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레 겁을 먹는 책이 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압도 당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허먼 멜빌의 『모비 딕』도 그런 책 중 하나였다. 읽기도 전에 읽을 수 있을까, 읽다가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책. 고래를 잡는 포경선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어쩌면 나 같은 독자가 아무런 편견과 기대 없이 『모비 딕』를 읽기에 알맞은 독자일지도 모른다.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화자 ‘이슈메일’을 따라 나는 포경선 ‘피쿼드’호에 탑승했다. 살짝 고백하자면 이슈메일이 배에 오르기 전까지 여관에서 만난 식인종 친구 퀴퀘그와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둘 사이의 묘한 긴장감, 퀴퀘그만의 의식(피쿼드에서도 그는 대단하다)이 흥미로웠다.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의 항해가 아닌 추운 날씨도 모자라 크리스마스에 항해는 시작된다. 이슈메일과 함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그러니까 ‘모비 딕’에 미친 남자 선장 ‘에이해브’는 모비 딕에 가려진 인물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에이해브에겐 오직 모비 딕만 중요할 뿐 그 외 에이해브를 구성하는 건 없다. 한쪽 다리를 잃게 만든 모비 딕을 향한 복수, 눈처럼 하얀 이마와 혹을 지닌 모비 딕이 그의 인생에 전부라는 말이다. 친절하게 수록된 ‘피쿼드’호의 항해 지도에서 볼 수 있듯 대서양에서 출발해 희망봉, 인도양, 일본 연해를 지나 태평양에 도달하는 항해 끝에 운명의 모비 딕을 만난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모비 딕을 쫓는 에이해브의 복수심과 욕망, 그리고 피쿼드에 승선한 선원들과 그들을 관찰하고 소설 내내 이슈메일이 설명하는 고래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정리해도 좋을 소설이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항해사도 작살잡이도 아닌 포경선이 아닌 상선에만 타봤을 이슈메일은 왜 ‘피쿼드’호에 탑승했고 고래에 집착하는가. 포경선에서 일어나는 작고 사소한 사건들, 선장 에이해브와 항해사의 갈등도 빼놓을 수 없다. 에이해브를 제외한 다른 선원들에게 모비 딕은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저 향유고래를 잡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고래를 잡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니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피쿼드 호의 대장은 선장이니 선장 에이해브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거기에 넓은 바다에서 다른 포경선과 만나는 이야기, 모비 딕을 만나기 전 고래를 잡고 해부하고 기름을 짜는 이야기, 모든 걸 이슈메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준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고래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 고래 사전, 고래 설명서, 고래 해부학, 고래 역사서라는 말이 이 소설의 부제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인생이라는 끝을 알 수 없는 항해, 그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역경을 철학적으로 풀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긴 항해가 끝났다는 것은 두 번째 항해가 시작된다는 뜻이니,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가 시작되고, 그렇게 영원히 계속된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견딜 수 없는 세상의 노고인 것이다. (120쪽)


누구나 작살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여러분이 철학자라면, 포경 보트에 앉아 있어도 작살이 아니라 부지깽이를 옆에 놓고 난롯가에 앉아 있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공포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403쪽)


일정 부분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에이해브와 모디빅이 언제 만날지가 궁금했고 그 둘의 대결, 그러니까 인간과 고래의 한판 승부를 기다렸다. 망망대해 거친 바다를 항해하면서 다른 포경선과 만날 때마다 에이해브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흰 고래를 보지 못했소?” 모비 딕을 기다리는 에이해브는 84일 동안 바다에 나갔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한 산티아고를 떠오르게 했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모비 딕을 떠올려야 맞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한낱 인간과 거대한 자연이자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모비 딕의 대결이 나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모비 딕』를 향한 다양한 해석과 찬사도 그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마침내 그토록 기다렸던 모비 딕을 만났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다. 나는 모비 딕의 결말을 모르기에 에이해브와 모비 딕의 팽팽한 대결에 빠져들었다. 에이해브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과 모비 딕이 인간의 욕망에 붙잡히지 않기를 바랐다. 모두가 추앙하고 마주하고 싶은 거대한 존재 “눈처럼 하얀 이마와 혹”을 지닌 아름다운 존재로 남아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모비 딕을 추적하는 하루하루의 생생한 묘사는 압권이다. 마치 태풍 전야의 고요 속 긴장감 가득한 슬픔을 담은 잔인한 아름다움.


적에게 다가갈수록 바다는 더욱 잔잔해져서 물결 위에 융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바다는 한낮의 목장처럼 평화롭게 펼쳐져 있었다. 드디어 숨죽인 사냥꾼이 아직 낌새를 채지 못한 듯이 보이는 사냥감에 바짝 다가가자, 눈부신 혹의 전모가 또렷이 보였다. 그 혹은 독립된 별개의 생물처럼 바다를 헤엄쳐 갔고, 그 주위에서는 양털처럼 고운 초록빛 거품이 끊임없이 빙글빙글 맴도는 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혹 너머에는 살짝 치켜든 대가리에 복잡하게 새겨진 거대한 주름이 보였다. 보드라운 튀르크 양탄자 같은 물결 위에는 그 넓은 우윳빛 이마의 하얀 그림자가 반짝거리며 머리보다 앞서 달렸고, 잔물결은 장단을 맞추어 장난치듯 움직이는 골짜기 속으로 푸른 물이 번갈아 흘러들고 있었다. 양쪽에서 비치는 물거품이 올라와 고래 옆에서 춤을 추었다. (726쪽)


나처럼 지레 겁을 먹고 『모비 딕』 을 두려워하거나 시작도 못하는 독자가 있다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설령 읽다가 멈추면 좀 어떤가. 한 편의 거대한 바다 뮤지컬 같은 소설, 바다라는 무대 위에 ‘피쿼드’ 승선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모비 딕을 만나 사투를 벌이는 대신 돌아올 수 있고 원하는 순간 바로 ‘피쿼드’에서 내려올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모비 딕과 에이해브의 목숨을 건 전투에서 누가 승리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어쩌면 그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에이해브에겐 항해 목표이자 삶의 목표였던 간절히 바랐던 모비 딕과 조우만으로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에이해브의 집착은 고래를 향한 이슈메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 모든 건 하먼 멜빌의 고래를 향한 위대한 집념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그 놀라운 수고와 대단한 노력 덕분에 이제라도 『모비 딕』 을 만났고 흰 고래를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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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3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4-05-03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드뎌 모비딕을 읽으셨군요! 뿌듯한 독서였을 거 같아요.
퀴퀘그하고 알콩달콩 재밌죠? ㅋㅋㅋ 둘이 그냥 결혼해라~!!
저는 에이헤브가(이런 인간 유형이) 싫어요;;;

책읽는나무 2024-05-0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모비딕 완독 축하드립니다.
여전히 겁을 먹고 있는 독자라 선뜻 구입하기에도 좀 망설여지는 책이었는데...괜찮다고 다독여주시니...언제 한 번 용기내 보아야겠어요.^^

새파랑 2024-05-0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도 드디어 읽으셨군요~!!
인간의 복수심과 맹목성이 얼마나 비이성적일 수 있는건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 마지막 싸움을 위한 빌드업이 좀 길긴 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stella.K 2024-05-03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생각인데 막상 읽어 본 사람들은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책이야 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죠?
잃시찾도 그렇다고 하던데. ㅋ
근데 같은 책을 두 권이나 갖고 계시는군요.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Falstaff 2024-05-03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그냥 좋다, 최고다. 뭐 이런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모비딕>은 말 그대로 ˝인류 문화 유산˝ 가운데에서도 앞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크게 야단맞은 이야기겠지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창세기˝보다 더 근사합니다.

잉크냄새 2024-05-03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 디자인이 참 인상적이네요.
 


4월의 책 목록을 살펴보았다. 읽은 책, 산책, 리뷰를 쓴 책, 리뷰를 쓰지 못한 책. 모든 책들이 줄고 리뷰를 쓰지 못한 책만 늘고 있다. 좋았던 구절을 발췌하고 메모 형태로 임시 저장을 해두었다. 임시 저장은 임시 저장에 불과하다.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죽었다고 할 수 없다.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는 글, 내가 보살펴야 하는 글이다.


책들에게 보살핌을 받았으니 나도 그래야 한다. 뭐 그렇다는 말이다. 5월이니 5월의 소설을 기대한다. 크리스티앙 보뱅, 그를 몰랐다면 어쩔 뻔했는가. 그의 책도 읽고 리뷰를 쓰지 못한 책에 속한다. 아무렴 상관없다. 이번엔 소설이다. 『마지막 욕망』 은 읽고 리뷰를 쓰고 싶다. 이주란의 짧은 소설 『좋아 보여서 다행』은 5월의 붉음을 닮은 표지다. 왠지 5월과 잘 어울릴 것 같다. 제목도 마음에 든다. 5월의 소설에 김이설의 장편소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도 추가될 것이다.





4월이 봄의 끝이었다면 5월은 여름의 시작이다. 5월이 봄이었던 기억은 저기 멀이 있다. 반소매 옷을 입기 시작한지 여러 날이 되었다. 송홧가루의 습격 때문에 창문을 열지 못하는 날들이다. 샛노란 가루가 멀리 퍼진다. 꽃가루가 닿는 곳, 먼 그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생명이 잉태될 준비를 할지도 모른다.


이곳의 5월은 분주할 것이다.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를 시작할 것이고 영글어가는 마늘의 마늘종을 뽑을 것이다. 그럼 나는 맛있는 마늘종 볶음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 5월에는 작약을 주문해야지. 작약을 곁에 두고 매일매일 조금씩 행복해야지. 5월에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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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5-02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뱅 책 바로 구매했습니다 ~!!
표지가 기존 시리즈랑 좀 달라서 아쉽습니다ㅡㅡ
완전 기대중입니다 ㅋㅋ

자목련 2024-05-02 14:15   좋아요 1 | URL
표지는 저도 그랬어요^^
새파랑 님은 바로 읽으실 것 같습니다!

blanca 2024-05-0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작약이 저도 기다려집니다. ^^

자목련 2024-05-03 09:47   좋아요 0 | URL
연휴 지나고 주문하려고 합니다^^

잠자냥 2024-05-0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뱅 책 바로 받았습니다~!!
가벼운 마음도 저 표지로 바뀐 거 같더라고요?!

라파엘 2024-05-02 21:52   좋아요 0 | URL
표지의 통일성이 훼손되어서 약간 불편한 마음이 드네요. 일관성 있는 질서를 추구하는 게 저의 마지막 욕망인 것 같아요... 😅

라파엘 2024-05-02 22:17   좋아요 0 | URL
그런데, 자냥님 말씀대로 이 작품과 가벼운 마음만 새로운 표지가 적용된다면, 출판사에서 보뱅의 작품 표지를 소설과 에세이로 구분해서 출판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네요 🤔

자목련 2024-05-03 09:49   좋아요 1 | URL
어쩌면 라파엘 님의 말씀처럼 출판사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기존 표지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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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의 소설은 어렵고 재밌다. 그리고 아름답다. 제발 그 놀랍고 기발한 상상의 세계를 이해하느냐고 묻지 말기를 바란다.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사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는 답으로 대신하겠다. 가장 최근에 만난 『미래과거시제』 가 가장 인상적이고 특별했지만 11년 만에 개정판으로 돌아온 『청혼』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려워서 그렇기도 하고 우주를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는 가까운 미래 우리의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청혼』이라는 로맨틱한 제목만 생각하면 결혼해서 함께 우주여행이라도 떠나자는 내용인가 싶었다. “휴가를 받으면 한번 놀러 와.” 란 문장의 편지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장거리 연애 중이구나 싶었지 설마 우주 전쟁이 등장할 줄이야. 그랬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목성 근처 소행성대에서 궤도연합군 작전 장교로 복무 중이다. 지구 출신인 너와는 다르게 우주 출신이다. 지구와 목성 근처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거기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까. 우주 전쟁은 상상도 못하는 지금의 나는 소설 속 연인의 연애가 얼마나 애틋할지 짐작할 수 없다.


“보고 싶었어” 하고 내가 너에게 말했을 때, “나도” 하고 네가 나에게 대답해주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그 순간을, 나는 행복이라고 기억해. 사랑한다는 너의 말에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해도 너에게 닿는 데 17분 44초가 걸리고 그 말에 대한 너의 대답이 돌아오는 데 또다시 17분 44초가 걸리는 지금의 이 거리를 두고 내가 가장 숨 막히는 게 뭔지 아니? 그건 대답이 돌아오기 전까지의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갑갑함이야. (35~36쪽)


소설은 ‘나’가 ‘너’에게 전하는 우주 전쟁의 상황이라고 할까. 우주 출신이라 지구의 중력은 감당하기 힘들지만 견딜 수 있다고 믿는다. 170시간을 날아가야 너를 볼 수 있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를 사랑하니까, 모든 건 다 괜찮다. 그러나 너와 나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너는 나를 만나러 왔다. 먼 우주를 지나 온 너에게 나는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핑계라면 적들은 우리가 어떤 대형으로 잠복하는지, 뭘 하고 있는지 몰랐는데 그들은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목표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행방을 찾아야 하는 게 나에게는 제일 큰 과제라서 너에게 소홀했다. 때가 되면 찾아오라는 쪽지를 남기고 너는 떠났다.


어쩌면 내가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이런 연애와 사랑은 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설에 등장하는 우주 함대나 휴양선을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우주적 상상력 부재 때문일 것이다. 광활함 그 자체인 우주, 기회를 엿보고 있을 적들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 그곳을 떠날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나를 비롯한 함대의 군인들의 외로움을 나는 모른다. 알 수 없는 적만큼이나 우주 함대에 있는 동료조차 믿을 수 없다. 적은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너와 나 사이에도 오해가 쌓이는데 업무로 만난 동료는 오죽할까.


배명훈이 묘사한 우주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그들의 고독을 너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과연 알 수 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 함대와 벌이는 전쟁, 전쟁이 끝나야만 너를 만나러 지구에 갈 수 있다. 가능한 일일까? 편지와 함께 너에게 줄 반지도 준비했다. 그것을 받고 너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반지를 끼고 나를 기다릴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이 소설을 우주의 미래, 현실적인 우주 전쟁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학, 군사학, 중력렌즈, 전파 망원경의 등장으로 묘사되는 교전을 보면 그렇다. 비슷한 게임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겐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였다.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닿고자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멀어지는 연인의 사랑. 그 결말이 어떨지 알 것 같은 사랑 말이다. 그럼에도 우주 한복판에서 너를 향한 영원한 마음을 보낼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를 바라보며 반짝반짝 빛을 내는 별을 말이다.


반드시 돌아올 거야. 이상하지? 나 같은 우주 태생이 어딘가로 돌아올 생각을 하다니. 이제 나도 고향이 생겼어. 네가 있는 그곳에. 고마워. 그리고 안녕.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153~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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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날이다. 그러니까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지. 책을 샀다. 예전처럼, 열심히 읽고 쓰지는 못해도 여전히 책은 좋다. 아, 그 예전은 언제인가. 예전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한 일인가. 불가능과 가능의 경계 어디쯤 있다고 나를 위로하자. 책은 좋고 그중에서도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 가운데에서도 한국문학으로 마음이 기운다. 책의 날에 곁에 둔 책은 이렇다.


김미월의 소설은 오랜만이다. 『일주일의 세계』란 제목만 보고는 잘 모르겠다. 자세한 내용을 검색하지 않았다. 중고로 구매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에 대한 신뢰 같은 거라고 하면 되겠다. 나머지 한 권은 최진영의 『오로라』다. 위즈덤하우스에서 나온 위픽 시리즈다. 첫 번째가 최진영의 소설이다. 80쪽 분량의 소설, 가격을 생각하면 높게 책정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권의 책값이 매겨지는 과정을 나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적당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앞으로 위픽 시리즈를 계속 만날지는 이 소설을 읽어봐야 알 것 같다.




읽기를 시작한 책은 없다. 현재 읽고 있는 소설은 『모비딕』이다. 계획대로라면 다 읽고 리뷰까지 끝내야 하는데, 이런저런 사정과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로 계획은 수정되고 수정되었다. 책의 날에 읽는 소설, 분량에 어마어마하다. 아직 출항 전이다. 빨리 출항을 해서 나도 바다를 만나고 싶다. 책의 날이 책을 읽어야지, 책의 날이니 책을 생각해야지, 책의 날이니 책에 대해 써야지. 책의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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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04-23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을 보고 제 이야기를 하시는 줄...

암튼 저도 꾸역꾸역 책도 사고 읽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열정(?)적인
독서의 시간은 갖지 못하는 게 아닌가
뭐 그렇습니다.

오늘 연세대에 편지 부치러 갔었는데
도서관 지하에서 창비 책 판매행사를
하더군요. 뭐 살 게 있나 싶었지만,
살만한 책들은 모두 가지고 있더라는.

그래도 책의 날이니 뭐라도 한 권 사
야 하나 어쩌나 싶네요.

자목련 2024-04-25 09:04   좋아요 0 | URL
제가 잘 낚은 건가요? ㅎㅎ

책의 날이라는 좋은 핑계 덕분에 책을 사도 좋았을 날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근데, 저는 레삭매냐 님 베란다의 튤립 소식도 궁금해요!
바쁘시겠지만 소식 좀 전해주세요^^

새파랑 2024-04-2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로라>를 너무 좋게 읽어서 저 가격이 전혀 아깝지가 않더라구요~!!

<모비딕> 자목련님의 감상평이 기대됩니다~!!!

자목련 2024-04-25 09:04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이 좋았다고 하셔서 <오로라>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 이유도 있습니다. ㅎ
 
고백루프 창비교육 성장소설 11
박서련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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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로맨스 소설을 쓰던 아이가 있었다. 반장이었다. 소설은 인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반장과 그리 친하지도 않았거니와 예나 지금이나 로맨스 소설에는 큰 과심이 없기에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박서련의 첫 청소년 소설집 『고백루프』를 읽고 뜬금없이 그 아이는 계속 소설을 썼을까 궁금해졌다. “청소년은 소설을 쓸 수 있고, 소설 쓰던 청소년이 결국 소설가가 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라는 박서련의 말 때문이다. 나의 학창 시절과는 다르게 현재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학 캠프나 공모전, 예술고등학교도 많으니 박서련처럼 고교 시절에 소설을 쓰고 소설가가 된 이들도 많을 것이다.


『고백루프』 에는 모두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1부에 수록된 「솔직한 마음」, 「안녕, 장수극장」, 「엄마만큼 좋아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감정과 마음을 잘 보여준다. 「엄마만큼 좋아해」 속 화자는 여섯 살 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솔직한 마음」의 ‘나’는 아이돌 그룹의 막내로 학교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다. 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게 아니다. 걸그룹의 멤버 하나가 그룹 내 따돌림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막내인 ‘나’도 가해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 아이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기는커녕 기사를 믿고 대놓고 따돌린다.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원래 왕따였던 아이 ‘원따’의 주변을 서성인다. 일부러 말을 걸고 매점에 가자고 말하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움뿐이다. 무대에서 빛나게 노래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실체도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십 대란 나이에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안녕, 장수극장」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진솔한 이야기였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장수극장’은 문을 닫는다. 고등학생인 ‘나’는 부모님을 대신해 매표소를 지킨다. 배우가 되고 싶었던 할아버지가 만든 극장이고 ‘장수’는 나의 아버지 이름이다. 그런데 학생회장 선배가 축제 때 아버지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한다. 놀라운 건 아버지가 직접 정성스럽게 영상을 촬영했다는 거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축제 때 학생회장이 담은 영상을 통해 동네 어른들이 장수극장을 추억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장수극장은 단순한 극장이 아닌 동네의 역사였고 동네의 기억이자 추억이었다. 내가 소읍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안녕, 장수극장」은 남다르게 다가왔지만 회장의 말에 뭉클하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어른이 되면 우리 모두 다른 길을 걷겠지만 우리가 이 마을에서 자란 기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장수극장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축제도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 (「안녕, 장수극장」, 61쪽)


학창 시절 벗어나고 싶었던 곳을 그리워하고 더 넓은 곳을 원했던 마음은 어느 순간 애틋함으로 변한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이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 이 소읍도 옛 모습과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만큼 시간이 지났다는 말이다. 청소년기를 보낸 공간과 그 공간을 함께 누린 친구들, 그 시절이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지 그때는 모르는 게 아쉽다. 하긴 이런 마음을 십 대엔 나도 몰랐으니까.


2부의 「보름지구」 와 「고―백―루―프」는 SF 요소를 적절하게 살린 소설이다. 미래에 지구를 떠나 달에서 거주하는 「보름지구」 속 청소년 ‘나’는 다른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게 한국 명절인 추석을 소개한다. 송편은 그 맛을 설명할 수 있지만 지구에서 달을 보면 소원을 비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달이나 화성에서의 거주가 한낱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니 푸른빛 도는 지구를 보며 소원을 비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 표제작인 「고―백―루―프」 특정한 날이 똑같이 반복되는 설정으로 친구의 고백을 받고 수락해야만 벗어날 수 있다. 동성 친구를 향한 진심의 고백, 그 고백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참 예쁘고 사랑스럽다.


3부의 두 소설은 작가가 고등학교에 쓴 것이다. 엄마가 암으로 죽고 철원을 떠나 언니가 사는 서울로 올라와 적응해야 하는 「가시」와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 새엄마와 단둘이 살 「발톱」은 상실과 애도를 겪고 서로 의지해야 하는 마음이 담겼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힘든 십 대의 상처와 방황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비슷한 구도와 설정이지만 가족과 타인을 향한 십 대의 마음을 가장 잘 묘사한 게 아닐까 싶다. 혼자라는 두려움과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지 어쩔 줄 모르는 마음과 서툰 행동이 그러하다.


청소년 소설답게 십 대의 이야기를 실감 나면서도 재미있게 풀어냈다. 그래서 당사지인 청소년이 읽는다면 더욱 공감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확장해 나갈 것 같다. 소설을 쓰고 있는 청소년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동기 부여가 되고 응원을 건네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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