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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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을 탐하는 늙음의 이야기. 소설 파우스터의 모티브는 괴테의파우스트이다. 회사 메피스토를 매개로 젊음을 구매하는 노인들이 삶을 조종당하는 젊은이들과 삼각구도로 연결된다. 회사에서 젊은이들의 뇌에 몰래 심은 칩이 안테나 역할을 하며 그들의 경험을 노인들의 장치에 전송한다. 노인들이 안마 의자에 헬멧과 같은 장치를 장착하면 젊은이들의 시각, 청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노인들은 자본과 권력을 이용해 의도적인 상황을 만들고 젊은이와 가까운 인물들을 포섭하여 모바일 애완견을 키우듯 젊은이의 삶이 흘러가도록 조종한다.

젊음을 착취하는 노인들을 파우스트’, 젊음을 빼앗기는 청년들을 파우스터라 칭한다. 소설은 파우스터가 파우스트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을 연다. 주인공이 야구선수라 용어가 생소하여 하나하나 검색해야 했지만 문장의 흡인력은 낯선 허들을 부드럽게 지나도록 만든다. 쫓고 쫓기는 두뇌싸움과 그들의 밀당이 블록버스터급 영화처럼 마지막까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묵직한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책이다. 탄탄한 구성과 두께의 중압감을 넘어서 진공청소기 같은 전개가 펼쳐진다. 무방비한 상태로 이런 책을 만나면 한동안 멍하다. 탁월한 문장력과 속도감이 느껴지는 내용에 압도당한다. 참 좋았다며 단순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아 의욕적으로 노트북 앞에 앉는다.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편은 아니건만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나의 문장에 주눅이 든다. 며칠 만에 후다닥 읽어놓고선 멈칫거리기를 반복하니 리뷰는 보름이 넘도록 진척이 없다.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읽었을 때도 비슷했다. 그나마 짧은 분량에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그린 이야기라 낄낄대면서도 뭉클한 느낌을 가까스로 적었건만. 생과 사로 이어진 길목에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늙음이라는 심오한 주제라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걸까. 고민 끝에 늙음이 끄집어낸 신변잡기스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하기로 한다. 끝내 소설의 깊이를 포용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를 인정한다.

 

요즘 자꾸 예뻐지는 인간이 있다. 이미 충분하여 더 이상의 업그레이드는 필요 없건만 30년은 더 젊어 보인다는 경이로운 말까지 듣는 지경에 이른다. 당신의 짐작이 맞다. 나비종의 글을 몇 번 접해보면 이 인간이 종종 제 잘난 맛에 산다는 사실을 절로 알게 될 테니. ‘젊다예쁘다는 동의어가 아니라고? ~ 젊음은 자체로 아름다움임을 몇 십 년 후의 당신은 절감하리라. 사회성 멘트 10년을 DC 한다 해도 찬란한 청춘으로 돌아간 듯 마음이 통통 튄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퇴행성관절염에 고지혈증에 만성위염의 삼재를 짊어진 노인 모드였기에 최근의 변화는 자체로 경이롭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일상을 되감기한다.

첫째, 듣는 음악이 변했다. 이용권의 기한이 만료되는 바람에 연장과 신상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잠시 예전에 저장했던 음악을 듣고 있다. 30대 때 듣던 노래들이다. 재생될 때마다 각각의 음표는 지나간 장면들을 매달고 넘실거린다. 서툰 모습 그대로도 의미 있고 눈부시던 시절로 종종 타임 슬립 했다.

둘째, 입던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 옷을 입던 모습이 떠올랐다.

셋째, 아이들이 타지에 나가는 바람에 타발적 신혼부부모드가 되었다. 새삼스러운 어색함에서 조금씩 나아간 한 발의 효과가 서서히 쌓임의 미학을 펼치는 중이다. ‘사이좋은 부부 코스프레가 반복되니 코스프레가 빠져버렸다.

넷째, 몇 가지 일들이 BGM으로 깔리니 새삼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희끗한 소금이 올라와 축 늘어진 미역 줄기 같았던 모발 모발. 퇴근길에 불쑥 미용실에 들렀다. 어둑해질 때까지 텅 빈 위를 감당한 보람이 있었다. 볼륨 매직 셋팅으로 다시 부활했다.

다섯째, 이 여세를 몰아 지난 주말에는 몇 년 만에 26년 지기의 집에 놀러갔다.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 속상했던 에피소드, 예전에 함께 했던 추억들이 이틀 동안 우리를 둘러쌌다. 말줄임표와 침묵이 대화 사이에 끼어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간들. 에너지를 완충하고 회춘이 되어 컴백했다.

 

몸이 변하면 마음이 변하는 걸까, 마음이 변하면 몸이 변하는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처럼 애매하다. 둘 다 명제를 증명할만한 사례가 어느 정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체중으로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며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이 다이어트 성공으로 삶이 180도로 바뀌었다는 경험담은 몸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진 예이다. 실체인 몸은 즉각적으로 변화를 만들거나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마음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몸의 변화는 발현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인다.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이 예뻐진다든가 마음이 즐거우면 표정이 온화해지는 것처럼 주로 얼굴을 통해 약간의 변화만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은 이러한 편견을 가볍게 깨뜨린다. 1979, 미국 하버드대의 심리학과 엘렌 랭어 교수는 70~80대 노인 8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한다. 20년 전의 환경을 재현한 고립된 공간을 노인들에게 제공한 다음,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집안일을 직접하고 생활하도록 주문한다. 1주일 만에 나타난 결과는 놀랍다. 마음만 청춘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그들 모두는 시력, 청력, 기억력, 지능, 악력 등 신체 나이가 50대 수준으로 변화한다. EBS<황혼의 반란> 에서도 왕년의 스타 5명을 대상으로 1주일 간 비슷한 컨셉으로 시간 여행을 한 결과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 BBC<더 영 원스>라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보여줬다고 한다.

시간을 되감기한 실험 결과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들을 검색해보았다. 수긍이 가는 해석이 눈에 띈다.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거다. 시간을 거슬러가는 과정에는 매번 함께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 그들과 상호작용하며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최근 나의 젊음이 발현되기 전에도 오랜 친구와의 푸릇한 대화의 시간이 있었음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젊음과 늙음을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니 독자에 따라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이다. 젊은이의 입장에 선다면 자유의지에 의한 주체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지리라. 노인의 입장이라면 자유의지를 젊은이에게 투영하여 젊음을 맛보려는 삶이 마음에 남을 터이다. 그렇다면 나는? 50대는 애매하다. 젊음과 늙음 사이를 서성이는 어정쩡한 경계랄까.

나는 후자의 입장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파우스트로서의 삶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표면적으로는 파우스트가 파우스터를 노예인 듯 조종하지만 이는 실체 없는 거품처럼 허무하고 안쓰럽다. 대리만족하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나의 것이 아닌 젊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나. 스스로의 근육 없이 번듯한 목발에 의지하는 걸음으로 언제까지 갈 수 있는가.

책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몽환적인 표지 그림이다. 복잡한 나뭇가지 아래 인간들의 옆모습이 보인다. 그림자 작가라는 나현정 작가의 명칭이 생소하여 다른 작품을 찾아본다. 흑백의 뒤엉킨 선들이 시선을 붙든다. 컬러감보다 무채색이 어울리는 작품 세계를 지닌 작가이다. 갈수록 무채색에 끌린다. RGB 0,0,0255,255,255 사이의 그러데이션이 인간의 섬세한 감정을 재현하는 것 같아서이다. 몸과 마음의 변화 역시 무채색 못지않게 섬세하니 책의 내용에 적절한 그림이다.

몸과 마음은 본디 하나라서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며 나만의 결론을 내린다. 무엇이 먼저인지 구분 없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몸이 젊어지면 마음이 젊어지고 마음이 젊어지면 몸이 젊어지는 변화가 이어지니까. 그 둘은 쌍방향의 화살표 사이에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삶의 흐름을 만드는 지도 모른다. 충전과 방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삶의 배터리가 줄어드는 것이리라.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는 건 과거에 얽매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찬란했던 에너지의 불씨를 되살린다는 의미이다. 몸과 마음은 온전한 나의 것이어야만 삶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우리는 모두 아직 늦지 않았다. 마음이 늙을 때 육체는 마음에 동조하여 사그라지는 지도 모르니.

 

p109, 밑에서 8째줄: 움켜진 움켜쥔

p322, 밑에서 9째줄: 모르겠군요.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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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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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바다에서 물방울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찰랑찰랑한 풍경 소리와 비슷할까. 다정한 숨소리인 듯 작은 알갱이들의 소리가 퍼져나갈까. 원자 단위의 입자들은 늘 진동하고 소리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의 에너지이니 황당무계한 상상은 아닐 터이다. 가시광선 바깥에 존재하는 적외선이나 자외선처럼, 가청주파수 너머로부터 울리는 크고 작은 소리들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검은 구멍에서 소리가 울려 퍼진다니! 지난 8, NASA는 블랙홀의 소리를 공개했다. 24천만 광년의 은하단에 있는 블랙홀은 57~58옥타브로 증폭시킨 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천상오싹의 상반된 평가를 받는 34초의 소리로부터 예술가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크고 작은 소리를 내는 삶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여 표현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음악가든 화가든 문학 작가든 공통적인 속성을 품는다. 섬세한 촉수로 들릴락 말락 존재감조차 어필하지 못하는 삶의 숨결을 증폭시킨다는 점이다. 선율이냐 색채냐 문장이냐 필터의 종류만 다를 뿐이다. 맥박인 듯 활어처럼 팔딱거리는 삶의 의미를 전하면서 스스로도 전율을 느끼는 순간을 상상한다. 이어폰으로 전해 듣는 블랙홀의 소리처럼 생경하면서도 묘하다.

 

음악을 먼저 들을까, 책을 먼저 읽을까. AKMU의 정규앨범 항해를 검색하니 10곡의 목록이 보인다. 앨범의 모티브라는 책의 소개 글. 잠시 고민하다 책을 먼저 펼친다. 예술과 연결된 문학은 어떤 느낌일까.

소설 물 만난 물고기는 음악을 통해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찾아가는 성장 일기이다. 주인공 은 여행을 하며 여러 인물들로부터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찾으려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망한다. 몽환적인 해야와의 만남은 그의 삶의 분기점이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공간 묘사,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캐릭터와의 대화는 4차원적인 분위기를 뿜어낸다. 그녀와의 사랑과 이별은 그에게 많은 깨달음을 남긴다.

픽션의 바탕에는 작가의 내면세계가 BGM처럼 펼쳐진다. 이야기의 흐름은 단지 거들뿐, 본질은 등장 인물간의 대화에 있다. 곳곳에 음악가로서의 열망과 고민이 묻어난다. 작가는 두 주인공이 함께 하는 풍경에 자신의 사유를 얹어 자유와 예술로서의 음악과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표현한 것이 곧 자신이 되는 사람,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 그리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 책 표지의 바다처럼 푸른 시선을 지닌 작가가 정의하는 예술가에게서 바다 냄새가 난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의 세상은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는 걸까.

 

삶의 모습에 대한 당위를 뱉어내곤 그대로 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끔 버거웠다. 내 자신이 얼마나 위태위태한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잘 아는 나는 종종 가라앉았다. 실제의 나와, 나를 돌아보는 나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혹은 물에 잠겨 짧아 보이는 두 다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뱉은 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의 말을 하면 된다는 문장에 뜬금없는 위로를 받는다. 예술과 삶의 싱크로율을 말하는 문장이지만 어쩐지 마음의 짐이 가벼워진다.

음악이 서랍인 듯 추억을 넣고 다닌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강한 인력으로 나를 당기던 음악은 종종 누군가를 담은 이야기와 함께 흘렀다. 함께 듣던 음악은 곁에 없는 그를 순식간에 불러왔다. 함께 먹던 음식은 더 이상 그 때의 맛이 나지 않았다. ‘라는 재료가 빠졌기 때문이다. 스치는 향기에 눈물이 나는가 하면 익숙했던 풍경이 의 부재로 낯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대상과 결합된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은 종종 환경으로부터 불현 듯 다가오는 호르몬을 경험한다. 특별했던 이를 공유한 음악은 공간 전체를 울리며 물처럼 심장을 향하여 스며든다. 흠뻑 젖은 마음이 마를 때까지 꿈인 듯 타임 슬립 하는 순간을 만든다. 감각할 수 있는 영역보다 드넓은 공간에 존재하기에 감각이 증폭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걸까.

 

앨범 수록곡의 노랫말을 하나하나 찾아본다. 모두가 책 속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문학적으로 서툰 몸짓이 음악과 겹쳐지니 책을 바라보는 시선이 몰랑해진다. 작가가 고민했던 예술가를 한 명 알게 된 것 같아서. 앨범에 실린 곡들의 탄생 배경을 음악가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기분이다. 큐레이터와 천천히 대화하며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온 느낌이랄까. 더불어 작가의 음악관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온 문장들을 통과하니 그의 음악을 보다 친근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전주만으로 공기가 물결치던 곡. 가수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벌써 좋아서 귀 기울이던 작품. 공간의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쨍쨍한 태양의 화살처럼 소리 없이 가슴에 꽂히던 순간. 선율을 쓰담쓰담하는 담담한 가사에 다시 반해버린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5분여 동안 나를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리고 이런 감각의 경험은 매번 현재진행형이다.

책을 덮고 곡을 다시 듣는다. 눈밭에 난 발자국을 따라 걷듯 흘러나오는 가사를 하얀 종이에 적는다. 시처럼 보였던 가사에 이야기가 얹어지니 이전보다 묵직해진다. 음표가 귓가에서 울릴 때마다 무심코 흘려보냈던 글자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품은 꽃잎으로 되살아난다.

책을 다시 펼쳐 휘리릭 넘기니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보이는 바다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잔잔한 물결 소리인 듯 착각이 인다. 노래하듯이 살아간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바다 속 물방울처럼 살아간다면 삶이 얼마나 찰랑거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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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 충분히 괜찮은 사람
김재식 지음 / 북로망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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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방울 백만 개가 모여서 하나의 빗방울을 만든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자연 현상의 본질은 과학을 넘어 인문학의 영역에 머물기도 한다.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을 해도 의미가 깊은 문장이 있다. 빗방울이 살아남아 바다가 된다는 작가의 글을 보고 과학교과서에 나온 문장을 떠올린다. 백만 개도 훨씬 넘을 빗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루는 장면을 상상한다. 곱씹을수록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우리의 생각도 이런 빗방울들의 집합체이리라. 빗방울이든 거대한 바닷물이든 모든 물은 하나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몸은 수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다. 당신과 나는 다르지만 우리는 인간이라는 공통적인 끈으로 묶인 존재다. 인간의 세포에는 각각 46개의 염색체가 담긴다. 모양과 기능이 달라도 공통적인 염색체마냥 한 권의 책은 수많은 문장의 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체이다. 하나의 제목으로 묶여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책속의 문장들을 보며 염색체를 떠올린다.나로서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향하는 세포들이다.

 

이 책은 시의 형식을 취한 에세이다. 찬란한 운율의 맛보다 순두부의 그것에 가깝다. 제목을 차례로 나열해본다. 1장은 기대해도 돼, 기대어도 돼’, 2장은 나는 나대로 충분히 아름다워’, 3장은 빗방울은 살아남아 바다가 된다’, 4장은 행복의 방향을 조금만 바꿔봐’. 조선 후기 백자의 담백함이 떠오르는 4개의 장은 제목만으로 마음을 다독인다. 작은 빗방울을 연상하며 차례에 쏟아지는 문장들은 천천히 음미한다. 읽는 것만으로 마음이 서서히 데워진다.

단편소설인 듯 생각의 조각들이 작은 이야기가 된다. 자연스럽게 심장을 두드린다. ! 나도 옛날에 이런 생각을 했었지잊고 있던 기억의 단편들이 부유한다. 작가는 어디서 들어봤음직한 문장, 언젠가 한 번쯤 했던 생각을 느린 화면으로 재생한다. 그의 특별한 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상에 숨어있는 작은 보석을 보여준다는 거다. 평범함에 담긴 본질이 그만의 해석으로 드러난다.

마라 탕의 자극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밋밋하게 비춰질 수도 있겠다. 책속의 문장들은 역동적인 봄의 시작보다는 봄 한가운데에 비추는 오후 햇살에 가깝다. 따뜻하게 마음을 두드린다. 문장을 따라 덩달아 흐르는 호흡이 평화롭고도 느려진다.

 

위안이 되는 몇몇 문장을 만난다. 모르는 길로 가도 집에 갈 수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 사람들의 말에는 아무런 힘이 없으며 진짜 힘은 내 마음의 변화에서부터 나온다는 것, 무엇을 하면서 살면 좋을지 알고 싶다면 무슨 일을 할 때 행복한지 보라는 것, 좋았던 기억이 후회로 남거나 잘못된 줄 알았던 일이 삶을 좋게 변화시키기도 하니 수많은 선택 앞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냉철한 문장도 보인다. 정리가 안 되는 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라는 것, 사람들이 굳이 궁금해 하지 않을 내 삶의 단편들을 보여주는 데 신경을 쓰느라 시간을 뺏기지 말라는 것, 나를 힘들게만 하는 것은 나를 위해 떠나는 게 좋다는 것, 쌓인 사람들도 정리가 되어야 내게 어떤 사람이 소중한지 눈에 보인다는 것, 나를 희생하는 것과 잃는 것은 다르다는 것,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정의하는 거라는 것, 물질적인 것은 다시 돌려받지 않아도 되는 만큼만 주어야 한다는 것,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나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 사람은 변하지 않고 달라진 상황에서야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는 것뿐이라는 것,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나에게 인정받는 게 중요하다는 것.

 

잠시 과거로 여행을 떠날 때가 있다. 예전에 했던 생각은 예전의 나를 불러온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처럼 먹먹하기도 한 감정으로 오래된 필름을 돌려본다. 나 같은 친구가 한 명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스스로 들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무거울 때 어린 나는 종종 이런 바람을 떠올렸다. 한동안 흐린 나날을 보내다 그럭저럭 빠른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환을 반복하곤 했다.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의 답, <나에게로 가는 길>은 이런 시간들이 모여 이루어졌으리라.

반복된 시행착오의 과정을 3단계로 정리한다.

1단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너, 우울 모드. 나 같은 친구를 찾아보지만 있었으면 좋을 그런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2단계, 천상천하유아독존, 절대고독 모드. 세상은 결국 혼자 사는 거다.

3단계, 이 안에 나있다, 거울 모드. 있었으면 좋을 그런 인간은 바로 나! 내가 나의 친구가 되면 된다.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바로 나이다.

 

잔잔하게 반짝이는 날, 바다를 바라보며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 오고가는 파도 같은 얘기를 이따금씩 두서없이 나누는 풍경. 말하지 않아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버릴 것 같은 두 마음.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장면 속 주인공이 된 듯했다. 무심코 흘려보낼 뻔한 일상의 빗방울을 살리는 노하우를 전수받은 기분이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생각이든 다 포용될 것 같은 분위기에 젖어 제목으로 위안 받고 내용에 공감하며 일상과 나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을 보냈다.

작은 행복의 특별함을 아는 작가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김재식의 시선을 따라가며 덩달아 나의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나 이런 적 있다 말하면, ? 나도 그럴 때 있었다고 답했다. 이럴 때는 이렇게 바라보았다 하면, ! 무릎을 치며 새로운 길을 찾은 듯 설렜다.

누구나 자신만의 바다를 품는다. 빗방울은 살아남아 바다가 된다는 작가의 문장을 떠올린다. 책 속의 문장들이 빗방울로 남은 걸까. 심장으로 떨어진 문장들이 나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것만 같다. 빗방울을 살리는 건 온전히 나의 몫임을 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인 나를 응원한다. 이 순간 스스로에게 지지를 보내고 싶을 당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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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부드러워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5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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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글자는 맞았다. 뛰어난 점이 너무 많아 경이로울 정도라는 어니스트님의 추천글에서 결국 나는 두 번의 경..를 경험했으니까.

첫 번째 경이! 믿기지 않지만 대장내시경s eve 의 방대한 드링킹을 능가하는 511쪽을 꾸역꾸역 넘겼다는 점이다. 바로 내가!

두 번째 경이! 이토록 마지막까지 줄기차게 재미없기도 쉽지 않다는 경이다.

마지막 장을 덮는 손이 511쪽의 후유증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듯 착각이 들었다. 굳이 찾고 싶지는 않지만 궁금은 하다. ......에서 경이를 찾아야 했던 건가요.

 

소설이 다큐는 아니지만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홀로그램 효과를 낸다. 진짜 일어났던 일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손에 잡힐 듯 실감난다. 내용면에서 많이 아쉬웠던 책이다.

첫째, 구상은 좋았으나 서사 구조가 약하다. 주요 테마는 충분히 시선을 끌만한 화두이다. 정신과의사 딕과 정신병에 걸린 그의 아내 니콜과 신인배우 로즈메리 사이의 삼각관계를 다룬 이야기.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인종폭동, 살인, 결투, 발작 등 자극적인 요소가 사이사이에 등장하지만 발가락 끝만 적시다 쏙 들어간다. 뚜껑은 열었으나 꺼내다 만 건더기인 듯 어정쩡하다.

둘째, 조연과 엑스트라의 포지션이 애매하다. 꿰지 않은 구슬이 서 말이다. 연결성이 약하다. 로즈메리를 마마 걸로 만든 그녀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몇몇 비중 있어 보이는 부인들도 등장하지만 주인공들을 서포트하는 배경으로서의 역할도 미흡하다. 손톱 아래 거스러미처럼 서사가 살짝 일어나다 사라진다. 지나가는 사람 1,2,3가 뜬금없이 소그룹으로, 개별적으로 잠깐씩 등장만 했다 퇴장한다.

둘째, 일관적인 시점이 없어 산만하다. 처음에는 딕과 사랑에 빠진 로즈메리의 이야기인가 싶다가 갑자기 딕과 아내 니콜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결론적으로 딕과 니콜이 피날레를 장식한다. 로즈메리는 연기 못해서 비중이 줄어든 주인공마냥 나중에는 슬그머니 사라진다.

셋째, 제목은 무슨 이유로 갖다 붙였을까. 밤은 부드러워라는 존 키츠의 시 <나이팅게일에게 부치는 노래>의 구절에서 인용한 제목이라고 한다. 전문이 궁금해서 찾아본 시가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시에서 묘사된 밤의 결은 명확하다. 그대와 함께 있기에 부드러운 밤이다.

이 소설은? 여주인공이 둘이니 2지선다형이건만 답을 고르기 어렵다. 둘 다 부드럽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하다. 제목에 심오한 의미가 있나? ‘부드러워라로 번역된 단어 ‘tender’의 의미를 찾아본다. 의학용어로 접촉 혹은 가압에 대한 비정상적 과민성을 뜻한다. 남자 주인공이 정신과의사이니 혹시나 중의적인 뜻인가 싶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tender’의 다른 의미로 감시인, 돌보는 사람, 간호인의 의미도 발견한다. 남자 주인공이 정신병에 걸린 아내를 돌보는 관계도 언급이 되니 혹시나 이건가. 그럼, 간호인 = ? 워워,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멋있는 시의 구절을 차용한 피츠제럴드를 그냥 받아들이자. 하지만 솔직히 여주인공 투 탑 중 어느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부드러운 밤의 느낌은 찾지 못하겠다.

 

이제껏 읽어왔던 소설은 대개 두 부류였다. 내용이 재미있거나 묘사 형식이 아름답거나. 둘 다 괜찮은 작품은 드물더라도 적어도 한 가지 요소에서는 독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묘사는 문체와 연결되어 일관적인 방향의 결을 만든다. 강물처럼 유려하게 흐르는 문체는 약간의 햇살만 받아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묘사 자체로도 흡인력 있게 독자를 빨아들이는 에밀 졸라처럼. 내용에서 재미 찾기에 참패한 나는 매력적인 묘사라도 건지려고 시도한다. 매의 눈으로 썩 괜찮은 표현을 뒤진다.

초반의 배경과 이야기는 겉돌았고 배경 자체에 대한 묘사도 이미지화하기 어려웠다. 화려한 묘사를 시도한 흔적은 묻어나나 난반사되는 빛처럼 일관성이 없어 조잡했다. 당최 뭔 얘기를 하려고 이 문장을 쓴 건지 이해가 안 되는 문장조차 곳곳에 등장한다. 배경과 서사와 문체의 삼위일체는 아무나 시전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닫는다. 졸라님이 나의 눈높이를 너무 고급지게 올려놓으셨나.

영어를 모르는 무식자로서 함부로 꺼낼 말은 아니지만 원본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반대로 꺾인 팔꿈치처럼 억지스러움이 곳곳에서 느껴져서 줄기차게 독서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주춤주춤 가다서다 반복하니 내용의 흐름이 끊어졌다. 이야기는 흘러야하는데 말이다. 맥락이 뚝뚝 끊겼다.

하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되어 맨 뒤의 해설에라도 기대를 걸었건만 해설, 너 마저. 밤이 부드러운 이유를 찾는 독자 앞에 개츠비는 왜 이리 자주 얼쩡거리는가. 하도 많이 등장해서 빈도를 헤아려보았다. 위대한 개츠비밤은 부드러워라둘 다 13회씩 언급된다. 본 작품에 대한 해설이 충분히 이루어진 이후에 추가 해설 개념으로 두 작품의 비교가 이루어지면 좋았겠다. 개츠비를 빼고는 밤 자체로 홀로서기 해설은 불가능했을까.

 

최대한 순화된 문장으로 리뷰를 작성하려고 노력했음을 밝힌다. 아무리 거르려 해도 몇 년 묵은 변비덩어리처럼 도무지 걸러지지 않는 부분은 솔직히 언급했다. 별점 12사이에서 갈등한다. 취향 차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인내심을 시험하는 프리미엄 레벨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걸로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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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2-07-26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진짜 팍팍 스킵하면서 읽었는데도 속터졌는데, 나비종님은 정말 꾸역꾸역 다 읽으셨나봅니다... ㅎㅎㅎ 대단하십니다. 경이로움을 체험하셨군요. 뭐라도 건진 거라 봐야 할까요 ㅋㅋㅋ

그래, 딱 삼각관계가 시작된다는 구상은 좋았어요. 음음 이건 로맨스 장르겠다 싶었는데, 점점 산으로 가다가 아에 증발해서 비가 되어 내리는... 대체 무슨 이야기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있어보이는 여러 인물들이 정말 스치듯 지나가곤 하는데, 난 왜 무슨 기대를 하며 그 인물들에 집중했던가 싶고...

내용과 제목의 연관성은 못찾겠어요. 감도 안 오고요. 부드러운 인물도 없고 부드러울만한 상황 같은게 없는데 말이에요. 아니면 그저 있어보이는 중2병들의 제목짓기 같은 건 아닐지........
그래요. 스토리가 약하면 글맛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죠. 그리고 그놈의 번역!! 정말 심각하더라고요! 이걸 편집부에서 아무도 태클걸지 않고 통과시키다니. 일을 하는건지 마는건지... 여튼 고생하셨습니다... ㅎㅎ

나비종님. 제가 한동안 개인적인 문제로 독서활동은 접어야 할 것 같아요. 완전히 독서를 끊는 건 아니겠지만 꽤 긴시간을 떠나있게 될 듯합니다. 그래서 나물모임도 이제 어려울 것 같아요^^; 꽤 오래 같이 해왔는데 참 많이 아쉽네요. 지금까지는 우리의 시즌1이었다 생각하려해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시즌2를 하게 될 날이 오면 좋겠어요. 너무 일방적인 통보가 되었네요. 건강히 잘 지내시고 독서도 꾸준히 하시는 나비종님 되시길 바랄게요! 그동안 저랑 함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나비종 2022-07-29 20:24   좋아요 1 | URL
스킵이 안되더라구요.ㅡㅡ; 헤밍웨이님의 안목을 믿고 혹시나 혹시나 했죠. 체할 것 같은 기분으로 다 읽기는 했으나 남는 게 없어서 허탈했습니다.

구상 자체는 좋았아요. 로맨스가 아닌 스릴러라도 일관성이 있었으면 그럭저럭 반전매력을 느끼며 읽을만 했을 텐데 말이죠. 인물 낭비가 너무 심했어요. 소설은 엑스트라조차 의미를 가지고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비중이 없다면 하다못해 배경효과로라도 작용해야 하건만 이도저도 아닌 인물들이 많아서 이건 뭐지 싶었습니다.

맞아요. 허세성이 짙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부드러운 밤과의 연결고리를 못찾겠더군요. 번역이 거슬렸던게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개인적인 문제가 부디 안좋은 일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친정어머니께서 담낭절제술을 받으시는 바람에 화요일부터 오늘까지 상주 간병을 하느라 답변이 늦었습니다. 물감님의 글에 대한 댓글은 핸드폰으로 간단하게 작성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 다소 늦은 시각 며칠만에 얻은 자유로운 시각에 커피숍에 와서 노트북을 두드립니다. 이 댓글을 바로 읽으실지 아니면 기약없는 어느 미래에 읽으실지 알 수 없는 거로군요.
갑작스럽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즌1의 마지막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무런 설명없이 슬그머니 사라지는 만남들도 허다한 세상에 진심어린 마무리에 뭉클합니다. 시즌2가 예고되어 있다면 그 언젠가를 기다리면 되죠, 뭐. 꾸준히 읽고 쓰다 보면 다시 글로 이어질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건강하세요~^^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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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법은 명쾌하면서도 단순하다. 01로만 숫자 표현이 가능하다. 짤막한 아라비아 숫자라도 엿가락처럼 쭉 늘어난다. 걱정 없다. 컴퓨터에게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 이진법을 사용하는 로봇. 기계에게는 망설임이 없다. 잘못된 결론일지라도 오류 앞에서 당당하다. 참 또는 거짓을 바로 외친다. 로봇의 삶은 ONOFF로 이루어진다. 삶이 1이라면 죽음은 0. 중간이 없다.

반면 인간은 복잡하다. 애매모호하다. 결론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망설임을 거친다. 어정쩡한 세모가 삶의 전 과정에 장맛비처럼 쏟아진다. 인간의 삶은 01사이를 무수히 오가는 순간들의 집합이다.

만일 당신에게 삶과 죽음의 명쾌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불로장생 GO? 이제 그만 STOP? 워워,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동양화는 잠시 접어두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란 말이다. 당연히 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과연 그럴까? 진지하게 다시 물으니까 불로장생을 외치려다 불초소생 모드가 된다고? 여기 판단을 돕기 위한 소설이 있다.

작별인사는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미래를 그린 이야기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이며,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니까. 이 책의 주제는 한마디로 선택이니 얼떨결에 햄릿이 된 당신의 선택지는 윤곽을 드러내리라.

 

선택을 중심으로 소설을 바라본다면 주인공은 철이, 선이, 민이 등 세 명이다. 이들은 각각 인간형 로봇, 인간, 로봇을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이야기는 휴머노이드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주연급 조연인 최 박사의 연구 주제로 언급되는 <인공지능의 윤리적 선택>은 작품의 주제를 관통한다. 인간에 가깝게 구현된 로봇은 인간 삶의 궤도를 선택할 것인가, 로봇의 삶을 따를 것인가. 인간의 삶과 로봇의 삶으로부터 각 존재의 죽음을 목도한 휴머노이드는 결국 그가 생각하는 최선의 끝을 선택한다.

모바일 캡슐, 생분해되는 그릇, 휴머노이드,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 인간다운 휴머노이드, 재생 휴머노이드, 휴머노이드 재활용 업체, 폐휴머노이드, 폐로봇, 플라잉캡슐, 사용감이 없는 아이, 유전자 배양육, 아파트형 농장, 무선통신모듈, 디지털 구름, 기계지능. 상상만 해도 빠른 속도감을 안겨주는 미래의 용어들이 보물 상자의 금화인 듯 쏟아져 나왔다. 아직은 현실감 없는 이야기이면서도 언젠가는 이런 풍경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묘했다.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에 처음부터 빠져들었다. 이런 모습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모습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01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며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을 보냈다.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한 공유님의 심장처럼 내 마음은 책 한 권을 통과하는 동안 우주에서 인간까지 진자운동을 하였다. 작가는 순간순간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을 두고 갔다.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아보라고, 가장 적절한 마침표를 선택해보라고.

 

제목을 볼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랑이야기인가. 겉표지만 보고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며 멍하니 바다를 응시하는 내용이라 지레짐작했다. 왜 책 제목을 보고 연인과의 관계를 떠올렸을까. <뇌의 착각>을 제목으로 하는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의 짧은 영상이 생각난다. 뇌는 주변의 상황을 조합한 다음, 이미 있는 데이터와의 싱크로율을 비교분석하여 짧은 시간에 상황을 판단한다는 거다. 이런 이유로 종종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나.

착각이 깨지는 것이 성장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유튜브 영상에서 어느 뇌 과학자는 말한다. 인간의 뇌는 실패를 하면서 점점 그것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좌절만 하지 않으면 실패가 데이터화되어 보다 나은 결과가 도출된다고 한다. 더 많이 느끼고 타인과 교감할수록 훨씬 풍부해진다는 작가의 문장처럼. 감정의 데이터도 뇌에 축적되면서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담겨있을 거다. 기쁨, 슬픔, 노여움, 아픔, 행복 같은 감정의 영역에서부터 논리, 비교, 분석 같은 이성적인 영역,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정보들이 보편적이고 특별한 장소에 새겨져있으리라. 다만 전원 버튼을 누르지 않아 눌리지 않은 스위치처럼 비활성상태로 잠들어있을 지도 모른다.

 

책은 질문이 담긴 스위치이다. 작별인사는 삶과 죽음과 우주와 인간과 미래의 스위치를 누른다. 인간답다는 건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생명체에서 하나만이 존재한대도 인간이라 칭할 수 있는가. 기계와 인간이 결합된다면 어디까지를 인간이라 말할 수 있는가. AI 발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감정도 01의 코드로 입력이 가능한가.

인간과 기계의 가장 큰 차이는 감정을 포함하는 마음의 영역이리라. 작가는 묻는다. 마음은 기억일까, 어떤 데이터 뭉치일까,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감정의 집합일까 하고.

내 생각에 마음은 감정의 감각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피부감각 등 몸은 다섯 가지 감각의 형태로 외부 자극을 수용한다. 몸과 마음은 연결이 되어있다고 본다.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뇌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감정의 문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거라고. 다양한 몸의 감각은 반드시 감정의 영역을 통과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감정의 스위치가 켜져 마음으로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간단한 감정이라도 뇌와 몸의 모든 부분이 함께 작용하여 느껴야 한다는 문장이 인상 깊다. 뺨을 간질이는 햇살처럼 결이 섬세하다. 문장 하나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챕터의 연결이 자연스러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흡인력 있는 전개로 가독성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각각의 챕터에서도 완성된 퍼즐만큼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메바와 세균 등 단세포 생물의 번식력은 엄청나다. 세상을 뒤덮어버릴 듯 증가한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미세한 변수에도 전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생태계의 주도권은 다양한 변수로 재현 가능한 존재가 쥐는 듯하다.

인공지능에서 단세포 생물을 떠올린다. 01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양성을 지닌 한 약해보이더라도 희망은 있다. 만일 로봇이 인간만큼의 다양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난다면? 환경에 따라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하는 히드라와 같은 성향을 보이게 된다면? 여기까지. 나머지 상상은 당신의 몫이다.

MBTI 붐이다. 무료간이검사를 해보니 ISFJ 였다 최근엔 INFJ 로 나온다. 언젠가는 E가 나온 적도 있다. 불과 몇 년 새에도 조금씩 뒤집히는 게 인간의 성격이다. 16가지 유형이지만 두 가지로 나뉜 성향의 %까지 고려하면 무수히 많은 채도의 스펙트럼으로 표현되리라.

소설 속 박사가 AI 고양이를 만들면서 성격을 설정하는 데 고민하는 장면에 놀란다. 로봇의 성격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발상이다. 표준화된 AI의 성격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설정 권한이 주어진 이에게 달려있으리라. 인종이나 민족을 구분해온 인류의 역사를 돌아본다. 미래에는 AI의 성격 결정권을 쟁탈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책 속에 등장하는 천자문 속 문장들은 우주의 속성을 자연스레 끌어온다. 가끔 우주를 상상하면 몸이 붕 뜨는 것 같다. 검고 검은 고요의 세계. 소리조차 전달되지 않는 광막한 공간. 독자의 시야는 순식간에 우주로 확장되다 그 안의 인간 존재로 시선이 머문다.

우주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천체들의 힘을 상상한다. 색에도 넓이가 있다면 가장 넓은 색은 검은색이 아닐까. 블랙홀인양 모든 존재들을 흡수하니까. 이미 우주 자체가 거대한 블랙홀인지도 모른다.

밤의 하늘이 본질에 가깝다는 옛 중국인들의 생각에 공감한다. 낮에는 태양의 강렬한 빛 때문에 우주의 본모습이 가려진 거라는 문장을 읽으며 태양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안대를 상상한다. 습관적으로 하늘 천, 따 지를 외칠 때만해도 천지현황의 의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건만.

우주의 대부분은 그냥 텅 비어있다. 원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프랙털의 중첩인걸까. 우주 안에서 별들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크고 작은 천체들이 얼핏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들과 흡사해 보인다. 전자구름으로 모호하게 표현하더라도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비슷한 느낌이다.

무해하고 장엄한 카오스라는 작가의 문장이 마음에 들어온다. 열역학 제2법칙이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 헝클어진 채 아무 일도 없던 듯 수많은 삶과 죽음을 품는다. 질서를 세워도 무너뜨리는 거대한 힘이 담긴 대상이다. 지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을 언급하는 작가를 따라가며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시간을 생각한다.

 

전체 블록을 설정하고 Ctrl+C 키를 누를 때마다 숨을 멈춘다. 손가락 하나 잘못 놀리다가는 1초 만에 망하기 때문이다. 삭제가 간단해지는 세상이다. 지우개가 왕복하는 시간만큼 느리게 삭제되던 시절을 건너 Backspace 키나 Del키 하나로 순식간에 삭제되는 시대에 서있다. 글을 쓰는 동안 나만 아는 이야기는 우주에서 태어나고 죽는 존재들처럼 탄생과 소멸을 반복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간단하게 보내버릴 수 있는 미래, 선택받은 소수가 원자핵인양 세상을 조종하고 나머지 존재들이 전자처럼 떠도는 세상이 펼쳐질까.

삶은 평생 나를 바라보는 여정이다. 매순간 나를 바라보기 위해 초점을 맞추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지금 이순간도 나의 마음은 다양한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며 01사이를 오간다. 운전석 앞 유리에 그려진다는 내비게이션처럼 마음이 색깔 있는 홀로그램으로 펼쳐진다면 어떨까.

영원하지 않은 것을 보고 덧없음을 느끼던 때도 있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면 삶이 행복했을까. 육체를 옷처럼 바꿔 입고 데이터로 지속되는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영원한 삶과 영원하지 않은 삶 중 어느 쪽이 더 의미가 있을까.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조화보다 며칠 만에 져버리는 생화가 지금의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계는 절실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예정되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나의 감정이 유일한 의미로 절실해지리라. 절실한 순간을 촘촘하게 건너온 마침표는 또 다른 시작의 스위치로 작용할 테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작별인사의 의미를 여기서 찾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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