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와 얼굴
이슬아 지음 / 위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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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사 와야 하나?"

"나 오늘 안 나갔는뎅."

"엄마, 2단계는 생략된 말이라구. 구글도 이렇게 까다롭지 않아. 아빠한테 콕 집어서 딸기를 사오라고 해야지."

옆에서 듣고 있던 딸의 핀잔이다.

"새삼스럽지도 않아."

진짜 새삼스럽지 않은 말투에 웃음기가 묻어있다. 

오늘 집 밖으로 안 나갔으니까 딸기를 사 왔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사오라는 얘기지. 속으로 구시렁거린다.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문장으로 옮겨 놓는다. 꺼내어지지 않은 말, 생략된 말, 투명하던 말들이 이제야 보인다. 뭉텅 잘린 문장에 살을 붙이며 의도를 유추했을 당신, 종종 답답했겠구나.


말 뿐만 아니라 얼굴도 그렇다. 사회에서 꺼내어지지 않은 얼굴, 세상에서 생략된 얼굴, 삶에서 투명하던 얼굴들이 있다.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은 이런 얼굴들을 스케치한 칼럼집이다. 2021년 1월부터 2023년 1월까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들과 새로 쓴 글 몇 편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지구 온난화로 변해가는 날씨에 우리 모두는 운명공동체임을 강조한다. '모두'의 범주에서 누락된 대상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그녀가 지칭하는 '모두'는 인간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보다 범위를 넓혀 비인간 동물을 아우른다.

인간은 잦은 착각 속에 산다. 지구 위에 인간만이 존재하는 듯 비뚤어진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친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세상이라는 오만함 속에서 삶의 패턴을 그린다.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세상이라는 이기심과 더불어 말이다.


1부, '동물에 대해 잊어버린 것'은 동물의 삶과 죽음 등 2단계가 생략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동물이 고기의 형태로 식탁 위나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이기 이전의 삶을 조명한다. 처음부터 고기로 존재하는 동물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동물은 인간과 동등한 생명의 무게를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언제부터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의 결과물만 바라보게 되었을까. 뭉텅뭉텅 잘려서 깔끔하게 포장되기 이전에 살아있었을 모습을 한 번이라도 떠올려본 적이 있던가. 인간과 대등하게 살아 숨 쉬는 생명체였음을, 인간과 똑같이 생명을 다하면 죽음을 맞이하는 생물이었음을 너무나 당연한 듯 잊고 지내왔다.

생명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먹이 사슬은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이치이리라. 다른 생명에 나의 삶을 빚지는 건 필연적인 과정일 테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공장식 밀집 사육이나 동물이 강제 당하는 삶은 인간이 저지르는 명백한 착취의 결과이다.


작가가 비거니즘을 표방한 이유는 동물에 대한 착취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의 실천이다. '고기'라는 언어로 불리기 이전의 생명체로서의 삶을 존중한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저자는 언어가 은폐하는 폭력의 실체를 까발린다. 물에 사는 동물이지만 죽기 전까지는 '고기'로 불리다 죽으면 '생선'으로 변모하는 존재를, '고기' 덩어리로 포장되어 구체적인 고통이 씻겨 나간 생명체를 담담하게 묘사한다.

처음에는 오타인 줄 알았다. 15쪽에서 소 한 '명'이라는 말을 보며 이런 실수를 하네 싶었다. <목숨을 세는 방식>에 대한 칼럼을 읽고 서야 '마리'를 생명으로 여기는 의도된 명명이었음을 깨닫는다.

세상 대부분의 일을 '어차피'와 '최소한'의 싸움으로 보는 이슬아 작가의 시선에 나를 돌아본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와 '그래도 최소한 이것만을 하지 않겠다'는 문장을 번갈아 읽는다. 삶의 많은 장면에서 핑계처럼 기대왔던 '어차피'를 반성하며 '최소한'을 향해 마음을 뻗어본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 2부, ' 나 아닌 얼굴들'은 나만 예쁜 줄 아는 인간이 쳐다보지 않는 얼굴들을 보여준다. 쿠팡 노동자, 이주여성, 시각 장애인, 농업인, 청소 노동자, 저소득 가구, 장애인, 보호 대상 아동, 아픔을 다스리는 이들, 성소수자, 빈곤층, 여성 등 타인의 얼굴을 차례로 비춘다.

더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오지 않는다며 '내 더위의 무게와 그들 더위의 무게가 다르다'는 문장 앞에 한참 머문다. 묵직하게 내리 누르던 어린 시절의 더위를 떠올린다.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틀고, 한겨울에 집에서 반팔을 입던 작년의 행동이 겹친다. 날씨에 무관하게 살 수 있음에 매 순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얼마나 지났다고 잊어버렸나.

<깊게 듣는 사람>에 대한 칼럼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아주 깊게 들을 수만 있다면, 아주 깊게 말할 수만 있다면.' 정혜윤의 『마술 라디오』에 나온다는 문장 앞에서 서성인다. '내가 직접 하지 않는 노동으로 내 삶이 굴러간다는 사실이 자주 새삼스럽다'는 이슬아 작가의 문장 앞에서도. 내 삶에 다시 한 번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다.


3부,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의 목록'을 읽으며 지금까지 언급되었던 내용들을 되새긴다. 저자는 각종 개발과 건설 사업으로 파괴되는 환경을 언급하며 하늘과 땅과 물에 난 길들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쓰레기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직 쓰레기가 아니었음을 말하는 그녀는 '너무 많은 옷이 너무 빨리 만들어지고 너무 조금 입은 뒤 너무 쉽게 버려지는 세상' 의 모습을 개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모두가 버리지만 모두가 치우지는 않는 세계에서 어떻게든 해보려는 사람들'이다.

이슬아 작가는 삶에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의 목록을 작성한다.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실천을 하고 있는지, 그 실천을 이어나갈 건지 다짐을 적는다. 더불어 한 사람의 삶의 앞뒤에 스며들어 생략된 인간과 비인간적인 존재를 잊지 않으려 한다. 그 모습을 문장으로 지켜보는 나에게도 작은 파문이 인다.


오만한 일부 인간은 생략된 존재를 망각한다. 생태계라는 거대한 집단을 인간 중심의 세상으로 바꾼다. 맑은 날, 저 혼자 햇살을 쬐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다른 이들을 그늘에 가둔다. 비 오는 날, 저 혼자 우산으로 시선을 가리며 수많은 동물들을 토르소로 만들어버린다.

조각 미술에서 '토르소'는 얼굴과 팔 다리가 생략된 작품이다. 이탈리아어 '몸통'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토르소는 몸통에만 시선을 집중시켜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하지만 생명체는 예술 작품이 아니다. 마음대로 생략할 수 없고 생략되어서도 안된다.

 '얼굴을 지닌 당신께 드립니다.' 책 날개를 펼치니 저자의 문장이 들어온다. 나는 얼굴을 지닌 존재인가. 나 아닌 대상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존재인가. 작가가 글을 통해 내미는 투명한 손이 보이는 듯하다. 무심코 생략해왔던 얼굴들이 느리게 재생된다. 


"(지난 주에 내가 새끼 손톱 만한 것까지 몽땅 뜯어서 초토화 시켰던 상추가) 쪼끔 올라왔어."

"엄마,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왜에? 알아들었지?" 미소 짓는 남편에 의기양양해지는 나, "봐봐!"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문장으로 옮겨 놓는다. 꺼내어지지 않은 말, 생략된 말, 투명하던 말들이 이제야 보인다. 뭉텅 잘린 문장에 살을 붙여 정확한 의도를 유추한 놀라운 당신, 나는 이제야 놀라는 중이다.

"아까 내가 상추 얘기할 때 주어를 생략했었어?" "어." "근데, 어떻게 알아들었어?" "올라올 게 그거 밖에 더 있어?"

나의 토르소 화법에서 생략된 얼굴을 보는 당신에게서 은은한 햇살의 온기가 느껴진다. 내가 보지 못했던, 보고도 지나쳐왔을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들을 향한 이슬아 작가의 온기와 당신의 온기가 겹치니 덩달아 나도 맑은 날 햇살 한 가닥이 되고 싶어진다.



※ p172, 10째 줄: 중이다 공장식 ~ → 마침표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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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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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무슨 색일까. 바다를 비추는 거울인 듯 파랑으로 나타나다 구름으로 뒤덮인 잿빛을 보여준다. 눈부신 빛의 노랑을 쏟아내다 후두둑 투명한 물방울을 흩뿌리는가 하면 반원형의 우아한 일곱빛깔 화살을 쏘아 보낸다. 날카롭고 하얀 얼음 꽃을 훌훌 날리다 불그스름한 난로로 물든다. RGB 색상 코드에서 하늘색으로 지칭하는 (173,216,230)이나 (135,206, 235)등 몇몇 단일 코드의 빛깔만은 아니다. 

RGB는 빨강(Red), 녹색(Green), 파랑(Blue)이다. 트루 컬러(True Color)의 경우, 세 가지 빛깔은 각각 256가지로 구현된다고 한다. 이들을 순서쌍으로 조합하면 256*256*256 이니, 16,777,216가지 색상이 가능하다. 천만 가지 이상의 다채로움을 한꺼번에 품는 대상이 존재할까. 그나마 근사치에 가까운 게 '하늘' 아닐까. 고유 명사로서의 정체성을 담은 '하늘의 색'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당신과 나의 것이 다르며 나의 하늘 역시 매순간 다르다.  

바다가 변화무쌍하다고 하던가. 물로 채워진 공간보다 하늘은 보다 신비롭다. 동양화의 여백처럼 지구의 공기나 구름 사이를 우주의 기운으로 채우기 때문이다. 우주와 지구의 공존이랄까. 3차원 입체 공간이 2차원으로 보이는 하늘에서 평면으로 펼쳐진다. 단순하지만 많은 대상을 표현할 수 있는 이진수, 0과 1을 떠올린다. 정반대의 의미를 품은 채 다양한 조합으로 어우러지는 숫자가 어쩐지 하늘의 정체성과 닮아 보인다.


책 표지에 그려진 하늘을 보다 창밖으로 펼쳐진 실제 하늘을 향한다. 파랑이 맑다. 제목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파랑이 천 개나 된다니! 어떤 이야기가 무려 천 개나 되는 파랑을 품고 있단 말인가. 파란 대문 한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마블링처럼 일렁이는 하늘을 바라본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문안의 세상을 상상한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뭘까. 시작과 중간과 끝이 가늠되지 않는 이 문장은 뭐란 말인가. 방금 읽었던 내용이 소설의 시작인가. 아니면 여기부터인가. 설명하기 어려운 얼떨떨함. 소설입구에서 느낀 첫 감정은 당황에 가까웠다.

출구에 도달해서야 작가의 빅픽처가 보인다. 서두와 말미에 각각 같은 장면이 등장하는 수미쌍관의 깔끔한 구성임을 이해한다. 잠시 '나'로 등장하는 화자는 휴머노이드다. 로봇의 관점에서 전체 이야기를 따스한 이불인 듯 폭 감싸며 결론을 맺는다. 본문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전개된다.

<천 개의 파랑>은 휴머노이드와 동물과 인간의 삶을 향해 화살표를 건네는 소설이다. 미래의 지구에서 각각의 개체는 어떤 삶의 형태로 살아가게 될까. 기계인 휴머노이드에게 '살아간다'는 말은 모순된 표현으로 보인다. 한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이질감 없이 로봇의 삶을 수용하게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휴머노이드 '콜리'는 폐기를 앞둔 기수 로봇이다. 미래의 사람들은 다칠 위험이 있는 사람 대신 로봇을 기수로 세우며 엄청난 속도감에 열광한다. 한데 콜리의 제작 과정에서 우연히 인지와 학습 관련 칩이 잘못 삽입된다. 이로 인해 콜리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작가는 콜리가 폐기되기까지의 과정에 인공호흡을 하듯 생생한 서사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엑스트라처럼 스쳐가는 각 분야의 로봇에도 시선이 간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서비스직 업무용 로봇, 거리 청소 로봇, 경비 로봇, 재난구조용 소프트 로봇, 은행원, 암 제거 수술법에 동원되는 나노봇 등. 미래 세상을 미리 체험하는 듯하다.

로봇의 미래는 어떨까. 윤기 좌르르 흐르는 번쩍거림은 영원하지 않다. 기계도 옷처럼 낡아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산소와 접촉하며 서서히 부스러진다. 지구에서 만들어지는 한, 이 행성에 산소가 있는 한, 획기적인 소재로 만들어지지 않는 한, 녹슴이나 삐걱거림은 필연이리라.

쓸모를 다하면 새 것으로 교체되는 로봇. 뛰어난 AI가 등장하지만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 독특한 소모품일 뿐이다. 로봇은 인간의 삶에 얼만큼 근접하여 연결될까. '사용'이라는 표현이 어색해지는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을 떠올린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구현 가능한 현실이 되지 않을까.


콜리를 태우는 말 '투데이'는 안락사가 확정된 경주마이다. 로봇인 기수를 태운 말에게는 과중한 속도감이 요구된다. 살아있는 말이 감당하기에는 혹사 수준의 빠르기다. 이기적인 인간 앞에서 다른 생명체는 허울뿐인 정체성을 지닌 존재가 되는가.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봇과 거의 동등하게 취급된다. 다리 연골이 모두 닳아 없어진 말들은 자연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일회용 컵처럼 교체된다.

투데이의 입장이라면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무얼까. 작가는 이를 자유로운 삶에 대한 억압으로 본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욱 큰 좌절을 느끼게 하는, 자기의 이유로 삶을 이끌지 못한다는 점이다. 투데이의 상황은 주인공 투탑 중 휠체어 생활을 해야 하는 '은혜'의 삶과 연결된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불합리, 사회적 시선, 가족 및 친구와의 관계가 은혜의 관점에서 담담하게 서술된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어설픈 도움이 자기 만족을 위한 배려로 포장되는 상황을 바라본다. 시간을 되감기 한다. 무심코 행동하고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을 듯하여 숙연해진다.

언니의 장애로 인해 많은 욕구를 제거하며 살아온 인물 '연재'는 또 다른 주인공이다. 그녀는 로봇을 다루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다. 연재는 부서진 로봇 콜리를 집으로 가져와 부활시킨다. 로봇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그녀이지만 인간 관계에는 서툴다. 같은 반 친구 '지수', 어색했던 엄마 '보경'과의 관계는 콜리를 매개로 자연스러워진다.


소방관인 남편을 갑자기 잃은 보경의 시간은 과거에서 멈춰있다. 두 딸에 대한 책임감으로 '슬픔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인물이다. 살아내야 하는 시간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데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한껏 품고 있는 내면의 시간은 '고여 있다.'

콜리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그녀의 시계는 조금씩 움직인다.  '그리움은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거야.' 답은 이미 그녀 안에 있다. 문을 여는 방법을 잊어버려 안에서 꺼내지 못했을 뿐. '들을 수 있는 귀와 끄덕일 수 있는 고개'. 콜리가 건네준 건 단지 그 뿐이다.

보경의 시간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던 콜리는 그녀의 말을 통해 투데이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행복만이 유일하게 과거를 이길 수 있어요.' 콜리-은혜-연재를 주축으로 한 투데이 구출 작전이 긴밀하게 계획된다.

우여곡절 끝에 투데이는 다시 경마장에 선다. 천천히 달리기는 책 속의 인물 뿐 아니라 책 밖의 독자에게도 필요한 연습이리라. 투데이의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주는 행복감이 고통을 덮는 마법으로 작용한다. 더 큰 자유를 선물하고 싶은 콜리는 복구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말에서 떨어지면서 무게를 줄여준다.


떨어지고 있다는 표현을 '하늘에서 멀어지고 있다'로 구현하다니! 하늘과 땅을 뒤집는 관점이 신선하다. 흡인력 있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문장이 품고 있는 무게감으로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느려진다. 작가는 소설 속 문장을 통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무엇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로봇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시간을 건넨다.

프로그램과 명령어로만 작업을 수행하는 로봇의 세상에는 0과 1이 가득하다. 단순함이 오히려 명확하다. 너 자신을 알라 하며 줄기차게 질문을 던졌다는 테스형처럼. 소설 속 로봇이 등장 인물에게 하는 질문은 독자를 향해있기도 하다. 휴머노이드의 질문을 따라가며 인간이란 존재를 근본적인 단계에서부터 응시한다. 인간다운 게 뭔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게 무언지 곰곰 생각한다.

로봇은 하나부터 열까지 디테일한 모든 요소를 0과 1로 입력하지 않으면 절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존재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 정의를 잘근잘근 음미한다. 호흡의 정의부터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 행복, 슬픔, 그리움, 과거 등 당연한 듯 받아들이던 말의 의미가 불현듯 낯설다.


하늘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그토록 다양한 빛깔로 변화무쌍한 파랑에서 작가가 심어 놓은 주제들이 군데군데 별처럼 빛난다. 어느 하루는 '시간'이, 다른 하루는 '장애'가, 다음날은 '그리움과 행복'이, '미래와 과거'가, '관계와 이해'가 두더지 게임처럼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리뷰를 쓸 때마다 종종 표현력의 한계를 마주한다. 느낌을 표현할 적절한 문장들을 찾지 못할 때면 답답하다. 느낌에 똑같은 정답은 없음을 안다. 당신과 내가 다르듯 같은 책을 읽은 우리의 심장은 다른 파장으로 울릴 터이다. 마음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 나만의 정답에 근접한 문장들을 건져 올리고 싶은 바람에 감기를 앓듯 방황한다. 

유성처럼 내게 떨어진 단어들로 작은 알고리즘을 만든다. 이들을 전부 연결하는 빅픽처를 만들고 싶지만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햄스터처럼 맴도는 생각들이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알고리즘의 루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일주일을 보낸다.

알고리즘이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명령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놓은 것이다. 출구를 찾는 과정에서 많은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 무슨 말을 할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작가가 세상에 건네는 주제는 명확한 실체로 독자 앞에 놓여있으리라. 변수는 각기 다른 자리에서 이를 바라보는 독자에게 있다.


휴머노이드, 동물, 인간. 책 속에 담긴 세 가지 대상을 보며 RGB 색상표를 떠올린다. 각각의 대상을 대표 색상으로 대응시키면, 휴머노이드는 블루, 동물은 그린, 인간은 레드 정도가 될까. 독립된 존재로 있으면 단지 3가지 색상인데. RGB가 한데 모여 서로를 덜어내면 얼마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펼쳐지는가! 또 이들이 하나로 합쳐지면 얼마나 올곧은 흰색이 되는가! RGB의 본질에서 연결 고리가 되는 알고리즘을 발견한다.

RGB의 유성 물감을 막 떨어뜨린 미래의 세상을 상상한다. 아직 섞이지 않은 물과 유성 물감이 눈앞에 놓인 입체 공간이다. 조화로운 무늬를 만들 수 있는 막대기는 내 손에 있다. 또 다른 마블링을 떠올리는 당신의 손에도 물론. 얼마만큼의 세기로, 어느 방향으로, 얼마의 시간 동안 저을까. 미래의 모습은 RGB의 알고리즘을 만드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0과 1의 명료함이 위로가 될 때가 많다. 안개 속인 듯 뿌연 시간과 마음을 선명하게 짚어주니까. 감정이 실리지 않는 로봇 콜리의 문장에서 열감을 느낀다.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을 천 개의 파랑으로 받아들이는 시선이 뭉클하다. 다시 읽는 뜨거운 문장에 마음이 달아오른다. 나는 몇 개 정도를 찾을 수 있을까.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가 되어 책갈피처럼 숨겨진 파랑을 세상에서 찾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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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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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같은 소설이 있다. 불꽃처럼 화려하게 춤추지 않고 묵묵히 흘러가는 물과 나란히 가는 서사가 담긴 작품 말이다. 작가는 그 안에 빙하를 띄워 놓는다. 뜨거운 듯 차가운 얼음은 양면성을 보여준다. 활활 타는 불을 접하는 경험 못지 않다. 냉철한 이성으로 삶의 단면을 예리하게 파고 든다.

가까이 간 이들만이 물속에 잠긴 거대한 몸체를 본다. 작가가 뜨거운 열정을 쏟아붓는 건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까지다. 지혜로운 작가는 굳이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의 역할은 단 하나, 독자를 빙하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것. 이후의 일은 독자의 몫이다.

물속을 들여다보고 잠수를 하는 것도, 빙그르르 돌아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길을 가는 것도 책장을 넘기는 이가 할 일이다. 누구도 뭐라고 하거나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상관없는 이에게 상응하는 책임은 없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여집합에 무덤덤하니까.

지금 감당하는 삶만으로 충분히 버겁지 않은가. 나도 어쩌면 당신도. 빙하의 나머지 부분을 왜 들여다보지 않느냐고 비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물에 비친 마음을 바라보는 자신이리라.

클레어 키건의 작품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은 물을 닮은 소설이다. 저자는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 받으며 노동력을 착취 당하던 여자들과 아이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핀 조명을 비춘다. 사건을 인지하고 따라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인 갈등을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물에 비친 마음의 일렁임을 냉철하게 묘사하며 독자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건넨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히는' 느낌을 인지하는 섬세함, '애를 써도 그것을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영혼의 투명한 갈등, 스스로도 흔들리고 위태로우면서 또 다른 존재를 포용하고자 결심하기까지 내면이 변화하는 과정이 촘촘하게 서술된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주인공 빌 펄롱에게 미시즈 윌슨은 모자를 포용해준 은인이다. 그녀 덕분에 빌은 어린 시절을 무난하게 보낸다. 그는 석탄 등 땔감을 취급하면서 배달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를 둘러싼 일상의 풍경은 자잘한 걱정거리의 허들을 넘어가는 평범한 모습이다. 다섯 명의 딸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아내와 고민하고 의논하거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가족들과 만들며 소소한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커가는 아이들을 흐믓하게 바라보는 부부는 서로의 덕이라며 상대에게 공을 넘긴다. 따스한 정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른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지만 그의 내면에는 거대한 공허가 자리한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는 나날'을 중년의 나이에 마주한다. 그는 삶의 의미를 향해 물음표를 붙인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달라질까, 마찬가지일까,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중년의 한 가운데 있는 나는 시간이 두렵다. 후다닥 빨리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느릿느릿 굼뜨지도 않는 그 시간이. 매순간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1초의 멈춤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을 느낀다.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그저 나아가는 묵묵함을 서늘하게 안는다.


주인공의 일상이 묘사되는 소설 초반에서는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가 떠오른다. 이야기 중간 중간에 눈에 띄는 삶의 철학이 깊어서이다. 이야기는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전개된다. 잠언이나 편안한 에세이 정도의 무게감으로 이 책을 대한다. 작은 여자 아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쉬지 않는 초침처럼 움직이던 펄롱의 눈앞에 멈칫하게 되는 장면이 놓인다. 처음에는 수녀원에서 강제 노역을 하리라 짐작되는 아이들을 발견한다. 그 이야기를 집에서 들은 아내의 반응은 일반적이다. 그런 일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첫 번째 균열이다.

그는 또 석탄 배달을 하러 갔다가 수녀원 건물의 석탄 광에 갇혀있는 맨발의 여자 아이를 발견한다. 작은 아이 한 명이 등장할 뿐인데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 보이던 그의 삶에 생긴 균열은 더욱 커다래진다. 아이의 존재감이 연약한 가시인 듯 심장에 박힌다.

그의 심장이 껄끄러워진다.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집으로 가버리고 싶다.' 까슬까슬한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시를 그냥 빼버리면 그만이다. 가시는 연약하므로. 내면에서 자기 보호 본능과 용기가 치열하게 싸운다.

최종 선택의 문 고리는 자신의 마음 안에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도,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것도 가시 만큼의 존재감이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치열한 싸움은 결국 용기의 승리로 돌아간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그렇다면, 해피 엔딩? 삶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겨우 지났을 뿐이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을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을 넘겼을 뿐이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주인공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삶은 늘 그렇듯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의가 지닌 힘을 믿는다.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걸 믿고 싶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말하는 작가가 존재하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는 독자가 있으며,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인해 박동이 빨라지는 당신과 나의 심장이 있기에 믿음의 이유는 충분하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일들은 발등을 철썩이는 파도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다. 어느 날 다가와서 발등을 툭 건드리곤 작은 포말로 부스러진다. 인간의 입장에서 물방울은 사소하게 보이지만 거대한 쓰나미의 시작도 결국 물방울 하나였을 터이다. 물방울을 이루는 수소나 산소 원자에 입장이라는 게 있다면 하나의 물방울은 온 우주가 되지 않는가. 이런 이유로 세상에 사소한 대상은 없다. 사소해 보이는 대상만 있을 뿐이다. 클레어 키건이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책의 제목을 의역하면 '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리라.   

사소해 보이는 차이는 우주 만큼의 의미를 품는다. 생각과 행동, 관심과 외면, 작가와 독자, 당신과 나의 차이 모두. 우주의 시간도 사소해 보이는 1초에서 시작되니까. 1초가 모며 1분이 되고, 1분은 1시간을 만들고, 그렇게 하루가 완성되며 촘촘히 쌓이는 하루는 계절을 지나 결국 우주의 시간으로 확장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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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무를 찾아서 - 숲속의 우드 와이드 웹
수잔 시마드 지음, 김다히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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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처럼 찍히는 장면이 있다. 보고 또 보아도 자꾸 잊어버리는 50대의 나를 순식간에 10대로 돌려놓은 사진, 80대 노모의 알몸이다. 투명하게 증발해 버린 왼쪽 유방, 두어 겹으로 출렁이는 뱃살, 탄력을 잃은 피부, 왜소한 다리가 심장에 새겨지는 문신인 양 선명하게 각인된다. 어머니의 왼쪽 팔목이 골절되는 바람에 목욕을 시켜드리면서 보게 된 몸이다.

11cm 자그마한 체구로 조각되었다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당신의 몸이 겹친다. 다산의 상징이라는 조각상 말이다. 밀로의 비너스처럼 육감적인 모습도 아닌데 왜 하필 '비너스'라 부르는지 의아하게 여기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라는 필터를 끼우니 그 이유가 한순간에 이해된다. 한때 날씬했을 몸이 그렇게 변해버린 이유를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포동포동한 몸에 미의 여신이 가당키나 하냐며 고대인의 안목을 의심했다. 가볍게 웃던 기억에 무게감이 더해진다. 더 이상 우습지 않아진다.

셀 수 없는 날들, 나를 씻겨주시던 몸을 난생처음 씻겨드리고 왔다. 그 몸이 지나온 시간을 가늠한다. 수많은 나날 아기에게 젖을 물리던 그 몸에, 불완전한 세포를 내내 뱃속에 품어 온전한 생명체로 만들었던 그 몸에, 휘몰아치는 삶의 파도를 감내하며 울타리가 되어주던 그 몸에, 품 안에서 떨어져 나온 지금까지 여전히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그 몸에 '비너스'처럼 적절한 명칭이 또 있을까.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는 식물계의 비너스가 걸어온 내밀한 삶의 여정을 탐구한 책이다. 동시에 어머니로서 살아가는 저자 수잔 시마드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거대한 숲을 논하는 대장정에 왜 개인의 삶이 끼어드는가. 간지처럼 끼워지는 저자의 일상이 처음에는 껄끄러웠다. 저자의 가계도를 둘러싼 배경지식까지 굳이 알 일인가. 연구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야 그렇다 쳐도 직계존속과 직계비속, 남편, 친구와의 소소한 관계까지 등장하니 마음이 뾰족해진다.

숲의 삶과 저자의 삶을 병치시킨 이유를 납득하게 된 건 책장 날개의 오른쪽 두께가 점점 줄어들면서이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과 지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나무들의 삶이 호수에 비친 그림자인 듯 닮아있음을 깨닫는다. 세상을 채우는 삶의 방식은 적자생존만이 아니었던 거다.

경쟁만이 난무하는 듯 보이는 세계에도 따스한 협력은 봄꽃으로 피어난다. 프랙탈인 양 서로 닮은 속성을 발견하며 생명으로서의 삶을 보다 깊이 이해한다. 인간과 나무의 삶을 동시에 바라보니 서로의 영역을 가르는 경계가 무너진다. 숲속 나무들 사이에 경계가 없는 것처럼. 이 나무의 영역, 저 나무의 영역이라 선을 긋는 건 숲의 정체성에 무지한 인간의 잣대일 뿐이다. 다른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니 불편하겠지, 이 나무는 영양분을 일방적으로 빼앗아 갈 거야. 제멋대로 판단하여 도끼를 휘두르고 제초제를 뿌리는 인간에게 나무는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나무의 언어를 해석한다는 건 지난한 기다림을 감내하는 일이다. 왜 이곳의 숲은 무성하고 저곳은 황량해지는가. 왜 그곳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찬란하다 순식간에 사그라드는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묵묵히 뻗어나가는 삶은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시간을 걸어갈 뿐이다.

비밀의 문을 열어보려는 삼림 과학자 수잔 시마드는 침묵의 언어에 도전장을 내민다. 한 사람의 뜨거운 열정은 종이 한 장 한 장에 선명하게 새겨진다. 학자로서의 순수한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자의 사랑이 보인다. 숲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도전들이 릴레이처럼 이어진다.

중간중간 세상의 편견이 가로 놓인 허들 경기에서 장애물은 생각보다 견고하고 높다. 조금이라도 편한 길을 찾아 흘러가는 전류의 속성과 닮아있다. 세상은 방해 요소로 보이는 나무를 당장 베어내거나 제초제를 뿌리면서 단기적인 이득을 취한다. 근시안적인 편견에 여성 과학자를 대하는 편견까지 더해지니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생명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그녀의 싸움이 시작된다.

영어로 제시되어 해석하지도 못할 참고 문헌의 기록을 보며 찡함을 느낀다. 34페이지에 달하는 책장을 천천히 넘겨본다. 연구에 담긴 열정의 땀방울을 가늠한다. 물방울이 모이고 모여 드넓은 바다가 만들어지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 많은 사람의 의지는 거대한 어머니 나무인 듯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낸다.

 

책 안에 촘촘히 기록된 저자의 글이 종이로 만들어지는 나이테 같다. 삶이 고스란히 찍히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말이다. 나무의 삶에는 지우개가 없다. 바람의 온기와 햇살이 머무른 시간이 화석처럼 남는다. 저자의 삶과 열정, 생명을 향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긴 책을 보니 거대한 숲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한 사람의 의지가 이렇게 숲을 이루었구나. 장 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 이 떠오른다. 흑백 애니메이션을 다시 찾아본다. 소설인지 다큐인지 경계가 애매하여 실제로 일어났음 직한, 정확히 말하면 일어났었기를 바라게 되는 작품이다. 볼 때마다 뭉클하고 묵직한 메시지를 안는다.

나무라는 존재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전해주는 이유는 무얼까. 끊임없는 나눔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나눔이 이루어지는 연결 통로, 저자의 놀라운 발견을 <네이처>에서는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이라 칭한다. 인터넷 네트워크처럼 나무들이 땅속 세계에서 거미줄처럼 얽힌 채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협력한다는 사실이다.

아카시아 나무들은 위험한 상황이 닥칠 경우, 그들만의 소통 방식으로 향기를 퍼뜨려 이웃 나무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고 들었다. 서로 다른 종의 나무들은 빛을 두고 경쟁하지만 동시에 탄소를 공유하면서 협력하는 삶을 이어간다. 가문비 나무에서 출발한 저자의 연구는 미송과 자작나무, 오리나무로 영역을 넓혀가다 숲 전체의 연결망으로 확장된다. 그 중심에는 진균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진균은 '진짜 균'이라는 의미로 곰팡이를 가리킨다. 이들은 광합성을 할 수 없으므로 기생 생활을 한다. 균근은 곰팡이의 균사와 식물 뿌리의 상호공생체를 지칭하는 용어다. 균근균은 효모, 버섯을 포함하는 균류의 10%를 차지한다고 한다. 균근균은 많은 식물종과 공생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식물의 95%는 대부분 균근성이라고 한다. 흙 속에 뻗어있는 뿌리만으로는 생존이 불완전하다는 의미이다. 촘촘한 균근으로 땅속의 물이 식물의 뿌리에 전달되면, 식물은 그 보답으로 진균에게 영양분의 일부를 건네준다. 완벽한 공생이다.

균근균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째, 외생균근으로 실처럼 생긴 균사가 식물 뿌리의 표피를 둘러싼다. 식물 세포 밖에서만 존재하고 뿌리의 안쪽까지는 침투하지 않는 균근이다. 둘째, 수지상균근은 나뭇가지 모양으로 뿌리 안쪽까지 뻗는다고 한다. 80% 이상의 육상 식물이 수지상균근균과 공생한다고 전해진다.

나무와 진균의 공생 관계에 나무들 사이의 공생이 더해진다. 홀로 자라는 뿌리는 잘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에너지와 자원을 공유하며 다른 나무나 진균과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도 저 혼자 자라지 못한다. 인간이 그러하듯이. 결국 인간 세계처럼 숲 역시 긴밀한 시스템으로 생명을 유지한다는 거다. 저자가 존경스러운 건 이 모든 사실을 사전 지식 없이 오롯이 실험으로 밝혀냈다는 점이다.

 

576쪽에 이르는 두께에 비해 실험 내용을 따라가기에는 예상보다 난해하지 않았다. 종종 전문적인 실험 과정이 등장하지만 나무보다는 숲 전체를 이해한다는 마음으로 접근한다. 다만 '묘목이 찾아낸 붙어서 자랄 토양은~' 처럼 일부 문맥이 어색하며 사소한 오타가 눈에 띈다. 문체에 익숙해지면 점차 나아지지만 매끄럽지 않은 노면을 걷는 듯 시선을 멈추곤 했던 과정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천천히 저자를 따라갔다. 속도를 내려야 낼 수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버섯 이름이 꾸역꾸역 등장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리도 버섯 천지였던가. 느타리, 양송이, 표고, 팽이 등 슈퍼마켓에 널린 버섯은 병아리 오줌이었던 거다. 애주름버섯, 비단그물버섯이 뭔지, 식용인지 독버섯인지 지식백과와 이미지를 찾으며 산책 걸음이 된다.

비글이 야외 변소에 빠져 구덩이 옆 땅을 판 이야기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토양의 구조를 떠올린다. 이론적으로만 알던 기반암-모질물-심토-표토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니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통나무에 깔리거나, 통나무 틈에 짓이겨지거나, 통나무를 부수려는 다이너마이트에 손이 날아가거나, 나무 절단용 회전 초커에 손가락을 잃거나, 통나무가 등에 떨어져 허리가 굽거나.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는 나무꾼들의 삶이 묘사된 장면에서는 야생의 땀 냄새가 훅 끼얹어지는 듯하다.

나무를 대상으로 한 실험 과정에서는 설계부터 실행 단계에 이르기까지 동료 과학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저자의 탐구 과정을 따라간다. 생물이니 변수가 많아 까다롭지만 그만큼 의미가 큰 작업이리라.

 

생물의 특성이 많이 알려지기 전, 생물은 흔히 동물과 식물의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동물과 식물의 삶은 흑과 백처럼 서로 다른 영역에 있는 듯 보인다.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는 나무가 아날로그라면 매일 세포가 탈락하고 재생되는 동물은 디지털 생명체에 가깝다. 동물인 나의 몸을 이루는 세포는 태어났을 때 지니고 있는 그것이 아니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삶과 인간의 삶에는 공통 분모가 있다.

외생균근의 진균 균사가 풍성하게 붙어 둘러싸인 뿌리 끝 사진을 본다. 땅속에 투명한 튜브를 넣어 뿌리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미니라이존트론이라는 기기로 촬영했다는 사진이다. 인간의 피부 아래에서 온몸에 걸쳐 존재한다는 거대 기관이 떠오른다. 유체로 채워져 있기에 피부를 절개하는 순간 허물어져서 결코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이질'이라는 기관이다. 진균 균사와 사이질 모두 생명을 보호하는 방패처럼 든든한 구조이다.

알츠하이머의 신경 연결망과 균사의 연결망을 비유하는 장면을 넘어서니 시야가 확장된다. 발로 딛고 있는 흙이 거대 생명체의 일부로 여겨진다. 지구라는 존재의 뇌 속에 식물 뿌리와 균사가 얼기설기 연결되어 있는 듯이.

생물 다양성을 접하면서 학교의 아이들을 떠올린다. 각각의 학급은 모범생과 사랑이 더 필요한 아이들이 분포하는 군집이다. 다양한 아이들이 섞여있는 공간이 숲을 닮아있다. 숲과 더불어 자라나는 나무들처럼 어쩌면 아이들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면서 성숙하는 게 아닐까.

 

거친 피부를 두른 채 성숙하는 나무를 보며 어머니를 품고 있는 비너스를 연상한다. 청순가련형이나 매끈한 몸과는 거리가 먼 투박한 몸통은 군데군데 벗겨지고 패이거나 갈라져 있다. 고스란히 새겨진 삶의 굴곡이 어머니의 그것과 닮아있다. 숲을 만드는 근원, 어머니 나무 위로 나의 어머니가 겹친다.

내 생명의 근원이 사그라드는 걸 지켜본다는 건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슬픔을 마주하는 일이다. 이 책에서 본 어머니 나무처럼 나의 어머니도 모든 걸 다 내어주고 언젠가는 자연으로 머무시리라. 그게 자연이야, 이게 자연스러운 거야,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심장을 다독인다.

모든 사물에는 언어가 있는지도 모른다. 소립자는 끊임없이 진동하며 소리는 진동이니까. 가청 주파수에 포함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리라. 나무의 언어를 상상하며 드넓은 지하 세계를 그린다. 포슬포슬한 흙 구슬을 얼기설기 꿰어 만든 이불을 덮고 숨 쉬는 공간. 그 안에서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생명들이 분주한 삶을 이어간다.

저자는 언급한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나무를 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책이 아니라 나무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책이라고. 말 없는 나무의 생을 알아가는 건 인간의 생을 이해한다는 의미일까.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난한 걸음을 지켜본다. 나무의 어머니가 걸어왔고 나의 어머니가 걸어왔으며 어머니로서 내가 나아갈 걸음에 마음이 머문다. 뭉클한 감동이 진균에서 뻗어 나오는 균사처럼 심장에 퍼진다. 묵직한 파문이 인다.


p85, 5째 줄: 소량의 물이 느리게 흘러 모인 모이는 움푹 파인 지대 ~ 흘러 모이는 움푹 ~

p104, 첫째 줄: 향 해 향해

p155, 마지막 줄: 태더볼 테더볼

p169, 2째 줄: 자릴 자랄

p174, 4째 줄: 바와 대로 바대로

p180, 12째 줄: 상충부 상층부

p308, 6째 줄: 유층 유충

p318, 마지막 줄: 플루오렌센스 플루오레센스

p320, 첫째 줄: 텔리마크 텔레마크

p328, 밑에서 7째 줄: 식사으로 식사로

p377, 밑에서 10째 줄: 블루베리 블랙베리

p385, 밑에서 3째 줄: 라틴 어 라틴어

p465, 밑에서 11째 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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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이웃 - 허지웅 산문집
허지웅 지음 / 김영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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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말할까.  '저, 버튼을 누르셔야죠.' 이미 골든 타임을 지나친 듯하여 그냥 입을 다문다. 20층 아파트인데 엘리베이터는 10층에서 11층을 넘어가는 중이다. 어색한 침묵 속을 방황하는 나의 눈은 문 왼쪽에 있는 광고 전광판에 고정된다. 졸지에 지하 주차장 층별 청소 일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인간으로 등극한다.

혼자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올라타시던 아주머니가 어색한 침묵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내리는 층의 버튼을 누르지 않으신 그분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마자 응당 이루어져야 할 액션이 없음을 인지한 나, '버튼 안 누르셨어요.' 말할까 잠시 망설인다. '에이,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자. 알아서 누르시겠지.'

끝내 19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어떠한 액션도 없다. 당신의 짐작이 맞다.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은 같이 내린다. 순간 움찔! 인사도 뭣도 아닌 어색한 각도의 고개 숙임 후에 미련 없이 돌아서서 좌우로 갈라진다. 마스크로 만난 이웃의 얼굴을 나는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여기로 이사 온 게 2020년 2월이다. 앞집 사람들과 나 사이에 삶의 교집합은 없다. 불과 3m도 안되는 거리에서 살아가건만.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다고 무조건 이웃이라 부를 수 없음을 피부로 느낀다. 같은 집에 산다고 무조건 가족이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허지웅 산문집 『최소한의 이웃』은 이웃으로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에세이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팬데믹으로 인해 더욱 커진 분노와 불신을 거두고 최소한의 이웃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책을 펴냈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가 정의하는 이웃은 단순히 옆집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나와 너, 혹은 가족을 제외한 불특정 다수를 이웃의 범주에 넣는다. 현실에서, 문학 작품에서, 영화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이웃의 모습을 그린다. 우리는 짧은 일화를 통해 이웃의 모습을 보고, 이웃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이 깔끔하다. 최소한의 단단한 뼈대 만을 보는 듯하다. <최소한의 이웃>이라는 제목만큼 내용도 멋지다. 맑고 올곧은 직선으로 만들어진 문장이 심장에 꽂힌다. <작가의 말>이 적힌 두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허지웅 작가의 힘이다.

그는 무얼 알고 무얼 알지 못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우리말은 특히 조사에 따라 어감이 달라지는데, 그의 표현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서술어의 표현 방식이다. '모른다'가 아니라 '알지 못한다'라고 표현한 점이다. 진중한 발자국이 다가오는 듯하여 신뢰감과 겸허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내용은 크게 6부로 나뉜다. 각 부에서는 최소한의 이웃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을 소개한다. 덕목과 함께 나름대로 정의한 용어의 의미에 공감이 간다. 1부 '애정'은 '두 사람의 삶만큼 넓어지는 일', 2부 '상식'은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3부 '공존'은 '이웃의 자격', 4부 '반추'는 '가야 할 길이 아니라 지나온 길에 지혜가', 5부 '성찰'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는 고단함', 6부 '사유'는 '주저앉았을 때는 생각을 합니다'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에피소드는 서론-본론-결론이 깔끔하게 드러나는 구성을 지닌다. 여기에 감성이 더해지니 독자의 심장이 반응을 한다. 감성적인 논설문을 보는 듯하다.

도입부의 제목과 의미가 멋져서 내용을 읽기 전에 살짝 긴장을 한다. 막상 들어가 보면 겉도는 내용에 실망스러운 책을 종종 접한 기억 때문이다. 제목은 번지르르한데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허술하거나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경우 말이다. 1부를 읽고 나니 괜한 염려를 했음을 깨닫는다.

제목에 부응하는 내용이 알차게 들어 있다는 점을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로 꼽고 싶다. 구구절절 만연체로 지루하지도 않고, 너무 짧아 허탈감을 주지도 않는다. 한 호흡으로 읽기에 적절한 분량이다. 소제목이 없어도 누구나 제목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주제가 뚜렷하다.


이웃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에 공감한다.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줄 전능한 힘 같은 건 없지만, 적어도 비참하게 만들지 않을 힘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우리가 서로에게 최소한의 이웃일 때 서로 돕고 함께 기다리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우리 모두는 결국 서로를 지키는 최후의 파수꾼'이라는 것.

갈수록 사람을 대하는 게 조심스럽다. 예전의 나는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인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웃음 지으며 온화한 분위기는 다 뿜어내면서 속으로는 음흉하게 상대를 깐 적도 많았음을 고백한다. 종종 오만했던 나를 돌아보던 중이다. 이런 시기에 읽은 책이라 더욱 울림이 큰 걸까. 문장 곳곳에서 느껴지는 신중함과 타인을 바라보는 세심한 시선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자살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마음이 찡해진다. '그들이 생명을 내어주는 건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그게 가장 무겁고 소중하기 때문이라는 것'.

'아무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음에도 누군가 하고 있는 것들이 기둥이 되어 떠받치고 있기에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나눌 줄 모르는 둘보다 나눌 줄 아는 하나가 훨씬 행복하다는 것',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구제될 사람의 자격을 가리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라는 것', '이웃은 오직 행동으로 결정된다는 것'.


며칠 전에는 행동이 소리 없는 말임을 깨닫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웃에 대한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인지 저절로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동료에게 시선이 갔다. 세심하게 관찰하니 이기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지난 화요일, 퇴근 후에 사무실 바닥 왁싱 작업을 한다고 의자를 복도로 내놓고 가 달라는 전달이 왔다. 최소한의 도리는 나의 의자를 내놓고 가는 것이다. 한데 깜빡 잊고 그냥 퇴근해버린 동료들이 있는 거다. 1초를 망설이던 나와 달리 동료 세 명이 망설이지 않고 남은 의자들을 내놓는다. 평소 다른 분들을 자주 돕던 이들이다. 역시 하며 얼떨결에 같이 돕는다.

다음 날, 다시 복도에 있던 의자를 들여놓으면서 바람직한 이웃을 새롭게 발견한다. 업무 분장이 바뀌면서 우리 사무실로 몇 분이 자리를 옮겨오셨는데 그 중 한 명이다. 업무로 오가던 몇 마디 말고는 자세히 알지 못하던 분이다. 한데 나의 의자를 들여놓고 앉으려는 엉덩이를 이 분이 들썩이게 하신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다른 동료의 의자를 계속 안으로 나르시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게 하던 행동은 어떤 말보다도 강력하게 그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친하게 지내고 싶은 유형의 동료를 빨리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인지라 책을 읽는 동안 삶을 돌아보는 시간도 덩달아 가졌다.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고  많은 문장을 메모했다.

'내가 쓰는 건 글이지만 결국 상대하는 건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정해지지 않고 그것을 수습할 방법을 결정하는 순간에 정해진다는 것', '변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변하지 못하는 것들에는 그보다 더 큰 사연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마치 자기가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배리 스위처)', '정답보다 오답에서 찾을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것', '내게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보이는 것이 늘 진실을 드러내는 건 아니라는 것', '중요한 건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

오랜만에 제대로 매듭지은 결말을 본다. 소설도 아닌 에세이에 구조적인 이야기 전개가 있을 리 없지만, 저자는 '최소한의 이웃'을 주제로 펼친 이야기에 어울리는 결론을 내린다. 깔끔한 음식을 먹은 기분이다.

이제 남은 건 나의 행동이다.  나는 이웃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책 속의 이야기는 독자의 행동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므로 저자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p54, 5째 줄: 개재 → 게재

p253, 첫째 줄: 기억하시나요 → ~.(마침표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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