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7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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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이건 뭐지? 하는 소설을 만난다. 놀람과 감탄의 연속이라고 할까.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진』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도대체 나는 소설을 제대로 읽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드는 거다. 읽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게 소설의 흥미를 떨어뜨린다는 건 아니다. 다만,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정도라고 할까. 아무튼 『진』은 매우 독특한 소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은 알랭 로브그리예가 미국 대학생들을 위한 교재로, 그러니까 프랑스어 문법을 위한 교재로 쓴 텍스트로 시작한다. 아, 물론 프랑스어를 공부하지도 않고, 원서로 읽을 일이 없는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 이야기에만 집중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는 거다. 소설 중간에 시점도 알라지고 시제도 달라져서(아, 교재라서 그랬던 걸까?)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뭔가 비밀스러운 장면이 계속 이어져 독자를 그 비밀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제 소설을 이야기해 보자면 젊은 남자 '시몽'이 구인 광고를 보고 면접을 보러 어느 장소에 도착했다. 면접을 보기 위한 공간이라고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곳에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진'이란 이름의 여자로 자신의 지시에 따르라고 한다. 그 지시도 모호하다. 파리 북부역으로 가라는 것뿐. 역으로 향하던 시몽은 어느 건물에서 나온 소년이 쓰러진 장면을 목격한다. 소년이 죽은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시몽 앞에 ‘마리’란 이름의 소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소년이 죽지 않았다고 알려준다. 소녀의 말대로 깨어난 소년의 아름은 ‘장’이다. 마리와 장은 시몽을 인도하는데, 이상한 건 시몽이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독자인 나도 뭔가에 홀린듯하다.


정신을 추스르려고 무진 애를 쓴다. 내가 아직 처박혀 있는 어둠은 잠에서 깨어나기를 더욱 힘겹게 할 뿐 아니라, 잠에서 깼다는 사실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내가 잠에서 깨는 꿈을 꾸는 동안은 그 잠이 연장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관념조차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 (60쪽)


계속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장이 이끄는 대로 눈을 가리고 택시 비슷한 걸 타고 낯선 장소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기억을 잃는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깨어나고 그곳에서 마리를 만나는데, 그녀는 이미 죽었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아니, 이건 도대체 뭐지? 1981년에 쓴 소설이 SF 소설이었나? 과거의 기억 한 장면, 같은 장소 다른 인물, 환상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점진적으로 기억이 희미해지고……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기억은 내게서 점점 더 멀어져…… 마지막 불빛, 조금만 더…… 그러나 아무거도 없다. 결국 짧은 환생에 불과할 터. 많은 이들처럼 내게도 빈번한, 덧없이 생생한 그 느낌을 나는 잘 안다. 이른바 미래의 기억이라 부르는 현상. (91쪽)


시몽은 그대로인데, 마리와 장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존재로 등장한다. 어쩌면 나는 소설을 잘못 읽고 있거나 잘 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설을 계속 읽고 멈추지 않는 이유는 시몽이 맡은 임무가 무엇이며 진이 누구인지, 진의 실체가 궁금해서다. 면접 장소에서 진과 함께 등장한 마네킹, 눈을 가리고 도착한 곳에서 자신과 같은 모습(선글라스를 끼고 지팡이를 든)을 한 수많은 남자, 그들에게 조직에 대해 설명하는 목소리.


그나마 안도하는 건 8장(그렇다. 이 소설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었다.)에 등장하는 ‘나’다. 나의 이름은 '진'으로 '시몽'이 면접을 보러 온 장소에서 시몽과 만난다. 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장소, 소설의 처음이다. 프롤로그부터 7장까지 실재가 아닌 환상 같았다면 8장은 그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는 진짜 소설이라고 할까. 하지만 의심을 거둘 수 없다. 마지막에 등장한 진은 진짜 진일까. 그녀는 소설 초반에 등장한 마네킹일지도 모르고 어린 마리의 다른 버전일지 누가 알겠는가. 중절모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표지의 인물이 분명 진이라고 생각하다가 진짜 그럴까 의심한다.


실험적인 소설이다. 내게는 그렇다. 짧은 분량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가득하다. 미스터리, 타임슬립, 추리소설,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소설이니까. 같은 듯 다른 이미지로 변모하는 인물, 하나의 공간을 다채롭게 활용하는 능력으로 미로 같은 소설 속에 독자를 꼼짝 못 하게 만든다. 이상한 건 그게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더 복잡한 미로를 경험하고 싶은 매력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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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14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모호하군요 ㅋ 자목련님 리뷰 읽어보니 어라? 읽어볼만 할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듭니다 ㅋ

자목련 2023-12-15 12:11   좋아요 1 | URL
모호하지만 지루한 모호함은 아닌.
새파랑 님, 즐겁게 만나시길~~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결심을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물이다. 궁금한 책은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많지만 12월의 책 구매는 이 소설들로 끝을 내려고 한다. 현재는 그렇다. 사실, 사진의 맨 아래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은 책장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알라딘에 들어가 구매내역을 살펴보니 11월의 첫날이었다. 잠자냥 님의 리뷰를 보고 산 책이었다. 무려 40일을 방치(?) 하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읽어야 한다. 아, 올해가 가기 전에 읽으려고 다짐한 책들은 왜 이리 많은가. 이제 겨우 20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좋은 소설을 발견하는 일은 기쁜 일이다. 이미 좋은 소설을 쓴 작가가 쓴 다음 소설을 만나는 일도 그렇다. 그래서 『맡겨진 소녀』로 만난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읽기 전에 기쁨이 한가득이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진』도 기대하는 소설이다. 물론 겨울이니 『소설 보다 : 겨울 2023』도 읽어야지. 가을 2023을 다 읽지 못했지만 말이다. ㅎ




누군가 연말에 많은 송년회를 하겠지만 나는 책을 읽고 싶다. 아니, 읽어야 한다. 지금의 게으름에서 일어나 읽어야 한다. 12월의 소설을 읽고 미처 읽지 못한(아, 너무 많구나) 책들도 차곡차곡 읽어야 한다. 도대체 뭐 하느라 책도 안 읽는지. 이러다 책들의 미움을 한가득 받을 것 같아 무섭구나.





12월의 소설은 하나같이 얇다. 열심을 내야지. 얇다고 나중으로 미루면 또 책장에서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문장을 한 번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느 소설인지는 나만 아는 것도 좋겠다. 먼저 읽은 사람은 바로 알겠지만 말이다.






나는 정해진 시각에 정확히 도착했다. 여섯시 반. 벌써 거의 어두컴컴하다. 창고는 닫혀 있지 않다. 나는 자물쇠가 없는 문을 밀면서 들어선다. 내부는 온통 조용하다. 좀더 바짝 귀를 기울이자, 꽤 가까운 곳에서 맑은 소음 하나가 규칙적으로 탐지된다. 제대로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 물이 새면서 통이나 대야 또는 고인 웅덩이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읽지 않은 소설을 생각하는 일, 제목만 보고 소설을 상상하는 일, 즐거움이다. 체득하는 즐거움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걸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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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11 1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2월 책 네권이 딱 아담하고 읽고싶어지는 두께네요~!!
제목에서부터 좋아보입니다~!!

자목련 2023-12-11 11:50   좋아요 2 | URL
네, 얇아서 빨리 읽을 것 같기도 한데..
모두 기대하는 소설이에요!

잠자냥 2023-12-11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40일이나 방치하다가 발견! ㅋㅋㅋ
올해가 가기 전에 읽으세요.
그리고 <진>은... 이미 사셨네요. 제 리뷰 읽고 사신다고 했는데 리뷰가 오늘 올라옴;;;

자목련 2023-12-11 11:50   좋아요 1 | URL
<소네치카>, <진> 모두 자냥 님 리뷰 덕분에 탱투하고 샀어요. <진>리뷰도 좋을 거라 여기고!!

거리의화가 2023-12-11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40일 방치에 저는 몇 년간 묵힌 책도 많은데 중얼거리며 자괴감에 빠져듭니다^^;;; 얇은 책들이 오히려 더 내용이 더 압축적인 경우가 많아 읽기 어렵더라구요. 자목련님 남은 12월 즐거운 독서 생활 이어가시길!

자목련 2023-12-12 17:12   좋아요 0 | URL
몇 년간 묵힌 책은 당연 무지 많지요. 다만, 그 책은 책장에 보이거든요. ㅋㅋ
화가 님 말씀처럼 얇은 책이 읽기 어려운 경우도 많더라고요!

그레이스 2023-12-14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미안한 맘도 못느끼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 ㅎㅎ

자목련 2023-12-14 14:28   좋아요 0 | URL
아마도 서재 대부분의 이웃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

희선 2023-12-15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십이월이 가기 전에 읽고 싶은 소설 만나시기 바랍니다 책을 사두면 언젠가 보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하는군요 출판시장은 줄어든다고 하는데 여전히 책이 많이 나오네요


희선

자목련 2023-12-15 12:28   좋아요 0 | URL
읽고 싶은 소설, 책들이 계속 나와서 걱정입니다.
희선 님, 비 오는 금요일 따뜻하게 보내세요^^
 
소설 보다 : 겨울 2023 소설 보다
김기태.성해나.예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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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의 소설이 반갑고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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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2-07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항상 자목련님이 반갑고 궁금합니다.

자목련 2023-12-11 09:35   좋아요 2 | URL
이거 고백인가요? ㅋㅋ

잠자냥 2023-12-11 11:4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저 곰탱이 표정 진실성 1도 안 느껴지는....ㅋ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12-11 18:0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진짜 너무웃기고기엽게생겼죠ㅜ
하지만 오해를 부르는 얼굴일뿐... 전진심입니다 고백이고요!! 😍
 
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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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시골도 항상 공사 중이다. 그러니까 빈 공터만 있으면 어김없이 아파트가 들어선다. 시골 인구를 생각하면 그 집을 누가 살까 싶지만 주변 아파트를 검색하면 빈 집도 없고 전세도 없다. 매번 드는 의문, 저렇게 집들이 지어지고 있는데 왜 많은 이들이 살 집을 구하지 못하는 걸까.


어쩌다 보니 최근에 집을 소재로 한 책을 이어 읽는다. 김혜진의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에서 만난 단편들도 하나같이 집, 공간,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꿈꾸는 미래, 더 나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알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고 힘들어도 그 마음이 커지기를 바라게 된다.


김혜진은 이 소설집에서 집이 갖는 의미, 집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의 집에 관련된 이들, 집을 소유한 집주인, 그 집에 살고 있는 거주자, 관리인, 부동산 업자까지 집을 향한 마음을 통해 집이 무엇이냐 묻는 동시에 나만의 특별하고 유일한 집을 떠올리게 만든다.


8개의 단편 모두 좋았지만 그 가운데 조금 더 좋았던 단편은 집주인과 세입자로 만나 서로를 챙기며 가족처럼 지내지만 결국 이사를 두고 불편한 사이가 되고 마는 '만옥'과 '순미'의 이야기 「목화맨션」, 한때 자신이 살아왔던 빌라의 관리인이 되어 빌라를 청소하고 세를 독촉하고 세입자들에게 소유주의 뜻을 전하는 일을 하는 '호수 엄마'의 이야기 「산무동 320-1번지」, 누구와 사느냐에 따라 집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사랑하는 미래」였다.


서로를 처지를 이해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가 있다면 힘들어도 살만하다고 느낀다. 「목화맨션」속 '만옥'과 '순미'가 그랬다. 순미는 집주인 만옥을 언니처럼 대하고 뭐든 나누려 했다. 세입자와 친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옥은 그런 순미가 고마웠다. 재개발이 될 거라는 말에 사들인 '목화맨션'에서 순미는 8년을 살았지만 만옥이 사정이 생겨 집을 팔게 된 상황이 오자 둘 사이의 단단한 우정은 헐거워진다.


집을 두고 만난 사이가 아니라면 둘은 어땠을까. 「산무동 320-1번지」의 호수 엄마도 그런 처지였다. 자신이 살던 곳이 얼마나 열악한 공간이지 잘 알지만 집 주인의 말과 세입자의 말을 그대로 전할 수 없었다. 잘 아는 처지였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곧 철거될 공간이라 누구도 돌보려 하지 않는 공간이지만 누군가의 삶이 지속되는 곳이다. 세입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호수 엄마'의 삶도 그곳에 있었다.


창 너머로 서서히 멀어지는 산무동 일대가 그들 부부에겐 마지막 직장이고 어쨌든 지금은 그 빌라에 누군가 살아야지만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으므로, 최선을 다해야 하고, 또 죽을힘을 다할 거라는 다짐을 되뇌면서였다. (「산무동 320-1번지」, 171쪽)


「목화맨션」과 「산무동 320-1번지」를 읽으면서 3층짜리 주택을 지어 1,2층은 세를 주고 3층에 사는 고모가 생각났다. 집 주인이었지만 오히려 세입자의 눈치를 보고 세를 올리지도 못하는 고모. 세입자에게는 마냥 부러울 주인이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집을 통해 맺어진 관계는 편할 수많은 없다.


그래도 집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그저 빈 공간이었을 때에는 없던 애정이 살림살이가 들어오면 커지기 시작해서 누군가 함께 살게 되면 공간은 색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저 퇴근 후 잠을 자고 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어느 순간 반짝반짝 빛나는 마법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변모한다고 할까. 「사랑하는 미래」가 딱 그렇다. 일상의 재미와 즐거움은커녕 휴가 계획도 없던 ‘주인’이 '마크'를 만나면서 그녀의 삶은 변화한다. 자발적으로 모여 대화를 나눈다는 모임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의 마크는 배우를 꿈꾼다. 촬영 장소와 시간을 맞추기 위해 주인의 집에 마크가 오게 되면서 집은 활기를 띤다. 친구는 그런 주인을 염려하고 걱정하지만 주인은 마크와 함께하는 미래를 고대한다. 주인이란 이름의 왠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집의 주인으로, 삶의 주인으로 사냐고 묻는 것만 같다.


멀리 집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녀를 채근하던 조바심이 기대심으로 바뀐다. 그 순간, 그녀의 집은 잿빛 담벼락 너머에 자리한 수많은 주택 중 하나가 아니다. 오랜 세월, 권태와 지루함을 견디며 낡아가는 그렇고 그런 주택이 아니다. 그 집엔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순수한 애정과 진실이 마음에 머물러 있다. 이 순간, 그녀의 집은 특별하고 유일한 장소다. 매일 새로운 서사가 탄생하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움트는 공간이다. (「사랑하는 미래」, 227쪽)

집을 향한 마음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누군가 집은 투자이자 상품이고 누군가 집은 안식처이고 누군가 절박한 공간이다. 나와 다른 목적을 지녔다고 해서 누군가의 마음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부동산 임장을 다니며 자신에게도 골칫거리가 아닌 좋은 기회를 안겨다 줄 집을 만날 희망을 하는 「이남터미널」 속 '남우 사모님'을 비난할 수 없다. 어쩌면 모두가 마음 한구석에 같은 희망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기대였고, 우려였고, 가능성이자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방향을 조금만 틀면 완전히 달라 보이는 홀로그램처럼 밤새 그녀의 내면에서 반짝거렸다. 아니, 그건 그녀가 도무지 짐작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던 자신의 미래였는지도 몰랐다. 빛바랜 집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집들. 누구도 원하지 않고, 가지려 않는 집들. 그러나 길고 긴 세월을 이기고 견디며 살아남은 집들.( 「이남터미널」, 113쪽)


그런 마음은 재개발 동네에 살면서 집을 대하는 어른들이 이상하게만 보이는 「20세기 아이」속 아이 '세미', 사는 곳이 좁아서 이사 가고 싶은 손녀를 위해 보험비를 더 타고 합의금을 받으려는 「자전거와 세계」 속 할머니, 집 청소를 하는 '인선'에게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는 「축복을 비는 마음」 속 '경옥'의 마음일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조금 더 나은 공간을 바라는 마음, 가까운 이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 소중한 사람의 축복을 비는 마음, 그 마음은 바로 모두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걸 알기에 우리가 머무는 곳이 삶이 피어나고, 따스함이 전해지는 특별하고 유일한 공간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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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2-0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자목련 2023-12-07 10:49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포근한 연말 보내세요^^
 

지난 달 방영을 시작한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을 보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대하사극이라 기대가 컸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드라마는 많았지만 고려를 다룬 드라마는 많지 않았기에 반가웠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다룬 드라마. 드라마의 원작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소설과 드라마를 비교하며 시청할 것 같다.


길승수 작가의 『고려거란전쟁:고려의 영웅들』 을 읽으면서 자연적으로 소설 속 인물과 드라마의 인물을 떠올리게 되었다. 저자의 『고려거란전쟁』가 전체적인 전쟁의 흐름을 다루었다면 소설에서는 2차 고려거란전쟁을 기록한 전쟁일지와 동시에 '고려의 영웅들'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전장의 나가 적과 맞서 싸우는 실존하는 고려인의 모습을 들려준다. 군사를 지휘하는 지도사의 모습, 병법과 전략을 세우는 모습,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내고 병사들의 사기를 복 돋우는 모습, 나라를 위하기보다는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모습, 전쟁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을 마주한다.


2차 고려거란전쟁은 소배압을 필두로 황제 야율융서가 직접 전장에 나온 거란에게는 오직 승리만이 중요했다. 막대한 군사력을 내세워 전쟁을 시작했으니 거란의 쉬운 전쟁이 될 거라 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려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소설은 1010년 11월 16일을 시작으로 날짜와 시간별로 이어가며서 공간을 바꿔가며 고려와 거란의 전투 상황을 입체적으로 다룬다. 그러니까 흥화진, 구주성, 통주, 서경 등 곳곳에서 전투 현장을 그리며 대치하며 상대의 전략을 예측하는 고려 영웅들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놀랍고 인상적인 것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로 진입하는 거란의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 노래를 부르고 뿔나발을 불러 전혀 밀리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는 고려의 모습이었다. 『고려거란전쟁(상)』 에서는 특히 현종을 왕으로 세운 강조가 통주에서 거란과 싸웠지만 포로로 잡혀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맞는 모습과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조원을 도와 서역을 지킨 강민첨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장면 앞에서 강민첨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과 마필, 기계가 보통강의 얼음 위를 가득 메우며 전진해오는데, 말의 발굽과 각종 기계의 바퀴에 긁히는 얼음 조각들이 마치 안개처럼 날리며 대기를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더욱이 해가 비추어 서릿발처럼 날을 세운 병장기들이 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대기 중의 작은 얼음 조각들이 이 빛을 산란시켰다. 모든 것이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구름 위 천상의 군대가 지상에 도래한 것 같았다. (상, 432쪽)


서경을 함락하고자 하는 거란과 그에 맞서는 고려의 전술은 기가 막혔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성의 약한 부분을 집중 공략하는 거란군을 막을 수 없기에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올라 성 안으로 집입하는 거란군이 바닥으로 내려올 때 빠질 수 있는 구덩이를 판 것이다.


거란군에게 패해 산속으로 흩어진 아군은 모으고 포로로 잡혔지만 투항하지 않고 죽음을 불사하며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은 높은 직책의 사람만이 아니었다. 성안의 평민과 노비도 군사를 도왔다. 생동감 넘치는 전투의 모습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되어 긴박한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주먹을 쥐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읽다 보면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 얼마나 소수인가 알게 된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증명한다고 할까. 그러나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이듯 지난 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선조들은 모두 승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드라마를 챙겨보면서 『고려거란전쟁(하)를 마저 읽었다. 드디어 강감찬이 등장했고 양규의 용맹함을 마주했다.사실, 강감찬만 읽고 있었고 양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고려거란전쟁(상) : 고려의 영웅들』 에서 실감 나게 전쟁의 모습을 그렸다면 『고려거란전쟁(하) : 고려의 영웅들』에서는 인물에 대한 깊이가 느껴졌다고 할까.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왕순(현종)이 전쟁을 대하는 태도, 그러니까 거란에 항복하자는 이들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이들 의견을 듣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고뇌의 모습. 한 나라를 책임지는 왕이 무조건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 왕후의 임신을 이유로 개성을 떠나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대신의 속내는 왕을 보필하며 결국 그들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식솔의 안전을 생각하면 우선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을 것이다.


왕순은 피난을 청하는 대신 군사를 차출하여 밥을 주고 사기를 돋우라는 강감찬을 믿기로 한다. 한국의 역사 속 위대한 장군으로 등장하는 강감찬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문신출신이었던 이가 전쟁을 이끄는 장군이 되었다는 것도 놀랍다. 소설에서 묘사한 강감찬은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고집쟁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감찬은 예부시랑이나 육십이 넘은 나이였다. 평소 말이 많지 않았고 엄격하기로 말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으며,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관료들은 평소 강감찬과 가까이하기를 꺼렸다. 강감찬이 심하게 원리원칙주의자인데다가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강감찬은 관료들끼리 사적인 교분을 맺는 것을 싫어했고 당파를 이루는 것은 더욱 싫어했다. 문하생들의 모임 따위는 당연히 나가지 않았다. 관료들끼리 사적 교분이 있으면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 180쪽)


『고려거란전쟁(하) : 고려의 영웅들』에서는 강감찬의 면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양규와 김숙홍의 활약이 가장 인상적이다. 아니,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곽주를 탈환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과 거침없는 행보와 거란의 포로로 잡힌 고려인을 구하고자 노력한 모습은 감동을 안겨준다. 전쟁에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승전을 기약할 수 없는 전략,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 절박함. 양규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곽주 탈환이 가능했다고 보인다.


“우리는 저들보다 병력이 아주 적습니다. 적은 병력을 기책(奇策)으로 메워야 합니다. 지금부터 거란군이 물러갈 때까지는 오직 이것에 집중해 주십시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나라를 지키는 일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 한 가지에 집중합시다!” (하, 94쪽)


역사의 기록을 다루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쟁을 다룬 소설이기에 내게는 낯선 말들이 많았다. 영채, 토산 같은 단어는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우습게도 소설을 읽으며 검색을 많이 했다. 강민첨, 양규, 김숙홍, 김종현 같은 인물을 검색하고 지식백과를 통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지역명들, 그림으로 만나는 무기, 작가가 생생하게 그려낸 전투의 모습으로 그 안에 살았던 이들을 생각한다. 작가는 이름있는 장수가 아닌 무명의 병사의 활약을 입체적으로 담아내어 그들을 우리가 기억하게 만든다. 고려서, 요사, 송사를 빠짐없이 공부하고 고려사를 기록하고 싶었던 작가의 수고에 감사하다.


드라마의 재미는 이제부터다. 그 안에서 나는 강감찬이나 양규보다는 김숙홍, 강민첨, 무명의 병사를 기한 배우들은 조금 더 애정 할 것 같다.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와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소설이다. 이미 읽고 있거나 읽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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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12-01 17: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드라마 재밌죠^^ 모쪼록 끝까지 이 페이스를 유지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면 좋겠습니다. 말씀처럼 잘 아는 인물보다는 그동안 드라마화되지 않았던 인물들에 주목한다면 좋겠어요. 드라마를 보면서 함께 관련 책을 읽어나가니 확실히 더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얼른 5, 6부 마저 보고 이번주부터는 본방사수하려구요. 자목련님도 드라마 재밌게 즐기셔요!ㅎㅎ

자목련 2023-12-04 15:54   좋아요 2 | URL
직접적인 전쟁의 묘사를 마주하는 건 힘겹지만, 그 모든 게 역사구나 싶은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파요.
강조의 죽음(스포일러군요..)은 안타까웠지만 그의 절개는 놀라웠어요.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인 강감찬의 활약이 두드러질 것 같아요. ㅎ

공쟝쟝 2024-01-16 14:0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열혈 시청자 한 명, 두 명, 여기 세 명이요!~! ㅋㅋㅋ
자목련님 강감찬은 언제(?) 활약 하나요… 양규 잃은 백성은 갈피잡지 못하는 가운데… 갑자기 드라마 생각나서 댓글달러 옴ㅋㅋ

은오 2023-12-01 1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사극도 좋아하시는군요?! 자목련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따..
역사소설까지 읽으시는 자목련님.. 날 미치게 해..

자목련 2023-12-04 15:54   좋아요 2 | URL
나이가 드니(?) 예전과 다르게 사극도 즐겨 봅니다. ㅎㅎ
역사소설 읽기는 재미있지만 리뷰는 어렵습니다. 화가 님을 존경!

미미 2023-12-04 18:57   좋아요 2 | URL
은오님 왜이렇게 귀여운 거예요ㅋㅋㅋㅋ
댓글을 안 달 수가 없따....아놔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12-05 00:12   좋아요 2 | URL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오잉 그정도였나요? 이런 멘트가 미미님 취향이구나... 접수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진심을 표현했을뿐인데..

yamoo 2023-12-0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려 거란전쟁을 보니, 아직도 저 지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를 봅니다.
이미 요즘 학계에서는 요하 일대에서 싸웠다는 게 각종 유물과 지형으로 증명이 되어 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조선사편수회의 지도를 따르고 있네요. 강동6주는 평안도 지방이 아니었다는게 <고려의 북계>에 나오죠. 논문과 유물 그리고 연구물이 싸여도 우리의 한국사 통설은 요지부동이네요. 고려거란 전쟁으로 우리 강역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자목련 2023-12-04 15:57   좋아요 0 | URL
네,말씀처럼 조금이나마 드라마가 그런 역할도 할 수 있기를 바라요. 고려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기대합니다.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지기를 기대하며 즐겁게 시청하고 있어요^^

도도라니 2023-12-12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를 보고 책을 사러 갑니다. 멋진 글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12-19 15:41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즐겁게 만나세요^^

공쟝쟝 2024-01-16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양규 장군님 돌아가실 때 저는…. 어흐흥…. (사실은 애국자) 그리고 김숙흥…과의 우정. 오랫동안 잊고 지낸 브로맨스 못 잃고…, 꺼이꺼이 (열혈 시청자)

자목련 2024-01-17 09:46   좋아요 0 | URL
이제 절반이 지났으니 본격적인 강감찬의 활약이 등장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