 지식을 설명하려는 것은, 또 다른 존재자들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언제나 동반한다. 이것은 마치 “붉은 색의 감각인상을 다양한 환상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요소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적”이면서 붉은 색이 어떤 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알고리즘적 특성에 대한 강조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우리는 하드웨어 속에서 전류가 지나가는 경로를 파악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 알고리즘이 무엇을 하는지에 관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특정한 입력이 신경에 주어졌을 때 그리고 그 때에만 그가 ‘붉은 색을 본다’고 대답을 한다면, 우리는 그 입력이 붉은 색에 관한 입력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컴퓨터 유비에 대한 비판자들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컴퓨터의 유비를 통해 인간의 알고리즘적 특성을 강조하려는 시도 또한 잘못되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곱셈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두뇌를 들여다봐도 곱셈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곱셈이 무엇인지 몰라도 누군가가 특정한 숫자의 곱을 생각하고 있는 뇌를 들여다본다면 그가 곱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곱셈’이라는 말이 아닌, 특정한 전기적 신호의 특정한 연결과 경로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대척행성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리적 대상들의 특정한 움직임으로 특정한 행동의 원인과 경로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무한퇴행 논변은, 설명과 정당화의 연결을 시도할 경우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런 질문의 인식론적 버전은 이른바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고, 이것은 나쁜 물음이다. 이런 질문은 설명과 정당화를 동시에 가능하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배경적 요소들을 요청하고, 그래서 인식에 정신적 존재자가 동원되고 이와 관련한 철학적 쟁점들이 생겨난다. 반면 이런 무한퇴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컴퓨터의 유비가 동원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이 유비는 무한퇴행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의 지식이 하드웨어적 과정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심리학은 이것을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인간의 지식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이른바 ‘인간 속의 인간’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게 하고, 지식을 만들어내는 알고리즘과 하드웨어적 배경이 인간의 본성 속에도 있으며, 경험 속에도 있다는 평이한 생각을 뒷받침하게 해준다. 또한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있는 알고리즘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데, 그것을 굳이 본성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실제로 그가 무엇을 하는가에 관해서만 관찰하더라도 그 알고리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개념적 동일성과 같이 알고리즘적 특성만이 나타난다고 생각되는 개념들도, 특정한 탐구의 목적에 의지해야만이 규명 가능하다는 것 또한 드러난다.

 

  그러므로, 로티의 입장에서는 “심리학적 상태를 내적 표상으로 생각하는 데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그렇게까지 흥미롭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심리학적 상태가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정된 상태이며, 생리학적 상태와 어떻게 동일시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하더라도 정신의 참된 본성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즉 알려질 만한 아무런 “본성”도 없음을 다시금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철학자들의 마음-몸 구분은 존재론적이기보다는 실용주의적이며, 이 구분이 인간에 대한 과학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마음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과학에 아주 해롭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똑같이 철학자들의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4. 표상으로서의 심리학적 상태

 

 

  정신적인 것을 구분해 내는 또 다른 구분법은 신경에 전달된 전기신호로부터 표상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신적인 것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해냄으로써, 정신적인 것에 대해 규명하는 것이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의 목표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한 언급은 기존의 전통적인 언급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은 이런 정신적인 것 또한 물리적인 것의 조합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며, 이와 관련해서 개념적 동일성에 대한 표상 같은 것들은 자극의 불변성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이런 개념적 통일성을 만들어내는 특수한 기관이 있다고 상정할 때에만 즉 특수한 심리학적인 인지과정을 가정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한 언급은 그 자체가 정당화 내지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경험적으로 지각되지는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이른바 ‘철학적 비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경험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철학적 독단이라고 하면, 그 비판은 효력을 잃어버린다. 이런 과정이 경험적으로 지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에 대한 심리학적 기술은 지식에 대한 일반적이고 유용한 이론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은 몸에 대한 설명과 정신에 대한 정당화를 무화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는 이것을 가정된 유기체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즉, 심리학의 연구 목적에 들어맞는 유기체의 상태일 뿐, 그것이 다른 영역에까지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지심리학적 주체는 평가적 개념인 인식론적, 도덕적, 윤리적 주체와 그 모습이 같지 않다. 근대의 경험론자들이 심리학과 인식론을 이으면서 했던 실수가 이런 주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심리학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로티가 비판하고자 하는 자연의 거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심리학에서 가정된 주체는 심리학의 연구에 알맞을 뿐, 그것이 세계를 정확히 표상한다거나 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물건이 밑으로 떨어진다’고 하는 상식적인 기술과 ‘물건이 중력에 의해 위치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물리학적 기술 모두가 참으로 인정받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우리는 심리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어휘 묶음을 통해서 비슷한 방식으로 어떤 대상에 대해 기술할 수 있다. 표상은 이런 어휘 묶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그저 기호일 뿐이다.

 

  그러나 근대의 인식론자들은, 이렇게 가정된 심리학적 주체를 ‘참을 생산하는 심리학적 주체’로 생각하였다. 로크 이래로 시작된 심리학과 인식론의 혼동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즉, 내적인 표상이 참된 믿음에 대한 어떤 것이라면, 내적인 표상이 생겨나는 과정 또한 참된 믿음에 대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은 인지과정이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의존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가정된 주체’라는 생각은 이러한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가정된 주체’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들은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의 여부를 “그들이 대화 속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가?”에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다양한 분과가 어떤 보편적인 대상에 관한 무엇인가를 서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심리학적 인지과정을 중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을 달리해서, 만약 인식론의 목표가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합리성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심리학적 과정에 대한 탐구가 인식론에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합리성은 목적에 따라 수단을 조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적 표상의 합리성에 관한 탐구는 ‘가정된 주체’의 관점에서 비춰봤을 때 어떤 개별적인 과정 연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런 탐구란 수단이 어떤 목적에 대해 얼마나 최적화되었는가에 대한 것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평가적 개념이라는 측면에서 ‘합리성’은 인식론에서의 ‘진리’, 도덕철학이나 윤리학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러 덕목들과 비슷한 수준에서 그 평가의 정도가 결정된다. 이런 평가적 개념들은 목적에 대하여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설정하는 우리의 능력에 의존한다.

 

  표상의 인식적인 적절함은 그런 것들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가정 아래서만 유효해진다. 이 타고나는 것이란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 온 정신적인 것, 정신적인 인지과정이며, 이것은 모든 합리성의 표준이 된다. 이렇게 타고난 것으로 간주된 개념들은 철학사에서 수없이 많이 제시되었다. 진리, 필연성, 개인, 대상, 과정, 상태, 변화, 의도, 인과, 시간, 연장, 수 등등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의 의미를 명료하게 한다는 작업은 불가능한 기획이라는 것이 콰인을 통해 드러났다. 또한 이런 견해 속에서는 위에서 나열한 단어의 의미가 우리의 경험에 의해 바뀔 수 없다라는 독단적인 전제가 감춰져있다. 그리고 ‘가정된 주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입장에 가한 비판에 따르면, 우리는 저런 단어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언제나 아예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정신적인 표상이라는 개념은 정보와 명제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알려진 모호한 개념이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이 두 과정을 표상이라는 한 단어를 통해 다루려고 함으로써, 설명과 정당화를 혼동하는 오류에 빠졌다. 하지만 ‘가정된 주체’를 통해서 이를 다시 해석하면, 표상은 가정된 주체에 의해 생산된 명제에 해당하기 때문에 소여의 신화에 대한 셀라스의 비판을 비켜갈 수 있다. 또한 그 가정된 주체는 특정한 과정을 거쳐 생산된 명제이기 때문에, 그 주체가 그것을 완전히 신뢰하고 표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경험론자들의 ‘관념’과는 달리, 망막의 상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처리장치가 취하는 다양한 명제적 태도를 통해서 주체의 언어중추의 출력에 이르는 인과적 과정이 주체의 견해를 정당화하는 일련의 추론과정에 대응할 필요는 없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것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에 관해서 논쟁을 벌이는 중이라면,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자기가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을 고려해볼 때, 정당화는 오로지 상호주관적 즉 공공의 영역에서 가능한 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자들은 인식론의 과제를 자신이 떠맡아서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철학적이어야 한다고, 그리고 인식론적 문제를 자기들이 해결할 수 있다고 잘못 믿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이 이런 강박을 버리면, 즉 의식의 토대 등등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자신들이 언급해야 한다는 강박 - 즉 정신의 존재를 규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정신에 대한 기술은 아주 가볍고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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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연습 발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플라톤이 그렇게 정의한 이래로 지식에 관한 가장 확고한 정의로 여겨져 왔다. 이 정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믿음 가운데서 지식을 가려내는 방법을 알려준다. 어떤 믿음이 참인 동시에 정당화되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닌 지식이다. 만약 지식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라면, 우리는 이 정의를 이용해서 우리의 믿음 가운데 지식을 가려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는 정의는, 단순히 특정한 믿음들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하고 또 그 믿음의 성격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런 규범적 측면은, 지식을 정의하는 그 두 가지 조건이 충분하지 않다는 주장 때문에 논란에 휩싸였다. 이 주장은 우리가 추구해왔던 지식, 즉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는 대상이 사실은 그럴만한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후 인식론에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지식을 다시 정의하려고 시도해왔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즉 인간의 믿음을 지식과 지식 아닌 것으로 나누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묻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함으로써 지식의 규범성 문제를 없애버린다. 인간에게는 고유한 인식적 구조가 있다. 또한 같은 인간 종 사이에서도 서로가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대면한 세계의 모습은 나의 믿음 이상의 어떤 지위를 가질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의 믿음에 그보다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하려면 그 사람은 내 인식적 구조의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또는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어떤 사람은, 실제로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을 리 없거나 또는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회의주의적 전통은 최근에 인식론적 신빙론, 자연화된 인식론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에게 고유한 인식적 구조를 과학적으로 연구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인식론과 비교해봤을 때, 과학과 인식론 사이의 관계가 역전된다. 왜냐면 인식론은 과학이 학문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지를 판정하기 위해 시작된 철학적 탐구이기 때문이다. 만약 전통적 인식론의 입장에서 과학이 엄밀하게 규명될 수 없는 몇몇 전제들에 의존하며 그 성과를 철학적 규범성의 측면에서 지식으로 인정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면, 자연화된 인식론은 그런 ‘철학적인 의미의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며, 만약 그런 엄밀한 시험을 통과해야만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믿음의 수준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머무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범성은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물음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자연화된 인식론의 한 흐름은 이것을 실재와 무관한 방식, 즉 상호주관성과 체계-믿음 관계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다. 만약 어떤 믿음 b가 특정한 인식적 환경 속에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인정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 사이에서 보증된 믿음이다. 이것 이상의 참 개념을 요구하는 순간 우리는 전통적 인식론자들이 직면해야 했던 상당한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b가 그 사람들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보증되리라는 보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당화의 경우, 한 사람의 믿음 c와 그 사람이 믿는 체계 s 속의 믿음 d,e,f,… 가 논리적으로 거의 일치하면 정당화된다. 만약 c가 더 많은 다른 믿음들과 일관될 경우, 그것은 더 강하게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체계들을 넘어선 정당화를 요구할 경우 역시 참 개념에 관한 인식론자들의 어려움과 마찬가지로 난점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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