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창비시선 284
신경림 지음 / 창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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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미지의 여행에 시를 동반하며 걸어가는 시인의 삶은 그가 풀어낸 시를 읽는 독자의 삶보다 몇 배 이상으로 고단하지 않을까. '신경림'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시인이 여직 껏 걸어왔을 그 여행의 녹녹함이 그려지는 듯 하다. 낙타라는 시집을 열고 처음 만나는 첫 시 낙타를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모든 시를 쭉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한다. 아무도 듣는 이 없지만 이 시집을 목이 아플 정도로 소리 내어 읽고 말았다. 시가 주는 평안함을 참으로 오랜만에 곱씹고 있는 나를 보며 시를 좋아하던 그 옛날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일까 쓴 웃음을 짓고 만다.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시인은 노래하고 있었다. 시인은 추억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는 마치 생의 마침표라도 찍을 듯 그 옛날 고향과 가족을 노래하고 그 시절 함께 마음을 나누던 벗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시인이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했던 낙타를 떠올린다. 누군가의 동반자로 누군가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그저 넓은 사막으로 사막으로 걸어가는 낙타. 절대로 빠르지 않은 걸음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그 모양이 복잡한 도시의 한 가운데로 오버랩된다.

추억과 그리움으로 잉태된 시들을 지나 시인이 떠나온 진짜 여행의 풍경이, 그 일상이 그대로 시가 되어 우리들이 고단함을 달래려 마시는 술잔, 찻잔에 잠긴다. 형제의 나라 터어키, 네팔의 숨막히는 고산의 눈 덮힌 세상 , 모든 이가 꿈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인을 길을 걸으며 세상을 담았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또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127쪽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중에서] 

긴 산문 속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의미와 역할에 대해 쓸쓸하면서도 정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타지에서 내 고향의 말투를 듣고 반색하는 우리네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내 안에 숨겨진 그리움을 알고 있다. 시라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시는 우리에게 잠자고 있는 감동을 흔들어 깨우는 때로는 소란스럽도록 시끄러운 노래인지 모른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들리지 않아 아름답고 보이지 않아 아름답다.
소란스러운 장바닥에서도 아름답고,
한적한 산골 번잡한 도시에서도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그러나
드러나는 순간.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다움을 잃는다.
처음 드러나 흉터는 더 흉해 보이고
비로소 보여 얼룩은 더 추해 보인다.
힘도 잃고 꿈도 잃는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숨어 있을 때만,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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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밋빛 인생 - 2002 제2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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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한 장면처럼 소설의 멋진 구절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인생이 장밋빛으로 묻들기를 바라기도 할 것이다. 꿈속에서라도 앞으로 펼쳐질 사랑과 인생의 행로가 장밋빛으로 가득하다면 얼마나 황홀할지 그 꿈에서 아마도 깨고 싶지 않은 순간이리라. 2002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정미경의 이 소설은 다른 작품을 다 읽고서 뒤늦게 이렇게 만났다.

제목에서 풍기듯 조금은 속물적이고 통속적인 연애소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미경이라는 작가를 아는 이라면 모두 느꼈을 듯이 무척 고급스러운 글로 쓰인 연애소설이라 한 목소리를 낼 것이다. 광고계라는 배경을 중심으로 그 안에서 만난 네 남녀의 사랑은 원하는 방향이 모두 다르다.메이크업 아티스트인 민, 푸드 스타일리스트 정애, 광고 기획을 하는 영주, 그리고 민의 남편. 민을 사랑하면서도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하지 않았던 영주는 자신을 향해 적극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정애와 결혼을 하고도 민을 만나왔다. 

서로 다른 곳을 향한 사랑의 시선은 한 순간 갈라져 버리는 유리처럼 되고 만다. 서로 한 공간에 산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을 나누지 않는 부부가 되고 민은 자살을 하고 만다. 지극히 뻔한 스토리를 가진 소설이지만 이 소설이 빛나는 이유는 단연 배경이 되고 있는 광고와의 적절한 조화 때문이다. 광고라는 것은 진실보다는 허구나 과장으로 가득하다. 메이트업 아티스트지만 민낯으로 다니는 민, 방송에선 사랑의 요리를 만들어 내지만 정작 남편을 위해 자신을 위한 사랑의 요리는 할 수 없는 푸드 스타일리스트 정애, 30초 짧은 순간에 세상 모두를 만족시키고 흡족시키지만 자신의 아내를 이해시키지 못하는 영주의 모습이 그러하다.

모두가 건조한 삶을 살고 있다. 광고처럼 빛나는 인생은 어디에도 없다. 화려한 마지막 광고를 향한 그들의 몸부림처럼 자신의 인생에 있어 사랑을 위해 몸부림치지만 부서지고 만다.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그 손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주에게 지쳐버린 정애, 사랑을 지키고 싶었기에 죽음을 택한 민, 그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영주, 이들 모두 메마른 정서의 소유자들이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이 주인공들과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미경은 이 불륜을 아주 우아하게 묘사한다. 마치 민과 영주의 사랑이 장밋빛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갈하면서도 수려하다. 밑줄 긋고 싶은 구절이 아주 많다.

[살아간다는 건 그 무언가를 위해 날마다 존재의 일부를 내어놓는 일이다. 79쪽] 매일 매일 우리는 자존심을 내놓기도 하고 때로는 철면피가 되기도 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삶이란 정색을 하고 저울질하기엔 너무 무거운 어떤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무거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여행을 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소비한다. 그리고 절대로 상처받지 않을 거짓 사랑에 짐짓 빠져보기도 한다. 140쪽] 삶이란 저울의 양 접시에 우리는 무엇을 올려 놓고 싶을까? 과연 그것은 욕망, 명예, 부, 사랑 중 어느 것일까?

우리네 인생은 불륜이 남긴 깊은 상처가 보여주듯 장미빛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저 멀리 장밋빛 인생이 있지 않을까 하며 살아가는게 또한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과대포장인 줄 알면서도 광고를 보고 선뜻 물건을 사게 되는 실수를 범하면서도 말이다.


이 책에는 이 소설 외에 '결혼기념일' 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물적이면서도 이중적인 모습과 약한 내면을 아주 소름 돋게 표현했다. 긴 호흡으로 만난 '장밋빛 인생' 뒤에 만나는 짜릿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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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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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하는 작가나 책은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요즘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는 '혀'를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기로 했다. 조경란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이 낯익은데도 나는 왜 그녀의 책을 선뜻 선택하지 못했을까. '나의 자주빛 소파' 나, '불란서 안경원' 기존의 작품을 기억하고 있는데 직접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혀'를 구입하지 않았더라면 '국자 이야기'는 그렇게 이름만 기억되는 그녀의 작품이 되었을지 모른다.

이 책은 모두 8편의 단편을 싣고 있는데 화자가 대부분 나로 시작하는 1인칭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마치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소설속 화자의 모습이 너무 평범하면서 일상적인 모습이라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런 점이 이 작가의 색이 아닐까 싶은 어설픈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로 시작하고 있지만 때론 나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를 묘사하기도 한다. '국자 이야기' 라는 소설은 외삼촌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는 나는 나의 감정의 균형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결국 외삼촌과 사촌에게 존재하는 균형이기도 했다. 외삼촌의 국자로 표현되지만 그것은 국자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작가 자신과 가족의 일상이 아닐까 의심하게 하는 '나는 봉천동에 산다'는 봉천동 일대를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그 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된 아버지와 나를 중심으로 하루 하루 그저 그런 날들을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나와 아버지는 무척 다른 사람처럼 보여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봉천동이라는 공간의 모든 것에 애정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또한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로 연결되어 화자는 역시나 글을 쓰는 작가이고 아버지는 여전하게 구직광고를 내고 사람들에게 소외당하는 고양이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 안에서 아버지와 나는 함께라는 공존을 바라본다. 

소설속 화자들은 또 무척 많이 걷는다. 걷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요즘같은 빠름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걷는다는 것은 느림이고 한 편으로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우리가 지나치는 많은 것들을 천천히 걸으면서 다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천동 일대를 걷는 것을 시작으로 '100마일 걷기'의 주인공은 함께 살았던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부재를 걷기로 달래려 한다. 그리고 그 걸음의 끝은 나 혼자의 삶에서 타인이 있는 세상속 사람들과의 만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입술''좁은 문'이라는 단편은 다른 작품과는 다른 색을 가진 소설들이다. 특히나'입술'은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수단인 입을 통해 우리가 쏟아내는 말들의 진실성에 대해 그리고 말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와 신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에 대해 풀어내고 있다. 사람간의 관계 맺음에 대해  점점 말이 줄어듦은 상대와 나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입술'을 통해 알게 한다. 이 소설은 무척 감각적이며 아직 만나지 않은 그녀의 소설 '혀'를 궁금하게 한다. 여전하게 말을 하고 있지만 상대에게 결코 나를 드러내지 않는 소설속의 화법은 누구나 한번쯤 써 보았음 직한 상황들이라 마치 우리가 겪게 되는 일상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건 예나 지금이나 나는 많이 먹고 느리게 말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세월은 가고 많은 것은 변했으나 이상하게 나는 항상 나인 것 같다. ' 293쪽 작가의 말중에서.

작가의 말이 그대로 소설에 있다. 봉천동을 걸으면서 수많은 고양이들을 만나고 방향제시 보도블록의 끝에 서있고 공포로 다가오는 모서리를 견디고 있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만나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작가가 만들어낸 특별하지 않는 일상을 살고 있는 주인공들은 서로간의 거리를 좁히려 하고 서로간의 부재를 또 다른 누군가로 채우기를 소망하고 있다. 아직 조경란의 글에 대해 명확하게 꼬집을 수 없다. 다만 그녀는 부정하겠지만 그녀의 느림과는 반대로 그녀의 글은 내게 명민함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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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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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한 것은 어지러운 마음 때문이었다.  자꾸만 쓰러지는 마음에 오뚝이 같은 무언가가 필요했다. 올해 들어 무척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지만 그 화를 밖으로 풀지 못함에 더 괴로웠다. 화를 내고 맘을 드러낸다 하여 내 속에 너무 크게 자리잡은 고통이 줄어들지 않음이 화를 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서 그것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공지영의 책이 떠오른다.

이 책은 개정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그만큼 끊임없는 애정을 받는 작품인가 싶은 생각도 들고 그 많은 독자들 중에 나같은 사람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도 스친다. 이제 아스라한 기억속으로 사라지는 80년대의 삶이 여기 저기 묻어있는 책.  다양한 길을 걷는 사람들의 분주한 삶을 만난다. 소설 속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네 인생사의 한 모습이기에 더 슬프기도 하고 더 정이 가기도 한다.

물론 80년대의 학생운동을 내가 알리도 없고 출간된지 이제 14년을 맞고 있으니 소설속에 등장하는 삶의 배경은 지금과는 많은 차이를 보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 속에는 여전하게 삶의 고단함을 견뎌내고 그 고단함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이가 있기에 내게 주는 의미가 더 크다. 80년대를 치명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고뇌와 현실속에서 자신을 찾으려 애쓰 모습이 담긴 소설 (꿈, 인간에 대한 예의, 무엇을 할 것인가, 동트는 새벽)과 미련한듯 보이지만 최선을 다해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사랑하는 당신께,무거운 가방, 절망을 건너는 법, 잃어버린 보석, 손)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9편의 단편들 중에서는 '꿈'이라는 소설은 제목처럼 꿈속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문학예술인들의 고민과 번뇌가 꿈처럼 지리하게 서술되고 있다. 반면 인간의 탐욕스럽고 비열한 욕심을 비틀어내면서도  자조적인 쓴 웃음을 유발하는 '잃어버린 보석'처럼 뻔뻔한 재미를 주는 글도 있다. 동 시대를 함께 사랑하고 싸우고 살았지만 다른이를 떠나 지름길로 빗겨나왔다고 스스로 자책하는 주인공의 내면묘사가 탁월한 '인간에 대한 예의'와 절망이라는 것의 기준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 지는지 묻고 싶은, 그 절망이라는 것을 희망으로 만들어가는 내용을 담은 '절망을 건너는 법'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들이다.

소설속에 한 주인공은 자신이 금 밖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금을 스스로가 긋어놓은게 아니라면 금 밖도 금 안의 사람도 아닌 것이다. 스스로에게서 조금은 자유로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그런 금은 긋지 말기를 바란다.  공지영의 글에서 더이상 슬픔이 담긴 잔을 만날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점점 새롭게 변화하는 세상에 당연한 일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끔은 공지영이 내미는 그 슬픔의 잔에 슬그머니 내 슬픔을 부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날을 만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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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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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고 누구는 잘 울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잘 운다. 너무 많이 울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눈에서 흘러내리는 그 짯만이 때로는 내 입술에 달콤하게 닿기도 한다. 우리의 감정을 담은 눈물.

낯선 소설이다.  정말 낯설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 또한 익숙하다. 고교시절 든든한 동성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위로하고 나를 바라봐주는 중성적 이미지의 친구와 이 책은 정말 닮았다. 소설가 박민규가 말한대로 누구도 모르게 오직 나만이 <그녀>를 읽고 싶은 마음이라는 글에 동감한다. 날카롭게 거침없이 독소를 뿜어낸다. 그 독소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강한 외침이고 강한 방백이다. 

8편의 단편은 시원스럽고 구성진 목소리로 연극 무대에 홀로 선 천운영의 방백들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관객은 독자이며 세상이다.  아직은 낯선 그녀의 글들. 그러나 곧 우리는 그녀에게 익숙해질 것만 같다. 소설속 등장인물들은 여자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물론 남자를 화자로 두고 남자의 시선으로 쓴 소설(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내가 데려다줄께)도 있지만 그 속에서도 여자의 존재는 무척 큰 의미를 둔다. 변화하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약자이고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들속에 당당해지려 희망을 보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눈물 사용법>

눈물을 흘려야 할 때 울지 않음은 독함으로 보여진다. 슬픔이 가득해온 집, 태어나자 마자 떠난 동생을 잃고 힘들어하는 가족, 그리고 그 동생의 영을 껴안고 살아가는 주인공. 살아가는 순간 순간 눈물을 소진할 만큼 힘들게 살아온 여자들, 할머니를 배신한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유방을 절제한 엄마도 그리고 그녀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죽은 동생을 위한 위령제를 하면서 그제서야 진짜 눈물을 흘리는 주인공. 허위의 눈물이 아닌 진심을 담고 마음을 주었을 때 비로소 참 눈물이 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알리의 줄넘기>

읽고 있으면서도 알리가 여자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라는 확인을 하는 글을 읽을 때까지. 알리 라는 이름에는 희망이 있다. 혼혈아로 살아온 아버지가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 알리. 알리도 울지 않는다. 아빠는 집을 나갔지만 그녀는 할머니와 고모와 함께 행복하다. 결국은 치매에 걸린 그녀의 할머니는 제니 라는 이름으로 즐겁게 죽음을 맞이한다. 잘나가는 동시통역사인 고모가 바라는 사랑은 우리가 되는 것이다.  혼혈아인 가족들에 대한 죄의식을 가진 그녀는 파키스탄 남자와 결혼을 한다. 알리는 이제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그래서 우리를 만든다.
[ 그래서 나는 지금 줄넘기를 하나 더 사러 하는 것이다. 줄넘기를 사면 손잡이에 더블더치를 할 '우리'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넣어야지. 나는 지금 '우리'를 만나러 간다. 103쪽]

<내가 쓴 것>

소설가이며 교수인 나는 학생들의 글에서 나를 본다. 타인을 주인공으로 글을 쓰던 그녀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놓고 바라본다. 소설 속 세가지의 소제목으로 그녀는 각기 다르게 보여지며 또 하나가 되기도 한다. 남편을 자살로 몰고간,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었고 학생들에게 깐깐한 늙은 여교수이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죽어 먼길을 떠나 어디엔가 도착해야 한다면 내가 쓴 소설 속으로 들어가겠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시간을 거슬러 기억 저편의 그림 속으로 가는 과정일 테니까. 그러니 이것이 누가 쓴 것이든 태우지 마라. 내가 쓴 것, 그 속에 내가 있다.192쪽] 이 글은 어쩜 천운영의 고백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글 속에 그녀가 있다.그녀가 숨쉬고 있다.

<후에>

언니와 나의 대화형식으로 내용이 묘사된다. 상황 설명없이 그저 쉼 없이 쏟아지는 말들에서 점점 글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쓰레기가 가득하고 학교에도 안가고 방치되어 사는 자매와 엄마에게 어느 날, 다가온 방송 카메라. 세간의 시선이 집중되고 엄마는 치료를 받으러 자매 곁을 떠나고 남아있는 자매들은 그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기다린다. 그러나 세상의 관심은 잠시뿐. 그것이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단적으로 꼬집고 있다.[다른 사람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아. 하지만 말이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것보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 더 나쁜 일인지도 몰라. 눈길조차 주지 않는 건 무시하는거잖아.(중략)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우리처럼 남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을 한다는 건 몇 배나 더 어려운 일이지. 227쪽]

늙음과 젊음을 남편과 아내로 비교하고 18살 소년의 등장으로 참되고 숭고한 아름다움이 과연 젊음에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꿈과 현실, 이승과 저승, 진실과 거짓을 몽환적으로 그려낸 '내가 데려다줄께'에서는 권력과 힘으로 무언의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의 모습을 그려냈다. 한 가족이지만 약한 여성을 강한 작은 아이로 상대적을 강한 남성을 거대한 아이로 대조시켜 표현하고 그 작은 아이가 가진 상처를 그 남자라는 특정인물을 만들어내 끌어안아주고 있는 읽으면서도 너무 슬픔 소설 '노래하는 꽃마차', 내면의 아름다움이 아닌 허위의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 여성의 또 다른 자화상을 그린 '백조의 호수' 도 무척 강한 인상을 남겼다.

소설속 주인공들인 여성들은 때로는 모호한 중성적인 이미지로 정체성의 혼란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것은 남성성으로 표방되는 세상에서 아직도 고통속에 사는 여성들의 삶, 이방인의 삶, 아웃사이더 삶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한정적인 공간(소설 속에서는 장롱이 많이 등장한다.)에 숨어들어 그 속에서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점점 그들은 문을 박차고 나온다. 알리가 꿈꾸는 '우리'가 함께 하는 세상을 향에 얼굴을 내밀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소리가 '천운영'이라는 소설가의 글을 통해 세상에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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